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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퀘이커

친우들의 믿음과 실천 /미국 필라델피아 연회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3.

퀘이커 서울모임

http://www.quakerseoul.org/

 

 

친우들의 믿음과 실천

 

 

세계 친우회에 속한 아메리카 섹션의 미국 필라델피아 연회가 1997년에 발행한 Faith and Practice 가운데 "친우들의 믿음과 실천"을 옮긴 것입니다.

 

  1. 속의 빛(The Light Within)
2. 예배와 예배 모임(Worship and the Meeting for Worship)
3.
모임의 의사 결정(Decision-Making)
4.
친우들과 성서(Friends and the Bible)
5. 기도(Prayer)
6.
친우들과 성례전(Friends and the Sacraments)

 

 

1. 속의 빛(The Light Within)

 

속의 빛은 친우들에게 있어서 근본적이고도 직접적인 경험입니다. 그것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우리 각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며 우리를 신앙 공동체로서 불러모읍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하게도 신(the Divine)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이면서 아무런 매개 없는 경험입니다.


친우들은 우리의 신앙 -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 얻어 온 신앙 - 의 출처와 내적인 확실성을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여러 가지 다른 용어 혹은 어구들을 사용해왔습니다. 내면의 빛(the Inward Light), 길(the Way), 진리와 생명(the Truth and the Life),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신적인 원리(the Divine Principle), 속의 그리스도(the Christ Within), 씨(the Seed), 내적인 빛(the Inner Light) 등이 그러한 예들입니다. 조지 폭스(George Fox)는 그의 일기(Journal)에서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자신들의 구원을 알게 되는 저 내면의 빛, 영, 그리고 은총"과 "그들을 모든 진리에로 이끌어가려 했던 저 신적인 영"을 말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한 분, 한결같은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니, 그 분이 네 처지를 말해 줄 수 있다"(There is one, even Christ Jesus, that can speak to thy condition). 또한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것(that of God)에 응답하면서, 세상을 너머 기쁘게 걸어가도록" 친우들을 격려했습니다. 많은 친우들은 "하나님의 그것"을 속의 빛에 대한 또 하나의 이름으로 해석했습니다.


친우들에게 있어 속의 빛은 양심이나 도덕적인 능력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양심은 인간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교육과 문화적 환경에 의해 조건지워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을 도덕적 실천에 전혀 오류가 없는 길잡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빛(the Light)이 비치는 통로인 여러 능력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유의해야 합니다. 친우들에게는 양심의 인도의 진위를 검토해보기 위하여 클리어니스(clearness)를 구한다거나, 예배 모임에서의 직접적인 영적 친교(communion)를 통한다거나, 혹은 클리어니스 과정(clearness process)을 거쳐보는 일이 권유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검토하는 가운데 통찰력이 강화되고 맑아지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양심은 잘못된 생각들을 제거하게되고 보다 참되게 속의 빛에 순종하게 됩니다. 빛을 체험함으로써 양심이 변화하게 되면 양심은 보다 신뢰할 만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비록 그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권위들과는 반대되는 방향을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친우들은 밝아진 양심을 따르는 것이 행위의 실제적 결과와는 무관하게 영의 해방과 평화로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경험해왔습니다. 영적인 힘은 신의 뜻(the divine will)과 조화를 이루는 삶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조지 폭스는 자신이 어려웠을 때에 경험한 힘에 대하여, 그리고 힘과 빛(the Light)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나를 통하여(through) 솟아났습니다." 또한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빛에 귀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각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느낄 것입니다."


빛에 계속해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여러 선물에 대한 우리들의 감사가 늘어갑니다. 선물들 가운데는, 개인으로든 모임으로든, 불후의 가치들에 대한 인식, 생명의 환희, 신의 인도하심에 맞게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 등이 있습니다. 빛이 안내하는 가운데 월회는 자기 회원들의 열망과 판단을 사용하거나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은 모임으로 하여금 이기심이나 편견에서 벗어난 초연한 정신으로 결정하게 하고, 맡겨진 일에 임하도록 돕습니다. 평등, 간소함, 비폭력, 성실, 공동체 등과 같은 기본적인 퀘이커 증언들은 속의 빛에 의해 인도된 개인과 단체의 깊은 책임감으로부터 생겨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모든 사람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분리와 다름을 극복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공감하면서 그들에 대해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친우들은 더 넓고 뚜렷하게 빛을 인식하고 따를수록 인류는 더욱더 일치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조지 폭스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기다리십시오, 거기에 통일(unity)이 있습니다."

