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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농부의 세계 공동체 체험기 2.
"세계 평화 일꾼들의 만남 광장,
우드부룩 컬리지" /
영국 퀘이커 스터디 센터(Quaker Study Center) (1)
처음, 세계 공동체마을 순례를 계획했을 땐 미국 퀘이커센터인 펜들힐에서 일년 정도 공부 한 후 순례를 떠날 욕심이었다. 그러나 펜들힐 장학금 확보에 실패하면서 다른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여기저기 귀동냥도 하고 자료를 뒤지면서 몇 가지 결론을 얻었는데
첫째, 세계에는 공동체들이 무지 많더라.
둘째, 또 상당히 다양하더라. 고로 가서 배울만한 곳은 너무도 많다.
셋째, 어떻게 차비만 마련해 가면 별도 경비 요구없이 먹여주고 재워주는 공동체도 꽤 있더라. 물론 몸이 피곤할 각오는 해야 한다.
요 대목에서 백 배 용기를 얻게됐다. 촌놈이 내세울 거라면 10년 농사로 다져진 몸뚱아리가 기중 쓸만하지 않던가! 여기저기 신청서를 보낸 끝에 몇 군데서 오케이를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두세 주 정도 머물 수 있는 곳들이었다. 외국이라곤 10여 년 전 필리핀에 회의 차 열흘 다녀온 게 전부인데, 그나마도 주최측에서 준비한 대로 따라 다녔기에 대민 접촉(?)이라고는 거의 못 해본, 그야말로 외국 나들이는 쑥맥인 셈이다. 버스 한번 갈아타보질 못했으니 처음 외국 나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고민 끝에 긴 순례 길의 교두보로 선정한 곳이, 영국 퀘이커 스터디 센터인 '우드부룩 컬리지'다. 영국이 퀘이커의 발상지이고 방문코자 하는 공동체들이 여럿 있는 데다 약간의 유기농업농장과 잘 가꿔진 숲과 정원이 있어 정원 일 돕는 자원봉사자를 받아주는 제도가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서둘러 이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우드부룩으로부터 받은 답장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9, 10월에는 여유가 없어 11월에나 볼룬티어(자원봉사자)가 가능하겠고 그나마도 2주밖에 배려할 수 있다는 우드부룩의 응답이었다. 두 주도 감지덕지할 처지이나 처음 서너 달 머물 교두보가 꼭 필요한 입장에선 성에 차질 않았다. 무조건 가서 부딪혀 보자는 생각으로 우드부룩 컬리지를 첫 목적지로 결정하고 출발했다. 외국생활에 적응하는 기간을 서너 달 잡고 우드부룩에서 지내며 퀘이커들의 삶과 사상에 대해 알아도 보고 부족한 영어실력도 끌어올리고 다른 공동체들에 대한 자료도 모으자는 욕심이었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 기착지에서 나는 기대보다 많은 것을 얻었다. 우드부룩컬리지는 긴 순례 길 교두보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정원과 농장의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숙소와 식사를 제공받고 일을 않는 기간은 정해진 요금의 반값만 지불하기로 했다. 일할 때와 식사시간(매끼 1시간)을 이용해 부족한 영어를 숙달시키는 기회도 마련됐다. 우드부룩은 모든 사람들이 공동식사를 하는데 테이블에 둘러앉아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게 된다. 서양인들은 식당에 식사를 하러 온 건지 대화를 위해 온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많다. 그러다 보니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덩달아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우드부룩에는 길게 서너 달부터 짧게는 주말 사흘간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 세계각국(주말에는 주로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기 때문에 다양한 주제의 대화와 정보를 나눈다. 나는 여기서 영국은 물론 독일, 네덜란드, 인도, 파키스탄, 터어키, 아랍, 중국, 인도네시아, 우간다 등의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방문할 공동체를 소개받는 행운도 얻었다.
