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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퀘이커

기독교 평화운동, 어디로 어떻게(새길이야기 9호)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4.

   2003년 여름(9호)

 

 

▶기획토론


기독교 평화운동: 어디로, 어떻게?


사회:  최만자 ·『새길이야기』편집부장


토론:     김민웅 · 뉴저지 길벗교회 목사

           박성준 · 비폭력평화연대 공동대표

           이삼열 · 유네스코 국제이해교육원 원장

           정현백 ·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사회자: 바쁘신 가운데 기획토론에 참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먼저 미가서 4장 3,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평화를 이야기할 때 꼭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평화의 원형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는 성서의 평화 이야기가 유토피아로 여겨지는 평화 부재의 세상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적대관계의 지속과 무기 기술의 가속적 발전의 역사였습니다. 특히 지난 세기 냉전이 끝난 후에도 민족분쟁과 미국의 패권주의로 인해 세계는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이라크 전쟁 이후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북핵 문제로 긴장감을 더하고 있는 한반도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미국의 패권주의에 유엔마저 무력화된 것을 보면서 평화세력은 오히려 무력감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평화운동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토론해 보려 합니다.


  첫 주제로는 지금까지의 평화운동, 특히 기독교 평화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고 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삼열 원장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기독교 평화운동의 역사와 의미는 무엇인가?


이삼열: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평화라는 개념도 넓고 평화에 이르는 길과 주장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안의 평화운동들도 입장과 견해들이 각기 다릅니다. 따라서 무엇이 대표적인 기독교 평화노선인지 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평화에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샬롬'이나 신약의 '에이레네'에서 나타나듯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평화입니다. 기독교인이 실천해야 할 윤리적 과제 중에서 평화의 윤리만큼 중요하고 종합적인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오랜 토론 과정을 거쳐 1983년 밴쿠버 총회 이후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한다는 신앙 노선을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는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전(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이라는 상태와 가장 흡사한 것이고, 기독교인의 의무는 그런 상태를 만드는 것이라는 데 합의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했듯이, 평화를 위해 애쓰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평화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태도는 단일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대한 태도만 하더라도 4세기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에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같은 기독교 사상가들은 악을 물리치는 전쟁은 성전(聖戰)이므로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로부터 정의로운 전쟁은 해야 한다는 태도가 기독교 안에 정착된 것입니다.


  반면 '정의로운 전쟁론'을 거부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한 완전한 비폭력 신앙과 실천이 재세례파, 메노나이트, 퀘이커 등을 통해 16세기 이후에 전개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세속적 반전 평화사상도 이들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지난 세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입장에서 기독교 평화사상이 강화되어 왔습니다. 암스텔담에서 WCC가 창립될 때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선언한 이후 에큐메니칼 신학은 반전, 반핵, 평화의 입장을 취해왔습니다.


  물론 이와는 반대로 기독교 안에서 전쟁을 정당화하는 입장도 함께 지속되어 왔습니다. 특히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악은 무력으로라도 물리쳐야 한다는 기독교 승리주의를 주장해왔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기독교의 틀 안에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이 갈라져 존재하므로, 기독교 평화운동을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회자: 기독교 안에 평화에 대한 상반된 커다란 두 흐름, 곧 정의로운 전쟁은 해야 한다는 생각과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예수의 가르침대로 절대 비폭력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상이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의 현실에서는 기독교 안의 절대 비폭력 평화운동의 전통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퀘이커의 평화운동에서 더 세밀하게 그 전통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성준 선생께서 정리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박성준: 퀘이커의 평화운동을 이야기하기 전에 제가 배우려고 하는 재세례파의 평화주의적 실천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7, 18세기에 박해를 받으면서 평화신조를 지켜 온 그들, 특히 메노나이트 사람들은 절대적 평화주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삼열 선생이 진보적 기독교가 평화와 화해를 우선시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메노나이트를 보면 교리적인 면에서는 전통적 기독교의 대속적 교리를 가지고 있어 우리 퀘이커의 입장에서 보면 교조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천에서는 본받을 게 많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교리적 보수성이 아닌 것 같습니다. 행동을 봐야 그 신앙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제가 이해하는 퀘이커에는 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노우 크리드'(no creed)란, 판단기준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것을 교리화해서 틀을 만들고, 그것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교리화나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입장으로 개종시키려는 태도도 없습니다.


  퀘이커의 입장은 인간에 대한 단순한 긍정, 각 사람 안에 빛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어떻게 보면 불교의 "일체 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가르침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퀘이커는 그 빛을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도 하고 '씨앗'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영'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나님의 그것'(That of God)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것'이란 현대 영어로 이해하면 '본성'(the essenc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본성과 같은 씨앗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다는 확신에서 퀘이커의 평화신조가 나옵니다.


  종교와 민족, 문화, 언어가 다르고 나와 다른 주장의 개인을 만날 때  퀘이커들은 다르다는 이유로 거리감을 느끼기보다는 나와 다르므로 배우고 싶다는 호기심을 먼저 갖습니다. 다른 것을 존중하며 경청하려는 것이죠. 그래서 입보다는 먼저 귀를 열고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먼저 들으려 합니다. 그렇게 그들 안에 살아있는 씨앗을 보려는 것이 퀘이커 평화사상의 뿌리입니다.


사회자: 평화사상이 하나님의 내광(內光), 본성에서 흘러나온다는 말씀이군요. 곧 퀘이커의 평화사상은 하나님의 본성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본성이 내재하고 있는 모든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이신데요. 그러한 평화사상은 역시 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평화운동 혹은 평화사상의 성서적 근거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김민웅: 성서의 평화는 적막강산 같은 평화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파괴하려는 힘과의 대립적인 차원을 갖습니다. 평화는 힘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서의 평화관은 강자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는 가짜이며 약자의 생명을 지켜내는 것이 진정한 평화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먼저 인식하지 않으면, 성서의 평화관이 갖는 현실적 치열함과 십자가적 헌신의 의미가 파악되지 못할 것입니다.