 

 

2. 예배와 예배 모임(Worship and the Meeting for Worship)

 

예배 모임은 친우회의 핵심(heart)입니다. 예배는 밝혀주고 능력을 주는 하나님의 현존 속에 우리를 함께 모아들이고, 새로워진 전망과 열심을 가지고서 나아가도록 합니다.

 

예배
"예배"에 해당하는 worship이라는 단어는 "가치로운 배"(worth-ship)라는 개념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느끼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궁극적인 가치로운 배(ultimate worthship)라는 그러한 느낌에 대한 우리의 표현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띌 수 있습니다. 예배는 혼자서 혹은 일행으로, 고요(silence) 속에서, 음악이나 혹은 말로, 침묵(stillness) 속에서나 혹은 춤으로, 언제나 가능합니다. 예배는 장소나 시간이나 형태에 결코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친우들이 예배할 때에, 우리는 우리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와서 생명과 우리 주변의 우주 만물을 주신 분인 하나님께로 뻗어 이릅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친교(communion)를 추구함이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우리들 자신 - 몸과 영혼 - 을 헌납하는 것(offering)입니다. 예배의 느낌(The sense of worship)은 예배 모임의 침묵 가운데서 우리가 느끼는 경외감(awe) 속에서, 혹은 자연과 자연의 힘에 우리가 깊이 연계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속에서 경험될 수 있습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존재의 궁극적 근원(ultimate source)으로 인정하는 표시로서 회개와 용서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의 평온함(serenity)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우리들 생활의 방향과 우리 자원들의 사용의 방향을 발견합니다. 인도하심(leadings)은 흔히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참조함으로써, 또한 내적인 빛(the Inner Light)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의해서 보다 더 분명해집니다. 예배로부터 위대한 두 계명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나옵니다 : "네 마음을 다하며 영혼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루가 10:27).


내면의 스승에게 주의 깊게 귀기울임으로써 신선한 열림들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랑, 통찰력, 그리고 상호의존의 유입 등이 그것입니다. 또한 참된 귀기울임은 예배하는 자로 하여금 고통과 근심의 근원이 될 것이 분명한 그런 인도하심을 포함하여, 새롭지만 때로는 성가신 것이 될 그런 인식들에도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마음의 온전함(wholeness of heart)을 가져옴으로써 힘겨운 과업들이 기쁨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통이나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마음이 상한 채 예배할 때조차도, 우리는 바로 이 예배 속에서 매일 우리가 부딪히게 되는 것들을 견뎌낼 수 있는 새로운 힘을 발견합니다.


예배의 경험은 매번 다릅니다. 예배가 영(the Spirit) 안에서의 기다림으로부터 무르익어 가는 동안, 영적인 교제를 준비하는 데 있어 정확한 방식(right way)이란 없으며, 따라야할 규정된 관습도 없습니다. 생기에 넘치는 예배는 어떤 특정한 관습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깊이 느껴진 갈망에 훨씬 더 의존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 7: 7).

 

 예배 모임

친우들은 매일의 기도, 명상, 그리고 특히 성서에 대한 공부와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대한 공부로써 예배를 준비한, 그런 마음과 지성으로 모임에 오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준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경이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농익게 하며, 그런 인식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을 얻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또한 일상적인 생활과 업무 속에서 사려 깊은 숙고와 내면의 빛에 귀기울임으로써 여러 가지 도움을 발견합니다.


