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사상 이야기/류영모

다석 류영모를 통해 본 생명으로서의 인간이해(장평수0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5.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다석 류영모를 통해 본 생명으로서의 인간이해

 

- 장 평 수 -

 


제1장 서론
제1절. 논문의 문제제기와 목적
제2절. 논문의 연구범위와 방법론

제2장‘天地合一’의 인간
서언
제1절.‘사이’적 존재
제2절.‘바탈’을 품은 존재
제3절.‘교역’하는 존재
결언

제3장‘求道精進’의 인간
서언
제1절.‘숨’쉬는 존재
제2절.‘거스름’의 존재
제3절.‘솟남’의 존재
결언

제4장.‘오늘’을 사는 인간
서언
제1장.‘점심’먹는 존재(하루살이)
제2장.‘가온찍기’
제3장.‘되어감’의 존재
결언

제5장. 결론:생명으로의 인간 ―‘귀일’

참고문헌

---------

 

               제1장  서   론

제1절 논문의 문제제기와 목적


우리 시대의 화두(話頭)를 꼽는다면 단연‘생명(生命)’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특별히 기술문명이 고도화되고, 의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우리의 안녕과 안락한 삶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더욱 인간답게, 그리고 윤택하게 하리라는 기대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야말로 아득하게 발전한 인간의 문명은 애당초 인간의 기대처럼 인간의 삶을 맑고 아름답게 하지만은 않았다. 발달한 문명을 통해 혜택을 받았다기 보다는 발달된 문명은 인간을 오히려 더욱 비인간화시키고,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인간의‘生’을 위협하게 됨으로 이제는 생존의 문제까지도 위협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에 대한 관심은 당연 점차 고조되었고, 인류는 그동안 자행(自行)되었던 죽임의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을 하게 되었으며, 점차 그 대안을 찾기에 열중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반성과 움직임이 생명의 본질적인 부분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채, 그때 그때 벌어지는 사건과 상황의 수습에만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과 현상에 대한 단편적이고 즉각적인 입장만을 취하게 되었고, 생명에 대한 논의의 대부분은 윤리적이고 생태적인 측면에서만 거의 논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생명에 대한 논의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하고 그 논의자체를 스스로를 한계지울수 밖에 없었다.


이는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인한 사회적 후유증이 심각하게 나타나게 되었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급급하다는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와 이것의 연장선상에 드러나는 정신적 공황(恐慌)이 그 원인이라 할 것이다. 경제 성장이 우리의 삶을 한층더 높은 단계로 이끈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갈수록 커지는 맘몬에 대한 숭배가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논의를 배제하고 제한시킨 원인인 것이다.


이에 본 논문은 생명에 대한 윤리적이고 생태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보다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측면에 대해 논의하려고 한다. 다소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는 단점이 있기도 하겠으나 오히려 이러한 논의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생명에 대한 여러 대안적 목소리들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지 않고 한 방향으로 나아갈수 있는 근원적 힘이 되리라고 본다. 또한 본 논문에서 다루게 될 생명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논의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로 연결된다. 우리가 생명을 논의함에 있어 그것이 단순히 지엽적인 동물과 식물의 생명기능과 이에 대한 생물학적 혹은 해부학적 차원의 논의가 아닌 이상 생명에 대한 담론은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로 귀결될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류의 문제는 자원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닌 결국 사람의 문제이고, 그러기에“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본다. 즉 이제까지 언급했던 생명의 모든 논의는 결국 인간에 대한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는 다시 가이아의 문제이며, 이는 또한 우주의 질서와 조화에 대한 문제로 확산 혹은 수축되며, 이는 또다시 생명이라는 화두로 환원되기에 이것은 이제 그동안의 개별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유기적이고 통전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필자는 생명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와 반성을 시도하고자 한다. 분명 지금 이 시대와 앞으로의 시대는 그동안의 삶의 방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죽임의 문화에서 살림의 문화로, 개체생명에서 온생명으로, 경쟁적 삶의 방식에서 상생의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일 것이다. 이에 필자의 논문이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에 있어 생명에 대한 보다 진지한 고민과 논의를 확산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필자가 의도하는 바, 본 논문의 목적은 충분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제2절. 논문의 연구범위와 방법론

생명에 대한 논의를 함에 있어 그 범위와 방법은 실로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본 논문에 있어서 그 범위는 앞서 언급했듯 생명에 대한 보다 형이상학적 구조에 주목하려고 한다. 그래서 생태적이고 윤리적인 논의는 피하고 생명의 본질성을 회복하는데 대한 논의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생명의 본질을 논한다 할때, 이 논함의 수단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될 것이다. 왜냐면 생명에 대한 논의의 궁극적 목적과 지향점은 다름 아닌 바로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자연히 따라오게 되는 인간의 이해와 삶에 대한 태도 등도 집중하여 논의할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생명의 본질로 향한 인간의 기본적 이해와 생명의 회복을 위한 인간 삶의 태도, 그리고 생명 존재로서 인간의 지향점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多夕 류영모는 생명의 화두를 그의 온 삶을 통하여 풀어내려고 했을뿐만 아니라 우리 고유의 언어와 정서를 바탕으로 생명의‘되어감’을 몸소 보여 주었고 생명으로의 인간의 의식과 삶이 어떠해야하는지를 직접 보여준‘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多夕 류영모의 사상은 유교, 불교, 도교의 동양적 사유로부터 시작하여 이를 다시 한국 토종적 사유로 다시 원숙하게 풀어내었기에 본 논문도 역시 동양적 사유구조를 바탕으로 다석 류영모가 생전에 기록한 그의「다석일지」(이하 일지)를 기초하여 다석일지에 나타난 그의 사유와 독특한 우리 말(語)의 사용과 그 이해를 중심으로 서술해 나갈 것이다. 특히 다석 사상을 서술할때 다석 사상의 직접적 인용은 각주란을 통해 별도로 서술하고, 본문에는 다석의 애제자였던 김흥호의 풀이된 글을 실도록 하겠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은 모두 5장의 구조를 갖는다. 제1장 서론을 통해서는 필자의 의도와 방향, 연구범위와 방법을 제시하고, 제2장에서는 땅과 하늘 사이에 살면서 땅과 하늘에 상응한 인간이 어떻게 우주와의 합일에 이르게 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합일을 통해 어떻게 생명의 담지자로 서게되는지, 그리고 존재의 근원으로서‘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하는‘시작과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다룰것이며, 제3장에서는 생명의 담지자로서 인간이 그 생명을 어떻게 보존하며 생명의 궁극성을 회복하는지를, 즉 존재의 본질로서‘인간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서‘과정’을 다룰 것이다. 제4장에서는 이러한 생명을 품은 인간이 이 땅에서의 삶의 원리는 어떠해야 하며 결국은‘어디로 가야하는지?’의 문제로서 존재의‘귀착점(종말)’을 다루고, 마지막 결론을 통해 다석이 말하는 생명의 의미와 이 의미의 표현으로서의 인간이해를다시 한번 재 조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2장부터 4장까지 각 장의 처음과 끝에는 서언과 결언을 달아 서언에서는 각 장의 전이해를 달고 결언에서는 각 장의 내용을 다시한번 정리하면서 본 논문의 주제와 연관한 서술을 덧붙일 것이다.


           제2장‘天地合一’의 인간


서언(序言)


생명으로의 인간이해에 있어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것은 인간이 어디서부터 왔으며 또한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존재로서의 시작과 정체성에 대한 언급일 일것이다. 이런 물음에 대해 우선 첫번째로 창세기 1장을 논의의 시작으로 삼을수 있겠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 절대 無 혹은 절대 空의 상태에서 모든 천지 만물의 창조가 이루어졌고, 이 창조과정의 마지막으로서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시를........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인간 창조의 독특성이다. 즉 다른 창조물과 달리 인간은 구체적인 물질개념으로서의 흙과 비물질적이고 극히 형이상학적인 개념인 하느님의 生氣로 지어졌고 이로인해 생명을 품은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생기로 인해 생명을 품은 인간은 하느님과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했고 또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들을 관리할 책임까지 부여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한 창조물에 그칠수 있었던 인간이 이처럼 하느님과 대면하고 대화할뿐만 아니라 그의 창조물들을 관리하는 존재에까지 부상할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하느님의 생기를 받았고, 이로 인해 생명, 즉 형이상학적 사고와 존재로의 지향(指向)을 갖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생기로 인해 인간이 생명이 되었다고 할때 그 생명의 의미는 또한 무엇일까?


먼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생명의 의미는 크게 네가지로 볼수 있다. 첫째는 하이임(!yYIj), 둘째는 네페쉬(@94), 셋째는 루아흐(j'Wr), 마지막 넷째는 너샤마(+2@/)이다. 하이임(2-:+))을 제외하고는 위의 단어들은 거의 언제나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뜻을 가진다. 네페쉬(@94)는 일차적으로 숨이나 음식을 넘기는 목구멍 또는 목이라는 신체기관을 뜻하는 이름인데 이는 동시에 생명과 직결된 신체기관으로서 목구멍을 뜻하면서 생명의 의미로도 쓰인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는 생명이 본질적으로 숨(너마샤, +2@/)과 피(담, 3&) 속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창세기 2장 7절은“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yYIj' tm'v]nI)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약함과 위대함이 다같이 표현된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가지시는 그 특별한 관계 ― 몸소 빚으시고 직접 당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점에서 ― 에 표현이고, 인간의 약함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호흡’덕택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즉 창세기 2장 7절에서 흙덩어리의 상태는 인간이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생명의 호흡을 받았을때 비로소 생명체인 인간이 될수 있었다는 것이다.
루아흐(j'Wr) 라는 단어 역시 생명이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는데, 이 경우 역시‘숨’이라는 뜻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때는‘바람’,‘영(靈)’이 갖고 있는‘힘’이라는 어감을 갖는다. 욥기 34:14-15절을 보면 루아흐(영)와 너샤마(숨결)가 동의어로 쓰여지고 있음을 볼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결심하시고 생명을 주는 영을 거두어 가시면,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은 일시에 죽어,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시편 104편 29절에도 창세기 2장 7절과 3장 19절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두려워하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상에서 본 숨결(너샤마, 루아흐)에 관한 성서의 구절들은 인간이 그 숨결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준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구약의 생명관을 알아보는데 있어‘숨’과 함께 중요한 것은‘피’인데, 이것은 생명력 자체가 머무는 곳으로 이해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어느 경우에든지 고기를 먹을때는 피를 먹지말라는 금령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피속에 생명이 머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느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생명의 호흡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하느님께서 말씀을 직접 건네시는 대화의 존재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함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신약에서의 생명의 의미는‘프쉬케(yuch)’와‘조에(zwh)’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프쉬케는‘현세의 생명(목숨)’을 뜻하고, 조에는‘내세에 구원의 선물로 주어질 생명’,“생명이라는 사실 자체”를 뜻한다. 이는“추상적으로‘생명력’또는 더 나아가‘영원한 생명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그리고 이것들은 눅 12:15; 16:25절에서만‘지상적, 자연적 생명’을 뜻할뿐 거의 항상‘초월적, 종말론적 의미의 생명(영원한 생명)’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공관복음에서는 구원에 대한 갈망과 그런 구원의 선포가‘영원한 생명’이라는 개념으로 주로‘하느님 나라’또는‘하늘 나라’라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특별히 예수의 생애를 살펴볼때, 그는 그의 전 생애가 종말론적 삶을 살았지만 결코 초월적인 삶을 취하지는 않았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예수가 그 자신이 철저히 다른 사람의 현세 생명을 위해 투신하면서도 또한 철저하게 자신의 현세 생명에 대한 애착에서 초연하였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살도록 가르쳤음에서 알수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프쉬케라는 단어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한편으로는 일반적 의미로서 현세의 생명을,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 때와 그 끝을 보거나 또는 그 심판을 넘어서 구원될 참된(본래적) 생명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같은 내용에 비추어 볼때 성서적, 그리스도교적 생명관은 생명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생명의 호흡을 지니고 있는 존재임을 뜻한다. 더욱이 신약적인 배경에서 생명은 지상의 자연적인 생명과 종말론적인 생명을 구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공관복음을 통해 볼때도 예수는 생명을 결코 경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인간 생명을 구하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렸으며, 종말론적 삶을 산다하더라도 결코 지상의 자연적인 생명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보게된다. 예수가 지상의 자연적 생명을 그토록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결코 절대화 혹은 우상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대한 애착에 초연했음은 오히려 우리의 생명에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껏 필자는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조건을 기독교적 입장에서 매우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인간의 시원(始源)에 대해 東洋的인 입장은 어떤 입장과 해석을 시도하는지, 그리고 본 고의 중심틀인 多夕은 이를 어떻게 재해석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동양에서의 생명의 이해는 대체로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 또는 자연동화(自然同化)적 세계관 속에서 자연 전체를 살아있는 신비한 힘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큰 시각 아래서 만물을 살리고 기르며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는 천지인합일적 삶의 태도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서의 생명이해는 대체로 인간 중심적이 아닌 자연중심적인 관점으로써 전체로서의 생명을 중시하였다. 또한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알수 없는 신비한 관계에 의해 서로 얽혀서 보이지 않는 관계의 그물망을 짜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불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인연에 의해 짜여진 생명의 그물이라고 설명한다.
동양에서는 서양에서처럼 분석적, 환원적 고찰방식이 널리 퍼지지 못한 관계로 다각적인 시각에서의 다양한 문제제기는 없었다. 그러나 전일적(holistic) 또는 전체론적 시각과 관계론적 관점 아래에서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만물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들이 서로 생명의 힘을 받아 나누고 있다는 큰 생각이 생명관을 이루는 공통의 생각이었다.


