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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퀘이커

공동묘지와 공놀이터(김조년)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4.

 

공동묘지와 공놀이터

- 김 조년 -

 

독일의 북부지방에 해당되는 곳에 바트 피르몬트(Bad Pyrmont)라는 작은 요양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철분이 섞인 물이 나오는 곳으로 요양지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것 말고 독일 퀘이커들에게는 고향과 같이 느끼는 퀘이커하우스가 있다. 1792년부터 퀘이커들이 이 지역에 살게 되면서, 영국의 퀘이커가 헌금한 돈으로 지금의 퀘어커하우스를 지었다. 시의 변두리, 봄베르크가(Bombergallee)에 자리 잡은 아주 아담한, 사치스런 장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집이다. 여기에 퀘이커사무실이 있고, 도서관이 있으며, 잠잘 수 있는 곳과 관리하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방들과 부엌과 작은 모임방이 있다. 물론 큼지막한, 원형은 아니지만 원형 비슷한 느낌을 주는 모임장이 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나무로 벽을 둘렀을 뿐이다. 가운데는 상황에 따라서 자리를 바꿀 수 있도록 비어 있고, 빙둘러 가면서 서너계단 정도의 약간 높은 턱 진 자리가 있다. 참여하는 사람의 수에 따라서 둘러앉거나 마주 바라볼 수 있게 의자를 조절할 수 있게 돼 있다.

바로 이 퀘이커하우스에는 독일 퀘이커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퀘이커하우스의 정원 마당과 같이 생긴 곳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입구와 비슷한 높이로 돼 있고, 그 길을 받친 축대를 씨멘트로 처리하였다. 그 축대에 이어서 푸른 잔디나 작은 민들레가 피는 풀밭으로 평평하게 된 곳이 있다. 축대 벽은 거무스름하게 돼 있다. 이 벽에는 편지지만큼 큰 동판이 많이 붙어 있다. 자세히 보면 사람의 이름과 그가 출생한 날과 장소, 죽은 날과 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부인의 경우에는 그가 결혼하기 전 성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가 어떠한 일을 하였으며, 어떤 직위를 가지고 있었거나, 어떤 영예를 가졌었다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그곳에 그렇게 이름판을 달고 있는 사람들은 독일 퀘이커들로서 죽은 뒤에 화장하여 그 재가 이 공동묘지에 뭍이거나 뿌려진 사람들이다. 퀘이커의 조상들이 뭍인 거룩한 곳이다.

그런데 이 장소에서 항상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바트 피르몬트 퀘이커하우스에서 모임이 있을 때, 즉 퀘이커들의 계절모임이나 연회가 있을 때는 가족들이 함께 온다. 어린아이들도 함께 올 때가 많다. 그 아이들은 돌보는 친우들에 의하여 산과 시내와 들로 다니면서 아주 즐겁게 놀고 게임을 하고 노래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를 한다. 그런데 아무도 시키지도 않고 지도하지도 않는 일이 벌어진다. 어린이들은 원래가 창의력이 출중하기에 스스로 놀이를 꾸미고 조직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기구 중 하나는 공이다. 아이들이 공을 어디나 가지고 다니면서 논다. 바로 이 공동묘지의 풀밭에서, 돌아가신 퀘이커들의 재가 뿌려지거나 뭍인 그 풀밭에서 신나게 뛰며 공놀이를 한다. 공놀이뿐만 아니라,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여러 가지를 즐긴다. 어디에도 죽음과 관련된 거룩함이나 엄숙함과 숙연함이 없다. 그냥 신나게 자기들의 생명력을 발산한다. 그것을 보는 어른들의 눈은 매우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워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한 어른이 모임에서 말하였다. 공동묘지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통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디에서도 공동묘지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놀게 하는 곳이 없는데, 바로 이 자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감동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여 보았다.

옛날 내가 어려서 살던 고향 학산의 순양 마을 뒷동산에, 뒷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동산에 큰 무덤들이 여럿 있었다. 소나무나 다른 나무들이 없던 그곳은 양지바른 곳으로, 산이 순하였기에 잔디가 잘 살아 있었다. 그 무덤 옆에는 아주 오래 된 큰 소나무가 두어 그루 서 있었다. 단오 때가 되면 동네사람들이 짚을 모아 동아줄을 틀어 그곳에 그네를 매었다. 내 어린 손으로는 두 손으로 잡아야 굵기를 잴 수 있는 굵은 동아줄이었다. 그것을 큰 소나무에 매고 그네를 뛰었다. 낮에는 일을 하느라 뛰지 못하지만, 저녁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이나 어른, 여자나 남자 할 것 없이 그곳을 즐겼다. 밤늦게까지 그네 뛰는 소리가 마을을 즐겁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아주 힘이 좋고 잘 연습이 된 사람은 까마득히 높이 올라가면서 앞가지에 달려 있는 솔잎을 입으로 따오기도 하였고, 궁둥이로 뒷가지를 치기도 하였다. 쌍그네를 뛰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걸작이었던지. 그러다가 단오날에는 그네뛰기 내기도 하였고, 하루를 아주 즐겁게 지냈다. 그리고는 그날 밤 그네 줄을 끊었다. 그 다음 날부터는 그네를 뛰지 않았다. 뛸 수가 없었다. 농사에 바쁜 때이기에 더 이상 그런 놀이가 불가능하였다. 또 큰 어른이 높게 그넷줄을 잘랐기에 어린 아이들의 손이 닿지가 않았다. 높은 나무에 두 줄 잘려진 그넷줄이 밑으로 내려뜨려져 있을 뿐이다. 그것을 볼 때는 섬뜩한 생각도 들었지만,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 끊어진 그넷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의 세계, 도달하기 불가능한 먼 하늘나라처럼 느껴졌었다.

