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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에코페미니즘

에코페미니즘과 생태중심주의 세계관 /김욱동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2.

『미국학논집』 제29집 1호 (1997)

pp. 47-70



에코페미니즘과 생태중심주의 세계관


김 욱 동(서강대)


에코페미니즘의 개념과 본질을 좀더 쉽게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용어의 의미소(意味素)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용어는 두말 할 나위 없이 ‘페미니즘’이라는 말에 ‘생태’나 ‘환경’을 뜻하는 ‘에코’라는 접두어를 붙여 만들어 낸 말이다. 의미소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에코페미니즘은 한꺼번에 남성과 자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으려고 한다. 생태 페미니스들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이나 착취가 자연 파괴나 환경 오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는 마치 샴의 쌍둥이처럼 서로 얽혀져 있어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에코페미니즘은 어떤 식으로든지 페미니즘과는 뗄래야 뗄 수 없을 만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생태 ‘페미니즘’이 페미니즘으로 대접받는 것은 전통적인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남성중심주의의 가부장제 질서를 타파할 것을 부르짖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편견이나 억압 또는 착취를 비판하고 그것을 없애는 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남성의 여성 지배는 모든 억압의 뿌리와 다름없다. 그러므로 이 여성 억압의 뿌리를 뽑아 버릴 때 비로소 자연에 대한 지배를 비롯한 이 세계의 모든 악압이나 착취를 없애 버릴 수 있다. 여성 지배나 억압을 근절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의 일차적인 목표인 것이다.

 

한편 ‘생태’ 페미니즘이 ‘생태’(에코)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생태계나 환경을 지키는 일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심층 생태학이나 사회 생태학과 마찬가지로 에코페미니즘은 환경 오염, 자원 고갈, 생태 파괴 때문에 인류가 종말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첨예하게 깨닫는다. 만약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종말을 맞이한다면 가부장 질서를 모두 없애 버리고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위치를 얻게 된다고 한들 아무런 쓸모가 없게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폭풍우 속에서 배가 침몰하는데 배안에서 좀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바로 이 점에서 에코페미니즘은 전통적인 페미니즘과는 크게 다르다. 종래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비판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생태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만한 관심이 없었다. 흔히 많은 학자들이 에코페미니즘을 여성 운동이나 문학 이론보다는 오히려 환경 윤리나 환경 철학의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실제로 에코페미니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개가 철학자들이거나 윤리학자들이다.



I


에코페미니즘은 과학 생태학 또는 생태 과학의 통찰과 지식에 기대기도 한다. 생태 과학에도 여러 갈래가 있고, 생태학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갈라진다. 캐런 J. 워런과 짐 체니는 여러 갈래의 생태학 이론 가운데에서도 R. V. 오닐을 비롯한 몇몇 이론가들이 펼치는 ‘계급 이론’ 또는 ‘관찰 태도 이론’을 발판으로 삼아 에코페미니즘의 이론적 토대를 설명한다 (Warren and Cheney 179-95). 물론 이 두 관계는 얼핏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과학 생태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생태 운동과 생태 과학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생태 운동가들이나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생태 과학자들은 이와는 조금 다른 입장을 취한다. 상호 관련성은 오직 홀론(생물과 환경의 총합체) 안에서 가능할 뿐 홀론과 홀론 사이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생태 과학자들에 따르면 한 체계 안에서 지나친 상호 의존은 오히려 생태계에 불안정을 가져온다.

 

그렇다면 에코페미니즘은 생태 과학 그 자체보다는 생태 과학의 기본 정신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 것 같다. 물론 생태학 이론과 기본 정신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코페미니즘은 심층 생태학이나 사회 생태학과 마찬가지로 을 생태 과학의 이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본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일 따름이다. 여기에서 생태 과학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태중심주의가 된다. 생태중심주의란 글자 그대로 그 동안 인간쪽에 두었던 무게를 인간이 아닌 자연쪽에 싣는 것을 말한다. 생태중심주의의 기본 원칙을 몇 가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기적 또는 전일적 패러다임을 형이상학적 기초로 삼는다. 여기에는 기계론적 또는 원자론적 패러다임이 들어설 자리란 아예 없다. 둘째,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밖의 다른 모든 것과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상호의존적 연관성은 흔히 그물이나 망의 비유로 표현한다. 셋째, 전체는 부분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크다. ‘부분의 총화가 전체’라는 유크리트의 기학적 명제는 생태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넷째, 우주는 언제나 역동적이며 살아 있다. 인간이건 인간이 아닌 자연 세계이건 모든 것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인다.

 

다섯째, 생태중심주의는 지속적인 변화 과정을 중시한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늘 변화 과정을 겪으면서 발전해 나간다고 본다. 여섯째, 이항대립적 또는 이원론적 사고를 거부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배타적 입장보다는 오히려 ‘모두 둘 다’의 포용적 입장을 취한다. 일곱째, 영혼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보다는 육체적인 것을 더 높이 여긴다. 다시 말해서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에 더 많은 가치를 둔다. 그리고 여덟째,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지향한다. 얼핏 모순적인 표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모든 개체는 각자의 개성을 지켜나가면서 전체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찾는다.

