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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강정구 특별기고②] 판이한 남북한 친일청산은 미국과 소련의 점령정책 차이

by 마리산인1324 2006. 12. 23.
강정구 “친일청산은 북한이 앞섰다”
[특별기고②] 판이한 남북한 친일청산은 미국과 소련의 점령정책 차이
입력 :2005-05-03 15:12:00   강정구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unikorea@cvnet.co.kr)
제대로 된 현대사 연구자라면 응당 그에게 제기되는 근본적 의문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왜 남과 북은 한 나라 한 땅덩어리 한 이불 속이었으면서도 민족사적 핵심과제에서는 전혀 다른 역사행로를 해방공간부터 걸었는가일 테다.

곧, 남과 북은 각기 친일청산의 실패와 성공, 토지개혁의 개량성과 혁명성, 민족독립 세력의 권력배제와 권력중추, 민족자주노선의 실종과 투철함, 통일조국에 대한 열망의 약세와 강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과 같은 극명한 차이를 보였는가하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 문제제기와 올바른 정답 찾기는 냉전굴레에 눌려 억압·차단되고 또 겁쟁이 학자들 스스로의 자기 검열에 의해 외면돼 왔다.

최근 저명한 사학자인 강만길 명예교수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독립운동의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비록 학계에서는 왕 초보적인 것이지만, 바깥세상에서는 매카시즘의 집중타를 맡는 것을 보면 짐작할 만하다.

▲ 강정구 동국대 교수. 
필자는 현대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한 학자로서 “만약 해방공간에 외세인 미국과 소련이 우리 민족사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친일청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질문을 종종 제기해 보았다.

이를 해결키 위해 반(反)사실적 추론을 바탕으로 한 ‘역사추상형 비교방법’을 고안하고, 이 주체적인 방법론을 위와 같은 ‘가위 눌리는’ 주제 연구에 적용해 왔다. 이로써 객관적이고 민족중심적인 평가를 확보하려했던 것이다.

2002년 8월 13일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연구논문은 만약 외세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사회 전체의 친일청산은 북한의 것과 유사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를 간략히 검토해 봄으로써 남한과 한 지붕 속의 북한이 걸었던 천양지판으로 다른 친일청산을 확인하고, 남한의 것과 비교해 역사적 교훈을 독자들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해방직후부터 권력을 박탈당한 북한의 친일민족반역자들

북한의 친일청산은 일본의 패망이 발표되는 해방공간 시점인 45년 8월부터 조선민중의 자연발생적 힘에 의해 곧바로 시작되어 46년 거의 완벽할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이 결과 북한에는 친일이라는 과거청산 논쟁이 아예 발붙일 틈이 없게 되었다.

남한 역시 해방과 동시에 친일청산의 민중적 욕구가 분출되어 자연발생적인 청산작업이 시작되었으나 미 점령군의 개입으로 즉각 중단되고 말았다.

이승만 정부 수립이후인 49년에서야 늑장부린 친일청산이 시작되다가 결국 이번에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래서 해방 60년 환갑이 된 이 시점에서도 친일청산이 미완의 과제로 남아 뜨거운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너무나 대조적인 친일청산 행로는 미국과 소련의 점령정책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은 남한을 실질적으로 점령한 시점인 45년 9월 중순 이전에 맥아더 포고령에 의해 와해되어 가는 일본군을 부활시켜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게 하고, 조선총독부를 존속시키고, 침몰하고 있던 친일민족반역자를 나락에서 구제했다.

비록 미국 국내외의 강력한 비판 때문에 조선총독부를 곧 해체하긴 했지만 총독부 전직 고위관리들을 고문으로 삼아 이들이 미군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했고 권력을 장악케 했다. 이 결과 해방과 동시에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된 조선민중의 친일청산 열기가 지속할 수 없는 구조적 조건을 미국은 처음부터 만들었다.

대조적으로 소련은 첫 단추부터 친일청산, 특히 인적 청산을 분명히 했고 조선 민중의 자연발생적 친일청산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이 지침은 소련 점령사령관인 치스차코프대장의 포고문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왜놈들이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 사람들을 멸시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은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 버렸다...”

이 결과 일차적인 친일청산은 조선인 자치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기 이전에 자생적으로 결성된 급진조직인 각 지방인민위원회와 조선민중의 자연발생적 욕구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뤄졌다.

