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신학의 형성과 전개
박성준1)
회원 / 일본 토미사카 그리스도교센터 協力主事
서 론
1. 본 논문의 목적
1970년대에 출현한 <민중신학>은 한국 그리스도교 1백여 년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신학적 성과로 꼽힌다.2) 민중신학이라는 자기 자신의 신학을 가지게 됨으로써 한국 그리스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역사적 현실과 문화적 전통에 튼튼히 발딛고 선 신앙의 정체성(identity)을 확립하게 되었다. 민중신학은 성서 및 그리스도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사의 민중전통이라는 두 갈래 전통의 흐름이 12970년대 한국 민중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의 현장에서 하나로 <合流>하였음을 증언한다. 한국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민중신학의 이러한 증언을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문화적인 면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정치적 면에 있어서도 하나로 일치되지 못하고 상호 갈등하는 관계에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먼저,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전통으로부터의 단절 또는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문화에 몸담고 사는 것 자체가, 자신이 의식하든 않든 간에,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의 상실 내지 손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극적 표현을 빌린다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한국인> 으로부터 <그리스도인>에로의 <전향(轉向)>이었다.3)
비단 문화적인 삶에 있어서만이 아니었다. 사회.정치적 관계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사회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민중>의 편에 서기보다는 그 반대쪽, 즉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편의 이해관계와 사회-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이거나 간에, 지지하고 따르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 자세요 본분이라고 교회로부터 주입당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민중신학은 이러한 신앙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70년대 한국 민중의 현장에서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새롭게 읽음으로써,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의 기나긴 역사에서 망각되고 은폐되어 온 <민중의 복음>이라는 성서의 진면목을 밝히 드러내 놓게 되었다. 성서 속의 민중과 오늘의 민중이 <하나님의 선교>의 장에서 서로 어우러져,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만이 아니라 사상-문화적 차원에서도, 하나의 민중전통으로 합류하여 오늘 여기에 현존하는 것을 증언하게 된 것이다. 민중신학은 또한 그리스도교의 교회사의 전통 안에서도 민중의 해방과 구원을 이룩해 가시는 한나님의 영의 활동이 일관되게 이루어져 왔음을 확인하고, 이 교회사의 민중전통의 흐름이 한국 민중사의 민중해방 전통과 합류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바로 그러한 증언을 자신의 임무와 과제로 삼는 신학이다. 본 연구는, 서구의 주류신학으로부터의 탈출을 주제와 방법 양면에서 성취하여 탈서구-아시아 신학으로서의 위치를 정립해 가고 있는 한국 민중신학의 <주제들>과 <방법론적 특질>, 그리고 <내적 구조>를 해명해 보려는 시도이다. 본 연구는 또한, 민중신학을 1990년대의 변화된 상황4) 에서 반성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신학의 본질적 가치와 보편적인 생명력을 새롭게 조명하여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줌으로써 이 신학이 70년대와 80년대의 신학에 머무르지 않고 90년대 이후의 신학으로서도 의연히 그 유효성을 견지하고 있음을 밝히는 한편, 민중신학에 주어지고 있는 비판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수정 보완해야 할 점들을 찾아내고 그 해결의 방도를 진지하게 궁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것은 민중신학이 금후 <아시아의 신학>으로, 나아가서는 <21세기의 지구촌 신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2. 본 논문의 방법
<민중신학>이라는 매우 유니크하고 독창성이 풍부한 그리스도교적 사상은 한국 현대사의 <70년대>의 역사적?창조적 소산이다. 민중신학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면 응당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70년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70년대>와 <민중신학>은 마치 심장과 혈액의 관계처럼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이 밀착되어 있다. 이 점에서 민중신학은 <70년대의 한국사회>를 <장>으로 한 <현장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든지,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를 옳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한국 현대사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70년대>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70년대>에는 해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그 하나 하나의 사건이 그 규모나 질에 있어서 거대한 산 봉우리에 비유될 만한 것이었고, 따라서 <70년대>는 그러한 사건들의 험산준령으로 이루어진 <웅대한 산맥>이었다. <전태일 분신 사건>(71년), <광주 대단지 주민 폭동사건>(71년), <7.4남북 공동성명>(72년),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선포>(72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73년), <대통령 긴급조치 1,2호 발동>(74년), <민청학련 사건>(74년), <인혁당 사건>(75년), <김상진 자살 사건>(75년), <긴급조치 9호 발동>(75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76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79년), <여성근로자 결사항쟁 사건>(79년), <박정희 피격 암살>(79년) 등등, 70년대 한국 민중사의 사건들의 현장에 돌아가, 거기에 두 발을 튼튼히 딛고 서서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를 숙고해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70년대 한국 민중사의 심장부에 뿌리 내린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그루 푸른 나무인 <민중신학>의 생명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런 뜻에서, 나는 '<70년대>는 민중신학을 해명하는 <해석학적 열쇠>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5)
그 시대는 박정희 유신 군부독재의 불의와 폭압에 신음하는 민중이, 문자 그대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면서>,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역사의 개벽을 일일천추(一日千秋)로 갈구해 마지 않았던 묵시문학적 정황이었다. 따라서 민중신학에서 이 <70년대>라는 역사적 <콘텍스트>를 사상(捨象)하거나 <70년대>가 지니고 있는 해석학적 의미를 약화시킨 채, 단지 신학의 내재적 논리에 치중하여 접근하는 방식은 하나같이 이 새로운 신학의 <뿌리>에 해당하는 요소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의 <본질>과 <내적구조>를 파악해 보려는 본 연구는, 무엇보다도 먼저 <70년대 한국 민중사>의 심장부로 되돌아가려는 <귀향>과 <회상>의 작업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필자는 이 논문의 전반부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투쟁의 70년대의 살아 숨쉬는 <현장>으로의 최선을 다한 복귀를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민중신학의 <본질>을 밝히려는 이 논문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법론>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에게 있어서 <70년대>에로의 <귀향>은, 70년대의 전 기간을 감옥 안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필자 자신의 특이한 개인사와 불가분리로 얽혀 있는 70년대 한국 민중사에로의 <회상의 여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로, 나는 이 연구논문에서 불가피하게 자신의 감옥살이 경험에 언급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민중의 자술적 이야기>와 <두 이야기의 합류>6)라고 하는 민중신학의 방법론의 적용의 시도이기도 하지만, 이 논문에서 전개하고자 하는 신학적 주장이 필자 자신의 개인사의 어떤 특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이 논문의 방법론 상의 또 하나의 구상은 <신학자 탐구>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학의 營爲(doing theology)는 신학자의 삶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어서 양자를 분리해 버리면 어느 쪽도 그 실체가 진실하게 규명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고 있다. <신학>과 <개인사>의 이러한 밀접한 연관성은, 이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분석 검토할 한국 민중신학의 대표적 두 신학자, 서남동과 안병무의 신학에 있어서도 그대로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그 두 분의 개인사와 특이한 인격과 개성, 그리고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그들의 신학적 편력을 자료가 허락하는 한 추적할 것이며, 이러한 탐구가 그들의 신학의 주제와 방법에 관한 고찰과 서로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결합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70년대>와 <한국민중의 수난>이 없었더라면 <민중신학>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70년대>라는 역사적 시대는 민중신학이라는 생명이 잉태된 <태(胎)>였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은, 70년대 역사가 있고 민중의 수난이 있었어도 만일에 그 시대에 서남동, 안병무와 같은 <신학자>가 없었더라면 민중신학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또 하나의 진실이다. <신학적 탐구>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 두 신학자를 탐구함에 있어서도 그들의 독특한 개성과 실존적 삶의 자세, 그들의 인생 체험이 다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쌓아 온 <신학적 훈련>(theological disciplinary)이다.
1970년대 한국 그리스도교는 서남동과 안병무라는 두 사람의 잘 준비된 신학자를 가지고 있었다. <잘 준비된>이라는 말의 뜻은, 그들이 현대 서구신학의 진보적 정수(精髓) 사상과 방법의 양면에서 두루 체득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새로운 신학을 창출해 낼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탈>서구신학, <반>신학이라는 민중신학의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70년대의 <민중사건>을 <그리스도사건>으로 읽을 수 있었던 그들의 신학적 통찰력은, 그리고 "성서 및 교회사의 민중 전통과 한국사의 민중 전통이 70년대 <신의 선교>(Missio Dei)에서 합류했다"는 식의 발상법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갈고 닦은 서구 신학의 훈련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렇게 준비된 그들의 신학적 상상력이 <70년대>와 만났을 때, 거기에 새로운 신학의 창조적 불꽃이 일어났던 것이다. <신학자>는, <70년대>가 그러하듯이, 민중신학 연구의 또 하나의 <방법론적 열쇠>인 것이다.
세번째로, 그러나 민중신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으뜸 자리에 놓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민중> 그 자체다. 민중의 수난과 절규, 그리고 민중 자신의 해방의 몸부림이 그리스도인들과 신학자들의 양심을 깨어나게 했고, 그들로 하여금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고 세상을 다시 보게 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신학자들은, 오늘의 신,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는 민중 안에, 민중과 더불어, <예수민중>으로 현존하며, 이 사실을 증언하고 해석하는 것이 신학의 사명이라는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민중>은 이제야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제>가 된 것이다. 이 논문은 민중신학의 <주제인 민중>을 한국의 기층 민중의 자술적 이야기들을 통해서 밝히려고 할 것이다. 민중이 신학의 주제로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며 그 신학적 함의가 무엇인가를 <민중의 恨>, <恨의 속량적 성격>, <민중의 메시아성> 등을 통해 밝힐 것이다.
