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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의 신학동네> 1999/10/05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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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문영석(서강대학교 수도자 대학원 강사/환경 신학)


현대는 여러 면에서 문화 변혁의 근원적인 전환점에 서 있다. 또한 현대 문명에 관한 종합적 진단은 현대 문화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극한에 다다른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기술적 합리성과 생태적 합리성의 조화로운 결합이 보장되는 새로운 성격의 과학 기술 출현과 이 출현의 원동력이 되는 새로운 문화 출현의 태동을 보고 있다. 이 죽음의 문명은 제너(Zenner)가 말한 것처럼,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전제가 되는 유기적 시스템(system)을 강조하는 새로운 문명 사이의 전환점에 서 있다. 이러한 전환기에 나타나는 가부장제도(家父長制度, patriarchical system)의 쇠퇴는 가장 큰 문화 변혁의 한 조짐이다. 남성은 사회의 모든 조직을 장악하고 여성은 그에게 종속되어야 했던 남성 중심적 가부장 제도가 기왕의 사회 모든 분야에 침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힘의 실체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기본 생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이런 신성 불가침 제도의 붕괴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생태 운동과 여성 운동의 접목인 이코페미니즘(Ecofeminism)은 현재 가장 강력한 현대 문화 조류 중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으며, 미래 사회의 진화와 학문적 패러다임(paradigm)1)에서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주제를 2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페미니즘과 생태학의 접목인 이코페미니즘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2부에서는 이코페미니즘이 어떻게 신학과 조우하는지를 시도해 보겠다.

 

페미니즘(feminism)은 통상적으로 '여성학', '여권신장주의' 또는 '여성해방주의'로 번역될 수 있지만, 단순한 번역으로는 그 의미 전달이 충분하지 않다. 원래 이 말은 불어의 feminisme에서 유래된 말로 19세기에는 여성들의 좀더 나은 권리를 옹호하는 여권신장운동의 의미로 쓰여졌지만, 현대에 와서는 단순한 여권신장(女權伸張)이나 성별간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제도적 평등을 요구하는 정치적 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인간관을 요구하는 이론이나 운동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feminism이란 단어가 가지는 광범위한 의미 때문에 굳이 어색한 번역보다는 그냥 페미니즘이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이미 페미니즘은 단순히 차별 받는 여성의 영역만이 아니라 구조적인 억압에서 주변화되고 소외된 생태계, 어린이, 노약자 등을 위한 전반적인 해방운동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남성 우월주의는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지배의 형태이다. 인종 차별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 다른 모든 종류의 억압과 착취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또한 소수의 남성들이 나머지를 지배하는 남성 우월주의의 연장일 뿐이다."2) 그러나 남성 우월주의가 반드시 모든 남성에게 특권과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노동자 남성은 가정에서는 자신의 부인 위에 군림하겠지만, 사회에 나가서는 교육받고 상급자 위치에 있는 또 다른 여성에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 구도에서 남성들이 알량한 기득권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나 그 기득권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위계 질서의 꼭대기에 선 남성들만 독점할 뿐이다. "남자다워라", "남자는 울지 않는다" 이런 강한 남성성의 세뇌는 한마디로 신화이다.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남성들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키워지는 것이다. 한국에서 남성들은 오히려 여성들보다 더 자신의 존재 증명, 곧 사내다움을 증명하라는 압박 속에서 자란다. 이런 남성성의 신화는 한국처럼 가부장 제도와 그 이데올로기가 뿌리깊고 왜곡된 데서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며 이런 뒤틀린 통로를 통해서 한국의 남성들은 겉으로는 강한 체, 자신 있는 체 하지만 사실은 두렵고, 허약한 자아(自我)에 치어 몹시 의존적이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단순, 무식, 과격성"3)을 드러낸다.