친우들이 모임을 위하여 도착할 때, 그러한 준비들은 우리가 열중하고 있는 일과 사무들을 잠시 접어두도록 도움으로써 1660년에 알렉산더 파커(Alexander Parker)가 말한 방식으로 예배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


모임 장소에 맨 먼저 도착한 사람은 … 마음이 빛을 향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혼자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마치 주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이점에서 그대는 강합니다. 그 다음에 도착한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안으로 동일한 그 빛을 향하십시오. 그리고 영(the spirit) 안에서 기다리십시오; 나머지 사람이 다 들어오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인간의 모든 성정(性情)이 순전하게 가라앉고 고요해진 가운데 앉아서, 빛 안에서 기다리십시오. 영(the Spirit) 안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순전한 침묵에 이끌려진 사람은 말(words)로 주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보다 더 가까이 주님에게 다가갑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요 영으로 예배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임에서의 예배는 마음과 몸을 가라앉히고, 긴장과 매일의 근심들을 내려놓고, 함께 모여 있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느끼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영(the Spirit)에게 개방함으로써 시작합니다. 예배에는 명상, 기억나는 성서구절이나 다른 신앙 문헌에 관한 묵상, 고요한 기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 찬양, 사람의 행위들에 대한 숙고, 양심의 가책, 용서를 구함, 혹은 방향 탐색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공허할 때조차도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친우들은 경험해 왔습니다.


함께 예배함으로써 예배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강하게 하고, 예배 행위 자체를 농익게 합니다. 그러한 공동의 예배는, 개별적이지만 상호의존적인 그 구성원들이 서로 서로에게 또한 보다 거대한 전체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 놓인 곡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콘서트에서 자신들 각각의 재능들을 바칠 때에 생기는 빛나는 통일체요 개인의 성취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친우들은 때때로 바울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리스도가 그 머리가 되는 몸으로서의 예배 모임을 이야기합니다(고전 12:27). 각 구성원들의 능력과 참여는 예배 모임의 영적 생명을 유지하고 풍성하게 하는데 중요합니다.


영의 소생은 우리가 세상사로부터 돌아서서 내면의 평온함(inward serenity)을 발견할 때에 생깁니다. 친우들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 18:20)라는 예수의 약속의 확실성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강화된 하나님의 현존의 느낌에 대한 우리의 희망들을 감화는 물론 고요 가운데 전달된 그룹 예배의 누적적인 힘을 통하여 실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oneness)요 또 서로 서로도 하나라는 상당히 깊고도 분명한 느낌을 경험할 때에 우리는 "한데 모아진" 혹은 "품에 안긴" 예배 모임이라 말합니다.

 

교제와 전달(communion and communication)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는 예배 모임의 본질적인 생명을 이룹니다. 예배 모임의 살아 있는 침묵 속으로 함께 나누려는 것이 아닌, 순전히 개인적인 인도하심과 신선한 통찰력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 그것들은 주로 듣기 위한 모임을 위해 의도된 것들입니다.


인도하심이 함께 나누어져야할 때가 되면 예배자는 감화(vocal ministry)에 대한 저항하기 어려운 내면의 요구를 느낍니다. "퀘이커"라는 바로 그 이름은 영(the Spirit)의 권능 하에 증언하던 초기 친우들의 분명한 떨림에서 유래한 전승에 의한 것입니다. 감화가 비록 그러한 외양을 동반하지 않을지라도 사람에 따라서는 여전히 내면의 떨림을 느낍니다. 감화는 기도, 하나님 찬양, 노래, 가르침, 증거, 혹은 나눔과 같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들은 단일한, 생명의 주제(a single, vital theme)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흔히 외관상으로 무관해 보이는 인도하심들도 나중에서야 그 저변에 어떤 통일성(unity)이 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감화와 기도는 인지되지 않았거나 발설되지 않은, 다른 구도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한 응답이 되기도 합니다.


말하라는 영의 (the Spirit) 부르심을 누군가가 받아들여 감화를 하게 되면, 동료 예배자들은 개방된 마음과 지성으로 거기에 귀기울이도록 마찬가지로 부름을 받습니다. 자신 없어 하고 여린 영들이 그들 안에 어렵사리 생성되려고 하는 메시지를, 비록 앞뒤가 맞지 않더라도, 그것을 말할 수 있으려면 모임 공동체의 애정 어린 격려를 느껴야 합니다. 생각을 오래 발전시켜왔고 또한 배움과 경험이 심오한 친우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면의 스승의 격려를 끈기 있게 기다릴 때에 가장 훌륭하게 모임에 이바지합니다. 감화에 이어 또 다른 감화를 하고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은 먼저 감화된 내용에 내면적으로 열중하고 반응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시간적 여지를 주어야 합니다.


