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서프라이즈는 2005년 새봄,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친일·반공·보수·우익의 실체를 분석하고 왜곡된 과거를 바로잡기 위한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와 윤경로 한성대 총장(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 강정구 동국대 교수 등 굴절된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대표적 전문가들이 기고문과 인터뷰를 통해 2005년 한국사회가 처한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친다(편집자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역사교과서 왜곡, 한승조 등의 일제식민지 미화 망언을 계기로 일본규탄 못지않게 친일청산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해방 60돌을 맞은 이 시점에서도 이런 친일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사실 자체가 남한 현대사의 파행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해방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가졌다. 하나는 일본제국주의의 직접적인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의 해방이었다. 다른 하나는 단순한 직접통치로부터 벗어남을 넘어서 조선인에 의해, 조선인을 위한, 조선의 사회와 역사를 일구는 것을 의미했다. 곧 벗어남과 창조를 함께 이룩했을 때 우리의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 되는 것이었다.
반쪽만의 해방에 그친 미완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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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구 동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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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조선의 해방은 벗어남의 해방에 머물고 창조의 해방은 좌절되고 말았다. 곧 반쪽 해방이고 미완의 해방이었다. 비록 일본의 직접적인 통치로부터 벗어나긴 했지만 이곳 남한 땅에는 친일이 아직도 창궐하고 있다.
박정희-김종필-한승조-지만원-조갑제 등이 무리가 되어 친일-숭미의 활개를 치고, 해방된 지 60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대표적 친일파인 송병준과 이완용 등 11명이 수십조 원에 달하는 약 440만평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몇 천만평의 땅이 조선총독부나 동양척식회사의 명의로 남겨져 있다. 이런 구도 속에서 창조의 해방은 애시 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해방이 왔건만 해방답지 못한 해방, 해방 60돌을 맞았건만 아직도 미완인 해방, 이 역사의 파행은 과연 누구 때문이었나? 친일청산을 좌절시킨 주범과 공범은 진정 누구였고, 또 이들의 하수인인 첨병은 누구였는지 명확히 밝혀보자.
주범은 미국, 공범은 이승만, 첨병은 한국민주당과 그 아류
우리들 대부분은 친일청산의 좌절과 실패를 우리 탓으로만, 곧 이승만 정권에게만 귀착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이는 역사현상의 설명에서 주로 최종 시점의 행위에만 주목하는 행위론적 설명에만 머무르고, 그러한 행위가 일어날 수밖에 없게 만든 구조적 요인을, 곧 구조론적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이다.
결론은 이승만이 아니라 미국 승인 하의 어떠한 정권도 미군정이 남겨 놓은 구조적 제약 때문에 친일청산은 기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을 살펴보면 필리핀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청산은 실패했고, 그 요인은 바로 미국의 반동적인 점령정책에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곧 친일청산 좌절과 실패의 주범은 이승만 정권이 아니라 해방 직후 우리의 운명을 가름한 3년간의 미국 군사정부였다.
그렇다고 이승만 정권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군정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승만 정권이었지만 진정한 친일청산에 대한 구조적 제약 하에서도 어느 정도의 친일청산은 가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친일청산은 커녕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미군정으로부터 물려받은 친일구조를 더욱 확대 재생산시켜 이후 남한 땅을 친일파와 그 후예의 세상으로 더욱 굳어지게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친일청산 좌절과 실패의 주범은 미국과 미군사정부였고, 공범은 대한·미군 초대정권인 이승만 정권이고, 첨병은 미군사정부 시대 여당이었고 대한민국 야당의 뿌리였으면서 친일파 무리인 김성수, 조병옥, 장택상 등이 즐비한 한국민주당(한민당)과 그 아류였다.
친일청산의 두 차원 사람바꿈과 구조바꿈
35년간의 일본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자 조선사회에서 가장 큰 과제와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 분단극복과 친일청산이었다. 새로운 조선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전제조건인 친일청산은 두 가지 차원에서 요구되었다. 하나는 친일파의 서식처인 구조나 법과 제도의 바꿈을 통해 친일청산을 꾀하는 구조바꿈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서식처에서 보호받고 성장해온 서식체인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사람바꿈이었다.