우드부룩에서 나는 가든 볼룬티어, 즉 정원일을 돕는 ‘자원봉사자’였다. 하루 다섯시간씩 가드너 바니씨와 함께 정원과 농장에서 일을 했다. 우드부룩은 2만여 평에 달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한다. 건물 앞은 확 트인 잔디밭으로 가꿔져 있고, 수형이 잘 잡힌 수십 년 생 회향나무 등 50여 그루의 정원수가 적절히 배치돼 고풍스러우면서도 너무 조밀하지 않아 전문가적 식견으로 오래전부터 관리돼 왔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잔디 정원 한가운데 달팽이 진을 만들어 놓았는데 방문객들이 걸으면서 명상을 즐길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들어 놓았단다. 아마도 인도 아쉬람에서 모방한 듯 하다. 잔디 정원 끝날 즈음에 자그마한 호수가 있는데 천연림에 둘러싸인 깊은 밀림 속에 들어와 있는 분위기다. 나이를 알 수 없는 큰 나무들이 마냥뿌리를 뻗어가다 물을 만나자 부끄런 줄도 모르고 속살을 다 드러낸 채 한가로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호수에는 천둥오리 10여 마리가 마실을 자주 오는데 먹을 것이 마땅치 않은지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호수 한편으로 작은 보트 보관창고가 지어져 있는데 그나마도 정원의 경치를 한결 격조있게 만든다. 호수를 건너면 숲이 시작된다. 숲은 언제부터인지 자연이 원하는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음이 분명하다. 그냥 내버려 둠으로서 자연이 마음껏 줄 수 있었고 스스로 가꿈으로서 천연 숲을 만들어 놓았다. 산책하는 이들이 엉겅퀴에 긁히지 않을 정도로 그저 오솔길을 조금 다듬었을 뿐이다.
우드부룩을 찿는 사람들은 숲을 한 바퀴 돌고는 대개 ‘원더풀’을 외친다. 프로그램에 참가해 강사의 이름은 못 외워도 가드너 바니씨 이름은 기억하고 간다 할 정도다. 가드너 바니씨는 이곳에서 10년 정도 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처음 우드부룩의 숲과 정원을 계획하고 기초한 사람덕에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을 듣고 있다.
숲과 더불어 자그마 한 사과 과수원, 700여평 정도 되는 유기농업 농장도 있다. 농장에서는 약간의 채소와 딸기, 블루베리, 꽃들을 키워 채소 과일은 식당에서 이용하고 꽃은 강의실과 사무실을 예쁘게 장식한다. 숲과 잔디를 관리하다 보면 풀과 낙옆, 잔가지 등이 많이 나오는데 농장 한껸에 차곡차곡 재 두면 훌륭한 퇴비가 된다. 겨울이 가까워 오면서 나는 내년 농사를 위해 거름주는 작업과 오솔길 가에 엉겅퀴 제거하는 작업을 주로 했다. 어쩌다 날이 들면 잔디 깎는 작업을 즐겼다. 비가 자주 오는데다 영국 특유의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에 (하루에 열댓번 변하는 날도 있음) 잔디 깎는 기회 한번 만나기가 힘들긴 해도 조그만 자동차 타입 기계에 앉아 태평스레 정원을 빙빙 돌며 잔디를 깎다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그 재미가 쏠쏠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로 가기위한 준비과정에 참여하며 함께 머물던 쌍둥이 아빠, 독일 헤르만목사가 딱 한번만 이 일 좀 하게 해달라고 바니씨에게 통사정을 했건만, 끝내 기계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낙옆만 쓸다 독일로 돌아갔다.
아침에 가든 사무실을 찿아 가면 가드너 바니씨는 그날 해야 할 일의 종류와 필요성 등을 내게 자세히 설명한다. 설명이 끝나면 내가 무슨 일을 원하는지 물어본다. 우리네가 일 시키는 방식과는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잠시 머무는 봉사일꾼 일지라도 의견을 묻고 상의하면서 지시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찿아 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려 신경써 주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러나 언뜻 영국인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먹고 살고 선진국이 됐는지 신기하다. 네델란드 공동체에서 15년전 만나 결혼했다는 팀, 한 부부가 유기농업농장 벽돌담 쌓는 봉사자로 한달간 머물렀다. 이들 부부가 한달간 머물며 한 일은 고작 벽돌담 6m정도 쌓은 것과 쉼터 용 구조물 한평 정도를 만든게 전부였다. 우리네 기술자들이 이틀이면 넉넉히 끝낼 일이다. 그런데 팀, 한 부부는 용돈도 안 주면서 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고 불만이 많았다. 우리네가 일거리 있으면 후딱 해치우고 또 다른 일을 찿고 하는 모습이 다소 으아스런운지 ‘일은 뛰면서 하는 게 아니’라며 바니씨는 몇 번씩 강조 하곤 했다.
