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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류영모

류영모의 영성(홍철화)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5.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류영모(柳永模)의 영성(靈性)

홍  철  화 (목사/ 전 기독교교육협회 총무)


  1. 생 애


  류영모(柳永模)는 1890년 3월 13일(경인년 2월 23일) 서울 남대문 수각다리 가까운 곳에서 아버지 류명근(柳明根), 어머니 김완전 사이 형제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서울 홍문서골 한문서당에 다니며 통감(通鑑)을 배웠다. 천자문은 아버지에게서 이미 다섯 살 때 외웠다고 한다. 10세 때 서울 수하동(水下洞) 소학교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2년을 다니고 다시 한문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큰집 사랑에 차린 서당에서 이때 이미 맹자를 배운다.


  그의 기독교 입문은 상당히 빠른 시기로, 15 살 때 당시 YMCA 초대 총무인 김정식(金貞植)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경성일어학당에서 2년 동안 일어를 배웠다. 17세에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한 후, 양평학교에서 한 학기교사로 가르치기도 하였다. 당시 신학문에 접하였던 그는 20세 때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고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하였다. 이때 오산학교를 기독교정신의 학교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승훈을 기독교에 입신토록 한 것이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톨스토이를 연구하다가 일본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동경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이 무렵 그는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강연을 접하였고, 그에게 큰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와서, 그의 나이 25세에 김효정(23세)과 결혼하였다. 그의 최초의 주목할 만한 글들이 육당 최남선이 펴냈던 잡지 <청춘>에 "농우(農牛)",  "오늘" 등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계속 남강 이승훈과 3.1 운동 거사 등 연관을 가지다가 31세에 다시 오산학교에 조만식 후임으로 1년간 교장직을 맡았었다.


  무교회주의자이며 교육가였던 김교신이 류영모에게 <성서조선(聖書朝鮮)> 잡지를 함께 만들어 내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이후 김교신이 류영모를 사사하였고, 그 잡지에 글들을 쓰게 하였다. 그리고 당시 중앙 YMCA 간사 현동완 선생의 간청으로 성서연구 모임을 맡았던 것이다. 이 연경(硏經)모임이 1963년 현동완이 사망할 때까지 약 35년간 계속되었다. 


  1935년 그는 적선동에서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농사하러 온다. 지금은 번화한 서울이지만, 그 때는 농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서 그는 자신의 깊은 내면 세계를 이루어 가서, 그의 나이 51세에 예수정신을 신앙의 기조로 하는 일대 전기(轉機)가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부인과 동거하면서, 이른바 해혼(解婚)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후 하루에 한끼의 식사를 하고 금욕생활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던 것이다. 잣나무 판자(七星板을 연상케 함) 위에서 담요를 덮고 누워 자게 되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일제 종로 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불기소로 57일 만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 나왔다. 다음 해 2월 5일 새벽 북악 산마루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瞻徹天 潛透地 經驗). 1945년 우리 조국이 해방되자 행정 공백기에 그는 지역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자치위원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와이 총무 현동완이 류영모 60세 때 그의 2 만 2 천일 산 날을 기념하는 자리를 억지로 마련했던 일도 있었다.


   그가 65세 되던 해에, 1956년 4월 26일을 자신이 죽을 사망 예정일로 잡아 놓는다. 66세 정도 산다는 것을 자신의 삶에 어떤 뜻 깊은 해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후 지금 우리가  <다석 류영모 명상록>에서 보는 일기 쓰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예정한 그날 사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날이 그의 일생에 어떤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류영모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老子>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순 한글식이면서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창적 언어와 사색으로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다른 경전을 이런 식으로 옮겨 놓았다. 앞서 보았듯이 그는 하루를 자신의 최후의 날처럼 여기면서, 일기에 산 날을 적었다. 1972년 5월 1일은 82세 3 만일을 산 날이다. 그 5년 후 결사적인 방랑길을 떠난다. 그리고 3일 만에 혼수상태가 되었다. 이 일 이후 3년간 건강 상태가 별로 좋지 못한채 지내다가 1981년 2월 3일 소천하였다. (90년 10개월 21일)