이 청산작업은 소련 점령군의 후원에 힘입어 보다 빨리 또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로써 아주 적극적인 친일파인 일제총독부 관리, 경찰, 관료, 친일지식인 등이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는 미군정하의 또 다른 세상인 남쪽으로 일찌감치 도망쳐 서북청년단과 같은 반공전사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친일민족반역자들이 일제 식민지 시대보다 권력을 더 강화해 자손에게까지 대물림해왔던 남한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아예 해방초기부터 친일민족반역자들이 권력을 박탈당하고 배제되어 다시는 이들이 권력중추에 감히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일찌감치 완비된 친일청산의 법·제도적 지침

그렇지만 친일파의 권력배제는 곧바로 그들이 죄 값을 치르는 처벌이나 숙청, 아예 되살아 날 수 없게 만드는 청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친일청산은 자치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는 1946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1946년 2월 8일 조선인 자치정부의 ‘11개조 결정서’ 1, 2항과 이어 3월 23일 자 ‘20개조정강’에서 친일청산을 확정하고 그 시행에 들어갔다. 이를 주도한 세력은 항일무장투쟁 등 반일독립투쟁을 주도한 급진 민족주의 세력이었고 그 시행기관은 남쪽의 미군정과는 달리 조선인 ‘자치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였다.

46년 2월에 발표된 11개조 결정서 1항은 “친일분자 및 반민주적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며” 라고 규정해 인적 청산의 마무리 지침을 내렸다.

2항은 “최단기간 내에 일본 침략자 및 친일적 반동분자에게서 몰수한 토지와 산림을 국유화시키며” 라고 규정해 친일민족반역자들이 소유한 토지나 산림을 몰수할 뿐 아니라 이를 국유화 시켜 법적인 분쟁의 소지를 아예 없애 버리는 지침이었다.

해방 60년이 된 지금까지도 남한 땅의 지적도에는 조선총독부나 동양척식회사 명의의 땅이 1000만평이 넘고, 송병준이나 이완용 등의 친일민족반역자 소유의 땅 4백만~5백만 평이 버젓이 아직 그들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친일민족반역자의 후손들이 자기 선대가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토지를 팔아 챙기는 일이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남한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20개조정강 1항은 “조선의 정치 경제생활에서 과거 일본통치의 일체잔여를 철저히 숙청할 것”을 명시하여 일상생활 속에 남아 있는 식민지 잔재를 철저히 청산토록 했다.

응당 이는 언어, 예술, 문화, 학문 등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지침으로 전 영역의 친일청산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규범적 범주가 되었다. 또 7항은 “일본통치에 사용하며 그의 영향을 가진 일체법률과 재판기관을 폐지하며”라고 규정해 법률과 재판제도에서도 식민잔재를 씻어내도록 지침을 내리고 있다.

이로써 북한은 해방된 지 6개월 만에 친일청산에 대한 포괄적 지침과 방향이 확정되어 35년간의 일제 식민지의 구각을 벗어나 조선인에 의한 새로운 조선사회로 나아가는 발판을 일찌감치 마련했던 것이다.

해방 된지 1년여에 인적청산을 마무리 짓다

이러한 지침에 따라 조선인 자치정부의 행정관리 하에 친일민족반역자의 처벌과 숙청은 진행되었다. 그리고는 1946년 11월 도,시,군 인민위원회인민위원 선거에서 이 인적청산은 드디어 마무리 되었다.

인민위원 선거에서 친일민족반역자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하여 그들이 새로운 조선사회의 중추권력에 접근할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린 것이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박탈된 친일민족반역자의 범주는 아래와 같다.

1.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고문 전부
2. 도회 의원 부회의원이었던 조선인 전부
3.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및 도의 책임자로서 근무한 조선인 전부
4. 일제시대 경찰,검사국,재판소의 책임자로 근무한 조선인 전부
5. 자발적으로 또는 일본을 방조할 목적으로 일본주권에 군수품 생산, 기타의 경제자원을 제공한 자
6. 친일단체의 지도자로서 열성적으로 일제를 방조하거나 동조한 자

이들 청산대상인 친일파는 그야말로 아주 적극적인 친일민족반역행위자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실재로는 총선에서 위의 친일파 범주 외에도 리 단위 민중총회에서 후보에 대한 자격 심사를 철저히 했기에 숨겨진 친일파나 경미한 친일파들이 권력에 몰래 스며들 수 없었다. ‘완벽한’ 숙청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에서 어쩔 수 없이 부일협력을 할 수밖에 없었던 소극적 부일협력자들에게는(이들은 자발적으로 친일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민족반역자라고 보기 힘들다) 주로 교육과 교화를 시키는 방식으로 반성케 해 인적청산을 마무리 지었다.