다음으로는, <성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중>과 <성서>의 관계다. 결론을 앞당겨 말하면, <성서는 민중의 책>이며, <민중은 성서의 주제>이고, <성서의 민중은 오늘의 민중을, 오늘의 민중은 성서의 민중을 비춰 주며, 그 둘은 오늘의 <신의 선교> 곧 <예수민중운동>에서 합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건>, <합류>, <전거>, <성서의 맥>, <성령론적 공시성>, <민중언어=이야기>, <한국적> 등 해석학적 패러다임을 해명하는 가운데 민중신학의 <내적 구조>를 드러내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는 이 논문 전체를 수미일관하는 신학적 주조(主調)로서는 <성령론>을, 방법론적 주조로서는 <합류>를 설정하려고 하였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논문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곧 장, 절과 소주제들이 구슬에 해당한다면, <성령론적 공시성>이라는 원리는 그 구슬들을 꿰는 실에, <합류>는 구슬을 실로 꿰어 엮는 일 또는 구슬 목걸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독자는 이 논문의 도처에서 성령론적 합류의 사고와 만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이 논문의 문체에 관해서 한마디 부언하면, 나는 이 글이 <민중신학>임을 감안하여, 되도록 누구든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문장으로 쓰려고 노력하였다.
이 논문의 구성은 이러하다. 서론에 이은 제1장에서, 70년대 민주화 운동에 선행하여 민중신학을 배태하고 길러낸 한국 그리스도교사와 한국민중사에 있어서의 민중신학의 <전사>(내지 토양)를, 제2장에서는 70년대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민중신학의 탄생을, 제3장에서는 <신학자> 서남동, 안병무를 다룰 것이다. 제4장에서는 <민중>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한국사의 문맥에서의 민중의 위치, 농민.노동자.도시빈민 등 한국의 기층 민중과 감옥 속의 <분단시대 민중>의 사회전기를 제시하며, 민중신학의 주요 '모티프'인 <恨>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해명할 것이다. 제5장에서는 민중신학의 해석학을, 제6장에서는 <성서>를, 제7장에서는 1980년대 이후의 민중신학의 전개와 민중신학의 <자기성찰> 및 전망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본 논문의 내용과 성과를 정리하고, 민중신학이 <아시아 신학>으로, 나아가서는 <21세기 지구촌 신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보편적 생명력>을 확인할 것이다.
(제1부, 제2부는 '중략')
결 론
1. 본 논문은 1970년대 한국의 민중신학의 형성을 중심으로 민중신학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연구다. 필자는 서론에서 민중신학이 1970년대 한국 민중운동의 현장에서 창출된 신학이라는 것을 민중신학의 <기본성격>으로 정식화하였다. 즉, 민중신학은 한국현대사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70년대>의 역사적.창조적 소산이며 <70년대 한국사회>를 <장>으로 한 <현장신학>이다. 따라서 <70년대>는 민중신학을 해명하는 방법론적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민중신학은 실제로 70년대말까지에는 내용과 방법의 기본골격이 이미 다 완성되어 있었다.7) 그러므로, 민중신학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본 논문은 <70년대>에 집중함으로써 연구의 실효를 거둘 수 있다.
서남동은 민중신학을 정의하여, "한국사의 민중전통과 성서 및 교회사의 민중전통이 1970년대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서 합류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신학이다" 라고 했다. 서남동의 이 정의 속에 민중신학의 본질이 잘 드러나 있다. <증언>은 행동과 실천, 더 정확하게는 '프락시스(praxis)를 뜻한다. 서남동은 <한의 사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인권과 민중을 위한 투쟁으로 전개되는 한국교회의 <하나님의 선교>활동에서 이 두 전통은 극적으로 합류하였다. 오늘 하나님의 선교에 초청받고 있는 우리들은 이 두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그것은 이 땅에 태어나서 오늘을 사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적 운명이다. 히브리서기자는 '우리들이 아니고서는' 이 증인의 전통이 완결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하고 있다(11장 40절). 증인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역사적 지식의 문제, 즉 이론의 문제가 아니고 실천의 문제, 곧 프락시스(praxis)의 문제다.8)
민중신학이 개념화되고 조직화되어 세련된 신학으로 되는 것은 십중팔구 민중신학의 본질에 해당하는 <증언>으로부터 멀어짐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증언의 행동과 신학의 언어가 미분화 상태였던, 안병무식으로 말하면, '케리그마'化 이전의 <사건으로서의 민중신학>이 민중신학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는 필자는, 이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자세로 본 연구에 임하였다.
2. 본 논문은 제1부에서, 먼저 민중신학의 형성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한국민중사와 한국 그리스도교사를 <전사>(제1장)로 다룬 후, 70년대 민중신학의 성립의 <3대요소>인 <70년대>와 <신학자들>과 <민중>을 고찰하였다. 이 3요소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의 규명이야말로, 제2부에서 고찰한 <사건과 합류의 해석학>(제5장)과 함께, <70년대 한국민중신학의 본질과 내적 구조>의 해명에 관건이 된다.
2.1. 민중신학이 한국민중사의 70년대의 소산임은 분명하지만, 이 신학의 상상력, 파토스, 신학적 지향은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세월에 형성된 것은 아니며 그 뿌리는 수난과 저항으로 점철된 근현대 한국민중사와 100여 년의 한국 그리스도교史의 민족.민중적 전통 속에 착근해 있다. 따라서, <전사>에서는 1945년 해방에서 1970년 전태일 사건에 이르는 한국민중사와 한국 그리스도교사의 민중전통을 다루었다. 그리스도교사의 민중전통에서는, 민족수난기에 있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민족의식, 함석헌 사상, 토착화 신학, 세속화 신학 등의 영향,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회선교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면서 <민중신학적> 발상의 맹아가 이 시기에 이미 배태되었음을 밝혔다. 특히, 1945년 해방 이후 한국민중운동사에 큰 분수령이 된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역사와 사회에 대한 긴 무관심의 잠에서 깨어 일어난 그리스도인들이 70년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대열에 참여하여 증언자의 삶을 산 모습을 추적하였다. 이 증언자들의 삶이야말로 민중신학의 <본질>의 드러남이고, <신학>이란 그러한 증언의 행동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을 보았고, 70년대 한국민중의 일어섬(곧 전태일의 부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았으며, 7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오순절 성령사건을 체험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한국현대사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70년대>는 성서의 민중전통과 한국사의 민중전통이 하나의 흐름으로 합류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또한 성서의 재발견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만남이었으며, 회심을 통한 신앙의 새 출발이었다.
70년대 한국 민중의 새 역사는 전태일 사건이라는 한 준봉으로부터 뻗어내린 거대한 산맥이었다. 신학자들은 전태일 사건에서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때의 징조>를 읽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여 민중의 고통과 恨과 희망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일들(요일 1,1)을 신학의 언어로 증언하였고, 거기에서 <민중신학>이라는 한 새로운 신학이 형성된 것이라는 것을 밝혀보려고 하였다.
2.2. 다음으로, <신학자들>(제2장)을 다루었다. <신학자의 탐구>는 민중신학의 본질과 방법론적 특질을 구명하려는 본 연구에 있어서 <70년대>와 함께 또 하나의 관건이 된다. 따라서, 필자는 한국민중신학의 묘목을 심고 길러낸, 민중신학의 대표격인 두 신학자 서남동, 안병무의 인생과 신학적 편력을 자료가 허락하는 한에서 충실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민중신학의 형성에 있어서 신학자의 역할의 중요성, 그리고 <신학자>가 민중신학 형성의 <구성적 요인>임을 대략 다음과 같이 밝혀보았다.
