<환경과 생명> 제27호(제8권2호) [2001년 봄]
pp. 50~65
생태적 삶, 에코페미니즘, 새로운 문명
하정남 / 영산원불교대 원불교학부 교수
1. 생태 위기의 근원적 치유책
경제적․정치적 욕심으로 인한 자연의 과도한 개발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면서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지역 경제를 증진시킨다는 명목 아래 자행되는 생태계 파괴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실례로 전남 영광 원자력 발전소의 경우를 보자. 처음 1․2호기가 들어올 때 군민들은 핵에 대한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한국전력공사가 선전하는 대로 핵발전을 미래의 공해 없는 대체 에너지로 생각하였다. 또한 군민들이나 군의 위정자들은 핵발전소가 이 지역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지금은 핵발전소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이 다소간 높아졌으나 지방자치단체장과 지자체에 대부분의 권한이 위임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영광에서만 5․6호기까지 건설되었고, 그 결과 이제는 핵폐기물 시설을 둘러싼 갈등이 진행 중이다. 핵발전소가 건립된 이후 영광의 명물인 굴비 생산은 빈약해졌고, 굴비의 주요 원료인 조기는 타 지역의 것에 의존하면서 해묵은 소금으로 간을 하는 등 전통적인 손맛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핵발전소로 인해 조상 대대로 자연에 의존하며 살아온 어민과 농민들의 생산성은 저하되었고, 방사능 유출의 위험 속에서 주민들의 건강과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산업화의 최대 전성기였던 지난 세기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황금 시대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 기반인 자연의 파괴와 공동체의 상실 등으로 우리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고, 물질에 대한 인간의 지나친 집착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사람들은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경제 논리를 앞세운 난개발과 인간 삶의 환경 파괴는 갈수록 그 도를 더해 간다.
강원도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이미 폐광된 탄광촌이 많은 곳이다. 폐광촌이 되면서 강원도 일부 지역의 경제적인 여건이 열악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떠나 빈 마을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카지노 시설을 만들어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러나 카지노가 무엇인가? 요행을 바라고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투기심을 부추기는 곳이다. 일확천금의 꿈을 위하여 전국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모여들고 있고 그 결과 지역 경제는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경제의 이면에 카지노가 많은 사회 문제를 야기하는 온상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을 타락시키고 사회를 부패시키는 일을 지자제가 환영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생존의 기반인 생태계를 위협하는 오늘날의 사회문화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통찰력보다 개발이라는 파괴적 도그마를 맹목적으로 믿는다는 데 그 문제가 있다.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이러한 생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엽적인 자연 환경 보호라는 차원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치유책을 모색하기 위한, 전 시대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삶의 양식에 대한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계 혹은 생태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포함한 사회문화와 함께 문제를 바라보면서 그 치유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산업화의 환상에 감추어진 서구 가부장제
산업화가 추구하는 최대 가치는 개발과 성장주의에 있다. 산업 사회는 개발을 통한 경제적 가치와 부의 창출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산업화에 대한 이러한 환상의 바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자연과 몸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서구적인 개발주의가 제3세계와 여성에 미치는 영향 등이 그것이다.
우선 자연과 몸을 바라보는 방식을 보자. 개발과 발전의 논리에서 자연은 자원이다. 현대 과학은 그러한 논리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한다. 자연이란 그냥 자연의 상태로는 비생산적이며, 과학기술을 활용하고 동원해 생산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할 천연 자원을 말한다. 여기에서 자연은 영성이 없는, 그리고 보다 나은 가치를 발휘하기 위하여 인공 즉 과학기술의 참여를 기다리는 단순한 물질일 뿐이다. 이렇게 자연 상태는 개발이 안된 원시적인 것 혹은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산업화 사회의 또 다른 문제는 자연을 단순한 물질로 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도 단순한 기계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육체의 병도 기계가 고장난 것으로 봄으로써 치료의 개념 또한 고치는 것으로 된다. 현대 의학은 이런 식으로 발전해 왔다. 현대 의학을 바탕으로 한 의료 행위는 환자의 참여가 배제된 의사의 관찰과 치료 방식에 의존한다. 여기서 환자의 몸은 의사의 치료 행위를 기다리는 단순한 물질일 뿐이다.
