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종교 다원주의라는 개념은 서구 문화가 그들 밖의 새로운 문화와 접촉했을 때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따라서 그 개념 속에는 서구 문화 밖의 고등 문화를 인정하긴 싫으나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부정적 인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한국의 종교문화적 전통을 살펴 볼 때, 샤머니즘과 불교 그리고 유교라는 세 종교 전통이 한국 사회 내에 수세기에 걸쳐 퇴적되어 오면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 그러니까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종교 지층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해 온 역사가 있다는 점에서, 종교 다원주의는 한국 문화의 고유한 부분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따라서 바로 여기에 우리 나름의 신학을 얘기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그동안 신학계에서는 서구 신학만이 중심이고 그 외 지역의 신학은 변방 신학이라는 개념이 유통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어떤 지역에 가면 그 지역에 맞는 신학이 형성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의 고유한 종교문화적 전통과 어울리는, 우리 실정에 맞는 신학인 이른바 지역 신학(local theology)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역 신학은 중심과 변방의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한 지역 신학은 한 장소에서 생겨나 다른 모든 장소에 적용될 수 있는 메타 신학 또는 거대 신학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거대 신학의 개념은 21세기 중반 이후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여러 새로운 형태의 신학들에 의해 거부되어 왔습니다. 지역 신학은, 모든 신학은 그 지역 사람들의 삶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다고 보기 때문에 그 지역의 사람들이 형성한 독특한 공동체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그 지역 나름의 특성을 간직한 그런 신학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역 신학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 내의 고유한 종교 다원주의 전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또한 이러한 전통에 독특한 기여를 한 지역 신학자로서 다석 류영모의 사상을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석 류영모는 여러 세기를 통해서 한국 문화 속에 깊이 각인되어 온 종교 다원주의 전통과 연관하여 기독교 신앙을 해석하는데 그의 전 생애를 바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류영모가 한국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끼친 공로는, 소수의 제자 그룹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학계나 또는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해온 한국 개신교 교회에 의해 무시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류영모를, 기독교를 한국의 종교 다원주의 전통과 긴밀하게 연관시킨 지역 신학을 한 지역 신학자로서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그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류영모는 그의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쓴 일기를 남겼는데 이 일기는 매우 시적인 문체로 씌어 있고 또 간혹은 명상 노트 형식으로 씌어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일기만으로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에 의해 보존된 강의 노트와 자료들 덕분에 류영모 사상에 대한 체계적 해석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럼 이러한 자료들을 기초로 해서 그의 사상을 다음 세 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설명해 볼까 합니다.
1. 신론神論 : '한읗님'으로 표현되는 신 개념
'한읗님'으로 표현되는 류영모의 신 개념은 류영모 신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됩니다. 류영모는 언어와 수리감각이 매우 뛰어나고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커서 한글의 조형미나 한글의 철학적 구성원리에 대해 대단한 호감을 가졌던 분으로, 이 '한읗님'이란 낱말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사상을 표현하는데 이 한글을 이용하여 스스로 매우 독특한 용어를 만들어 자기 사상을 표현하였습니다.
사실 영어의 God에 해당하는 개념을 우리말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한국의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쪽에서는 유일신 개념을 포함한 '하나님'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천주교쪽에서는 하늘님의 개념이 포함된 '하느님'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류영모는 이 두가지 주장을 모두 포용하면서도 한층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한읗님'이란 표현을 제시합니다. 즉 류영모가 사용한 신의 이름인 '한읗님'의 '한'에는 '하나님'이라는 표기가 담고있는 '하나'의 뜻이 담겨있고, '읗'의 '우'에는 '하느님'이란 표기가 담고있는 뜻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류영모는 '우'라는 표기 밑에 '우'라는 글자의 뒤집혀진 형태인 'ㅎ'을 첨가함으로써 순환의 의미를 덧붙입니다. 그러니까 '한읗님'이란 표기에는 하나이기도 하고 또 위에 계시지만 만물과 더불어 순환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 됩니다.
