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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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지는 큰 나무
1
초부목동(樵夫牧童)의 발자취는 이르지도 못하는 깊은 산골에 큰 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뿌리는 만세반석(萬歲盤石)의 가슴을 뚫고 들어가 꽉 박혀 땅 속의 깊은 정기(精氣) 빨아 올리고 키는 삼백 척이 넘어 검푸른 얼굴을 구름 위에 내밀고, 하늘의 영원한 바람을 받아 마셨다.
굵은 가지는 사방으로 퍼져 푸는 차일 구름같이 벌리고, 우뚝하고 버텨서는 몸집은 틀지고도 억세어 마흔 사내가 들러서도 헤아릴 수 없었다.
나이 몇 살인지 일러줄 사람도 없고, 온몸에는 춘풍추우에 찢기고 상한 자취에 산 역사의 기록이 가득하였는데, 퍼렇게 이끼조차 성하여 한층 더 거룩한 빛을 더하고 있었다.
2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그 깊은 산골에, 낮이면 구름을 바라고, 밤이면 별을 바라면서 그는말없이 자라났다.
발 밑에는 토끼가 와서 춤을 추어도 좋고, 호랑이 승냥이가 와서 싸움을 해도 좋고, 독사가 와서 서리거나, 좀스러운 들쥐가 와서 장난을 하거나, 관계가 없었다.
가지 위에는 어떤 때는 꾀꼬리가 와서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어떤 때는 올빼미가 와서 졸기도 하고, 부엉이의 부처(부처)가 앉아 흉계를 꾸미고 있는 그 가지 꼭대기에는 또 검은 독수리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치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좋다는 듯이 그는 커다란 가슴을 벌리고 좋고 언짢고를 가리지 않고 서 있었다.
3
봄이 와서 새싹이 돋는 때면 검푸른 그 얼굴에도 온자(溫慈)의 빛이 넘쳐 자라나는 어린 나무들을 굽어보고 있는 모양이 뭇 아들을 쓰다듬고 노는 늙은 아버지인 듯하고,
여름이 와서 가지에 녹음이 퍼지는 때면 왕성한 원기에 창창한 나무바다에 우뚝 서는 그 모양이 마치 백전노장(百戰老將)이 전진(戰陳)에 앞서서 삼군을 호령하는 듯도 하였다.
가을이 오면 잎이 다 내려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거침없이 뵈는데 늘어선 송낙은 수염 같아 백발의 예언자가 장차 올 환란을 외치고 섰는 듯도 하고,
겨울이면 만목소조(滿目簫條)한 가지 가운데 풍설을 무릅쓰고 있는 모양이 어지러운 세상 풍파 다 겪고 난 성자(聖者)가 거룩하게 파리한 손을 들어 믿음을 가르치고 섰는 듯도 하였다.
4
그렇듯 그는 서 있어 눈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을 풍편에 그 소식을 들을망정 눈으로 가보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 그 머리 위에 뜨는 해 지는 달을 맞고 보내면서, 천명을 기다리는 철인(哲人)같이 한 해 또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불평도 없고 불만도 없고 급해도 않고 지루해도 않고, 남이 본다면 한없이 강한 듯하면서, 자기로선 아무 자랑도 없으면서, 무엇을 인해 사는 것도 없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도 없고,그저 사는 대로 살고, 자라는 대로 자라 하늘을 우러르고 서 있었다.
그러는 그의 위에 한 때가 왔다.
5
푸른 물결 높은 녹음의 바다 위에 여름도 다 지나가고 가을이 장차 깊어가려는 하룻날, 온종일의 격전을 이기고 돌아가는 개선장군같이 넘어가는 햇빛에 그가 온몸에 영광을 입고 서는 저녁, 어둠의 장막이 채 내리기 전 일진광풍(一陣狂風)이 그 골짜기를 엄습하였다.
평화의 마을에는 갑자기 수심의 빛이 돌고 노장부(老丈夫)의 얼굴에는 새로이 긴장의 기색이 나타났다.
바람은 구름을 부르고 구름은 비를 몰고, 지평선에서 희미하게 번쩍이던 번개는 어느덧 동구(洞口)에 들어서, 비는 총알처럼 퍼붓고 바위 사이에 고함치는 시냇물 소리는 은은히 들리는 우레 소리에 응하여 온 골 안에 그대로 포화(포화)를 서로 사귀는 전장인 듯하여졌다.
6
캄캄한 어둠 가운데 폭격을 받는 어린 나무 젊은 가지는 정신을 못 차리어 눴다 일고 머루넉지 다래넝쿨 얼크러져 있는 것들은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미쳐 돌아가는데 노장부(老丈夫)는 여전히 서 있어서 무엇을 미리 느껴 안 듯하였다.