  2. 그의 靈性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하였다. 영성이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특성을 그대로 살려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인간관이다. 사람을 진흙으로 빚어 만드신 후,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한다. 이 구약 창세기의 말씀과 어울리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다(요 20:19-23).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벧후 1:4)고 하였다. 사람은 철저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야 한다는 신의 명령을 들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류영모는 이 나라에서 드물게 보는 영성적인 사람이다. 어찌 보면 그의 일평생은 자신의 영성을 캐내고 다듬어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보는 이에 따라서 그가 탐구한 것들이 불교, 인도교, 유교, 도교 등 여러 가지 경전과 고전들이었기 때문에 혼합종교 내지 다원주의(?)가 아닐까 의심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일관하여 예수에게 향한 그의 애정과 신앙만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인간이 타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을 애타게 부르시며 찾으신다. 어쩌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듯한데, 하나님은 사람에게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사람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경지 같이 보인다. 특히 죄인인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다.


   류영모는 자신이 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따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이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 살아갔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삶은 일관되게 영성적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공생애에서 특별하게 영성적인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40일간 금식을 하신 것이라든지,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으로 가셔서 함께 기도하면서 신앙수련을 쌓게 한 것들이 그것이다. 류영모의 삶을 예수님의 그것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의 생애에 보통 사람에게서 보기 어려운 영성적인 것들이 있다. 이것들을 나름대로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기독교 입문


  그는 비교적 일찍 기독교 신앙에 접하였다. 15살에 와이 총무 김정식(金貞植)에 의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성실성과 그 나름의 학적 어떤 탐구심 때문에 이 당시의 저명한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이런 경험들이 신앙적 수련을 쌓게 도왔을 것이다. 신앙이라든가 어떤 깊은 깨달음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사도 바울의 다메섹의 경험은 단 한 번에 그를 변화시킨 놀라운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단번에 완성된 자리로 나가는 것이 아니기에 그는 그후 아라비아로 가서 자신을 더욱 수련하였던 것이다. 그가 성숙한 전도자로 또는 사도로 나타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였다. 류영모는 기독교에 입문하여 그 신앙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과 이후 누구보다 철저한 수행을 쌓았으며, 사도 바울이 고백하였던 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그런 경지까지 도달하는 데는 엄청난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류영모는 오산학교의 몇 년 생활에서 끝없는 신앙의 분투를 했다. 이 곳을 떠나 일본에 가서 공부하는 기회에 무교회 지도자 우찌무라(內村監三)를 만나게 된 것 또한 그의 신앙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다. 이후 한국의 무교회인들과 교분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김교신, 류달영, 함석헌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자신이 신앙적으로 쌓아 올린 것들을 후학들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YMCA에서 연경반을 계속한 것이 그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남을 가르친다는 것에 앞서 자신이 더 배우고 깨닫는 것이 아니겠는가. 앞서 그의 생애에서 보았듯이 "마음의 전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 체험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라고 말 할 수 없겠으나, 이후 부인과 해혼(解婚)을 선언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건 후 53세 때 2월 5일 북악산 마루에서 그에게 "하늘이 열리고, 자신이 엎드린 땅을 깨닫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는 것을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하루를 산다"고 생각한다. 그의 일기에서 날짜 기록은 출생한 날 이후부터 센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가 매일 종말론적으로 살아간다는 그것이 얼마나 삶을 진지하고 긴장하게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오늘>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오"는 감탄사이다. 우리가 이 날 하루를 살아가게 되는데, 바로 그날은 나에게 지금 허락된 참으로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는 그런 기회인 것이다. 그리고 "늘"이라는 말은 '영원'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오늘>은 "내가 감격해 맞이할 영원의 그 시간"이라는 것이다. 하루를 이렇게 사는 사람은 그 날이 자신의 최후의 날과 같을 것이다. 그는 인생을 <하루살이>라고 하면서 이 하루를 잘 살자고 하였던 것이다.


   1956년 4월 26일을 자신의 <사망 예정일>로 발표한다. 이후 일기를 써서 남긴 것을 지금 우리가 <명상록>에서 읽는다. 그 때의 일기문을 적어본다.   