이 두 사람의 신학자의 존재가 있었기에 한국의 민중신학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남동의 신학적 '안테나'는 70년대 한국민중의 한맺힌 소리를 감지하여 그 <소리의 내력>을 신학적으로 증언하는 예리한 촉수였고, 안병무의 <역사의 예수>에의 間斷없는 추구는 <민중신학>이라는 '단비'를 부르는 긴 목마름이었다. <70년대>가 <민중신학>이라는 새 생명의 胎였다면, 두 신학자는 산모였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훈련을 쌓은 탁월한 신학자의 매개역 없이는 창조적인 신학의 산출은 불가능하다. 다만 강조해야 할 것은, 그들의 신학적 훈련이 책과 강의실과 연구실에서의 논리와 학(Wissenschaft)에 그치지 않고, 민중의 생활과 문화의 대해에 합류했기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 그들은 <서구신학>의 '게토'를 <脫>했지만, 그 脫은 전면부정이 아니라, 서구신학에 대한 치열한 저항이면서 한편으로는 서구신학의 <비판적 계승>이었다. 그들이 정열을 불태워 연구, 흡수했던 서구신학의 적극적(positive)인 요소들이 한국의 민중경험과 그들의 신학 안에서 극적으로 합류한 것이다. 이것은, 서구의 진보신학에는 70년대 한국민중 현장과의 <접점>이 무르익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상황>에 대한 신학자의 대결이 진지하고 치열하면 그 접점에서 창조적 신학의 불꽃이 일어날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2.3. 그 다음으로, <민중>(제3장)을 ⑴ <역사에 있어서의 민중>, ⑵ <현실에 있어서의 민중>, ⑶ <[신학의] 주제로서의 민중>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2.3.1. 먼저 <역사에 있어서의 민중>에서는, 민중사학자 정창열의 연구에 힘입어,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민중>과 <민중의식>의 형성과정을 제시하였다. 정창렬은 그의 논문 「백성의식, 평민의식, 민중의식」에서, 지배계층의 권위에 복속되어 순종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싸우는 인민이 민중이라고 하는 동태적인 민중 개념을 제시하고, 이러한 민중과 민중의식이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에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 왔는가, 특히 지배계층의 강제에 의해 규범화된 지배 이데올로기를 인민이 어떻게 내재적으로 극복하면서 스스로를 민중으로 정립하였는가에 초점을 두고 탐색한다. 그는 민중의식이 <백성의식→평민의식→민중의식>의 순으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다고 하고, 한국사에 있어서의 <민중.민중의식>이 1876년 개항 이후에서 70년대까지의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본다. 필자는, 이처럼 한국사에 있어서 민중.민중의식의 형성 시기가 그리스도교의 전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민중 이해(이를테면 <합류>)에 빛을 던져 준다고 생각하며, 또한 한국민중신학의 <민중 이해>는 정창렬이 제시한 <민중.민중의식> 패러다임과의 창조적 대화를 통해 전개됨이 바람직하다고 확신한다.
2.3.2. <현실에 있어서의 민중>에서는 현실의 민중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파악하기 위해 민중신학이 한 방법인 <민중의 자술적 전기(이야기)>라는 방법을 도입, 70년대를 살아온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기층민중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신학적 해석을 가함이 없이 되도록 있는 그대로 옮겨 놓았다. 또한, 전태일의 죽음 이후 10여 년이 경과한 80년대초의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실태를 그곳 여성노동자들의 좌담에서 발췌해 실었다. 그리고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한[조선]반도 민중의 '특수성'을 민중신학의 민중이해에 보태기 위해 필자 자신의 옥중경험을 실었다. 그것이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분단을 관리하는 악법들의 존재로 인해 고통당해 온 한국민중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라는 점 외에도,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본 논문의 논지가 필자 자신의 개인사의 어떤 특징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2.3.3. 다음에, ⑴ <주제로서의 민중>에서는, 그리스도교 신학인 민중신학이 어떻게 <예수>보다는 오히려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여, 서남동과 안병무의 <민중 이해>를 고찰하였다. 특히 민중을 <하나님의 구원사의 주체>로, <복음(계시)의 구성적 요인>으로 보는 서남동의 민중관을 자세히 논구하면서 <恨의 속량적 성격>과 <민중의 메시아성>을 해명하였다.
2.3.3.1. 서남동은 "민중신학의 주제가 '예수'가 아니고 '민중'이라고 선언했다. 이 점에 관한 안병무의 생각은, 그가 예수와 민중의 일체성을 깨닫고 <예수민중>에 도달함으로써 <예수 對 민중>이라는 주객도식을 허물어 버렸다는 데서 분명해진다. <예수민중>은 2천 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한국의 민중으로 실재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한국 민중의 해방사건은 다름 아닌 <예수민중>이 일으키는 사건, 곧 <오늘의 예수사건>이다. 따라서 안병무의 신학은 <사건의 신학>이고 그 주제는 <(예수)민중>이 된다.
서남동의 민중 이해를 요약하면, <하나님의 구원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이 될 것이다. 그는 민중의 <고난>(suffering)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경영을 알아보는 색인(index)이라고 한다. 민중의 고난을 중시하고 그 의미를 신학적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민중개념은 사회과학적 민중개념과 다른 신학적 개념이다. 서남동에 따르면, 예수운동의 담지자들인 <가난한 사람들>(ptochoi)의 <자의식>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史의 주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민중신학이 민중사학으로부터 수용한 명제, "민중은 역사의 주체다"를 한층 더 신학적으로 심화시킨 "민중은 하나님의 구원사의 주체다"라는 명제를 얻게 되며, <민중>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이해를 넘어, <민중>이야말로 무릇 모든 신학의 <주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2.3.3.2. 서남동의 민중이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의 메시지의 역사적 전승자인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을 구성하는 <구성적 요인>이다."라는 데까지 이른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으로 수육된 것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빼버리면, 복음은 추상적 이념이 되고 만다. <복음>은 상부구조(마음)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부구조(몸)다. 양자가 모두 <역사적 계시>(복음)를 구성하는 <구성적 요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 복음의 전승자들, 하나님의 구속사의 주체들(가난한 사람들)을 제외하고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길도,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할 수 있는 길도 없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의 복음을 수락하려면, 그래서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수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2.3.3.3. 안병무는 그의 민중이해를 우선 철저하게 <성서로부터> 취하고 있다. 그는 마르코복음서의 <오클로스>를 <민중>과 등치시킨다. 예수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민중(오클로스)이 함께 있고, 예수와 민중은 식탁을 같이 하며, 예수와 오클로스는 <예루살렘>과 대립관계에 있고, 예수는 오클로스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라고 선언했다. 특히 예수는 오클로스에 대해서 여하한 도덕적, 종교적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 즉 예수는 바리사이파를 위시한 소위 지도층에게는 맹렬한 비판을 퍼붓지만, 오클로스에 대해서는 그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뿐, 그들의 죄를 운운하는 법도 없고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요구를 일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병무는 이것을 예수민중의 주요 특징으로 본다. 예수는 그 원인이 어디 있든지 간에 지금 고난당하는 무리, 지금 배고프고 지금 울고 지금 목마르고 지금 억눌리고 소외된 자들을 무조건 편들었다. 안병무는, 때로 민중을 낭만화(또는 美化)한다는 비판에 접할 때마다, 예수와 민중의 그와 같은 관계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병무의 민중 이해에 있어서는 또한 그의 <페미니스트적> 예수민중 이해를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예수민중>과 <예수운동>의 성격 이해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의 입장에서 성서를 보려는 노력은 남성중심의 시각을 당연시해 온 전통적인 해석에 제동을 걸었으며, 특히 <예수운동>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섬겼고 수난의 현장까지 예수를 동행했던 여인들이 남자 제자들보다 예수운동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했고, 그들이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라고 추론한다.
2.3.4. 한국의 일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70년대에 한국민중의 토속종교인 무교(샤머니즘)와 민중문화예술, 그리고 그것들 속에 내재한, 한국[조선]민중의 집단적 혼인 <한>을 신학의 한 주요한 <모티프>로 도입했다.
<한>은 춥고 배고픈 사람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과 불의를 일상 경험하고 그것에 대해 울분을 느끼면서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이 늘 당하기만 하고 사는 서민계층의 절망감이다. <한>은 봉건제와 가부장제 아래서 기구한 삶을 이어 온 한국여인들의 情操다. <한>은 언젠가는 한을 한번 풀 날이 있으리라는 강렬한 <희망>의 情操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래서 한맺힌 사람은 소극적이거나 체념적이지 않고 오히려 낙천적이고 억척스러울 경우가 많다. 한맺힌 사람들은 전태일에게서 보듯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저항적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머리가 아닌 가슴과 창자 속에 또아리틀듯 맺힌 한은 풀지 않으면 병이 된다. 우리 민족과 민중은 한풀이의 지혜를 오랜 역사를 통해 익혀 왔다. 노래(민요)로 풀어 내고, 이야기(신세타령, 민담)로 풀어 내고, 춤(탈놀이)과 굿으로 풀었다. 한은 "너죽고 나죽자"는 불같은 복수와 저주의 감정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으나, 눈물과 한숨 섞인 익살(해학)로 풀어 내어 삭히는 경우가 더 많다. <한>은 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과 분단의 시대를 살아온 한[조선]민족.민중의 보편적 情操다. 恨은 복합.중층적인 한국[조선]인의 집단적 무의식, 한국[조선]민중의 집단적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영학은 <恨>에는 세 얼굴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하나는 情恨인데 탄식-체념-적응-연민과 사랑 등 으로 연결되는 제사장직의 한이고, 다른 하나는 怨恨인데 원망-복수-변혁-정의의 실현 등으로 전개되는 예언자직의 한이다. <한>의 이 두 얼굴은 서로 엇바뀌며 교대로 나타날 때도 있고 '앰비벌런스'하게 동시에 나타날 때도 있다. 현영학은 이 두 얼굴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고 한다. 해학과 풍자와 웃음의 얼굴이다. 이 웃음은 점잖고 얌전한 미소가 아니라, 봉산탈춤에서 보듯이 창자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 허리를 잡고 몸을 비틀며 웃어젖히는 파안대소다. 이 웃음은 단테가 본 것처럼 천당에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웃는 웃음, 궁극적 승리자 <제왕>의 웃음이다. 이 세 가지 얼굴은 민중의 <恨>의 예술인 탈놀이나 판소리, <恨>의 종교인 무교에서는 언제나 볼 수 있다. 민중의 <恨>을 신학에 도입하자마자,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들의 꽃(마태 6,28) 같이 생기를 얻게 되었고 갈릴리 민중의 땀냄새와 건강한 웃음소리와 항거의 몸짓을 회복하게 되었다.