우드부룩에선 보트 창고 옆에 차이니스(중국) 정원을 만들기로 2년 전 결정했다 한다. 게시판에 모형도를 그려 놓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으는가 하면, 멀리 에딘버러에서 차이니스 정원 전문교수를 초대해 자문을 구하는 등 정말 오랫동안 철저하고도 꼼꼼하게 준비하는 모습을 역력히 살필 수 있었다. 10월 중순 경, 나는 거창한 사업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게 됐다. 줄자와 말뚝, 해머 등 경계 설정에 필요한 도구들을 수레에 챙겨 싣고는 한껏 부풀어 있는 가드너 바니씨를 따라 드디어 현장에 도착했다. 바니씨 주문 대로 줄자와 말뚝(사실은 손가락 굵기의 댓가지)을 들고 이리 저리 막뚝을 다 꼿자, 2년간 준비했다는 거창한 차이니스 가든의 실체가 드러났다. 전체규모가 10평 남짓 될까 말까 한 그리 많지 않은 평수였다. 정원가운데 산을 만든다며 흙 반 트럭 정도 날라다 놓은 것이 보였다. 연못으로부터 운하를 만들어 동산 주위를 돌아 다시 연못으로 순환하게 하고 동산에는 바위 서너 개를 얹고 차이니스 나무 두 그루를 심을 계획이란다. 운하와 동산 주변에도 역시 나무 서너 그루를 심는단다. 운하를 건너고 동산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도록 오솔 길을 이리저리 만들 거라며 바니씨는 너무도 열심히 설명했다. 석등이나 정자는 계획에 없냐니깐 그것까지 마련하기는 힘들단다.
다음 날부터 나는 운하 파는 대 역사(?)를 시작해 사흘만에 공정의 90%나 진행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다음 날부터 비가 자주 오는 바람에 완성치 못하고 독일 공동체들을 방문 하고 돌아왔을 때 바니씨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병수 없는 동안 차이니스 가든이 많이 진행돼 크게 변했는데 가 보았소?” 곧 우드부룩을 떠나 부루더호프, 인도 등 다른 공동체 방문계획과 준비로 바쁘기도 하고 비가 자주와 질척이는게 싫기도 하여 쉽게 가 지질 않고 미적이고 있는데 볼때마다 묻는 통에 큰 맘 먹고 어느날 아침 일찍 현장을 가 보았다. 연못까지 운하가 관통됐을뿐 크게 진행된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나중에 물으니 나무와 동산 등은 겨울 지나고 내년 삼월에 진행할 계획이란다. 오랫동안 대 역사를 통해 완성된 운하의 실제 모습은 길이 10m 남짓에 폭 50cm, 깊이 40cm 정도의 도랑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럼에도 바니씨의 그런 모습이 허풍스러워 보이거나 밉지가 않았다. 너무도 진지하게 계획하고 추진하는 모습이 오히려 눈여겨 보여진다 해야 할까? 급히 서둘지 않고 일을 차근차근 되짚고 따져보는, 그러면서 우리네가 사소하게 스쳐 보낼 수 있는 것들에서도 의미를 찿으려는 그런 모습이 좋게 느껴졌다. 특히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을 즐기는 태도는 나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영국 퀘이커 스터디 센터(Quaker Study Center) (2)
우드부룩컬리지는 정규 대학과정이 아니다. 그래서 학위와는 상관없는 곳이다. 1870년경 퀘이커 교도인 죠지 케드베리라는 거부가 살던 집을 퀘이커 교단에 기증하면서 우드부룩컬리지가 탄생했다. 죠지 케드베리는 쵸코렛회사 주인이었는데(지금도 영국에 ‘케드베리’ 쵸코렛회사가 있다.) 버밍험이 산업혁명 당시 공업도시로 발전할 때 우드부룩이 있는 셀리옥 일대 땅들을 모두 사들여 버밍험대학, 셀리옥컬리지, 우드부룩컬리지 등에 기증했다 한다. 버밍험 도시 전체가 여느 공업도시처럼 삭막하기 이를 데 없지만 셀리옥만은 나무와 숲, 호수, 실개천이 잘 어우러진 녹색도시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한다. '개처럼 벌더라도 정승처럼 쓰라'고
우드부룩을 굳이 우리 나라 실정에 맞게 표현하자면 기독교내 작은 교파의 훈련원(혹은 기도원) 같은 곳이다. 그러나 운영하는 내용과 모이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도저히 우리 나라에서는 비슷한 곳을 찿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가졌기에 그러려니 하면서도 -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1936년)와 우리 나라 함석헌선생(1963년),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 안정된 재정과 인력을 갖추고 운영되는 걸 보면서 그들의 사상에 자연스레 관심이 쏠렸다. 대부분 규모있는 공동체들이 출판사를 가지고 있는데 우드부룩 출판 부서는 웬만한 전문 출판사를 능가한다. 출판되는 책들을 보면 이들의 관심, 시대정신, 역사를 잘 알 수 있고, 사상을 나타낸다. 조그만 낱장 짜리 홍보물 하나를 내더라도 끊임없는 토론과 검토과정을 거치고 있다 한다.
