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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문국현과 심상정 너머, 초록당이 '한다' (주요섭, 070921)

by 마리산인1324 2007. 9. 23.

 

<초록정당을 만드는 사람들>

http://www.koreagreens.org/news/articleView.html?idxno=554

 

 

문국현과 심상정 너머, 초록당이 '한다'
2007년 10월, 초록당의 의미와 전망

 

 

주요섭(초록만사 정치대변인)

 

2007년 09월 21일 (금) 12:29:27 편집부 koreagreens@koreagreens.org

10월 20일, 대선의 소용돌이 속 초록이 ‘한다’

초록이 뜬다. 아니 초록이 ‘한다’. 드디어 초록당이다. 올해 초부터 초록정당의 창당을 결정하고 ‘전환의 기획’과 ‘체제전환의 상상력’을 토론하던 초록정치연대가 대선 바람의 한복판 그 소용돌이 속에서 오는 10월 20일 발기인대회를 열고 한국형 초록정치를 선언한단다. 신문 정치면 기사 식으로 말하자면, 견고한 기반이나 뚜렷한 ‘세력’이 눈에 띠지 않는데다 대선후보는 고사하고 이름난(?) 지도자 한 명 없이, ‘창당’ 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고 한다.

 

초록정치는 그렇다 하더라도 ‘창당’이라니. 그 진부하고 무겁고 딱딱한 일을? 벌써부터 머리가 복잡하다. 그런데 각주를 살피듯 그 전에 먼저 확인해 둘 게 있다.

 

‘녹색’이 아니고 ‘초록’이란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영어로는 녹색도 초록도 모두 Green이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어린이들에게는 더 이상 ‘녹색’이 없다. 2003년 정부가 기존의 일본식 색깔 이름 체계를 바꾸면서 ‘녹색’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물론 녹색도 관용적으로 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라나는 미래세대가 그 색깔 이름을 모른다면... 더 중요한 이유는 ‘초록(草綠, green grass)’이 녹색이 가진 환경의 표피적 이미지를 넘어 생명, 평화, 영성, 풀뿌리 등의 가치를 보다 깊고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색깔 이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적색과 백색, 흑색을 떠올리면 확실히 녹색보다는 초록이 낫다.

 

새로움인가 저항인가. 기왕의 그린(Green) 정치는 모두 녹색이었다. 녹색평화당(2002년 지방선거), 환경연합의 녹색후보(2002년 지방선거), 장기표씨와 한국노총, 그리고 녹색평화당 잔류파 일부가 모여 만든 녹색사민당(2004년 총선), 그리고 최근 민주노동당의 녹색정치선언까지.

 

낯설다. ‘녹색당’은 보통명사인데 ‘초록당’은 여전히 그들만의 고유명사다. 언제 보통명사가 될 수 있을지 기약할 수도 없다. 이름뿐만이 아니다. ‘초록공명’이나 ‘초록바람’은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초록+정당’도 생경하고, 더욱이 ‘바람보다 빨리 눕는 풀’처럼 연약한 초록이 정치광풍 휘몰아치는 대선판에 나타난 것도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책이 뭔지, 주체가 누군지, 초록정치 그 자체가 아직은 묘연하다.

“근대정치 아니고”

필자가 사람들을 만나며 지역을 다니면서 숱하게 들었던 얘기가 있다. 왜 꼭 정당을 해야 해요? 누군가 또 묻는다. ‘근대정당’이 아니라면 ‘탈근대정당’을 만들자는 건가요? 운동권 매체들도 매번 이런 식이다. ‘초록정치’ 하자는데, 어김없이 ‘환경운동의 정치세력화’라고 정리해준다.

 

‘초록’은 뜨는 것도 대변하는 것도, 어느 후보처럼 건설하는 것도 아니다. ‘한다’. 마치 동학 접주 김구선생의 체천행도(體天行道)처럼,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한다. 좋아서 한다. 요컨대 ‘한다’는 것은 스피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초록으로 산다는 것이다.