2.3.5. 서남동의 <恨 이해>는 또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 그는 먼저 민중과 恨의 관계를 특이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사람을 밖에서 보면 육체이고 안에서 보면 혼이듯이, 민중도 밖에서 보면 민중이고 안에서 보면 恨이다." 즉 민중의 혼에 해당하는 것이 恨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의 문제는 <죄>였는데, 민중신학의 핵심 문제는 <한>이라고 한다. <죄>라는 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뒤집어씌우는 陋名이나 렛델인 경우가 많다. 예수시대에도 종교적 지배집단이 민중에게 붙인 딱지가 <죄인>이었다. '예수가 죄인을 위해서 왔다'는 것은 그래서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죄는 지배자의 눈으로 보면 <죄>이고 민중의 눈으로 보면 <恨>이다. 죄는 지배자의 언어고 한은 민중의 언어다.
서남동은, 다음으로, 우리 모두를 해방시킬 <메시아>는 고난받는 민중의 신음소리, 곧 <恨의 소리>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한다. 우리 시대의 수난당하는 이웃, 특히 우리가 <구조적인 악>이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이웃의 절규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아무데서도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서남동은 단언한다. 그는 이것을 가리켜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아성> 또는 <한의 속양적 성격>이라고 한다.
한편 서남동은 '속량'과 '해방'의 재일치(reunion)를 말한다. 전통적 기독교 신학에서는 '속량'과 '해방'이 분리되어 버린 결과, 한편으로는, <속량>은 해방이라는 사회적 차원의 실천이 탈락되어 종교적 차원에 국한되어 버렸고, 다른 한편, <해방>은 종교적 차원을 상실해 버리고 사회적 해방에만 국한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본래 분리되면 안되고, 분리되면 양자가 다 변질 왜곡되는 것이었다. 성서의 구원은 그 양면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창조가 있는 곳에 속량(redemption)이 있다. 창조와 속량은 실은 하나님의 행위의 양면이다.
필자는, 한국민중사와 문화전통 속에도 하나님의 창조와 속량의 역사가 있어 왔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속량'과 '해방'이 분리되지 않고 일치된 경우를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서 만난다. 전태일의 속량은 자기의 몸을 불살라 바쳐 다른 노동자들을 속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일으켜 세워 '해방'의 도정에 나서게 하였다. 실로, 전태일의 죽음은 속량과 해방, 종교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포괄한 것이었다. 민중신학에서 <구원론>을 말한다고 할 것같으면, 바로 속량과 해방의 절묘한 일치를 구현하고 있는 <전태일>의 예를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3. 본 논문의 제2부에서는, < <사건>과 <합류>의 해석학>(제5장)과 <성서>(제6장), 그리고 <운동의 신학>과 <민중교회운동>(제7장)을 고찰했다. <사건과 합류의 해석학>에서는 민중신학의 해석학적 패러다임의 두 기조인 안병무의 <사건>과 서남동의 <합류>를 중심으로 민중신학의 방법론적 구조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것들과 관련되는 여타의 해석학적 개념들, 곧 <전거>, <탈신학=민담(또는 이야기)>, <계시의 하부구조> 등을 해명하였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민중신학의 해석학적 뼈대가 드러나게 하였다.
제5장 <성서>에서는 민중신학의 성서 읽기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의 눈으로>, <성서의 재발견>, 민중에 의한 <성서의 해방>, <예수사건의 전승 주체> 등을 다루었다. 終章인 제6장('운동의 신학'과 '민중교회운동 : 80년대 이후의 전개')에서는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또 하나의 분수령9)으로부터 발원한 <80년대 민중운동>의 흐름 속에서의 민중신학의 전개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시기에 전개된 <80년대 민중신학>의 특징을 나타내는 3개의 지표는 ⒜ 제2세대 민중신학 그룹에 의한 <운동의 신학>형성, ⒝ <민중교회운동>의 전개, ⒞ 서남동 서거 이후의 제1세대 민중신학 진영 내부의 변화와 안병무의 신학작업의 성과 등이라고 인식, 이를 고찰함과 아울러 민중신학의 <자기성찰>과 금후의 전망을 시도하였다.
3.1. 안병무의 신학은 <사건의 신학>이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하나님[예수, 성령]과 인간이 함께 일으키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집단적[또는 공동체적]인 일, 곧 사건을 증언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건을 일으키는 신이고, 사건 안에 현존하며, 사건을 통해 인식되는 신이다. <하나님사건>, <예수사건>, <성령사건>은 각 시대의 사회구조와 제도와 문화 속에서, 역사적, 사회-정치적, 문화적 사건들 속에서 일어난다. 신학은 바로 이 사건을 증언한다. 여기서 사건의 신학은 <증언의 신학>이 된다. <증언의 신학>은 오늘의 민중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예수, 성령]의 사건을 보고 그것을 증언하는 신학이다. 즉 오늘의 사건들에서 출애굽사건과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이 재현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안병무는 예수와 민중이 일체가 되어 벌이는 <사건> 속에서 예수는 한 개인(individium)이 아니라 <민중예수>(집단적 예수)로 확인되며, 이 민중예수는 오늘의 <예수민중>으로 현존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여기에서 그가 한평생 찾아 헤맸던 <역사의 예수>를 드디어 만났다고 고백한다. <사건>은 안병무 신학의 주요 <패러다임>이다. 이 패러다임을 하나의 명제로 바꾸면, "최초에 사건이 있었다"로 된다. 안병무의 <사건>이라는 패러다임은 <역사의 예수>의 실체를 규명하는 길을 열었다. 즉 성서 속에서 <케리그마>에 가려져있던 <예수사건>전승을 찾아 내는 열쇠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라는 열쇠는 과거의 예수사건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만이 아니라 현재의 예수사건을 규명하는데 있어서도 효험을 발휘한다. 안병무는 오늘 한국에서 일어나는 민중사건을 오늘의 예수사건으로 보고, <예수사건>이라는 해석학적 열쇠로 오늘의 <그리스도 사건>을 추적한다. "오늘의 그리스도가 ―나의 언어로는 오늘의 <예수사건>이 ― 오늘 여기의 <민중사건>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2천년전의 예수를 추구하는 것이나 교리상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은 '넌센스'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예수사건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안병무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2천년 전에 단 한 번 일어나고 그것으로 끝나버린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장에서 민중의 수난과 부활(민중운동) 속에서 거듭거듭 재현된다고 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러면 그 사건에서 2천년의 시간적 거리를 가진 오늘의 우리는 어디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나? 우리가 오늘의 그리스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2천년 전의 그리스도의 절규를 오늘에 들을 수 있을 때다 ― 그것은 수난당하는 이웃의 비명소리를 타고 우리의 현장에까지 진동한다 ― 바로 이 절규에 호응해서 그 고난에 참여하는 자는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3.2. <합류>란 무엇인가? 서남동은 김지하의 <옥중 메모>에서 <합류>의 착상을 얻었다고 하는데, 정작 <서남동 신학>의 대명사처럼 된 이 <합류>에 대해서 그 개념이나 정의를 스스로 제시한 바가 없다. 그의 글 <두 이야기의 합류>에는, "기독교의 민중사와 한국의 민중사가 한국기독교인에게서 지금 합류되고 있다. 이러한 합류과정을 민중신학은 어떻게 이해하고 실현해야 할 것인가"10)라고 문제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본 연구에서 <합류>의 해석학적 성격과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합류>에 관한 필자 자신의 정의 또는 이해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 합류는 서로 다른 전통들이 합하여 하나되는 일 그 자체, 그리고 그 방법이다. <합류>는 그리스도교의 민중전통과 한국민중의 정치적 및 문화적 전통이 만나고 결합하는 방식에 대한 신학적 패러다임이다. 신과 인간이 <공동주체>가 되어, 정치적 해방과 문화적 해방(문화적 정체성의 확보)을 이루어 나간다. 합류는 두 차원, 곧 정치, 경제, 사회적 해방의 차원과 문화.종교적 주체성의 차원을 가지는 바, 이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 민중의 해방과 주체성 확보를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합류이다. 이 <합류>를 증언하고 해석하는 일이 곧 신학인데,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합류를 증언하고 해석하는 것이 <정치신학>이라면, 문화.종교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합류를 증언하고 해석하는 것이 <문화신학>이다. 민중신학은 이 두 차원에서 일어나는 합류를 통전적으로 증언하고 해석하는 신학이다.