  다름을 힘의 차이로 인식하고 짓밟는 것이 강자의 평화입니다. 문제는 강자의 폭력을 평화라고 강변하는 것이고 이로써 약자의 평화를 끊임없이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운동이 도달한 십자가의 현실입니다. 성서적 평화는 그런 "강자의 폭력에 의한 평화"를 뒤집고 약자의 평화를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진짜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이루는 길은 철저히 '저항적 비폭력'의 길입니다. 오른뺨을 맞는 것이 현실이라면 왼뺨을 내미는 것은 때린 사람으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식과 차원을 가진 저항적 평화의 노력입니다. 이런 저항은 구체적 역사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의 극적인 해방과 광야에서의 투쟁으로, 신약에서는 '팍스 로마나'에 맞서는 그리스도의 평화로 나타납니다.


  구약의 평화는 크고 강한 것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그것을 폭로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나일 강에 지팡이를 들이미니까 핏빛으로 변한 것은 이집트 제국이 누리는 풍요의 밑바닥에 피가 흐르고 있음을 폭로한 것입니다. 미물들이 동원되는 열 가지 재앙도 평소에는 파리 목숨처럼 여겨졌던 눌린 자들의 집단적 저항을 상징합니다. 폭로와 저항을 통해 제국의 해체와 붕괴를 가져오는 것이 출애굽 해방 사건이었습니다. 구약의 평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가치체계를 제시하는 데 이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제국에서 고기 맛에 절어 있던 자들에게는 매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거기 가면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식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젖과 꿀'이라는, 이들이 발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체계를 제시했습니다. 누가 누구를 유린하지 않고 평화적인 공존의 삶,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안식과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공동체적으로 훈련하고 실현하는 것이 광야의 삶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마틴 루터 킹은 "나에겐 꿈이 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에서 왜 흑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에서 소외되어 있는가, 우리도 같은 테이블에 참여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반면에, 말콤 엑스는 "너의 꿈은 내겐 악몽이다."(Your dream is my nightmare)라면서 미국의 꿈같은 풍요와 번영의 밑바닥에는 흑인들에게 악몽과 같은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이런 제국의 질서에 대한 저항이 평화의 근본적 자세이고 성서와도 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비판적 논평으로 이름이 높은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천재적 언어학자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인물입니다. 그의 언어관은 '변형생성문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사유방식에 따르면, 언어는 한 상대에게 주어져서 암기되고 재생산되는 주입식 경로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개성과 창조성에 의해 새로운 언어의 세계와 그 나름의 창조적 문법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짓밟는 것이 폭력이고 평화를 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암 촘스키가 강대국의 대외정책을 바라보는 관점도 이렇게 정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입장을 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동물에게 인간이 이름 붙이는 것을 보시고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자신과 다른 생명체와의 첫 관계를 개인이 주체적 판단을 가지고 맺도록 하는 것이죠. 인간의 주체적 자율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한 권위주의적 중심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각 나라의 말을 가지고 서로 한 뜻으로 통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각자의 중심이 보장되면서 서로에게 열린 방식으로 연대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인간 하나하나의 존엄성을 지켜주면서 공동으로 연대하는 대안이 기독교 평화운동에서 지향해야 할 인간과 인간, 나라와 나라 사이의 질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현백: 저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사회학적으로 볼 때 기독교는 매우 호전적인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그 형성기의 척박한자연환경이나 사회적 환경이 상당히 전투적 종교를 만들어내었기 때문이지요. 또한 척박한 사막지대에서 고난을 받으며 형성된 초기 기독교에 토대를 두고 성서가 씌어졌지만, 로마제국의 국교화 이후로 기독교는 서양에서는 고난 받는 종교가 아니라 지배체제와 결탁하여 군림하는 종교로 존립해왔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출발할 때의 평화와 관련된 성서적 근거와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적 입장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오늘의 차이를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에 대한 설명이 나와야 합니다.


  저도 토마스 뮌쩌와 재세례파의 관계에 대해 석사논문을 썼습니다만, 퀘이커나 재세례파의 민중적 종교개혁은 루터의 정통종교개혁과는 그 입론에 있어서 차이를 보였고, 이들 민중적 종교개혁은 무자비하게 탄압을 받았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평화주의적 근거는 오늘날의 주류 교회의 속성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답변이 기독교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주류에 해당하는 한국 기독교가 평화 실현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적 판단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한국여성단체연합〉이나〈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등은 퀘이커에 속하는 미국 친우봉사회의 지원으로 시민단체 실무자들에게 갈등 해소와 관용교육을 실시했고, 미국에서 평화교육 실습도 하였고, 국내에서 이를 확산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6월에는 여·야 의원들과 시민단체 대표들이 함께 미국의 정치 지도자, 언론, 한반도 전문가 집단을 방문하여 한반도 평화에 대한 시민사회의 입장을 알리고 그들을 설득할 계획인데, 이 역시 미국 친우봉사회가 지원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퀘이커재단의 활약은 대단합니다. 평화주의의 신념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평화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촛불시위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한〈한국기독교총연합〉의 집회였습니다. 그것은 평화운동에 대한 큰 타격이었습니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볼 때 기독교는 평화운동을 진척시키는 세력이 아니라 평화운동에 제동을 걸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성서적으로는 평화주의라는 의견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사회자: 김민웅 목사는 성서의 평화는 어디까지나 약자의 생명을 지켜내는 저항적 비폭력 형태의 평화라고 말씀하셨고, 정현백 선생은 역사적 현실의 기독교는 성서의 그러한 평화사상과는 거리가 멀게 호전적이고 전투적이며 세계 평화를 이루는데 도움되지 않고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정현백 선생이 제기하신 문제, 즉 성서의 평화와 현실 기독교가 자행하고 있는 반평화적 행태와의 간극 문제, 특히 현실 기독교의 반평화적 행태들에 대해 성서의 평화주의를 말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어떤 해답을 말할 수 있을까요?


