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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박성준

퀘이커 평화운동가 박성준씨 /한겨레신문 20030324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4.

 <한겨레신문> 20030324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3/03/005000000200303242040506.html

 

 

 

‘퀘이커 평화 운동가’ 박성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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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준씨는
  • 인터뷰 뒤안길

  • 우리 안위위해 남의 피눈물 어찌 강요하나

     

    박성준(63) 씨는 ‘평화를 외치는 자’라기 보다는 ‘평화로운 자’였다. 조용조용한 음성, 수줍은 듯 따뜻하게 짓는 미소에서 그의 내면이 느껴진다. 퀘이커교도의 영성인 듯싶다. 함석헌 선생 등으로 대표되는 무교회주의인 퀘이커교는 미국과 유럽에서 인종·성 평등과 비폭력 평화운동에 앞장서온 교파다.

    그는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가르치는 교수, ‘비폭력 평화연대’와 ‘아름다운 가게’의 공동대표, 목사 등 여러 직함이 있지만 ‘퀘이커교도 평화운동가’가 가장 적절한 표현인 듯 싶다.

    퀘이커교도는 ‘나 아닌 남에게도 진실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을 내 신념이나 주장쪽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상대에게서 진리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애쓴다고 한다.

    함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과 다르면 ‘악’으로 규정짓는 기독교 원리주의자 부시 미국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인 셈이다.

    서울 양천구 신정2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미국 퀘이커공동체에서 살고 돌아온 뒤 ‘움직이는 학교’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는 보통의 학교가 아니라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할 수 있는 동아리 활동이다. 상대의 말에 온전히 마음을 기울여 듣도록 하는 ‘경청 학교’다. ‘경청’이야말로 갈등과 전쟁을 막을 방법이라고 여기는 그다. 따라서 그는 말하기보다는 경청하길 즐겨한다. 그러나 그가 평화를 원하는 간절함을 담아 모처럼 입을 열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고 있다. 이 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전쟁’이 아니다. 침략이다. 미국은 유엔의 무기사찰도 무산시키고, 국제사회의 평화적 해결 노력도 허물어버렸다. 국제법상으로도 분명히 불법인 침략이다.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고 주장하며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 지구상에서 미국만큼 대량살상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는가. 미국은 이라크를 최첨단 무기 성능시험장으로 만들고 있다. 군수산업의 이익을 도모하고, 석유 이권과 중동에서 패권을 노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고 있다.

     

    -그런 침략을 노무현 대통령이 지지하고, 지원부대를 파견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부끄러운 일이다. 이라크전을 지지하는 대신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미국으로부터 약속받으려고 하는데, 우리의 안위를 위해 어찌 남에게 피눈물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살육에 참여해놓고 한반도가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떻게 국제사회의 도움을 호소할 수 있겠는가. 미국이 국익만을 위해 저렇게 무도한 짓을 하는데, 우리도 국익만을 생각해야 하는가. 어떤 이익도 ‘생명’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전쟁을 막는 반전운동가가 아닌가. 이번 침략을 막을 방법은 없었을까.

     

    =영국만이라도 주저앉혔어야 했다. 실제 이라크 공격에 참가한 나라는 미국과 영국뿐이다. 만약 영국 국민의 반전 열기가 더욱 거세 국민과 의회 차원에서 불참 결정이 내려졌다면, 미국 홀로 침략을 결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민의 70% 이상이 이라크전을 지지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됐다.

     

    =물음에 따라 조사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미국에도 전쟁 반대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미국 사회를 바꾸도록 도와야 한다. 미국의 문제는 먼저 그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라크전 남의집일 아닙니다. 힘의논리 패배주의 젖지말고 붉은 함성처럼 떨쳐 일어나야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얘기가 파다하다.

     

    =그렇다. ‘강 건너 불 구경’할 때가 아니다. 설마 설마 하다가 남북한 민중이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일본에선 이미 북한이 핵 원자로를 가동하면 미국이 바로 북한을 공격하고, 북한은 미사일로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전쟁이 나면 한·미·일 동맹체제에 따라 일본도 전쟁에 참여할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상황 인식은 안이하기 그지없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데도 말이다. 휴전선에서 30~40분 거리에 2천만 명이 밀집해 있다. 전쟁이 나면 원치않아도 우리 모두가 ‘인간 방패’가 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을 방도가 없겠는가. 이라크전에서 이미 봤듯이 미국은 막무가내 아닌가.

     

    =(목소리 톤이 높아지며) 숙명론은 안된다. 우리의 목숨이 달렸고,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문제다.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부시가 하겠다고 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패배주의는 안된다. 이라크전은 이미 되돌이키기 어렵지만, 한반도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국민 절대 다수가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결정해야 한다.