친우들은 말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기로 미리 결정함으로써, 또는 고요와 전해진 말씀 사이에 어떤 균형을 주기 위해 이야기해야할 의무감을 느낌으로써 부름의 길에 방해물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설사 한 마디도 나오지 않더라도 예배 모임은 매우 심오하게 자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Hindrances to Worship)

영적인 기회들은 모이는 시간에 유의하고 또 이미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을 고려하는 일 등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책임도 수반한다는 것을,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논쟁이나 강의 혹은 토론하는 태도로 하는 말은 예배 모임과 모임 공동체의 생명을 파괴하게 됩니다. 앞서 감화한 것에 대해 대답을 한다거나 반박하는 것도 좀처럼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강렬하게 뒷받침되는 주장들을 말하고자 마음이 움직인 친우들은 자신들이 통찰한 것들을 간단하고도 섬세하게 말하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 동안에 알리거나 공유할 자료를 가져온 사람도 마찬가지로 섬세해야합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책을 읽는다거나 혹은 무심하게 그냥 앉아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동료 예배자들로부터 그리고 스며 배이듯 도달하는 영(the Spirit)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예배 모임 중에 예배를 방해하는 일들이 발생하면, 예배와 봉사(Worship and Ministry) 위원이나 혹은 다른 적절한 사람들이 재빨리 그러나 사랑으로 권고해야 합니다.


 

마무리(In Closing)
친우들은 조용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가운데 예배하기 위해서 모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돌봄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우리의 공통된 열망으로부터, 영(the Spirit)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고, 우리의 결점과 용서의 실재를 뚜렷이 느끼며, 우리의 고뇌, 신앙, 찬양, 환희,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이야기하기 위해 함께 나옵니다. 예배 모임이 끝나면 우리는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우리의 열의에 감사하는 표시로서 서로 간에 악수를 나누고, 하나님의 은총과 또한 사랑의 권능과 실재에 대한 새로워진 확신을 가지고서 나갑니다.

 

3. 모임의 의사 결정(Decision-Making)

 

함께 드리는 예배 모임의 전제들은 맨 초창기부터 사무 모임(the meeting for business)에서의 의사 결정 방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두 모임에는, 인도하심(the Guide)에 대한 신앙이 있습니다. 새로운 나타남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항상 개방되어 있는 끊임없는 계시에 대한 신앙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서로 다른 것들을 돌파해 나가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있습니다. 그 존경과 애정은 또한, 인내와 개방성으로, 그 모임이 보다 분명해지기를 기대하고 모임 앞에 놓인 문제들의 해결을 기대하는 그런 신앙에 불이 붙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 출처 미상

 

신앙에서 사무로(From Faith Into Business)
친우들의 의사 결정은 종교적 공동체의 영적인 하나됨(spiritual oneness) 속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치된 결정에 이른다는 더 높은 목표(goal)를 얻기 위한 다수결 원리를 거부합니다.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친우들이 전개해온 특유한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사 결정 진행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참여가 장려된다는 의미에서 민주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참여자들에게는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자아(the self)를 초월하여 인도하심(the Guide)이 자신들을 이끌도록 하는 것이 요청됩니다.


이러한 의사 결정 과정이 부주의하게 사용되면, 질서에 관한 형식적인 규칙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그것을 오용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잘 주의하기만 하면 대단히 만족스런 것이며 영(the Spirit)과 조화를 이루는 실제적인 결정들(practical decisions)을 만들어냅니다.


선택하는 행위는, 그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가치관과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성실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불가피하게 종교적입니다. 그러므로 친우들은 자신들을 인도하는 것의 궁극적인 출처를 식별하고, 항상 자아 너머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의지가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도록 하는 등등에 있어 종교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의사 결정의 종교적 근거(The Religious Basis of Our Decision-Making)
사무 모임은 형식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무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면서 영(the Spirit)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개방적인 가운데 수행되는 예배 모임입니다. 우리의 종교 공동체가 튼튼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우리의 영적 일치를 유지하며 영(the Spirit)과 조화롭게 사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신념들은 우리 사무 모임에서의 마음가짐과 실천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외적인 문제들로 씨름할 때에, 내면의 빛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과 창조적인 응답을 제시해 줍니다. 온갖 문제들, 심지어 세속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도 내면의 빛의 현존은 진리의 새로운 계시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보다 더 분명한 이해를 약속해 줍니다.