 

성차별주의(sexism)는 인간 사회의 모든 왜곡된 인간관에서 유발된 차별주의, 곧 인종 차별주의(racism), 계급 차별주의(classism), 식민지주의(colonialism) 등과 내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성차별은 단순히 여성만을 소외시키고 그들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당사자인 남성에게도 비인간화된 삶으로 이끌어 통전적인 인간성의 상실을 가져오게 한다. 여성을 무시하고 핍박하는 것은 그러한 핍박과 억압으로 여성의 권리를 파괴한 바로 그 남성의 자기 상실과 자기 몰락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한 남성은 여성에게 억압자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적이 됨으로써 총체적으로 억압받는 위치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남성 우월주의에 기반한 성차별주의는 여성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인간의 총체적인 삶에 상처와 피해를 준다.4)

 

페미니즘은 '남성은 여성의 적'이라고 보는 분리주의적 여성 운동이나 단순히 '여성들만의 이익을 위한 운동'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단순한 남성 배척주의가 아니라 온전한 인간성 실현을 위해서 요구되는, 곧 모든 종류의 인간 억압으로부터 해방과 새로운 사회를 위한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이다. 이는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통해 새로운 자기 발견과 해방을 위한 노력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과 인간의 평등성과 존엄성을 믿는 모든 이의 운동이 된다는 점에서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참여할 수 있는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 페미니즘(Feminism)과 생태학(Ecology)의 조우(遭遇)


생태학적 페미니즘(Ecofeminism)은 생태학(Ecology)과 페미니즘(feminism)이 합성된 말이며, 이 용어를 1974년 프랑스의 작가인 프랑소와즈 도본느(Francoise d'Eaubonne)가 그의 저서 [페미니즘이냐 아니면 죽음이냐](Le feminisme ou la mort)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지구 안에 사는 인간의 운명이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하면서 여성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인류의 생존을 위한 생태적 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녀는 이 저서에서 자연 파괴와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주의적 사회 구조를 연결시켰으며, 이의 해결을 위한 유일한 대안은 남성주의적 억압과 지배 구조를 종식시킴으로써 여성이 가지는 잠재력이 생태계 위기와 혼란에서 인류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생태적 혁명(ecological revolution)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여성과 남성 사이의 새로운 성별 관계(new gender relationship)의 재구성을 이끌어 내었다.

 

이코페미니즘은 인간의 평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해방과 자연 해방을 동시에 추구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며, 인간이 인간을 서로 불신하는 가운데 무한 경쟁과 탐욕 속에서,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마저도 급속도로 황폐화된 이 죽음의 문명 속에서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인간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형성하기 위하여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으로 출현한 통전적 인간성 회복 운동이다.

 

사회의 각종 전문직과 환경 운동 단체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재능이 성차별(性差別)이라는 장벽 앞에서 좌절되었을 때 자유주의적 페미니즘(liberal feminism)에서 대안을 찾으려고 했으나, 곧 생태 페미니즘의 각종 서적 매체들과 조우하면서 곧 이런 억압적인 사회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60년대 말부터 서구 사회에 생태계 파괴의 심각성을 알리는 경종이 울리기 시작하면서, 1972년 노르웨이의 철학자 네스(Arne Naess)가 그의 저서 Inquiry에서 이제까지 인간 중심주의적 세계관에서 생태중심적(生態中心的) 세계관으로의 변환을 요청하였다. 그는 인간이 생태계 시스템(ecosystem) 안에서 특별히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타의 종(種)들과 똑같은 위치에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생태 철학(Ecophilosophy)적 사유(思惟)인 심층 생태학(Deep Ecology)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환경 파괴에 따른 철학적 물음과 새로운 해방의 형태로 제기된 급진적, 문화적 페미니스트들의 자연관과 세계관에 관한 물음들이 서로에게서 응답을 구하면서 결합하기 시작하였다.5) 이런 사상적 영향들은 녹색 운동에 종사하던 남성들과 여성들이 환경 운동의 이론적 대안을 이코페미니즘과 심층 생태학의 조우(遭遇)에서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역사적, 고고학적 탐사를 통해 가부장제 이전의 고대 신화와 종교에 있었던 여성적 신관의 발굴 또한 여성에 대한 사유에 많은 통찰을 안겨 주었다. 그러므로 이코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바로 여성의 몸(생물학적 성)에 대한 차별이고 자연성에 대한 무시이며, 현대 과학 기술 문명이 자연과 환경에 가해 왔던 폭력과 무시가 오래된 여성에 대한 폭력과 내적으로 연관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여성의 본질과 자연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주장은 '환경 운동'에 여성을 폭발적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코페미니즘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여성에 관한 이런 생물학적 속성 주장은 또 다른 이견과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왜냐하면 여성과 자연의 동일성 주장은 사실상 오랫동안 보수주의가 여성을 가정 또는 재생산 영역 또는 사적 영역으로 묶고 억압하는 데 사용한 ‘여성적 본성론’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이다.6) 따라서 일부에서 이런 여성들의 생물학적 속성 주장이 사실상 본질적으로 주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이 창조한 여성에 대한 이미지(image)를 그냥 받아들인 것이라는 비판과 반성이 여성학자들 일각에서 일기 시작하였다.

