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2007-08-24 08:49
http://life.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30181&ar_seq=3
"흔적 남기지 말고 마음만 씻고 가소" | |
축령산 금곡마을 변동해 선생이 사는 법 | |
김대호(mokposm) 기자 |
▲ 아름다운 금곡마을 전경 |
ⓒ 김대호 |
전혀 인가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깊은 산속이지만 생뚱맞은 느낌보다는 길 잃은 손이 마치 희미한 창호등을 만난 마냥 반갑기 그지없다. '마음을 씻는 집'이라는 뜻의 '세심원(洗心院)' 이정표가 반긴다.
주인장 변동해 선생은 없었다. 뜨신 햅쌀밥에 애호박·청양고추 송송 썰어넣은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쉴라고 온 사람 앞에 얼쩡거리면 불편항께 푹 자고 낼 봅시다"라고 전화가 왔다. 불청객에게 사연을 묻지 않고 배려해주는 마음이 고맙다.
다녀간 흔적을 원치 않는 세심원
▲ '아니온듯 다녀가소서'라고 쓰여지 세심원 처마 |
ⓒ 김대호 |
집 처마엔 격식없이 휘갈겨 쓴 글귀는 왠지 엄격한 계율처럼 육중하다. 주인장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당신은 이 풍광과 새소리·개울소리의 주인이 아니라 객이므로 흩트리지 말라는 압력(?)일까. 바람처럼 소리없이 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라는 말일까?
아마도 이 곳에 쓴 주인장의 당부글이 해답일 것 같다.
"고기를 굽는 일은 아니 됩니다. 되도록이면 핸드폰을 꺼주시고 세심원의 아름다운 풍경만을 마음에 담아주시기 바랍니다. 머무르고 있는 곳의 주인은 자연입니다. 모든 것을 소중히 생각하시고 자연을 사랑해 주세요. 떠날 때는 다음에 오실 분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기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흔적을 남기고 산다. 외국에 나가보면 관광지마다 "누구누구 왔다 간다" 류의 낙서는 꼭 있다. 명산대천에 가면 바위에 기어코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가는 이들이 있다.
내가 기르는 진돗개 마루도 산책을 나가면 곳곳에 소변을 보며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하물며 옛 시절 이름 높은 선비나 스님들도 바위에 시를 새기고 자신의 흔적을 남겼으니 미물에서 영장이라는 인간까지 흔적에 대한 욕망은 본능적인 것 같다.
▲ 마음을 비우고 씻는 집 세심원 전경 |
ⓒ 김대호 |
▲ 세심원 주인장 변동해 선생이 숲속미술관을 설명하는 모습 | |
ⓒ 김대호 |
그도 그럴 것이 틈만 나면 공개석상에서 자치단체장들의 행태와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을 사사건건 꾸짖으니 좋아할 리가 없다. 한 마디로 성질 사나운 공무원이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30년 넘게 재직해온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축령산 기슭에 터를 잡았다. 나무를 가꾸고 기르는 일이 그의 낙이다.
산속에 '숲속 미술관'이라는 전시관도 지었다. 단 한 사람이 찾아오더라도 그 작가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면 족하다. 지금은 김문호 선생의 '기와집' 초대전을 하고 있다.
차나무를 심어 차밭을 일구고 봄이면 갖은 산 나무의 움을 솎아 '새싹비빔밥'을 만들어 객들을 대접한다. 남들은 나사 하나쯤 빠진 사람으로 보지만 좋은 벗을 만나 나눌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 손님에서 차를 대접하는 변동해 선생의 사랑방 | |
ⓒ 김대호 |
그가 김문호 선생의 분청사기와 비틀어진 백자다기를 좋아하는 것은 격식 없이 자유로우면서도 옹골찬 고집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 생활이 12년에 불과하지만 좋은 다기와 만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는 안다. 거기에 마음 깊은 도공까지 만난다면 금상첨화다.
'비호감' <조선일보>가 살아남는 법
이 날의 이야기주제는 당연히 '흔적'이었다.
변 선생은 "노인이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 분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들이 쌓여 훗날 큰 역사의 밑거름이 되는 것인데 그 지혜를 기록해 두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것이다. 노인이 사라지면 폐촌이 되고 결국 농촌도 고향도 없어지는 것이다. 농경사회의 근본 골간인 마을이 사라지는데 그 사회와 사람의 모양이 제대로 자리 잡겠는가 되묻는다.