첫째의 구조바꿈(구조청산)은 35년간의 식민통치가 우리 조선사회에 심어놓은 법, 제도, 사회·경제·통치구조 등의 청산을 핵심으로 한다. 둘째 사람바꿈(인적청산)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영합해 민족을 배반했던 친일민족반역자의 숙청과 청산을 통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조선민족과 조선민중의 맺힌 한을 풀고, 무엇보다 조선인 스스로에 의한 새로운 조선역사를 창출시키는 데 최대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이러한 친일청산에 대한 요구는 활화산처럼 타올라 친일파들은 도망가거나 움츠렸으며 일본의 통치구조 등은 곧바로 마비되어 와해직전이 되었다. 그러나 갓 탄력을 받기 시작한 이 구조청산과 인적청산은 미 점령군이 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들의 총과 칼에 의해 중단 및 좌절되고 말았다.
한미동맹으로 좌절된 남한의 친일 인적청산
반공 · 반소 · 반혁명 · 반탁을 정책기조로 삼은 미 점령군은 일반명령 1호에 의해 어제의 적이었던 일본인을 동원해 조선인 대중투쟁으로 와해 직전인 식민지 통치구조를 긴급 구출하면서 친일민족반역자들과 인적동맹인 한미동맹을 맺는다.
이를 통해 철저한 친일청산을 제창하면서 조선사회를 압도하던 사회주의 지향의 급진세력과 민중세력을 제압하여 남한을 반소 · 반공 · 반혁명의 보루로 삼으려 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공했다.
가장 먼저 맺어진 한미 인적동맹은 점령 직후인 10월에 임명한 조선인 행정고문에서다. 남한에 있는 고문 10명 가운데 우익이 9명, 좌익진보세력이 여운형 1명으로 당시 조선사회의 실질적인 이데올로기 지형과는 거의 100% 상반된 비율이었다. 이 가운데 6명이 친일파 정당인 한민당으로 충원되었다.
또한 46년 12월에 개원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미군정은 한민당과 이승만의 독립촉성회를 중심으로 한 친일우익의 당선을 보장해주는 형식으로 선거를 진행시켜 친일우익세력이 이를 장악했다.
이러한 한민당 중심의 친일우익 편향의 동맹관계는 미군정의 국가억압기구 분야인 경찰과 검찰 및 군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대법원장 김용무, 사법부장 김병로, 검찰총장 이인 등은 전부 한민당 출신이다. 다른 부처에서도 이와 유사한 인적구성으로 한민당은 자타가 공인하듯이 미군정의 실질적 여당으로 군림했다.
경찰 간부의 80%가 일본경찰 또는 일본군대 출신으로 채워졌다. 해방은 되었지만 경찰은 조선의 경찰이 아니라 여전히 일본경찰인 꼴이었다.
남한군대는 더욱 장관이다. 미군정의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임관된 110명이 남한군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이 가운데 일본군 출신 이응준이 추천한 일본군 출신이 87명, 원용덕이 추천한 만주군 출신이 21명, 중국군 출신이 2명으로 군대는 친일민족반역자 일색이었다.
또 미군정 하 9개 연대의 연대장이 모두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었다. 극소수 광복군 출신이 군에 참여했으나 미군정과 이승만에 의해 조직적으로 배제되고 한직으로 따돌림 당했다.
이후 이승만 시대에는 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낀 친일파 군인들이 경찰에서(서울시내 서장급 간부들이었던 윤우경, 김정채, 전봉덕--김구암살에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헌병사령관, 서울법대 형법교수, 자살한 전혜린의 아버지) 군으로, 사회에서(2관구청장을 지낸 이익흥) 군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남한군은 더욱 친일 색채를 띠게 되어 철저히 ‘일본군의 남한군화’한 셈이다.
이 결과 친일민족반역자가 친미파로 변신해 해방된 조선사회의 권력을 장악해 인적·구조적청산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띠게 되었다.
미군정의 친일민족반역자 보호 · 육성 정책
이러한 친일동맹으로 미군정은 인적청산과 구조청산을 저지시키는 방벽을 굳건히 쌓았고, 이 방벽을 통해 미국의 대 조선 점령 목표인 반공 · 반소· 반혁명을 성취시켜 나가면서 직접적인 친일파 보호·육성정책을 강행했다. 이의 연장선에서 1947년 연말 쯤 친일청산에 대한 조선인의 몸부림에 마지막 주먹을 날려 친일청산을 끝내 좌절시키고 말았다.