 

앞에서 초록이 ‘뜬다’고 했지만 인터넷신문 타이틀에서 그럴 뿐, 아니다. ‘뜬다’ 라는 말은 엔터테인먼트 세계에서 부침하고 명멸하는 스타들의 짧은 생애 중 깜박 빛나는 한 시기를 표현할 때 목격된다. 하지만 필자의 머릿속에선 전형적인 운동권 용어 중 하나일 뿐이다. 80년대 수많은 투쟁조직들이 떴다가 사라졌다. 수면 아래 있다 수면위로 떠오르기도 하고, 가끔은 혼자서도 떴다. 필자는 이 말이 싫어 조직은 ‘건설’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조직이란 자고로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튼실한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믿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오늘 조직이나 사업은 뜨는 것도 엔지리어니링에 의해 건설되는 것도 아닌 듯하다. 근대정신을 촘촘히 구축해야 할 시대에 ‘건설’은 진보적이었지만, 정보화시대, 생명의 시대에 이명박의 그것처럼 ‘건설’은 퇴행이다.

 

그러므로, ‘세력’은 더욱 아니다. 세력(勢力)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보여주는 힘의 과시다. 얼마 전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한 이른바 시민사회운동 ‘세력’도 사실은 그저 세력일 뿐이다. ‘건설’의 토대위에 구축된 세력은 그나마 낫지만, 이 경우엔 메시지도 없는데다 기반도 턱없으니 부족하니 그 폼새가 더욱 안쓰럽다.

 

굳이 말하자면, ‘형성(形成)’된다고 표현하는 게 그럴듯하다. ‘모양을 이루다.’ 예컨대 유목적 삶과 정착적 삶의 교직. 그것은 형성되는 것이다. 갖가지 풀과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고, 그 숲속에 사자와 양이 더불어 뛰어노는 세상. 공명과 공감의 초록대안 네트워크, 그것은 뜨거나 건설되지 않고 아름답게 형성되어진다. 자기조직화(self-organizing)의 정치학이다.

 

초록이 녹색이 아닌 이유, 물론 표현의 차이가 아니다. 패러다임이라고 말하건 요새 유행하는 ‘프레임’을 빌리건 기왕의 사고체계와 시각, 틀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다. 초록정치연대의 생각을 다시 읽어본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문제의식이 비교적 잘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정치 개념이 요구된다. 한 마디로 근대정치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 근대정치는 기본적으로 ‘규모’과 ‘세력’의 정치이다. 그리고 규모의 세력화를 통해 지배력을 획득하는 ‘권력’정치다. 권력정치, 대중정치, 엘리트정치, 일국정치, 국민정치, 중앙집권정치, 패거리정치, 줄서기정치, 다수결정치 등등

 

그렇다면 초록(생명)정치, 혹은 탈근대정치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정치결정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정치로써 세상을 구하겠다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또한 국가와 시장을 넘어서겠다면, 좌-우도 넘어서야 한다. 우리의 고민은 소박하다. 생명과정의 원리인 관계성, 순환성, 다양성, 그리고 창조성이 실현되는 정치가 그것이다. 수직/수평적 관계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는 연기적 관계망으로서의 ‘관계성’ 정치. 신분으로 고착된 정치꾼과 정당 논리를 깨고,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 위와 아래를 넘나들며 대의정치의 썩은 물을 정화하는 ‘순환성’ 정치. 보수와 진보, 성장과 분배와 넘어서 비자본주의, 비성장주의의 대안적 상상력이 백화제방(百花齊放) 하는 ‘다양성’ 정치. 바로 이것이 생명의 정치학 아닐까.

 

우리는 꿈꾼다. 깨달음의 정치, 자율정치, 매개정치, 전환의 정치, 차이의 정치, 상생의 정치, 풀뿌리정치, 자기조직의 정치, 생성의 정치, 신나는 정치, 삶의 정치, 소수자 정치, 지구정치, 문화정치, 작은 정치, 네트워크정치, 사이버정치... 정치가 ‘민(民)’의 사회적 자기조직화라면, 정치는 ‘자치(自治)’이며, ‘협치(協治)’이고, 창조로써의 정치(創治?)이다.

정당문제도 그렇다. 정당은 이미 근대의 구조물. 대의제, 혹은 대변형 민주주의의 뼈대를 이룬다. 정당은 (권력)정치를 하지만, 민초들은 정치로부터 배제된다. 아니다. 이제 민초들이 정당을 버리기 시작했다. 한국사회만 봐도 그렇다. 근대정치의 근간이 채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근대정당이 위기를 맞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 나라 정당정치의 전근대성을 조롱하지만, 서유럽의 정치학자들과 미래학자들은 정체성의 혼돈과 당원수의 급감 등을 예시하며 30년 후 사라질 근대의 구조물 중 하나로 ‘정당’을 꼽는다. 그렇다면, 근대정당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더라도, 목표가 탈근대 ‘정당’은 아니다. 초록이 권력의 획득을 목표로 하지 않듯이.