 

에코페미니즘을 부르짖는 이론가들에 따르면 환경 문제를 불러일으킨 것은 심층 생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중심주의도 아니고, 사회 생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사회적 계급주의도 아니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해 있는 모든 환경 문제는 오히려 남성중심주의에서 비롯한다. 바꾸어 말해서 자연을 훼손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한 장본인은 다름아닌 남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장본인일 뿐만 아니라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는 장본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남성은 두 쪽에서 비난의 화살을 받는 셈이다. 에코페미니즘은 한편으로는 남성중심주의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하여 혐의를 둔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심층 생태학에서 물려받은 유산이라면,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회 생태학에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과 자연이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견해는 얼핏 아주 최근에서야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래 전에서 이미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을 자연과 같은 차원에서 보려는 태도는 그 뿌리가 꽤나 깊다. 이러한 태도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까마득히 멀리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제노폰이나 루크레티우스와 만나게 된다. 제노폰은 일찍이 “지구는 여신”이라고 말하였고, 루크레티우스는 한 발 더 나아가 “지구는 어머니로 불러 마땅하다. 인류를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지구이다”라고 말하였다. 근대 과학에 이론적 틀을 마련해 준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을 여성과 연관시키면서 자연을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는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자연을 불가사해한 처녀에 견주면서 자연은 ‘자궁’ 안에 ‘아주 쓸모 있는 많은 비결’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 숨겨진 비결을 캐내기 위해서는 과학이라는 연장을 깊숙히 집어넣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베이컨은 성(性)과 관련한 에로틱한 비유를 쓰고 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시몬 보부아르는 지금으로부터 약 50여년 전에 여성과 자연의 관계에 처음으로 눈을 돌린 여성 이론가였다. ꡔ제2의 성ꡕ에서 그녀는 비록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여성과 자연 사이에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 점과 관련하여 보부아르는 “남성은 여성을 소유함으로써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을 기대한다. 즉 여성은 남성이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특별한 대상이다”라든지, “여성한테는 자연의 불안한 신비가 구현되어 있고, 남성은 자연에서 벗어날 때 여성의 손아귀에서 풀려난다”(de Beauvoir 281)고 말한다. 그러니까 자연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여성을 지배하는 일이고, 여성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자연을 정복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좀더 본격적으로 다룬 이론가는 바로 수전 그리핀이다. 앞에서 말한 ꡔ여성과 자연ꡕ에서 그리핀은 서구 가부장제가 그 동안 여성과 자연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아주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적어도 서구에서 여성은 자연, 물질적인 것, 감정적인 것, 구체적인 것과 연관되어 온 반면, 남성은 이와는 반대로 문화, 비물질적인 것, 합리적인 것, 추상적인 것과 깊이 관련되어 왔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리핀은 이 두 가지 가운데에서 남성과 관련된 특성들이 여성과 연관된 특성보다 훨씬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아 왔다는 점을 밝힌다 (Griffin 1).

 

이렇게 여성과 자연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과학의 발달이 아주 큰몫을 한다. 중세기만 하더라도 자연은 ‘위대한 어머니’로서 존중을 받았다. 이 무렵 자연을 존중하는 것은 자식이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것과 같았다. 말하자면 자연에 대한 존중은 유교 질서에서 효도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었던 것이다. 가령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광산과 야금을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기 일쑤였다. 광물과 금속은 대지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체로 보았고, 이러한 것을 채취하는 것은 곧 어머니의 질(膣)을 뒤지는 것과 같았다. 오비디우스, 세네카, 플리니우스, 그리고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땅 속을 파헤쳐 광물을 채취하는 것이 곧 어머니의 창자나 자궁을 파헤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플리니우스는 지진이란 바로 능욕당한 대지의 어머니가 분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광물을 채취하기에 앞에서 고대 사람들은 토지 신과 지하 세계의 신을 달래기 위하여 제물을 바치고 정중히 제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이 기간 동안에는 몸을 깨끗히 하고 성 행위를 삼가하고 금식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자연과 여성에 대한 태도는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과학 혁명과 더불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과학 혁명은 곧 자연의 정복이라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원자론적이고 기계론적인 과학은 자연을 오직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과학 혁명이 자본주의와 손을 잡으면서 이러한 현상은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자연은 이제 존경하여야 할 ‘위대한 어머니’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천연 자연으로서의 구실밖에는 하지 못하였다. 지구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간직한 귀중한 보물을 인간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니었다. 캐롤린 머천트의 말대로 “지구는 친어머니가 아니라 금속을 인간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대신 자신의 깊숙한 몸속에 감추어 버리는 사악한 계모였다” (Merchant 33). 친어머니와 계모의 이미지는 얼마 가지 않아 곧 좀더 부정적인 이미지로 바뀐다. 즉 땅 속을 샅샅이 뒤져 광물이나 금속을 캐내는 것은 쾌락을 얻기 위하여 여성의 깊숙한 곳을 범하는 것과 같았다. 다시 말해서 대지의 어머니는 이제 인간에 의하여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처럼 여성의 위상도 마찬가지로 크게 떨어졌다. 자연의 격하는 곧 여성의 격하와 다름없었다. 산업 혁명 이후 생산이 수공업에서 기계 공업으로 옮겨옴에 따라 여성의 경제적 역할이 크게 줄어 들었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경제적 동반자의 위치에서 전적으로 남성에게 기대는 의존자의 위치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자연과 여성은 이제 ‘타자’의 위치로 떨어진 채 주변부에 남아 있게 되었다. 자연이 인간의 물질적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떨어졌듯이 여성은 남성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생태 위기를 겪으면서 여성과 자연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자연은 이제 정복하여야 대상, 인간을 위하여 착취하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의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관심은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여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자연과 여성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자연을 억압하는 것은 곧 여성을 억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페미니즘이 이렇게 생태학과 손을 잡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네스트러 킹의 말대로 이 두 가지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 공생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생태학은 페미니즘 시각을 요구한다. 여성 혐오와 자연의 증오의 연관된 뿌리를 보여 주는 사회 지배를 철저히 분석하지 않고서는 생태학은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즉 그러한 생태학은 불완전하다. 만약 남성 생태 과학자들과 사회 생태학자들이 그들 자신의 삶에서 자연 증오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여성 혐오를 다루지 못 한다면, 그들은 생태학적 삶을 살지 않거나 그들이 주장하는 생태 사회를 만들어 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King 24)


에코페미니즘은 그리핀과 킹 그리고 머천트의 주장을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여성의 지배와 자연의 억압, 여성의 억압과 자연의 착취 사이에는 아주 깊은 함수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다른 쪽도 잘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지배나 착취 가운데에서 어느 한쪽을 잘못 이해한다면 다른 쪽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마련이다. 이 두 문제는 마치 동전의 앞뒤 면과 같아서 결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이렇듯 여성 운동은 자연스럽게 환경 운동과 손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페미니즘 신학자 로즈메리 래드포드 루서의 말대로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비판하고 극복하지 않고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비판할 수 없다” (Reuther a 73).