김민웅: 정현백 선생의 이야기에 당연히 동의합니다. 제가 말한 것은 제가 믿는 바의 평화에 대한 성서적 근거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한국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도리어 평화운동의 적이 되고 있습니다. 부시도 자신을 선악의 판단자로 삼는 기독교 원리주의적 관점을 내세워 평화를 무너뜨리는 선봉에 서 있고요. 심각한 문제입니다. 기독교 전반의 방향전환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곧 선악의 절대적 판단자 또는 심판자가 되는 것, 이야말로 성서가 지적한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선악과 사건의 본질입니다.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생각은 그런 점에서 실상은 반기독교적인 것입니다.


  지난 2주 동안 한국에서 여러분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진보적 평화의  입장을 가진 이들을 기존의 신학교 교단이 수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성서와 현실 기독교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보적 평화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어 이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들이 변방에 몰리지 않도록 힘을 결집해서 역사를 끌고 나가는 주역이 되게 해야 합니다.


박성준: 정현백 선생 이야기에 백 이십 프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 비평화적 흐름과 대립하여 존재하는 소수의 평화지향적, 진보적 흐름을 강화하자는 김민웅 목사의 이야기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대립구도로만 문제를 볼 때 기독교의 잠재력을 평화의 물줄기로 돌이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대립은 대립을 재생산할 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능성은 보수의 늪과 같은 거대한 기독교 속에 숨어 있는 맑은 샘 같은 존재들을 찾아, 그 가능성을 크게 인정하면서 작은 흐름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저도 어떤 해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관심 갖고 있는 것은 개신교, 가톨릭을 막론하고 어마어마한 시간과 에너지, 재력을 동원하여 신심 깊은 사람들이 성서를 반복해서 읽으며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정현백 선생 이야기처럼 결국 헛돌고 있는 셈입니다. 성서 공부가 현실에선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대신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합니다. 저는 성서를 조명해 주는  다른 참고자료들을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목숨 바쳐 지키려는 사람들이 성서만 달달 외웠겠습니까? 그들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 세상의 참고자료들을 공부했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성서읽기 못지않게 신앙적 자세로, 가톨릭에서 많이 사용하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같은 방법으로 읽어야 합니다.


김민웅: 제가 말씀드린 것은 진보-보수 이분법적 대립으로 접근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대립적 갈등의 현실이 있다는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주변화된 평화세력에게 사회적 힘을 실어주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에서 가급적이면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박 선생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성서 외적 자료도 중요하지만 성서 자체를 어떻게 읽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기독교 신앙인들과의 진솔한 대화를 위해서라도 성서를 어떤 시각에서 이해하도록 하는가가 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런 노력이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나 성서의 내용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신학교나 교회에서 이루어진다면 폭력을 용인하고 강자의 질서를 수용해버리는 방식으로 성서의 본질적인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자: 기독교 평화운동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양극적 태도와 실천이 있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한 쪽에서는 힘의 논리를 통한 평화운동으로서 정의로운 전쟁을 이야기하고, 한 쪽에서는 고난에의 참여를 통한 평화운동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기독교 내에서 심각한 갈등으로 오랫동안 존재해 온 문제입니다. 이 둘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갈 것인가는 쉽게 풀어지지 않을 과제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팍스 아메리카나 속의 평화 실천의 길은?


사회자: 기독교의 평화가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 맞선 '팍스 크리스티아나'(Pax Christiana)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 평화의 가장 큰 위기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팍스 크리스티아나의 신앙을 가진 기독인들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어떻게 인식하며 평화운동을 전개해야 할까요?


이삼열: 팍스 아메리카나는 오래된 이야기인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소련 사회주의권이라는 대항권, 견제세력이 있었으므로 상당한 제약이 있었습니다. 파워게임이나 핵 경쟁 가운데도 어떤 합의된 틀에서 소극적 평화, 즉 전쟁이 없는 상태를 지속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21세기의 팍스 아메리카나는 완전히 일방적 독점과 전체주의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마치 2천 년 전 로마의 세계 지배처럼 완전히 미 '제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 유엔은 완전히 통제력을 잃었고, 미국 단독으로도 군사작전을 실행할 수 있다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할 것인가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 지역만 하더라도 미국의 제국주의, 군사주의가 굉장히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작년 9월에 마닐라에서 WCC를 중심으로 세계화 시대의 테러와 반테러 전쟁의 의미에 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미국의 군사주의와 패권주의가 아시아 국가들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만 보더라도 결국 힘의 논리에 밀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군 철수를 주장하다가도 미 2사단을 한강 이남으로 뺀다고 하니까 더 이상 미군철수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높았던 반미 물결도 지금은 가라앉아 버렸죠.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의 미 제국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군 기지를 철수시켰던 필리핀도 다시 미군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몇 되지도 않는 사람들이 하는 독립운동을 알 카에다와 연결시켜 소탕 작전을 벌이기 위함입니다. 인도네시아의 보수적 군부 세력은 발리 사태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와 결속하고 있고,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에서도 힌두교, 이슬람 근본주의와 군사주의의 결탁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은 더욱 커지는 상황입니다. 동북아에서 서남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군사적 간섭이 팽배하고 있고, 아프가나스탄 전쟁 이후 전통적인 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도 미국 통제 하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동구권 민주화 이후에는 동유럽도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중동에서조차 미국의 군사력이 상존하게 되면 미국은 전능한 파워를 과시하게 될 전망입니다. 경제적 세계화화 함께 군사적 지배가 정착되는 것이죠.


