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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태환경

'햇빛'이 '희망'이다 <5> 하늘의 창을 열다(프레시안 071121)

by 마리산인1324 2008. 1. 27.

 

<프레시안> 2007-11-21 오전 7:36:37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1120185124

 

 

'붉은' 십자가 없는 '햇빛' 교회를 상상하자

'햇빛'이 '희망'이다 <5> 하늘의 창을 열다

 

 

유가가 100달러에 육박하면서 에너지 문제가 연일 언론 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관심 속에는 '더 이상 잔치를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깊은 불안감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런 관심이 얼마나 갈지 알 수 없다. 유가가 몇 달러만 떨어져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잔치는 계속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사실 단기적인 유가의 등락은 온갖 변수가 작용한 결과일 뿐이다. 더구나 석유가 아주 유용한 '투기' 대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더욱더 그렇다.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중ㆍ장기적인 유가의 추이이다. 유가는 두바이유 기준으로 2000년대 초 20달러대에서 불과 7년 만에 90달러대로 4배 가까이 올랐다. 등락을 거치면서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온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른바 '석유 생산 정점(Peak Oil)' 사태의 도래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최근 부쩍 많아진 것이다. 낙관론을 견지하던 전문가들이 속속 비관론으로 돌아서더니 최근에는 아예 2006년에 석유 생산 정점을 지났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고유가에도 석유 생산량이 쉽게 늘지 않는 상황에서 나온 경고이다.
  
  연초부터 큰 관심을 모은 기후 변화 경고는 인류가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골칫거리다. 일부 불확실성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지난 수백 년간 석유, 석탄을 포함한 화석연료를 쓰면서 배출한 온실 가스가 우리별 지구의 균형을 깨는 데 일조하고 있음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행동을 해야 할 시점이다.
  
  석유, 천연가스 등 자원을 둘러싸고 갈수록 험악해지는 국제 정세는 어떤가?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여러 가지 진짜 이유의 맨 앞에 석유가 있다는 것은 이젠 상식처럼 받아들여진다. 러시아와 같은 새로운 자원 강국이 에너지로 국제 정세를 좌지우지하려는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앞으로 이런 자원을 둘러싼 갈등은 더욱더 심해질 것이다.
  
  <프레시안>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창간 때부터 다각적으로 에너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특히 올해 연초부터 '석유 제로(0) 시대를 그린다'와 같은 연재 기사를 통해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극복하려는 국내외의 흐름을 자세히 소개하는 등 에너지 문제를 공론화하고자 노력해왔다.
  
  이 연장선상에서 <프레시안>은 시민발전(유), 대북에너지지원국민운동본부와 함께 '햇빛이 희망이다' 캠페인을 진행한다. 앞에서 열거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으로 꼽히는 태양, 풍력 에너지 등 재생 에너지는 시민의 관심과 참여가 있을 때 널리 확산될 수 있다.
  
  캠페인이 진행되는 동안 한 주일에 세 번 재생 에너지 보급 운동에 함께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프레시안>을 통해 독자를 만난다. 성당, 학교, 창고 지붕에 소규모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하거나, 심각한 에너지난을 겪는 북한 주민에게 석유 대신 재생 에너지를 공급하자고 정부, 국민을 설득하는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왜 햇빛이 희망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① "우리는 '파국의 회오리' 속에 들어갔다"
  
  ② "태평한 당신…부안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③ "햇빛은 청구서를 보내지 않는다"
  
  ④ "수소가 아닌 유채가 대한민국을 구한다"

  올 겨울 들어 서울이 처음으로 영하로 내려간 날 아침,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고 목도리를 두른 채 차가운 거리로 나섰습니다. 바람이 위세를 자랑하자 은행나무 잎이 사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게 늦가을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햇살은 눈부셨고, 저는 서늘함을 즐기며 걸었습니다.
  
  이제부터 내복 검사를 해야겠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더군요. 몇 해 전부터 겨울이면 내복 입기 캠페인을 해보지만 젊은이들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도무지 동참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겨울은 좀 춥게 지내고, 여름은 좀 덥게 지내자고 입이 닳도록 말하지만 사람들은 불편함을 잘 참아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래 전부터 '즐거운 불편'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생명을 사랑하는 이들의 삶의 방식이라고 말해온 덕에 저는 불편한 목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환경문제를 앞장서서 이야기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통해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나 온산 공단 문제를 접하면서입니다. 그러나 그게 생태적 개종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인생을 계기적 실존이라 하던가요? 재직하고 있던 학교를 떠나 백수생활을 하고 있던 1990년 봄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우리나라에서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최하는 제1회 '정의ㆍ평화ㆍ창조질서의 보전 대회'가 열렸고, 그 대회에 참여하면서 저는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2차 초안 문서인 '홍수와 무지개 사이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창조질서의 온전함이 대부분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요인들에 의하여 심대한 위협을 받고 있다. 이 지구상의 생명은 조화롭고도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들의 상호작용에 의존해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인 프로세스의 미묘한 균형이 붕괴하게 되면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현재의 역사적 시점에서 중요한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다. 인간은 창조질서에 대하여 광대한 실험들을 벌여 왔는데 이러한 실험의 궁극적인 결과는 대단히 파국적인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치 한 몸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그런 조화 속에서 지탱되던 생태계가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멸절의 위협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저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소극적으로나마 반생명적인 삶에서 벗어나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생명운동으로 전환시킬 용기도 능력도 제게는 없었습니다. 안타까워하며 개인적 실천에 힘쓰면서, 사람들에게 생명이 얼마나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일깨우는 데 주력했을 따름입니다.
  
