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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세상 여행

옥천 청마리 솟대놀이 (충북인뉴스 071205)

by 마리산인1324 2007. 12. 14.

 

<충북인뉴스>

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909

 

 

 

옥천 청마리 솟대놀이
윤년드는 4년마다 장승·솟대 다시 세워
2007년 12월 05일 (수) 14:18:05 충북인뉴스 cbi@cbinews.co.kr
1986년 2월 18일 옥천 관성 동호회원들을 따라 탑신제가 열리는 옥천군 동이면 청마리를 찾아갔다. 정월 대보름을 하루 앞두고 청마리에서는 솟대놀이 준비가 한창이었다.

얼마 안 있어 솟대놀이가 시작되고 부락민 전체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한시대부터 이어진 탑신제는 해마다 거르지 않고 지내고 있고 윤년이 드는 4년마다 장승과 솟대를 새로 세우는 큰 행사가 치러진다. 마침 우리가 도착한 날이 윤년이 드는 해라서 제대로 된 청마리 솟대놀이를 볼 수 있었다.

   
 
  ▲ 솟대제사청마리 솟대제사는 탑신제가 끝나고 그 음식을 솟대 밑으로 옮겨 제주가 제사를 주관하고 마을고령자 순으로 제를 올렸다.  
 
청마리 탑신제당(靑馬里 塔神祭堂) 탑신제는 부락을 지키고 평안을 빌며 질병(疾病)과 악귀(惡鬼)를 쫓아내고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신앙이 짙게 묻어나는 마을 제사이다.

제당은 마을 입구 원추형(圓錐型) 돌탑으로 돌탑의 크기는 높이와 넓이가 각 5m에 달하고 돌무더기 탑의 둘레는 17m 이르는 큰 탑이다. 돌탑 옆에 긴 장대 위에 기러기 모양의 새를 깎아 얹은 나무가 꽂혀있고 마을로 들어서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두 장승이 길 양 옆에 자리해 마을 수호신 역할을 맡는다.

   
 
  ▲ 청마리 탑신제마한시대부터 내려온 탑신제 행사는 옥천군 동이면 청마리에서 전해져 내려와 해매다 제를 올리고 있는데 충청북도는 한곳밖에 없는 중요한 민속제로 1976년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받았다.  
 
솟대는 삼한(三韓)시대에 신을 모시던 장소인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소도에 세우는 솟대[立木]가 그것이며 소도라는 발음 자체도 솟대의 음이 변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솟대는 짐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짐대의 유물은 오늘날 마한의 옛 땅인 충북의 남부지방과 전라도 지방에 남아있는데 충북에는 대청댐 수몰 전 청원군 문의면 문덕리 압실마을과 옥천 청마리 2곳 밖에 없었다. 그것마저 대청댐 수몰로 오로지 청마리 한곳만 남게 됐다.

   
 
  ▲ 청마리 장승제탑신제, 솟대제에 이어 3번째 제사를 올리고 장승제는 천하대장군 한곳만 지내고 지하여장군 장승밑에 약간의 제물만 놓는다.  
 
솟대는 농가에서 섣달 무렵에 새해의 풍년을 바라는 뜻에서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장대에 높이 달아맨다. 이 볏가릿대[禾竿]를 넓은 마당에 세워 두고 정월 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벌이는데, 이렇게 하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또 청마리처럼 민속신앙의 상징물인 장승 옆에 장대를 세우고 장대 끝에 기러기를 닮은 새를 나무로 깎아서 달기도 했다.

청마리 솟대놀이 제사 순서는 먼저 탑신제로 시작된다. 제주(祭主)의 초헌(初獻)에 이어 마을의 고령자가 삼헌(三獻)을 하면서 소지(종이태우기)를 올리는데 이때는 각자의 소원성취를 기원한다. 이어서 솟대제를 단잔(單盞)으로 마치고 장승이 있는 장소로 옮겨 장승제를 지낸다.

   
 
  ▲ 노청각 큰선물지하여장군장승에 놓인 제물을 먼저 먹으면 장가를 갈 수 있다는 속설로 마티 마을 청년 김상호씨가 제물 들고와 기뻐했다.  
 
장승제에서 천하대장군에게는 제대로 제를 올리고 지하여장군에게는 천하대장군에게 차렸던 제물을 조금씩 놓는다. 이는 노총각들이 제물을 먹으며 장가를 가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 위해서다. 장승제가 끝나면 온 동네사람들이 모여 음복(飮福)하고 제물을 골고루 나누어 먹으며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렇게 각자 복을 나누고 받고 즐기면서 놀이는 끝이 난다.

청마리 솟대놀이의 특징은 탑신제, 솟대제, 장승제, 마당굿, 샘굿 등 5가지 행사가 하루에 모두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청마리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주민이 많이 거주할 때는 행사가 복잡해져 외지인 출입을 막기 위해 해뜨기 전에 탑신제, 솟대제, 장승제를 지내고 마당굿과 샘굿은 부락민과 참석한 모든 이가 정오에 맞춰 먹고 춤추고 신명나는 화합의 놀이판이 걸출하게 벌여져 볼만했다고 한다.

솟대와 장승이 새로 만들어지는 윤달이 드는 해는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을 제관과 청년들이 모시고 산으로 올라가 노인이 솟대와 장승으로 쓰일 나무를 정하면 가지고 간 떡시루를 놓고 제사를 지낸 뒤 도끼로 나무를 잘라 동네로 옮겨 왔다. 운반된 신목은 톱을 사용하지 않고 도끼와 자귀, 끌 등으로 솜씨 좋은 사람이 장승과 솟대를 깎아 세워 완성했다.

   
 
  ▲ 마을주민 함께하는 제사탑신제에 이어 솟대를 세우고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부탁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했다.  
 
동이면 소재지에서 청마리로 넘는 고개는 해발 500m의 마티고개인데 옛날 노부부가 대추를 팔러 고개를 오르다 굴러 죽게 되고 그들이 가지고 갔던 대추가 싹을 피워 대추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험한 고개로 유명하다.

이런 지리적 이유에서인지 단순한 부락축제로만 여겨졌던 청마리 솟대놀이는 1976년 청주대 김영진(민속학과) 교수에 의해 귀중한 민속자료로 조사됐고 그해 12월 23일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됐다. 한때 50가구 넘게 주민이 살았고 돌탑 앞에는 초등학교 분교까지 있었던 청마리는 부락 인구가 급격히 줄면서 탑신제를 지낼 인력이 모자라 옥천 관성 동호회원들이 부락민과 합세해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고장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마한시대의 민속놀이와 민속자료가 이렇게 명맥만 유지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일부 동호인들과 마을 주민만의 힘으로는 진정한 민속놀이로 계승되기에는 힘이 부쳐 보인다. 행정당국의 실질적인 지원과 도민들의 관심이 있어야만 후대에도 청마리 솟대놀이를 계속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