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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류영모

다석의 도(김흥호)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5.

 

다석 선생 탄생 101주기, 서거 10주기 기념 강연
 

다석의 道

- 김 흥 호 -


선생의 도는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이다. 일좌一坐라는 것은 언제나 무릎을 굽히고 앉는 것이다. 이를 위좌危坐라고도 하고 정좌正坐라고도 한다. 일식一食은 일일일식一日一食이다. 일언一言은 남녀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일인一仁은 언제나 걸어 다니는 것이다. 선생은 댁에서 YMCA까지 20리 길을 언제나 걸어다니셨다. 선생은 우리에게 남녀 관계를 끊으라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며 희로애락을 넘어서야 진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욕을 초월하는 데서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또 일식을 권면하셨다. 식욕은 모든 욕심의 근원이다. 욕심의 근원이 식욕이요 죄의 근원이 성욕이다. 일식의 일一은 끊는다는 뜻이다. 일식으로 식욕을 끊고, 일언으로 성욕을 끊고, 일인으로 명예욕을 끊는다. 도라는 것은 욕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무욕이다. 욕심이 없는 상태를 무無라 한다. 무가 되어야 진리의 세계를 살 수 있다. 진리의 세계를 사는 것이 도덕이다. 선생은 현실적으로 진리의 세계를 사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참사람이라 하였다. 참사람이 되어야 예수를 믿는다 할 수 있다. 믿을 신信 자는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말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선생은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실천하였다.


십자가는 나무에 달리는 것이요, 하늘에 달리는 것이요, 천체가 되는 것이다. 하늘의 아들이 되는 것이요,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자유친이다. 부자유친이 될 때 땅의 집착은 끊어지고 일식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성만찬이다.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사는 것이다. 땅을 떠나서 하늘에서 사는 것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사는 것이 일식이다. 선생은 일식이 성만찬이요, 일식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진짜 제사요 산 예배라고 한다. 선생은 성만찬으로만 살았다는 성녀 젬마를 좋아하여『젬마 전기』를 사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일식은 동양의 오랜 전통이다. 소강절邵康節도 일식을 하였다. 소강절이 67세를 살았다 하여 유 선생도 67세를 살고 가겠다고 말할 만큼 선생은 소강절을 좋아하였다. 소강절은 서화담徐花潭이 사숙한 스승이다. 석가가 일식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석가가 일식하기 전에 인도에는 일식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일식은 불교 이전의 힌두교 전통이다. 간디도 일식을 하였다. 간디는 인도의 근본이『바가바드기타』에 있다고 보고『바가바드기타』의 핵심이 일식인 것을 알게 된다.『바가바드기타』는 신의 찬양이요, 핵심은 단식인전생심소斷食人前生心消라고 유 선생은 말씀하셨다.


유 선생은 자기가 난 날부터 매일 날수를 계산하면서 살아갔다.『다석 일지』에는 자기가 산 날을 계속 적어갔는데 82세에 3만 날을 살고도 10년을 더 살았다. 하루를 사는 그분에게는 한 달이니 1년이니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제나 하루를 사는 것이다. 선생은 하루를 '오늘'이라 하였다. 오늘은 하루라는 뜻도 되지만 '오'는 감탄사요 '늘'은 영원이라는 뜻을 갖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하루하루 속에 영원을 살아가는 감격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 이가 유영모였다. 유 선생의 삶 속에는 언제나 빛이 솟아 나왔다. 우리는 그것을 말씀이라 하였다. 선생은 언제나 시조형으로 된 노래를 적어와서 신이 나 설명해주었다. 그 노래를 읊조리면서 흥에 겨워 어깨를 들고 발을 떼면서 춤도 추었다. 천진난만 그대로였다.


그래서 유 선생은 67세 4월 26일을 한정하고 하루하루 유한한 시간을 살아갔다. 그분에게는 내일이 없다. 어제도 없다. 다만 오늘이 있을 뿐이다. 영원한 현재, 그것이 선생의 하루였다. 기독교는 하루를 사는 종교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 그것이 하루다. 선생은 그런 하루를 살았다. 그것이 영원한 하루다. 선생은 인생은 죽음으로부터라고 늘 말하였다. 죽음이야말로 십자가요, 그것은 하늘 궤도에 오르는 순간이요 죽어서 부활하는 것이 참 사는 것이었다. 선생은 십자가와 부활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은 유교의 인의예지처럼 언제나 하나의 여러 모습이다. 마치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교회가 언제나 하나인 것처럼 성부는 십자가요 성자는 부활이요 성령은 승천이요 교회는 재림이었다. 유영모는 노자를 좋아했다. 노자가 언제나 통채로 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노자는 통채를 박樸이라 한다. 통나무가 산 나무다. 쪼개면 나무는 말라죽는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성령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교회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교회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통으로 사는 기독교, 그 속에 유영모는 한없는 기쁨을 느꼈다.