 

그런데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여성의 역할이 무척 크다고 주장한다. 환경 문제를 아예 여성이 떠맡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여성은 ‘집안의 천사’에서 이제 ‘생태계의 천사’로 탈바꿈한 셈이다. 에코페미니즘에 따르면 남성들한테 환경 문제를 맡기는 것은 마치 고양이한테 고기를 맡기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태도는 다름아닌 가부장적 세계관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전 그리핀 · 엘리저베스 돗슨 그레이 · 메리 데일리 · 캐롤 머천트 · 이네스트러 킹을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은 생태 문제는 곧 여성 문제라고 잘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이들 이론가에만 그치지 않고 거의 모든 에코페미니스트들한테서 마찬가지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라면 참다운 의미에서 에코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 같다.

 

이렇게 생태 문제를 여성 문제와 관련시키려고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여성은 남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지금까지 대지를 비롯한 자연은 늘 여성으로 여겨 왔다. 여성은 곡식을 자라게 하는 대지처럼 아이를 분만하고 출산하는 일을 맡는다. 뿐만 아니라 환경 오염이나 생태계의 파괴로 피해를 입는 것은 남성쪽보다는 오히려 여성쪽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여성들은 갖은 질병과 가뭄이나 기근에 시달려 왔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환경 오염 때문에 생명이 위협을 받아 왔다. 여성과 자연의 관계는 우리가 늘 쓰는 비유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여성을 의인화할 때에는 언제나 여성형으로 받는다. 여성을 폭행하거나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를 두고 ‘강ㄱ ㅏ ㄴ한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흔히 여성과 연관되는 ‘물질’이라는 말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머니’라는 말과 만나게 된다. 이 두 낱말은 모두 자라나는 나무 줄기라는 말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 점과 관련하여 캐런 J. 워런은 에코페미니즘의 기본 원칙을 네 가지 관점에서 살핀다. 첫째, 여성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자연의 억압과 착취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 둘째, 이러한 연관성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과 자연의 이중적 억압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셋째, 모든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은 반드시 생태학적 관점을 포함하여야 한다. 그리고 넷째, 생태 문제에 대한 모든 해결은 반드시 페미니즘적 관점을 포함하여야 한다 (Warren a 4-5). 첫번째 원칙과 두번째 원칙이 여성과 자연의 관계를 밝힌 것이라면, 세번째 원칙과 네번째 원칙은 페미니즘과 생태학의 연관성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여성을 남성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생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 제도를 뜯어고치는 일이 중요하다. 생태 페미니스들은 지금까지의 제도로서는 이러한 일을 결코 이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ꡔ새로운 여성/새로운 지구ꡕ(1975)에서 로즈메리 래드포드 루서는 사회 관계의 모델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여성은 지배 관계가 기본적인 관계의 모델인 사회에서는 여성 해방도 생태 위기의 해결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관계와 이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를 급진적으로 새롭게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여성 운동의 요구와 생태 운동의 요구를 서로 결합하여야 한다. (Reuther b 204)


루서에 따르면 여성 운동과 생태 운동은 결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이 두 운동은 얼핏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배의 기반을 이루는 세계관을 변혁하고 새로운 가치 체계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입장을 같이한다. 페미니즘과 생태학을 서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곧 두뇌와 심장을 분리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워런은 루서의 주장을 한 발 더 밀고 나간다. 워런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사고 방식에 따라 알게 모르게 활동한다. 그녀가 ‘개념의 틀’이라고 부르는 이 사고 방식은 인생관과 세계관을 설명하는 일련의 신념 · 가치 · 태도 · 전제 따위를 말한다. 이러한 개념의 틀은 sex · 인종 · 계급 · 나이 · 종교 · 국적 같은 요소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행위 그 밑바닥에는 ‘가부장적 개념의 틀’이 굳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까지 남성의 신념 · 가치 · 태도 · 전제를 유일한 것이거나 표준이 되는 것 또는 여성의 그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겨 온 입장은 다름아닌 이 가부장제 개념의 틀이다.

 

그런데 워런에 따르면 이 가부장제 개념의 틀은 가치계급적 사고의 특성을 지닌다. 바꾸어 말해서 이 개념의 틀은 모든 가치에 상하의 수직적인 등급을 매긴다. 예를 들어 남성보다는 여성, 자연보다는 문화, 그리고 육체보다는 정신에 더 높은 자리매김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가부장적 가치계급적 사고는 이른바 ‘지배 논리’를 만들어 낸다. 이 지배 논리에 대하여 워런은 “각 집단의 (주장된) 우수성이나 열등성을 근거로 ‘우수한’ 집단이 ‘열등한’ 집단에 대한 종속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가치계급적 사고 방식”이라고 규정한다 (Warren c 6-8). 지금까지 남성들은 이 지배 논리를 도구로 삼아 여성을 억압하거나 착취해 왔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억압과 착취를 합법화해 왔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글에서 워런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사이의 개념적 관계를 밝힌다. 이 두 관계 또한 여전히 ‘지배 논리’에 기대고 있다고 말한다. 워런에 따르면 이 논리 밑바닥에는 언제나 인간과 자연 사이에 도덕적 차이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A1  인간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공동사회를 의식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식물은 그러한 능력을 가

     지고 있지 않다.

A2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무엇이든 그러한 능

     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보다 도덕덕으로 우월하다.

A3  인간은 식물과 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A4  X와 Y에 있어 만약 X가 Y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면

     X가 도덕적으로 Y를 종속시키는 것이 정당화된다.