자연과 인간을 갈등 관계로 바라보며 자연과 자연 상태를 정복하고 개발․가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구체화하는 데 현대 과학이 함께 하였다. 또한 인간의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바라보며 몸을 단순한 기계의 원리로 바라보면서 몸의 병을 기계가 고장난 것으로 바라보는 관념에서 소위 현대 의학은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 과학과 현대 의학은 서구 과학과 서구 의학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개발 프로젝트를 앞세운 산업화 또한 서구적 가부장제와 그 패권주의를 정당화하는 전략이었다. 서구식 개발주의가 제3세계와 여성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중의 하나는 인도의 이론물리학자이면서 칩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반다나 쉬바이다. 반다나 쉬바는 현대의 개발론이 서구 가부장제의 새로운 프로젝트라고 주장한다.1)
“개발(development)은 후기 식민지 프로젝트였다. 식민주의가 가시적인 정복과 착취를 위한 것이었다면, 개발은 강제적 정복과 착취 없이 온 세계가 현대 서구식의 발전 모델을 받아들이도록 선택하는 새로운 식민주의적 프로젝트였다. 개발은 모두를 위해 개선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카테고리의 서구화(즉 수요․생산성․성장 등)와 동일시되었다. 식민주의적 힘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화와 자본주의 성장의 독특한 맥락에서 나타난 경제적 발전 및 천연 자원의 사용에 관한 개념과 카테고리는, 새로이 독립한 제3세계의 사람들을 위한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맥락의 필요성에서 보편적인 가설과 적용이라는 차원으로 부각되었다. 독일 사회학자 로자 룩셈부르크2)가 지적하였듯이, 서구 유럽에서 초기 산업 발전은 식민주의적 힘에 의한 식민 국가의 영구적인 지배와 지역적 ‘자연 경제’의 파괴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식민주의란 자본주의적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필요 조건이다. 식민주의가 없이는 자본의 축적은 정지된다. 자본의 축적으로서의 발전과 ‘잉여(surplus)’나 이윤(profits)의 창출을 위한 것이 경제라는 선전은 이처럼 부의 창출이라는 특별한 형태의 재생산뿐만 아니라 빈곤과 박탈의 창출의 재생산에도 관련되어 있다. 신생 독립국들에 있어 물건을 생산하기 위한 천연 자원의 사용이라는 선전에 기반한 경제 발전의 모방은 내면적인 식민국들의 양산으로 귀결되었다.
발전이라는 것은 이처럼 지속적인 식민국화의 과정을 위한 것이다. 발전이라는 것은 여성의 착취와 배제에, 자연의 착취와 파괴에, 그리고 타 문화의 착취와 파괴에 기반한 현대 서구 가부장제의 경제적 전망의 확산이다. 이것이, 제3세계에서 과거에 여성과 농민들과 원주민들이 식민주의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싸웠듯이 지금은 발전 논리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이유이다."(Vandana Shiva, Ibid)
여성의 경제적 위치는 산업화가 확산되는 동안 더욱 열악해졌으며, 특히 저개발국 여성들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물론 저개발국에서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모든 남성들이 물질 획득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개발에 참여할 전문적인 능력을 갖지 못한 많은 남성들도 부의 분배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에는 더 많은 것을 잃었다. 개발론자들은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육체적 존재로 보게 하면서 개발론에 적합한 기술 능력의 보유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경 사회에서 여성들은 땅에 의존하여 가족을 부양해 왔다. 그러나 개발주의는 땅을 박탈하면서 여성을 소외시키고 여성이 땅을 이용할 권리도 박탈하였다(Ibid).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도 농경지가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정부는 개발을 앞세워 논밭을 매입하고 천연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농촌의 여성들은 자녀들과 노부모들을 부양할 책임을 떠맡고 있다. 동시에 농지 감소와 기업농 증가로 여성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점점 빈약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한 가지는 땅과 물과 숲을 관리하고 제어한다는 핑계로 흙과 물과 자연의 자기 갱신의 생산성을 파괴하고 식물의 성장 체계인 생태계를 파괴했다는 점이다. 다른 한 가지는 여성을 생산성에서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이렇게 개발론은 파괴를 적극적인 생산성으로 간주하면서 여성과 자연 자체의 재생산은 수동성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Ibid).