특별히 생명을 말함에 있어, 生命이라는 말은 원래 性命이라는 말과 통하여 쓰였다고 한다.‘命’은‘명령하다’는 뜻 이외에‘부여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이는 천지만물이 하늘로부터 각각 그 본성을 부여 받았다는 측면에서 보면 성(性)이지만, 하늘이 천지만물에게 각각 그의 본성을 부여하였다는 측면에서 보면 명(命)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性, 바탈)과 하늘의 뜻(命)이 합하여 성명(性命) 또는 생명(生命)이라는 개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렇듯 동양에서는 생명을 天 또는 道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것을 천지만물의 본바탈을 얻었다는 뜻을 지닌 덕(德, 속알)이라는 개념으로 표시하였던 것이다. 이때 天은 천공(天空), 천지(天地), 천연(天然) 등 다양한 의미로 쓰이게 되는데, 천공(天空)은 하늘로서 육안의 대상이고, 천지(天地)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며, 천연(天然)은 자연과 동의어로 쓰인다. 이중에서 천지는 만물을 통칭한 道라고 말해진다. 즉 천지는 우주이고 일체의 존재자인 만물은 그 안에 있으며 이러한 천지를 존재시키며 지탱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바로‘道’로 보는 것이다.


道家에서는 道를 천지만물의 근원으로 보는데, 道가 일체의 존재와 힘의 근원으로 천지만물을 움직이고 존재하게 한다고 본다. 또한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며 움직이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道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無爲)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이라면 어떤 것이나 그에 의하지 않고서는 존재하거나 움직일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道로부터 유래하는 일체 존재는 우주의 원리인 태극(太極)의 이치로부터 발생하는 陰과 陽 두 氣의 화합으로 생성된다. 모두 다 우주의 氣를 따라 그 氣의 발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역시 태극으로부터 발생하는 陰陽理氣의 화합결과이다. 단지 인간만이 빼어난 氣, 즉 바르고 통하는 氣를 얻어 태극의 理를 알수 있다. 그 이치는 바로 우주 자연의 이치이며 동시에 인간 도덕적 심성의 이치이므로 인간은 그 이치에 따라 도덕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天地의 理를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의 정신 능력을 맹자는 心이라고 하였다. 心은 곧 하늘이 부여한 능력이며 사유하는 능력이다. 사유란 인간 개체의 사적 욕망이나 경향성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보편적 관점에 따라 행동하게끔 하는 정신활동을 의미한다. 인간의 의식이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벗어나서 전체를 생각하고 고려할줄 아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 이러한 사유능력으로서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있기에 인간은 보편적 관점에서 사유하며 역지사지(易之思之)할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사적 관심에만 매여 있지 않고 그것을 넘어 일체존재를 자기 자신과 평등한 것으로서 사유하는 것이 곧 마음이다. 그리고 이 마음을 확립하고 보존하는 자를 곧 대인(大人)이라 한다.


제1절.‘바탈’을 품은 존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을 구성하는 두 원리에 확고한 철학적 개념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곧 형상과 질료이다. 현상적 사물세계에 있어 우리의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사물의 형상이며 그 형상을 담지하고 있는 사물 자체는 정신과 구분되는 물질적 질료라고 하였다. 따라서 형상적 개별 사물들은 모두 형상과 질료의 종합인 것이다. 그렇지만 형상과 질료는 또한 상대적 개념이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첨가된 형상을 배제시켜가면서 재료로 계속 나아갈 경우 결국은 더 이상 무엇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없게끔 형상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된 질료가 남게 되는데, 이를 순수질료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질료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된 형상을 순수형상이라고 한다. 따라서 순수 질료는 순수 물질적 존재이고 순수형상은 순수 정신적 존재라고 말한다. 이렇게 순수 정신, 불순물에 배제된 상태의 그것이 바로‘바탈’이라고 다석은 말하고 있다. 즉 인간에게는 영혼을 키울 수 있는 天性을 타고났는데, 이 天性을 또한 바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바탈에는 태초의 하느님의 신성과 창조의 靈이 들어있는 것으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며, 생명의 자기 운동과 확장을 가능케하는 동력(動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력으로서의 바탈은 본래 하늘로부터 받은 性을 통해 인간의 아름다운 본질을 또한 말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늘이 주었기에 천부(天賦), 하늘이 시켰기에 천명(天命), 타고났기에 본질(本質)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늘이 바탈을 통해 인간에게 정신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길러 가게하고, 이렇게 영혼을 길러감은 종당 神을 생각하게 하여 그리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바탈은 하늘이 내 속에 집어넣어 준,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한 본성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인간에 대하여“천공(天空)의 모형인 둥근 머리를 위로 치켜든 인간은 말하자면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천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이 하늘의 산물임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욱이 플라톤의 이런 주장은 인간이 ‘저 위’를 지향하는 존재이지‘이 아래’에 머무는 존재가 아님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 즉‘위’와‘아래’란 말을 사물의 요소가 그 원래 장소인 궁극(窮極)으로 향해 들어가려는 경향으로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이 절대적인 의미에서‘위로 향하여’올라가는 것 존재임을 간파한 것이다.


이렇게 볼때 인간은 天上의 존재로서, 하늘로 올라가는 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내면에는 하나님의 참 기운이(생명의 호흡)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이 내재된 기운으로 인해 인간은 생명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속알을 키우는 것이 참 생명 속에 드는 것이다. 속알을 키워서 생명을 얻는 것이 지천명이다. 속알을 깨우는 것이 진리요 속알을 키우는 것이 천명이다. 우리는 하늘에 도달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인간은 속알 영혼을 키울 천성을 타고났다. 우리는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는 속성을 가지고 났다. 빛이 계속 오고있는 것처럼 성령이 계속 오고있다. 성령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 우리 속알이요 영혼이다. 우리 속을 키워 가는 것은 성령이요 성인이요 받할이요 은혜다. 우리는 속을 키워가는 하늘의 받할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근원인 바탈을 가진 인간의 현실적 삶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바탈을 품은 인간의 책임영역은 어디까지인가? 창세기에서는 인간에게 지상의 모든 생물을 잘 관리할 책임을 부여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관리의 내용은 모든 생물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몫의 생명을 잘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관리의 내용이며 책임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이 땅에서 잘 성장시키고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근원으로 계속해서 오르려는 바탈의 성향을 잘 길러 바탈이 하늘로 잘 오를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뒤 따르게 된다.


하지만 이런 근원으로 향한 성향은 자동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바탈의 거처인 인간의 의식적인 정신적, 육체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고 결국에 가서는 잃어버린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여 천상의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것이며, 결국에 가서는 인간의 인간됨 즉, 나의 나됨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바탈은 性인데 성은 노력하면 되고 꼭 되어야 인간이 된다. 세상 사람은 오관의 대상인 부귀(富貴)를 性이라고 생각하고 힘써서 꼭 얻으려고 하지만 군자는 이것을 바탈이라고 아니한다. 이는 노력해도 얻을수 없는 것인 천명(天命)과 달리 인간이 노력하면 충분히 얻을수 있다.

바탈은 올라가는 경향이 있고 이 올라가는 성향을 계속 키우면 천지지성이 되고 물질은 흘러내려 바탈은 기질지성이 된다.“바탈이라는 것은 올라가는 경향과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떨어지는 경향은 남녀(男女)에 빠지게 되고 올라가는 경향은 죄악(罪惡)을 거슬러 뚫고 올라간다. 정신은 거슬러 올라가는 바탈을 가져 천지지성(天地之性)이 되고 물질은 흘러내리는 바탈을 가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된다.

바탈은 하늘이 내 속에 집어넣어준,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한 본성이다. 바탈은 인간의 본성으로 이를 잘 다스려야‘솟나’,‘해탈’이 가능하게 되고 인간의 개성(인격)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나의 나됨’이 될수 있는데, 나의 나됨이란 하늘로 솟나야 하는 것으로 바탈을 극복해야하는 것이다.

바탈은 하늘이 사람 마음속에 천명을 집어넣어 주었다. 사람 속의 천명을 성, 바탈이라고 하는데 이 바탈을 뿌리박고 사는 곳이 땅이다.

머리되시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계신 계, 우리 속에는 키워 가야 할 소질이 있다. 그것을 받할, 性이라고 한다.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계속 곧게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곶당 계속해서 하늘과 연결하여 정직한 존재가 된다. 내 속에는 아버지의 끝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다. 그것을 바탈이라고 한다.


바탈의 성향을 잘 길러 태초의 하느님의 창조성을 회복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무엇일까? 바탈의 성향이 잘 길러지고 있음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 생명의 근원을 회복하여 생명을 품은 존재라고 할때 이러한 인간의 내적, 외적 표징은 과연 무엇일까?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바로 바탈을 회복한 자의 표징은 이처럼‘자유’하게 됨이라 할수 있다. 그리고이러한 자유함은 인간이 천상의 존재로서 땅의 것을 초월할 수 있음이며, 궁극으로 향하는 여정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기 안에 분명한 지향점을 가지고 자기 존재를 서술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바탈은 무엇일까? 자유일것 같다. 자유가 있기에 창조가 있고 인간은 하늘로 올라갈수가 있다.

속사람을 키워야 할것을 몰라서 되겠느냐 우리의 속은 흰빛의 천사(天使)와 같은 본질이다. 자유자재.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마음은 우주대로 확대할수 잇는 기체(氣體)다. 이 마음속에서 내 바탈이 자유롭게 소요유한다. 내 바탈이 나비가 되기 위하여서는 내 뜻이 길고 영원해야 하고 우리의 몬과 몸은 이것을 위하여 먹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모르면 속사람을 키워 갈수가 없다. 바탈은 나비, 맘은 고치, 몬은 애벌레, 삼단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속에 무엇을 집어넣어 주셨는지 너무도 자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되는 성품을 집어 넣어 주었다. 이 성품은 너무도 진실해서 귀신조차도 어떻게 할수 없는 정당하고 평등하고 근원적인 것이다. 잠깐 동안이라도 계속 발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야하고 공부(工夫)하고 공력(工力)을 쌓아서 하늘에 올라가는 일을 해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꾸준히 하늘 길을 날아 올라가지만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높은 하늘을 날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자신 안에 주어진 근원을 향한 생명의 운동을 외면한채, 끊임없는 자기 기만과 주어진 창조성을 무너뜨린다는 인간의 일반적인 성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인간의 자기 소외는 더욱 증폭되었고, 이것은 또다시 창조질서의 교란 및 붕괴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석(多夕)은 자기 안에 바탈이 자리잡고 있음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여겼으며, 이것의 회복만이 인간이 살 길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자리잡고 있는 바탈로 인해 인간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생명의 운동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인간을 천상의 존재로 태초의 신성을 회복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속알을 집어넣어주셨기 때문에 속알을 키워가는 것이 인간의 충성되고 진실한 삶이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편지가 있다. 이 세상을 벗어날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편지를 읽으며 즐겁게 살다가 죽음이 오면 훌쩍 날아가면 되지, 그 이상 더 물을 것이 무엇이냐. 내 속의 신성(神性)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 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다.