 

이코페미니즘에 관한 다양한 접근 시도는 그 나름대로 장점과 약점을 가질 수 있으며, 이코페미니즘은 현재 대략 두 가지의 방향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여성 혐오와 생태계 파괴가 서로 어떤 연관적 함수성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서구 문화에서 형성된 그 이념적 기반과 전제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적 태도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적 태도가 유사하다는 점에 착상하여 여기서 유발되는 억압과 착취를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형성 과정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억압적 지배 원리를 지양하고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자연 간의 새로운 관계 형성이라는 기반 위에 구축된 또 하나의 대안 철학이며 사회적 개념구도(social conceptual frameworks)로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둘째는 이코페미니즘은 전 지구의 사회적, 생태학적 위기가 누구에 의해서, 무엇을, 왜, 어디서, 어떻게 초래되는지를 분석한다. 이런 위기들은 독립적인 이슈가 아니라 상호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불균형한 신식민주의적 경제 구조와 무역, 신제국주의, 맹목적인 개발 정책, 대중 문화를 통해 전파되는 무한정한 소비문화에서 야기되는 불안정한 사회구도를 탐색한다. 그러므로 파괴를 생산으로 이해하고 생명의 재생산을 수동성으로 이해하는 가부장제의 정치적 범주들은 여성과 자연의 고유한 내재적 가치를 박탈하고 오직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만 취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코페미니즘은 이론이자 운동이며, 그 형성사가 아주 짧은 학문이다. 생태학과 페미니즘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이제 20여 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적 시도는 논리적 치밀성과 통합성보다는 분화성, 다양성, 과정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시도로써 발전해 나가고 있는 국제적 운동이다. 이는 학문적인 탐구와 비평뿐만 아니라 학회, 피정, 전례, 예술, 무용 그리고 정치적 기구들까지 포함하는 복합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다. 또한 생태 페미니즘은 생태 철학, 생태 영성, 생태 신학, 과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동물의 권리 운동, 사회-정치적 분석 및 정치적 활동도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전 방위적 활동으로써 여성과 생태계에 가해지는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고 있다.

 

녹색 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 운동이 일종의 시대적 유행병이라고 폄하한다. 그리고 이 운동에 참가하는 자들을 현대 산업 사회가 결코 회피할 수 없는 발전의 역동성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수 집단이라고 매도한다. 공해 문제는 인류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추구해 왔던 산업화의 결과이다. 산업화는 인류를 빈곤에서 구출해 내었으며 풍요한 복지 사회를 예고하는 위대한 약속을 해 왔다. 그리고 그 약속은 많은 경우 성취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빈곤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려고 하는 순간에 공해의 발생과 자원의 고갈 등으로 인류는 삶의 질 저하라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반평생을 고생해서 어느 정도 삶의 기반을 마련하고 이제 여유 있게 인생을 즐기려고 하는 순간 치명적인 병이 드는 경우와 같다. 현대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생명과 생활의 재생산 조건을 파괴시키고 생산 활동의 기반 그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한쪽에서는 공해를 유발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생산 활동을 지속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막대한 자원과 인력을 투입하여 그것을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코페미니스트들은 이 운동이 기존의 자본주의, 산업주의적 문명 모델과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끝없는 착취에서 자연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한없이 소외되고 주변인화되는 것으로부터 여성과 그 모든 것들을 해방시키자는 이 운동의 외침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T.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H. Kug and D. Tracy (eds.), Paradigm Changes in Theology, trans. M. Kohl, Edinburgh, T & T Clark Ltd., 1989 참조.