3. 개발과 성장주의가 초래한 일반적인 문제들
반다나 쉬바가 지적하듯이 개발론은 서구 가부장제가 고안한 후기 식민지 프로젝트에 의한 것이지만, 개발과 성장주의가 초래한 문제는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 즉 비서구권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지구적인 위기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그 피해의 영향이 국가 간 빈부 격차를 더욱 가중시키면서 제3세계에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미국의 사회경제학자인 로버트 테오발드(Robert Theobald)는 40여 년간 테크놀로지 문제, 지구적 에너지 수요와 천연 자원의 문제, 인구 문제, 환경 문제 등의 심각성을 제기해 온 사람이다. 그는 저술가이며 유명한 연사이고 미래학 백과사전(Encyclopaedia of the Future)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테오발드는 가시적으로 나타난 오늘날의 위기 현상은 지난 세기 동안 그들이 이룬 성공의 결과 때문이라고 보고, 오늘날 야기된 위기 현상들을 통하여 지난날 그들이 이룩해 온 성공의 개념을 재개념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발과 성장주의에 의해 야기된 여러 가지 위기 현상들을 지적한다. 그 첫째가 스피디한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 증가다. 우리나라에서 40대 남성의 사망률이 높은 것은 과중한 의무와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다. 스트레스 문제 외에도 100년 전의 16억에서 지금은 60억에 육박하는 인구 증가 문제와 그에 따른 천연 자원의 고갈 문제, 시골 생활에서 도시 생활로 옮겨가면서 각종 사회 범죄와 건강 문제와 환경 문제를 야기하게 한 도시화의 문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화학 비료나 농약의 과다 사용으로 인한 환경 오염과 또한 공장을 가동시키면서 야기되는 음식물과 물과 공기와 땅의 오염 등 환경 문제, 소비 촉진으로 인한 쓰레기 문제, 쓸 만한 지식과 지혜는 부족한 데 비하여 지나치게 많은 정보의 문제 등이다.3)
테오발드는 이러한 가시적인 위기 현상들 외에도 비가시적인 위기 현상이 있는데 이 비가시적인 현상들이 더 심각하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경제 위기와 사회 위기와 도덕의 위기와 생태 위기와 영성의 위기이며, 이 가운데 영성의 위기가 보다 본질적인 위기라는 것이다. 우선 경제 위기를 보자. 그는 강대국들의 경제가들이 대중에게 비밀로 하고 있는 경제 현실을 폭로한다. 즉 경제적 성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수요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수요를 증가시켜야 공장을 계속 가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세기부터 식민주의자들이 취한 전략은 생산품을 그들에게 의존하는 식민지국들에게 보내면서 자기들이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주의자들은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였다. 아시아에서 싼 값의 물건들이 생산되면서 자국의 문제가 어려워졌고 점점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을 더 우려하는 상황에 이르렀다(Ibid).
이렇게 식민주의국들의 경제 정책은 국가 간의 빈부 격차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자기 사회의 빈부 격차도 야기해 온 것이다. 국가 간이나 한 사회 속에서 빈부 격차가 심화되면 사회 위기가 발생한다. 소위 식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세계화라는 전략은 패권을 장악한 소수의 나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서 소수의 거부를 양산하고 보다 많은 사람은 빈곤하게 되는 것이다. 이 빈곤 문제는 사회 불안을 가중시킨다.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일어나는 극우파들의 외국인 혐오증은 주로 실업자들에게서 심각하다.
식민주의적 경제 정책에서 우리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발견한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자에 대한 관용이 부족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많은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조를 지원함에 있어 정치적 거래가 앞서는 것을 자주 본다. 물질적 가치가 인간이나 생명에 대한 사랑보다 더 앞서면서 생기는 문제는 바로 자비심이 결여된 도덕의 위기이다.