제2절. 사이적 존재


인간은 분명 하느님의 태초의 신성인 바탈을 지닌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육을 입고 있는 존재이다. 이는 단순히 인간이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유대-기독교의 세계관은 유기체일뿐 아니라 역동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형태 형성학 혹은 유기체의 구조적 분화로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적 과정에서 피조물은 서로 구별되지만 창조자의 본성은 모두 보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생명(生命)이라 할때 생(生)이라는 글자는‘땅에서 싹이 돋아나는 것’을 형상화한 글이라고 한다. 이것은‘하늘과 땅 사이에서 하늘과 땅의 큰 힘을 받고 땅을 뚫고 하늘을 향해 새 싹을 튀워 그 사이에 존재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명(命)이라는 글자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명(命)은‘입 구(口)’자와‘명령할 령(令)’자가 합쳐진 글자이다.‘령(令)’자는 관청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한다. 관청에서 높은 사람이 하늘에서 명 받은 것을 선포하는 것이‘령(令)’자인데, 모든 명령 선포가 입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점을 분명히 하여‘입 구(口)’자가 덧붙여졌다고 한다. 따라서‘명(命)’자의 의미는 높은 사람이 관청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로부터‘령(令)’받은 것을 말하여 선포한다는 뜻을 함축하여 명령의 의미, 천명의 의미, 운명의 의미등을 담고 있다. 이로써 생명이라는 말은 하늘과 땅의 큰 덕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나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이 생명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면서 모든 생명체에서 하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이 신비로운 생명의 사건에‘사이-존재’로서 하늘의 뜻을 지상의 물체(생명체)로 전할‘살림’의 책임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석은 이러한 사이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말하기를“누구나 수직으로 우뚝 선 이가 이이, 저이, 나이, 너이, 사람이다. 모든 동물이 다 벌벌 기는데 사람만은 우뚝 서서 다니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사람은 왜 일어설까?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가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이다. 하늘에서 온 것이 무엇일까? 닐러내린 하나님의 말씀이다. 계속해서 내려온 성령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내 자신이다. 그래서 사람은 일어선다.” 라고 말하였다. 또한 사이적 존재인 인간의 모습을“머리로 이어야 할 아버지요, 아래로 튼튼하게 발을 둬야 할 몬땅 어머니다. 어머니를 디디고 아버지를 이고 사는 것이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하늘과 땅의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존재적 속성을 표현하고 있다. 즉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육적인 존재이지만, 육을 초월하여 하늘(궁극)로 가야만 하는 지향적 존재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이적 존재로서 하늘(궁극)을 지향한다고 했을 때, 인간의 육체성을 평가절하하기 쉬운데“몸은 인간과 세계의 일체성을 확인하는 표시이고, 몸이 어떤 물체나 현실에 깊숙이 뿌리 내린 닻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상관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매개가 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닻을 내리는 운동 자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육체성은 생명을 향한 온전한 인간에게 있어서 분명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이기고 정신을 일깨워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바탈 생명이라 할때, 사이적 존재로서 인간은 예수가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시킨 것처럼 하늘(절대, 생기, 음)과 땅(상대, 흙, 양)을‘하나’로 연결하여 최초의 창조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존재로서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까지도 생명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 가운데서 나는 서서 나의 본성을 완성하고 다른 사람을 깨우쳐 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성, 소멸, 변화를 할때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과 사물들의‘사이’를 경험한다. 그리고 이‘사이’란 간격을 통해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게 된다. 더욱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다는 것은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의 전체 속에서 생성, 소멸, 변화를 통해 사물들은 또한 되어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 되어감은 온통 하나로서 우주 전체를 생성시키고 변화시키며 유지, 보존시키는 우주적 생명력, 우주의 신령한 힘, 한얼 등의 우주의 절대 생명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이같은 견지에서 사이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어쩔수 없이 이러한‘사이’에 내던져진 존재이며, 이 내던져짐을 통해 인간은 우주의 질서를 맺고 끊을수 있는 존재가 되게 된다. 즉 사이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주어진‘사이’에서 하늘과 땅을 잇기도 하고 그 사이를 나누기도 하는 책임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끊고 맺음의 역할을 통해 인간은 더욱더 책임적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이러한 책임성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주었던 위임명령을 통해서도 확인할수 있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표준 새번역,   마 16:19)

이러한 위임의 권한은 베드로 스스로를 책임적 존재가 되게하였고 이를 통하여 기독교 교회는 그 기반을 공고히 하게되어 무한한 발전의 시발이 되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이같은 맥락에서볼 때 사이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미 바탈을 품은 천상의 존재로서 우주 질서의 한 요소이지만 동시에 우주 질서의 운동력으로 작용하여 천지만물을 관장하는 책임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제3절. 교역(交易)하는 존재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것은 자기-생성, 자기-유지, 자기-개선으로 자기-보존성이다. 이와같은 성질은 생명체가 개체성(個體性)으로 지니는 고유함이자 근본 역량으로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생명체처럼 세계 내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기획하며 문화적이며 존재론적 삶을 사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이 문화적이고 존재론적인 존재가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세계라고 하는 터전이며, 이 터전 속에서 인간은 세계 사방과, 천지 만물과 어우러짐과 놀이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어우러짐과 놀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 생명은 생명체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같은 것은 바탈을 품고, 사이적 존재가 된 인간이 하늘과 땅의 매개적 존재로서 어떤 입장과 위치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또다른 설명이 된다. 그리고 그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이미 서술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분명한 역할과 책임이 주어져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역할을 감당하고자 할때 그 역할 수행에 필요한 에너지는 어떤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가? 물론 이미 주어진 바탈의 원초적 운동력에 의하여 거역할 수 없이 나타는것이기도 하겠지만 이 나타남의 보다 구체적인 과정은 어떠한 것인가?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다석은 또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천지만물은 서로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서로 감응하며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易의 관계로서 太極과 陰陽으로 설명될수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 만물이 한 몸이며 개체와 부분이 나름대로 동일하고 정연한 질서 위에 있음을 보게 된다.


易이란 고대 상형문자로 고대 중국사전「설해문자」에 의하면“카멜레온”으로 정의되어 있다. 즉 카멜레온의 기본적인 특징이 가변성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易의 형이상학적 어표를 따라 볼때, 해를 의미하는‘日’과 포기하다(勿) 혹은 고대 형상으로 달(月)을 의미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해와 달의 끊임없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수있다. 즉 생산과 재생산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며 세계 만물 가운데 일어나는 변화의 항구적인 진화의 과정으로 변화의 궁극적 실재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해(日)와 달(月)은 陰과 陽의 원형으로 이 둘이 상호작용을 함으로 진보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늘(天)과 땅(地)의 상징으로 日은 하늘을 드러내어 숭덕(崇德)이고 月은 광업(廣業)인데 숭덕은 수직이요 광업은 수평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이 사이적 존재라는 독특한 위치를 지닐때, 이는 드러난 질서로서의 陽의 개념인‘흙(땅)’과 내재된 질서로서의 陰인‘하늘’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게 되는데, 이는 사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려면 陰과 陽의 필연적인 상호작용이 수반됨을 말하게 된다. 다석은 이러한 역할에 대하여‘으이아’와‘아으이’란 말을 가지고 설명한다.

으이아는 세상을 뚫고 올라가는 기운이고 아으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운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운과 땅에서 올라가는 기운이 크게 통하는 것이 인온태통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나는 공중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공중이란 무엇이냐 공중이 나다. 하늘이 내 속에 속알을 넣어 주셨다. 속알이 서면 몸은 허깨비인줄을 알게 된다.

이것은 바탈을 품은 인간이 하늘에 응함으로 창조자와 피조물 간을, 하늘과 땅을 일치와 화해로 이루어 냄을 말한다고 보여진다. 드러난 질서로서의 표현인 으이아 곧, 인간의 구체적 행동으로서의 陽과 내재적인 질서와 기운으로서의 표현인 아이으 곧, 바탈로서의 陰이 서로 교역(交易)함으로 참된 인간성을 이루어 낼뿐만 아니라, 하나를‘이룸’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과 궁극성을 실현하여 인간 자신을 스스로 일치와 화해시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에서 아들은 피조물을 나타내고 아버지는 창조자를 나타낸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아버지는 주체로 행위하고 아들은 객체로 행위한다. 피조물을 상징하는 아들은 또한 신성이고, 창조자와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적 연속성은 신적 주체와 신적 객체 사이의 본질적인 일치를 수반한다.

다석은 이러한 역에 대하여“역이란 자기를 완성하고 남을 완성시키는 것이 易이다. 높은 것을 알고 낮은 것을 돕고 그것이 하늘을 본받고 땅을 법받은 것이다. 하늘처럼 높아지고 땅처럼 낮아질수 있어야 역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늘처럼 높아지는 것은 천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며 땅처럼 낮아지는 것을 도를 확대시키기 위해서다. 하늘처럼 높아지고 땅처럼 낮아지는 것이 도덕과 종교의 핵심이다. 하늘처럼 높아지고 땅처럼 낮아지면 그 가운데서 사람은 변화된다.”라고 하면서 우주 원리 속에서 천지합일을 이루는 인간을 설명한다. 다시말해 결국 인간은 생명력을 품은 바탈과 교역(交易)함으로 그 자신도 생명력을 갖게되고, 이러한 생명력은 곧 구원, 본질의 질서를 창조세계에 전달하고 이로써 태극으로 들어간다.고 보는 것이다.


결언

태극(太極) 음양(陰陽)에 따라 형성된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 음양오행(陰陽五行)이 내포한 자연질서 및 사회 도덕적 질서에 따라 삶을 유지하며 적극적으로 그 도덕성을 구현하고 실현하는 것을 生의 사명으로 갖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바르고 통하는 氣인 바탈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주 이치를 자각하여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 앎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氣를 알아 그 氣의 근원이 되는 理 또는 태극(太極)을 앎을 의미한다. 즉 우주 전체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이 세상에서 홀로 고립되어 있지 않고 전 우주와 상호 관계에 놓여있다. 또한 우주 자체가 인간의 원형이고 이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이 우리의 지상의 생활에 반영된다면, 인간과 우주는 그 아름다움과 존재 의미를 저 높은 현실에서 얻고, 다같이 본성적으로 그곳을 향하여 가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이 둘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수 있다.


인간의 이러한 탈 중심적인 지향성은 몸과 영혼의 일체성 뿐만 아니라 天地合一의 인간을 보다 분명하게 정의내릴수 있게 하는데 즉, 신적인 배경으로 인간을 보게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신적인 영역에 놓는 것이다.

껍데기 너라고 할 수밖에 없는 육체적 나와 심오한 영계(靈界)속으로 찾아들어가 하늘 위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받들어야 하는 정신적인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인 나가 있다.

일생은 마음과 몸으로 사는 것인데 하늘은 마음을 키워 하늘처럼 비게 만들고 땅은 몸을 키워 땅처럼 튼튼하게 만든다.

너 자신을 알아서 살아가라. 이세상 모든 물건이 하늘에서 바탈을 받아서 나오는 것이지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모두 하늘에서 온 것이다. 하늘에서 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땅도 하늘에서 왔다. 몸도 하늘에서 왔다. 마음이 하늘에서 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것의 몸도 모든 것의 마음도 모두 하늘에서 왔다. 심신일여(心身一如)다. 모든 것의, 하늘의 모든 것은, 땅은 하늘이나 땅이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두가 진선미를 구현하고 있다. 사람들도 모든 것의 모든 것이지 그 밖의 것이 아니다. 사람아, 어떻게들 생각하고 있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늘에서 온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짐작해서 네가 너를 알고 살아가야 한다. 인생의 제일 소중한 것을 자기를 아는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아는 것이다.