악전고투하여 온 그 생애에, 믿어오고 견디어오고 순종해온 그의 생애에 어떤 운명의 시간이 옴을 느껴 얻은 듯하였다.
입을 다물고 그는 장차 오는 운명을 기다리는 듯하였다.
7
밤이 갈수록 놀은 더 일고 함락하려는 외로운 성을 총돌격을 하는 군대처럼 폭풍우는 노목(老木)이 서 있는 골짜기 복판을 향하여 비바람을 묶어 박았다.
바람은 더욱 사납고 뇌성벽력은 더욱 노하고 인간에서라면 닭이 거의 울게 되는 때에 마지막 순간은 점점 가까워 무슨 일이 나고야 말 듯한 절박감이 골 안을 꽉 눌렀다.
노장부는 전신을 떨고 부르짖음을 발하였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드디어 임하는 큰 사명의 계시를 받으려는 순간의 긴장에서 나오는 진동이요 부르짖음이었다.
그 소리라야 무서움도 아니요, 노함도 아니요, 분도 아니요, 원망도 아니다. 슬픈 노래라 할 수도 없고, 기쁜 외침이라 할 수도 없고, 고민의 소린 듯하면서도 아니요 싸움의 함성 같으면서도 아니다.
형용할 수 없는, 그대로 가만히 있어 듣고 있을 수 없는 소리가 바위 속에서 우러나오는 듯 지심(地心)에서 솟아 나오는 듯 터져 나오고 밀려나오는 그 소리였다.
우우, 으으, 와와, 으흐흐흐, 우허어, 어허어.
호소하는 듯, 탄원하는 듯, 절규하는 듯, 전신의 세포가 떠는 소리였다.
8
삼백 척의 커다란 몸뚱이가 부르르 떨고 보면 온 땅덩이가 따라서 떨고, 지구의 속 창자까지 따라나올 듯이 부르짖다가는 너무도 급한 듯이 가다가는 잠깐잠깐 끊이고 끊이고 하였다.
문득 앞을 캄캄케 하는 불덩이가 나무 꼭대기에 번쩍 했는가 하자 딱하는 소리가 귀청을 막았다. 우적우적 하는 몇 마디 소리의 뒤를 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온 골이 지진하듯이 뒤흔들리었다. 무서운 울림은 바람 소리 비소리를 엎누르고, 골짜기 어둠 속으로 달아내렸다.
다음 순간에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 저 건너편 하늘가에 번쩍이는 번갯불에 빗치어, 이때껏 하늘을 뚫을 듯이 서 있던 그 큰 몸집이 밑둥에서 꺽어져 전사영웅(戰死英雄)의 시체 같이 골짜기 바닥에 가로 엎어진 것이 보였다.
9
뇌우일과(雷雨一過)!
폭풍우는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슬쩍 지나가고 멀지 않아 동이 트려는 초가을 하늘에는 억 천년의 빛을 변함없이 발하는 별들이 반짝반짝 내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아침해가 올라와 밤 동안에 골짜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연히 빛나는 얼굴로 골 안을 들여다 볼 때 온 골 안의 초목은 죽은 아버지의 영구 앞에 엎대는 자녀들 모양으로 휘주근하여 고개를 숙이고 가지 끝에서 떨어지는 이슬만이 맑은 눈물같이 한 방울 두 방울 또 세 방울.
아 영웅은 넘어졌는가, 위대한 혼(魂)은 사라졌는가, 거룩한 빛은 꺼졌는가?
소쩍새는 그날 밤부터 슬픈 노래를 끊지 않았다.
10
이 골짜기에 된 일을 알 사람이 없었다. 그가 있었던 줄을 아지 못하는 세상이 그의 간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후부터 그 나무는 누워 썩기 시작하였다. 해가 갈수록 썩었다.
첨에는 껍질이, 담에는 겉살이, 그 담은 속살이, 나중에는 심(心)까지 썩었다.
다람쥐가 맘대로 그 몸 위에 기어 오르내리고, 좀이 맘대로 파먹고, 옛날에 하늘에 비하는 영웅인 듯하던 그는 말없이 드러누워 썩고 있었다.
아깝게 여길 사람도 없이 하늘만이 보이는 깊은 골짜기 바닥에 누워 아무도 모르게 그저 썩고 있었다.
11
썩어지는 그 큰 몸통 옆에 이름 모를 풀꽃이 몇 번을 피었다 지고, 찬 눈이 그 위에 몇 번을 쌓였다 녹은 후, 하룻날 공명심의 물결이 어지러이 뛰노는 이 세상 거친 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외로운 유자(遊子)하나가 그 골짜기에 찾아들었더라.
