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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류영모

젊은 류영모 선생님(함석헌)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5.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다석 류영모 선생을 기억하며


 

젊은 류영모 선생님

함 석헌

 

  내가 선생님을 처음으로 뵙게 된 것은 1921년 9월이었는데,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서였습니다. 3. 1운동이 터졌을 때 나는 평양보통학교 3학년에 다니다가 그 운동에 참가하고는 아예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집에서 2년 동안을 있노라니 운동이후 폭풍처럼 일어나는 자유의 물결과 교육열 속에서 젊은 놈의 가슴이 타올라 날마다 빈둥빈둥 놀면서 썩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 4월에 다시 공부를 하려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입학시기가 지났다고 어느 학교에서도 받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데 우연히 길가에서 집안 형 되는 함 석규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내게 여러 말 말고 정주 오산학교에 들러 조형균 장로라는 분을 찾으니 그가 바로 오산학교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곧 나를 데리고 학교로 가더니 3학년에 편입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때의 오산학교는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본래 있었던 교사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헌병이 와서 불질러 없어졌고, 선생과 학생이 다 흩어져 버렸는데, 몇 달 후에 졸업생들이 모여서 이래서는 아니된다, 학교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임시로 가 교사를 짓고 학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가보니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잘 깎지도 못한 재목으로 이름 그대로 도끼주우의 솜씨로 서둘러 지은 집에다 짚으로 이엉을 이어 덮고 책상도 의자도 없이 사오백명 학생이 모여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오산은 도시가 아니고 농촌입니다. 옛날 고려시대의 익주성(益州城) 터라는데 이씨 왕조 시대의 경의재 집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초창기에는 학생이 잘해야 백오십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데 이제 오산에는 여러 백명이 모여드니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근처 농가의 사랑방 윗칸을 얻어 하숙을 하게 되니 자연 모든 설비가 부족하고 옴과 이가 우글거렸습니다. 학생도 선생도 안정이 안 되어 그저 오는 사람, 가는 사람으로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겉은 어수선해 보여도 속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 그 불안하고 잡탕인 것을 묶어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옛 오산>입니다. 모여만 앉으면, 동네 썩은 된장은 학교에서 다 치워 준다고 했다는 말과 선생 학생이 한 덩어리가 되어 울고 웃고 했다는, 그저 그 소리뿐입니다.


  거기서는 남강선생을 호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에 유선생님은 20세였고, 이광수 선생은 19세였는데 선생으로 계셨습니다.


  그때 이광수 선생이 지었다는 <오산 경가> 가사에


    "백두산서 자란 범은 백두호라고

     범 중에 범으로 불리나니라

     우리들은 오산에서 자라났으니

     어디를 가든지 오산이로다"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마 거기서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노래 속에는 또 남강선생을 늙은 비둘기라고도 했습니다. 사실 그 두 가지 성격이 다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을 하려는 오산에 첫 학기가 거의 다 되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려 할 때에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들리기를 "이제 가을 학기에는 새 교장으로 아주 놀라운 분이 오신다는데 그분은 초창기 오산학교 시절에는 선생으로 계셨다는데 유영모 선생이시란다. 철학자래. 최남선씨가 무서워하는 분은 그분이시라는데......."


  여름이 다 가고 새 학기가 되어, 춘원의 말대로 지붕 위에 지저귀는 참새의 무리같이, 이곳에서 저리로, 저기에서 이리로 무리 지어 다니며 떠들어대는 뜨거운 가슴의 학생의 무리가 또 오산 골짜기를 꽉 채웠습니다.


  개학식입니다. 첫 시간부터 모두 혀를 뽑았습니다. 새 교장선생님이 들어오시는데 키가 자그마하고, 등이 조금 굽고, 뒷골이 이상하게 툭 튀어나오신 분인데, 하얀 한복차림이었습니다.  말씀은 물론 웅변조는 아니고, 크게 울리는 음성도 아니고, 조용조용히 하시는 말씀인데, 그 날 나는 뒷자리에서 있었으므로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만, 어쨌거나 배울 學자 하나를 풀어 말씀하시는데, 무려 두 시간 동안을 얘기하셨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서른 둘이시던 때입니다.