 


          제3장. 求道精進의 인간


서언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기간을 생명체는 목숨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살아있음이라는 생명의 의미는 지속(持續)과 과정(過程)이라는 뜻을 자연스럽게 함축하게 된다. 이는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일정한 기간 동안의 삶의 지속과 과정을 말하는 것이며, 태어남과 죽음 사이를 살아감의 동안을 흔히 간략하게‘삶’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때를 살아가면서 섭취, 소화, 발육, 성장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생명체는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체로서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이미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명의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관점에서‘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물으면 존재하는 다른 생물체들과 독특하게 구별되는 차이점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즉 바람과 돌은 그저 있는 것이고, 풀과 나무는 자손을 퍼뜨리며 자연의 흐름에 따라 생존한다. 벌레나 짐승도 나름의 짧고 긴 일생을 바쁘게 보내며 자연을 형성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를 형성하며 자연의 흐름에 따라 주어진 몫의 삶을 살다가 갈 뿐 특별히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탁월한 점은 없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달리 유난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변화 무쌍한 집단 사회를 이루고 그 속에서 윤리나 종교, 예술,  학문의 세계를 창조하며, 갖가지 자연물을 대상화시키면서 완전한 삶과 세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하는‘발전’개념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의미를 구현하는 의미론적이며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은 생명체의 일반적 기능인 물질대사와 자기 복제, 자기 운동성을 넘어 의미체험과 의미추구라는, 진리와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추구하며 동시에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 형이상학적 궁극으로의 초월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렇게 형이상학적 초월을 추구하고 존재의 궁극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최대의 약점은 바로 육체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인간은 앞 장에서 언급했던 바탈을 잃어버리고 이 때문에 인간은 늘 자기 기만과 자기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록 인간의 육체성이 인간의‘나아감을’일차적으로 제한하지만 인간이 이 육체성을 극복할때, 인간은 비로서 인간됨(바탈)을 회복 할수 있게 된다.

언제나 불평불만없이 자기 속에서 무한한 존재를 끄집어 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미리 무한한 보물을 집어 넣어주셨다. 그것을 캐내는 것이 내 사명이다. 제 속을 파내는 것이다. 자기 본성을 파헤치고 자기의 본체로 돌아가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인간의 육체성은 단순히 부정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 잃어버린 바탈을 회복하기 위한 또다른 기회이자 가능성이 될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런 육체성은 인간이 아직 미완성의 존재이며 계속해서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으로“천명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이렇게 해서 육체성이라는 한계를 갖는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내면적인 전체를 바라볼 줄 아는 인간이 된다. 내면의 전체를 바라볼때 인간은 이미 자아를 포함하여 삶과 세계의 근원을 보게 되는 것이며, 삶과 세계의 근원을 봄으로 다른 생명체에는 없는‘자기반성’이라는 독특한 특징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인간만의 독특한 특징은 인간을 은폐로부터 개방으로 전개시켜줌으로 육체성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몸이 죽는 길이 고행이요 맘이 모아지는 길이 사색이다. 고행와 사색으로 다 죽게 되었을때 진리를 깨닫고 다시 안심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순간이 覺이요 이 각을 위해 결사적인 정진을 하게 된다.


제1절,‘숨’쉬는 존재


‘생명’이란 말은 漢字의 태어남과 자람 및 삶을 뜻하는‘生’과 목숨과 운수 및 명령을 뜻하는‘命’의 합성어이지만, 우리 말 뜻으로는 일반적으로‘목숨’으로 통하며 살아있는 것의 속성인 감각과 운동 및 증식 등 죽은 것들에서 볼수 없는 현상의 내재적 본질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목숨은“숨을 쉬며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할수 있다. 뼈와 살만 놓고 보면 인간의 몸은 한낱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는데, 여기에 살게 하는 힘 내지는 살게 하는 원리가 바로‘숨’인 것이다. 그래서 숨은 인간의 생명의 원천이며 생명의 힘 즉 생명력이 된다.


다석은 이런 숨의 원천적 생명력을 통해 인간이 세상에 나게 되었고, 이 숨으로 인해 바탈을 회복하여 하늘의 아버지께로 다다를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때의 숨은 육체적인 호흡뿐 아니라 정신의 호흡으로 인간이 생명존재로서 하늘을 호흡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영원(永遠)을 산다고 말한다.

生死가 하나가 되는 것은 내가 없어서 무아가 되고 더 커서 대아가 되면 생사는 一毫一吸이 된다. 大我가 살기 위한 하나의 호흡이 생사라는 것이다.
가고 오고 한가온이 나요 나는 언제나 데계로 하나님 안에 있다. 생사를 넘어선 나, 하나님과 같이 있는 나에게는 가고 오는 것이 하나의 호흡에 불과하다. 한 호흡을 쉬는 것이 하니님이요 그것에 맞추어 사는 것이다.

다석은 숨을 목숨과 말숨으로 나눈다. 목숨은 코로 숨쉬고 깊이 잘수있는 생리적인 호흡이고, 말숨은 천하의 소식을 듣고 고금의 경전을 보고 생각하고 연구함으로 말씀에까지 미치도록 함으로 생명의 호흡을 쉬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해 목숨은 육체성을 지닌 인간이 생물학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만, 말숨은 동서고금의 경전을 읽고 깨달음으로 몸나의 인간이 얼나의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숨쉼이 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의 모든 질서와 조화가 그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음에 근거하는 것이다. 또한 말씀은 하늘로부터 인간에 내려온 하느님의 변치않는 영원성을 띠는 것으로, 이는 그의 능력의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말숨이 말씀이 되어 생명이 되는 이유는 말숨이 말씀으로 변하면 이 말씀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기에 생명이 된다.
숨 쉼을 통해 인간이 영원성을 띤다고 하는 것은 숨 쉼을 통해 인간은 生과 死의 갈림을 매 찰나마다 체험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숨 쉼은 말숨을 쉼으로 가능하다. 김흥호는 다석의 이러한 사상을 풀어내기를,“내쉬고 들이쉬는 것이 호흡인데, 호흡이야말로 하나의 소식(消息)이다. 일생을 살려면 9억 4천만 번의 숨을 쉬어야 하는데 사람은 진리의 숨을 쉬어야 하고 정의의 숨을 쉬어야 하고, 생명의 숨, 성령의 숨을 쉬어야 한다. 이러한 숨을 쉴 때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으로 우리의 속알이 깨어날 수 있으며 참생명으로 쉼쉴수가 있다. 생명은 한 생명이요 한숨이다. 하나님을 그리는 얼숨도 한숨이고, 이치를 푸는 말씀도 한숨이요, 목숨을 이어가는 코로 쉼쉬는 자연생명도 한 생명이다. 목숨은 氣가 통하고 말씀은 理가 통하고 얼숨은 神이 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것은 얼숨 쉼인데, 목숨을 쉼으로 만물과 통일(統一)을 이루고, 말씀을 쉼으로 만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고, 얼숨은 쉬어 천지합일에 이르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호흡은 숨을 내쉼으로 속(體內)의 노폐물을 밖으로 내 뱉어 속을 비우고 淨하게 하는 것이며, 숨을 들이마심으로 우주의 기운과 하느님의 말숨을 받아들여 바탈을 회복하고 얼나의 나로 커가고, 숨 쉼의 찰나때마다 진리의 숨을 쉬어 하나로 뚫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같은 호흡은 생리적으로 볼때 인간을 더욱 천지합일(天地合一)의 인간으로 향하게 하는데, 이것을 다석은‘소식(消息)’라는 말로 표현한다. 다석은 숨을 산화작용을 생명의 불꽃을 일으키는 풀무질로 본다.

소식한다는 것은 기식(氣息)곧 호흡(숨), 목숨(생명)을 소비하는 것을 주관하여 쓰니, 가장 인간 생활 이치의 핵심을 잡아 된 말이다. 자(自)는 비(卑)의 본자(本字)요, 심(心)은 염통이니 코와 염통을 대어놓는 형상으로 숨쉰다는 식(息)자를 이룬것도 묘하다. 휴식(休息)은 안식(安息)이요 기식(氣息)은 호흡이다.......오인(吾人)이 소식하는데는 이대식(二大息)을 소비한다. 기식과 신식(信息)이다. 기식은 호흡으로 되고, 신식은 왕복으로 되는데 호흡의 기는 천지간에 가득 찬 대기(大氣)요, 왕복의 神은 신인간(神人間)에 바로 놓인 성신(誠信)이니 대기는 생리(生理)의 본원이요 성신은 윤리의 본원이다. 코로 숨쉬는 자, 대기의 자식이요, 맘(심정)으로 왕복하는 자, 성신의 자식이다.

하늘에서 명을 받고 내속에서 말씀 사르고 성령은 위에서 내려오고 내 속에서 생명샘은 강같이 솟아나오고 내려오고 올라가고, 정신적 호흡이 성이다. 성은 생각이요 기도다. 숨쉼이다. 이렇게 산소는 공급되고 탄소는 밀어내어 모든 영양분이 장작이 되어 불을 피우고 힘을 내는 것이 消化요 내 마음 속에서 진리의 올올을 풀어내어 기쁨으로 바꾸어 감이 성령의 기운이다. 힘있게 일어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心氣가 크게 변하여 땅의 일을 버리고 하늘의 일을 해야한다.

이로써 육체 생리적인 호흡을 통해서도 인간은 천지와 합일의 운동을 함으로 인간의 육체성을 극복할 수 있게되며, 인간은 구도적(求道的) 인간형이 될수 밖에 없다고 다석은 본다.
사람이 나비가 되는 길은 무엇일까. 몸뚱이의 나에서 말씀의 나가 되는 것이다. 말씀을 더듬어 하느님을 찾아오르고 하나님을 만나 영감을 받아 다시 말씀을 생산해 간다. 말씀을 생산하다가 내가 말씀이 되는 것이다.

말숨이 맞으면 진리가 되고 진리가 되면 땅의 집착을 버리게 되고, 이를 버리면 자유가 된다. 인간은 진리의 호흡을 해야한다. 진리의 호흡은 생각인데,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에 생각은 인간의 본성이요 받할이요 하늘에서 받아서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인 인간의 자연이다. 생각하는 본성을 계속해서 정리하고 통솔해 나가면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진리를 도라고 한다. 또 이 도를 통하여(깨닫게 되면) 인간은 실천을 수반하게 되는데(구도자로서 당연한 것), 이것을 반복하면 하나의 길이되고, 계속하다 길을 내어 가다보면 가온, 중도를 가게되고 가다보면 하늘을 오른다.(솟남에 이른다)

말숨이란 말과 숨인데 계속해서 여기를 떠나라는 말이 말이요 숨어 살라는 것이 숨이다. 삶이란 떠나는 것이요 숨는 것이다. 떠나는 데 발전이 있고 숨는 데 깊이가 있다. 불사르는 것이 떠나는 것이요 물처럼 땅 속에 숨는 것이 깨끗하게 사는 것이다.
제2절.‘거스름’의 존재


플라톤의「국가론」에 나타난 동굴의 비유를 보면 동굴 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굴의 끝을 향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손발과 목이 모두 묶인채로 머물러 있고, 목이 묶여 고개를 돌릴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앞만을 쳐다볼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들의 등 뒤로 어떤 반향이 온다. 이때 동굴 안 사람들은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중 한 사람의 사슬이 풀려지고 억지로 일어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동굴안으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게 강제된다면 그는 그 빛이 고통스러울 것이고 그가 이전에 그림자로 보았던 사물들도 그 번쩍이는 빛 때문에 제대로 알아볼수 없게 된다. 또한 그는 이전까지 보았던 것이 헛것이고 앞으로는 보다 실재에 가까은 것을 보게 될것이라는 말이 오히려 더 괴로워지게 되고 오히려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동굴 밖으로 이끌려서 시선 가득 햇빛으로부터 오는 광선을 받게 된다면 그는 이전까지의 모든 것이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동굴 안의 동료들이 가엽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 여전히 빛을 등지고 앉아있는 그들에게 지금 보이는 것은 진상(眞相)이 아닌 허상(虛想)임을 밝히고 그들의 묶인 몸을 풀어 동굴 밖으로 이끌려 하지만 오히려 그는 동굴 안 동료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플라톤은 이 비유를 통해 인간의 본질은 이성(理性)인바, 이는 인간에게 있어 오직 이성만이 감성과 달리 영원한 진리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감성에 따라 현상 세계만을 알고 거기에 매달리는 욕망의 인간과 이성에 따라 이데아계를 사유하며 현상을 넘어설줄 아는 정신적 인간의 차이는 마치 동굴 안에 갇혀 묶여 있는 죄수와 지상 위를 마음껏 활보하는 자유인과의 차이와도 같은 것이다.
어쨌든 몸을 돌려 자신 뒤의 사물을 보고 빛을 봄으로 실상을 깨닫게 됨은 바로‘거스름’의 행위가 되었고, 일상적으로 일정한 고정관념과 편견, 그리고 관습에 얽매여 한 방향으로밖에 사유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그 실상을 알림으로 오히려 죽음은 당함은‘거스름의 결과’라고 할수 있겠다. 하지만 빛을 보고 그 빛을 사람들에게 알려 죽음을 당했지만 그는 진리를 본 것이고, 빛을 봄으로 구원을 이룬 그에겐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되려 가엽게 느껴졌을 것이다. 신약성서의 스데반처럼.