초록, 체제의 전환을 말하다

                              유럽연합 초록당 홍보 이미지(출처: 유럽연합 초록당)

 

초록 ‘하는’ 사람들은 삶을 바꾼 사람들이다. 사회의 변혁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이미 바꾸었거나 바꾸려는 사람들이다. 초록정치는 생각과 생활을 바꾼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려는 사회적 공모다. 초록은 말한다. 세계관의 전환, 생활양식의 전환, 나아가 체제의 전환. 그리고 그 전환의 키워드는 생명과 평화다.

 

경쟁력의 최상층에 낄 수도 없고 들어가고 싶지도 않은 소박한 사람들, 허름한 사람들이다. 섬 전체가 바닷물에 잠길 위기에 처했다는 태평양 한 가운데 투발루라는 섬나라 주민들의 이른바 ‘기후난민’ 이야기는 극단이라도 치자. 몸이 아프면, 숨을 쉴 수 없으면, 불안이 엄습하면, 먹고사는 게 치통처럼 고질적인 걱정거리가 되면, 생명이 절실하다, 평화가 절실하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삶의 전환뿐만 아니라, 구조, 체제의 전환을 말하려 한다. 개별적 인 실행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금 두루뭉수리 하지만, 속도와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조건 없이 더불어 주고받는 세상을 꿈꾼다. 느리고, 작고, 예쁜 세상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만들려 한다. 비자본주의, 비성장주의, 비근대의 대안을 모색한단다. 국가와 시장의 한계를 동시에 넘어서는 새로운 뭔가를 찾는단다.

 

그렇다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체제의 전환을 실행에 옮길 정치조직이 필요하다. 초록당. 초록당은 체제전환의 아방가르드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고 생각하는 이들과 먼저 말을 걸고, 선거시기엔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해준다. 초록세상의 메신저다. 생명의 위기를 정치사회적 의제로 만들고 가능하면 제도적 수단도 강구해야 한다.

하지만, 초록당만으로 체제의 전환이 가능하리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이중전략이다. 정당정치와 비정당정치, 제도(=선거)정치와 비제도정치. ‘반(反)정치의 정치’를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존 정치질서에 대한 근본적으로 저항하면서 동시에 선거정치에 참여해 발언한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최근 어느 미국학자가 언급했다는 데로 패권국가 미국의 숨은 지배자는 부시가 아니라, 초국적 거대기업연합이다. <인류의 미래사>라는 책에서는 그것을 지구에 대한 ‘초거대기업’의 지배라고 표현한다. 미국 초록당은 강령에서 미국사회를 ‘기업지배체제’라고 말하고 있다.

 

‘숨은 지배’에 대해서는 ‘숨은 대안’으로 맞서야 한다. 그 대항마는 누구일까. 민중들의 집권, 혹은 노동계급이 관리하는 국가일까. ‘숨은 지배’의 궁극적 대안은 ‘보이지 않는 공명’이다. 물병자리의 공모와 같은 민초들의 생명력, 그리고 그것들의 네트워크이다. 출렁이는 생명그물의 약동이다. 생태적 균형과 사회적 관계, 문화적 정체성이 온전히 살아있는 지역 공동체(넓은 의미의)와 그들의 네트워크, 그리고 전지구적인 생명가치 지향의 정신문화 장(field)의 형성이다. 지역전략과 문화전략으로 요약된다.