 

2) "Restockings Manifesto", in Clause III, Sisterhood is Powerful: Robin Morgan (ed.), An Anthology of Writings from the Women's Liberation Movement, New York, Random House, 1970, 534면.

 

3) 정유성, [에코페미니즘에서 말하는 남성학:가름과 나눔에서 나눔과 섬김으로], 6면.

 

4) 강남순, [현대 여성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4, 90면.

 

5) 하지만 양자는 환경 파괴의 원인에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Ecofeminism과 Deep Ecology의 공통점은 모두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가진 내적인 전환(inward transformation)을 추구한다는 점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내적인 전환이란 Deep Ecology에서 이야기하는 "타인과의 진정한 공동체(동일시), 더 나아가서 자연 세계와 공동체(동일시)를 이루는 차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차이점은 deep ecology에서는 환경 파괴의 원인이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세계관이므로 확장된 자기의 내적 전환을 통하여 생물 중심적 평등주의(biocentric egalitarianism)의 세계관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Ecofeminism에서는 환경 파괴의 근본적 원인이 남성주의적(androcentric) 세계관이라고 주장한다. 곧 Deep Ecology와 Ecofeminism 모두 원자론적 세계관, 이원론, 수직적인 위계주의, 합리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인 점은 동일하지만, Deep Ecology는 원자론, 수직적 위계주의, 이원론의 발달에서 남성 중심과 가부장제의 역할을 간과했다고 Michael Zimmerman은 비판한다:"Feminism, Deep Ecology and Environmental Ethics." Environmental Ethics 9 (Spring, 1987), 21-44면 참조.

 

6) 문순홍, [생태 위기와 녹색의 대안], 나라사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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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철의 신학동네> 1999/10/05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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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서는 전혀 인간과 닮으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을 구별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영(靈)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어떠한 완전성, 즉 어머니, 아버지, 배우자의 완전성을 반영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편, 370항). 

  지난 호에 언급한 이코페미니즘이 생태학과 여성학의 조우(遭遇)라면 이번 호에서는 이코페미니즘과 신학의 접목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보겠다. 1960년대 이후 전통 신학은 여러 가지 다양한 도전들을 받아 왔다. 해방 신학, 흑인 신학, 여성 신학, 과정 신학, 실존 신학, 문화 신학, 사신(死神) 신학, 정치 신학, 생태 신학 등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다양한 신학적 발제들은 모두 전통적인 신학의 방법론에 근본적인 질문들을 제기하면서 이 시대의 거대한 사회 문화적 변혁에 응답하려는 새로운 신학적 해설들의 시도였다. 현대의 그리스도교를 위협하는 여러 가지 도전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질문은 종교 자체의 생명력에 관한 문제이다. 개념적으로 세속화에 대해 말하건 현대주의적 영향에 대해서 말하건 간에, 역사적으로 이 시대만큼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소멸, 신의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서술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그러므로 오늘과 같은 문화적 위기의 시대에서 문명의 새로운 정신적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신학자들은 물려받은 전통들을 해체하고 새로운 개념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고 카우프만(Gordon Kaufman)1)은 강조한다. 

  1. 이코페미니즘과 신학의 조우(遭遇)

  1960년대 북미에서 일어난 두 가지 커다란 운동은 환경 운동과 페미니즘의 태동(胎動)이었으며 이 두 가지 운동이 서로 조우하여 연계되면서 1974년 생태 페미니즘(Ecofeminism)으로 확장 전개되었고 급기야 이런 사상은 신학과 만나면서 같은 해에 이코페미니즘과 신학을 잇는 첫 번째 책, [새 여성, 새 땅]이 로즈마리 래드포드 류터(Rosemary Radford Ruether)에 의해서 발간되었다. 