  유엔의 통제력마저 상실되어가는 마당에 대안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한반도는 미국의 군사주의, 팽창주의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북한이 하나의 위험 요인으로 상존하는 우리에겐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반도가 미국의 이런 군사적 질서와 무관한 적이 없었습니다. 가쓰라 태프트 조약 이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대동아 전쟁에 억지로 참여했고, 분단, 베트남 파병,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침략에 파병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세계 평화에 우리가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정현백: 저는 이삼열 선생이 말씀하신 팍스 아메리카나가 왜 우리에게 먹혀들고 있는가를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경우 핵심은 경제적 이해관계입니다. 이라크 전쟁을 석유전쟁이라고 하는데, 그 외에도 유로와 달러의 갈등관계도 전쟁의 동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전쟁 전에 이라크가 석유대금을 유로로 결재하도록 하고, 이럴 경우 생겨날 유로화 강세현상에 대한 미국의 염려가 전쟁을 일으킨 또 다른 원인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흥미 있는 것은 북한도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미국 사람들은 이 전쟁을 마지못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수행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캘빈 이후의 예정설, 어떤 이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영원히 선택되었다는 확신이 선악에 대한 명백한 이분법을 만들어내고 기독교인들에게 스스로가 선한 존재라는 신념을 심어준 것이라고 할까요? 과거 신분 세습에 의해 기득권을 유지하던 귀족들과는 달리 근대의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재능, 능력에 기초한 합리성을 신봉했습니다. 이들의 경제적 성취와 기독교 신앙에서의 확신이 스스로의 모순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이런 기독교적 근본주의와 자본주의적 성공신화의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도대체 이런 팍스 아메리카나가 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론조사에서 반전을 지지하는 비율이 80퍼센트까지 올라갔는데도 파병안을 통과시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저는 도대체 파병안을 추진하는 핵심 세력이 누구인가 의문을 가졌는데, 이라크 재건 작업이나 달러 주도 하의 세계경제체제에 한국이 한 몫을 갖기를 열망한 경제 관료들의 목소리가 강력했다는 후문을 전해 들었습니다. 정확한 진실은 확인되지 않지만,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지요. 우리 국민 자신이 미국에 의존한 경제성장의 신화에 집착하고, 경제적 불이익을 받을까 전전긍긍하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평화에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진정한 평화운동을 하려면 지금의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를 포기하려는 확고한 확신과 신념이 있어야만 합니다. 한국인이 반전을 지지하면서도 파병은 찬성하는 모순의 설명 고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경제대국 11위로서의 우리의 이해관계, 이 지독한 약육강식의 경쟁체제를 포기하지 못하는 한, 평화를 실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약소국의 외교는 어느 정도는 실리주의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경우는 이윤추구의 속성이 심각한 수준까지 와 있습니다. 우리의 실리주의에도 도덕주의 사고가 혼합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퀘이커의 공동체 생활이나, 환경운동에서 기대하는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 같은 개념과 평화운동이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환경문제, 공동체 생활을 통합적으로 연결하는 대안체계나 대안사회의 신념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 없이 말해지는 평화는 수사에 불과합니다.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반대도 우리 내면에 있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반성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박성준: 문제의 근원을 직시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장기적인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이라크 전쟁 때처럼 평화를 지키기 위해 급박하게 행동해야 하는 단기적 대응도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장·단기 대응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북핵 문제 역시 소수의 진보적 세력만 가지고는 역부족입니다. 평범하고 보수적인 다수, 어떤 면에서는 평소에 다소 친미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평화에 눈을 뜨고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장·단기적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아시아의 평화, 세계 평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김민웅: 정현백 선생이 제기한 유로 문제는 정확한 이야기입니다. 유로와 달러의 대립은 서구 제국주의 내부의 대립 내지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차 걸프전도 유럽이 독자 방위군을 만들겠다, 유럽 연합 체제를 굳건히 하겠다, 등의 움직임이 있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유럽의 헤게모니 도전에 대해 강력한 제동을 걸고자 했던 것이고, 유로에 대한 자세도 그러한 입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심각한 것은 미국 대중들이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나라를 선의 제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1960년대 베트남 반전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던 시기,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했던 이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을 이른바 '복지 제국주의(welfare imperialism)'라고 비판했습니다. 다 너를 위해 하는 것이야 라는 식의 발상과 논리로 제국주의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이 생각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적으로 말하자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광야를 전제로 합니다. 광야의 자유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비록 노예상태지만 고기 가마의 적선에 넘어갈 것인가의 선택에 한국 기독교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경제적 문제에 대한 태도 변화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겠지요. 스콧트 니어링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생태적 삶과 운동의 선구자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제국주의에 급진적으로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사람들이 인식으로는 그의 제국주의 비판이 맞는다고 동의하면서도 몸은 따라와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니어링은 삶의 스타일과 내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을 시도한 것입니다. 반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온 몸으로 실천해나간 것이지요. 제국의 고기 가마를 거부하고 젖과 꿀의 현실을 이루겠다고 한 것입니다. 스콧트 니어링의 이러한 시도에 뜻을 같이 하는 저로서도 장기적 차원에서는 정현백 선생이 말씀하신 대안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장 시급하게 행동해야 할 문제들도 있습니다. 전쟁은 갑자기 터지는 것이 아니라 상당기간 그 조건들이 축적되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전쟁도 자본주의의의 모순, 파시즘의 대두, 전쟁통제력을 상실한 국제질서의 붕괴 등이 이어지면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축적시키는 조건을 면밀히 주시하며 폭로하고 위기를 각성시키는 작업 또한 삶의 근본 변화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전쟁의 조건이 일정하게 축적되면 전쟁은 불가피해지는 쪽으로 인식됩니다. 이번 한미 회담의 문제는 전쟁의 위협을 축적시키는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민족 생존과 관련된 주도권만은 넘겨서는 안 됩니다. 이 주도권을 놓치게 되면, 그 이후 일어나는 사태 앞에서 경제도 정치도 다 소용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정책 하나 하나가 전쟁의 위협을 증대시키는 것인지 완화시키는 것인지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문학적, 정서적 분석과 이러한 논의의 확산이 중요합니다.