  하루 때문 <1955. 4. 26.  화  23785>


한/ 이승에선 꽤 한 해 뵈는/ 하루 때문/ 긴지도 모르지라오 비러자븐날은/


1956. 4. 26./ 요한 12:27(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왔나이다.)


  이 날을 죽는 날로 잡은 것은 김교신이 죽은 4월 25일 그 다음 날이 좋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67세는 그가 좋아했던 소강절(邵康節)의 나이를 생각하여 잡은 것이다. 이렇게 죽는 날을 정해 놓고 하루하루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려고 했다. 이 한 해는 꽤 긴 한 해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하루 이 한 해가 무엇을 해 보이는 한 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먹는 문제, 남녀 문제


  류영모는  삶을 <食>과 <色>이라고 말한다. 食은 생(生)을 뜻한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날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기름이 들어가지 않은 자동차가 갈 수 없는 것같이 사람이 먹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는가. 살기 위해서  먹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이 이 음식을 제대로 먹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을 따지고 보면 "먹느냐, 사랑하느냐 그것이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류영모는 그의 호를 <多夕>이라고 했다. 그는 저녁을 좋아하였다. 한 밤 중에 별을 바라보고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다석이라는 한자에서 보듯이 다(多)는 저녁석(夕)자를 두 개 포개 놓은 것이다. 이 호에 저녁 석자가 세 개다. 다석 류영모는 하루에 세끼 식사를 하지 않고, 저녁에 세끼 남들이 하는 식사를 한 끼만 먹었다. 인도의 철저한 수행자들은 하루 한끼만을 그것도 아주 간소하게 먹는다고 한다. 간디가 일일 일식 하였던 사람이다. 종교 수행에 이 한끼 식사라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듯하다. 붓다, 소강절(邵康節), 톨스토이, 더러우(Henry David Thoreau)... 다석이 그런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가졌던 바, 이들이 일일 일식 하였던 것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기독교의 원죄를 불교에서 말하는 <貪> <瞋> <痴>처럼 생각한다. 그 중에서 첫 번째가 '탐욕'이다. 사람의 욕심을 식욕 색욕 물욕 명예욕 수면욕(5욕)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식욕이다. 그러므로, 나의 욕심을 끊는다고 할 때, 첫 번째 식욕을 끊는다는 것은 수행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석은 하루에 일식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백운대를 등산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한 번 저녁 식사만 했다는 것이다. 이 일식을 철저히 단행하면서, 그는 개성이나 인천까지 걸어서 하루에 갔다. 이런 식사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여 식사 때 가서 보았는데, 저녁 식탁에 잡곡밥과 배추국 그 외에 간단한 반찬으로 소식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 식사 때 하는 五觀偈를 그는 좋아하였다. 計攻多少 量彼來處,  村己德行 全缺應供, 防心離過 貪等爲宗, 正思良藥 爲療形枯, 爲成道業 應受此食-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이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손에 손이 많이 가고 힘에 힘도 퍽은 드러, 곱게도 지고 지며 바로도 되고 되어온 이 밥을 우리 지은 노릇으론 이에 구태어 받을 수 있사오리까. 거듭 잘못이 없게스리 걸챔부치의 마음을 막고 오직 깨나는 약으로 우리 맡은 것을 마추기까지, 몸에 이바지어 삼가 들렵니다."


  자신은 매일의 식사를 자기에게 드려진 제물처럼 받고자 한다. 이렇게 식사를 하는 것은 자신도 그런 제물로 살겠다는 것이다. "밥이 하늘이다"라는 말이 있다. 쌀알 하나가 되기 위해 태양과 별과 달, 물과 바람 수많은 정성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밥상이야말로 하나님이 나에게 내려주신 자신의 몸과도 같은 것이다. 류영모는 교회의 의식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식사를 주님이 주시는 성찬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성만찬이 따로 없고 그 식사 상이 언제나 주님의 몸인 성만찬인 것이다. 매일 같이 먹는 식사를 이렇듯 성화시켜 받고 있다는 것을 그의 영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 한 번 저녁때마다 마음의 점을 찍는 점심(點心)이 一日 一食인데, 그 밖의 모든 식사는 약육강식의 불장난과 같은 것이다. 그를 좋아해서 따랐고 그에게서 배웠던 김흥호목사는 그처럼 일식을 40년 동안 실천하고 그것이야말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요, 거룩한 길이며, 님께 드리는 예배요, 사랑이다. 一食만이 십자가요 믿음이다. 一食은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믿음이다"라고 고백하였다.(명상록 2권 87면)