 

영성정치, 생명정치를 말씀하시는 어느 어르신은 아주 간명하게 ‘이니셔티브의 정치학’이라고 표현했다. 초록정치는 하되 제도정치에 함몰되지 마라는 것. 오히려 조선일보의 그것처럼 사회적 의제를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체제전환의 상상력을 현실로 만드는 다양한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조직적으로는 민회(民會)라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돌아가신 생태정치학자 문순홍 님을 비롯해 생명운동의 선배들은 일찍이 ‘생명운동의 정치형식은 민회’라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초록정치는 끊임없이 제도와 운동을 넘나들며, 초록의 가치와 문화를 확산하고 대안적 체제의 가능성을 탐색하며 또 실험해야 한다. 초록당 안에서도 다른 비전, 다른 조직문화로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상상력을 현실로. 이를테면 이럴 것들이다. 생명지역권(bio-region)에 따라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통일된 한반도의 형태는 자치체연방이다. 지역에게 내각제든, 직접민주주의든 정치제도를 결정할 권리를 준다. 국회를 양원제로 만들어 생명대표성에 의거해 상원을 구성한다. 지방자치단체는 왜 시군립학원만 지원하나. 대안학교, 홈스쿨링 지원조례도 만들자. 이중당적도 상관없다. 동물도 당원이 될 수 있다. 중앙위원도 제비뽑기로 선출한다.......

문국현과 심상정, 그리고 초록

전환의 시대는 혼돈의 시대, 초스피드 근대화-산업화를 자랑하는 한국사회는 그 극단을 내달았다. 한 사람의 생애 안에 세 개의 문명이 공존한다. 산업화와 탈산업화가 공존하고,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가 혼재되어 있다. 농촌의 자식들이 산업화의 역군이 되고, 이들의 세대가 끝나기도 전에 정보화사회(자본의 또 다른 변신이지만 여기선 논외)가 습격해 다른 사회에선 전통으로 인정받았을 것들을 퇴물로 만들어버렸다. 민주화 20년만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운위되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어지러운 이합집산은 오던 길을 부끄럽게 만든다.

 

바로 그 전환, 혹은 혼돈의 한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2007년 대통령선거다. 민주화의 적자라 자부하는 이른바 범여권은 지리멸렬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내가 일하는 동안 너희들은 뭐 했냐” 며 용맹하게 질책하는 건설의 역군은 지지율 50%를 오르내리는 유력한 대통령후보가 되어 당당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진보정당도 사회발전의 단계를 따지면 한번쯤은 마땅히 서유럽 좌파정당의 영광을 누려야 하겠지만, 산업화 초-중기에 머물고 있는 베네수엘라나 브라질을 공부하는 걸 보면 앞만 보고 가는 ‘진보(進步)’도 미래로의 길을 찾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 와중에 문국현이 떴다. 가짜경제와 진짜경제의 패러다임 전쟁을 선포했다. 기대주라는 원망(願望)도 있고 작전주라는 냉소도 있지만, 대안부재의 난기류 속 올 대선판에서 문국현은 하나의 현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른바 범여권 주자 중에서 그는 거의 유일하게 건설족과 명쾌하게 선을 긋고 신자유주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언명한다. 성장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자본주의의 기형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분명하다. 무릇 정치란 한 사회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할 때, 다른 사회적 진로를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그 지평을 넓혀주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공동체의 운명을 토론하는 것이 정녕 정치 아닌가.

 

그러나 초록의 시각에선 20% 부족하다. ‘기후변화’와 당대의 문제가 된 환경재앙을 차치하고서도 말이다. ‘사람중심 진짜경제’ 좋다. 하지만 초록의 입장에선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가짜경제’ 대 ‘진짜경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생태 우선이 아니라, ‘생명가치(holistic life value)’ 대 ‘경제가치(economic value)’의 구도, 정확히 말하면 생명가치의 전일성에 대한 통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원래부터 경제(economy)는 생태(ecology)의 자식 아닌가. 경제는 생태적 균형과 사회적 관계, 영성문화적 차원을 아우르는 생명계의 큰 틀 안에서 존재한다. 시장의 계산법대로 하더라도 사회적 비용, 생태적 비용, 그리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영혼의 비용을 어찌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이 나와야 공기청정정기와 정수기가 없어 가난한, ‘근대적 빈곤’의 착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일자리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무한 소비의 욕망을 무한히 확대재생산하는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시장/자본 유일지배체제에서의 ‘공포와 불안’의 경쟁구도를 ‘삶의 보람’과 ‘공동체적 연대의 기쁨’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초기 독일 초록당의 경제 강령의 모토는 ‘의미 있는 일, 더불어 사는 삶(Meanigful Work, Living in Solidarity)’이었다. 중소기업 경제론이 ‘신(新)성장동력론’에 그친다면 초록의 입장에선 아니다.