평화를 위해 한국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자: 팍스 아메리카나를 추구하는 세력의 평화 위협과 한반도의 전쟁 위협 속에서 우리가 평화문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장·단기적 전망과 실천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이삼열: 교회의 평화운동 원칙과 방도 역시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당시의 팍스 로마나는 가난을 양산하고 '오클로스'(민중)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 체제였습니다. 그런 시대와 체제 속에서 가난한 자들, 갇힌 자와 눈먼 자들에게 기쁨과 해방을 주는 복음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운동이었습니다. 예수는 평화를 주고 가지만 그것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예수의 태도는 헤롯이나 로마 지배층으로 볼 때는 반체제였기 때문에 평화를 위해 일한 예수가 평화를 교란한다는 죄목으로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원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회퍼도 그 길을 따른 것이죠. 이처럼 팍스 로마나 같은 질서의 세계에서 기독교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과제에 대해서는 WCC가 지난 2001년부터 전개하고 있는 '폭력 극복 10년'(Decade to Overcome Violence, DOV) 운동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처음 그 운동을 시작할 때 우리는 폭력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그 폭력은 전쟁만이 아니라 세계화, 경제적 글로벌리즘, 빈부 격차를 일으키는 구조조정 같은 구조적 폭력, 나와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에 대한 적대적 행동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조적, 문화적 폭력의 극복이 기독인의 윤리적 책임입니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십자가를 져야하는 현실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평화운동이 수난을 겪고 있고, 미국에서도 평화 운동가들이 경찰들의 과격한 진압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제3세계나 다른 나라에서는 지금까지는 미대사관 앞에서 평화롭게 시위를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억압이 강화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평화선교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신앙의 차원에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으로 각오하고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입니다.


  한편 팍스 아메리카나에 저항하는 이들의 폭력도 우리는 거부해야 합니다. 저항은 필요하지만 미국을 고정된 악으로 보고 직접적인 폭력저항이나 자살테러를 하는 것은 긍정할 수 없습니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에서도 무게 중심을 잡기 어렵지만 북한의 핵개발만큼은 우리 역시 단호하게 경계하며 비판하고 막아야 합니다. 양극화된 세계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폭력은 기독교 복음에 어긋나므로 거부해야 합니다.


정현백: 저는 오늘 기독교를 비판하러 왔습니다.(웃음) 저는 기독교인이 십자가까지 질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구체적인 실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평화를 어떻게 대중적으로 접근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확실한 대중동원을 할 수 있는 두집단은〈민주노총〉과〈한기총〉뿐입니다. 이 두 집단의 대립이 지금 남·남 갈등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간극을 어떻게 메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동안 진보적 기독교는 보수적 기독교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평화를 실현하는 다양한 통로가 있는데도, 조용한 접근보다는 첨예한 대립의 방식을 사용해왔습니다. 물론 작은 일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보수적 기독교의 반공주의가 더 문제이기는 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좀 더 비판적으로 성찰하자면, 진보적 운동 역시도 단순한 이분법을 내면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친미는 나쁘고 반미는 좋다는 식의 이분법이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고립을 자초하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천주교, 기독교, 불교가 반전·평화운동으로 대중을 동원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평화 실현의 의사소통 망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자가라는 고달픈 은유보다는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요즘의 한국은 이미 전쟁 중에 있습니다. 〈교총〉과〈전교조〉는 아이들을 볼모로 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NEIS' 자체가 지닌 인권침해 여부를 국민이 토론해야 하는데, 그보다는 전교조와 교총의 갈등만이 매일 지면을 장식합니다. 이런 언론의 접근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평화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부나 양 당사자 모두가 접근방식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한국적 상황에서 교회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 안에서 갈등 해소와 중재의 담론을 개발하고 통용시키는 것입니다. 파병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한〈조선일보〉가 가장 먼저 '이라크 돕기 운동'을 시작했던 점은 참 아이러니입니다. 조선일보에서 걷는 이라크 성금의 액수와〈한겨레신문〉의 성금 액수는 비교가 안 되겠죠. 파병안은 반대하지만 이라크 성금 모금은 재빠르게 착수하는 이런 정서에 우리가 개입해 들어갈 여지가 없는지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여성운동은 '평화기행'을 시작했습니다. 백령도, 매향리 같은 군사주의가 남긴 갈등의 땅을 돌아보며 평화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평화 장난감 갖기, 평화심성 기르기처럼 평화를 위한 감수성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일을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핵문제의 전략적 대응은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시민단체나 전문가 집단이 주력을 담당하고 교회는 평화심성을 형성하는 문화적 차원에 더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김민웅: 십자가의 길과 대중의 길 중 어느 편에 설 건가는 그때마다의 현실에서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져야 하고 어떤 사람은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는 것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돌파할 수 없는 상황도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것을 누구보고 지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 바로 나 자신이 져야겠지요. 그런데 평화는 혁명을 요구합니다. 혁명이 아니고는 바뀌어 질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평화를 압살하려는 세력은 혁명적 의지가 아니고서는 물러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조건이 축적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장기적 비전과 단기적 실천이 결합되면서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고, 이 과정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세상이 달라지고 그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 신념, 자세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물론 이 모든 요건을 대중에게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혁명적 헌신과 희생을 감당해야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떻게 할 건가 하는 문제는 목회를 하는 저에게 일종의 중심 고민이기도 합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위로를 바라고 있을 때 역사와 사회를 이야기하거나 그 반대 경우, 즉 이제는 무언가 역사적 실천을 하기를 바라는 이에게 위로의 메시지가 전해지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어려움을 느낍니다. 대중의 다양한 요구와 삶에 쉽게 다가가면서도 근본적인 이야기, 실천을 촉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평화운동과 관련해서 기독교 신앙인의 동원이 어려운 이유는 미국과의 관계, 정치적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성과에 대한 평가도 정치적 문제 때문에 입장 설정이 쉽지 않고 미국과의 관계 정립도 각기의 입장에 따라서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저는 '반미'라는 용어를 다른 방식으로 정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일종의 반미주의자로 찍혀 있는데(웃음), 반미라는 말은 수구 세력들이 공격하기 좋은 소재입니다. 게다가 미국에서 우리와 연대할 수 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가로막기도 합니다. 또 이 단어는 우리를 수세적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운동적 차원에서도 문제가 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미국 연구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대응의 수준이나 밀도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영향력의 범위는 시대적으로 달라졌어도 본질은 같습니다. 19세기 말, 미국이 쿠바를 식민지화하는 역사적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독립국가를 만들어 주겠다며 해방자로 다가갔다가 결국 집어삼키는 점령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도처에서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미국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정립되어야 교회나 다른 곳에서도 미국과의 관계 정립에 대한 이야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동시에 한반도 정세에 대한 분석을 정교하게 하고 대중적으로 풀어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른바 '북핵' 문제에 있어서는-이 용어는 북한이 핵 위기를 주도했다는 식의 인식을 주어서 문제가 좀 있습니다만-북이 핵무장할 필요가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의 압박정책에 의해 위기상황으로 몰리는 북한으로서는 자신들의 무장을 정당방위라고 생각하게 되고 미국은 그것에 대해 공격적으로 치고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군사주의적 선택을 할 필요가 없게 하는 환경 조성이 중요합니다. 켈리가 지난 해 북한을 방문한 이후 미국에 돌아가 북핵 위기를 조장했던 것도 북한이 러시아, 중국과 관계를 더 밀착시키고 일본과 경협을 시도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미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북한의 핵이 아니라 동북아가 미국에 의존하는 정도를 낮추면서 자율적 질서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국이 제기하고 있는 북핵 위기의 이면에 있는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한반도,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생존환경을 보다 자율성 있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만드는 과정이 있으면 군사주의적 선택을 하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견과 분석을 교회 대중과 이야기할 수 있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평화에 대한 연구와 체험, 상상력이 중요합니다. 통일하면 돈이 많이 들어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통일하면 오히려 군사비를