   1960년 3월 5일 <단식일기>라는 글이 있다. "5일 단식하면서 맛을 끊고 혀끝은 말하는 데만 사용한다. 밥은 먹지 않아도 물은 마셔야 한다. 그래야 노폐물이 빠지기 때문이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손에 와 닿는 물은 갈증이 날 때 냉수를 마시는 맛과 비슷하게 유쾌하다."라고 금식 소감을 적고 있다.


   남녀의 성은 나무의 뿌리와 같다. 뿌리는 언제나 땅 속에 파묻어 두어야 한다. 뿌리가 드러나면 나무는 말라 죽는다. 요사이는 세계 어디나 성이 많이 개방된 상태이다. 성이 상품처럼 되어 그것이 천해진 것은 말할 필요가 없으며, 옛날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어가고 있다. 류영모는 자신이 결혼을 했으나, 해혼(解婚)하고 말았다. 결혼을 한 사람이 함께 동거하면서 부부생활을 하지 않고 자매처럼 지내면서, 수행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 생각해 본다.  해혼을 한 후에도 그의 부인과 같은 집에서 살았고 부인은 지극한 마음으로 류영모의 수행생활을 도왔다고 한다. 그의 연경반에서 공부하였던 이들의 말에 의하면, 단식 중에 그 연경반에 나가도록 부축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이들이 결혼하겠다고 하면 신중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고 할 수 없이 결혼하였던 그의 제자가 이제 자신도 늙어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선생님의 그 당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 많은 죄악이 남녀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사도 바울도 죄의 근원을 남녀의 타락에서 보고 할 수만 있으면 결혼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동물들은 단지 생식을 위해서만 관계를 가지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데 이것의 심각성이 있다고 하겠다. 어쩌면 인간이 이 점은 동물에게서 배워야 할지 모르겠다.


  생식은 본능이다. 그러나 음란은 본능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타락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음란을 버리고 진리를 사랑해야 한다. 간디와 류영모는 결혼하였지만, 해혼한 후 올곧고 깨끗하게 살고자 했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 성욕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육신의 정욕을 없애고 거룩한 뜻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류영모는 육신의 정욕적인 것을 <몸>이라 하고, 거룩한 뜻을 따르는 내면을 <마음>이라고 보았다. 그의 명상 일기에 "맘 몸 /몸 맘"이라는 것이 있다. 맘이라는 글자에 고어의 ‘아래 아’ 점을 사용하였다. 1969년 6월 23일 명상일기에  "마음 모아서 예사리에 씨운 것이 사랑기오.  계 가 몸알게 속알이큼 참삶속에 듦이여, 아 아 하 우리 아바지 할넬루야 아멘."이라고 적었다.


   이런 시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말일까 당혹스러워질 것이다. 그는 순수한 우리말, 훈민정음 때의 우리말을 추구한다. 그가 쓴 한마디 한마디의 글 속에 깊은 생각과 뜻이 담겨 있다. 위의 글을 김흥호목사가 해석한 글에서, '마음은 모아 몸이 되고 몸은 그만 두어 마음이 된다. 마음을 모아서 이 세상 삶에 쓰여지도록 한 사람이 사랑의 화신인 성인들이다.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몸은 육신의 몸이 아니고, 영혼의 몸 속알이요 明德이다. 속알을 키우는 것이 참 생명 속에 드는 것이다. 아아! 기쁘다. 우리 아버지 할렐루야 아멘' 이라고 했다.