경제적․정치적 욕심으로 인해 자연의 과도한 개발은 한계를 넘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현금의 사회문화에서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이성보다 개발이라는 파괴적 도그마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문제다. 이것은 삶과 우주를 바라보는 방식, 즉 영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미래를 걱정하는 서구인들은, 파괴적 도그마가 인간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죄(original sin)’론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원죄설은 인간성과 자연의 자연 상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통제와 규제를 합법화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테오발드는 영성의 문제를 보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 절대 빈곤보다 더한 배고픔은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나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배고픔이라고 보았다(Ibid). 황금을 추구하는 마음은, 자연 존재를 비롯하여 타인이 없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는 자각과, 자연과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영성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는 낙관할 수 없다. 지난 세기의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의 질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적 가부장제의 발전론을 뒷받침하는 하수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4.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 에코페미니즘
테오발드가 현대의 위기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위기를 영성의 위기라고 지적하였거니와, 그 영성의 위기는 바로 전 시대의 세계관을 포함한 패러다임의 문제이다. 현대의 위기를 야기한 산업화 시대의 철학과 가치관을 극복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과 생태 문제의 해결도 영성의 문제와 떼어 놓을 수 없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후기 식민지 정책으로서의 서구 가부장제가 내세우는 개발론에 대응하여 새로운 희망을 잉태할 새로운 패러다임은 생태 문제와 여성 문제를 함께 바라보는 시각과 관련이 있다. 특히 새로운 패러다임은 서구 가부장제의 개발론이 배제시켜 온 자연과 여성적 가치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자연의 생산성에 의존하며 살아온 제3세계 여성의 체험은 우리에게 보다 소중한 가르침을 준다.
반다나 쉬바는 파괴를 생산성으로 간주하고 생명의 재생산성을 수동성으로 간주하는 가부장적 카테고리가 오늘날 생존의 위기를 초래하였다고 본다. 즉 반다나 쉬바는 서구 가부장제의 잘못된 발전은 소위 GNP로 측정되는 ‘경제 성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GNP로 측정하는 ‘경제 성장’은, 그 이면에 성장에 따라 치러야 할 비용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가난 혹은 빈곤의 의미도 다르게 본다. 즉 고급 저택에 살지 못하고 초가집에 사는 것이 빈곤이 아니라, 진짜 심각한 빈곤은 개발론이 야기하는 천연 자원의 고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 가부장제의 발전론과는 달리 제3세계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생산성이란 생명과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반다나 쉬바, Ibid). 그런 의미에서 생태 문제와 환경 문제를 함께 바라보는 에코페미니즘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가능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에코페미니즘은 페미니즘과 심층생태주의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으로 역사는 그리 깊지 않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생태학과 페미니즘의 보다 깊은 차원의 만남을 통해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자연을 지배하게 하는 정당성이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어떤 관련성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에코페미니즘은 인간이 자연 환경인 지구를 지배하는 것이 사회 내의 지배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에코페미니즘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자연을 지배하게 하는 정당성이 사회문화적인 이데올로기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드러낸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남녀 차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차별을 사회문화적으로 정당화해 온 인류 문화의 바탕에 도사리고 있는 깊은 사유 체계를 탐색하였다. 그 결과 가부장제 문화의 철학적 기반은 이원론임을 알게 되었다. 최초로 인간은 유한한 현상적 인간 삶의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 즉 무한한 정신적 세계를 갈망해 왔고, 그것은 영(靈)과 육(肉)이라는 최초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 최초의 영육 이분법은 희랍 사상에서 유래된 서구 철학의 뿌리에서 주체와 객체, 즉 ‘나(我, ego)’와 ‘너(他者, the other)’를 구분하는 이분법으로 발전하였다. 다시 말하면 영과 육의 관념이 이후 인식의 주체인 나(我, ego)와 인식의 객체인 너(他者, the other)를 구분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문화 속에서 나(我, ego)는 인간, 남성(특히 서구 문화에서는 백인 남성), 이성, 영혼, 기독교, 유럽 중심(동양은 중화(中華) 사상) 등이며 너(他者, the other)는 자연, 감성, 육체,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 유럽 외의 모든 나라 등이었다. 전 시대의 식민주의 혹은 제국주의, 배타적 유일신주의, 인간 중심주의는 모두 남성 중심주의, 즉 남성적 패권주의와 그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
모든 존재를 대립적으로 보는 이분법적 이원론에서는 이에 따라 사사물물이 서로서로 섞일 수 없는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계층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남성 중심주의적 사고 체계는 여성과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그리고 남자들에 의해 적절히 개발되어야 할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남성 중심주의와 개발주의에 의해 착취되는 여성의 인권과 황폐화하는 자연은 전지구적 종말을 예고하게 되었다. 이러한 남성 중심주의가 가져온 문화의 폐단을 치료하고 인류의 생존 환경을 지키려는 운동이 바로 에코페미니즘이다. 즉 에코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 운동 중에 가장 최근에 일어난 사상이며 가부장적 문화의 총체적 개혁을 꿈꾸는 전지구적 메시지이다.
