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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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의 종교사상
10강, "귀일사상"
- 하나, 하나님께 돌아가기.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는 한국적 종합사상 -
- 박 재 순 -
1. 서로 다름과 하나됨
지구화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공존.공생하는가에 있다. 지난 인류역사는 타자에 대한 정복과 폭력의 역사였다. 죄는 타자(의 경계)에 대한 두려움, 분노, 미움을 품는다.
한국.아시아인은 '나'가 우리 속에 해소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속에 하나되는 경향이 두드러지지만 타자의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고 '우리' 안에 갇히는 경향도 있다.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히브리즘과 기독교는 타자인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있으나 다른 인종종교문화에 대한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 개체의 고유한 인격과 개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추구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하나되는 차원을 열고 있다.
2. 다석사상의 핵심: 귀일(歸一)
다석 사상의 핵심은 '하나로 돌아감'(歸一)에 있다. '위로 솟아오름', '가온찍기'도 하나에 이름이다. 그가 늘 말하는 '고디 곧게'(貞)도 몸과 마음의 하나됨을 뜻한다. 위, 하늘도 하나이고 한가운데도 한 점이고 허공도 '없음'도 무극(無極)도 하나님도 하나이다. 다석에게 '빔'과 '없음'의 절대세계는 나뉠 수 없는 하나이다.
다석에 따르면 예수가 이루려 했던 하나님의 뜻은 "우주전체(宇宙全體)의 생명(生命)이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이 되게 하시랴는 아버지의 뜻"(요한복음 17장 22-3절)이다.(유1, 663)
다석은 한사상을 바탕으로 '한'을 추구했다고 본다. 1964년 12월 25일에 천부경을 옮겼다. '한'을 근원과 밑둥으로 보았다. 첫 귀절 一始無始一을 "한 비롯 없는 비롯 하나"로 옮겼고 끝 구절 一終無終一을 "한마침 없는 마침 하나"로 풀었다.(다일4. 497) 한문을 그대로 우리 글로 옮겼으나 '한'이 근원과 밑둥임을 잘 드러냈다.
삼일신고에서 집일함삼(執一含三)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원리로 내세운다. "하나를 잡아서 셋을 포함하고, 셋이 만나서 하나로 돌아간다."(한단고기. 235-6쪽) 하나와 셋의 만남과 일치는 삼위일체와 통한다. 국악인 황병기는 한국예술문화에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한'과 '셋'의 일치는 서로 다른 것을 회통하고 귀일시키는 경향과 원리를 품고 있다.
3. 귀일(歸一): 하나님께 돌아감
1)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생
다석에 따르면 인생과 만물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歸一)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시작해서 종당에는 하나로 돌아간다. 대종교가나 대사상가가 믿는다는 것이나 말한다는 것은 다 '하나'를 구하고 믿고 말한다는 것이다."(까막눈. 1,833-36) "인간은 사랑의 대상을 찾는다...마음 그릇이 커감에 따라 자꾸 높은 님으로 바뀐다. 그 기량이 아주 크면 사랑의 대상을 영원절대인 하나님에 둔다.(1,33)
"동양에서는 음양오행을 찾다가 멸망한 것이다...유교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우주의 근원인 무극(無極)을 잊어버리고 천상(天上)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다석어록. 명상록 330)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언제나 하늘로 머리를 두고 언제나 하늘을 사모하며 곧이 곧장 일어서서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窮神은 식물의 向日性과 같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이 본성 때문에 인간은 "만물을 이기고 극복하고 지배하고 살아갈 수 있다."(1, 1,741-4)
그러나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통하는 나의 바탈,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각하고 추리하여 영원에 들어가는 길은 자기의 속알을 깨치고 자기의 뿌리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하나. 1, 757-60)
2) 하나님은 하나이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을 때 우주만물이 살아나고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할 때 우주만물이 죽어간다."(1,30)고 했다. 하나님을 믿을 때 '나'와 우주만물이 이어지고 생동하는 관계 속에 있게 된다. 다석은 '빔'(空)을 "맨 처음으로 생명의 근원이요, 일체의 뿌리...곧 하나님"이라 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유무를 초월"한 "맨 처음 일체"(진2. 86)로 보았다. 하나님은 우주 전체를 생동하게 하는 '하나'이며, 예배의 대상이 되는 유일한 분이다.(진다2. 138)
다석은 하나님을 '하나'라고 했는데 '하나'는 무엇인가?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는 이성적 인식으로는 '하나'는 인식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다. "하나(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영원한 신비다."(명상록 328) "('하나'인) 절대에서는 있다 없다가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할 수가 없다...상대적 유도 상대적 무도 아닌 것이 不二다." 나뉠 수 없는 '하나', 곧 둘이 아닌 '하나'는 물건이 아니므로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 다석은 "둘이 아니면 가질 수 없다."고 한다. "물건에 만족을 느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까막눈. 1,833-36)
다석은 허무를 무극(無極)으로 고유(固有)를 태극(太極)으로 보고 태극과 무극은 하나이고 하나는 하나님이라고 한다.(진다2. 371-2) 다석이 하나님을 하나라고 할 때 그것은 관념적인 서술이 아니다. '하나'로서의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이며 그 하나의 실재는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터져 나온 것이 하늘과 땅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인 하나님은 상대적 물질의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걸어온다."(하나. 1, 757-60)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에서는 '없는' 분이다. 그러나 절대, 사랑, 믿음의 세계에서는 '계신' 분이다. 따라서 다석은 하나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한다.(진다2, 372)
없이 계신 하나님과 통하는 길은 '고디'뿐이다.(말씀. 1,887) 고디는 하나됨에서 나온다. 마음의 통일, 온전함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하나됨'으로써만 '하나'에 이른다.