삭감할 수 있고, 그 비용과 자원, 인력이 결합되면 서로 나아지는 긍정적 비전을 불어넣을 수 있는 평화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일반 대중이 꿈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평화가 이루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한 상상 말이죠. 존 레논이 노래한 '상상력'(imagine)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 말입니다. 이런 발상이 교회 개혁, 역사 변화까지 번져 나가야 하고 그로써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력을 줄어들게 할 것입니다.


정현백: 그런 점에서 저는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지식과 정보전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 사회의 반미주의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 왜곡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지난 해 촛불시위에 계속 참여했는데,〈여중생범대위〉에서는 오히려 반미나 미군철수에 대한 피켓팅에 대한 자제를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반미구호나 미군철수 구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주 소수의 움직임입니다.〈뉴욕타임즈〉등에서 청소년 인터뷰 등을 통해 반미의식을 과장해서 전달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가『역사비평』2003년 봄호에 쓴 글에서 한국의 촛불시위가 부시 정부에 비판적이면서도, 절제 있고 평화적인 집회였다는 사실에 경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왜곡되고 과장된 정보가 보수적인 국내 기독교나 미국에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박성준: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저도 정보의 바른 전달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합니다. 얼마 전 이라크 전쟁 중 린치 일병 구출작전이 조작으로 밝혀졌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우리는 전쟁 중 미국의 심리전이나, 전후 이라크 민중의 약탈행위에 대한 과장 등 미국 중심의 일방적 선전과 정보에 의해 오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자성해야 합니다. 우리는〈알 자지라〉방송도 그중 극히 일부를 영어로 번역된 것을 통해 듣고, 그것도 한국의 방송들이 채택해 주는 부분만 듣고 있습니다. 이런 정보의 불균형을 바로잡기 전에는 세계의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한스 블릭스 유엔 사찰단장이 미국은 사찰 결과에 상관없이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말한 것은 진실일 것입니다. 미국은 9·11 사건의 원인에 대한 반성 없이 보복부터 시작했습니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폭력의 악순환은 끝나지 않습니다. 벌써 보복 테러가 자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은 이제 이란을 지목하고 있고 북한을 끼워 넣고 있습니다. 이란을 공격하면 또 다른 폭력의 악순환이 일어나겠지요.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질 때 미국은 원인을 반성해야 했습니다. 9·11 희생자들의 피는 반성의 기회를 은총의 선물로 주었지만 미 제국은 그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랬다면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저는 테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9·11을 '테러'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애써 표현해왔지만 현시점에서는 '테러리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미국에게 침공의 빌미를 제공했고, 이라크 사람들과 유서 깊은 인류의 유적들을 파괴하게 만들었고, 미국 국민이 점점 더 집단적 광기에 사로잡히게 했고, 원리주의와 근본주의가 미국에서 강화되게 하고, 내년 미 대선에서 부시가 재선될 가능성을 확실하게 만드는 등 이러한 현실의 구실과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한 테러 행위는 어리석은 방법이었습니다. 분명히 어리석고 잘못된 방법이었으므로 테러리즘이었다고 봅니다.


  이제 우리는 두 개의 폭력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의의 이름으로 미화하면서 살육하는 국가 테러리즘이고, 다른 하나는 피에 대해 피로 보복하는 자살폭탄 같은 방법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심화시켜가는 그런 폭력입니다. 이 둘은 모두 테러리즘입니다. 이런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는 방법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나도 우리의 글로벌 체제에 대한, 우리 삶의 모든 것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시작해야 한다는 정현백 선생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존 체제에서 우리가 선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내년 미국 대선에 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투표권을 가진 미국인들은 부시를 선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가정일 뿐이지만, 지난 미 대선 때 고어와의 경선에서 만약 부시가 당선되지 않았더라면 9·11테러가 일어났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무튼 내년에도 부시가 당선되지 않을 가능성은 늘 있습니다. 우리는 대의민주주의, 투표의 합리성을 이용해야겠지요. 물론 미국의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경제체제와 결합된 경제패권주의, 석유자본, 군수자본 등과 결합된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는 약점과 불합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과, 보수적이지만 평화의 감성을 잃지 않고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폭력의 악순환은 안 된다고 결단하면서 선거에 적극 참여한다면 전혀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에서도 블레어 정권이 파병을 강행했을 때도 미국 독자적으로밖에 공격할 수 없게끔 영국 국민들은 참전에 반대할 수 있었고,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이후에 우리는 의지를 모아 한편으로는 정부에 압력을 넣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를 설득해 갈 수도 있어야 합니다. 방미 성과의 문구를 해석하는 과정을 지금부터 시작하고, 평화지향적 시스템을 찾아내서 활용해야 합니다. 그런 자원은 시민사회, 교회, 보수적 사람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그런 성찰이 필요합니다.