비록 늦었지만 1947년 7월 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특별조례를 통과시켰다. 해방 2년 만이었지만 그래도 민족정기를 되찾는 획기적 조치였다.
그러나 이미 미군정 하에서 활개를 치고 있던 경찰 등 친일파들의 조직적인 반대가 기승을 부렸다. 친일파 일색인 경찰의 총수인 조병옥은 경찰규제조항의 수정을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종로경찰서장 김형진은 공공연한 무력행사를 역설했다.
만주에서 일본군 밀정 짓 했던 악명 높은 이종형은 친일청산 법안 검토대회에서 괴변으로 민족반역자 처벌을 오히려 반민족행위로 모는 등 무소불위의 만행을 자행했다. 그 뒤에는 튼튼한 미국의 보호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이들 친일파들은 반공제일주의론, 친일불가피론, 건국공헌론, 능률 제고론, 국민 총화합론, 인재 부족론, 민족분열경계론 등을 구실로 특별법 저지에 사생결단이었다.
미군정은 ‘친일파 문제는 조선인 자신의 문제’라고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막상 이 법이 통과되자 4개월 동안 유보시키더니 끝내 11월 27일 인준보류 통지를 함으로써 특별법을 사문화시켰다. 이로써 미군정 하 친일파 청산문제는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미군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남한이 미군정에서부터 ‘독립된’ 이후 까지도 친일청산이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를 이승만에 대물림시켜 남한 땅을 친일파 아성으로 만드는 치밀함과 끈질김을 보였다.
이는 초대국회선거인 5·10선거에서 잘 나타난다. 5·10선거에서 미군정은 중앙선거관리위원 15명 가운데 13명을 한민당으로 구성했다. 선거에서 모든 좌익,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모든 중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익 진영의 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5·10선거를 분단선거로 규정짓고 선거참여를 거절했다.
단지 이승만의 독립촉성회, 친일파 주축인 한민당, 테러집단으로 월남한 서북청년단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또 다른 테러집단이었던 대동청년단 등과 같은 정당·사회단체만 5·10선거에 참여했다. 당시 남한의 400여 정당·사회단체가운데 불과 10% 정도만 참여한 셈이었다.
이래서 5·10선거는 투표 이전에 이미 친일세력의 집권이 예정되어 있었다. 선거는 하나 마나였다.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독립정부 출범은 아예 공염불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5·10선거를 끝까지 강행해 끝내는 민족을 분단시켰고 또 남한 사회를 친일파 세상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다.
이런데도 미국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보은론과 한미동맹 절대론이 아직도 남한 땅에는 기승을 부리고 대미 자발적 노예주의가 판을 치는 오욕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이승만정권 하 친일청산의 완전좌절과 미국
미군정으로부터 친일구조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승만 정권과 국회였지만 친일청산에 대한 폭발적인 국민요구 덕분에 헌법 101조는 반민법 제정을 의무화 했고, 이후 국회 소장파의 주도로 반민특위와 반민법이 의결됐다.
반민특위와 반민법은 국회라는 관문을 어렵사리 통과했지만 미군정이 이승만 행정부에 심어 놓은 친일 구조 때문에 결국 국회 밖을 넘어 설 수 없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면서 반민법 폐지를 역설했고, 일제고등계 형사출신 악질경찰 노덕술의 석방을 종용하고, 국무회의에서 반민법 반송기도를 꾀하고, 정부 측 조사위원으로 친일파인 유진오를 임명하고, 김상덕 반민특위위원장을 협박·매수 기도도 했다. 경찰 역시 테러분자인 백민태를 통해 반민특위 요원의 암살을 기도하는 등 행정부의 반민법 공격은 사생결단식이었다.
반민특위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2가지 대표적 사건은 경찰의 6·6 반민특위습격사건과 ‘남로당국회프락치사건’이다. 이 두 사건에서 미국의 입김이 결정적 역할을 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위 습격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주미대사 장면으로부터 반민특위가 양주삼 목사를 친일행위로 구속한데 대해 미국 감리교 측의 웰치 씨로부터 항의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자 즉석에서 김효석 내무장관에 특경대 해체지시를 내려 일어난 사건이다.