   종교는 남녀를 초월한 것이지 남녀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다. 성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다. 생명의 핵심은 食과 色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절제와 절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食과 色을 절제하지 못하면 큰 화를 당하게 된다. 남녀의 성은 음욕에 빠지지 않도록 절도가 있어야 한다. 밥은 살기 위해 먹는 것이며, 남녀의 성은 자녀를 낳기 위해 만나야 할 것이다. 류영모는 남녀가 절제하여 정과 신을 보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轉精成丹이라고 하여 정을 가지고 단을 만든다 하였다. 단이 박힌 사람이 도인이라는 것이다. 류영모가 간디를 특히 좋아하였던 것은 그가 하루 일식하였고 남녀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남녀가 하나 되는 것보다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살기를 원하였다. 그가 좋아하는 공자의 말 중에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이다'라고 하셨다. 우리들의 삶에서 거부하고 올라가야 할 무엇이 있다. 죄와 악이 그것이다. 누에가 허물을 벗어야 고치로 탄생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따라서 쉽게 산다면 거듭 날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을 처서 주님께 복종시키겠다는 '극기복례'에서 천국의 문이 열려질 것이다.


   3)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인생


   인간 류영모가 누구인가? 이런 물음은 우리 모두의 근본 물음이라고 하겠다. 지혜자가 "네 자신을 알라"고 했다지 않는가? 류영모의 핵심 사상이라고 할까, 그에게서 보는 독특한 글 하나를 소개하겠다. 그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이 명상 일기문의 제목은 <이 끗>이다.


"올 끈이로 /  온 끝에까지 /  말씀 사르므로 / 생각이오니 / 맨 첨부터 / 함께 계심 / 몬 있는 '   '끗으로 / / 숨있는 웋 / 끗으로 / 命存在上元"


이 글의 해석은: 이 끗인 나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한 끝이라는 것이다. 올(理) 끈(斷) 이(續)로, 이치를 생각하고 단행하고 온 세계의 끝까지 말씀을 전함으로 사명을 삼으니, 생각하는 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이다. 말씀이 영원하고 생각이 영원하고 하나님이 영원하고 나도 영원하다. 물질세계는 공간적이요, 가운데 중심이 있고, 정신세계는 시간적이요 처음에 중심이 있다. 처음이 꼭대기인가 한다.(명상록 1권 31면)


   류영모는 자신을 하나님의 끝이라고 하며, 우리 한글의 <ㅣ>를 고디(곧게 하늘에서 땅으로 그어진 'ㅣ'긋)라고 한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의 줄이기도 하다. 영원한 생명이 시간 속에 터져 나온 한 순간이 '이'긋이요, 그것이 공간으로 터져 나와 육체를 쓰고 민족의 한 끄트머리로 나온 것이 '나'라는 제긋이고, 이 육체 속에 정신이 터져 나와 가장 고귀한 점수를 딸 수 있는 가치가 이 '제긋'이다. 그는 '기역'( )과 '니은'( ) 사이에 점(點)을 찍고 이 기호를 <가온 찍기>라고 하였다. 한글의 첫 자음과 모음이 이렇듯 위대한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 신비스럽다.


   다시 이 글자와 관련된 말들을 생각하여 본다. 기역과 ㅏ가 함친 글은 '가고 간다'는 말을 담는다. ㅗ와 니은을 합친 글자는 '오고 온다'는 뜻을 담는다. 인생이란 가고 가고 오고 오는 영원한 선상에 와 있는 하나의 점과도 같은 것이다. 인생이란 영원 또는 하늘을 그리워하는 <고디>이며, 하나의 점과도 같은 '가온찍기'인 것이다.


  인생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땅에 다리를 디디고 곧게 서서 갈 수 있는 특별한 존재, 영성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는 주역에 나오는 <貞>이라는 한자를 좋아한다. 인생은 곧이 곧이(貞) 하늘을 그리워하는 존재이며, 반드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려면 하늘을 그리워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나는 영원한 자의 아들이다. 내 속에는 속알이 있고 그 속알은 덕이요, 인간성이요, 인격이요, 신성이요, 하나님의 형상이 거기에 담겨 있다. 나야 말로 그릇에 담은 보배요, 속알 실은 수레다. (김흥호;<제소리>220쪽 이하)