A5  그러므로 인간은 식물과 돌을 종속시키는 것이 정당하다.                                                     (Warren b 129)


워런은 이와 똑같은 지배 논리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거나 억압하는 행위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B1  여성은 자연이나 물리적 영역과 동일시된다. 남성은 ‘인간

     적인 것’과 정신 영역과 동일시된다.

B2  물리적 영역과 동일시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인간적인 것

     이나 정신 영역과 동일시되는 것보다 열등하다.

B3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 또는 거꾸로 말하자

     면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다.

B4  X와 Y에 있어 만약 X가 Y보다 우월하다면 X는 Y를 종속

     시키는 것이 정당화된다.

B5  그러므로 남성은 여성을 종속시키는 것이 정당하다. (130)


워런은 조금 어렵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을 좀더 쉽게 바꾸어 말하면 여성의 지배와 자연의 착취는 곧 이원론적 또는 이항대립적 사고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이원론적 사고란 남성/여성, 인간/자연, 문화/자연, 정신/육체, 문명/원시, 이성/감성, 동일자/타자 따위처럼 모든 현상을 서로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파악하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쪽 가운데에서 유독 어느 한쪽에만 가치를 부여한다는 데 있다. 앞에 이항 대립에서 뒤쪽보다는 앞쪽에 더 높은 무게를 실어 준다. 이원론은 한 마디로 계급 질서의 논리이다. 가부장 질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식의 이분법을 여성을 지배하고 자연을 착취하는 지배 논리로 삼는다. 가령 남성/여성의 이분법은 남성의 여성 지배와 억압을 합리화하려는 수단이고, 인간/자연의 이분법은 인간의 자연 지배와 착취를 합리화하려는 수단이다. 마찬가지로 정신/육체의 이분법은 계급에 따라, 그리고 문명/원시의 이분법은 인종에 따라 다른 사람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려는 논리이다.

 

에코페미니즘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를 무너뜨리는 데 온갖 힘을 기울인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본다. 이원론적 사고는 본질적으로 생태학 기본 원칙에 크게 어긋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원론에 대한 비판은 곧 모든 것이 다른 것과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든지, 한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제각기 평등한 가치를 지닌다든지, 또는 균형잡힌 생태계라면 다양성을 유지하고 차별성을 중시한다는 생태학의 기본 원칙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II


에코페미니즘은 남성중심주의적 가부장제를 타파하고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에코페미니즘은 실제로 이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을 포함한다. 가부장 질서를 떠나서 페미니즘을 생각할 수 없듯이, 모든 형태의 지배와 억압을 떠나서는 에코페미니즘은 생각할 수 없다. 에코페미니즘은 모든 형태의 불평등 · 지배 · 억압 · 착취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이렇듯 처음에는 여성의 억압과 자연의 착취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에코페미니즘은 점차 그 테두리를 넓혀 나간다. 참다운 의미에서 여성을 해방시키고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권력 구조 관계를 문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서 사회 변혁의 기치를 높이 쳐드는 몇몇 다른 해방 이론과 함께 에코페미니즘은 아주 야심만만한 이론이라고 할 만하다.

 

에코페미니즘에서 가부장제란 말은 단순히 남성중심주의만을 뜻하지 않는다. 가부장제적 개념의 틀을 말할 것도 없고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억압적인 권력 관계를 정당화하거나 영구화하려는 모든 형태의 이데올로기나 태도 또는 행위를 가리킨다. ‘타자’의 범주도 마찬가지이다. 여성과 자연을 포함하여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모든 대상이 다 타자의 테두리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가부장제’라는 말이나 ‘타자’라는 말이나 제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에코페미니즘이 전통적 페미니즘과 뚜렷히 구별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여전히 여성의 문제만을 의제로 내세우지만 에코페미니즘에서는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를 그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

 

셰일러 D. 콜린스는 “인종 차별, 성 차별, 계급에 의한 착취, 그리고 생태 파괴는 가부장제가 기초하고 있는 서로 연관된 네 기둥”(Collins 161)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에코페미니즘의 다문화적 특성과 관련하여 캐런 J. 워런도 에코페미니즘이 “여성과 자연의 관계를 분석하여 성 차별은 물론이고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연령 차별, 민족중심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등 모든 사회적 지배 체체 사이의 복잡한 상호 관계를 포함한다”(Warren c 2)고 밝힌다. 여기에서 콜린스와 워런이 밝히고 있는 기둥 말고도 가부장 질서라는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인간이나 자연을 억압하고 착취를 사회 지배 체제로는 정치 체제, 종교, 종(種), 성적 취향에 따른 차별, 그리고 지구에서의 삶 자체를 크게 위협하는 전쟁과 핵 사용 따위를 더 꼽을 수 있다. 

 