 

정치공학적으로 볼 때에도, 이명박과의 경제 논쟁은 장기적으로 유리하지 않다. 자칫 잘못하면 ‘코끼리 프레임’에 갇힐 지도 모른다. 경제성장 중심 논리의 카운터파트로써 다른 세상에 대한 기대를 실어야 한다. 필자가 볼 때, 반한나라당 정서의 기저는 이것.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 형성된 공동체, 평등, 이상주의의 멘탈러티가 이명박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문국현은 실낱같은 희망일 수 있지만, 성장의 신화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국민들과의 위너게임에선 답이 안 나온다.

 

한편 문국현에 대해 진보는 “일자리와 중소기업의 컨셉은 긍정적이지만, 경영만 있고 경제는 없다”고 대립의 각을 세운다. 하지만 성장과 경제라는 맥락에서는 민주노동당 후보들이 말하는 ‘인간적인 성장’이나 ‘서민을 위한 성장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양극화,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의 질서를 막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분배론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녹색평론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심상정의 ‘지역공동체 활성화’ 공약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그것이 서민을 위한 성장과 삼박자 경제에 살짝 붙어있는 악세사리에 그쳐서는 안 된다. 국민경제가 여전히 GNP경제의 다른 이름에 머물고, 통일경제가 사실상 남북 시장통합을 의미하는 한 (경제를 포함한) 전일적 생명순환의 지역공동체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지역’ 의제가 빛나는 공약이 되기 위해선 정녕 생명 패러다임에 대한 천착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양의 경제에서 질의 경제, 삶의 경제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초록의 몫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의 대안을 모색하고 토론하며, 또 책임있는 정책을 창출하는 노력은 훌륭하다. 하지만, 문국현도 진보성장론도 삐끗하면 또 다른 선진화담론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특히 문국현의 경우, 기형적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은 90년대 주류 시민운동의 성장과도 맥을 같이 한다. 진보가 80년대적 운동문화에 젖어있는 것과 비슷하게. ‘합리적 시장’, ‘성숙한 시민사회’, ‘건전한 정부’ 등등. 간단치 않은 다층적 함의를 가진다. 초록의 입장에선 개혁과 진보, 초록이 따로 또 같이 만나는, 덧셈이 아닌 ‘곱셈 연대’의 과제를 숙고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초록의 선거정치, 생존할 수 있을까?

최근 일본의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초록당(Japan Greens)이 한 명의 지역구의원을 배출해 한국의 초록정치 활동가들을 고무시켰다. 이번 선거에서는 일본민주당의 추천을 받은 도쿄생활클럽 소속 참의원도 한 명도 당선됐다. 류하이라는 이름의 에이즈환자인 일본초록당 최초의 참의원은 아마도 아시아 최초의 초록당 국회의원일 것이다. 부러운 일이다.

거대 정당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문국현과 민주노동당 사이 한국 초록당의 자리를 존재할까. 초록이 대선국면에서 다소 뜬금없이 창당을 말하는 것은 2008년 총선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총선에서 3%, 혹은 5%의 정당지지를 통해 ‘초록의 정치적 시민권’을 얻고, 제도정치 진입의 교두보를 마련해 2010년 지방선거에서 지역에서 개혁-진보와 연대해 풀뿌리 초록정치를 실험하겠다는 것이다. 초록정치의 본격적인 무대는 2010년인 셈이다.

 

그렇다면 초록정치의 첫 관문, 내년 총선에서의 3%(2002년 총선 투표율 60%기준으로 약 65만표) 득표는 실제로 가능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만 되면 대성공이라고 말한다. 알 수 없는 일, 우선 과거의 비슷한 예를 살펴보자. 한국에서의 좁은 의미의 초록정치, 즉 초록의 제도정치 진입노력도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녹색평화당, 녹색후보, 그리고 초록정치연대 등.

 

2002년 지방선거에서 일부 녹색연합 임원들을 중심으로 녹색평화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비롯해 7개 시도에서 비례대표 후보를 내는 등 초록정치에 도전했다. 전북에서 4.8%를 얻는 등 일부 시도의 정당투표에선 적지 않은 득표율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환경’과 ‘초록’은 아직 정치적 이슈에 불과했고, 대안적 가치와 전망도 불명확했다. 풀뿌리운동, 생명운동 등의 지지와 참여도 거의 부재했다. 그런 탓인지 녹색평화당은 초록정치의 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선거직후 사실상 정치활동을 포기했다.