진리에 대한 새로운 열림은 언제 어떤 근원으로부터도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친우들은 진리를 표현하려는 그러한 온갖 노력들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그러한 노력들을 축적된 경험들 즉,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그리고 성서와 그 밖의 다른 곳에 들어 있는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길잡이들과 대비시켜 테스트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텍스트의 글자에 의존하기보다는 조지 폭스가 "성서를 성서 되게 한 영 안에서" 성서를 읽으라고 우리에게 요구한 것처럼 읽으려고 마음을 씁니다.


 

친우들의 의사 결정의 목표(The Goal of Friends' Decision-making)
친우들의 의사 결정의 목표는 영의 인도를 받은 모임의 의견을 얻자는 것입니다. 영의 인도를 받은 모임은 의견이란 바꿔 말하면, 생각 중에 있는 주제에 관하여 분명한 것을 찾으려는 탐색의 한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의견의 차이가 크다하더라도 영적인 일치가 있으면 그 목표는 달성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탐색은 전원합의(unanimity)가 아닌, 일치(unity)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리 탐색이 공유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귀기울임이 신실할 때에; 우리의 의지들이 그리스도의 현존 속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그리고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계속 유지될 때에, 우리는 우리자신이 일치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치된 모임은 지성으로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견상의 차이들을 초월하는 이러한 일치는 하느님의 능력 주시는 사랑으로부터 솟아 나온다는 것과 그러한 사랑의 인도를 신뢰하여 일치의 정신으로 함께 한 모임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신의 탐색에서 일치를 누릴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모임은 의견의 차이가 크다할지라도 그것을 감싸안을 수 있는 살아있는 영적 실재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상충되는 경향들을 지니면서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마지막 분별력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개인과도 같습니다. 모임의 의견은 계획되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착상이 되고 태어나 길러집니다; 모임이 의사 결정 과정의 질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은 모임의 결정들의 올바름에 필수적입니다. 마치 산모가 자신의 건강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이 아기의 건강에 필수적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임의 의견은 일치(consensus)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일치는 주로 합리적인 토론과 타협을 통하여 일반적인 합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폭넓게 사용되며 매우 가치 있는 세속적 과정입니다. 모임의 의견은 하나님에 대해 귀기울이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종교적 과정입니다. 둘 모두 참여자들에 의한 동의된 행위의 과정으로 귀착되지만, 그러나 모임의 의견은 의식적으로 영(the Spirit)에 의지합니다. 사리에 맞는 자기 주장의 논증과 생생한 찬반 토론은 친우들의 의사 결정에 있어 종종 어떤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영적 인도하심의 표현인 정도에만 유용합니다.


모임의 의견이 바르게 식별될 때에, 출석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내자를 신실하게 따랐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며, 또한 서로에 대한 계속되는 애정을 느낄 것입니다.


 

참여자들에게 요구되는 것들(Expectations of Participants)
친우들 사이에서, 그룹이 정한 결정들은 모든 구성원들이 예배 모임은 물론 의사 결정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할 때에 풍요로워집니다.


모임 내내 예배의 영을 유지함으로써, 참여자들은 영(the Spirit)의 인도하심과 신뢰, 겸손, 측은히 여김, 용기 등과 같은 영의 선물들에 대한 자신들의 개방성을 길러나갑니다.
서기의 역할을 맡은 친우가 있다할지라도 영의 인도를 받는 집회를 유지하고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며 진리 탐색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등에 대한 책임은 모두가 나누어집니다. 모든 참여자들에게는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과 사람마다 가질 수 있는 식견을 간단 명료하게 제시하는 것이 요청됩니다. 누구도 결론이 이미 정해졌다거나, 혹은 모임 대부분의 그것과 분명히 반대되는 어떤 통찰이 불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으로 침묵해서는 안됩니다.