그때는 벌써 하늘을 덮던 그 가지들은 다 삭아 형적조차 없고 커다란 몸통만이 골짜기에 쌓인 낙엽을 자리 삼고 가로누워 반만큼 묻혀 있을 때였다.
자와 저울의 잘고 잔 눈 그림자에 못이 박힌 그의 눈은 이 자는 성자의 몸을 헤아려 보려다가 그 크고 밋밋함에 놀라 입을 벌렸다.
아, 이 아까운 천하의 양재(良材)를!
아직도 쓸 만하냐 하는 듯이 그는 짚었던 지팡이를 들어 말없이 누운 그 몸을 찔렀다. 지팡이는 아무 저항을 받음 없이 쑥쑥 들어갔다.
속까지 썩었구나.
겸손한 자,
맘이 가난한 자,
너는 완전히 죽었구나, 아낌없이 죽었구나.
빈 산에 썩는 거목(巨木)!
피곤한 지체를 내던지듯이 그 겸손한 가슴 위에 올려놓고 유자(遊子)의 생각은 끝이 없었다. 해는 점점 저물어 가는데.
이는 무엇 하러 세상에 났으며 무슨 의미로 비바람을 겪으며 자랐을까? 그리하여 또 비바람 밑에 썩을까?
이 좋은 재목은 왜 세상에 알려짐 없이 그저 자랐다가 속절없이 썩을까? 왜 운명은 그를 왕궁의 대들보로 아니 뽑고 성전(聖殿)의 기둥으로 아니 골랐을까? 모르게 났다 모르게 썩는 생애, 이는 무의미한 실패의 일생이 아닌가, 이것은 자연의 낭비가 아닌가, 하늘의 잊어버림이 아닐까?
12
그렇듯 중얼거리며 드는 눈앞에 단풍이 물든 잎새 하나가 가비어이 떨어져, 날 보라는 듯이 내려앉는 곳을 보면, 온 골 바닥은 떨어진 잎 삭아진 줄기가 걷어 가는 나무꾼 하나 없어, 떨어진 채 쌓이고 또 쌓이고 썩고 또 썩어 발목이 푹푹 빠져든다.
얼마나 많은 나무가 이전엔 나서 자라서 썩었으며, 썩고는 또 났던가? 또 얼마나 많은 나무가 이제도 나서는 썩을 것인가?
생명의 동산은 썩음의 동산인가?
역사의 들판을 씨알의 시체로 깔린 들인가?
쌓이고 쌓여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그 밑으로는 뿌리와 뿌리를 한데로 연(蓮)하는 흐름이 예언자의 어머니의 기도 모양으로 소리도 잘 들을 수 없이 천만고(千萬古)의 비밀을 전하는 듯 수근거리며 흘러가니,
아 생명의 신비여!
썩음의 거룩함이여!
13
천래(天來)의 계시(啓示)를 가져오는 듯 봉우리로부터 휙 하고 불어 내려오는 일진청풍(一陣淸風)을 따라 어린 가지는 팔을 들어 저기를 보라 가리킨다. 그 가리키는 손을 따라 저 산(山) 밭 아래를 내려다보면 퍼지는 수풀의 바다에 생명의 물결은 일고 꺼지는 은근한 곡조를 아뢰고 있고, 자리하고 앉은 그 썩어지는 나무통 밑으로서 흐르기 시작한 시내는 무수한 곡절을 지으며 그 수풀 사이를 흘러 저 지평선 끝에 닿기까지 가는 곳마다 푸른 가지를 기르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흐름인가? 생명의 흐름인가? 역사의 큰길인가?
14
썩자!
동량(棟樑)의 재목(材木)으로 뽑혀 왕궁과 성전의 보짱이 되고 기둥 되기보다는 썩자!
거기서 간사하고 더러운 무리들의 눈꼴 틀리는 꼴을 보고 속을 썩이기보다는 이 시원한 생명의 전당에서 한가히 누워 썩는 것이 좋다.
거기서 겉에는 아름다운 단청(丹靑)을 칠하여도 속으로는 좀이 먹고 좀스러운 쥐무리의 밤낮으로 갉아내는 데 속 아픈 일을 당하다가 하룻밤 어리석은 아이들의 싸움 끝에 이는 불길에 타 연기로 사라지기보다는 이 골짜기에서 썩어져 저 어린것들을 살찌우자!
거름으로 되자!
생명의 바다로 돌아가자!
썩자, 동량의 재목아!
썩자, 위대한 혼아!
썩자, 가만히 누워 썩자, 풀 속에서 땅 밑에서 겸손하게 용감하게 썩자!
썩어 사라지자, 남 모르게 사라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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