  그저 한번 척 보아서도 마음이 가라앉은 분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언제나 꼭 지키고 있는 분이란 것이 몸매에나 말씨에나 걸음걸이에나 늘 나타나 있었습니다. 빈틈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도 마음을 헤쳐 놓음(放心)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 선생님이 버둥버둥 눕거나, 허둥지둥 달리거나 하시는 것을 한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하품, 기지개는 물론, 너털웃음을 웃는다든가, 목에 핏대를 돋혀 큰 말싸움을 하시거나 하는 것을 본 일도 없습니다. 앉으면 언제나 꿇어 앉으셨고 한번도 무릎을 세우거나 다리를 뻗고나 하는 일은 없으셨습니다. 옷을 주르르 흐르게 입으시는 일이 없고 침을 뱉으시는 일이 없습니다. 걸음은 흔들흔들도 아니시고 헐레벌떡도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가까이 하기가 어렵고 잘못 아는 어떤 이들은 아주 차다고도 합니다만 그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결코 차신 분은 아닙니다. 무슨 일에나 누구에게나 그저 예사로 대하시는 일이 없으신데 차다는 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찬 것이 아니라, 참입니다. 오산에 오신 지 얼마 지나 후인데 이제는 기억이 확실치는 않습니다마는, 아무튼 그리 오래지 않아서 선생님을 조용히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서, 무엇 때문이란 것도 없이 그저 그러고 싶어서, 유하시는 방문 앞까지 가서 문고리를 잡기까지 했었지만, 들어가면 무슨 말을 어떻게 여쭈어야 할까 그것이 두려워 그냥 돌아온 일도 있습니다. 그 후에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마음이 약하고 수줍음이 많아서 그런 것인데 그때 용기를 내서 들어갔더라면 선생님 편에서 아시고 무슨 말로나 말문을 열어주셨을 것입니다.


  한번은 선생님 방 앞을 슬쩍 지나다보니 방문이 좀 열렸는데, 벽에다 큰 글씨로, (아마 한자가 손바닥보다도 더 크게) "夜靜海濤 三萬里"라 써 붙인 것이 보였습니다. 선생님이 손수 쓰신 것으로 아는데, 그때는 나도 王陽明을 읽지 못해 그것이 그의 글인 줄도 몰랐지만,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그것을 쓰셨을까 혼자 생각을 해 본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가서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직원실에 간혹 들어가 보면 여러 선생님들이 다 책상 앞에 의자에 걸터앉아 일을 보시는데 유독 선생님만은 앉아서 공부할 때 쓰는 책상 같은 상을 따로 만들어다 그 위에 꼭 꿇어앉아 계셨습니다.


  학과 담당은 수신(修身)을 맡으셨는데, 한번도 수위 교과서라는 것을 가지고 말씀해 주신 일은 없습니다. 가장 많이 하신 것이 노자의 '도덕경'이고,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에서 뽑아내서 하신 것도 있고, 일본의 우찌무라 선생의 작은 책자를 가지고 하신 것도 있습니다.  그 중에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카알라일이 어렸을 때에 지었다는 시입니다.

           "여기 흰 날이 다시 왔도다

            낭비하지 말지어다"

하는 식으로 읽어 내려 가셨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몸소 실천하시고 계신, 또 예로부터 모든 참되게 살려했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지켜왔던, 현재주의 또는 시재(時在)주의 살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내 손으로도 찾아 읽었고, 그의 '옷 철학'도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 본문은 이렇습니다.


      So here had been another blece day;

      Think, wilt thow let it slip useless away?

      Out of eternity this new day is born;

      Into eternity at night will return.

      See it afore time, no eyes ever did;

      So soon it forever from all eyes is hid.

      Here has been another blue day;

      Think, wilt thow let it slip useless away! abc


  그리고 특히 일생 잊지 못하는 것은, 그때 어느 시간에 우찌무라 선생의 젊었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때 나는 그 우찌무라가 생존해 계시는 분인지 이미 돌아간 분인지도 모르고 들었지만, 웬일인지 그것이 잊을 수 없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일본에 간 후 그의 성경연구 모임에 나가게 되어 그 이도 나의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에 안일이지만 선생님은 벌써부터 우찌무라를 잘 알고 계셨고 그의 책도 많이 읽어 알고 계셨습니다. 그 얘기는 이렇습니다.


  우찌무라 선생이 젊어서 미주에 유학을 했을 때 학비를 벌기 위해 한때 펜실바니아주 레딩이라는 곳에 있는 퀘이커들이 경영하는 정신박약아 학교에서 교사노릇을 한 일이 있었답니다. 전체를 두 학급으로 나눠, 좀 나은 학생들을 워싱턴 클라스라 하고, 그 아래를 링컨 클라스라고 했는데, 우찌무라는 워싱턴 클라스를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들은 지능이 너무 낮아 학문을 가르칠 수는 없고, 그저 나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독하는 것이 일인데, 그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벌을 해도 소용이 없고, 그저 밥을 안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더랍니다.