 

같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환경운동연합이 녹색자치위원회를 만들고 고양시에서 시장후보를 내는 등 전국적으로 50여명의 ‘녹색후보’를 냈다. 고양, 부산, 서울 등에서 기초의원 15명이 당선되는 성과를 얻었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초록정치연대의 의원단으로 결합했다.

 

초록정치연대는 ‘녹색후보’의 성과를 토대로 2003년 녹색정치준비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됐다. 그리고 지난해 5.31지방선거에서 10명의 현역 지방의원 포함해 21명의 풀뿌리초록후보를 냈으나 기초의원정당공천제가 실시된 데다 한나라당의 싹쓸이 분위기 속에서 2명이 당선되는데 그쳤다.

 

2006년도 지방선거의 결과는 초록정치 실험에 좌절감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 ‘풀뿌리정치’조차도 무당파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기초의원 정당공천제란 악재가 결정적이긴 했지만, 민주노동당이 각 지역에 현실적인 힘으로 존재하는 조건에서 정치조직 없는 풀뿌리 초록정치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2007년의 초록당 창당 시도는 어떨까. 역시 ‘현재로썬 예단키 어렵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단 대선 결과와 이후의 정치지형의 변화를 쉬 예측할 수가 없다. 더욱이 초록정치의 제도정치 진입시도도 총선에선 처음이다. 비교적 오랫동안 준비했고 환경단체들과 시민사회단체들과의 교감도 적지 않지만, 전폭적인 지지와 참여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분위기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살림 생협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운동 그룹과 공감대의 폭이 넓혀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지금 생존 여부를 답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번 초록당 창당 움직임은 한국사회에서 거의 최초의 본격적인 초록정당 창당 시도라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심장하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분산되었던 초록정치 역량이 한 데로 모아지고 나름대로의 대표성을 가진 조직 틀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최소한 ‘범진보’ 안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실체로 성장할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혹 대선이라는 현실정치무대에서 작지만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할 경우 총선 전에 정치적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선과 한반도평화체제, 그 이후

대선에 대해 일부 범여권 인사들은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지만, 숨은 지배자들은 매우 견고하다. 경쟁적 시장논리는 이미 국민들 마음 속 깊이 내면화되어 있다. 더욱이 잃어버린 10년을 저주하는 이들의 투쟁은 처절할 정도로 치열하다. 마치 반독재투쟁 전사들의 그것처럼. 또한 선진화담론은 생각보다 치밀하다. 그러니 한방에 날아갈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런 이유 때문에 거꾸로 초록의 여백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오히려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변수가 너무 많다. 그 여백의 성격과 크기는 대선결과와 그로 인한 정치적 지각변동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더욱 결정적인 변수는 대선기간 동안 벌어질 지도 모를 한반도 정세의 변화다. 대선이나 한반도정세나 물론 초록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그 자체로 진보의 정체성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분단체제의 해체는 바람직한 일이지만, ‘민주화의 역설’처럼 ‘평화의 역설’이 진보의 해체를 강요할 지도 모른다. 더욱이 한국정부가 거론한 남북FTA가 적나라하게 시사하듯, 평화체제가 남북 시장통합으로 이어진다면 그 결과는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 될 것이다. 오히려 통일강국의 환상속에 애국주의가 어디로 튈지 우려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환상만은 아니다. 시장 통합이 가시화되면 북한 개발특수 속에 한국 자본주의는 제2의 부흥기를 맞을 수도 있다.)

 

초록도 독자적인 길을 가건 더불어 가건 그 격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도의 우경화 혹은 수구보수의 중도화, 개혁-진보 대연합, 중도좌파 정당의 등장 등등. 운동과 정치의 재구성이 현실화될 경우,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긴 전망, 그랜드 디자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때쯤이면 개혁-진보와 초록의 곱셈 연대도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먼 훗날 문국현이 이야기하는 연정의 가능성도 천천히 검토하는 때가 오지 않을까.

 

 

                                                                       주요섭(초록만사 정치대변인)

 

*이 글은 [환경과 생명] 2007년 가을호에 실린 글로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초록만사의 공식적 입장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