㈏ <합류>의 신학에 있어서 한 중요한 '포인트'는 합류의 <원심력과 구심력의 문제>이다. 합류의 원심력에 해당하는 것이 <문화의 관점>이라면, 구심력에 해당하는 것은 <민중의 관점>이다. 원심력은 문화의 다양성, 다원성을 추구하는 방향이고, 구심력은 민중성을 추구하는 방향이다. <민담의 신학>은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룰 때 <민중적 합류>의 신학으로 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합류를 <하방(下方) 합류>라 부른다. 낮은 곳을 향해 흐르고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이 되는 <민중적> 성격의 합류를 다른 것들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 이야기, 민담은 한 곳에 고여 있지 않다. 광활한 대지를 적시며 구비쳐 흐르는 대하처럼, 민담은 지역, 민족, 문화권의 경계를 넘어 그 전승권을 넓혀 가는 강물이다. 흘러가며 다른 강들과 만나 <합류>한다. 이 합류의 도도한 흐름은 <주객도식>의 둑(제방)을 무너뜨리는 운동이다. 민담(=이야기)의 강물은 인간(민중)만이 아니라 유역의 모든 자연과 생명에게도 젓줄이 된다. 그래서, <합류의 신학>은 <脫>신학이다. 아시아의 그리스도교가 서구 부르주아 인간중심주의 신학의 바벨론 포로상태를 脫출해서 아시아 <민중전통의 바다>에 합류하는 <신학운동>(theological movement)이다. 이 합류신학의 원리는 서남동의 <성령론적 공시성>에 암시되어 있다.
㈑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전통들이 합류하는 원리 내지 방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합류는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따라서, <합류>를 해석하려면 <성령론적 공시적 해석방법>을 가지고 해야 한다. 환언하면, <성령론적 공시성>은 합류의 원리이자 합류를 해석하는 <해석학적 원리>이기도 하다.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현재>와 <현장>을 중시하고 그 의미를 강화시키는 성령의 활동원리이다.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화, 현장화시키는 <오늘의 하나님>이다.
둘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성서 및 교회사의 민중전통과 오늘의 민중전통을 합류시키는 <하나님의 선교>의 방법이다. 합류는 두 차원, 곧 정치[사회, 경제]적 해방의 차원과 문화[종교]적 정체성 확보의 차원을 가진다.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합류의 이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 <해방의 영>의 활동을 증언하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셋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오늘의 세계에 있어서 문화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세계와 인간생활의 다원성과 다원종교, 다원문화, 多민족(ethnics), 諸인종, 남녀兩性 및 하나님의 창조계(creation)를 관류하는 성령의 활동을 해석하는 원리이다.
넷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성서의 빛 아래서 과거 및 현재의 민중전승들과 민중문화, 민중종교의 의미를 조명해 내는 한편, 여러 민족의 다양한 민중문화전승들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교적 전승들의 의미를 재조명하여 양자를 합류시키는 성령의 활동원리이다.
다섯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에 따르면, <합류>는 우선적으로 낮은 곳, 어두운 곳, 구석진 곳, 변두리, 밑바닥에 사는 작은 사람들을 지향하는 <하방합류>이며, 따라서 우리는 성령이 지금 어디에서 어떠한 합류의 사건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분별하고 나의 삶을 성령의 지향에 합류시켜야 한다.
3.3. 서남동은 그의 이른 바 <두 이야기의 합류>신학을 구상함에 있어서 먼저 두 이야기(전통)를 확정해야만 했다. 두 이야기란 하나는 성서의 민중전통과 그리스도교 교회사의 민중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사의 민중전통인데, 이 두 개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는 방대한 내용으로부터 핵심요소들을 뽑아 내어 거기에 <典據>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남동이 제시하고 있는 민중신학의 전거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다. 즉, 그리스도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사의 민중전통이다. 그리스도교의 민중전통에는 성서의 민중전통과 교회사의 민중전통이 있다.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로서, 구약성서에서는 ① 히브리들의 출애굽, ② 가나안 정착과정과 왕조형성 이전의 <原이스라엘 평등공동체> 형성, ③ 예언자의 아나빔(가난한 사람들), ④야훼의 고난받는 종 등을 들고 있으며, 신약성서에서는 ⓐ 예수의 갈릴리 활동, ⓑ 십자가 처형 사건, ⓒ 초대교회의 방랑하는 설교자들을 들고 있다. 다음으로, 교회사적 전거로서는 ㉠ 요아킴의 <성령의 제3시대>, ㉡ 토마스 뮌쩌의 사회혁명적 신앙, ㉢ 탈기독교시대인 현대의 정치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등을 든다. 그리고 한국민중사의 전통으로는 동학농민전쟁, 의병운동, 활빈당 투쟁,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3.1운동, 4.19혁명 등 한국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민중해방의 몸부림과 투쟁, 그리고 민중의 내면성과 혼을 표현한 민중문화의 유산들, 즉 민담, 민요, 가면극, 판소리, 시조, 가사, 노래, 시, 소설 등과 그 밖에 미륵신앙 등 민중종교의 전통을 들고 있다.
서남동은 <전거>라는 말을 전통적인 신학의 규범인 <계시>와 대립하는 말로 사용한다. 즉, 그에 의하면, 계시는 종교적 사고의 범주인 데 대하여, 전거는 역사적 범주라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 범주에 속하는 것을 해석하는 방법과 역사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을 해석하는 방법을 구분하여, 전자를 전통적인 <기독론적-통시적 해석>(christological-diachronic interpretation)이라고 하고, 후자를 <성령론적-공시적 해석>(pneumatical-synchronic interpretation)이라고 해서 양자를 대조시킨다. 그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성서적 전거를 예로 들어, 기독론적 해석과 성령론적 해석이 얼마나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즉, 기독론적 해석에서는 이미 주어진 종교적 범주에 맞기 때문에 적합성이 인정되는 데 대하여, 성령론적 해석에서는 지금 여기의 현실적 경험 및 상황과 맞기 때문에 적합성이 주어지게 된다. 기독론적 해석에서는 예수가 <나를 위하여> <내 대신에> 속죄한 것으로 되는데 대하여, 성령론적 해석에서는 <내가 예수를 再演>하는 것이고 지금 <여기에 예수사건이 再現>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두가지 입장을 양자택일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민중신학의 입장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문제의 핵심이고 물려받은 전통은 해석의 전거로서의 구실을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3.4. 서남동은 김지하의 민담형식의 문학과 만나게 됨으로써 일종의 '신학적 회심'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민담'(=민중의 이야기)이 그의 신학의 한 방법이 된다. 그는 '민담'을 민중신학의 논문에 대담하게 도입하게 되고, <민담의 신학>이라는 신학의 새로운 방법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서남동은 <성서>의 역사적. 발생학적 <핵> 곧 계시는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이 태초의 사건은 신학적인 논술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에 담겨져 전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역사적 사건>이 성서의 핵인 <계시>이고, <사건>은 계시를 담는 그릇(매체)이며, 민담(민중의 이야기)은 사건을 담아 전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민담'이라는 것이 민중의 '집단적인 영혼'의 공간을 갖고 있는 민중의 '자술적인 사회전기'라고 한다.
서남동의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과 「민담의 신학 ― 반신학」은 한국 전래 민담들을 통째로 옮겨다 놓고 거기에 매편마다 약간의 신학적 '코멘트'를 곁들인 아주 새로운 '스타일'의 글이다. 그는 신학의 '언어'와 '방법'의 극적인 전환을 의도한 이 글을 선언적으로 <민담의 신학>이라고 명명하고, 신학에 있어서의 <언어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민담의 신학은 서구신학처럼 논리와 개념으로 하는 '신학'이 아니라 '이야기'로 하는 신학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反신학'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전통적인 서구신학'에 대해 반기를 들고, 그 자신의 이야기신학, 곧 '反신학(Gegen Theologie, countertheology)의 새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전통적 신학의 매체가 논리적 사변, 추상적 관념이며 그 방법은 연역적이고 그 담고 있는 내용은 초월적인 신의 존재라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참다운(authentic) 매체는 실제적, 구체적 경험과 사례에서 귀납적(inductive) 방법으로 얻어낸 '이야기'다. 이야기는 추상적인 '초월'을 추구하지 않고 구체적인 '성육신'을 찾는다. 전통적인 신학이 초월적 연역적이라면 <이야기신학>은 귀납적 신학, 아니 '反신학'이라는 것이다.
전통적 신학에 대한 서남동의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문자와 서적과 체계적인 신학은 지배(통치)의 이데올로기에 편입, 흡수되어 지배질서를 정당화해 주고 그것을 축복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지배의 신학'(Herrschende Theologie)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초월성, 전지전능, 무소부재, 그리스도의 왕권과 주권을 강조하는 내용이 다 정치적 지배구조 안에서 얻어진 '이미지'(지배자의 언어)이며 그 고정화, 항구화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신학'이라는 것 그 자체가 '성서적인 계시' 이후에 생겨난 사상체계인데, 그리스도교의 신학체계가 발생한 사회학적인 '삶의 자리'는 고대 노예제 사회인 그리스와 로마였다. 따라서 자유민과 노예, 성과 속, 물질과 정신의 형이상학적 이원론과 사회의 계급구조가 그 신학이 발생한 모태였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신학'이기에 그 태생적 성격으로 인하여 신학은 <지배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성서적 계시의 본래적 삶의 자리는 노예제 사회에서 탈출한 히브리, 가나안과 갈릴리 민중들이었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계시의 매체였다. 그것은 '신학'과는 유전적,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민중신학은 지배체제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그 문화를 비판하고 시정하는 민중의 언어(=이야기)로 하는 신학이[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변과 연역법적 논리로 하는 신학에 대한 '안티테제' <반신학>이라는 것이다.