  그런데 워싱턴 클라스에 대니라는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아주 성질이 고약해서 나쁜 짓을 하는데, 한번은 주일날 그 대니가 온종일 말썽을 부려서 애를 쓰다못해 우찌무라 선생은 그 아이를 불러다 놓고,

  "이눔아, 네가 오늘 한 짓을 생각한다면 저녁을 안주어야 마땅하지만, 오늘은 주일인데 네놈 밥 아니먹일 수 있느냐?  내가 오늘 저녁을 먹지 않을 터이니 너 내 밥 먹어라" 했답니다.

  우찌무라 선생은 동료 교사들에게도 별로 알리지도 않았는데, 옳은 일이란 숨어버리는 일이 없는 법이라 그 소식이 마침내 워싱턴 클라스 아이들 귀에 들어가고야 말았습니다. 그래 그 아이들이 큰일났다고 클라스회의를 열었더랍니다. 의논한 결과 대니는 우리 학급에 있을 자격이 없으니 링컨 클라스로 보내야 한다고 결의를 해가지고 왔더랍니다. 그래 우찌무라선생은 대니를 불러 놓고 위로하며 타일러 보냈습니다. 그런 후 여러 해 있다가 어떤 일본 사람이 그 정박아 학교에 구경을 갔더니 대니가 그때도 남아 있다가 일본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묻더랍니다.

  "당신이 정말 일본 사람이예요?"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니 "그럼 미스터 우찌무라를 아십니까?" 하고 질문하더랍니다. 그래서 안다고 했더니 대니가 말하기를 "He is great man!" 하더랍니다.

이 이야기를 나는 일본에 간 후 우찌무라 성경연구 모임에서, 선생님이 몸소 말씀하시는 것을 또 한번 듣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신기한 섭리로밖에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1979년 미국 갔을 때 그 정박아 학교를 찾아갔었습니다. 지금 <엘윈 인스티튜트>라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큰 사업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학교와 공장이 다 갖추어져 있어서 여러 천명의 아이, 어른들을 수용하고 가르쳐 주고 공장에서 일도 시키고 있었습니다. 내가 찾아간 사연을 말했더니 직원 한 사람이 모든 기록문헌, 사진을 들추어내고 기록영화까지 틀어놓고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인 지난 82년에 어떤 분에게 그것을 좀 알려 줄 필요가 있어서 또 한번 갔더니 삼년전에 갔던 일을 그대로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주어서 참으로 놀랐습니다.


이번에는 선생님의 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하기로 하겠습니다.

오산 학교에 오신 그 해 겨울에 다 가고 이듬해 5월이 되어 학교 창립기념 행사로 운동회를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당국으로부터 학교의 운동가가 불온하니 고치라는 명령이 왔습니다. 본래의 운동가는 춘원 이 광수 선생이 지은 것인데, 이제 그것을 다 외울 수는 없지만 대략 이런 구절들이 있었습니다.


  1. 티벨(로마市 流河) 하반 조막(주먹의 사투리)같은

    칠강(七崗) 위에서

    반 천하를 호령하던 용장한 그들

    머리에선 지식 세암 솰솰 솟건만

    익은 근육 날랜 체격 더욱 용장타.

    태동의 대륙 큰 벌판

    주권자 될 우리 건아야


후렴  우레 같은 고함 소리

        천지 드르륵

        번개 번쩍 말을 달려

        나아가거라

        명예로운 저 우승기

        네것 되도록


  2. 백두산 상 산상봉에 깃발이 날고

    두만강수 두 언덕에 살기 식식타

    십년 갈은 우리 칼이 번쩍이는데

    금수강산 삼천리에 자유종 친다.


  3. 제석산 상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둥지 찾는 우리 건아 모두 식식타

    .........................

    ...........................


  그래서 급작스럽게 유선생님께 새 운동가를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천하가 아는 대로 선생님은 운동을 도무지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때 지으신 운동가는 이렇습니다.