에코페미니즘은 인종 차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 동안 서구 페미니즘은 주로 백인 중산층 여성을 위한 운동과 다름없었다. 이 운동은 따지고 보면 남성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을 박탈당한 것에 대한 소수 중산층 여성들의 불만을 토로한 것이었다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흑인이나 아시아계의 유색 인종에 속한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란 겉만 번지르한 구호요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유색 인종에 속하는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백인 여성 가운데에서도 중산층 이하의 여성들도 여전히 타자의 위치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성은 성차(젠더)와 관련하여 피식민지 주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식민지 개척자이기도 하다”(Plumwood 67)는 밸 플룸우드의 말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1980년대부터 소수 집단 여성 사이에서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페미니즘은 어쩔 수 없이 궤도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소수 집단에 속한 여성들을 포함하는 좀더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을 가리키기 위하여 ‘포스트페미니즘’이니 ‘우머니즘’이니 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에코페미니즘은 포스트페미니즘이나 우머니즘보다도 훨씬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혈통이나 피부 색갈에 관계 없이 모든 여성들은 다 평등하다.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고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는 인종 차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위기 의식이 전통적인 페미니즘보다 에코페미니즘에서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에코페미니즘에 앞장 선 이론가들을 보더라도 백인 중산층 여성에 못지않게 유색 인종에 속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예들 들어 흑인 여성, 오스트레일리어 출신의 여성, 인도 같은 아시아계의 여성, 그리고 북미 인디언 혈통의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인종뿐만 아니라 민족에 있어서도 에코페미니즘은 다원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 동안 서 유럽의 국가들이, 그 다음에는 미국이 세계 무대에서 주역을 도맡아 왔다. 지금까지 서구 열강들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삼아 침략을 ‘발견’으로, 약탈을 ‘무역’으로, 그리고 원주민의 문화 파괴를 ‘복음 전파’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분식하였지만 피식민지 국가의 자원을 무자비하게 착취하였다는 비난을 모면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세계 국가들은 한낱 타자로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채 세계 무대의 주변부에 머물어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말하자면 세계사의 드라마에서 배경이나 소도구 구실을 하였고, 기껏하여야 단역이나 말단 역할밖에는 맡지 못 하였던 것이다. 원시적이고 이도교적이며 불가사해하다는 이유로 멸시받기 일쑤였다. 제1세계나 제2세계의 선진 국가들이 곧 빛의 세계였다면, 제3세계의 개발도상 국가들은 어둠의 세계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에서는 제1세계나 제2세계에 못지않게 제3세계 민족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 제3세계 민족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전체 인구 가운데 무려 3분의 2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머리에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같은 개발도상 국가들이 새롭게 세계 무대의 중심부로 옮아오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제1세계나 제2세계 국가들이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제3세계 국가들이 치른 값비싼 희생의 대가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생태계에서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들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듯이 제3세계 국가들이 없다면 제1세계나 제2세계 국가들도 아마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들어 제3세계라는 용어와 함께 ‘제4세계’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쓰인다. 본디 제3세계 국가 가운데에서 자원을 가지지 못한 나라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다가 지금은 토착 원주민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쓰인다. 크리스토퍼 콜럼부스가 북미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토착 인디언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알라스카 지방의 에스키모인들도 백인과 마찬가지로 ‘인간 가족의 일원’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삶의 영역을 외계까지 넓혀 본다면 인간은 누구나 다 ‘지구의 토착인’이라고 주장하는 에코페미니스트들도 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이라는 페미니즘의 슬로건은 에코페미니즘에 이르러 “지방적인 것이 곧 세계적”이라는 슬로건으로 바뀐 셈이다.

 

에코페미니즘은 민족이나 인종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듯이 계급에 따라서도 차별하지 않는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그러하지 못한 사람이나 서로 동등하게 대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이 생겨난 것은 인간이 타고날 때 물려받은 어떤 특성 탓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 제도 탓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허버트 스펜서 같은 사회 진화론자들에 따르면 인간과 사회는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 원칙과 똑같은 방식으로 발전한다. 즉 적자 생존이나 양육 강식의 정글 법칙에 따라 오직 능력 있는 사람들만이 재산을 모을 수 있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적자 생존이나 양육 강식을 사회 진화론자들과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보다 힘이 약한 상대방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죽이는 능력보다는 복잡한 관계 안에서 서로 공존하고 협력하는 능력을 뜻한다.

 

계급 차이만이 아니고 빈부의 차이도 마찬가지이다. 에코페미니즘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같은 차원에서 다룬다. 부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청교도들의 개신교 윤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된 것은 오히려 부자들의 탐욕 탓으로 돌린다. 그러므로 빈부를 이유로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들어맞지 않는다.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 한 국가에서는 물론이고 지구촌 곳곳에 걸쳐서도 빈부의 차이의 골은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ꡔ세계의 기아ꡕ(1986)에서 프랜시스 무어 랩과 조셉 콜린스는 기아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의 가면을 벗긴다. 지구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것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지적한다. 세계 차원의 기아를 가져오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다름아닌 탐욕과 불평등에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는 모든 사람들의 욕구를 채울 만큼 충분한 것을 마련해 주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을 채울 만큼은 충분한 것을 마련해 주지 못한다”는 마하트마 간다의 그 유명한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치 민주주의에 못지않게 경제 민주주의가, 정치 · 사회 정의에 못지않게 경제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선진 국가들은 한 세기 앞서 식민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질렀던 일을 지금은 발전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자행한다.

 

가령 라틴아메리카의 열대 우림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열대 우림이 파괴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열대 우림에서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거의 모두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제1세계의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그들의 삶은 크게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맥도널드 햄버거 같은 다국적 기업들이 울창한 산림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대단위 목장을 만들었다. 두말 할 나위 없이 전 세계에 걸쳐 체인점을 가지고 있는 이 기업은 햄버거를 만드는 데 막대한 소고기를 필요로 하고, 이러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소고기를 대량으로 생산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세계 은행이나 국제 통화기금 같은 국제 기구들이 다국적 기업이 대단위 목장을 만드는 데 자금을 대어 줌으로써 열대 우림 파괴에 한몫을 한다. 생태계가 파괴되자 기후가 영향을 받고 이 지역이 곧 페허의 땅으로 바뀌면서 이 곳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헐벗고 굶주리는 상태로 떨어져 버렸다.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에 걸쳐 일어난 이른바 ‘녹색 혁명’도 저개발 국가들이나 개발도상 국가들이 어려움을 겪는 데 톡톡히 한몫을 맡았다. 멕시코, 인도, 파키스탄 필리핀 같은 국가들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선진 국가의 도움으로 곡물 생산 운동을 펼쳤다. 단백질이 높고 수확을 많이 늘일 수 있는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고, 화학 비료와 살충제와 제초제를 대량으로 쓰며, 물을 끌어오기 위하여 대대적인 관개 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 녹색 혁명은 저개발 국가에 풍요를 가져다 주기는커녕 오히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난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가난한 농부들은 선진국에서 들여 온 값비싼 화학 비료와 살충제나 제초제를 쓸 여유가 없었을 뿐더러, 이러한 화학 물질을 계속 쓰다 보니 토양은 날이 갈수록 척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녹색 혁명은 환경친화적인 운동과는 거리가 먼,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또 다른 실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생태 환경을 무시한 채 실행해 온 단일 재배 농법도 생태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이 드러났다. 옥수수 같은 토착 농작물 대신에 커피 같은 작물 재배는 토양을 약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생태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제3세계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점점 더 제1세계나 제2세계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제3세계 국가 차원에서 보더라도 엘리트 집단의 통제가 더 강화되었고, 사회적 불평등의 골이 더 깊어졌으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나 억압이 늘어났다.