모임에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느끼는 친우들도 자신과 모임을 고생시키지 않을 목적으로 사무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유혹에 결코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식으로 참석하지 않는 것은 모임이 신의 안내에 나아가고 일치를 찾는 모임의 능력에 대한 신앙이 결여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 모두가 다른 사람에 대한 존경심으로,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 듣는 사람은 빛(the Light)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빛이 드러나는 것처럼 함으로써 표시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여는 것은 특히 의견을 달리하는 시각들이 표출되는 때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친우들은, 회원은 아니지만 진지하고 언행이 일치하는 참석자들이 기여한 공헌의 가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모임들이 의사 결정 회의에 참석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맞이합니다. 비회원들은 모임의 사무를 처리할 때에 민감한 자제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각 모임은 참석자의 참여를 자유로이 제한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제한들은 당혹스러움과 마음 상하는 감정을 피할 수 있도록 미리 분명하게 그 경계가 규정되고 전달되어야 합니다. 미리 제한하는 일은 개인들의 내밀한 정보나 혹은 평가를 수반하는 모임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합니다.


어떠한 사람도 의사록의 승인을 기대하고서 모임을 대신하여 미리 행동을 취해서는 안되며, 실제의 승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4. 친우들과 성서(Friends and the Bible)

 

친우들이 성서와 그 밖의 다른 경전들을 존중하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 즉, 신 경험에 대해 열려 있고 책임적일 수 있는 능력이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한다는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경험의 가능성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심지어 성서가 쓰여지기 이전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친교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를 진지하게 추구할 때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있어 왔습니다.


친우회에 대한 성서의 영향력은 독특하면서도 심오한 것이었습니다. 조지 폭스는 그의 위대한 "열림"(openings) 즉, 종교 문제와 사회 문제 모두를 철저하게 다루었으며 또한 우리 친우회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끼쳐오는 열림이 있기 전에도 성서를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폭스는 자신의 열림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과 능력"에 의해 먼저 왔으며, 나중에서야 그 열림이 "성서에 어울리는 것"임을 알게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 후 친우들은 폭스처럼 성서를 우리의 인도하심을 테스트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직접적인 성령 체험들에 대한 기록으로 이해해 오고 있습니다.


친우들은 항상 자신들이 읽은 성서에다가 다른 출처로부터 얻은 빛을 대비해 보았습니다. 선별된 경험뿐만 아니라 역사, 문학, 문화 연구 등을 통하여 우리는 성서를 읽어서 얻은 우리의 통찰력들을 더욱 풍요롭게 했습니다. 하나의 단체로서 우리는 소위 과학과 신앙의 갈등으로부터 대체로 자유롭게 되었고, 그 대신 그 점에 있어 상호조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친우들은 모임에서 공유된 폭넓은 성서 지식이 감화와 내면적 귀기울임의 영적 능력을 강화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서는 심지어 이질적이고 뜻이 안 통하는 듯한 부분에서조차도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가설과 인도하심을 좀더 면밀하게 검토해보도록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통찰력과 경험을 성숙시킴으로써 한 때 일견 부적절하고 생명이 없어 보이는 구절들이 힘있게 진리를 말해 주고 있음을 흔히 발견하게 됩니다.


친우들은 하나님의 현존과 인도하심에 대한 그들의 경험을 계속해서 표현해 왔으며 우리의 예배와 감화를 비춰주는 성서의 능력도 또한 계속해서 표현해 왔는데, 그 표현 방식들을 형성하는 데 끼친 성서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 성서를 더 잘 알아야겠구나 하고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히브리 경전이나 기독교 경전 혹은 다른 신앙의 경전 등 그 어떤 경전일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본성과 의지의 최종적 계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계속적인 계시를 믿습니다. 계속적인 계시라는 이 용어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지금 진행중인 교제(ongoing communion)를 강조하며,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 우리의 확장되는 감수성을 강조하고, 우주에 대한 우리의 자라나는 지식을 강조합니다.


성서는 또한 개인들을 양육하는 대단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지식은 예술, 음악, 문학이 지닌 종교적 능력에 대해 우리의 영을 열어 줍니다. 또한 성서는 우리에게 개인의 독선적 특성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폭력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데 뿌리박고 있는 냉혹성을 경고합니다. 성서는 우리의 속의 빛(the Light Within)에 대한 책임성에서 나오는 길잡이를 표현해 주는 말을 제시해 줍니다. 실례로,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라는 아모스의 소명 기사(5:24), 예수가 인용하는 두 큰 계명(마태 22:37-39), 사랑 안에서 참을 말합시다 라고 하는 바울의 명령(엡 4:15)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성서는 예수의 언명에서처럼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해준다는 것입니다. 즉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마태 7:7).