   <명상록> 일기 1955년 9월 22일 "가온찌기"라는 글에   [講] 心線路 // 接境이오 一線이다. / 前進이 一路다.  / 直上 一點心. // 가온찌/ 잇다감 생각/ 그저/ 나 므름 업시/ 제게로부터.  이 해설을 보자. 直上 一點心 마음은 가온찌기다. 곧장 위로 깨나는 것이다. 깬 사람은 前進一路다. 이 세상에 있다가 하늘나라로 감을 늘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접경을 이룬다. 그것이 일선인데 그 국경을 침범하면 안 된다. 그것이 '나 무름 업시'이다. 다른 사람에게 불평하면 안 된다. 나를 끈임 없이 묻고 또 물으라. 자신을 반성하라. 자기를 묻고 찾으라. 자기를 묻고 찾으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 나는 하나님 '제'와 하늘나라인 '게'와 연결되어 있다. 신인합일이다. 나는 안 죽는다.<명상록 1권 44쪽이하>


   그의 <명상록>에 "與空配享"이라는 글이 일곱 개 나열되어 있다. 그는 이 한자의 空이라는 것을 '븬탕' 與를 '한대' 享을 '맞혀'라고 하였다. 空은 창공 즉 하늘이다. 그는 하나님을 때때로 '없이 계신 분'이라고 한다. 空은 하나님을 뜻하고 있다. 이 글로 보아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목말라 사모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최상의 기쁨과 행복을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무가 물을 마시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그보다 더한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사람이 가질 것은 진리와 생명과  正道뿐이다. 언제나 진리를 사모하고 정도를 실천하고 생명을 살려 내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다. 이 사명을 완수 할 때만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고 도와주셔서 어느 때나 어떤 곳에서나 우리를 놓치지 않는다. 우리 인생은 이 하나님을 순종하여 죽는 날까지 그를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사명이요 죽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


   4) 폭 넓은 영성적 삶


   그의 하루 생활이 어떠하였을까? 평범한 하루 일과가 자연스러운 수행이고, 그것이 유별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류영모의 하루가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그 특유의 운동을 하고 냉수마찰을 한다. 그리고 책상 앞에 꿇어앉아 동서양 고전을 읽기도 하고 깊은 묵상에 들어간다. 그는 이 시간에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생각에 들어간다. 그가 연경반에서 말씀한 것들은 이런 깊은 명상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의 가슴에는 신의 계시 같은 진리의 말씀이 때때로 샘물처럼 솟아 나온다. <명상록>에 있는 일기문들이 그런 결실들일 것이다.


   그가 연경반에서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보면 그의 모습이 신들린 듯 보였으며, 열강을 하고 어떤 때는 스스로 흥겨워 춤을 덩실 덩실 추었다고 한다. 그의 생업은 양봉이었다고 전한다. 벌들의 삶이 그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 공동생활이라고 보았다. 그는 전혀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누가 인사차 무슨 선물이라도 가지고 오면 전적으로 사양하였다고 한다. 머리 둘 곳 없으셨던 예수,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의 삶을 그대로 믿고 살았다고 하겠다. 예수의 영성 중에서 <가난>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그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그는 올곧고 참된 것 즉 거짓 없는 깨끗한 삶이라고 보았다. 그의 일상생활에서 다짐하고 실천 하겠다는 글이 1955년 4월 30일 일기에 적혀있다. 그 제목은 <七思>이다. 1. 暝思誠  말없이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생각한다.  2. 居思直  앉을 때에는 무릎을 굽히고 언제나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는다(이것이 一坐이다). 3. 息思消(吸生呼命)  숨은 깊히 쉬고 잘 때는 코를 골고 잔다. 4. 寢思寧  잠 잘 때에는 나무판자 위에 누워 편안히 잔다. 5. 房思後生  남녀 관계는 끊는다. 자녀를 낳기 위한 관계는 자연이요 본능이요 진리다. 6. 郊思事天  나가서 산책할 때는 더욱 하나님을 생각한다. 한가할 때 배나 아버지를 생각하고 동산을 산책할 때 낙원을 생각한다. 7. 食思割愛  식사는 적게 한다. 내가 안 먹는 부분은 남이 먹는다. 이것이 사랑이다. 조금이라도 남에게 나누어주는 시작이 一日 一食이다.