 

다국적 기업이나 자본주의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여성 운동의 좋은 예로 에코페미니스트들은 흔히 ‘칩코 운동’을 손꼽는다. 인도의 칩코 지방에 살고 있는 여성들은 식량과 땔감을 비롯한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거의 대부분 숲에서 얻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손길이 뻗쳐 오면서 사정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대기업이 대량으로 나무를 베어 내기 시작하였고, 몸 말고는 다른 방어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성들은 벌목을 막기 위하여 손에 손을 맞잡고 나무를 껴앉은 채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나머지 벌목 회사는 그만 벌목 작업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도 사람들은 나무와 산림을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 왔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칩코 운동은 단순히 생존이나 환경 보호 차원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칩코 운동의 정신은 영국 제국주의에 맞선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 저항 운동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일은 미국 서부 지방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이윤 추구에 눈이 어두운 몇몇 대기업들이 그 동안 캘리포니어주와 오리곤주의 원시림을 마구 벌목해 왔다.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벌목을 막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더구나 에코페미니즘은 정치 체제에 따라서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자유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추상적 이념에 지나지 않으며, 개인을 추상적 이념에 따라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최근 들어 생태주의자들이 아나키즘을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우리말로 흔히 무정부주의라고 옮기고 있지만 본디 그 뜻은 정치적 개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용어가 갈라져 나온 어원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아르케’라는 그리스어에 부정(否定)을 가리키는 ‘안’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만들어진 말이다. 아르케란 시간적 면에서 시작이나 시원, 논리적 면에서 근원이나 기원, 정치적 면에서는 지배나 통치를 뜻한다. 그러니까 아나키즘이란 곧 시원이나 근원 또는 통치나 지배를 모두 거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아나키즘은 무엇보다도 상호 의존을 통하여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를 함께 추구하려는 운동이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연을 보존하고 환경 파괴를 막는 데 있어 아나키즘이 큰 몫을 맡을 수 있다고 본다. 정치적 아나키즘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러한 아나키즘은 흔히 ‘생태 아나키즘’이라고 부른다.

 

자원 고갈이나 환경 오염 또는 생태계 파괴와 관련해서도 두 정치 체제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를 기본적인 경제 원리로 받아들이는 자유 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생태 위기를 가져온 장본인으로 흔히 일컫는다. 상업주의와 손잡고 지나치게 경쟁을 부추기고 이익을 추구한 나머지 자본주의는 자연을 파괴하는 일에 앞장 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말하자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옛소련과 동구권 여러 나라에도 볼 수 있듯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국가에 못지않게 자연을 크게 훼손시켰다.

 

계급이나 인종 또는 정치 체제에 따른 차별 말고도 또 다른 차별이 있다. 특히 이 차별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흔히 지역주의라고 부르는 지방에 따른 차별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지방색이나 지역에 따른 차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민주주의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도시 사람들은 ‘레드 넥’이니 ‘힉’이니 하여 시골 사람들을 은근히 깔본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지방적 특색에 머물지 않고 특정한 지방 출신 사람들을 직접 · 간접 차별한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처럼 어느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 차별을 두는 나라는 아마 세계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드물 것 같다. 몇몇 정치가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이러한 지역주의를 부추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종교에 있어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에코페미니즘은 종교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에코페미니즘은 기독교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이러한 태도는 구약성서 창세기를 문제 삼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이브를 만들었고 아담을 지아비로서 섬기도록 하였다. 또한 아담과 이브에게 자연의 관리인으로서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주기도 하였다. 이렇듯 여성에 대한 지배와 자연에 대한 착취가 일찍이 창세기에서 그 씨앗이 뿌려졌다고 주장하는 에코페미니스트들도 있다. 한편 에코페미니즘에서는 기독교 이전의 이교도 전통,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샤머니즘 전통, 그리고 동양의 종교 전통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적어도 생태 문제에 관한 한 피타고라스나 히포크라테스 또는 플루타크 같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오늘날 생태학자들과 아주 비슷한 데가 많았다. 북아메리카 대륙에 살았던 인디언들도 놀랄 만한 환경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신비주의 색채가 비교적 강한 동양의 종교 또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오히려 경외심과 존경으로 대하였다.

 

에코페미니즘은 나이에 따라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특히 어린이와 노약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린더 싱거는 후기 자본주의의 특성을 성적 만족과 소비를 통한 만족에서 찾는다. 또한 저메인 그리어는 sex란 곧 ‘소비 경제의 윤활유’라고까지 못박는다. 서양에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음란물이 동양보다 훨씬 더 보편화되어 있다. 이렇게 어린이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은 동물을 학대하는 것과 같다. 한편 에코페미니즘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어린이들을 차별하지 않듯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노인들을 차별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서구 선진국에서는 노약자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어린이나 노약자만이 아니다. 에코페미니즘에서는 신체적 능력에 따라 차별하지도 않는다. 정상인이나 장애인이나 사회에서 쓸모 있는 구성원들이다. 최근 들어 유전 공학이 발전하면서 유전 인자 조작하여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자손을 낳지 말고 우수한 자손만 낳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인간 복제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그 이름도 낯선 유전 태생(胎生)학자들은 수정란 세포를 휴면 상태로 만들고 그 세포핵을 다른 양의 난자에 이식함으로써 양을 복제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인간도 복제해 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계획은 단기적으로는 인류의 장래에 도움이 될른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큰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삶을 동질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염려가 있다.