     

    -전세계의 반전 여론에도 기어코 침공하는 부시가 아닌가.

     

    =월드컵 때 보인 열기라면 부시라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축구를 즐기는데도 그렇게 열을 냈는데, 생사문제에 그보다 힘을 모으지 않는다는 게 될 법이나 한 얘긴가.

     

    -그러나 반전 평화시위가 월드컵 열기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 아닌가.

     

    =(잠시 한 숨을 쉬며) 내놓고 말하기 어렵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운동가들의 운동 방식이다. 문제가 심각하다. 사람들은 소수 운동가들만이 단상에 오르고 카메라 앞에 얼굴을 내밀며 자신을 과시하려는 방식에 더 이상 호응하지 않는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들러리를 서지 않을 만큼 대중은 이미 달라져 있지만 운동가들은 옛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운동은 이회창이 되느냐, 누무현이 되느냐의 운동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한민족이 결딴나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운동가들이 뼈를 깎는 자기 반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월드컵 때 붉은악마 응원과 미군 장갑차 사고 때 촛불시위를 보지 않았는가. 운동가는 뒤에 숨고, 참가자들이 주인이 되게 했다. 그들은 단상과 단하를 구분하지 않았다. 모두 하나 되게 했다. 소수가 마이크를 잡고 다수를 가르치려고 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참여자가 주인이 되어 현장에서 분위기를 자신이 만들어 가니 흥이 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안일도 큰 문제 아닌가.

     

    =미국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반도 전쟁은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내 문제다. 그러니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들 촛불 정도는 스스로 들고 거리로 나와야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미국의 매스컴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다. 국민도 인터넷을 통해 직접 미국민들에게 우리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글 조연현 기자 cho@hani.co.kr,사진 탁기형 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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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준씨는

    통혁당 연구 13년 옥살이, 출소 뒤 교회공동체 일궈

     

    박씨는 1940년 경남 통영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회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 뒤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으나 그와 동생이 고향에 보내진 사이 6·25가 일어났고, 부모·형제와 소식이 끊겨버렸다. 부모는 월북 뒤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할아버지마저 사망하고 세상에 동생과 단 둘이 남은 그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학교를 마쳤다. 그 시절 소원은 ‘밥 한 그릇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는 독학으로 1960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갔고, ‘경제복지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이끌었다. 부인 한 장관과 김근태 민주당 의원 등이 동아리 후배들이다. 그는 1968년 신영복씨 등과 함께 이른바 ‘통일혁명당’사건에 연루돼 수감됐다. 감옥 안에서도 당당함을 잃지않았던 그는 198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석방됐다. 해방후 당시까지 가장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하다 출소한 최장기수였다.

    출소 뒤 한국신학대를 졸업하고 고 안병무 박사가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학술부장으로 일하며 그 안에 한백교회를 설립해 권위주의 없는 교회공동체를 일구었다.

    1994년 드디어 여권이 발급되자 부인과 함께 일본 도쿄 릿쿄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따고, 다시 미국으로 가 뉴욕 유니온신학교와 펜실베이니아 퀘이커 공동체 ‘펜들힐’에서 3년 간 ‘평화’를 화두로 공부하고 수도했다. 그는 2001년 봄학기부터 성공회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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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뒤안길


    "우리 한명숙이는‥", 떼는 운마다 동지애 그득

    박성준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5일 다일교회에 열린 공동체영성세미나에서였다. 강연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얘기를 듣고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에 대해 알고싶어 인터넷을 검색했으나 단 한 건의 기사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남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아 한 번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는 현 환경부장관인 한명숙씨와 고 3이 된 외아들과 셋이서 살고 있다. 그가 ‘우리 한명숙이는’이라고 말하는 한씨는 결혼 6개월만인 1968년 박씨가 감옥에 간 이래 13년 6개월 간 옥바라지를 했다.

    그는 “79년 감옥에서 아내가 구속된 줄도 모르고 50일 간 연락이 끊겼을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부인이 기다리다 지쳐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까봐 괴로웠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고라도 당했을지 몰라 두려웠을 뿐이지 우리 둘은 부부 이전에 동지애와 완벽한 신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운동 방식에 문제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평소 애정을 가진 그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무척 힘들어 했다. 그는 다음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틱낫한 스님을 비롯한 연예인 스타들을 총출동시켜 주최쪽이 10만 명을 참여시킬 것이라고 한 반전집회에 대해 ‘그런 식의 행사에 사람들이 얼마나 호응하겠느냐”고 말했다. 아니나다를까. 정작 그 행사엔 수 천 여명만이 참석해 그의 지적을 뒷받침했다.

     

    조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