3.5. 서남동의 <민담의 신학>이라는 방법에 관한 필자 자신의 비판적 소감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방법은, 크게 말해서, <사회경제사적 방법>과 <문학 사회학적 방법>을 한 날개로 하고 <성령론적 공시적 방법>을 다른 한 날개로 하는 <양날개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양 날개를 펴서 균형을 취하는 것이 그의 신학방법의 요체라 할 수 있는데, 때로는 그의 글이 이 균형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가령 「민담의 신학 ― 反신학」 같은 경우가 그렇다. <민담(민중의 이야기)>라는 방법은 신학의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다른 모든 방법들을 대신할 수는 없는데, 서남동은 <문자>로 기록되는 모든 신학을 <말(이야기)>의 신학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고 모든 신학을 <이야기>로 대체해야 한다는 듯이 말한다. 그런가 하면 비슷한 시기(1983년)에 쓴 <빈곤의 사회학과 빈민의 신학>에서는 마치 <민담의 신학>에서 한 말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경제학이나 사회학 논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사회과학적 분석을 도입하고 있다.
민중신학이 추구하는 민중의 <실체>가 사회과학적 분석만으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중이 처해 있은 경제적 조건, 사회.정치적 조건은 사회과학적 분석의 도움을 받을 때 보다 효과적으로 밝혀질 수 있다. 민중신학은 사회과학적으로 파악된 민중이해를 딛고 그 성과 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학적'인 작업을 진척시킬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민중의 자술적인 이야기(사회전기)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 통전적으로 드러나는 민중의 생동하는 실체는 민중신학의 민중이해를 보다 풍부하게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일방만을 강조하면 균형은 상실되고, 민중의 실체(reality)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민중신학이 돋보이는 것은 <발상법>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새로움을 보여 준다는 점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의 서구신학으로부터의 전환은 단지 <방법>이나 <해석학적 발상>에 있어서의 전환일 뿐만 아니라 <민중의 편에 선다>는 점에서 더 결정적인 전환이다. 말하자면 <편바꾸기>이다. 지배층에 편드는 <지배의 신학>의 자리로부터 피지배층인 <민중의 신학>으로의 신학하는 자리 옮김이다. 이것이 더 본질적인 전환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표현을 만일 쓸 수 있다면 바로 이 점에서 일 것이다.
민중신학은 기존의 모든 신학 방법들의 폐기 위에 유아독존하는 신학이 아니라, <창고에서 새 것과 헌 것을 꺼내는 하늘나라 훈련을 받은 학자>(마태 13,51-52)처럼 물려받은 신학의 전통과 유산들을 주체적 활용할 줄 아는 창조적이고 개방적인 신학이[어야 한]다. 서남동 자신이 현대 구미신학으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론을 배워서 적절히 구사하고 있는 데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역사, 자연과의 관계에서 학문의 영위가 불가피하다. 그리도교의 신학에 있어서도 학문적, 이론적 활동이 있을 수밖에 없고, 개념과 논리를 구사하는 이론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남동 자신이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사회경제사적 방법>이나 <문학사회학적 방법>이 다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의 소산이며, 그 방법들의 응용 자체가 만만치 않은 논리적(머리의)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의 「민담의 신학 ― 反신학」을 읽어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거기에는 그 자신이 <신학>이라는 학문영역에서 오랫동안 각고연마한 이론적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를 위한 변명을 한마디 덧붙인다면, 그가 <민담의 신학>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처럼 얻었을 때, 그것과 전통적인 신학의 여러 방법들과의 상관성을 고려하고, <민담의 신학>의 방법론적 한계를 냉정히 객관화해 보아서 균형을 취하는 일은 서남동의 몫은 아니었다.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에 감전되어 7, 80년대 한국민중운동의 절정기를 열정적으로 살다 간 그에게 그러한 주문은 무리다. 오로지 지배적 신학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일, 민중과 무연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대하여 단호히 결별을 선언하는 일, 신학의 언어와 방법에서 일대 쇄신을 단행하는 일이 그에게는 우선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反신학>은 전통적인 서구신학에 대하여 분명한 선을 긋고 아시아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자주성>을 선언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3.6. 필자는 본 논문에서 서남동의 해석학적 주요개념의 하나인 <계시의 하부구조>의 의미를 "민중신학에서의 <한국적>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연관지어 다음과 같이 고찰하였다.
㈎ <한국적>을 규정하는 규준은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우리의 현실의 삶'이다. 이 규준은 오늘의 삶을 중심에 놓되 이 오늘의 삶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 유기적 관계 속에 있는 <총체적인 삶>을 전제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적 삶>이라는 객관적이고 인식 가능한 실체를 제쳐 놓고 한국사상.문화사의 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어떤 사상적 지표, 문화적 특질, 전통종교의 원리를 찾아 내어 그것을 '한국문화의 고유성' 또는 '우리민족의 내재적 원리'라고 하여 <한국적>의 규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방법이다.
㈏ 이 문제와 관련하여, 대만신학자 송천성의 신학에 대한 서남동의 논평은 대단히 유익한 관점을 제공한다. 서남동은 宋泉盛의 신학을 소개하고 논평한 글 「문화신학.정치신학.민중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을 서양문화-백인문화의 지배로부터 벗겨내어 아시아 문화에 전위(transposition)시키려고 노력한 宋泉盛 신학의 업적은 오늘날 아시아의 신학자들이 토착화신학, 문화신학, 정치신학 혹은 민중신학을 시도함에 있어서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서남동의 이 생각은 현재와 미래의 민중신학에 변함 없이 유효한 <지침>으로서 깊이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 그런데, 서남동은 宋泉盛의 신학에서 '사회사적 인식의 결핍'을 발견한다. 즉 宋泉盛이 성서적 계시의 <신학>(상부구조-이념)만을 주목하지 성서적 계시의 <역사>(하부구조-물질-사회사)는 간과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宋박사는 성서적 계시의 신학(상부구조-이념)만 인용하지 성서적 계시의 역사(하부구조-물질-사회사)는 완전히 간과한다. 宋박사는 그의 전 저서를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을 아주 많이, 그리고 자세하고 길게 풀이한다. 그러나 그 풀이는 전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상부구조)이지, 그 역사(사회사)는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십자가에 부과된 종교적 희생(속죄)만을 풀이하지, 불의한 정치에 의한 의인의 처형이라는 역사(사회사)는 전적으로 간과한다. 부활에 관해서도 그 종교적인 의미만 말하지 사회사적인(물질적) 역사는 말하지 아니 한다. 내가 부활의 사회사적인 하부구조라 함은 '죽임을 당한 자의 부활' '갈릴리에서의 만남' '메시아 재림 때의 부활'이라는 사회사적인 측면인데 宋박사는 여기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는 말이다. ??? '역사적' 계시라고 말하면서 그 하부구조(몸)에서 유리된 상부구조(이념)만을 말하는 전통신학은, 그렇기에 나는 유령이요 나아가서는 아편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계시의 하부구조가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서남동은 여기서 민중신학을 포함하여 무릇 모든 신학에게 지침이 되는 하나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즉, "신학은 단지 성서적 계시의 상부구조(머리=신학=이념)만을 말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하부구조(몸=물질=사회사)를 함께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남동이 지적하는 바로 이 대목이 민중신학을 포함해서 모든 신학이 걸려 넘어지기 쉬운 '문턱'이고, 신학의 '아킬레스건'이며, <민중신학>으로 자처하는 어떤 신학이 과연 <민중>신학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된다. 宋泉盛 신학에 대한 서남동의 논평 속에 90년대와 그 이후를 살아갈 한국민중신학 세대가 신학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두 가지 원리가 들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 두 가지 원리를 다시 정리하면, '서양-백인문화 신학으로부터 아시아 문화 신학으로의 전위'가 그 하나이고, '신학은 계시의 하부구조(몸-물질-사회사)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라) 그러면, 민중신학에서의 '한국적'을 밝히는 일은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원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국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은 일차적으로는 한국민중이다.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영어나 독일어로 표기할 때 'people'이나 'Volk'라고 하지 않고 'minjung'이라고 표기할 것을 요구한다. <민중>(minjung)은 한[조선]반도의 기나긴 수난의 역사를 통하여 봉건제, 半봉건제, 식민지, 신식민지, 매판.예속 자본주의, 일제식민지 잔재, 가부장제적 성차별주의, 이승만 친미.반공 독재 정권, 박정희 군사 쿠테타와 군부독재와 유신체제, 대미종속문화, 분단체제와 분단문화, 5.18 광주대학살, 광주민중항쟁, 한국사회의 계급.계층문화, 민중문화, 를 온몸으로 살아온 사람들, <민중>이다. 민중은 사회경제사적, 정치경제학적, 문화사회학적, 종교-예술-신학적 존재이며, 그 모든 '한국적'요인들을 통전적으로 육화한 존재다. 그러므로 'people'이 아닌 'minjung'이다. 민중은 이처럼 '한국적'이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민중>은 일차적으로 <한국적>이다. 첫째 문화적으로 한국적이고, 둘째 사회사적으로 한국적이다. 전자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위해 서남동은 宋泉盛의 아시아 문화신학의 <전위>의 방법을 배우자고 했던 것이고, 후자에 대한 성찰을 위해 <계시의 하부구조>(사회사)를 강조했던 것이다. 양자의 <통전>에 의해서만 민중신학에서의 <한국적>의 의미는 올바르게 해명될 수 있다.