 

에코페미니즘은 성적 취향에 대해서도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 그 동안 전통적인 페미니즘에서는 이성 사이의 sex에만 관심을 둘 뿐 동성끼리의 sex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정상을 벗어나는 변태 행위로 금기시하였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게이나 레스비언 같은 동성 연애자들도 ‘정상적인’ 이성 연애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이 두 사이에는 다만 성적 대상의 선호에 있어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에코페미니스트들은 동성 연애자들이 시민권 취득이나 직업 선택에 있어 조금이라도 이성 연애자보다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몇몇 생태 페미니스들은 sex의 테두리를 훨씬 더 넓게 잡는다. 즉 성기의 결합을 통한 성 행위 말고도 얼마든지 성적 만족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가령 사정 행위에 못지않게 감정을 통한 애정의 표현을 높이 여긴다. 그리하여 몇몇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사정을 하지 않고서도 성적 만족을 느끼는 중국의 제의적 성 행위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에코페미니즘은 평화 운동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인류 평화를 해치는 모든 형태의 행위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한다. 평화 운동은 곧 반전 운동이나 반핵 운동으로 이어진다. 군국주의야말로 세계 평화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이념이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국군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미사일을 남성과 같은 차원에서 본다. 미사일은 남성 과학자들이 만들어 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모습부터가 남성의 성기를 닮고 있는 까닭이다. 전쟁은 인류는 물론이고 자연 생태계까지도 크나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위험을 미리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군비를 축소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에서 녹색당을 이끈 페트라 켈리의 말대로 “군비 축소, 평화, 사회 정의, 지구 보호, 그리고 기본적인 인간 욕구와 인권은 한 문제로서 서로 구분할 수 없다” (Kelly x).

 

여기에서 켈리가 직접 언급하고 있지만 반핵 운동은 넓은 의미에서 군비 축소의 테두리에 들어간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琦) 원자 폭탄 투하에서도 잘 보여지듯이 핵 무기는 인간과 자연에 그야말로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동서 냉전 체제에서 미국과 소련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들도 앞을 다투어 전술 또는 전략적으로 핵 무기를 개발하였다. 냉전 체제가 허물어진 지금에도 핵 무기는 여전히 큰 과제로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괴와 살상보다는 인류의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세계 이곳저곳에 건설한 핵 발전소도 심각한 문제를 불러 일으키기는 마찬가지이다. 1986년 옛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고는 아직도 뭇사람들의 기억 속에 악몽으로 남아 있다. 이 사고에서 생겨난 방사능 낙진은 우크라이나 북부 지방은 말할 것도 없고 동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과 스칸디나비아 지방을 오염시키는 참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역사상 최대 방사능 유출 사고로 일컫는 이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직접 · 간접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이 보여 준 반핵 운동은 영국 그린햄 공유지 시위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국에 핵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나토군에 맞서 여성들이 몇 년에 걸쳐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이 시위는 인도의 칩코 운동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중심으로 한 소극적인 것이었지만 그 효과는 무척 컸다. 이밖에도 미국 네바다주의 웨스턴 쇼쇼운 인디언 여성들이 벌인 핵 실험 반대 운동, 우라니움 광산 개발을 막으려는 또다른 원주민 여성들의 시위, 소련 크림 지방의 여성들의 핵 발전소 건설 반대 운동, 남 태평양의 여성들의 프랑스의 핵 실험에 반대 운동도 여성들이 얼마나 반핵 운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로 손꼽힌다. 이러한 예는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다.

 

그런데 핵 확산은 흔히 소수 민족의 억압이나 착취와 맞물려 있다. 그 동안 정책 입안자들은 소수 민족이나 토착 원주민이 살고 있는 장소에 핵 시설을 건설한 것으로 드러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련 사람들은 저 악명높은 체르노빌 핵 발전소를 모슬럼 사원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웠다. 미국 위싱턴 근교에 있는  한 핵 발전소는 인디언 원주민의 공동묘지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 사람들은 단군성이 위치해 있던 자리에 평양 역사(驛舍)를 지어 민족 정기를 말살하려고 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타자와 관련하여 에코페미니즘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역시 남성까지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전통적인 페미니즘에서는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남성은 마땅히 타도하여야 할 ‘적’과 크게 다름없었다. 심지어는 페미니즘 이론에 관심을 가지는 남성에 대해서도 의혹을 눈길을 보내기 일쑤였다. 만약 남성들이 참으로 여성을 돕고 싶다면 페미니즘 이론에 끼여들 것이 아니라 집에서 가사를 돌보거나 아이들을 양육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론가마저 있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에서는 굳이 남성을 제외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남성을 ‘적’보다는 오히려 ‘동반자’로 본다. 자연을 이루고 있는 모든 개체가 그러하듯이 남성과 여성 가운데에서 어느 한쪽을 제외시킨다면 균형과 조화는 깨뜨려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궁극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성별에 따라 남성을 차별하는 것은 그 동안 남성이 저질러 온 잘못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과 마찬가지로 남성들도 가부장제의 희생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의 형제요 아버지요 연인이요 친구인 남성들이 반드시 여성의 적이 될 필요는 없다”(Plant 2)는 주디스 플랜트의 말은 큰 설득력을 갖는다.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비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동료 인간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차별한다는 것은 이치에 들어맞지 않는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도 있지만 집밖의 존재자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기에 앞서 집안의 존재자에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마이클 E. 지머먼은 “여성이건 남성이건 모든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아닌 존재자의 가치에 대한 존중을 발전시키는 필수적인 단계”라고 말한다 (Zimmerman 43).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와 균형은 뒷전으로 한 채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집안 식구들은 학대하면 이웃 사랑을 부르짖는 것처럼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여기에서 잠시 밸 플룸우드가 주창하는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의 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연속성과 차별성, 연관성과 타자성을 다함께 높이 여기는 플룸우드는 남성이 문화와 가까운 반면 여성이 자연에 가깝다는 종래의 이원론적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에 따르면 남성이나 여성이나 자연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문화에 속해 있기는 다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정체성을 자연과 구별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자연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려고 한다. 플룸우드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종래의 두 입장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여 제3의 입장을 펼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무비판적으로 남성 중심의 문화에 참여하려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입장,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대지의 여신으로서의 여성성을 무조건 찬양하려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입장 모두를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 자연을 노예주로서 떠받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노예로서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남성을 노예주처럼 섬기지도 않을 뿐더러 노예처럼 그 위에 군림하지도 않는다. 플룸우드가 하필이면 왜 자신의 이론에 ‘비판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있는지 그 까닭을 알 만하다.