5. 에코페미니즘의 주요 이슈
인류 정신사의 총체적 변혁을 꿈꾸는 에코페미니즘의 기본 원리는 내재성(immanence), 상호 연결성(interconnection), 공동체(community)에 있다. 이는 스타학이 말한 대지 중심의 영성에서 빌려온 말이지만, 대부분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생각과 상통한다. 스타학에 따르면 전통적인 종교가 초월적 하늘 중심의 종교였다면 새로운 종교 영성은 대지 중심의 영성이라고 한다.4)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시사하듯이 이 흐름은 서구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동학과 원불교와 같은 한국 민중 종교의 운동에서 이미 에코페미니즘과 유사한 새로운 영성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패러다임은 오히려 서구의 에코페미니즘보다 보다 더 철저하게 전 시대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비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현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하였으며, 그 결과 현대인들은 동학과 원불교와 같은 근대 한국의 종교 사상보다 서구 문화권의 경험이 훨씬 가깝다. 이 글이 서구 에코페미니즘의 흐름에서 새로운 영성의 문제를 조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5) 즉 에코페미니즘이 서구 문명의 중심에서 그 한계와 문제를 철저히 자각하면서 일어난 것이기에 현대 사회를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다 가깝게 느껴질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에코페미니즘의 세 가지 기본 원리 중 가장 중요한 요소로 모든 존재들의 상호 연결성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에코페미니즘이 서구에서 시작되면서 특징적인 것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켜 온 서구 종교의 이분법적 이원론에 대한 비판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유태 기독교 전통의 신 관념을 보면, 신은 그의 창조물과는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초월자이며, 인간은 신의 이미지로 만들어졌고, 자연은 영성이 없는 단순한 물질덩어리라고 규정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을 고립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분열이 오늘날 모든 생명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생태계 문제를 야기한 원인이다.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근대 과학조차도 자연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등 자연을 단순한 물질로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신학적인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환경 문제는 자연을 단순한 물질로 보는 우리 인간의 가부장적 영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에코페미니즘의 첫 번째 이슈는 초월적 신이 아니라 내재적 신성에 관한 것이다. 신성의 초월성을 주장하는 종교는 자연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이를 무시한다. 또한 유태 기독교의 전통에서 현실 세계는 영혼의 타락을 야기하는 유혹이 많은 곳이다. 현실 세계가 영성이 부재한 곳으로 되면서 자연은 단순한 물질로 간주되었고, 모든 존재는 초월적 신과 다른 존재들과는 상호 관련성이 없는 고립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신의 초월성을 비판하고 신의 내재성을 강조한다. 즉 신성의 내재성에서 볼 때 대지는 살아 있고 모든 존재는 살아 있는 우주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게 된다. 초월적 신성을 강조하는 종교가 보편주의를 가장한 획일주의를 강조하였다면, 내재적 신성은 개개의 개성을 존중하는 다양성을 지향하게 된다. 이 우주 속의 어느 것도 같은 모습, 같은 성질은 없다. 다양한 모습과 특성을 가진 존재이면서 그들은 우주의 부분을 이루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에코페미니즘의 또 하나의 원리인 상호 연결성을 보게 된다. 즉 인간과 자연과 우주 속의 모든 존재가 신성과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대지와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이 신성을 갖춘 살아 있는 존재라면, 각각의 개체들은 또한 다른 개체들과도 고립되어 있을 수 없다. 에코페미니스트인 조안나 머시(Joanna Macy)는 불교의 화엄 사상에서 나타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존재의 연결성을 강조한다.6) 그는 진정한 자아란 이 지상에서 모든 생명체들과 우리가 공존(coexistence)하는 것인데, 그는 이를 생태적 자아(ecological selfhood)라고도 부른다. 화엄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제석천의 인드라망은 존재의 세계를 설명하는 좋은 비유이다. 인드라망은 유리 보석으로 짜여진 그물과 같다. 