변화된 상황에서 북한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방청석: 정현백 선생이 한국 기독교 내 두 진영의 의사소통이 안 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동시에 시민사회단체 운동가들에게도 과거부터 지금까지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도 의사소통의 단절 문제가 있고 운동 양식에 반성할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식적인 생각에 귀 기울이지 않는 교조주의, 자기절대화 같은 것이 운동권에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요즘 초미의 관심사인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노무현 정부에 어떤 태도 변화가 나타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 직접적 계기는 북한이 핵보유를 공개적으로 시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인기는 없었어도 햇볕정책만큼은 상당한 지지를 얻었는데, 결국 6·15 정상회담도 돈거래 의혹으로 빛이 바랬고, 또 그 돈으로 북한이 무기를 사고 핵 개발을 하지 않았냐는 식의 비판도 팽배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상식적인 생각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시민들의 이런 의혹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함구해 온 반면 이른바 '조중동'만이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핵문제를 공개적으로 들고 나온 이상 이제는 정부의 대응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접근방법을 조정할 때가 된 것이죠.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결과도 그런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조건 햇볕정책만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선택의 폭을 좁혀 놓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운동권 내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이 필요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비판할 점은 분명히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정현백: 연초에 188개 단체들이 공동으로 성명서를 내면서, '북핵문제는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미국에 보다 근원적인 책임이 있지만, 북한도 핵무기를 통해 칠천만 동포의 생명을 위협하는 도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서는 보다 명확한 입장을 제시해야지요. 동시에 미국에 대해서도 북한 인권문제나 핵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이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과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핵무기 소지여부를 북한이 인정하면서, 문제는 심각해졌습니다. 북에 핵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북이 핵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우리만의 위협이 아니게 됩니다. 이 위기 상황을 빌미 삼아 일본도 핵을 갖게 될 테고, 그러면서 동북아가 핵을 둘러싼 긴장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미국의 오해입니다. 어떤 연구자가 미국의 정계·학계 관계자들을 약 2백여 명을 면담하고 귀국하였는데, 충격적인 내용을 전하더군요. 그들의 대다수는 남한 사람들 대부분이 북한이 핵을 갖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통일되면 북한 핵무기는 우리 거 아니냐?"는 청년들의 인터뷰를 실은〈뉴욕타임즈〉등의 기사가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또 워싱턴에는 북한붕괴론자의 주장이나 탈북자 문제를 주로 다루는 보수적인 한국 NGO의 의견이 주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갈루치는 사석에서 제네바협약을 성사시킬 때, KEDO를 위해 재정지원을 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전에 북한이 붕괴될 줄 알았다는 이야기지요. 이런 태도들이 북한으로서도 미국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든 측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일단 북한 핵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반대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핵문제 해결도 벅찬데 인권문제까지 제기하면 북한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유엔의 관심 표명 등을 고려할 때 이제는 북한의 인권문제도 거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조용한 외교입니다. 북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북한 인권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좋겠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흥미 있는 사실은 지금 북한 인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과거 군부독재 시절의 인권탄압에 참여하였거나, 거기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북한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 주민의 사회경제적 인권을 먼저 염려해야 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과감한 물자 지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와 관련하여서는 '평화적 해결'의 약속을 어느 정도 받아낸 셈이어서 그 나름으로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 자신이 너무 말 실수를 많이 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NGO의 입장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추가적 조치' 부분을 계속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박성준: 북에 핵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은 그것으로 위협하고 있고 미국은 그것을 이용해서 동북아를 주무르려 하고 있습니다.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에서는 미국의 선제공격을 통한 북한 핵 프로그램 폐기에만 초점을 두어, 그것만 막으면 다른 모든 것은 다 상관없다는 식이었습니다. 2사단 한강 이남 배치라는 말만 흘려도 한국정부와 시민들이 쩔쩔매는 등, 미국 손바닥에서 놀고 있는 꼴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어떤 전쟁이 될지 불 보듯 뻔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위기설이 유포되는 가운데 긴장 상황에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위기 속에 있으면서도 일상의 나날을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교회를 개혁하고, 사회에서는 사회를 개혁해야 합니다.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위기의 골짜기에서도 일상을 지혜롭게 사는 양식과 프로그램을 가져야 합니다.


  노 대통령의 방미 결과를 놓고 시민단체, 진보적 운동권 세력에서 성토식 대응을 하면 상대방의 귀를 막아버릴 것입니다. 그런 비판도 필요하지만 상대방이 솔깃해서 듣게 할 수 있는 의사소통 방식을 열어놓지 않으면 그나마 갖고 있는 정부의 합리적 대응력도 약해집니다. 노무현 정부를 너무 몰아붙이면 최소한의 협상력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위기의 때입니다. 운동권, 비운동권을 막론하고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입니다.


김민웅:  북한의 핵 문제는 핵무장 논란의 소지를 제공하는 북한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북한도 미국도 다 잘못했다고 하는 식의 양비론은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과정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비판의 강도와 중심이 혼란스러워지지 않게 하려면 "둘 다 책임 있다."는 식의 의견은 옳지 않습니다. 책임의 원인, 비중이 다릅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핵 비확산체제인 NPT(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는 불평등조약입니다. 기존의 핵무장 국가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다른 비핵국가의 핵무장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대신, 핵을 가진 나라는 갖지 않는 나라에 대해 선제공격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NPT 체제 아래 있던 북한을 선제공격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당연히 북한의 국가안보는 최고의 비상사태가 발생한 것이고 이에 대한 국가적 대응이 절박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핵무장 가능성을 유도하는 미국의 숨겨진 의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석에서 나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아직 공식화되어 있지 않기에 그 실상은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저는 비핵, 반핵 입장이지만 핵무장 자체가 그 나라에 대한 적대적 군사주의 노선을 채택할 근본적인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가령, 우리가 러시아나 중국이 핵무장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는 이유는 관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경우라면 또 다르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관계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일과 핵무장 문제해결을 함께 다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남한 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쟁 통제력 문제에 있어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결과는 유감스럽습니다. 그가 미국 의 전쟁 정책에 대해 반발하는 한국의 시위 역량을 외교적 역량으로 전환시키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국에서 남한의 반미가 거세지는 것을 우려할만한 카드로 제시하고 미국 내부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문제를 새롭게 수습할 수 있었던 근거를 상실하고 만 거죠. 협상에서는 터프한 면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는 터프해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별로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는 식의 'easy man' 소리나 듣고 왔으니 말입니다. (웃음) 미국의 부시는 현재 논리로 하는 설득 대상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논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세와 의지가 중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허물어지면 강대국이 제기하는 일방적 논리에 굴복하는 양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우리가 당면한 평화의 문제란 오늘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자 지구 제국의 피라미드형 지배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매우 어려운 위기에 늘 봉착하게 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의 평화운동은 바로 이러한 세계질서의 일방적 위계질서를 꾸준히 극복하는 가운데 약소민족과 약소국가들이 강자의 폭력에 유린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 핵심이 있다고 봅니다. 인간의 생명을 폭력으로 짓밟는 "제국에 대한 십자가적 투쟁을 포기하는 한", 의로운 평화를 일구어 내는 이 땅의 하나님 나라는 추상적 구호에 머무를 뿐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질서와 맞선 십자가의 현실에서 태어납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평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과 이를 이루려는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를 파괴하는 세력 앞에서 확신에 찬 용기를 요구합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믿음이 그 관건일 것입니다. 이걸 믿고 나서는 이들은 세상의 그 어떤 압도적 대세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믿음대로 살면서 평화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거는 진정한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를 실현해 낼 것입니다. 그런 힘으로 우리의 평화는 지켜지고 우리 모두의 권리가 되어갈 것입니다.