친일에 대한 준엄한 청산과 부일에 대한 여유로운 관용이 함께 했기에 북한은 별다른 혼란 없이 친일청산과 반제반봉건혁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결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계급별 구성비는 농민 22%, 노동자 26%로 전체의 거의 과반수를 기층민중이 차지함으로써 일제 식민지 당시 자본가, 지주, 관료, 경찰 등 지배계급으로 군림했던 친일민족반역자들은 완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로써 북한정권은 민중정권의 토대를 강력하게 형성할 수 있었다.

1년 3개월 만에 마무리 된 친일구조청산

일제식민통치가 남겨 놓은 법, 제도, 자산, 구조 등은 조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 사람을 위한 새로운 조선사회인 새 세상을 만드는 해방을 맞아 이들 일본인을 위한 법과 제도 및 구조를 응당 조선인을 위한 것으로 바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민족사적 요구였다. 곧 친일 구조청산 또는 물적 청산은 당면 최대과제였다.

이에 대한 지침은 20개조정강에서 내려졌다. 앞에서 확인했듯이 전 영역에서 “과거 일본통치의 일체잔여를 철저히 숙청”하고 “일본통치에 사용하며 그의 영향을 가진 일체법률과 재판기관을 폐지”를 규정했다.

이러한 정책기조에 따라 물적 청산은 46년 3월에 시작된 토지개혁에서부터 철저히 시행된다. 토지개혁법령 제2조는 몰수토지의 대상을 “일본국가, 일본인 및 일본인 단체의 소유지와 조선민중의 반역자, 조선민중의 이익에 손해를 주며 일본제국주의의 정권기관에 적극 협력한 자의 소유지”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토지개혁은 한 달여 만에 완료되어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조선총독부나 친일민족반역자의 토지는 더 이상 북한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북한에서는 친일파의 물적 근거가 상당 부분 사라져 이들이 토지개혁 이후 지주들과 함께 집중적으로 월남 했던 것이다.

토지에 대한 물적청산으로 친일구조청산이 끝날 수는 없었다. 일본인과 민족반역자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나 중요 산업 또한 청산의 대상이었다.

1946년 8월 10일 공포·발효된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은 “일본국가와 일본인 개인 및 법인 등의 소유 또는 조선인민의 반역자로 되어있는 일체의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 운수 체신 은행 상업 및 문화관계 등은 전부 무상으로 몰수하여 이를 조선인민의 소유 즉 국유화”했다. 이로써 친일파의 물적 토대는 거의 일소될 수 있었다.

북한의 전반적인 친일 구조청산은 1946년 2월부터 시작된 토지개혁에서 시작해 중요산업국유화, 노동법, 남녀차별금지법, 인민위원선출의 총선 등으로 이어지면서 법과 제도의 영역에까지 청산이 완결되었다.

친일정신 청산에까지 나아간 북한의 친일청산

그러나 북한의 친일청산은 인적, 물적, 구조적 청산에서 끝날 수 없었다. 정신영역에까지 친일의 잔재를 말소하는 청산에까지 나아갔다. 그것은 일제와 이광수, 최남선, 장덕수 등 민족개량주의자들이 퍼뜨린 민족허무주의나 민족비하주의를 청산하고 민족의 자긍심과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작업이었다. 이것이 바로 건국사상 총동원운동이었다.

이광수, 최남선 등 친일지식인들은 조선의 민족성 자체가 아직 독립을 독자적으로 이끌어 갈 정도로 성숙되지 못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기에는 시기상조란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인은 독립을 꾀하기보다 먼저 민족성을 개량한 연후에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민족자폐주의를 확산시켰다. 이 결과 일본인은 세 사람만 모여도 단결해 집을 짓는데 조선 사람은 세 사람만 모이면 모래알과 같아 당파싸움을 벌인다면서 ‘엽전은 안 된다’고 하는 민족비하주의가 일제시대 난무했다.

‘조선 사람은 민족성을 뜯어 고치기 이전에는 어쩔 수 없어’ 라고 자처하면서 독립을 하려는 의지, 곧 민족정기를 스스로 꺾어 버리도록 만드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물론 일본에게는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46년 말부터 북한은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벌려 ‘우리도 스스로 할 수 있다, 스스로 하면 된다’라는 자심감과 민족자긍심을 북돋웠다. 더 나아가 이들 민족자긍주의나 자주정신이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는 오늘날 최악의 경제난과 미국의 북한죽이기에 직면한 극심한 상황에서도 북한정권이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대일(對日) 민족허무주의나 자폐주의는 남쪽에서 미국의 후원으로 권력을 장악한 한민당 등 친일파세력과 이승만 등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 및 재 확산되었다. 이 결과 숭미(崇美) 자발적 노예주의와 공미(恐美) 자폐주의로 변질되어 해방 60년이 된 지금까지 남한의 기성주류에 만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친일청산 문제는 결코 지나간 과거의 문제에 그칠 수 없고 바로 오늘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케 된다.