사실 류영모는 잡지에 기고할 때나 또 다른 때에는 하나님이나 하느님이란 표현 가운데 그 어느 쪽의 표현도 고집하지 않고 매우 자유롭게 이 용어들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생애 후반 20년동안 쓴 일기의 중반 이후부터는 일관되게 이 '한읗님'이란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일기를 쓴다는 것은 이 한읗님 대한 경험을 늘 쓰는 것이었다 할 수가 있지요.
2. 기독론(그리스도론) : '얼'로 표현되는 얼 기독론
기독교 신학에서 기독론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해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류영모의 사상에서 기독론이란 문제의 핵심은 예수라기보다는, 나와 예수 그리고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가 아닌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 그 핵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류영모가 사용한 말이 바로 '얼'이란 용어입니다.
본디 '얼'이란 용어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학적 개념으로 쓰인 말인데 류영모는 이 '얼'이란 낱말에 기독교의 영이나 성령과 같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류영모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의 주인은 바로 이 얼인데, 이 얼은 절대자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 얼이 바로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얼 기독론'이라 표현할 수 있는 류영모 기독론의 핵심 주장은 "얼이 그리스도이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기위해 이에 관한 류영모의 주장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주장입니다. 류영모에 따르면 벗어버릴 우리의 육체는 절대로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경우에도 몸의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몸의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몸의 예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오직 얼의 예수만이 그리스도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의 주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얼이고, 바로 이 예수 안의 얼이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둘째로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의 경우, 몸의 예수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고, 얼의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얼은 예수한테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도 온다고 류영모는 주장합니다. 따라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리스도는 꼭 예수만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셋째로 "하느님의 얼이 그리스도이다"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류영모에 따르면 우리를 구원하는 주체, 온 백성을 구원하는 주체는 몸의 예수가 아니라 바로 예수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얼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얼이 바로 그리스도인 셈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얼 기독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과연 사람들의 삶에 어떤 결단력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류영모에 따르면 예수는 훌륭한 선생인 것만으로도 우리 삶에 결단력을 주고 또한 우리 삶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모범이 될 수 있는 분이 됩니다. 또한 류영모는 이러한 것을 몸소 자신의 삶을 통해 직접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3. 귀일歸一 신학 : Returning to the one
류영모 신학의 핵심을 꿰뚫는 말이 바로 '귀일歸一'입니다. 이 귀일 개념은 '화해'라는 종교철학적 개념과 연관되어 한국 지성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인데, 멀리는 손님과 신을 화해시켜주는 무당의 존재가 있는 샤머니즘부터, 원효와 지눌 그리고 율곡을 거쳐 류영모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서구 신학계의 주된 흐름 가운데서 많이 주장되어 온 예수 중심주의나 신 중심주의는 일방향적(one way)인 면이 많은데 반해, 이 귀일 개념은 온 곳이 있고 또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양방향적(two way)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귀일 개념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얼을 보내주는 한 방향(one way)이 있고 또 그 얼을 받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소명은 한 걸음 한 걸음 우리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또 한 방향(two way) 모두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우리의 일생을 온전히 다 바쳐야 하는 매우 실천적인 개념입니다. 또한 류영모는 이러한 귀일을 위한 실천적인 방법론도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효孝'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보여줄 수 있는 관계의 극치를 예수와 하느님이 보여주었으니 우리도 그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바로 이런 점에서도 예수는 우리들의 삶에 결단력을 주는 모범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류영모의 신학은, 지금 한국 사회에 만연해있는, 종교를 물상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치유하는데 공헌할 수 있을뿐더러, 보수와 진보의 두 영역으로 갈라져있는 한국 신학계의 편협성을 치유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고, 또한 우리 자신의 삶에 어떤 결단력을 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류영모의 신학은 지금 우리에게 하느님의 씨를 받은 우리의 할 일은 하느님이 보낸 씨를 틔우는 일이라는 실천 신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원식 객원기자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