유영모 선생은 사람을, 땅을 디디고 하늘을 이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수출고고영현외首出高高領玄外 요긴심심이황중要緊深深理黃中이라 했다. 머리는 하늘 위에 두고 마음은 진리의 가운데를 붙잡는 것, 그것이 가장 편한 탓이다. 또 저녁 8시에 자서 밤 12시에 깼다. 4시간이면 수면은 충분했다. 그만큼 깊은 잠을 잤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잠 속에서 하나님 말씀도 듣고 인생의 근본 문제도 풀었다. 잠 속에서 지은 시를 읊기도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때다. 선생은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정좌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푸는 것이다. 풀어지는 대로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는 YMCA에 들고 나가 그것을 몇 시간이고 풀이했다. 너무도 엉뚱한 소리라 듣는 사람이 몇 안 되었다. 어떤 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혼자 20리 길을 걸어와서 한 시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또 20리를 걸어서 집으로 갔다. YMCA 간사 가운데는 선생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현동완이 간 뒤 유영모 선생은 YMCA에서 쫓겨났다. 그리고는 이집 저집을 헤매고 다녔다. 나중에는 집에서 사람 오기를 기다렸다. 한 사람이라도 오면 몇 시간이고 말씀을 퍼부었다.


유영모 선생은 언제나 "아바디 아바디"하고 소리내서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소리만이 아니다. '아'는 감탄사요, '바'는 밝은 빛이요, '디'는 실천이다. 인생은 하나의 감격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은 감격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선생의 삶을 보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뒤에는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있다. 그 기쁨은 진리에서 솟아나오는 기쁨이요 그리스도로부터 터져나오는 기쁨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법열이요 참이었다. 진리의 충만이요 영광의 충만이다. 그래서 선생은 아바디라고 했다. 아바디는 단순히 진리의 충만뿐이 아니다. 그뒤에는 생명의 충만이 있고 힘의 충만이 있다. 그 힘으로 선생은 이 세상을 이기고 높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다. 선생은 욕심과 정욕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깨끗과 거룩을 살았다. 그것이 선생의 실천이다. 선생은 죄악을 소멸하고 하늘의 별처럼 빛을 발하며 살았다. 그것이 도다. 도는 억지로 하는 율법이 아니다. 성령의 부음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힘이다. 그것은 하나의 유희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 노는 것이다.


다시 한번 선생의 주기도문을 적어본다. "이것이 주의 기도요 나의 소원이다."


한울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도 주와 같이 세상을 이기므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 나라에 살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길고 멀게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오늘 여기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먹이를 주옵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먹이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서로 남의 짐만 되는 거짓살림에서 벗어나 남의 힘이 될 수 있는 참 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에 끄을림이 없이 다만 주를 따라 읗으로 솟아남을 얻게 하여주시옵소서. 사람사람이 서로 널리 생각할 수 있게 하옵시며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주께서 하나이 되사 영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하나이 될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참말 삶에 들어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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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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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유영모(柳永模, 1890~1981)는 천문․지리․서양철학․동양철학․불경․성경 등에 능통한 대석학이요 현자요 한글철학자이다.
16세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32세에 조만식선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그곳에 정통 기독교 신앙을 전하였다. 40대 이후에는 월남 이상재의 뒤를 이어 YMCA에서 30년이 넘도록 연경반강의를 맡았다.
교회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였다. 예수를 절대시하고 {성경}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 성인을 모두 좋아하였으며, 노자를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순수한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여 우리말이 들온말(외래어)에 밀려 없어지거나 푸대접받는 걸 몹시 언짢아했다.
170센티미터가 못 되는 체구에 서민적 모습이었으나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눌변도 달변도 아닌데 한 말씀 한 말씀이 예지가 번뜩이는 시문(詩文)이요 진언(眞言)이었다.
52세에는 부인과 해혼(解婚)을 하고, 얇은 잣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목침을 베고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였다. 하루에 한끼씩 저녁에 식사를 하였는데, 세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고 하였다.
항상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맨손체조와 냉수마찰을 평생 동안 하였다. 일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천으로 만든 손가방에 명상의 일기 공책을 들고 다녔다. 시계도 차지 않았지만 시간을 어기는 일은 없었다.
사람은 제 먹거리를 제가 마련해야 한다면서 북한산 밑으로 이사하여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남에게 잔심부름을 시키지 않는 것을 생활신조로 지켜 밥상을 손수 부엌 마루에 내놓았다. 걸어다니기를 즐겨 북한산에 자주 올랐고 강의하러 갈 때도 꽤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새벽마다 지구의를 사타구니 밑에 깔고 우주를 한 바퀴씩 돌며 우주 산책을 한다면서 세계의 명산과 깊은 바다의 높이와 깊이를 모조리 기억했으며, 지구와 별들과의 거리도 외웠다.
나이를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날수로 하루하루 세었는데, 33,200일을 살았다.
가까이 따르던 사람으로는 김교신, 함석헌, 현동완, 이현필, 김흥호, 류달영 등이 있다.
감탄할 만한 명문장가였는데도 평생 다석일지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