4. 본 논문의 제6장 <성서>는 민중신학의 성서연구의 성과를 집약한 것이다. 그런데, 서남동은 조직신학자이고 안병무는 신약학자이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성서연구에서의 새로움은 구약성서 쪽보다는 신약성서 쪽에서 이루어졌다. 필자는 민중신학의 성서해석에서의 기여를 주로 안병무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4.1. 민중신학의 성서해석의 패라다임은 <민중의 눈으로>라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눈과 머리와 가슴으로> 성서를 다시 읽은 결과, 성서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성서가 민중, 곧 가난한 사람들, 사회와 역사의 가장 밑바닥에서 억눌려 지내 온 사람들, 역사와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차별과 천대를 받고 살아온 사람들의 구원과 해방의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바로 민중 자신이라는 새로운 발견이다.
이 성서의 재발견은 성서학자의 서재나 대학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70년대 한국민중의 수난의 현장에서, 그 현장에 몸을 던졌던(혹은 그들 자신의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발꿈치에 채여 던져졌던") 몇몇 신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중의 한 사람인 안병무는 그 경험을, "<민중>을 접촉점으로 삼아 성서와 오늘의 한국사회를 연결해 본 것이지요. 그렇게 하자마자 성서의 새 세계가 눈앞에 활짝 전개되었습니다. 성서의 내용과 해석 방법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했다.
먼저 그들은 <성서>에 있어서 <민중>의 위치를 발견했다. "성서가 민중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의 중심 테마의 발견이다. 그렇다면, 이제 <민중>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테마로 되지 않을 수 없다. 즉 민중은 하나님, 예수, 성령, 구원 등 신학의 여러 주제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민중>이라는 신학의 대상 또는 주제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 아니라 "<신학의 진정한 주제>를 비로소 찾아내고야 말았다!"고 말해야 옳다.
4.2. 그런데, <민중>은 신학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방법(패러다임)이기도 하다. 안병무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관건은 성서의 각 책 자체의 성격이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한다(『갈릴래아의 예수』, 서문) 성서라는 책 자체가 자기 안에 질문을 가지고 있고 그 질문이 固有性을 지녔기 때문에 그 질문을 답하는(=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그 나름의 고유한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성서해석에서 어떤 <교리>나 <신학>(=이데올로기)의 정당화를 구해서는 안 된다. 성서의 고유한 물음은 <민중>이다. 성서는 민중을 묻는다. 민중의 현실, 민중의 고난, 민중의 '恨', 민중의 구원, 민중의 해방, 민중의 희망, 민중의 나라(하나님 나라)를 묻는다. 따라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성서 안에서 찾는 것이 성서해석의 목적이 되고 방법이 되어야 한다.
4.3. 서남동은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에서, 그리고 안병무는 「예수와 민중」에서 각각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풍자'와 '은유법'을 빌려, 민중이 예수를 <신학>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 나아가서 이것은 민중에 의한 <성서의 해방>이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외침에 귀를 막고, 세 속의 안락과 부귀와 권세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스스로 예수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바리새인들이 나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지도 못하도록 이 시멘트 감옥에 가두었느니라."
거지는 묻는다. "예수님, 어떻게 하면 해방될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나 저희들에게 올 수 있습니까?"
"내 힘만으로는 안 된다. 너희들이 나를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같이 가난하고 불쌍하고 천대받으면서도 어진 사람들이 아니면 안 된다.
네가 내 입을 열어 주었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시켰다. 자, 가까이 오너라. 네가 내 입을 열게 했듯이 이제는 내 몸을 자유롭게 해다오. 내 몸에서 이 시멘트를 벗겨 다오. 답답하고 갑갑해서 못살겠구나. 어서 빨리 이 감옥에서 벗어나 가난한 민중들 속으로 가고 싶다. 내 머리에는 가시관으로 족하리라. 어서 이 시멘트를 벗겨다오. 어서!"
김지하가 <금관>으로 은유하고 있는 것은 교회이고 교회조직이다. 그리고 교리요 신학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예수는 <성서> 속에 감금된 것은 아닐까? 예수의 머리에 씌어진 금관, 예수를 가둔 시멘트, 그것은 교회가 만들어 낸 <그리스도론>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로 하여금 제도교회를 옹호하도록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다.
서남동은, 예수의 머리에서 금관을 벗기고, 몸에서 시멘트를 허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고 한다. 해방신학도 민중신학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묻는다."예수를 신학으로부터, 나아가서 <성서>로부터 해방시킬 자는 누구일까?" 대답은 "1970년대에 군부독재하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절규가 예수의 금관을 벗겼다"(안병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해방은 예수만의 해방이 아니다. 민중신학에서는, 예수는 <예수민중>이라고 했다. 따라서, 예수의 해방은 <성서 속에 있는 민중>의 해방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긴 세월 동안, 복음서 속의 민중은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70년대 한국의 민중의 상황이, 그들의 고난과 절규가 신학자들로 하여금 성서 속의 민중의 존재에 눈을 크게 뜨게 한 것이다. 그들은 민중이 있는 곳에 예수가 늘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와 민중은 <예수민중>으로 '하나'인 것을.
4.4. 민중신학의 <성서 읽기>는 처음부터 <민중의 눈으로>라고 자신의 시좌와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놓고 있다. 이것은 서구의 성서학(예를 들면, 역사비판적 방법)이 해석의 <객관성>을 위장하는 것과 대조된다. 민중은 성서에서 <해방의 길>을 묻는데, 서구 신학의 주석으로는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해방사건>이 잡히지 않는다. 텍스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민중사건) ― 이것이 성서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다 ― 를 붙잡으려면 문자를 뛰어넘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텍스트를 뛰어넘어 그 배후에 있는 어떤 현실(reality), 원사건에 도달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성서해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다. 전통적인 학문(Wissenschaft)적 성서해석은 텍스트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학문은 텍스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텍스트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만일 목적이 <학문>에 있지 않고 <민중구원(해방)>에 있다고 한다면, 텍스트의 의미는 상대화된다. <민중의 구원>이 목적이라면 텍스트를 우상화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교적 사유에 있어서 성서 텍스트는 중요하다. 그러나 텍스트가 중요한 것은 텍스트(文字)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찾고 있는 <그 무엇>이 텍스트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을 전통신학에서는 <그리스도>, <구원> 등으로 말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역사적 차원, 사회적-정치적 차원, 해방의 차원이 탈락하여 관념화, 추상화한 <구원>이 되어 버렸다. 전통신학에서 탈락된 이 차원을 되찾으려면 텍스트의 우상화를 타파해야 한다. 텍스트를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학문적> 신학을 <脫>해야 한다.
5. 1970년대의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정의하고 개념화해야 할 필요를 거의 느끼지 않았다. 민중은 물과 공기처럼 그저 거기에 있었고 신학자들 자신이 고난당하는 민중과 함께 있었다. 신학은 사건들의 한복판에서 <증언>하는 일 외에 여념이 있을 수 없었다. 증언의 행동(praxis) 그 자체가 신학이었다. 개념화의 요구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민중신학의 변증이 요구되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변증의 필요란 적대자나 비판자의 존재, 또는 객관적 제3자의 시선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필자에게 이 논문을 쓰도록 자극과 동기가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민중신학의 유효성이 실천적으로 질문되고 있는 90년대의 변화된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리라.
필자는 이 사실을 인지하면서, 이러한 상황의 요구에 올바르게 대응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바른 해답을 얻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최근 한국에서 거론되는 <민중신학 비판>11)이나 민중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제안한 의견들은, 민중신학에 대한 <기본적 이해>조차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한 비판들에 답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이지만, 이 논문이 그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쓸모 있는 글이기를 기대한다.
이 논문을 쓰면서 민중신학을 새삼 정독해 본 결과, 필자는 "민중신학은 1995년 지금에도 아직 너무나 새롭구나!" 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신선함>은 민중신학이 재발견한 <성서의 새로움>에 그 뿌리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은 인간이 지상에서 생을 영위하는 한, 그래서 사회를 만들고 역사를 가꾸어 가는 한, 인간이 성서로부터 삶의 지혜를 구하는 한, 늘 푸르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70년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현장에서 창출된 <민중신학>은, <70년대>와 <한국>이라는 시공의 한계를 넘어 그 유효성의 샘이 마르지 않을 보편적 생명력을 지닌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이 논문에서 웬만큼 밝혀졌다고 믿는다.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하는 뜻으로, 다음 몇 가지 점만 부언하겠다.
첫째, 민중신학의 인간이해(<민중론>), 역사관(<사건> <합류> <성령론적 공시성>), 구원론(<恨의 속량적 성격> <민중의 메시아성>), 성서해석 방법(<민중의 눈으로> <예수민중> <예수사건>), 실천론(<합류와 증언>) 등은 신학하는 방법으로서 여전히 탁월하고, 참신하고, 유효하다.
둘째, 문화신학과 정치신학의 관계에 있어서의 <원심력과 구심력>, <변증법적 긴장>, <통전>, <계시의 하부구조>, <하방합류> 등의 방법론적 착상들은 민중신학이 <아시아 신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전개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셋째, 70년대 민중신학의 <현장성>, 그리고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세상과 교회를 보았던 그 관점은, 그래서 고난 가운데 신음하며 몸부림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스스로 민중이 되어 가는 체험을 나누었던 그 증언의 신학은 우리 모두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진실이 아닌가.