이렇게 볼때,‘거스름’이란 진리를 위한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라고 할수 있으며, 이것은 바탈을 회복하기 위한 인간의 당연한 행동이며, 사이적 존재로서 하늘과 땅을 잇는 중요한 삶의 방식이라 할수 있다.
다석은 이러한 거스름에 대하여“인간의 본성은 이 세상과는 이질적(異質的)이다. 기름과 물처럼”이라하며 인간 삶은 기본적으로 거스름의 삶임을 직접적으로 언급을 한다. 또한 이러한 삶의 방식이‘말숨을 쉬는 삶’이며, 하느님께서 이미 인간에게 명령한 삶이라고 말한다.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서 세상을 역행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말씀이다. 삶이란 역행이요 죽음이란 유행이다. 한없이 클 둥근 영혼이 하늘에 오르며 버릴 먼지인 몸뚱이는 땅이 떳떳하게 잘 처지할 터이니까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 땅 하면 몸이 떨어져 부닥치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우스운 빈 소리로 땅은 모든 만물을 빈 마음으로 받아들여 처리해 주시는 고마운 어머니다.

이처럼 거스름의 삶은 생명으로의 직접적인 방식이 되는데, 이러한 삶의 방식은 단순한‘반역’이나 기존 질서에 대한‘교란’이 아닌‘파장(wave)’을 이루어‘힘(power)’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거스름은 신의 창조성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적 행위에 참여하는 인간의 의식적이고 계속적인 자기 운동(투쟁)이 된다.

창조는 단 한번의 사건이라기 보다는 계속적인 과정이다. 왜냐하면 창조 신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역할을 창조자로서 강조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우주를 신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신의 창조성은 우리 안에 완전한 신의 의식의 완성을 향한 계속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적 행위는 세계 내 신의 창조적 행위의 일부가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운동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다석은 이 거스름의 방식을 일식(一食), 일좌(一坐)의 삶으로 드러낸다.

정신이란 精과 神인데 정과 신을 붙잡는 것이 수도(修道)요 그것은 체득(體得)하는 것이다. 정을 붙잡는 방법이 일좌요 신을 붙잡는 방법이 일식이다. 일좌(一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감정을 승화시켜 精을 붙잡아 전정성단(轉精成丹)하는 것이이 일식(一食)은 심정(心情)을 가라앉히고 사색 명상을 통하여 신언을 이해하고 신에 통하여 천리를 체득하는 것이다. 일좌(一坐)는 입장(立場)을 가지고 승토(乘土)하여 마음을 체득한 사람이 되게 하고, 일식은 숨을 바로 쉬고 잠을 바로 자서 속알을 밝히고 생명을 일어서게 한다. 일식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간의 본성을 깨우쳐 주고 일좌는 설완(褻翫)을 끊어 주고 습염정(濕染情)을 제거한다. 일식은 사람을 우주 밖에까지 소요유하며 생각할수 있고 일좌로 사람은 호연지기를 능양하여 우주를 내 뱃속에 집어 넣을수도 있다. 일좌식이 정신이다.

이것으로 다석은 거스름의 방식을 몸소 체현(體現)하였고, 이런 삶의 방식만이 인간이 육체성을 극복의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이 바탈을 회복하면 죄악에서 벗어날수 있으며 궁극에 가서는 본체(本體, Imago Dei)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석은 자기를 먼저 다스리라고 말한다. 그래서“나를 죽이는 일을 해내라. 극기복례하라. 나 소아(小我)를 죽여야 큰일 대아(大我)가 자꾸 커져 나온다. 깍을수록 커지는 구멍, 자기를 깍을수록 자기는 커지고 자기를 뽐낼수록 자기는 작아진다. 자기를 죽여서 자기를 키우는 것이 잘(善)이다. 대아가 자꾸 자라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잘못을 내가 책임지는데 있고 그것이 선이다.”이다라고 말한다.


인간 존재는 현실성에 대적해서 강력한‘아니오’를 내뱉을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 부처가‘모든 사물을 관조하는 것은 훌륭한 것이지만 사물이 되는 것은 두려운 것’이라고 말했을때 그는 이‘아니오’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계와 자아의 탈현실화의 기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플라톤도 이데아에 대한 직관을, 사물의 감각적 내용으로부터 영혼을 이탈시키는데 결부시키고 또 여기서 사물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영혼을 자기 자신에게로 전환시키는데에 이데아의 직관을 결부시켰을때 이‘아니오’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아니오’를 말할때 인간은 중통외직(中通外直)으로 설수 있다고 다석은 보았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막대기처럼 곧이곧게 살아야 한다. 중통외직(中通外直), 속은 통하고 똑바로 앉아서 사는 정좌가 인간의 모습이다. 수평으로 가는 세상을 뚫고 수직으로 올라가며 사는 것이 인생이요 종당은 태극점(太極点)인 아버지께 도달해야 한다. 사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께 나 자신을 전부 드려 바치는 것이 인생이요 참이요 생의 의미를 아는 것이요 진실이다. 수평, 수직 태극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대해서는 모든 집착을 버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 안녕 안녕 잘 계세요하고 떠날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중통외직(中通外直)으로 인간이 설때, 인간은 전체와 하나가 되고, 바탈이 드러나고, 하나님을 볼수 있으며, 견성(見性)하여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육체성의 한계를 갖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찰나적 삶에 최선을 다하고, 바탈을 회복하기 위한 거스름을 삶을 살아낼때, 인간은 하늘과 땅의 사이적 존재로서 천지합일을 이룰수 있고 진리를 깨달음으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거스름의 삶을 체현(體現)할 수 있음은 바로 인간이‘아니오’의 개념을 알고 있으며, 아니오라는 말을 내뱉을수 있는 주체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붓다가 말하기를‘모든 사물을 관조하는 것은 훌륭한 것이지만, 사물이 되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바로 이 아니오를 말함으로 세계와 자아의 탈현실화의 기술을 발전시킬수 있었고, 플라톤도 이데아에 대한 직관을 사물의 감각적 내용으로부터 영혼을 이탈시키는데 결부시키고 또 여기서 사물의 근원을 찾기 위해 영혼을 자기 자신에게로 전환시키는데에도 바로 이 아니오를 알고 이었던 것이다.


거스름의 인간이라 할때, 인간은 바로 이 아니오의 존재여야 하는 것이고, 아니오를 통해 자신의 설 자리(立場)을 분명히 알고 몸을 절제하고 마음을 모아 하늘에 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제3절.‘솟남’의 존재


인간의 근원에 대하여 살펴볼때, 인간은 하나님의 바탈을 타고 난 존재이며 바탈의 성질상 그것은 언제나 하늘로 솟아 오르려는 성질이 있음은 이미 본 논문 서두에서 밝힌바 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 있어 뿌리요 인간은 그 순(殉)이며,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며 계속 발전해야 할 사명을 띤 존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플라톤 역시도 동굴의 비유를 통해“인간은 일상적으로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벗어나 진리에로 향하는 사랑, 에로스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영혼 안에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그 진리를 향한 에로스가 있기 때문이며 이 에로스가 인간 영혼을 진리에로 이끌어 간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체적 욕망이나 감각 경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보편적 진리를 인식하는 이성적 사유 차원으로의 도약이 필요하다.”라고 말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상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결코 만족할 수 없기에 언제나‘지금 여기 그렇게 있음’의 한계를 돌파하려고 하며, 언제나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물론이고 또한 자기 자신의 그때 그때의 자기 현실조차도 초월하려고 노력하는 영원한 파우스트로서 새로운 것을 가장 많이 욕구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더욱기 다른 생물체와 달리 오직 인간만이 자기를 넘어서 초월할수 있으며 또한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시간적, 공간적 세계의 피안에서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그의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수 있어는 정신적 존재로서, 스스로 생명체이면서 또한 자기 자신과 세계를 넘어설수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궁극을 향하여 나아감이 인간의 본질이며 사명이라할 때, 다석은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솟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편지가 있다. 이 세상을 벗어날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편지를 읽으며 즐겁게 살다가 죽음이 오면 훌쩍 날아가면 되지 그 이상 더 물을것이 무엇이냐 내 속의 신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 나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이다.

사람은 땅을 박차고 하늘을 얻어 가져야 한다. 그것이 극기복례다. 소아를 버리고 대아가 되는 것이다. 대아가 되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가야 한다. 몸으로 대아가 될수가 없다. 마음으로만 대아가 될수 있다. 마음을 완성하는 것이다. 마음을 완성하는 것이 말씀을 완성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계속해서 중심을 이탈하여 원래의 본성인 바탈을 회복하고자 할 때 비로소 되어감의 삶을 살수 있으며 이 되어감의 삶의 결정체로서 솟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솟남은 또한 인간이 동물처럼 모든 것이 뻔한 세계에 갇혀서 즉각적인 자극과 반응의 고정된 세계에 갖혀있지 않고 자기 자신 밖으로 뛰쳐 나감으로 자기와 거리를 둘 줄 알 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해 열린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솟남’이 인간의 궁극적 지향이라고 할때, 이러한 솟남은 어떻게 이루어질수 있는가? 이에 대해 다석은‘생각’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내게 건제 주는 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거룩한 참 생각은 하느님과의 연락에서 생겨난다. 하나님과 연락이 끊기면 질컥질컥 지저분하게 사는 짐승이다. 하나님과 교통하며 생각의 불꽃을 피어 올릴때 사람 구실을 하게 된다.

말씀의 근원은 하나님의 가운데이고 그 말씀이 사람 속에서 불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불타는 것이 바로 생각이다.

다석은 서구의 계몽철학이 타율적인 전통과 비합적인 권위로부터, 다시 말해 타인, 자연, 하느님의 지배로부터 인간 자아의 해방을 추구했다면, 솟남으로서의 인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아로부터 타자를 위한 삶, 자아와 타자가 귀일(歸一)되는 삶에로의 해방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즉 솟남의 존재로서 생각하는 사람은 성숙한 존재로서 인간 자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타자를 위해 열린 존재가 된다고 본 것이다. 또한 이와같은‘생각’은 나와 존재와 본질을 형성하는 행위로서‘삶’에로 확장되게 되는 것이다.


다석에게 있어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사상은 바로 인간은 바탈을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계속해서 하늘을 향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인생이 알 것은 오직 한가지, 인간은 본래 하늘에서부터 나왔으니 종당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연임을 알고 자기 완성에 힘써야지 세상에 무엇을 남기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정신을 잃고 세상에 빠지지 말고 정신만 차리면 원형정대(元型正大) 분명히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자신의 마음을 고요히 하고 두텁게 자기를 지켜, 화광동진(和光同塵), 얼을 늦추고 마음을 열고 몸을 낮추어 못난 사람들과 같이 하고 극기복례(克己復禮), 몸은 잘 수습하고 정신은 높여 道 위에 올려 놓고 머리는 언제나 위를 생각하고 하늘을 언제나 못 잊고 사는 것이 사람의 본성으로, 나의 본성,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을 키워가는 것, 이것이 사람의 길이요, 사람의 의무요, 사람의 길을 가는 것이다. 사람의 길은 한 길뿐이다. 올라가는 길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다석은“우주의 근본은 無다. 무에 뿌리를 박고 유에서 사는 것이 인생이다. 삶의 근원은 무요, 삶의 의미도 무다. 무를 드러내기 위해서 살고 무에 돌아가기 위해서 산다.”라고 하면서 인간존재는 무한(우주) 속에 유한의 존재로서 무로의 뚫음을 위한 존재임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거룩하고 존엄한 성령의 김 속에 살던 것이 본래의 우리다. 그래서 거룩한 언니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대로 인간은 성언(聖彦)을 찾아나선 인생길이다. 하나님 너 안에서 네 복종하며 하늘나라 계에 올라가면 모두 하나님 앞에 바쳐진 어린 양으로 저가 된다. 저가 되면 제계 나 자신 속에 돌아가는 모든 사람이 된다. 그것은 세상을 떠나서 위로 치켜 올라가는 것이요 회개하는 뉘우치기다. 세상을 빠져나와서 하늘나라에 사는 것이 솟나는 일이요 하늘에서 사는 것이 참 사는 일이다.

