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시대, 역사의 비극을 끌어안고 살면서 아픔이 있는 자리라면 그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서 앞장서던 바로 그 발” 한 평생 세상보다 ‘낮은 곳’을 찾아 기도해 온 거리의 목회자, 정진동 목사(75)가 지난 10일 청주 성모병원에서 영면했다. 입원중인 정 목사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병문안했던 김태종 목사는 먼길 떠나는 ‘바로 그 발’을 정성스럽게 만져보았다. 김 목사는 ‘같은 하늘 아래서 숨 나눠 쉴 수 있었던 것을 평생 자랑으로 간직하며 살겠다’는 고별인사를 그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3년에 걸친 오랜 투병을 접고 홀홀히 떠나갔다. 70~80년대 충북 민주화운동의 ‘큰 어른’, 노동자·도시빈민을 위한 투쟁의 ‘선봉장’이었던 대꼬챙이 목사. 문민정부 출범으로 민주화를 쟁취했다는 세상에서도 외롭게 순수 재야의 길을 고집했던 원로. 자신이 직접 세상 바꾸어 보겠다며 청주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던 낭만적 사회운동가.
치열했던 고인의 삶은 지난 2005년 1월 느닷없이 찾아온 뇌졸중으로 ‘원치않는’ 휴식에 들었다. 자택에서 쓰러져 충북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고인은 첫 마디로 “나에게 아직 통일을 위해 할 일이 남아있다”고 되뇌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꿈꿔온 평등세상과 통일시대는 저 세상으로 가져갈 업이 되고 말았다. 고 정진동 목사의 살아온 이력을 정리하며 그의 꿈과 땀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고 정진동 목사는 1932년 12월 26일 청원군 호죽리 동래 정씨 집안의 6대 독자로 태어났다. 농사마저 변변치 않은 가난한 집안에서 가마니, 짚신, 나무짐을 팔아가며 생계를 도와야했다. 후에 고등성경학교, 대한신학(현 대신신학), 단국대 문과대, 장로회 신학대학 등을 졸업했지만 모두 제 나이를 훌쩍 넘어서 다녔다.
이 때문인지 고인은 가난해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유난히 많은 정을 베풀었다. 50년대 고향 시골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헌신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돈이 없어 배우는 못하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진천군 덕산면에도 염광학원을 지어 정규학교를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당시 토끼풀을 뜯어오는 것이 수업료였다는 것.
마침내 72년 고인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목사로 취임해 기층 민중을 위한 본격적인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전도부 안에 산업전도위원회에서 활동하다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지원으로 청주 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 당시 영등포산업선교회 조지송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평생의 동지로 지내왔다.
고인은 도시 기층민중의 삶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거리의 넝마주이로 나서기도 했다. 부산 출신인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차성수 비서관의 청주 경험담 가운데 정 목사와의 인연이 흥미롭다. 지난 75년 고려대 재학중이던 차비서관은 빈민운동 차원에서 청주에 파견돼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 목사의 주선으로 함께 넝마줍기에 나서기도 했다는 것.
군사독재정권하에 억압받고 짓눌린 노동자·빈민들의 발길이 청주도시산업선교회로 몰려들자 경찰·정보기관의 감시 눈길도 집중됐다. 유신말기인 78년에는 신흥제분 퇴직금 투쟁, 조광피혁 부당인사, 소작인 의문사 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때 청주지역 재야 종교계 인사 20여명과 피해 당사자들이 대대적인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당시 고인의 장남인 정법영군(당시 19세)도 직접 유인물을 작성하며 단식투쟁을 도왔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내적갈등을 겪던 정군은 같은 해 7월 청주시내 모병원 응급실에 약물복용 증상으로 숨졌다.
민주화 제단에 바친 막내아들
누가 병원으로 후송했는지 어떤 약물을 어디서 복용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은채 19세의 어린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생전에 고인은 충청리뷰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비를 욕하는 학교 선생님밑에서 공부할 수 없다고 자퇴하고, 신학공부하면서 민중운동을 열심히 도와주었어. 그러던 애가 어느날 누군가에 이끌려 술을 취해서 집에 들어왔어, 그러고 얼마뒤에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이 왔서 가보니 이미 혼수상태였지. 그 상태에서 혼자 몸으로 병원을 찾아왔다는 것도 믿을 수 없고…내가 좀 더 챙겨줬어야 했는데, 죽은 자식은 평생 가슴에 묻고 사는거지” 결국 정 군의 죽음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의문사’로 판명받았다.
또 막내 아들 정세영씨도 청주 민정당사 점거로 인해 집회시위법으로 구속수감되기도 했다. 또한 와병중인 정 목사를 대신해 교회를 이끌고 있는 조순영 전도사는 처제로 온 가족이 엄혹한 시절에 탄압과 고통을 함께 해야만 했다.
고인은 정춘수 동상 철거 사건, 청주대 재단비리 의혹사건, 산남동 택지개발지구 보상민원 등 800여건이 넘는 지역현안과 노동·인권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88년 임금협상에서 월급제를 도급제로 바꾸는데 합의한 노조 지도부와 사업주에 반대한 11개 택시사업장의 총파업투쟁은 지역 노동운동의 이정표로 남아있다. 수많은 민원과 집회과정에서 고인은 30여 차례의 연행과 옥고를 치렀고 고인의‘ 민중신학’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 제명당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대통령에게 쓴소리할 수 있어야’
70~80년대 청주도시산업선교회는 진보적 민중운동을 이끌던 민주인사들의 강연장이었다. 김관석, 인명진, 박형규, 문동환, 문익환, 조남기, 김진홍, 고영근 목사 등이 방문했고 함석헌, 계훈제, 백기완, 안병무, 한완상 교수 등도 고인의 민주화운동에 원군이 됐다. 고인은 1980년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해 처벌받기도 했다. 이같은 공적에 따라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돼 민주열사들과 함께 5·18묘역에 묻히게 됐다.
고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생전의 일화가 있다. 지난 97년 재야의 비판적 지지를 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기독교 관계자들의 축하모임이 열렸다. 자리에 참석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김대통령 찬양일색의 발언을 이어가자 정목사는 그 자리를 뿌리치고 나왔다. “종교는 중립에 서야지 누구 편을 들 수는 없다. 그래야 나중에 대통령이 실수를 할 때 쓴소리를 할 수 있다”고 일갈했다는 것.
고 정진동 목사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1주일에 1장씩 시국관련 글을 쓰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고인은 주변의 지인과 지역 언론사에 자신의 글을 보내주었고 이 글은 6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마지막으로 발간된 책의 제목 <끌 수 없는 정의에 불꽃>처럼 고인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밤 하늘의 별로 남아 새롭게 이 땅을 비춰줄 것이다.
생전의 언론 인터뷰 가운데 고인이 독백처럼 던진 한마디가 가슴을 찌른다. “지금 하는 일도 자기희생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솔직히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어.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이 3∼4명만 돼도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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