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2006/05/18/200605180500003/200605180500003_1.html
<여성동아> 2006년 05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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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헌정 사상 첫 여성총리가 탄생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초대 여성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을 지내고 16, 17대 국회의원으로 활약한 한명숙씨(62). 한 총리는 4월19일 총리 임명 동의안이 가결된 직후 “이견이 있다고 해도 화합하고 조정해나가는 어울림의 항해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부드러운 힘’을 강조해온 그가 보여줄 통합의 리더십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 총리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가장 큰 힘이 돼준 사람은 바로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겸임교수(66·NGO학과)다. 그는 한 총리를 문학소녀에서 맹렬한 여성운동가로 바꿔놓은 ‘키다리 아저씨’였고, 사회활동으로 바쁜 아내를 위해 집안일을 도맡아 해온 ‘열린 동반자’였다. 박 교수는 아내가 첫 여성총리가 된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말을 아꼈다. ‘조용한 외조’를 자처하며 묵묵히 아내의 활동을 격려하겠다는 것. 현재 ‘비폭력 평화물결’과 ‘아름다운 가게’ 등 시민단체에서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박성준 교수와 한명숙 총리 부부의 러브스토리는 정치권에서 유명하게 회자되고 있다.
한 총리가 남편을 만난 것은 이화여대 3학년 때다. 이화여대와 서울대 기독교학생연합단체인 ‘경제복지회’에서 껑충한 키에 마른 몸매의 박 교수를 처음 만난 것. 박 교수는 연합서클의 회장, 한 총리는 부회장을 맡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한 총리는 이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남편을 만나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현실에 눈을 떴다”고 말한다.
먼저 사랑을 은근슬쩍 고백한 것은 한 총리였다. 이화여대 개교기념 축제 ‘쌍쌍파티’에 남편을 파트너로 초대한 것. 박 교수는 빨간 넥타이를 매고 축제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 역시 한 총리가 자신을 파트너로 신청해주길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결혼 여섯 달 만에 겪은 ‘이별의 아픔’, 13년 동안 매주 남편과 옥중 서신 교환
4년여의 열애 끝에 1967년 결혼한 두 사람은 여섯 달 만에 ‘이별의 아픔’을 겪는다. 이듬해 7월 남편 박 교수가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13년 동안 복역한 것. 13년의 긴 세월 동안 한 총리는 여성운동에 전념하며 옥중에 있던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한 총리는 대전교도소에 수감된 남편이 출감할 때까지 교도소 규정대로 1주일에 한 번씩 봉함엽서 한 장에 깨알 같은 글씨로 편지를 보냈고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 한 총리는 당시 상황에 대해 “두 사람이 주고받은 옥중 서신은 부부가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이자 사랑을 확인하는 강한 끈이었다”고 회상한다.
남편의 구속을 계기로 재야운동에 뛰어든 한 총리는 79년 아카데미 간사들이 교육생에게 용공교육을 시켰다는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돼 2년 6개월간 복역했다. 박 교수는 그 당시를 떠올리며 “79년 감옥에서 아내가 구속된 줄도 모르고 50일 간 연락이 끊겼을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전한다. 아내가 사고라도 당했을지 몰라 두려웠다는 것. 박 교수는 “아내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까봐 걱정한 적은 추호도 없었다”며 “우리 둘은 부부 이전에 동지애와 완벽한 신뢰가 있었다”고 덧붙인다.
81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한 총리는 단식을 하며 남편의 석방운동을 벌였다.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박 교수는 81년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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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청년이던 박 교수는 세월이 흘러 41세 중년이 돼 아내 앞에 나타났다. 한 총리 역시 어여쁜 새색시에서 중년을 바라보는 서른일곱 아낙이 돼 있었다. 이들은 뒤늦은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을 만끽했다. 여자로서는 늦은 41세에 한 총리는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박한길. 아버지의 성과 어머니의 성에 이름 ‘길’을 지어 붙인 것이다. 박한길군(21)은 지난해 2월 군대에 입대해 경기 북부의 한 공병부대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 총리는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진보적 여성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한국여성민우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91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혼여성의 재산분할청구권’을 강력히 주장했다. 당시만 해도 생소하던 ‘재산분할청구권’ 개념이 그의 노력 덕분에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목회자인 남편이 빨래를 도와주기도 하고 바깥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줘 큰 힘을 얻는다”고 밝혔다. 이처럼 ‘의식이 깨어 있는’ 박 교수는 아내가 정계에 진출한 뒤 전적으로 집안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한 총리 가족은 98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에서 살다 왔다. 박 교수가 미국 펜실베이니아 퀘이커공동체 ‘펜들힐’에서 수도생활을 했기 때문. 한 총리는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로 16대 국회의원이 되면서 부자(父子)를 남겨둔 채 99년 귀국했고, 박 교수는 미국에서 아들과 1년간 함께 지냈다. 아들 뒷바라지는 당연히 박 교수의 몫.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한 총리가 계속 바빴기 때문에 박 교수는 미국생활의 연장으로 가사노동과 아들 돌보기를 전담했다.
박 교수는 아들의 식사를 챙겨주면서 ‘요리의 세계’에 매료됐다고 한다. 정작 부딪쳐 보니까 요리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것. 박 교수는 새벽 1~2시까지 공부하는 고등학생 아들에게 아침이라도 잘 먹이고 싶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식빵에 버터를 발라 토스터에 굽기도 하고, 프라이팬에 지지기도 했다. 박 교수는 “아들이 아침을 먹고 가면 하루 종일 마음이 편하고, 굶고 가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다.
“내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의 아내 한명숙’이라 답할 것”
아침을 굶고 출근하는 아내 한 총리에게 사과 한 조각이라도 먹이려고 애쓰는 박 교수가 한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경상도 통영 출신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두 사람도 사실 젊은 시절에는 가사분담 문제로 자주 다퉜다고. 그러나 아내 덕분에 페미니즘에 눈뜬 박 교수는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이 큰일을 잘 하려면 결국 같이 사는 사람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깥에서 상처받고 들어온 아내를 집안에서 위로하고 쓰다듬어 재충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바로 그의 역할이었다. 여기에는 젊은 시절 함께 고생한 아내 한 총리에게 보답하려는 마음도 담겨 있다.
박 교수는 지난 3월 말 아내가 총리로 지명된 직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내는) 진실하고 순수한 외유내강형이다. 정치 쪽에서 아내의 이런 덕목이 소중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내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만한 안정감이 있고 욕심이 없는 사람인데다 타고난 인내력 때문에 총리직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 총리에 대해 전적인 믿음을 드러냈다.
첫 여성총리가 탄생하면서, 한명숙 총리의 홈페이지(www.happyhan. or.kr)에는 누리꾼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박성준 교수가 ‘아내 한명숙’에 대해 쓴 글은 이 홈페이지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명숙은 혼인신고도 못한 채, 아이도 없이, 13년 반의 세월을 남편 옥바라지를 하며 기다려준 순정의 여인이다. 평범한 아줌마 같은 편안한 인상의 한명숙은 그 누구에게도 경쟁심을 유발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난하고 힘겨운 고통의 세월을 살아보았기에 어려운 사람을 보면, 내가 비록 지금 어려운 처지에 있을지 몰라도 도움의 손길을 베풀기를 잊지 않는다.
누군가 나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진심에서 ‘나의 아내 한명숙’이라고 대답한다. 이 마음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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