회개하고 이 세상을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산다. 세상 위로 치솟고 커져서 무아,대아로 사는 것이 신앙의 길이고 씻고 씻고 개끗하게 식고 닦아 빛나게 닦아 거듭나고 부활하여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 그것이 믿는 사람의 도리요 으이아 세상을 뚫고 올라가서가서 아버지와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할 일이다. 해가 떠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인생도 해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인생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받들고 사는 것이 하늘 위로 오르는 것이다. 우린 하늘 위로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고 올라가고 세상을 뚫고 올라가야 한다. 태초에 맨 꼭대기 하나님께서 일찍 일러 내려온 속 깊은 말씀의 뜻을 깨닫고 속 깊은 뜻으로 아버지의 높은 뜻으로 아들의 속알을 키우는 먹이는 삼아야 한다. 아들의 음식은 아버지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때 아들의 속을 자라고 커진다.


결언


다석은 인간은 본래 선하다고 본다. 그러나 세속에서 인간은 본성을 잃어 악하게 되었기에 인간은 세속을 벗고 본성으로 가야 하며(가온찌기, 수신, 수덕)‘하늘’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인간은 찰나적 존재로서 안개와 같이 덧없고 변화무쌍하고 나약한 존재이기에 다만‘읗’을 향할 때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읗’을 향한 인간의 정진(精進)이 하늘로 향한 정진이 되어야지 개인의 영달(榮達)을 위한 정진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이것은 오히려 다석에게 있어 제거되어야 할 인간의 습성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인간은 이상적인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 본연의 모습(바탈)을 발견해야하고 바탈의 회복을 위한 자기 운동과 자기 변화가 있을 때 비로서 참된 존재가 된다고 보고있다. 이러한 자기 운동을 통해 인간은 새로운 가치 창조를 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솟남’의 삶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석은 또한‘생각’을 통해 진리(궁극, 본질)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궁극을 향하여 가는 구도자(求道者)일 수 밖에 없고 이 구도적 여정은 탐(貪), 진(瞋), 치(痴)의 수성(獸性)을 제거함에 있다고 보았다. 탐, 진, 치를 제거한 인간에게는 진(眞), 선(善), 미(美)의 선한 것만 남게 되는데 이것이 곧 인간의 생명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회복해야 할 바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탐, 진, 치의 수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해서 육체를 평가절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수신(修身)을 통해 육과 영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석은 육신의 건강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 자신도 매일 새벽 냉수마찰로 하루를 시작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생각’하는 인간은 정신을 머리에 인 존재다. 그래서 하늘로 직행(直行)을 하고 상행(上行)하여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돌아가려는 존재이다. 그래서 다석은 말하기를“인간의 본성을 똑바로 잡고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만이 죽어서 산 땅으로 돌아가고, 옹글게 성숙한 영만이 위로 솟아 세상을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이렇게 위로 오를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며 언제나 바탈의 삶이 바른 생명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사명을 알고 자기 본성을 붙잡으면 그는 영원한 생명이지 살다가 죽는 생명이 아니다. 사명(使命)이 있다는 것은 하늘에서 왔다는 것이고 본성(本性)이 있다는 것은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때문에 性은 영원한 생명이요 천명이 된다. 그리고  천명은 언제나 돌아가는 것이지 이 땅에서 썩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늘에서 왔기에 언제나 하늘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룰 것을 생각해야 한다. 머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해야 마음에 안식을 얻을 수 있고 발은 땅을 거부하는 구도정진(求道精進) 인간이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제4장. 오늘을 사는 인간


서언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구체적으로 실천한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기계의 버튼을 누르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한번 전체적인 자연으로부터 밖으로 떨어져 나와서 자연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며 인간화의 활동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말하자면 놀라운 눈으로 둘러보고서는 내 자신은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가? 도대체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하고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질문할 때도 우리는 인간은 왜 사는냐? 보다는 어떻게 사느냐?는 물음을 물어야 할 것이다. 왜냐면 이 물음은 인간의 지향성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곧 정위(正位)를 뜻하는 것이며, 다시 인간의 행동이 사람됨의 본질을 드러내는 요소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논어(論語)에서도“生도 미처 모르는데, 어찌 死를 말하겠는가”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도덕을 실천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지 괴상하고 기이한 것, 귀신이나 사후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리 유익하지 않음을 뜻한다고 여겨진다. 즉 현실에서의 건전한 삶의 자세를 말해 주는 것일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물음이며 그 물음의 답이 인간의 본성, 즉 바탈을 회복하는 것이라 할 때 그것은 죽고 나서 어떻게 되는가와는 상관이 없이 행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석은 일찍부터 오늘 하루에 집중하는 사상과 삶을 추구했다. 이러한 그의 삶의 태도는 그가 하루 하루의 날수를 세었음을 통해 알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지금 여기’의 삶을 존중하는 한국적 사유의 전통을 따른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석이 날수를 세기 시작한 것은 시편“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시편 90:12)에서 비롯된 것이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마 16:34)을 실현한 것이다.


다석은 아침에 잠이 깨어 눈을 뜨는 것을 태어나는 것으로 보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잠드는 것을 죽는 것으로 보아 하루 동안 일생을 산다는‘일일일생주의(一日一生主義)’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하루 동안의 삶은‘하루살이’의 삶이요,‘오늘살이’의 삶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오늘’을‘오! 늘’로 보고 하루의 시간에서 영원으로 솟아 오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인생은 꿈이다’라고 말해왔다. 인생이 꿈일지 모르나. 아니 꿈이다. 그러나 꿈까지도 내 삶의 사실임이 또한 사실이다. 내게는 인생이 사실뿐이라고도 할수 있다. 그러므로 내 삶에 충실하여 당장의 사실을 사실로만 대하여 총명하고 팔팔하게 생활한다면 몽환적인 사실은 신속히 지나가고 진실된 사실만으로 채워질 것이다. 사실을 진실로 채운다는 그 지극한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말하면 오늘 살이(今日生活)에 있다. 오늘(今日) 여기 나(自我)라는 것은 동출이이명(同出而異名)이라 이름만 다를뿐이다.이 셋이야말로 삼위일체라 할 것이니 오늘이라 할때 여기 내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여기라 하는 곳이면 오늘 내가 사는 것이 분명하고 나라 하면 오늘 여기가 전체 되어 있다. 무수한 지점에 광겁한 시간에 억조의 인생이 살더라도 삶의 실상은 오늘 여기 나에서 볼 뿐이다. 어제라 내일이라 하지만 어제란 오늘의 시호(諡號)요, 내일이란 오늘의 예명(豫名)일뿐 거기라 저기라 하지마는 거리간 거기 사람의 여기요, 저기란 저기 사람의 여기가 될 뿐이다.......오늘 오늘 산 오늘! 어제의 나와 거기의 나는 죽은 나가 아니면 남이 된 나다. 나는 오늘 여기서 사는 나를 낳은 부모라고는 하겠으되 어제의 나는 아니다........생명력은 내게 있으니 오늘 여기 내가 살게 된 것은 오늘 일을 위하여 생명력을 발휘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지러지는 생명이 많다. 이는 그들이 오늘 살이에 충실하기 못해서다........오늘 살이에 무심한 사람은 그 의미조차 없다. 어제를 돌아보거든 오늘은 어제보다 낫게 살겠다는 뜻으로나 반성해야 한다........하루 동안에도 열백 세계가 갈릴수 있고 하루라는 것은 늘 오늘이라는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안다면 오늘에 자족(自足)아니할 수 없고 자활(自活)아니할 수 없다.

결국 다석에게서 오늘은 영원한 시간이요 하루는 무한한 공간으로 영원과 무한이 만나는‘여기’였던 것이다.

제1절.‘점심’먹는 존재(하루살이)


불가(佛家)에서는 점심을 점심(點心)이라 하여 진리를 깨달았음의 표현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다석은 이와같은 점심을 보통 생각되는 중식(中食)이라는 뜻으로도 새기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한자어 그대로 點心으로 새긴다. 즉‘마음(心)에 점(點)을 찍는다’는 의미로 인간이 하루 세끼중 한 가운데인 중식(中食)을 하면서 지나간 반나절의 하루를 반성하고, 이어올 반나절의 하루를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점심(點心)의 개념을 사용한다.

영원한 이제와 무한한 여기가 한 点을 이루어 小心念이 되어 점심이 되고 영원에 붙고 무한에 친하여 立場을 가지게 된다. 一食과 一坐인데 모두 사차원의 세계가 정신과 육신이 통일이 되어 점심을 먹고 자리에서 잔다. 각의 세계는 한끼 먹고 한잠 자고 깨어나는 세계다. 이대로 한끼 먹고 한잠잠고 하나님 나라 한가운데로 깨어 오름이 인간의 이상이다.

다석은 특별히 선(線)을 예로 들어 점심을 설명한다. 선은 선 자체로는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데 다만 점이 모일때야 비로소 선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점이 연속적으로 모였을 때 선이루어지는 것처럼 인간의 하루도 이처럼 찰나 찰나가 모여서 하루가 이루어 짐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탈을 받은 존재로서 언제나 하늘로 솟남의 삶을 지향해야하는 인간이 그 솟남을 이루기 위해 하루 하루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특히 앞 장에서도 밝혔듯이 하루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닌‘영원(永遠)’의 하루이기 때문에 다석에게 있어서 찰나의 순간은 하루나 영원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숨을 통해 삶과 죽음의 찰나(사이적 삶)를 사는 것이고, 이는 상대를 넘어 절대에 도달하는 삶(바탈의 회복)을 이루는 것이다.


다석은 점심을 먹는다고 했을 때, 이것은 존재와 시간속에서 빈 곳을 찾아 빈 곳을 채워가는 것으로 보았다. 즉 솟남을 위해 끊임없이 솟아오는 매일 매일의 하루를 살아야 하는 인간이지만 육체성이라는 한계로 인해 솟남의 정진(精進)이 게을러짐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하루가‘오늘’이 될수있도록 하루를 반성하고 반성하여 틈이 없게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석은 이렇게 빔을 채워나감이 곧 우주를 형성하는 것이며 바탈을 회복하여 감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우주의 일점영명(一點靈明)이요 우주의 양지요 우주의 눈이다. 인간이 눈을 뜰때 우주도 눈을 뜨고 바로 걸어가고 발산한다.

이와같이 점심먹음이 계속해서 이어질때 인간은 본성인 바탈을 회복할 수 있고, 결국에는 인간이 점심에 먹혀 그 존재 자체가 자연스럽게 하늘로의 솟남을 이룰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삶은 자기를 먹는 것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얻기까지 먹어야 한다. 대자(大慈)는 부활이요 대비(大悲)는 십자가다. 자기를 만나는 것이 부활이요 자기가 되는 것이 십자가다. 자기를 만나는 것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고, 자기를 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다. 자기를 아는 것이 견성이요 자기가 되는 것이 성도요 자기를 보여 주는것이 종교다. 쌀은 살이 되고 살은 알이 되고 알은 얼이 된다. 얼이 대자대비요 영원한 생명이요 어른이다. 어른이 하나님이다.

점심먹음은 인간이 하루살이의 존재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하루살이는‘할(爲) 읗(天) 살이(生)’로 하늘을 품고 하늘을 향해 살아야 하는 인간의 본성적 성향을 드러낸 말이라고 여겨진다. 이것은 사람이 하루를 살면 실존이요 영원을 살면 실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존 속에 실재가 있고 실재 속에 실존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하루살이고 하루살이가 영원(永遠)살이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땅은 공간속에 떠 있고 나는 땅을 떠나간다.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땅에 붙어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해 살면서 계속해서 새로워진다. 오늘은 나요 나는 언제나 새롭다. 죽어도 죽지않고 살아도 살지 않고 언제나 아버지와 같이 있는 것이 영원 오늘이다. 오늘 내가 산다. 나는 하루살이다. 오늘을 떠나면 나는 없다. 오늘에서 영원을 찾아야 한다.

다석은 이러한 하루살이에 대하여 말하기를“삶 속에 이미 죽음이 함께 하고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을 의식할 때 그 경계로서 죽음이 동시에 의식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죽음의 의식을 배제한 삶의 태도는 오히려 자신의 삶의 상황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입 안으로 떨어지는 꿀의 단맛에 취해 있는 어리석음으로 비유된다. 죽음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루살이의 인간은 언제나‘신독(愼獨)’에 힘써야 하며,‘성(誠)’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신독(愼獨)에 힘쓰고 성(誠)에 힘쓸때 인간은 결국‘성(聖)’을 이루어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일과없이 誠은 없다. 성은 聖이다. 일과가 聖이다. 하루살이가 聖이다. 매일 실천하려면 수사생(修辭生)해야 한다. 수사는 말을 다듬는 것이다. 말을 고르는 것이다. 실천할 말을 고르는 것이다. 날마다 꼭꼭 誠을 일으켜 세우려면 말을 골라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誠을 일으켜 세운다. 정신을 일으켜 세운다. 정신을 깨우기 위해서 말을 고른다.