바로 그 그네가 매달렸던 나무 옆에 있는 몇 상부의 산소들이 우리 어린아이들이 아주 즐겨서 놀던 놀이터였다. 그 산소의 주인은, 아니 그곳에 뭍인 분의 친척이나 후손들은 다른 동네에 살았던 모양이다. 우리가 그곳에서 그렇게 신이 나게 놀아대도 아무도 와서 꾸중하거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서 패를 갈라 온갖 놀이를 다 벌였다. 어느 무덤 꼭대기를 서로 차지하는, 일종의 진지나 고지 탈환전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 봉분은 여지없이 우리 어린아이들의 발에 짓밟히고, 잔디들은 잎을 잃고 잔디뿌리만 밖으로 내보이기도 하였다. 어린 우리들은 뒹굴기, 구르기, 밀어내기, 깽깽이치기, 잔디썰매타기 따위 온갖 놀이를 그 무덤에서 하였다. 무서운 생각도 없었고, 그 밑에 누가 있어서 힘들어하거나 노여워할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고 놀았다. 옷은 찢어지고, 단추는 떨어져 날아가 버리고, 꿰맨 잇으매들은 타개지고. 잠자는 그 분은 조용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평상시에, 아니 살아계실 때 아이들을 좋아하였던 분일까? 아니면 아주 싫어했던 분이었을까? 모른다. 그러나 유독히 그 무덤에는 아이들이 들끓었다. 놀기에 아주 편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당이었다.

어느 날 내가 고향을 찾을 때, 그곳을 둘러보았다. 옛날 같이 놀던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곳에 지금은 나무들이 무성하여졌고, 잔디가 좋던 그 무덤가에는 겨우 햇볕을 받아 잔디라는 명맥만을 잇고 있었다. 전에 없던 비석과 상석이 놓였고, 매우 정성을 드린 듯한 느낌이 드는 무덤단장이 있었다. ‘효심’이 발동한 후손이 돈을 벌어 조상을 섬긴 것일까? 그 무덤 가 어디에서도 아이들의 노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떠난 무덤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거룩하게 느껴졌고, 엄숙하게 느껴졌다. 어떤 괴기스러움이 느껴졌다. 그 무덤이 아늑하거나 따뜻한 기운을 잃어서도 그러겠지만, 그곳에 와서 신나게 즐기고 놀 아이들이 그 마을에는 이제 더 없다. 60-70명 씩이나 되던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은 겨우 10여명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놀이패 한 짝을 짓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시골이지만 시장에서 사온 장난감이 방안에는 늘비하게 많고, 알프스의 하이디를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가 방안에 놓여있다. 자연이 주던 장난감은 상품제품에 자리를 빼앗겼고, 푸르거나 금빛 나는 잔디에서 푸른 하늘을 벗삼아 놀던 열정은 알프스의 아름다운 산록을 누비는 하이디를 방영하는 그것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바트 피르몬트 퀘이커하우스 앞 공동묘지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놀던 고향 뒷동산의 무덤가를 비교하여 생각하여 보았다. 죽음과 삶이 한 곳에 있는 곳, 가고 옴이 따로 있지 않는 곳, 죽어 잠잠함과 살아 약동함이 함께 있는 곳. 그들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면, 우리가 짓밟고 놀던 그 무덤의 주인은 기뻐서 날뛰었을 것이 아닐까? 지금 저렇게 푸른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면서 노는 철모르는 아이들을 그윽하고 흐뭇하고 기쁜 맘으로 바라보는 어른들이 있듯이. 무덤과 이이들은 가까워야 하는 것인가? 놀이터처럼 편안해야 할 무덤, 그 무덤을 안방이나 안마당처럼 생각하는 아이들.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수염을 쥐뜯고, 지엄한 할아버지 얼굴을 핧히고, 등과 어깨를 타고 넘던 손자들. 마치 무덤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러한 것들이지 않았을까?(05.11.07. 照)

 

** <표주박통신>89호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