국회프락치 사건은 조작 의혹이 짙은 사건으로 반민법을 주도했던 소장파의원들이 한국 내 미국이 관심을 가진 재산의 매도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신식민지적 한미경제협정을 주권침해로 규정짓고 맹렬히 반대하고, ‘남북평화통일에 관한 결의안’ 등으로 미군철수를 요구한 시점에서 터졌다.
이 두 사건으로 국회 내 진보적인 소장파 의원이 제거됨으로써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반민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채 그 효력을 상실했다. 이로써 이승만과 그 정권은 친일청산을 좌절시키는 미국의 공범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이 결과 미군정이 남겨 둔 구조적 제약 하에서 국회 소장파들의 친일청산 시도는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비록 의회라는 국가기구에서는 소장파들이 구조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행정부와 관변 시민사회에서 부하되는 구조적 제약을 결코 뛰어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구조적 제약은 전적으로 미국이 우리 민족에 강요한 타율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사회 친일 현황
해방공간의 민족사적 핵심과제였던 친일청산이 비록 조선사회의 내재적 역량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외세에 의해 원초적으로 좌절되었다. 이 역사적 결과는 당대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우리 사회의 전 영역에 수많은 파행과 왜곡을 불러 오고 있다.
필자는 대학에 몸담고 있으므로 대학 내 친일청산 좌절의 현황을 확인해 보겠다. 이로써 친일청산 좌절이 우리 사회 전 영역에 가져온 파행의 모습이 어느 정도 인지를 짐작케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서울대학을 보자. 서울대 설립이후 조선인으로 초대총장을 역임한 이춘호는 “40만 십자군병들아, 다 같이 일어나 총후보국의 보조를 맞추자”고 외치며 기독교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앞장섰던 경성기독교연합회 회원이었다.
고려대 총장을 역임하고 ‘고려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진오는 조선문인보국회의 간부를 지내면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의의 전쟁이고 미국 등은 악마라고 부르짖는 등 친일 족적의 거목이었다. 이러한 친일에도 불구하고 뉘우침 한마디 없이 헌법기초위원, 초대 법제처장, 신민당 총재, 한일회담 수석대표를 맡았다.
연세대학교 초대총장이었던 백낙준은 친미에서 친일·반미로 다시 숭미주의로 변신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드디어는 친일분자인 유억겸 등을 애국자로 평하는 역사의 왜곡을 주도하면서 독립유공자 심사위원까지 맡는 파렴치범이었다.
이화여대의 화신이라 일컬어지는 김활란의 친일행각은 가장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경우로 그녀는 해방이 되자 과거에 대한 속죄 한마디 없이 유엔총회대표, 공보처장, 순회대사, 아시아반공연맹이사 등을 역임하고 남한 여성계의 대모로 자리 잡았다.
이들 4개 대학 외에도 성신여대의 이숙종, 덕성여대의 송금선, 상명여대의 배상명, 서울여대의 고황경, 중앙대학의 임영신 등 이들 대학 설립자들이 한결 같이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가입한 친일 대부들이었다.
이들 친일민족반역자 무리의 손아래에 놓인 남한의 대학이 민족학문이나 민족지성을 길러내기에는 너무나도 친일의 위력이 막강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이런 현상은 대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한 사회 전 영역에 걸쳐 만연되고 보편화된 현상이다.
친일청산의 좌절과 대미 자발적 노예주의
2001년 초 한러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ABM(탄도미사일제한)조약 파기에 반대하고 이 조약의 유지를 원하는 러시아를 지지해 남한 외교 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대한 자주외교를 펼쳤던 적이 있었다. 당시 장본인이었던 이정빈 외교장관이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공세에 장관직을 물러나면서 “한국언론은 미국언론이 동으로 가면 동, 서로 가면 서로 간다”라고 개탄했다.
정치평론가인 김민웅 역시 “이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언론이며, 어느 나라 정치집단이며 어느 나라 지도자인가?”라면서 통탄했다. 국회의원 김원웅은 “우리나라의 수구세력들은 국적이 한국인지 미국인지 분별을 못 하겠다”면서 이들의 대미 자발적 노예주의적 작태를 질타했다.
친일청산을 좌절시킨 주범인 미국과 주한·미군, 공범인 이승만정권, 첨병인 한국민주당이 해방공간의 조선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더라면 이러한 반역의 역사와 대미 자발적 노예주의가 해방된 60년인 오늘까지 버젓이 재연되고 만연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반문에 반문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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