4. 통일(統一):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
1) 통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다석은 통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고 사람이 통일을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 돌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일은 귀일(歸一)이다. "나는 통일은 싫어한다. 통일은 되는 게 아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귀일(歸一)이라야 한다."(다석어록. 진다2, 393) 통일은 하나님이 이루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로 돌아가는 귀일을 할 뿐이다. 귀일은 타자에 대한 존중을 전제한다.
사람이 '하나'이신 하나님께 귀일하면 하나님이 인간 사이에 통일을 이루어 주신다. '하나'는 삶의 밑둥이므로 하나로 돌아가면 살 수 있다. 삶의 "큰 밑둥"인 "하나(壹)에서 살리심을 받자와, 내가 살고(알고), 남이 살고(알고), 여럿이 살고, 아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저마다 제 머리를 위로 받들고 올라갈 생각을 가지고 살 때 서로 다른 타자들이 "곧잘들 나남없이 살게" 된다.
상대세계의 물질에 집착하고 향락하면서 땅 위를 기면, 혼란에 빠져 멸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향해 위로 솟아오를 때 열리는 하늘나라는 "...곧디를 가진 사람들의 나라다. 그것은 하나로 통일된 한데나라다." 하나이신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 때 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남과 하나될 수 있다. 서로의 삶과 존재에 참여하여 "아픔과 쓴맛을 같이 맛볼 때에만 나와 남 사이를 가로막는 산과 골짜기를 넘어서서 온 세상에 넘치고 넘치는 늠실늠실 춤을 추는 꿈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속알. 1,861-4)
하나님 안에서 깨어나면 천국이다. 다석은 하나님의 품을 '그늘'이라고 한다. "그 품 속에 앉아 주는 것이 그느름이요 이것이 統治다...그늘에는 금이 없다. 갈라짐...싸움이 없다. 제그늘은 자기가 통치하는 자유의 왕국이다."(깨끗. 1,841-4) 하나님의 품인 그늘을 또 이렇게 말한다: "절대세계에는 분열이 없고 문제가 없고 조건이 없다. 거기는 영원한 평화만이 깃들이는 그늘이요 완전과 성숙이 영그는 영원한 그늘이다."(깨끗. 1,841-4)
2) 하나를 품은 삶
다석은 '득일'(得一)이라는 한시에서 "다른 게 없어 하나(전체)를 붙잡아 하느님 속으로"(무타(無他得日大我中)이라고 했다.(명상록 381) 하나는 전체이며 중심이어서 하나를 잃으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하나를 잡으면 삶에 중심이 생기고 서로 통하고 힘이 생긴다.
반탕한데는 절대의 세계, 절대무(絶對無)이며, 절대무는 '깨끗이'다. 그러나 부분무(部分無)는 '덜 없다'(더럽다).(제소리) 절대적인 빔과 없음에서만 깨끗한 '하나', 하나님을 만나고 볼 수 있다. 절대의 빔과 없음을 맘에 지니면 상대적 존재도 알차게 된다.(명상록 326)
자기를 비우고 깨뜨린 '빔'과 '없음'에서 '하나'가 드러나고 이 '하나'가 진리이다. '하나'만 꽉 붙들면 무서울 것은 저절로 없어진다."(진리파지 버 16 1, 765-8) 빔과 없음의 '하나'를 잡은 사람은 욕심이 없고, "정말 욕심이 없으면 생사도 넘어설 수가 있다...생사를 초월하면...자유요 진리요 사랑이요 무한이요 믿음이다."(속알. 1,861-4)
'하나'를 본 사람은 '나와 너'의 일치, 하나님과 나의 일치에 이른다. 그러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은 모든 것을 그만 두는 때요,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쓰러지는 때는 "제 눈 제 보기"(56. 3,2)다. 제 눈으로 제 눈을 보고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내"가 된다. 그리고 "내 정신과 신이 통할 때 눈에 정기가 있고 말에 힘이 있다."(밀알2. 1,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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