이삼열: 평화는 정의하기도 어렵고 정책 방안을 들고 나오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평화운동을 한다고 할 때 남북통일의 방안을 내놓는 것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정책적 결정은 그 시기 상황에 따라 선택해야 합니다. 보다 유리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책적, 전략적 과제는 정치인들과 평화통일 운동가들에게 맡기고 종교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에 관심 갖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는 평화를 주러 왔다고 하면서도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의 화해와 용납의 길을 만든 분입니다. 때로는 지배체제에 맞서는 일을 평화를 만드는 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말루프 섬에서 1999년에서 2003년 사이에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의 충돌로 9천여 명이 죽었습니다. 저도 가서 양쪽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다들 자기들 이야기가 맞는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 편만을 들 수 없었습니다. 양쪽 근본주의가 다 문제였으니까요. 자기들의 가치관과 입장만 절대시하고 저쪽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양극화된 대립과 적대 관계 속에서 남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는 작업이 더욱 필요합니다. 국제적으로는 종교간 대화, 기독교 전통의 상대화, 문화상대주의적인 검토들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의 노력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적대적 대립이 우리와 북한 사이에도 있습니다. 대립현상, 양극화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국정원장 임명과 관련된 논쟁을 보더라도, 북한 체제에 대해 연구하고 조금만 우호적이어도 빨갱이로 모는 편견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런 교조적 상황에서 어떻게 공존과 상생의 평화질서를 만들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하지만 북한의 이데올로기와 체제도 고쳐 나가는 노력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쪽을 다 비판하면서 화해시켜나가는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테러와 안티테러의 시대에서 우리의 선택지는 좁고 어렵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힘센 자가 압제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 하는 동시에 양쪽을 이해시키는 화해의 사명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부터 편견을 고치는 계몽은 꼭 해야 합니다. 우리의 편협하고 독단적인 태도를 고치지 않고서는 반평화적 현실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박성준: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전에 발표했던 '300인 선언'은 미국의 선제공격이 영변 핵시설만이 아니라 휴전선 일대에 배치된 북한의 장거리포 기지에 대한 일제 폭격이 될 거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신문의 기사를 포함했습니다. 제가 부시의 군사외교팀 멤버라면 저도 그런 시나리오를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북한이 자위 수단으로 장담하고 있는 것은 남한 수도권을 사정거리로 하는 1만 5천문 정도의 장거리포입니다. 그 사정권 안에 미군 2-3만 명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그것을 갖고 있는 한 미국이 자기들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선제공격을 한다면 이런 장거리포 기지를 폭격하게 될 것이고, 그 전에 평택 이남으로 미군을 이전하는 것이 선제공격의 전제가 될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군사행동이 감지될 때 북한 김정일 정권은 가만히 앉아 당하기보다는 모종의 자기 시나리오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반도가 위험합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수백만의 사망자가 나올 것이고 민족은 공멸할 것입니다. 한반도는 전쟁이 일어나서도 안 되고 전쟁이 불가능한 지역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걱정입니다. 이라크에서 미국이 최첨단 무기로 인명살상을 최소화하면서 단기에 끝내는 전쟁방식을 개발하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도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는 마당입니다. 일각에선 5, 6개월 안에 미국이 북한 선박을 검색하며 긴장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런 사태에 이미 동의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합니다. 원천적으로 전쟁이 불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미국과 북한, 전 세계가 알 수 있도록 할 우리의 시민적 각성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런 시작을 위해선 평화에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정현백: 결론으로 한 말씀드리자면, 한반도 비핵화는 우리가 철저하게 요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동시에 북한에 인도적 차원의 물자지원 역시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하고, 가능하면 정부는 남·남 대화를 통한 합의를 견인하면서 이를 추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단체는 다양한 연대 활동을 통해 남·남 갈등의 해소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인도적 지원을 위한 모금 활동도 해왔습니다. 지금은 이라크 피난민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 기독교인들도 정확한 정보를 공유하며 평화를 위한 일상적 실천에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데, 늘 사람이 모여 있는 교회 조직이 참 부럽습니다. 이 중요한 공동체를 평화실현을 위해 최대한 활용하기 바랍니다. 평화주체로서 한국교회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겠습니다.    


사회자: 평화의 길은 참 먼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평화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예수의 평화를 말하면서도 전혀 다른 평화를 생각하는 현실이 기독교와 우리 사회 안에 양극화를 이루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근본주의의 폐쇄성이 강할수록 우리 안의 대립이 더 크게 생겨날 것입니다. 이런 간극을 메우는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의 개발을 한국 기독교 평화운동의 우선적 과제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긴 시간 토론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