넷째, "민중신학은 끝났다. 생각을 바꿔라!"라고 충고하는 일부 시민운동측의 예단에 대하여: 이 논문의 제1부 제1장 <전사>와 제2장 <1970년대>는 역사적 과거이면서 <과거>가 아니다. 그 시대는 1990년대인 <오늘> 속에 합류해 들어와 있는 오늘 우리들의 일부이다. 그 부정적 측면만을 좀 열거하자. 식민지 잔재, 분단체제, 휴전상태, 국가보안법, 남북의 정치.군사적 긴장과 대치상태, 정치.군사.문화의 대미 종속성, 주한미군기지, 최근 안기부의 간첩사건 조작, 이렇게 끝모르게 줄줄이 나온다. 또 이 논문의 제4장 <민중>에서 제시된 전태일 사후 12년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현실은 그것이 80년대초의 일이라 해서 결코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니다. 1995년 오늘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삶의 정황도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2) 십보 양보해서, 적어도 박노해의 시 <손무덤>은 오늘 이 땅에 와서 품을 팔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생생한 현실이 아닌가. 한국 민중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지구촌 사회의 평화로운 공생을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민중신학의 <상상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서남동의 유고 「현장의 소리」는 오늘의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인간을 부르는 <메시아의 음성>으로서 그 메시지의 생명력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6. 이 논문은 <1970년대 민중신학의 형성>을 중심으로 한 연구일 뿐이며, 그것도 주로 서남동, 안병무
두 신학자에 집중했기 때문에 스스로 한계를 지니는 것이다. 70년대 민중현장에서 증언자의 삶을 살
았던 많은 분들이 민중신학 형성에 끼친 자극과 공헌을 충분히 살피지 못한 점, 80년대의 다른 민중신
학자들의 기여와 최근의 젊은 민중신학 연구자 '그룹'의 집단적 작업 성과를 수렴하지 못한 점, 여성민
중신학 쪽으로부터의 비판적 조언에도 귀기울이지 못한 점 등이 이 논문의 한계이자 앞으로의 과제라고 여겨진다.
특히, 이 논문을 일본에 와서 썼으면서도 일본신학계의 민중신학 비판이나 연구성과, 또는 민중신학.
해방신학.여성신학 등과 유사한 계열의 신학작업을 하고 있는 일본신학자들의 글들을 검토하고 대화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였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금후의 과제로 남긴다. ◈
※ 목차 ------------------------------------------------------
서론. 목적과 방법
1. 본 논문의 목적
2. 본 논문의 방법
제1부. 민중신학의 형성
제1장. 前史
제1절. 수난과 저항의 한국민중사
1. 1945년 해방에서 60연대말까지
2. 1970年 전태일 사건과 민중의 등장
제2절. 한국 그리스도敎史
1. 민족 수난기에 있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민족의식
2. 咸錫憲 사상
3. 토착화신학, 세속화신학,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
4.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회선교
― 도시빈민선교와 기독자 학생의 사회참여운동
제2장. 1970연대 ― 민중신학의 성입
1. 민중사건의 화산맥 ― <하나님의 선교(1)>
2. 기독자들의 증언 ― <하나님의 선교(2)>
제3장. 신학자들
제1절. 서남동
제2절. 안병무
제3절. 신학자들과 민중신학
제4장. 민중
제1절. 역사에 있어서의 민중 ― 한국사의 맥낙에서 본 민중
제2절. 현실에 있어서의 민중 ― 민중의 삶의 모습
1. 장영근 ― 농민
2. 조만영 ― 노동자
3. 이옥순 ― 도시빈민
4. 전태일 사후 12연, 평화시장 여성노동자들의 상황
5. 분단시대 민중의 비극적 삶
제3절. 주제로서의 민중 ― 민중신학의 민중 이해
1. 민중은 민중신학의 주제
2. 민중신학의 민중관
1) 서남동의 민중이해
2) 안병무의 민중이해
㈀ <누가 민중인가>
㈁ 페미니스트적 시각
3. <예수민중>
4. 민중의 <恨>
5. 민중의 <메시아성>
제2부. 민중신학의 전개
제5장. <사건>과 <합류>의 해석학
제1절. <사건>
제2절. <합류>
1. <합류>와 <증언>
2. <합류>의 범례 : 김지하의 <장일담> 이야기
3. 민중신학의 한 패러다임으로서의 <합류>의 의미
4.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
제3절. <전거>
제4절. 민중의 언어, 민중신학의 언어
1. 민중의 언어
2. 유언비어
3. 기적 이야기
4. 민중의 사회전기
5. 민중신학의 언어 : <민담의 신학 ― 반신학>
제5절. <계시의 하부구조> : 민중신학에 있어서 <한국적>의 의미
제6장. 성서와 민중
제1절. <민중의 눈으로>
제2절. 성서의 재발견
제3절. 성서의 해방
제4절. <예수사건>과 그 전승주체
1. 문제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3. <예수사건> 전승의 성격
4. 그 민중신학적 의미
제7장. 1980연대 이후의 민중신학의 전개
제1절. 운동의 신학
제2절. 민중교회 운동
제3절. 민중신학의 자기성찰과 전망
결론
1) 이 논문은 박성준 선생이 일본 릿교오(立敎) 대학 문학부 그리스도교 학과에 제출한 「민중신학의 형성과 전개 ― 1970년대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1996.3)의 서론과 결론부이다(참고로 이 논문의 전체 목차를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게재했다). 박선생은 민중신학 제2세대를 대표하는 신학자로, 「한국기독교변혁과 기독교운동의 과제」(『전환 ― 6월 투쟁과 민주화의 진로』, 서울: 사계절, 1987) 등을 썼으며, 한국신학연구소 학술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일본 토미사카(富坂) 그리스도교 센터의 <동아시아의 선교와 신학> 연구 그룹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2) 민중신학은 비단 한국 그리스도교의 빛나는 성과일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민중 문화사의 창조적 성과이기도 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앞으로 그리스도교 자체의 평가를 넘어서 일반 역사 학계로부터도 응분의 평가가 주어져야 마땅하다.
3) 안병무는 1986년에 쓴 글 「한국적 그리스도인 像의 모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국인의 정체형성에 부정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을 반성하고 한국적인 것을 말살해 온 데 대해 참회하는 의미에서도 한국적인 것을 찾는 데 적극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 ??? 서구인이 전파한 그리스도교 문화에 의해서 체질화한 그리스도인像이 본래적인 것은 아니다. ??? 서구 그리스도교는 서구 문화와 분리될 수 없듯이, 한국 그리스도인도 한국문화의 틀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移籍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에서 <再移籍>하여 한국인이되는 轉向을 하여야 한다."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 (한길사, 1986), 15-19면.
4) 90년대의 변화된 상황이란, 70년대와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서 1993년에 이른바 文民政府가 들어서는 등 한국 사회의 민주화의 부분적 달성과,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 및 세계적 규모에서의 보수화 물결 등의 영향으로 민중 운동이 약화되고 시민운동이 급성장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을 말한다.
5) 물론 한국 사회의 민주화 투쟁은 70년대를 지나 80년대로 이어져, 87년 6월 민주화 대투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따라서 민중신학은 <80년대의 신학>이기도 했다. 80년대에도 민중신학은 한국 민주화 운동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민중신학 자체에도 부분적인 변화와 진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의 내용과 방법의 기본 골격은 1970년대 末까지에는 거의 다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6) 김용복, 「민중의 사회전기와 신학」, 『한국 민중과 기독교』 (형성사, 1981), 90-95면 ;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1984), 45-50면 참조.
7) 민중신학의 첫 논문집인 『민중과 한국신학』 (한국신학연구소)에 수록된 20편의 민중신학 논문들은 1979년 10월 CCA(아시아 기독교 협의회) 주관으로 서울에서 개최된 신학자협의회에서 발표된 것들인데, 1995년 현재의 시점에서 본다하더라도, 민중신학의 그 이후의 논의들은 그 책에 수록된 논문들의 내용과 방법의 기본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70년대에 발표된 글들이 그 이후의 것들보다 민중신학의 <본질>(증언과 행동)에 보다 충실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8) 서남동, 「한의 사제」, 『민중신학의 탐구』, 41면
9) <전태일의 사건>이 70년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듯이, <광주민중항쟁>은 한국민중운동사의 새 단계인 80년대를 열어젖히는 시발점이 되었다. 두 경우 모두 민중의 수난과 죽임당함이 민중운동의 새 시대를 여는 기폭제였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10) 서남동, 『탐구』, 77면.
11) 그 대표적인 예로서는, 민중신학연구소 엮음 『민중은 메시아인가』 (한울, 1995)에 수록된 임태수의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위시한 몇몇 논자들의 글, 그리고 같은 연구소 엮음인 『민중신학입문』 (한울, 1995)의 글들에 나타난 민중신학 비판을 들 수 있다.
12) 나는 평화시장 주변 봉제업소 노동자를 한 사람 알고 있어서, 최근에도 몇 번 그를 만나러 그 곳에 가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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