   이 밖에 <아홉가지 몸짓>과 논어에 나오는 <아홉가지 생각>을 같이 실천하겠다고 결심한다. 이런 결단이 자연스럽게 실천되도록 一日克己復禮의 생활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사망 예정일을 1년으로 잡아 놓은 것은 이렇게 종말론적으로, 하루를 자신의 최후의 날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죽는 날을 잡아 놓았다고 누가 비난하면, 그는 "죽을 날을 안 받아 놓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받아 넘겼다. 언제 죽음이 와도 태연자약 기쁨으로 죽어 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죽는 날을 받아 놓았다는 것은 근원적 시간을 살자는 것이었으며, 피상적 시간이 아닌 정신적 시간을 살자는 것이다.


   매일 어두움을 뉘우치고 더 밝게 나가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순리대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세상을 떠나면 멀고 큰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에 있는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입장이 똑바로 세워져서 하나님의 자녀로 올바르게 살면 어디나 언제나 천국이다(隨處爲主 立處皆眞). 그는 主一無適의 삶으로 一而貫之하려고 했다.


   현재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은 앞으로 더 나은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와 같은 것이다. 그는 張橫渠의 西銘에 나오는 대목을 인상 깊게 인용한다. 存吾順事 沒吾寧也  '내가 지금 살아 있을 때에 기꺼이 일하고, 언젠가 죽은 다음에는 평안히 있을 것이다.' 이런 삶이기에 그는 "인생은 죽음으로부터"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치 자신이 모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났듯이, 이제 이 세상의 삶은 또 다른 모태일 것이며, 다음의 새로운 영계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연경반에서 기독교의 성경 이외에 타종교의 수많은 경전을 인용하고 때로는 부처 노자 공자 맹자 장자 등 성인 철인들의 사상을 거침없이 소개하였기 때문에 혼합종교를 가진 사람, 또 다원주의 종교가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런 경전이나 고전, 위에서 말한 성인들을 말한 것은 자신의 신앙과 삶을 깊고 넓고 높게 그리고 풍성하게 하려는 영성적인 수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초기의 글 중에(18943일)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는 것이 있다. 거기에서 그는 '노자신' '석가심' '공자가' 그리고 '인자 예수'라고 썼다. 마지막 인자 예수라는 대목에서 '말씀으로 몸 일우고, 뜻을 받어 맘하시니, 한울밖엔 집이 없고 거름거린 참과 옳음! 뵈오니 한나신 아들 예수신가 하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신앙의 고백적인 글은 '한나신 아들(독생자)' '십자가' '인자를 가로보면' '인자를 세로 보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의 신앙은 "주여, 영생의 말씀이 당신에게 있사오니, 내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요 6:66-68)에 철처하였다고 생각된다. <김흥호:제소리 347쪽 이하 참고>


  3. 맺는 말


  류영모는 우리 나라의 기독교계에서 드물게 보는 영성인이다. 한국 개신교 100년 사에서 이만큼 깨끗한 영성인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는 "거룩"이라는 개념을 "깨끗"이라고 보았다. <깨끗>이라는 말에서 나는 '깨어난다' '깬다' '깨끗하다'라는 말이 연상되고 있다. <끗>이라는 말에서는 '언제나' '마지막까지'라는 뜻이 떠오른다. <영성>이라는 것을 여러 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예수의 산상수훈 8복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였다.


   류영모의 생애는 지금 우리 신앙인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는 靈性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런 영성이 매우 자연스러웠고 일상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도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누구나 탄식하는 이 세상에서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확신할 것이다. 참으로 류영모의 삶과 가르침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새 방향과 규범 같은 것을 제시해 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류영모는 자신의 집과 연경반을 주로 오간 것 같다. 그의 교분도 그리 많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연경반에서 일주일에 한 번 모일 때 그 수가 매우 적었을 뿐 아니라 어느 때는 아무도 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 때 뿌려진 씨의 열매가 맺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그는 '맨발의 성자'로 알려져 있는 이현필과 친분이 두터웠고, 그들 수도자들의 모임인 동광원, 귀일원에서 말씀을 전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씨 들임에 틀림없다.


  생태계가 이렇게 오염되어 간다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머지않은 장래에 끝장이 날 수 있을 것이다. 왜 생태계가 이처럼 더러워져서 사람이 살기 힘든 환경이 되는가. 그것은 사람들의 정신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환경의 오염보다 이 정신계의 오염이 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염된 세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영성인 밖에 누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