  반응은 미미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 생태계의 파괴는 가속화되었습니다. 1990년에는 가능성이었던 것이 이제는 현실이 되어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거대한 생명 멸절의 지진해일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풍요의 잔치에 넋이 빠진 사람들은 현실에 눈을 돌리려 하질 않습니다.
  
  며칠 전 방글라데시를 휩쓴 사이클론으로 말미암아 사망자가 최소 3000명에서 최대 1만 명에 이른다는 보도를 보면서 목이 말랐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주전 8세기의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면서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은 자가 거두는 게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많이 누린 자들이 심어놓은 재앙의 씨앗을 수확하는 것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입니다. 이런 불공평이 어디 있습니까? 많이 누리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이제 또렷한 음성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라는 구호 아래 소비주의를 부추기는 이 시대의 노래는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사이렌의 노래처럼 모두를 죽음으로 이끌 뿐입니다.
  
  2억 년 동안 지구가 만들어온 천연자원을 지난 200년 동안 거의 탕진하였으니 문명의 식욕을 대단하다고 해야 할는지요? 여신이 아끼는 나무를 도끼로 찍어 넘긴 죄로 배고픔의 형벌을 받았던 신화 속의 에리식톤이 다름 아닌 근대인의 초상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음식을 사다가 급기야는 제 살을 베어 먹고 죽었던 에리식톤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인지요?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석탄 등 천연자원으로 지탱되던 문명은 이제 종언을 고하고 있습니다. 석유 생산이 정점을 지났다는 보도도 들려오고, 온실가스의 증가로 인한 기후 변화로 예상치 않았던 질병에 대한 보도도 끊이질 않습니다. 생물종들이 빠른 속도로 죽어가면서 지구의 보호막이라 할 수 있는 생물권(biosphere)에 구멍이 뚫리고 있습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햇빛은 하늘의 값진 선물
  
▲ 서울 용산구 청파동 청파감리교회 정문에는 태양광 발전기가 생산한 전기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 있다. 태양광 발전기는 교회 지붕 십자가 밑에 설치돼 있다. ⓒ청파감리교회

  얼마 전에 교회 지붕 위에 햇빛 발전소를 올렸습니다. 몇 해 전 부암동에 있던 '에너지 전환'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곳을 다녀온 후 햇빛 발전소를 세우리라는 고운 꿈 하나가 제 가슴에 잉태되었습니다.
  
  그 꿈을 우리 교인들 공동의 꿈으로 전화시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화석연료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고, 뭔가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핵융합 반응에 의해 초당 약 900억 조 칼로리의 에너지를 방출한답니다. 그것이 대기권 밖에 도달하면 초당 약 42조 칼로리로 줄어들고, 그 70% 정도인 30조 칼로리가 지구의 표면에 안착하게 됩니다.
  
  태양은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에너지의 1만5000배나 되는 양을 매일 지구에 보낸다고 합니다. 그것도 무료로 말입니다. 햇빛 에너지는 마음만 열면 누구라도 받을 수 있는 값진 선물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는 성경 말씀을 요즘 저는 또 다른 의미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지붕에 올린 햇빛 발전소가 생산하는 전력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3㎾ 용량이니까 기껏해야 한 가정이 필요로 하는 전기를 충당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햇빛 발전소를 세운 것은 등불 하나를 밝히는 마음이었습니다. 욕망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하늘빛을 맞아들이기 위한 하나의 창문이라 할까요?
  
  꽤 많은 이들이 햇빛 발전소를 견학하러 옵니다. 와서는 "겨우 이거예요?" 하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태양 전지판과 변환 장치로 구성된 그 단출한 시설을 보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단출합니다. 그렇기에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행정 절차가 복잡하기는 하지만 고맙게도 '시민발전'에서 다 대행해주었기에 우리는 번거로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3㎾ 햇빛 발전소는 나무 200그루
  
  햇빛 발전소를 세운다는 것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문명을 전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지금 제게는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교회와 성당과 사찰의 지붕마다 햇빛 발전소가 들어서는 꿈입니다. 한 사람이 건너면 모두가 건널 수 있다 했습니다. 종교 시설의 지붕마다 하늘을 향한 창이 열리게 될 때 피조세계의 신음소리는 조금씩 잦아들 겁니다.
  
  요즘은 햇살 좋은 날이면 마당가로 달려 나가 전력 발전 현황을 보여주는 디스플레이 앞에 서서 혼자 흐뭇해합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공간에 세워진 햇빛 발전소는 나무 200그루가 처리하는 만큼의 이산화탄소를 절감한다고 합니다. 그 좁은 공간에 나무 200그루를 심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합니다.
  
  우리 교회 지붕에 세운 햇빛발전소는 새로운 삶을 향한 하나의 이정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과 하늘을 향해 건네는 수인사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는 생태학적인 발자국을 덜 남기는 삶을 향한 소박하지만 끈질긴 행군을 시작할 차례입니다.
  
부안 시민햇빛발전소 건설에 동참하실 분들은 부안시민발전소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부안시민발전소 소장 이현민 (016-381-0518)
   
 
  김기석/청파감리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