 

5. 기도(Prayer)

 

친우들은, 기도 속에서 우리 자신을 신을 향하여 개방하는 것이 예배를 농익게 하고 생활을 올바로 정돈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해왔습니다. 친우들에게는 규정된 기도 형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필요물을 충족시키는 신을 명시해 주는 그러한 실천들과 말씀들을 선택하는 데 자유롭습니다.


기도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도는 노래로 불려질 수도 있고, 생각으로도 될 수 있으며, 말로 이야기될 수도 있고, 손으로 만든 작품이나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과 같은 정형화된 기도들을 사용할 수 있으며, 혹은 진심에서 우러난 우리 자신의 말을 쏟아 놓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그날의 아주 기쁜 감사와 같은 간단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마음의 갈망을 조용히 토로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신적 존재 안에 말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영의 활동에 대하여 개방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파헤치는 것과 같은 복잡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을 때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되면서 하나님과의 더 가까운 관계를 열망하는 데서도 생깁니다. 하나님께 중심을 두고 가까이 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런 외양의 노력 없이도 사람은 줄곧 성령의 도구로서 기도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오는가를 경험할 때 우리의 기도와 봉사의 생활은 이 무한한 사랑에 대한 하나의 응답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혹은 혼자서 혹은 예배 모임의 고요 속에서 주의 깊게 귀기울임으로써 하는 기도는 흔히 섬기라는 인도하심을 위한 모판이 됩니다. 기도 생활로부터 나오는 행동은 성공하려는 욕망이나 자아에 기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빛의 이끄심에 충실하려는 우리의 열망을 성취해 줍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께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을 치유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은 기도에 있어 절대 필요한 한 부분입니다. 마음과 영이 가장 깊은 차원에서 상처를 입었다하더라도 기도를 통하여 치유되고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경험입니다. 내면의 그리스도가 머무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귀기울일 때에 우리는 밖을 향해 나아가 사랑과 감싸안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게 됩니다. 기도를 통하여 친우들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말이나 형식보다도 더 깊은 일치(unity)에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친우들은 규칙적인 기도의 시간이 중요한 훈련임을 인식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규칙적인 실천을 통해서라야 기도가 우리의 생활에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규칙적인 기도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의 영은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성장하고 피어오릅니다. 우리의 창조주께서 들으시고 돌보신다는 확신 속에서 기도는 겸허하게 자백과 용서를 갈망하는 시간,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질서로 되돌아가려 애쓰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슬픔, 분노, 우리의 사랑, 기쁨, 내면의 평화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쏟아놓을 수 있습니다.


기도가 아주 흔하게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소리내서 하는 기도는 예배 모임이나 사무 모임에서는 유익한 감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회사나 작은 그룹에서 생겨나거나 요청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으로든 가족으로든 혹은 모임으로든, 식사 전에 하는 침묵의 기도나 말로 하는 기도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기꺼이 인정합니다.


기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것에 대해 우리 자신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며 이 땅에서 기쁘게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6. 친우들과 성례전(Friends and the Sacraments)

 

친우들의 예배에 성만찬, 물세례 등 외양으로 준수되는 여타의 성례전이 없는 것은 내면 경험의 실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친우들은 참된, 내면의 성령 세례가 주는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즉 예배 모임이 한창 무르익은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와 서로간의 우정(fellowship)을 압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외양적 의식(rites)이 필요치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며, 또한 그 외양적 의식들이 어떤 친우들에게는 상징적으로 다뤄지는 영적 경험들에 한껏 도달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수 세대에 걸쳐 외양적 형식들을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전해내려 온 도움에 충분히 감사하면서도 친우들은 성례전이 갖는 본질적인 내면적 본성을 자신들의 바로 그 상징의 결여를 통해서 상징화합니다. 그러나 의식과 형식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그럼으로써 영적 능력을 감소시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식과 의식을 교조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생명이 없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친우들은 생활 전반이 영(the Spirit)의 인도하심 아래 있을 때의 그 생활이 갖는 성례전적 본성을 주장합니다. 어떠한 순간, 어떠한 관계, 어떠한 대상도 그렇게 감동이 될 경우에는 성례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고백에 충실하는 한에 있어서 바로 우리의 생활이 내면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교제에 대한 외양적이고 눈에 보이는 증거로서 다른 사람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