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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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 - 한국의 국민적 영웅
- 무또오 요오이치 -
<씨알의소리> 1989년 6월호
지난 2월 4일 새벽, 한국의 함석헌 선생이 영면(永眠)하셨습니다. 88세였습니다.
선생님과는 1981년 여름, 일본 우화회(友和會, J.F.O.R) 전국대회 때에 처음으로 뵈온 이래, 우화회에서 하고 있는 “평화 여행”으로 방한할 때마다, 한번은 오키나와에 가시는 여행 때에, 그리고 85년 저뭄께 일본에 오셨을 때에는 하루 동안을 여유 있게 모실 수가 있어 따뜻한 사귐의 베푸심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강연도 여러 번 듣게 된 셈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상당히 어려워서 좀처럼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항상 선생님의 사고(思考)가 유연하시다 는 것, 성서나 그 밖의 고전 - 특히 노자, 장자 - 의 이해가 깊으신 점, 그 담담하신 이야기 모습에 감명을 받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역시 강화도의 산길에서, 혹은 서울의 지하철 안에서, 혹은 도쿄를 안내하는 차 속에서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친밀하게 말씀해 주신 일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흔히 “한국의 간디” 라고 일컬음을 받으십니다만, 아직 중학생 때인 1919년의 3. 1 독립운동을 맞이하여서 목이 터져라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신교출판사) 이래로, 일본 유학중 관동대지진 때에 조선인 박해 폭행사건에 말려들어 고마고메 경찰서에 유치 당하고, 귀국 후에는 일제하의 이른바 한국 무교회의 “성서조선 사건”에 의한 미결 복역, 해방 후에는 소련군에 의한 체포 투옥, 그리고 한국 민주화 투쟁을 하는 중에 당하신 여러 차례의 구금 수감 등, “형무소 대학 졸업생”(국제 우화회 기관지의 소개문의 표제)으로서 실로 저항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오셨습니다. 그러한 뜻에서 선생님은 실로 정의와 공평의 예언자이며, 간디나 마틴 루터 킹과 함께 비폭력 저항의 창도자이셨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쓰면서도, 그러나 나 자신은 그러한 선생님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함 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다른 누구와도 싸우거나 말다툼을 한 일이 거의 없다”(앞의 책)는 온화하고 부드러우시며, 조금도 꾸밈이 없으신, 백발 흰 수염, 바지저고리 모습의 선생님이십니다. 한번은 부산행 기차 속에서 함께 모시고 갔을 때, 시골 노인이나 어린애를 업은 어머니, 혹은 실업가로 보이는 신사나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가 연방 가까이 와서는 좌석에 정좌하고 계시는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가는 것을 보고, 나는 “아, 이러한 분이야말로 ‘국민적 영웅’이라고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지금 이 국민적 영웅을 잃고 깊은 슬픔 속에 잠겨있는 한국의 이 친구 저 친구들 떠올리면서 다만 그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함 선생님은 유학을 위해 동경에 오신 그 이듬해인 1924년 가을, 처음으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성서연구회에 출석하고, 예레미아서의 강의에서 진정한 애국을 배워, 자기 장래의 갈 길을 확정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경고사(高師)를 졸업하고 귀국하기 직전에 우치무라에게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이후 선생님의 우치무라에 대한 경애(경애)는 일관해서 변하는 일이 없었습니다만, 아주 오랜 동안 선생님은 한국의 무교회와도 일본의 무교회와도 그 관계는 소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무교회를 떠났다기보다는 무교회 사람들이 선생님을 "십자가 신앙에서 떠났다" 고 비판한 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서 선생님은 “십자가 없이 무슨 기독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해석을 제게 맞도록 저 나름대로 바꾼 것뿐입니다. 나는 ‘우러러보는 십자가’보다는 ‘져보자는 십자가’ 켠에 섭니다. 그 점에서 나는 유 선생님(유영모, 선생님의 은사)이나 간디에 가깝지요.”(‘내가 알고 있는 우치무라간조(內村鑑三)선생’, <內村鑑三 全集> 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 ‘월보’ 39, 1983년 12월)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져보자는 십자가”란 심각한 말입니다. “우러러보는” 십자가에서 떨어질세라 겨우 매달리고 있는 것 같은 저에게는 도저히 선생님의 깊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선생님이 한민족을 “세계의 하수구”에 비유하고, 세계의 불의를 짊어지는 백성이라고 하신(<고난의 한국 민중사> 신교출판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일역판 - 편집실 주) 선생의 역사이해, 민족적 자부심, 애국의 충정은 모두 거기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러러보는 십자가”와 “져보자는 십자가”는 아마도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근본문제를 규명할 힘은 제에게는 도저히 없습니다만, 제가 마음속에서부터 공감하는 선생님의 무교회 이해를 나타내는 글월 하나를 소개코자 합니다.