친일청산을 넘어 친 외세구조의 단절로

해방 후 민족의 핵심과제였던 친일청산에서 북한은 인적, 물적, 구조적, 정신적 청산에 머무르지 않았다. 더 나아가 해방된 나라의 권력핵심체가 항일 민족독립투쟁에 적극적으로 종사한 사람들로 충원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다시는 친일세력과 친 외세세력이 재생되거나 복원될 수 있는 구도가 원천적으로 배제된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곧, 친일청산이라는 민족사적 핵심과제의 역사적 이행이 이후 민족정기정신으로 이어지면서 민족자주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게 만든 것이었다.

이는 북한을 이끌어 가는 핵심정치세력인 북조선로동당 당대표자 인적 구성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1946년 8월 29일 열린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당 대표자 801명에 대한 심사위원회 심사결과를 보면 북한권력 핵심인 노동당의 인적 구성이 얼마나 친일민족반역자를 배제하고 항일민족독립투쟁세력 중심으로 이루어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전에 일제에게 체포당한 동지들 중 감금자수 291명 36%, 1~5년 징역자수 149명 18%, 6~10년 징역자수 71명 7%, 10년 이상 징역자수 26명 3%, 최고 징역자 년수 18년인데 그 수는 1명이고 옥중생활 한 동지들의 총수 263명이며 그 징역의 총연장 년수는 1,087년이었습니다. … 반일투쟁으로 혹은 지하운동 혹은 무장폭동 등 망명으로 외국에서 혁명사업하던 동지들의 수는 427명 53%이었습니다(국토통일원, -조선로동당대회자료집-1, 20쪽).

위의 박일우의 보고에 의하면 해외에서 항일혁명사업을 전개한 대표자와 국내 항일투쟁에서 감금을 경험한 당대표자 수는 무려 718명으로 전체 당대표의 89.6%가 된다. 이러한 북로당의 통계는 친일파의 인적청산과 권력기반의 와해가 북한에서는 거의 완벽히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소련 점령군은 독립변수가 아닌 촉진제나 가속제에 불과

북한의 친일청산에 대해 소련 점령군의 역할은 점령사령관 포고령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대했다. 그러나 소련 때문에 친일청산이 가능했다고 보는 소련 귀착론은 분명히 오류다.

소련 점령군의 역할은 첫째 남한을 점령한 미국 점령군과는 정반대로 곧바로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토착자생국가기관인 인민위원회로 행정권과 치안권을 이양했다.

둘째, 조선 토착혁명세력의 세력화와 대중투쟁에 일본인의 개입이나 반혁명 행위를 철저히 차단시켰다.

셋째, 미국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합의한 대로 일제잔재의 청산을 점령정책 기조로 삼았다. 넷째, 인민위원회 등 자생기구에 행정·통치권 등의 자주적 행사를 승인 및 지원해 주어 조선인에 의한 조선역사의 창출을 후원했다.

이들 소련 점령군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친일청산에 대해 도와주고 촉진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곧 소련 점령이 없었다하더라도 친일청산은 조선민중의 자연발생적 욕구에 의해 충분히 청산될 수 있었지만 소련의 도움으로 빨리 청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해방공간의 조선사회는 친일청산에 대한 내재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기에 소련점령은 결코 독립변수가 아니라 그야말로 촉진변수였다.

지금 이 시점에서 국회는 과거청산 특별법을 제정하려고 한다. 과거청산은 진상규명, 관련자의 법적 역사적 처벌, 청산되어야 할 과거사에 의해 제정된 악법이나 제도 및 구조 등의 폐기, 피해자 배상 및 명예회복, 민족해방투쟁 정신 계승 및 역사적 자리매김 등이다.

북한의 친일청산 경우 진상규명에서부터 정신계승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청산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 부끄럽게도 진상규명 조차 안 된 수준이다. 북의 친일청산과 이를 이은 자주정신은 그들만의 자산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산으로 통일조국이 계승해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한은 30년 이상 반독재민주화 투쟁이라는 고귀한 족적을 가져 민주정신이 우리 사회 곳곳에 배어 있는 곳이다. 이 민주정신 역시 남북을 넘어 우리의 통일조국이 마땅히 계승해야 할 값지고 고귀한 열매다.

이제 서로의 값진 열매를 무조건 악마화하고 배격해 “남북이 함께 망하는 통일”일랑은 박물관으로 보내 버리자. 그리고는 남의 값진 열매와 북의 고귀한 열매를 함께 합치고 계승해서 문익환 목사가 언제나 읊으시는 “둘이 하나 되어 함께 커지는 통일”로 나아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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