겉으로 보기에 조그만 스터디 센터(수용인원이 1회에 최대 50명을 넘지 않는다)에 프로그램 계획책임자, 기획 교수단(7명이 넘는데 모두 상근하며 박사학위자가 세 명-이들이 강의와 모임을 이끈다), 펀드 및 모금 조성 책임자, 재산투자 책임자(이익의 3%를 배당 받는다), 넘쳐나는 자원봉사자들 - 기간은 2주, 1개월, 6개월 단위 등 다양하다. 특히 도서관도 우드부룩의 자랑거리인데 아담하면서도 고풍스럽다. 소장된 자료의 규모나 방대한 양은 놀랍고 부럽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1500년대 기록부터 10만여 종의 자료와 3만여 권의 장서들이 소장돼 있다.
우드부룩이 운영하는 프로그램 참가비는 상당히 비싸다. 2박3일 주말 프로그램이 우리 돈으로 20만원, 3박4일 평일 특별프로그램은 27만원, 일주일 프로그램의 경우 40만원 정도한다. 이렇게 비싼 경비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이 늘 넘쳐난다. 그만큼 프로그램 준비에 정성을 쏟은 결과일텐데, 내용이 상당히 다양하고 구성원들에게 꼭 필요한, 관심을 갖고 있는 내용으로 준비됐기 때문인 듯 하다. 동원된 참가자들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자기 필요에 따른 참석자들이기에 참여 태도부터가 능동적이고 진지하다. 강의 시작 후에 입장하거나 중간에 나가는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다. 교육, 홍보분야 일을 오랜 동안 담당한 경험자로서, 우드부룩에서 영국 퀘이커들을 통해 가장 부러웠던 것 하나를 꼽으라면 회의, 교육에 참석하는 구성원들의 태도이다. 그들의 능동적이고 진지하고 성실한 참여자세, 이것이 재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네가 오랜 독재정권, 권위주의 사회를 지내오면서 교육이고 회의고 모임이고 구성원들의 의견이나 관심은 무시되고 동원대상, 들러리로 치부돼 온 경험이 많다 보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이런 모임,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계적이고 진지한 토론과 교육, 훈련 과정을 통해 퀘이커는 얼마 안되는 숫자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평화운동, 비폭력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보다.
우드부룩컬리지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저력은 아무래도 퀘이커들의 깊은 영성에 근거한 듯 하다. 우리네 기독교 풍토와는 사뭇 다르게 퀘이커들은 자유로우면서도 진지하다. 매일 아침 30분, 저녁 15분 일요일은 1시간씩 종교모임을 갖는데(Worship이라 부름) 매우 독특하다. 참석자들이 둥그렇게 앉아 침묵(!)한 채 그냥 앉아 있다가 시간이 되면 옆 사람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는 게 전부다. 예배라고 굳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여느 교회들 처럼 지도하고 설교하는 목사 없이 자원봉사직인 인턴들이 돌아가면서 문 앞에 서서 안내만 한다. 눈을 뜨고 멀뚱히 앉아 있는 사람, 눈 감고 있는 사람 제 각각이다. 가끔, 정말 어쩌다 월십 중에 일어나 몇 마디 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의 영적 체험을 프랜드들과(같은 교인을 'Friend'라 함) 나누기 위해 증언('Witness')하는 거다. 월쉽중 '증언'들은 모두 녹음하여 기록을 남기는데, 퀘이커 교단 전체에 중요한 제안을 하는 이도 있다 한다. 중요한 제안은 모임에서 토론과 대화를 통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한다. 중요사안을 결정할 때, 퀘이커들은 전통적으로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다. 구성원 중 한 명이라도 다른 의견을 내면 채택이 보류된다.