  류터의 생태 여성 신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가이아와 신](Gaia and God)은 종교에 관한 역사적 분석 이론이자 신학에 관한 생태론적 재해석이다. 계약, 성사, 영성 그리고 정책 등의 실천과 개념 유형을 이용하면서 현대 문화 안에서 종교적 전통의 갱신을 추구한다. 류터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서구 문화 유산인 고대 근동, 히브리즘, 그리고 헬레니즘의 세계관과 여기서 피어난 창조 설화, 죄에 관한 개념들을 분석하면서 이에 대한 생태론적 치유를 다루고 있다. 그녀는 생태계의 위기가 일차적으로는 서구의 신학적 전통에 형성된 "존재의 계층적 사슬"(hierarchical chain of being), "지배의 사슬"(chain of command)2)과 같은 개념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구별 그리고 하위 계층은 상위 계층에게 지배당해야 한다는 이원적이며 대립적인 인간 이해와 세계 이해에서 유발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에서 형성된 여성과 남성, 지배자와 피지배자와 같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 구도들과 관념들이 결국은 인간도 한 구성원인 생태 공동체(biotic community)까지도 파괴로 이끌어 왔다고 주장한다.3) 이와 같은 대립 구도적 시각은 여성을 남성이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국한시키며, 나아가 여성`=`자연이라는 등식이 사용되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이원론적 개념의 모형은 근대 서구 사회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기타의 세계에도 매우 큰 영향을 주어 왔다. 이처럼 여성, 자연, 종족, 계급과 같은 네 가지 억압 구조의 연쇄 고리를 실라 콜린즈(Sheila D. Collins)는 "연쇄 기둥"(interlocking pillar)4)이라고 하는 반면, 류터는 이를 "상호 구조성"(interstructuring)5)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처럼 불연속적으로 이원화된 세계관에서는 두 개의 쌍 중 한 쪽은 목적을 위한 수단의 영역으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분은 존재물에 내재된 고유한 가치를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유용성을 중심으로 한 것이며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상호 협동적 행위보다 경쟁적 행위가 권장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속 구도적 개념의 고리를 끊어 버리지 않고서는 온전한 세상의 구원과 치유를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코페미니즘이란 기존의 철학, 과학, 종교 안에서 형성되어 온 문화 비판을 토대로 형성된 운동이자 이론이다. 이들은 서구 유럽의 문화적 유산이 여성과 자연에 대해 이원론적 억압이라는 사고를 만들어 낸 유다-그리스도교의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분석을 시도한다. 비옥한 옥토가 아닌 황량한 사막이라는 자연 환경에서 태동된 유다교는 따라서 자연계를 지배하는 초월적 신의 힘을 더욱더 요청하게 되었고 이런 초월적 신관에 의지한 인간 이해로 후기 그리스도교는 인간 중심주의적 문화와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상이 바로 환경 파괴를 낳은 현대 서구 기계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다.6) 이들의 주장은 수직적, 군주적, 가부장적인 신관(神觀)이 자연의 신성함과 그리고 그 신성한 영역으로부터 지구와 여성을 소외시켜 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패권적, 권위적인 그리스도교의 기존의 신학적 개념들을 좀더 건설적, 상황적, 페미니스트적 그리고 상호 유기적 신학의 새로운 모형을 창출하려고 노력한다.


  최근의 생태 여성 신학은 서구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신우주론(new cosmology)을 기반으로 한다. 우주론은 류터의 말대로 과학적, 사회-윤리적, 그리고 신학과 영성에 기반을 둔 세계관의 합성물이며 그 동안 그리스도교가 구원의 역사에서 지구의 역사를 배제시킴으로써 생태계의 파괴를 촉발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코페미니즘과 새로운 우주론의 결합은 기왕의 인간 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종교적 전통과 그에 따른 세속적 가치와 의미 등에 근원적인 비판을 감행한다. 그러므로 현대 우주 과학은 그 동안 제대로 기능을 못해 온 우주론을 개선하여 새로운 우주론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전의 기계적 비활성적 우주론에서 유기적이고 살아 있는 우주론으로 역사적 전환을 새롭게 시도하고 있다.