각각의 유리 보석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보석 속에 다른 보석들이 서로 투영되어 있어 말 그대로 중중무진의 존재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너의 모습 속에서 나를 보고 나의 모습 속에서 너를 볼뿐만 아니라, 너에게 일어나는 일은 곧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곧 너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여기서 우주가 한 몸을 형성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고 이러한 자각이 일어날 때 사랑이나 자비심(compassion)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생태 문제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이러한 자비심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조치나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에코페미니즘의 세 번째 원리는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즉 인간과 자연이 그리고 모든 존재들이 하나의 큰 몸처럼 상호 연결되어 있고 각 개체에 일어나는 일이 곧 전체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에코페미니스트의 영성에서 공동체 의식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공동체를 실천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이 공동체는 자연과 인간,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를 포함한 사회의 다양한 직업과 종족과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존중받고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에코페미니즘은 대부분의 동양 종교들처럼 이 대지를 단순한 물질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우리가 본래 모습대로 온전(Integrity)하게 사는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과 이 세계가 살아 있는 거대한 몸통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세계는 우리의 영성과 발전을 도모하는 바로 그 장소가 되는 것이다.
6.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삶의 양식
에코페미니즘의 주요 사상에서 보듯이 나와 너 혹은 나와 우주 만물이 둘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과 모든 우주 만물이 서로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면, 공동체적 삶에 대한 필요성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더 나아가 영혼과 육체, 감성과 이성, 주관과 객관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은 달라질 것이다. 보다 상세히 말하자면 에코페미니즘적인 자각을 이룬 사람은 자연에 대한 사랑과, 다른 성(性)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모든 죽임의 구조와 그 문화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래에서는 산업화 이후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몇 가지 문제를 살펴 보면서 생태적인 자각을 토대로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모색해 보자.
모든 존재들이 서로서로 떠나서는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사회는 빈부 격차와 계층 간의 갈등 구조와 지역 간의 갈등 등 여러 가지 갈등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갈등 구조를 들여다 보면 서구와는 다른 한국적 특징을 볼 수 있다. 서구의 문제가 백인 남성 중심이면서 개인주의의 경향인 강하다면, 한국의 경우는 집단주의(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주의와는 다르다)의 특징을 띤다.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나타나는 한국의 집단주의는 보다 근원적인 삶의 질, 즉 공동체적 삶에 이르지 못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집단주의의 근원을 들여다 보면 한 마을에 한 씨족이 집단을 이루고 살아온 혈연 중심주의에 근원한 (남이 아닌) ‘우리’라는 관념이 그 출발점이 되어온 것을 알 수 있다. 폐쇄적 혈연 중심의 가족 이기주의는 집단 이기주의의 공감을 형성하여 이차적인 사회 분열로 연결된다. 이혼 가정, 독신 가정, 동성애 가정,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다양한 가족 문화가 전개되고 있는 것은 새로운 가족 문화로 갈 전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혈연 중심의 가족의 끈은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동물과 식물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보이면서도 불행한 이웃을 위한 자비심은 발휘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생태적인 자각으로 사는 사람은 우주 속의 나와 타인과의 넓은 그물망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금수와 초목에 그리고 타인에게 가하는 행위는 바로 우리 삶의 그물에 가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 결과는 바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정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과 함께 갈 수밖에 없다. 또한 타인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되려면 각각이 가진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산업화가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영향은 교육 문제이다. 