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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태환경

도법, 안동 권정생 선생을 찾아 /경향신문 20051125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5.

 

경향신문 2005년 11월 25일 17:52:3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11251752341&code=210000

 

 

[도법과 걷다] ‘인간국보’ 안동 권정생선생을 찾아
 
 
권정생선생이 자신의 토담집 안마당에서 도법스님과 환경과 생명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소백산맥의 거대한 준령과 낙동강 상류의 물줄기가 만들어낸 분지에 위치한 경북 안동. 안동은 대표적 역사문화 도시 가운데 하나다.

무엇보다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등 문인 학자들을 배출한 영남사림의 중심지이자 한국 유교문화의 본산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어느 지역보다 많은 독립지사들이 쏟아져 나온 것도 유림 정신과 무관치 않다.

지난 15일 안동에 들어선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의 순례 여정도 안동의 무수한 문화유산을 비켜갈 수 없었다. 의성 김씨 집성촌이었던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에서 시작된 탁발순례는 퇴계종택~육사 생가를 거쳐 하회마을, 병산서원, 봉정사, 대원사로 이어졌다.

순례단을 이끌고 있는 도법 스님에게 문화유산은 ‘역사의 침전물’이 아니다. 당대의 삶과 혼이 배어 있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도법 스님은 지난 20일 안동의 마지막 밤을 고성 이씨 종택인 임청각(보물 182호)에서 유숙했다. 임청각은 본래 99칸집이었으나 일제때 절반 정도로 줄었다. 스님은 안동의 문화유산에서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을 수 없었다는 점을 안타까워한다. “임청각은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탄생지입니다. 석주 선생은 유학자이면서도 가족들을 설득해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임청각에서는 그분의 혼을 찾기가 힘들었어요.”

안동 순례 마지막날인 지난 21일. 순례단은 다시 ‘국보’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유형문화재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근대화가 덜된 사람’(염무웅), ‘깊은 산속의 약초 같은 사람’(신경림)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 국보’ 권정생 선생(68)이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피재현 시인의 안내를 받아 골목을 따라 가니 마을길이 끊어진 곳에 붉은 슬레이트 지붕의 토담집이 나타났다. 울도 담도 없으니 대문이 있을 리 없다.

순례단의 인기척에 동화작가 권 선생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두툼한 작업복 차림에 털실모자를 쓴 그는 10명이 넘는 순례단 규모(?)에 흠칫 놀라는 듯했다. “스님 혼자서만 오시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신다 했으면 못오시게 했을 텐데.” ‘이 많은 손님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눈치였다. 선생은 “방이 좁아 들어갈 수 없으니 그냥 여기에 앉으세요”라며 마당의 의자를 권한다.

-작년 3월 지리산을 시작으로 전국 탁발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며 생명과 평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도법스님)

“걸어서 전국을 다닙니까.”(권정생 선생)

-많이는 못 걷고요. 하루 15㎞ 정도 걷습니다. 지금까지 대략 6,000㎞를 걸었지요.

“걷는다고 생명이 살아나나요.”

-일단 걸으면서 고민하자는 것이지요. 요즘은 인터넷이나 통신의 발달로 사람들이 잘 소통하는 것 같으나 오히려 옛날보다 단절이 더 심합니다. 만나서 환경, 생명 문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걸어다니면 누가 일을 합니까.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일할 농민이 더 필요합니다.”

-저도 줄기세포를 만든 황우석 교수보다 농민들의 삶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사람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있지요. 바로 오늘날의 농촌과 농민들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오히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말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스님처럼 사람들과 만나 얘기할 게 아니라 다소곳이 시골에 내려와 일하면 됩니다. 정 걸어야 한다면 스님 혼자 걸으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면 되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두 선생님처럼 살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게지요. 혼자 어렵기 때문에 여럿이 함께 할 일을 모색하는 겁니다.

“다들 고향이 있지 않습니까.”

도법스님이 순례단원들과 함께 경북 안동시 일직면에 있는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토담집을 찾아가고 있다.
-선생님처럼 고향에 살면 쫓겨납니다.