▲ 매일 차를 올리는 변선생의 절집과 불상 |
ⓒ 김대호 |
때로는 진보보다 더 진보적인 문화면과 자신들에게 비호감인 인사들을 파격적인 인터뷰를 통해 호감으로 만들어 버리는 과정은 다분히 중독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
나 역시도 <국방일보>와 <조선일보>밖에 구독이 허락되지 않던 3년간의 GOP 생활에서 국한문이 혼용된 <조선일보>의 문화면을 3권 넘게 스크랩할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라크와 아프간처럼 총칼로 쓸어버리고 문화와 종교로 그 나라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해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 저항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개 제국주의는 총칼을 앞세우기 전에 자신들의 침입을 환영해줄 지지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문화와 종교라는 백신으로 흔적을 미리 남겨 놓는다.
언론이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특종과 높은 사람들 정치이야기는 1면을 위한 하나의 콘셉트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고향이 문화를 싣고 골목골목의 낮은 이야기들을 실을 때 든든한 지지 세력을 동반한 끄떡없는 체력을 가지게 되는 것. 더디지만 골간부터 장악해 들어가면 철옹성이 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가 비호감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은 수구적인 우편향의 정치면이 보여주는 파괴력도 있겠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구독자들에게 문화면과 사람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통해 신문읽기를 습관과 일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서운 흔적이 있을까?
시골 이발소는 박물관이다
▲ 산림왕 임종국 선생이 50년간 조성한 축령산 편백나무 휴양림 |
ⓒ 김대호 |
▲ 단 한 사람을 위한 전시관인 금곡 숲속미술관 |
ⓒ 김대호 |
변 선생은 시골 이발소가 가장 보존해야 할 유물이고 박물관이라는 주장을 편다.
교사들에 대한 쓴소리도 한다. 그림자도 밟지 않았던 스승의 수난시대가 왜 이어지는가 묻는다. 물론 엘리트 위주의 교육으로 다수의 아이들을 탈락시키고 학교를 지배구조의 재생산 공장으로 전락시킨 지배자들의 잘못된 교육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변 선생은 사람들이 교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앞과 뒤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교사들은 우량 중소기업 사장이다, 아이들이라는 유망한 코스닥이 있는데 엉뚱한 데 투자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아이들이 평생을 살아갈 지혜라는 자양분을 생산하는 공장(?)이 곧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때로는 흔적을 남기려는 인간의 본능은 동물의 영역표시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춘기 시절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특히 눈꽃처럼 흰 백상여와 '이제 가면 언제 오나~'로 시작되는 상여소리에 대한 공포로 날을 꼬박 샌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신론자인 내게 기억과 육신이 사라지고 무화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열여섯 어린것이 세상에 자식 외에 아무것도 남기고 가지 못한다면 인간이 동물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연쇄살인범이나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돼서라도 흔적을 남겨야 억울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험한 생각도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토록 집요하고 끈질기게 나를 붙들었고 그럴수록 흔적에 대한 욕구는 동물적이 되어갔다.
글을 쓰면서부터는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애송할 수 있는 시 한 편 남기고 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소월과 영랑에게 질투가 났다. 결국 딸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러 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음을 깨닫기까지 17년이 걸렸다.
'부재 공포'에서 비롯된 영역표시 본능
▲ 변선생이 손님들과 나누기 위해 준비한 된장이며 고추장을 담은 장독대 |
ⓒ 김대호 |
▲ 변동해 선생의 마음을 공부하는 선방 |
ⓒ 김대호 |
내 터전 월선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취향의 변화를 느낀다. 과거 관광버스나 명소관광 시절에는 누구도 찾지 않던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엔 가족을 이끌고 도예나 천연염색 같은 문화를 체험하고 배우기 위해 찾는다. 요즈음엔 내가 변 선생과 차 한잔 나누기 위해 장성을 찾았던 것처럼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곳 깡촌을 찾아온다.
더디지만 집요하고 식지 않는 열정은 가슴에 흔적을 남기는 사람 같다. 더구나 그 사람이 마음을 씻어주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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