제2절. 가온찌기


다석은 가온찌기라는 말을 사용하여 솟남을 향한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즉 가온찌기는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 찰나로서‘여기’를 뜻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바탈을 깨달을 수 있고, 이러한 깨달음을 가온찌기라고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에 이를수 있게 된다.

천명은 곧 이제다. 이미 지나가고 간 것만 쫓아다니면 무엇이 지금 금시인가 옛날부터 오고 미래부터 오는 그리스도가 누군가. 그분이 즉금이다. 즉금 여기 이 순간 이곳이 나요 공간과 시간이 곱해진 방금이요 나다. 간 옛날과 오는 지금이 부딪치는 곳에 살고 이는 것이 이제 나다. 천명은 이제에 있지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순간을 하나님과 통하고 사는 것이 즉금이다. 순간순간이 깨달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시공의 사차원이며 언제나 지금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가온찌기는‘ㄱ’,‘ㆍ’,‘ㄴ’으로 표현되는데,‘ㄱ’과‘ㆍ’가 만나서‘가’字가 되어‘영원을 향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ㄴ’은‘ㆍ’와 만나서‘영원히 온다’라는 뜻을 갖는다.여기서‘ㆍ’는‘中’으로서 사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즉 인간은 영원히 가고 영원히 오는 것의 가운데(中) 존재로서 지금, 찰나, 순간에 깨달음을 얻어야만 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바탈의 존재로서 솟남의 삶이 계속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직상(直上) 일점심(一點心) 마음은 가온찌기다. 곧장 위로 깨 나는 것이며 전진일로의 삶이다. 세상에 있으나 하늘나라로 가는 것을 생각한다. 나 무름(자기 반성)의 삶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 제와 하늘나라 게와 연결된다. 나는 나비인데 나비가 되면 하늘을 난다. 이것은 제게로부터이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고치에서 깨 나와야 한다. 그것이 가온찌기다. 애벌레로 있다가 나비로 가는 것이 고치의 생각이다. 애벌레가 고치가 되었다가 나비가 되는 것은 저절로 된다. 거저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게로부터다. 사람은 본래 완전하다. 그런데 인간은 완전하려고 하는 것이 꿈이다. 이 꿈에서 깨어남이 가온찌기다.

만고와 시간이 합급(合及)한 것이 이제요 만고가 선 이순간이 이제 나다. 자기를 제도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알 수가 없다. 저승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어두운 이 세상을 떠나고 거스르고 부정하여야 한다. 원목을 베게로 베고 자기를 일깨운다. 만고 영원과 이제 순간이 마주친 것이 각(覺)이요 이제요 입장이요 부득이 무아요 합급 시간단제(時間斷除)다. 이 순간을 놓치면 영원은 없다. 찰나 속에 영원이 있다. 내 속에 하나님이 있다. 내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가온찌기는‘지금 여기’사는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한 집중(集中)이다. 다석은“나는 無, 제로다. 이제 여기의 點일 뿐 시간 공간을 쓸수없다. 자리만 있을뿐 없는 존재다(位而無)”라고 함으로써 찰나를 사는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와 위치를 또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가온찌기 인간은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이고, 내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은 오직 걸어가는 한 點이며, 지순한 진리에 명중하는‘한울’이 된다. 다석은 인간을 하나의 목적을 가진 과녁이라고 표현하는데,“몸은 활이고, 고디 정신은 화살이다 몸이란 활에다 정신이란 화살을 끼워 쏘아야 중정(中正)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몸과 맘의 인간이 가온찌기를 서로 잘 융합해야 하는 것이며, 인간은 계속해서 솟남을 위해 자기의 길을 걸으며, 오직 그 뜻을 하늘에 둠으로 세속의 영화(榮華)를 초월한 자임을 말해준다.

오직 내가 할 일은 진리와 생명의 중심인 하늘에 맞추는 일이다.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사명이다.

나의 나됨을 앎으로 나비, 완전한 존재가 된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존재가 된다. 나의 나됨을 알아 나의 본성을 회복해가면, 내가 내가 되는 것이 바로 천지의 변화와 만물의 발육을 협찬하는 것이며 인간은 하늘과 땅과 같이 만물의 영장이 되어 천지인 삼재가 될수 있는데 이것이 생명이다.

다석은 진리와 생명의 중심인 하늘을 내가 맞추려면 사욕에 사로잡힌 내가 깨져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몸의 사욕과 물욕에 사로잡히면 시간과 공간에 붙잡히고 세상을 옆으로 기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깨짐’곧 자기 혁신과 자기 운동, 그리고 자기 비움이 있어야만 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하늘로 오를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큰 속, 빈 속, 하나님 속, 걱정도 없고 마음은 비고 만유를 사랑하는 마음.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용납하고 가까워 오는 하늘나라를 이루어 가는 거고 마음속의 참뜻은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것. 큰 속이 빈 마음이요 용서하는 마음이 속마음이다. 다 하나다. 마음도 하나고 몸도 하나고 우주도 하나다. 매일처럼 가고 가도 한 속을 가는 것이고 얻고 얻어도 한마음을 얻는 것이다. 심체는 한마음이고 영체는 한 몸이다. 일체를 용납하는 한마음이 자유의 마음이다. 생도 용납하고 사도 용납하고 육체를 용납하는 영체가 나다.

인간이란 존재는 계속해서 죽음을 행해 가는 존재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사는 시간적인 존재이다. 또 인간은 오늘이라는 하루에 만족하면 내일에 대한 기대를 품고 땅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다석은 이러한 태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며 얼이 빠진 행동이고, 바탈에 대한 반역이라고 본다. 즉 가온찌기의 삶은 시간을 아끼는 삶이며 땅 위에서 하늘을 보는 것이며, 영원한 오늘을 맛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오늘을 맛보는 일이 인생의 최고 목표가 되는 것이며, 이 영원한 오늘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고, 하나님 만나 사흘만에 트여 하늘로 솟남이 바로 부활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다석은 오늘의 상실은 영혼의 상실이며 영혼의 상실은 영원의 상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을 찾는 것이 바탈을 찾는 것이요 나를 찾는 것이며, 나를 찾아 가지고 사는 것이 세상을 알고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니러 온 사람이요 돌아갈 사람이지 여기에 살러 온 사람은 아니다. 인간은 이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생명만을 길러 내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본성을 완성하고 거듭나서 살면 이처럼 아름다운 인생은 없다. 호호인생(好好人生)이요 일일호일(日日好日)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루살이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루를 사는 것이다. 하루를 살면 영원을 산다. 하루 살고 죽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이 하늘을 사는 것이요 천명(天命)이다. 일일호일이 천명이다.: 인간의 삶을 나그네 삶이다. 그리고 찰나에 충실할 뿐이다. 언제나 읗만 추구하는 존재이다. 마음속에 하나님만을 모심으로 過도 不及도 없는 삶인, 바로 중용의 삶인 것이다.



제3절.‘되어감’의 존재


인간은 신비로운 힘의 영역(바람 혹은 호흡; 프뉴마, 루아흐, 아트만 등) 안에서 세계를 향하며 언제나 열려져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의식(意識)은 곧‘자기 자신과 더블어 아는 자기 지식(양심)’이다. 이것은 내 안에‘나와 더블어 아는 자’즉, 양심이 있다는 말이다. 앞 장에서 필자는 인간의 육체성은 오히려 인간 존재에게 또하나의 가능성임을 밝힌바 있다. 즉 미지의 세력이 이 가능성의 영역에 나타날 수 있고, 영역을 통하여 비로소 신적인 세력이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마무리가 덜 되어있고 자기 자신으로는 미완성의 존재이며 신의 탈에 불과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석은“산다는 것은 성인(聖人)이 될수 있는 가능성을 길러가고 인격을 바로 세워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루 하루의 삶을 삶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이는 그의 실존적 경험(김교신 등의 죽음)과 그 스스로 정통신앙을 버리고 비정통신앙인으로 돌아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석은‘38년만에 믿음에 들어감’으로 죽음을 준비했고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향해가는 시간의 의미는 그에겐 매우 남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하루 하루는 곧 하나님께로 가는 시간이며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었고 하나님께로 가는 시간은 곧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실존을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에 찰나에도 성실해야만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다석은‘되어감’으로 풀어낸다.


다석은 되어감에 대한 비유로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남을 예로 든다. 즉 알에서 병아리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알 속의 무력하게만 보이는 생명체가 껍질을 깰수 있는 힘을 기를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도 삶도 역시 바탈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자신의 입장(立場)을 확인하고, 자신 안에 있는 존재를 깨달아‘읗’으로 솟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지나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인간은 계란이 병아리가 되듯, 소아(小我)적 기질을 바꿔 대아(大我)로, 하늘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즉 기질(氣質, 김받땅)에서 생기(生氣, 살김)로, 생기에서 성질(性質, 받할받땅)로, 그리고 생명(生命, 삶목숨)으로 바꾸어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인생은 계속 발전하는 것이어서 뱃속에서 나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계속 발전해야 하는 것이며, 하늘나라에 가서도 또 발전하는 함이 道이며, 이렇게 비약하는 것이 생명 속성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에는 비약함이 있어야 한다. 즉 애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가 나비가 되듯,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듯 인간 역시 숨이 말숨으로 말숨이 말씀이 되는 비약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비약은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계속해서 되어감의 삶을 살아야 하는 바, 그 되어감의 종착점은 없다. 그리고 이 종착점에 다다르기 위해서 인위적인 수단을 내세우는 것은 옳지 못하며, 오직 깊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바탈을 통해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생각을 통해 호흡하며 호흡을 통해 생명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며, 더욱이 인간은 모든 생명과 호흡하는 전체요 한 목숨이며 한 생명이기에 함게 발전하고 함께 가야한다 고 말한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눅 2:52)

따라서 되어감의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존재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 있으며, 바탈을 회복하여 하늘과 통하려는 의지와 의식이 있어야 된다. 특별히 인간 안에 내재된 음양(陰陽)의 원리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로 통합되고 이것이 다시 우주 질서와 일체화됨으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되어감에 있어서 다석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ㅅ, ㅈ, ㅊ’,‘삶, 잠, 참’의 삶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인생을 찾을수 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ㅅㅈㅊ이다. ㅅ이 ㅊ이 되려면 ㅈ을 통과해야 한다. ㅈ은 ㅅ이 어떤 한계에 도달한 것이고 그 한계를 뚫고 올라가면 ㅊ이된다. ㅅ과 ㅊ의 중간항은 ㅈ이다. 즈는 잘한다, 좋다이고 잠이다. 삶이 참이 되려면 잚이 잘 되어야 하는데, 잠이란 아무것도 안하고 한없이 하는 것이 잠이다. 무위자연이요 진공묘유이다.

‘삶, 잠, 참’의 삶에 있어서 다석은, 인간이 자기의 근원을 트고 나아가 하나님께 도달하는 것이 종교의 세계이며 종교의 세계에 만이 참이 있고 충만이 있는 것인데 참을 알려고 힘쓰는 것이 과학적 삶이요 참이 되려고 힘쓰는 삶이 철학적 삶이요, 참을 온 세상에 가득 채우려고 함이 종교적 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생명으로의 인간에 있어 되어감은 이처럼 삶, 잠, 참의 삶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석은“내 문제는 하늘로 머리를 두는 일이요, 고디 곧장 올라가는 줄(絲)이 문제요 위로 솟아나서 올라갈 성령이 문제다. 하나님 말씀과 성령 신령과 진리만이 문제다. 솟을 얼이 솟아 올라가 진짜 삶을 볼까 한다. 참 삶이란 얼이 사는 참 삶이다. 참 삶을 키우는 것이 성령과 진리다.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 이것만이 우리의 절대조건이다”라고 하면서 인간의 궁극적 지향(指向)에 대하여 말하는데 바로 이 지향점이 되어감의 궁극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되어감의 지향성은 인간의 한계성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이 지향성은 인간이 의미가 가득 찬 존재임을 드러내고, 새로운 완전한 가능성으로서 인간을 전혀 완전한 모습으로 바꿀수 있는 것이 된다.