  생태 여성 신학자들 중에서도 류터는 신과학(新科學, new science)과 우주론의 유기적인 관점(Gaian view)에 입각한 생태 여성주의적 신우주론(神宇宙論 theocosmology)을 주장하는 반면, 맥페이그(McFague)는 "하느님의 몸으로서 세상"(the world as the body of God)이라는 은유적 신학(metaphoric theology)을 통해서 신학과 생태학이 조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니스 피터스(Denise Peeters)는 류터의 노선을 따라, 가이아 이론(Gaia theory)이야말로 생태계의 치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사상을 위해서도 최선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학의 패러다임이 이미 시대 착오적이며 따라서 새로운 신학은 새로운 환경 윤리와 함께 만물을 유지시키고 생산하는 "가이아와 함께 가이아 안에서 역동적 힘의 신비"(the mystery of power-within and with power-with Gaia)로서 성령의 재발견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태 여성 신학은 신과학에 의존하고 있는 우주론이 기존 신학의 본질적 구성 요소들에 대해 비판을 감행하면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환경은 사회이며, 사회는 생태계를, 생태계는 생물권을, 생물권은 전 우주를 그 환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2. 생태 여성 신학이 기존의 문화 전통과 신학에 던지는 물음들

  예수님께서 여성 해방주의자냐 아니냐는 신학자들간에 논란이 많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맨 먼저 여자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이 생태 여성 신학자들에게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여자의 말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법정에서 증인도 될 수 없었던 사회에서 여자에게 맨 먼저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대단히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예수님의 언행이 당시의 화석처럼 굳어 버린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충격이 아닌 것이 없지만, 유다인인 예수님과 이방인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요한 4,4-42), 그것도 공공 장소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의 기존 가치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가 10,38-42)에서도 여자가 토라를 배우는 일이 전혀 허락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성의 역할을 부엌일에만 제한하지 않으시고 당시의 남자들같이 영적이고 지적인 탐구를 좋아하는 마리아를 "참 좋은 몫을 택하였다." 하고 칭찬하신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예수님의 반 성별주의적 태도가 그의 후대 제자들에게 잘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교회 안에서 여자들에게 어떤 공식적 직위도 마련되지 못했고 사도 바오로는 아예 여자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충고하였다(1고린 11,3.7.9). 스위들러(Leonard Swidler)는 이 점에 대해 이렇게 충고한다.

"이러한 모든 증거들로 미루어 예수님께서 뿌리깊은 남성 주도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존엄과 평등을 강력하게 증진시키고자 하신 것은 명백하다. 예수님께서는 여성 해방주의자이셨다. 그것도 아주 급진적인 여성 해방주의자이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이러한 그리스도를 닮을 수는 없을까?"7) 