1. 저 하늘에 해와 달도 돌아다니며

     이 땅위에 물과 바람 또한 뛰노니

     천지 사이 목숨 불을 타고난 우리

     열센 힘에 번뜩이어 빛을 내이자

(후렴)

    물이나 불이 모두라

    다무른 입 한번 뛸터라

    우레 울리고

    내렷던 손 들게 되면

    번개치리라

    힘을 몹고 맘 다스려

    이김 얻도록


  2. 모란 데는 범만 뛰게 들것 아니요

      바란란덴 고래놈만 놀릴 것이랴

     물과 붙에 우리 운동 자유자재해

     열센 힘을 번뜩이어 빛을 내이자


  3. 저 공중이 어찌하여 독수리 거면

     이물 밑이 아무려믄 해조의 터랴

     공중 날고 물밑 기기 또한 능하니

     열샌 힘을 번뜩이어 빛을 내이자


세계 어디서도 못 들은 운동가입니다.  그래 모두 철학적 운동가라고 했습니다.


  나는 수줍음이 많아서 한번도 선생님한테 질문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후회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스스로 이때까지 인생을 헛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2세가 되도록 인생이란 문제를 생각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숨’, ‘참’하는 단어를 집어들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겨우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와서 그때에 모든 문제를 좀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한합니다. 선생님은 또 두들겨 깨우는 성격은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한 일년 남짓한 때에 당국으로부터 교장인가를 줄 수 없다는 통지가 나와서 학교를 떠나 서울로 돌아오시게 됐습니다. 마지막 떠나시는 날 내가 홀로 선생님을 따라 고읍역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학교에서부터 모시고 떠났던 기억은 없는데, 내가 혼자 뒤를 따라가게 됐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어머님께 드리시겠다고 오산 지방의 특산물인 바닷굴을 한 푸대를 학교 심부름꾼인 강효국에게 지워 가지고 나가시는 것을 만나게 됐는데, 그때 나로서는 아직도 잘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시간이 마침 어두컴컴한 초저녁이어서 그러셨는지,    빛, 빛 하지만, 빛보다 어둠이 더 큰 것 아니냐.

  삶, 삶 하지만 삶보다는 죽음이 더 먼저 아니냐.

  깬다 깬다 하지만 깸 보다는 잠이 더 먼저 아니냐,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그저 알 듯이 모를 듯이 듣고만 있었습니다.  한문으로도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은 "死餘是生" 이라는 한 句만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내가 이번에 오산 왔던 것은 함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였던가봐" 하셨습니다. 나는 그저 송구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선생님이 오산 오실 때는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오셨던 것인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적히 섭섭한 마음이 있어서 하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내가 감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선생님이 처음 오산을 20세에 오셨다가 12년 후에 다시 오셨는데, 본래 생각이 깊으신 선생님이시지만, 그 동안에 공부하신다고 일본의 물리학교엘 가셨다가 생각이 달라져 다시 돌아오신 때문이었으므로 그냥 쉽게 승낙을 하고 오셨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때 그때 그 시국에 깨려다가 채 깨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분위기 속에서 교장으로서 어떤 교육을 해보시려고 하셨던 것일까? 아니면 세속대로 하는 졸업생들의 간청에 끌려 남강선생님이 감옥을 나와 돌아오시는 날까지 한동안 학교의 명맥을 지키기나 하자는 정도에서 하셨던 것일까? 그때에 비하면 몇 갑절이나 더 어지러워진 오늘을 어떻게 살아나갈까 생각하면서 지금 선생님이 계시다면 좀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문제입니다.


  그 다음 선생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날짜를 헤어가는 것과 일종식을 하는 두 가지인데 나도 처음에는 생일을 음력으로만 알 뿐이었는데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으므로 양력으로 하게 됐고 날을 헤게도 됐습니다. 더구나 생일이 선생님과 같은 날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범연하게 보시지 않는 선생님이 더 신기하게 여기셨습니다. 음력으로는 선생님은 2월 23일 생이신데 나는 정월 23일이고 양력으로는 똑같이 3월 13일로 만 11년, 날로 해서 4017일 차입니다.


  날짜 헤는 것과 관련해서 한때 선생님은 자기가 돌아가실 날을 아셨다. 또는 못맞히셨다 하는 말이 돌았지만 그것은 선생님의 본래의 뜻을 잘 모르고 하는 말들이었습니다.


  김교신 선생이 간 후 언젠가 선생님께서 당신이 김교신보다 앞선 그날 수만큼 앞으로 더 산다면 어떻게 될까 해서 계산을 해보니 이상하게도 남강선생님이 살고 가신 날수 만큼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기해서 그럼 그것을 내 날로 알고 한번 살아본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 발표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누가 만일 그날 돌아가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느냐고 질문을 했답니다. 그래서 선생님 자신이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살림살이에 예산을 세울 때에 꼭 맞는 수는 쉽지 않지만, 부족하면 추가하고 남으면 뒤로 넘기더라도, 역시 예산은 세우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 그와 마찬가지로 그날을 내 날로 알고 살아보자는 것이지, 꼭 맞히고 못맞히고가 문제될 것 없지 않으냐는 그것이다.  위에서 말한 ‘이제-여기’주의로 살자는 데서 나온 일입니다.