“나는 원래 무교회를 알고 있으면서 우치무라 선생에게 간 것이 아니고, 선생님에게 가서 무교회가 됐습니다. 그러나 무교회라면 굳어버려선 못 씁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은 그 어떤 모양으로든지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될 수 있는 대로 형식에 굳어져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무교회는 우치무라에게서는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무교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우치무라는 내 안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우치무라도 내안에서 영원히 살아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교회 정신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앞의 ‘월보’에서)
이 무교회 정신, 비폭력 저항 사상, 평화로운 삶의 방식, 그리고 만년에 특히 강조하신 국가주의의 극복 등이 함 선생님께서 남기신 커다란 정신적 유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날에 일본에 유학하여 인간형성의 중요한 시기에 일본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으신 함 선생님은 틀림없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서 깊은 통찰과 준엄한 비판을 갖고 계셨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우리들은 기회가 있으면 그 일단을 알아 볼 수 있었으면 하고 원했습니다만 선생님은 결코 비판적인 말씀은 입 밖에 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서울과 부산에서 격년으로 열리는 하기수양회에 참가하는 일본 우화회(友和會) ‘한국 평화여행’에 참가자들에게, 항상 “일본에서 이렇게 멀리 많은 일본 분들이 와주셔서................” 하시면서 깍듯이 인사해 주셔서 우리들은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1983년 9월, 선생님은 재일 한국인 여러 단체의 초청으로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60주년 기념집회’를 위해서 “내가 체험한 관동대재”라는 제목으로 말씀해 주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사증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 계획은 실현되질 못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저희에게 편지를 주시고 “나는 일본에는 자유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공중을 나는 꿈이 깨진 것 같은 기분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놀라면서 ‘어쩐 일이지요?’ 하고 묻는 것입니다.” 라면서 탄식하셨습니다.
그 2년 후 선생님께서 일본에 오셨을 때에 다행히 저희들은 작은 그룹으로 그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만, 끝나고 나서 선생님은 “일본 정부는 손해를 본 것이지요. 만일 그때 내가올 수 있었다면 오늘 저녁에 이야기 한 것 같은 여러 친절한 일본 분들 이야기를 할 계획이었으니까요” 라면서 웃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유머 넘치는, 조심성 있는 선생님다운 표현입니다만, 그것은 얼마나 준엄한 일본인 비판인지요.
선생님에 대한 이러한 경우도 그렇고, 때때로 반복되는 한일간의 역사왜곡의 문제도 그렇고 - 우리들 일본인의 너무나도 왜소함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공정하고 겸허하게 인정하지를 못하는 야비한 인간은 결국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는 소경이 되는 것”(R. 봐이젝커)입니다.
85년에 일본에 오셨던 그 기회에 선생님은 가와사키에 있는 대한기독교회에서 강연을 하셨습니다. 그 날밤 선생님은 한국말로 말씀하셨고 그 교회 교역자이신 이인하 목사께서 일본어로 통역해 주셨습니다. 교회당을 꽉 메운 재일 한국인들을 향해서 순순히 타이르시듯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의 중심은 고난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역사는 나선상으로 움직여 가는데, 거기에 하늘땅을 꿰뚫는 축이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축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오히려 선생님의 용어로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 “기류(寄留)의 백성”에게 그 고난의 역사의 ‘뜻’을 추구하는 굳은 ‘의지’(한국말로 ‘뜻’[意味]는 ‘意志’라는 뜻도 된다고 합니다)를 가지고서 고난을 극복하라고 격려하셨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또한 말씀 중에 “나라사랑의 깊은 신앙에 서서 정의를 관철하는 일이다”라고도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재일(在日)을 살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고 내치시듯 대답하셨습니다. 말씀하시는 투가 온화함에 비해서 실로 준엄한 내용의 강연으로서, 한민족을 “세계의 하수구”에 비유하실 정도의 선생님의 뜨거운 민족애를 저는 비로소 절실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강연은 전후 40여년, 이제 외견상의 번영과 포식(포식)의 교만 속에서 ‘기류의 백성이나 분단의 백성’의 슬픔은 고사하고 스스로의 민족의 슬픔도 자부심도 잊고 멍청이가 돼버린 듯이 보이는 우리들 일본인에 대한 실로 통렬한 메시지였습니다.
민주화 투쟁이 한참일 때 일입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외국 친구가 “한국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면 좋을는지요?”하고 물을 때마다 그 대답은 항상 똑 같이 “당신 나라의 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주세요. 그것이 곧 한국 민중의 자유를 위한 싸움을 돕는 일이 되니까요.” 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전세계의 친구들에게” <世界> 75년 6월호)
저도 또한 씨알의 한 사람으로서 이제 바야흐로 그 존망의 기로에 서있는 일본의 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키고 저 나름대로의 십자가 신앙 위에 서서 이 일본에서 평화에 살고 평화를 위해서 일함으로써, 함 선생님의 귀한 유지를 다소라도 이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저 온화하신 얼굴 모습을 마음속으로부터 그리워하면서 쓰다.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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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또오 요오이치씨 는
일본 무교회의 유력한 전도자의 한 분으로서, 이 글은 필자가 자신의 개인 전도자인 <데코아(通信)> 1989년 3월호 제 1면에 실은 것을 보내온 것입니다. 산은 먼데서 볼 때 그 윤곽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짧은 글에 함 선생님의 모습이 참으로 요점있게 잘 나타나 있는 듯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일독을 바라는 마음에서 옮겨 싣습니다. <씨알의소리 편집실>
필자는 현재 일본정부를 상대로 군사비 해당 분에 대한 납세 거부 위한 소송을 내어 재판 진행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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