인간은 이상을 가지고, 그것을 인간의 목적으로 삼으면 그것이 인간의 관혁(貫革)이 된다. 인간의 현실은 인간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체는 활이 되고 정신은 화살이 되어 밤낮 화살을 쏘아 올리는 것이다. 언제나 자기의 힘 안에서 착실하게 걸어가야지 만에 하나라도 실현될 수 없는 공상을 가지면 안된다. 진리를 깨달으면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생명을 얻으면 도에 통할 수가있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자기를 이기는 일이요 생명을 얻었다 함은 하나님께 도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왔다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나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죽음은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이다. 죽음은 해탈이지 멸망이 아니다. 이 세상을 벗고 나갈 실존이 있어야 한다. 쭉정이가 되면 벗고 나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 씨알이 되어야 제계 들어갈수 있다. 씨알이 되면 일없이 졔게 들어가니 알고프겠지만 더 알것은 없다.


결언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인간의 내면성에 응답함으로써 생긴다.곧 우리 안에“나를 따르라”말씀하시는 靈에 응답함으로 생기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 즉 진리를 통한 자유의 성취는 변화와 변혁의 고정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변화와 창조성의 근원인 易의 원리에 따를때,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영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띠기도 하는 것이며, 인간이 영과 하나됨을 이루었을 때, 그 靈은 본성을 회복하게 되어 神의 창조성을 회복하게 되고, 창조자 신의 궁극적 목표를 완성하게 되며, 신의 조화를 일으키게 된다. 즉 신의 조화란 인간이 신의 영에 응답하는 것을 통해 회복되는 것으로 변화와 변화하는 현상 사이의 완전한 조화를 의미함으로 우주적인 규모로서 신의 왕국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석은‘오늘’을 강조한다. 바탈을 품은 존재로서 인간이 그 지향(指向)해야 할 곳은 바로 하늘(天)인 바, 인간은 언제나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바탈을 통하여 하늘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미 주어진 바탈과 더블어 있는 정성을 다하여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고 나아가야 하며, 하루하루의 일과를 착실하게 꼭꼭 해 가고 한 발짝 한 발짝 착실하게 걸어가서 순조롭게 길이 가는 도인(道人)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명의 창조, 문화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생(生)의 도달처라고 보았다.
이러한 창조는 매일 매일 주어지는 인간의 시간 즉‘오늘’속에서 가능한 것인데,“오늘은 영원하다는 뜻이고 내일은 내놓는 일이다. 모레는 모른다는 뜻이다. 오늘은 영원하고 내일은 죽는 날이고 모레는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오늘 하루는 할 일이 있어서‘할읗’이다. 하나님이 하라고 시키니까 생명을 바쳐서 정확하게 해내는 것이 사는(生, 삶)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은 언제나 영원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임마누엘이요 영원이요 영생이다. 또한 이것이 늘 그러해야 좋은 날이다.”라고 말함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되어감을 통해 솟남의 삶을 실현하지 못하는 인간은 그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하늘로 솟아 바탈을 회복해야 하는 인간 본연의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고도 아직 다 자기 못한 것은 옥오고도 다 오지 못한 탓이다. 가면 오고 오면 가는 것이 대자연이다 구름이 오르고 비가 내리면 언제나 샘은 솟게 마련이다. 이 순간을 잡지 못하면 이 순간은 영원히 알수가 없다. 꿈이 가고 깸이 오면 언제나 현재가 선을 이루어 가는 때다. 현재를 놓치면 영원은 없다. 영원이 친구요 영원이 뿌리다. 이것이 道다. 그 영원은 오늘을 놓치면 없다. 오늘이 실존이다. 실존에서 존재를 잡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놓치면 하나님은 없다.

다석은“인간이 씨알로 시작해서 씨알로 끝나는 것이 인간이다. 아버지께 도달해야 참이요 결실이요 실상이다. 자기 돌아볼 사이가 어디있다. 만족 불만족 그런 소리일랑 아예 하지 말고 아버지꼐만 가라. 일이관지요 일로매진이요 향상일로다. 열심으로 자라는 것이다.”라고 인간의 지향에 대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러한 분명한 지향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갈때, 비로소 인간은 하늘에 도달할수 있는 것이고, 바탈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도달하는 것만이 거룩이요 길이요 말씀이요 생명이다. 하나님께 도달하는 것만이 생명이요 거룩이다.”




            제5장. 결론:생명으로의 인간‘歸一’


제1장 논문의 요약


지구화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서로 다름을 어떻게 인정하면서 서로 공존, 공생 하는가에 있다고 본다. 특별히 지난 인류의 역사는 타자에 대한 정복과 폭력의 역사였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더욱이 히브리즘과 기독교는 하느님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있으나 다른 인종, 종교와 문화에 대한 배타성이 늘 지적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가능성이 있는 것은 개체의 고유한 인격과 개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즉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하나되는 차원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다가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전체가 한 지체로 되어 있다고 하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됨의 차원을 한마디로 말 한다면 그것은‘귀일(歸一)’이라고 본다. 즉,‘일자(一者)에로 되어감’이 바로 귀일이라는 것이다. 이 일자(一者)는 다석이 계속해서 강조했던 것처럼 바로 하늘(天)이며, 바탈이며, 존재의 궁극이며, 태초의 창조성이며 신성이다. 그리고 이 일자(一者)로의 귀일(歸一)을 위해서 인간은 먼저 자신이 태초의 창조성인 바탈을 지닌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며, 하늘과 땅의 사이적 존재로서 이 양극(兩極)을 이어주고, 이것의 상호작용을 이루어 인간 자신이 우주 전체의 생명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한 삶을 살게하고, 이러한 삶은 현실 상황 속에서‘구도정진(求道精進)’의 삶을 살수 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구도정진의 삶을 산다하여 기괴한 행동이나 사회의 관념과 질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바탈의 존재로서 깨달은 바, 그 지향(指向)을 향하여 성실하게 나아감이 바로 구도정진의 삶인 것이다. 이러한 구도정진의 삶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던 창조성을 더욱 깊이 알게하고, 자기에 대한 분명히 정체성과 입장(立場)을 갖게 함으로‘솟남’의 삶으로 이르게 한다.


솟남의 삶이란 인간 본래의 근원(생명)을 회복하는 것이요, 사이적 존재로서 천지 만물, 우주 질서에의 참여이며‘이룸’이며,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이기도 한 것이다.

오직 순수하게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내 속에 하늘이 주신 밝은 속알을 깨우친다. 하늘에 태양이 있고 방안에 전등이 있는 것처럼 하늘에 아버지가 계시고 내 속에 아들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요 17:3) 하나님과 그 보내신 그리스도를 앎이 영생이다. 무성무취(無聲無臭), 아무도 모르게 내 속의 불을 켜고 내 속의 불을 등불로 해서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자기를 개체화시킴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 자기 반성이 가능할 때, 비로소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반성은‘인간됨’의 기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다. 이는 인간의 나날의 삶이 결국은 죽음을 이루기 위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오늘’을 사는 존재가 된다.


‘오늘’을 산다고 했을 때, 인간은 찰나를 사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며, 찰나를 사는 하루 속에 영원을 사는 존재가 되게 된다. 즉 매 순간이 하늘의 바탈을 깨닫는 순간의 연속이며, 솟남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우주의 질서를 형성하며 우주의 질서속에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도 미래도 아닌 즉금(卽今)이 중요하며, 과거와 미래의 중간(사이)으로서 바탈을 향한 되어감의 연속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석에게 있어‘생명으로의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숨어 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窮極)을 향한 구도자(求道者)가 되게 하고, 태초의 신성(神性) 곧 바탈을 회복하기 위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게 함으로 천지(天地)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제2절 논문의 평가


다석 사상의 위대함은 그의 사상이 고상하고 극히 형이상학적 사고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지극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발전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특히 다석의 사상이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있는 일상적인 말(語) 씀씀이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반성하게하면서 동시에 그동안 서구의 시각과 사고에 근거한 신학에서 벗어나‘우리말로 신학하기’의 새로운 가능성과 지평을 열어준다고 본다. 다만 이러한 작업이 일반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활발하게 연구되고 그 결과물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음에 반하여, 신학계에서는 거의 전무(全無)하다시피 한 것에 적지않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다석의 사상을 연구하고 그의 사상을 통해 새롭게 신학함의 지평을 열려는 움직임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는 신학함에 있어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필자가 본 논문을 기획함에는 바로 이런 바탕이 깔려 있었고, 본 논문은 바로 이러한‘우리말로 신학하기’의 작은 시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의 첫 시작을 필자의 평소 관심사이자 화두인‘생명’에 대한 문제로부터 시작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인간의 문제로 또다시 귀결될수 밖에 없었기에, 다석의 생명이해에 기초한 인간이해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다석에 대한 필자의 일천(日淺)한 지식과 사고(思考)의 미숙함으로 인해 다석을 깊이 있게 풀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석을 이해하고 새롭게 조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지 심히 걱정스럽다. 하지만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 다석의 사상에 대한 필자 나름의 풀이와 새김을 시도했다는 것과 우리 말을 통한 생명(生命)과 인간(人間)에 대한 이해를 시도했음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본 논문을 평가하면서 판화가 이철수 님의 판화를 실으려 한다. 이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필자의 일천(日淺)함으로 미처 살려내지 못한 다석의 사상을 살려낼수 있는 좋은 그림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철수 님의 도움 그림으로 필자의 미숙함이 보충되고, 본 논문의 의도가 다시 한번 살아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1. 일차자료(Primary Souces)

김흥호 풀이,「다석일지」1 (1955. 4-1956. 8), 서울:솔, 2001.
                      2 (1956. 9-1957), 서울:솔, 2001.
                      3 (1958-1960), 서울:솔, 2001.
                      4 (1961-1964), 서울:솔, 2001.
                      5 (1965-1968), 서울:솔, 2001.
                      6 (1969-1971), 서울:솔, 2001.
                      7 (1972-1974), 서울:솔, 2001.

2. 이차자료(Secondary Source)

<단행본>
C.A.반퍼슨, 몸 영혼 정신:철학적 인간학 입문, 서울:서광사, 1985.
로즈마리 레드포드 류터, 가이이와 하느님, 전현식 역, 서울: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0.
막스 셸러,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 진교훈 역, 서울:아카넷, 2001.
스콧 니어링, 스콧 니어링 자서전, 김라합 역, 서울:실천문학사, 2000.
첸리푸, 동양의 인간과 세계, 서명석 이우진 역, 서울:철학과 현실사, 2000.
한스발터 볼프, 구약성서의 인간학, 왜관:분도출판사, 1976.
강영계, 종교와 인간의 삶, 서울:철학과 현실사, 2000.
김흥호, 제소리:다석 류영모 강의록, 서울:솔, 2001.
박영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上, 서울:두레, 2000.
    ,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下, 서울:두레, 2000.
이정용, 역의 신학, 이세형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8.
우리사상연구소, 우리말 철학사전1: 과학 인간 존재, 서울:지식산업사, 2001.
한국하이데거학회, 하이데거와 자연 환경 생명, 서울:철학과 현실사, 2000.
한자경, 동서양의 인간이해, 서울:서광사, 2001.

<국내 간행물>
김준우,“WCC의 세계현실 인식과 신학적 대응,”「세계의 신학」1998, 겨울.
김병익,“세기말의 회의,”「당대비평」 1997, 겨울.
김영남,“그리스도교의 생명이해,”「가톨릭 신학과 사상」, 1997,여름.
조규만,“하느님과 맘몬,”「가톨릭 신학과 사상」, 1993. 12.

<미간행 논문>
이기상,“생명. 그 의미의 갈래와 얼개,”우리사상연구소 2001년 추계 학술심포지움, 2001.
    ,“다석 류영모에게서의 텅 빔과 성스러움,”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동양신학회 제3차 학술강연회, 2001.
박재순,“다석 류영모의 종교사상: 생각,”새길기독교사회문화원 추계일요신학강좌, 2001
     ,“다석 류영모의 종교사상: 하루살이-하루를 영원처럼,”새길기독교사회문화원 추계일요신학강좌, 2001.
       ,“다석 류영모의 종교사상:귀일사상,”새길기독교사회문하원 추계일요신학강좌, 2001.

<기타>
동아일보, 1998년 9월 10일자.
靑春, 1918년 4월 5일자.
「성경전서」표준새번역.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전공 2002.1.  ( ELPEACE@chollian.net )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