  수신(修身) 시간에 말씀해 주신 선생님의 자작시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放逸奢侈諧身亡, 學藝事業共世長,

                         今石我玉一生攻, 呑日吐月百年老.


  “어제를 돌 삼아서 나라는 옥을 닦아내자”는 말씀입니다.


  하루 한번만 먹는 것을 선생님은 '성서조선사건' 일이 년 전부터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나도 그 사건에서 풀려 나온 후에 시작해 봤습니다. 각별한 준비 없이도 한 일주 일간 계속해 보니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어머님이 걱정을 하시므로 이미 되는 줄 알았으면 후일 자유로와진 때에 하기로 하고 다시 그전대로 2식주의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됐고, 평안북도 임시자치위원회에 참여했다가 두 번 소련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 후 그냥 계속 있을 수가 없어 1947년 봄 월남해서 송 두용 선생을 찾아 오류동에 있게 됐습니다.


  그해 11월 초로 기억하는데 어느날 주일모임에서 백운대로 놀러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구기리 선생님댁에 이르러 들어가서 선생님도 올라가시자고 했더니 그러신다고 하면서 나오시는데 손에 빵을 한 주머니 들고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일식을 하시는 선생님도 이런 때는 역시 점심을 드시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일행이 대남문을 지나 정오쯤 태고사에 이르러서 거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각각 자리를 잡자 선생님은 저만큼 떨어져 가 앉으시더니 나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갔더니 그 빵주머니를 주시면서 "이거 내가 먹자는거 아니고, 혹시 누가 점심을 준비하지 못하지나 않았나 해서 가지고 온 것이니 가져다 나눠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첫 말씀에 그대로 "예" 하고 돌아와서는, 나혼자 생각에 그래도 일을 모르니 반은 떼어 내놓고 반은 내가 들고 만일의 경우를 위해 가지고 있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온종일 백운대까지를 오르는데 선생님이 내내 앞장서서 안내하셨고 위태로운 바위에 가서는 등을 돌려대고 두팔을 좌우로 벌려 바위를 뒤로 안고 돌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쉽다'고 이것을 지두리하고 한다며 가르쳐 주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 길이 늦어서 나중에 대남문에 오니 깜깜하게 어두워졌습니다.


  이제 두패로 갈려서 한패는 다시 대남문으로 해서 구기리 쪽으로 가야 하고, 한패는 보궁문으로 해서 정능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 이제다 싶어 가지고 다니던 빵을 사과 한알을 겸해 내놓으면서 "이제는 사장하실터이니 이것을 잡수세요" 했더니 "아니, 일 없어, 이것만 주면 돼" 하시면서 사과만 집으셨습니다. 나는 정능으로 내려갔는데 후에 들으니 선생님 댁에는 아홉시가 지나서야 도착했다고 했습니다.


  그 해 3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해서 4월 초에 선생님을 모시고 광주 등지로 한달 여행을 했는데 그때에도 나는 2식이어서 선생님을 옆에 두고도 나는 나대로 맘놓고 점심을 먹었었는데, 이제 그 경험을 하고 나니 이 이상 더 생각할 것도, 주저할 것도 없다 하고 아주 그 이튿날부터 두 번에 먹던 것을 저녁에 한번에 먹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지장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때 기분으로 훌쩍 날아갈 듯 했습니다.


  1938년 3월에 오산학교를 그만 두고 차마 떠날 생각이 없어 두해 동안을 거기 서성거리고 있다가, 40년 봄에 평양시의 송산리에 있는 송산농사학원을 맡아가지고 나갔는데, 몇 달 못되어서 계우회사건이 터져 거기에 관련된 일로 인해 평양 대동경찰서에 들어가 한해 동안을 있다가 나온 일이 있는데, 그 소식을 들으시고 선생님이 얼마나 염려를 하셨던지, 박승방 씨가 찾아갔더니, "그 사람이 외유내강한데, 그 고생이 얼마나 할까. 그래서 내가 오래 전부터 끊었던 '소리내서 하는 기도'를 다시 들이게 됐소"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는 그 소리를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1983.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