에코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요 균형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보면 결국은 동료 인간과 조화와 균형을 꾀하는 것이 곧 자연과 서로 친화를 맺는 첫걸음이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이 생태학과 서로 손을 잡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페트라 켈러의 말대로 이 두 이론이 함께 추구하는 것이 바로 ‘참으로 자유로운 사회’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중계할 수 있는 생태학적 원칙과 페미니즘 원칙에 근거하여 참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공동 목표이다.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억압받고 차별받을 때 모든 이데올로기와 지역적 벽을 뛰어넘어 유대를 나누고 유대를 주는 것 또한 우리가 추구하는 공동 목표이다. 이해할 수 있는 인간 차원에서 삶을 누리고 생산에 참여하고 노동하는 것이 우리의 또 다른 공동 목표이다. (Keller x)



III


에코페미니즘은 타자성의 테두리를 크게 넓혔다는 점에서 그 업적을 높이 살 만하다. 여성의 벽을 뛰어넘어 그 관심을 자연으로 넓혔고, 더 나아가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억압받는 모든 사회 제도에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였다. 에코페미니즘은 이제 여성 운동이나 문학 비평의 좁은 테두리에 머물지 않고 사회 운동 쪽으로 그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 모색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골이 깊어진 정치적 갈등, 경제적 불평등, 인간 소외, 환경 파괴 등 후기 산업사회의 여러 사회 모순을 극복하는 데에 있어 아주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먼저 심층 생태학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다. 심층 생태학이 본질적으로 남성중심주의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실제로 그 비판은 여간 과장되어 있지 않다. 아르네 네스를 비롯한 이론가들이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심층 생태학은 남성중심주의적이라기보다는 인간중심주의적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옳을 것이다. 좀더 꼼꼼이 따져 보면 에코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이론은 거의 다 심층 생태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이 퍼붓는 비판의 화살은 ‘지구 우선!’ 운동에는 맞을른지 몰라도 심층 생태학에는 그렇게 썩 잘 들어맞지 않는다. 물론 ‘지구 우선!’ 운동은 심층 생태학의 영향을 받고 생겨난 것이기는 하지만 이 두 운동을 같은 차원에서 보려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것은 자크 데리다의 해체 철학이나 자크 라캉의 신프로이트 이론이 대서양을 건너가 미국에서 토착화되면서 본래의 의미가 굴절되고 변형된 것과 같다.

 

더구나 심층 생태학에 대한 비판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에코페미니즘은 여전히 남성에 대한 불신을 보인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생층 페미니스트들이 심층 생태학을 반대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개가 남성들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주창하는 이론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 뿐더러 자기 모순적이다. 심층 생태학자들이 주로 남성들인 것처럼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오직 여성만이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물론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전통 페미니스트들처럼 남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정도는 아직도 미미하다. 여전히 에코페미니스트들은 남성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떨구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와 자연에 대한 인간 지배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이 두 지배와 착취 사이에 상호 관련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두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할 위험성이 있다. 환경 파괴나 생태 위기는 어디까지나 남성중심주의보다는 인간중심주의에서 생겨난다. 남성이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듯이 여성도 얼마든지 자연과 환경을 파괴할 수 있다. 또한 여성도 얼마든지 인종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하면, 제국주의나 국군주의의 편을 들 수도 있다. 더구나 남성중심주의적이지 않을 뿐더러 사회 · 경제적으로도 평등하고 인종 차별이나 제국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 사회이면서도 얼마든지 인간중심적일 수 있다. 얼핏 이상주의적인 이러한 사회에서도 삶의 질을 높인다는 구실 아래 인간은 얼마든지 자연을 지배하거나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자연, 성별이나 계급, 나이나 능력,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는 사회란 다름아닌 유토피아의 세계이다. 에코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세계는 한 마디로 ‘에코토피아’, 곧 생태적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듯이 상대방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사회, 그것은 곧 에코토피아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를 이룩하려는 노력은 그 동안 인간이 잃어버렸던 낙원, 그 녹색의 낙원을 다시 꿈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앨래스데어 맥인타이어의 말대로 “훌륭한 인간은 우주의 시민이다. 그밖의 모든 집단, 도시, 왕국, 또는 제국과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McIntyre 168-70). 훌륭한 우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경쟁보다는 협력, 착취보다는 보존, 합리성보다는 직관, 이성보다는 감정을 더 높이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태 의식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자연 모두를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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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cofeminism and Ecocentric Wordview


Wook-Dong Kim


Currently one of the most recent literary theories and philosophies in Western intellectual life, ecofeminism embraces a worldview which is neither anthropocentric nor biocentric, but ecocentric. Critical both of deep ecology as expounded by Arne Naess and of Murray Bookchin's social ecology, ecofeminism has adopted an ecocentrism as its major guiding principle. Ecofeminism attempts to unite the demands of the women's movement with those of the ecological movement to envision a better world for both human beings and for nonhuman nature on this planet. It is based on the assumption that the domination between humans in subdominant or subordinate positions, particularly women, and the domination of nonhuman nature are closely related. This essay explores the way in which the ecofeminist analysis of the twin dominations of women and nature includes considerations of the domination of people of color, children, and the underclass. What makes ecofeminism one of the most promising liberation movements is that it includes in its analyses of women-nature connections the inextricable interconnection among all social systems of domination, for instance, racism, classicism, ageism, localism, enthnocentrism, imperialism, colonialism, as well as sexism and the rape of na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