초등과 중등 교육은 대학 입시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인생을 보다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대학 교육이 아니라 취업이 더 시급한 것이 된 현실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 교육은 찾아 볼 수 없다. 교육이 대학 가기 위한 수단이나 직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배움과 일에 대한 관념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특히 이 시대의 교육은 산업화를 추종하면서 야기된 우리 시대의 물질 숭배와 발전 및 성장 이데올로기를 넘어 새로운 인류 문명을 추구하기 위한 근원적인 도전이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테오발드는, 교육은 새로운 문명으로의 이민을 위한 도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문명을 위한 새로운 교육의 시작은 개인의 개성에 중심을 두고 개인의 가능성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쟁보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행복 추구가 더 앞서는 교육이어야 한다. 학교가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거나 직업을 위한 기술을 제공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개개인의 차이를 지지하고 상상력을 고무시키는 교육이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영성 교육이다. 영성 교육이란 마음의 뿌리에 이르게 하고 그 속에서 듣고 보고 영감을 얻게 하며 스스로를 신뢰하고 자신의 할 바를 알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의 양식은 일에 대한 관념과 관련이 있다. 산업화 시대의 일은 취업과 보수를 의미하면서 삶과 일을 분리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다 나은 일자리를 찾으려 했고, 보다 나은 일자리는 개인의 개성에 맞는 일이 아니라 더 나은 대접과 높은 보수를 의미하였다. 직장에서는 일의 능률과 그에 따른 보수로 평가되었고, 일이 그 개인에게 가져다 주는 즐거움은 본질이 되지 못하였다. 일과 관련한 또 다른 현상은 실업률이 높아지면서도 여전히 힘들고 고역스러운 일은 회피하는 현실이다. 천시당하고 힘든 일을 회피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보수의 차이 때문이다. 직업의 종류에 따른 보수의 차이가 줄고 노동의 대가를 평등하게 받는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 구하는 것을 힘들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손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작은 공장이나 기업들도 많다. 누구나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노력한 만큼 동등한 대접을 받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개인도 사회 체제도 변화되어야 한다.
산업화는 소위 현대 과학이 가져다 준 결과이다. 현대 과학은 성장과 발전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과 꿈을 실제로 가능하게 해 주었다. 현대 과학은 인간 위주로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하도록 사고 체계를 형성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자연을 파괴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달성하게 하였다. 그러한 현대 과학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현대 의학의 우리 몸에 대한 태도롤 결정하였다. 우리는 몸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고, 몸도 기계처럼 생각하였다. 몸의 병은 기계가 고장난 것처럼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현대 의학에 대한 맹신은 우리나라나 서구나 마찬가지이다. 스트레스에 의한 두통이나 몸의 장애를 아스피린에 의존하는 미국인이나, 제왕 절개 수술이 세계 1위라는 우리나라의 산모들을 보라. 또한 출산 문화가 산모 위주가 아니라 의사 위주라는 지적도 상당하다. 스트레스로 인해 과다한 약물 남용이나 음주와 흡연에 빠져든 환자에 대해서도 의사는 환자의 마음 상태와 습관을 고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산업 폐기물로 인한 호흡기 및 기타 질환에 대하여 현대 의학은 근원을 제거하기보다 약물 개발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더욱이 현대 의학이 발전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민간 요법과 수련 문화로 심신을 단련하던 건강법이 현대 의학에 밀려나 미신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테오발드는 ‘Healing’과 ‘Fixing’의 차이를 강조한다. 그러나 현대 의학을 완전히 무시하기보다는 개인적․사회적․환경적인 요인을 고려하면서 치유해야 한다. 생명의 연장과 건강을 위하여 현대 생명공학도 의학 발전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영성의 면에서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를 지나치게 거스르는 동안 인간에게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삶의 단절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삶의 연장선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도 생각해 볼 일이다. 자연적인 죽음과,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자살은 다르다. 자연의 순환으로서의 생노병사를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도 영성의 가치는 중요하다.