퀘이커에서는 개인의 영적 체험을 중요시 여기는데 이 때문인지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도 너무(?) 관대하고 넉넉하게 포용한다. 우드부룩에는 인근 셀리옥컬리지나 버밍햄대학 과정에 참여하면서 비싼 체제비(1일 8만원 정도)를 내고 단순히 숙소만 이용하는 방문객도 함께 머물고 있다. 얼마 전 파키스탄에서 온 이슬람 교수 '나힘'이 저녁 월쉽에 참여해 이슬람 기도송을 틀자고 제안했다. 놀랍게도 아무도 반대 않고 이슬람 기도송이 틀어졌다. 저녁 월십때는 참석자의 제안에 따라 가끔 음악을 튼다든지 좋은 글을 낭독하곤 하지만 타종교의 기도송을 허용하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닐텐데도…. 지난 11~12월 이슬람 '라마단' 기간에는 라마단의 의미와 배경을 설명하는 리플렛이 게시판에 게제되고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함께 하루라도 금식을 하자는 제안이 붙고, 일요일 오후 2시간 동안 이를 경험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이날은 인근에 사는 무슬렘 신자들이 많이 찿아와 그들 전통방식의 예배를 드리고 기도송을 틀었다. 퀘이커 신자들과 우드부룩의 디렉터(학장) 제니퍼를 비롯한 스텝들은 함께 둘러 앉아 침묵한 채 다른 날 처럼 앉아 있었다. 이날 프로그램은 무려 세 시간 정도 진행됐는데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다만 끝날즈음 우리나라 한 가족이 인사차 잠시 들렀다가(무슬렘 참석자 한사람과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는 친구라고 함) 아이의 투정 때문에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모든 의식이 끝났을 때는 이미 한 밤중처럼 어두워져 있었고 파키스탄인 가족들이 정성껏 만들어 왔다는 회교 정통음식을 함께 나누며 한데 어우러져 한참동안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땅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깊이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지난 가을 뉴욕 트레이드빌딩 테러와 미 영의 아프칸공격이 진행중이어서인지 내 맘속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얼마전 '불교, 퀘이커 그리고 메디테이션(meditation)'이라는 제목으로 나흘간 진행됐는데 '진핌'이라는 저명한 불교학자를 초대해 강의도 듣고 그들의 참선을 직접 해보기도 했다. 퀘이커들은 불교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특히 '진핌'과 베트남 망명 승려이며 평화운동가 '팀 나한'의 책을 많이 애독하는 듯 하다. 우드부룩에 머무는 동안 나는 특히 티쳐 '팀 나한'을 알게 되고 그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너무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의 책 "평화가 있도록(Being Peace)"은 친구, 선배들에게 편지로 소개하기도 하였고 가능한 여러 사람과 감동을 나누고 싶어 틈틈히 번역을 하고 있다. 같이 가든 일을 하던 영국 퀘이커 '레이첼'은 대학에서 힌두교를 전공하고 인도 아쉬람 등을 방문해 경험하며 힌두교를 이해하려 노력했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미,영의 아프칸 공격이 터지면서 우드부룩 사람들에게 들은 의견은 '이러면 안 된다' 였다. 토니블레어나 '더 타임'지 같은 보수신문들이 방방 뜨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드부룩은 물론 퀘이커 교인 전체가 보복공격이 시작되기 전, 토니블레어와 부시에게 보복전쟁을 반대한다는 성명서와 서한을 서명하여 보냈다 한다. 나도 일요일 날 셀리옥 인근 퀘이커 모임에 참여했다 편지에 서명을 하였다. 미국 퀘이커들은 워싱턴에서 반전 시위도 했다 한다. 우드부룩에서는 계획에도 없던 워크샵을 잡았는데 제목이 '이슬람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Muslim is not our enemy!)' 였다.
퀘이커의 진지한 영성이 밑거름 되어서 인지 이들의 삶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청렴하다.(이들은 Simple하게 산다고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소외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나 정의로운 실천이 요구되는 현장에는 적극적으로 달려가곤 한다. 그것도 드러내지 않고. 한국전쟁시 우리나라에도 찿아와 병원을 운영했다 한다. 퀘이커 중에는 큰 재산가들이 많다고 하는데, 죽을 때 재산을 퀘이커 재단에 헌납하는 이들이 많다. 영국이 퀘이커 발생지임에도 전체 교인이 28,000명뿐이고, 미국에는 18,000명뿐이라는데 이렇게 튼튼한 재정을 갖춘 재단이 여럿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인가 보다.
열심히 이들의 워십에 참여는 해보지만 온갖 상념만 떠오르고 명상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걸 보니 진정한 영적 체험을 경험하려면 나는 아직도 멀었는가 보다.
(2002년 1월, 김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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