“쫓아내도 꿋꿋이 나 여기 살겠다 하면 더이상 어쩌지 못하지요. 저는 위대한 사람이 없는 세상이 훌륭한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마더 테레사 수녀는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있어 훌륭하게 됐지요. 간디는 영국인 침략자들이 만든 것이고. 말없이 착하게 살아야 하지요. 우리 동네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전에 이현주 목사가 찾아왔는데, 그분에게도 허공에 떠도는 말 그만하고 농사지으라고 했어요. 농사질 힘이 없으면 마당에 텃밭이라도 가꾸라고.”

-선생님 말씀대로 말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곳 중의 하나가 절집입니다. 그런데 그속을 들여다보면 조작이나 허위의식이 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만 말을 만들어요. 자연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말하셨어요. ‘저 뜨거운 태양 속에 있는 감이 언제 뜨겁다고 하더냐’고. 어머님도 평생 덥다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방은 따뜻하십니까.

“당연히 춥지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게 살아야 하는 게 사람의 도리이지요.”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농사짓는 얘기에 이어 골프장 건설로 인한 환경파괴 문제에 이르러서는 권선생은 목소리를 높였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골프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골프장 건설을 막지 못한 안동시민들을 더이상 보기 싫다”고 말했다.

한때 교회 종지기 생활을 하며 신앙에 몰두했던 권선생과 스님은 종교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사는 방식이나 철학에서 좀처럼 합의를 보지 못한 두 사람은 종교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두 사람은 대화 중 농촌과 농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피폐화되는 농촌을 안타까워했다. 권선생은 “15년 전만 하더라도 집앞 개울에서 송사리가 살고 건너편 산에는 수달이 살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살지 못한다”고 전했다.

생전 처음 만난다는 두 사람. 자연과 생명과 삶과 인간에 대해 두루두루 끝없는 얘기를 풀어냈다.

〈안동|글 조운찬·사진 권호욱기자〉

 
 
 

[도법과 걷다] “골프장도 못 막으면서 무슨 운동이냐”
입력: 2005년 11월 25일 17:52:43

 
토담집 마당에서 한 시간 동안 도법 스님과 대화를 나눈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은 많은 이들 앞에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스러워했다. 순례단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한다”며 순례단에게도 다시 찾아오지 말 것을 여러차례 부탁했다. “사람들과 만나 떠들고 나면 폐에 무리가 가 며칠씩 고생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인간성이 파괴된 사회와 환경오염, 이기심을 조장하는 도시 문명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라크 전쟁이 화제에 오르자 그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석유 때문이 아니냐”면서 “전쟁 반대에 앞서 자가용부터 없애자”고 말했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도 강하게 드러냈다. 권선생은 “청와대, 국회가 백성을 위한다고 하는데 하는 게 뭐가 있느냐”며 “대통령이 뭘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듣지 않은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골프장 건설도 못막으면서 무슨 운동을 하느냐”며 환경시민운동 단체에도 화살을 겨누었다. “운동을 하려면 농약 만들지 말고 가루비누 쓰지 말기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40년간 폐결핵을 앓고 있는 노인답지 않게 권선생의 말은 또박또박했고 논리도 정연했다. 외견상 건강도 괜찮아 보였다. 그는 2년 전에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이후 병원 출입을 끊고 있다. 그는 “‘성경’에서도 예수님은 걷지 못한 사람에게 ‘네 스스로 자리를 들고 걸어라’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병을 안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낸다. 사람들과의 접촉이란 마을 사람들과 찾아오는 손님을 만나는 게 전부다. 최근에는 지인들의 방문까지 거절하는 바람에 찾는 이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권정생 선생과의 만남에는 순례단원뿐 아니라 이원걸 안동 YWCA 사무총장 등 안동 시민 몇 사람도 동참했다. 취재진은 순례단에 끼여 권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권선생이 언론과의 만남을 극도로 꺼린다는 얘기를 듣고 신분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도법 스님은 “자신을 낮추고 소박하게 사는 삶이 가장 진보적이라는 자기체험과 확신을 잘 보여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