7. 21세기를 ‘치유의 세기’로
소에게 발생한 광우병에 이어 인간 광우병과 그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시작된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이제는 우리나라에도 확산되고 있다. 광우병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초식 동물에게 동물의 뼈와 내장 등을 사료에 배합하여 강제로 소가 먹게 한 결과로 빚어진 일이다. 육식을 하지 않는 소에게 눈가림으로 육류를 섞은 사료를 먹여 보다 나은 육질을 만들어 내고 수익성을 올리겠다는 인간의 자만심과 이기심이 문제였던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눈가림으로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치(愚痴)함은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탐욕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잘못된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즉 그것은 자연은 단순한 물질이며 비생산적이고 비경제적인 것이므로 인공에 의해 생산성과 경제적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보는 개발론과 관련이 있다. 개발론의 배후에는, 우주는 무한한 자원이며 인간은 우주와 자연을 정복하고 인간의 편리를 위하여 혹은 인간의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가공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단순한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고 방식이 바탕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를 단순한 물질의 덩어리로 보고 우주 속의 모든 존재들은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서로 단순한 구성물 혹은 파편으로 바라보는 기계론적 우주관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기계론적 우주관을 바탕으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개발과 성장이라는 산업화의 환상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 산업화의 배후에는 힘을 가진 자와 그들의 그칠 줄 모르는 정복욕을 정당화하는 패권주의가 그 축을 이루고 있다.
테오발드는 20세기를 자연과 인간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시대였고, 이것이 인류를 몰락의 위기로 이끌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몰락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21세기는 치유(Healing)의 세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개인의 차원에서 생태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보살핌과 온정적인 문화(compassionate culture)를 향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거대한 몰락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오발드에 의하면, 원죄설을 믿는 한 사람은 강제적인 힘에 강요되지 않는다면 파괴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비관론에 빠진다. 따라서 그는 치유의 세기를 위하여 ‘원죄(original sin)’를 부정하고 대신에 ‘original blessing’을 말하는 매튜 폭스(Matthew Fox)7)의 주장을 의미깊게 경청한다(Robert Theobald, Ibid). 또한 자연이란 단순한 물질이 아니며, 자연과 인간 그리고 우주 속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호 의존의 유기적 관계라는 세계관이 대두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위기 의식을 느끼면서 21세기의 생존과 존속을 위하여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해야 하며, 새로운 각성과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다운 지식이며 삶의 지혜이다. 산업화는 인간이 물질을 추구하도록 부추기지만 물질이 결코 인간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또한 이 세상에는 다양한 세계관이 존재한다. 그런데 성장과 발전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산업 사회는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경쟁 문화를 부추겨 왔다. 그러나 경쟁 문화로는 더 이상 발전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차이를 극복하고 공동선을 실천하기 위한 대화와 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에 따라 이제 모든 인간 관계와 사회 구조가 전통적인 상하(top-down)의 문화에서 수평적 관계로 전환이 필요하며, 더 나아가 이분법에 근거한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파트너십으로서의 관계 형성이 필요하다. 우주를 거대한 기계로 보고 인간과 자연을 대립 관계로 보는 뉴턴식 사고에서 벗어나 최근 들어서는 카오스와 복합성 이론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성장주의와 경쟁 문화 속에서 우리의 전통이나 도덕성을 구시대적 가치관으로 여겨 왔으나 최근 들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등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21세기를 살아남기 위한 변화의 조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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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남:
1955년생. 원광대 원불교학과 졸업, 미국 웨스턴 미시건대 비교종교학 석사, 원광대 대학원 철학 박사. 현 영산원불교대 원불교학부 교수, 본대학 부설 여성문화연구소 소장, 영광 여성의전화 회장. 논문 「한국 신종교의 남녀 평등 사상에 관한 연구」등. 저서 『종교적 영성, 페미니즘, 에코페미니즘』, 『여성, 종교, 생명 공동체』(공저). 영성과 삶과 생명의 관점에서 에코페미니즘의 이념을 여성 농민 운동과 결합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농촌여성문화축제’라는 에코페미니스트 페스티벌 사업을 진행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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