  이제까지의 서구 전통 신학은 인간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고, 그 인간은 바로 남성과 동일시 되어 왔으며 그 남성은 또한 서양의 백인을 의미했다. 이런 관점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을 "몸집과 키가 크고 늙고, 회색 빛 수염이 나고, 파아란 눈을 가진 백인 남성"8)으로 묘사해 왔다. 이런 '백인 남성 신학'(White Male Theology)은 따라서 여성의 경험과 관점을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백인이 아닌 타민족의 경험과 관점도 지나쳐 버렸다는 점이다. 이처럼 왜곡된 신 이해와 결별하고 이제는 지배와 종속에 기반을 둔 '종속의 신학'(theology of subordination)이 아니라, 원래 성서에서 의미하는 인간과 인간의 동등한 관계뿐만 아니라 자연에까지도 그 동등의 개념이 확대된 '동등의 신학'(theology of equivalence)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의 남성적, 가부장적, 제국주의적, 승리주의적인 신학적 메타포(meta-phor)들이 오늘날과 같은 평등적이며 친생태적 사회에 조화를 이룰 수 없음은 명백하다. 여성 신학은 미래 신학계의 발전에 가장 의미심장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기에 존 컵(John B. Cobb Jr.)9)은 여성 신학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미래를 위하여 현대의 가장 중요한 소리이며, 만일 기성 전통 교회가 여성 신학이 주는 이런 새로운 계시와 지혜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교회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생태 여성 신학은 창조론, 계시론, 인류학, 종말론, 죄에 대한 기존의 개념, 구원론, 성서의 위치와 권위뿐만 아니라 신학적 방법론, 하느님에 관한 교의,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까지도 신학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논의하는 신학이다. 이러한 생태 여성 신학은 기존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기존의 서구 전통에 근거한 교의 신학에 대한 생태 여성 신학의 재구성 시도는 실로 거대한 신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성 신학의 특성은 문화 신학적 관점과도 맞닿아 있다. 곧 신학이 인간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또한 더 나아가서 신학뿐 아니라 신의 계시는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진 개념과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석학적으로 말하면, 계시와 신학은 상호간에 서로 얽혀 있어서 더 이상 그 둘을 따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이른바 가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신학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10) 문화란 삶 전반에 걸친 인간의 행위다. 삶의 신학으로서 문화 신학은 초시간적이거나 초공간적이지 않고 실존적이며 그러기에 역사적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흐름이 갖는 특수한 맥락 안에서 이해된다. 문화 신학의 이런 특징은 실존적이며 역사적인 삶이 전제되지 않아도 이야기될 수 있는 보편적 교리 및 교의 신학과는 이런 점에서 분리된다. 교의 신학은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진리의 보편적 규범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교의 신학 역시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문화 신학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삶의 문화적 지평을 떠나서는 어떤 신학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성차별적 문화권 안에서 행하여진 성서 해석은 그 해석자의 전제, 지적인 개념들, 정치 또는 개인적 편견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여성 신학이 발굴해 내었다는 점이다. 남성 우위적 관점은 신성 불가침의 제도처럼 오랜 역사에서 인간의 의식 안에 깊게 새겨져 왔다. 이처럼 남성 중심적 문화의 관점은 신학이나 역사의 모든 작업을 은연중 결정해 왔으며, 그 결과 그런 작업들을 '남성의 이야기'(his-story)라는 뜻의 역사(history)라고 규정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만약 여성이 그들의 뿌리나 전통을 접하고 싶다면 이러한 남성위주적 관점에서 써 온 역사를 다시 써야 하며, 신학은 그때야 비로소 'his-story'뿐만 아니라 동시에 'her-story'로서 온전한 모습을 갖출 수 있다는 점이다.11) 생태 여성 신학은 주님의 수염을 깎고 치마나 입혀 드리려고 하는 의상 신학이 아니다. 종교의 근본 기능이 인간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 주는 것이라 한다면 현대 신학 또한 새로운 지평 확대를 통해 가부장적 문화 전통 안에서 그 동안 하느님의 부성적 모습만이 일방적으로 강조되고 모성적 모습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버린 하느님의 온전한 참 모습을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태 여성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과 전통이 여성의 소외와 억압을 합리화하고 강화해 왔음을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기존의 신학, 상징,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갱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생태 여성 신학은 이런 갱신을 통해서 종교 안의 감추인 거대한 힘과 그리고 기존의 종교적 전통들이 주는 감추어진 가정들 안에 놓인 많은 위험 요소들을 발굴해 내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1) "Nuclear Eschatology and the Study of Religion",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51, 1983년, 13면.
2) "Toward an Ecological-Feminist Theology of Nature", Readings in Ecology and Feminist Theology, Kansas City, Sheed and Ward, 1995년.
3) Gaia and God: An Ecofeminist Theology of Earth Healing, San Francisco, Harper, 1992년, 2면.
4) A Different Heaven and Earth:A Feminist Perspective on Religion, Vally Forge, Judson Press, 1974년, 161면.
5) New Woman/New Earth:Sexist Ideologies and Human Liberation, New York, Seabury, 1975년.
6)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t of Our Ecological Crisis", Ian Barbour ed., Western Man and Environmental Ethics, Reading, Mass.:Addison-Welsley Publishing Co., 1973년, 25면.
7) 강남순. [현대 여성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4년, 150면에서 재인용.
8) Alice Walker, The Color Purple,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82년, 178면.
9) "Roundtable Discussion:The Influence of Feminist Theory on My Theological Work" Journal of Feminist Studies in Religion 7(1991년 봄), 95-126면 참조.
10) 강남순. 앞의 책, 107면.
11) 위의 책, 107-108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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