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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프랑스사

by 마리산인1324 2006.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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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 史, France, history of]

 

 

갈리아

 

BC 1200년경 주로 켈트족으로 구성된 갈리아(골)인들은 라인 강 유역으로부터 남과 서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에 자리잡았다. 그로부터 수세기가 지난 BC 121년 로마는 갈리아 정복을 시작했으며, 로마 지배하에 갈리아는 완전히 로마화되었고 로마 제국 말기(250~400경)에 그리스도교가 갈리아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로마 제국의 쇠퇴에 따라 갈리아에는 게르만족의 침입이 잦아지고 내분도 발생했다. AD 5세기말 살리아 프랑크족이 루아르 강 이북을 점거하고, 서(西)고트족이 아키텐과 프로방스를 차지했으며, 부르군트족이 론 강 계곡에 자리잡았다.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 시대

 

클로비스의 죽음(511) 이후 그의 아들 3명이 분할한 프랑크 ...
카롤링거 제국
메로빙거 왕조클로비스 왕(481/482~511 재위) 때 로마 교회의 그리스도교는 갈리아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8세기에 프랑크 왕국의 실권은 카롤링거 왕조로 넘어갔으며, 이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샤를마뉴는 그리스도교권(敎圈) 서방의 대부분을 통합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성탄절에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았으며, 그의 제국은 서유럽 대부분 지역을 포함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843년에 제국은 동(東)·중(中)·서(西) 프랑크로 분열했으며, 그후에도 통합과 분열이 거듭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중프랑크가 사라지고, 비만왕 샤를 3세(884~888 재위) 때 다시 통합되었으나 유명무실했으며 마침내 왕마저 폐위되었다. 로마령 갈리아에 게르만족이 정착함으로써 완전히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민족이 접촉하게 되었으며, 게르만족은 라틴어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농업이 주된 경제 활동이며 귀족의 거주지이자 수입의 주된 원천인 대영지는 오래 전부터 예속적인 농민의 경작에 맡겨졌다. 로마 제국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의 주교제와 주교 관구제는 큰 변화없이 잔존했다. 4~5세기에 걸쳐 주교 관구는 여러 교구로 나누어지고, 6세기에는 수도원의 수가 증가했다.

 

프랑스의 탄생과 정치적 발전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활동이 부활함에 따라 여러 공국(公國)이 형성되었다. 그중의 하나인 파리와 오를레앙을 축으로 한 일드프랑스는 새로운 프랑스 왕국의 핵심이었다. 이 왕국은 카페 왕조의 프랑스라 할 수 있는 것으로 13세기에 와서는 근대 프랑스의 영역에 맞먹을 정도로 팽창했다. 중세 초기 노르만족(바이킹)의 파괴적인 침입으로 대제후들은 그들이 상속한 관직·영지·봉토 등에 교회의 토지를 보호령으로 추가함으로써 대공국을 건설하고, 혼인을 통해서도 새로운 영지를 획득했다. 이러한 공국의 토지 관리인은 단순한 관리인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고유의 권리를 행사하는 봉건 주군이었다. 이리하여 9세기의 통합된 제국으로부터의 권력의 분산 현상은 11세기에 완료되었으며, 이러한 지방분권적인 정치체제를 봉건제도라고 한다. 봉건 주군은 충성을 맹세한 봉신(封臣)의 군사적 봉사에 의존하며, 봉신은 그 대가로 불입권(不入權)을 가진 봉토를 받는다. 이러한 봉토는 수없이 증가했으며, 권력의 세분화를 가져왔다.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크게 침체되었던 교회도 갱신되었으며, 클뤼니 수도원이 910년에, 시토 수도회가 12세기에 창건되었다.

 

정치권력의 분산으로 국왕은 오랫동안 대제후들과 대립하고, 동맹을 맺거나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아르 강 이북에서 왕령지를 제외하고 가장 유력했던 지역은 플랑드르·노르망디·앙주·브르타뉴·블루아샹파뉴·부르고뉴였다. 루아르 강 이남에서는 프로방스·오베르뉴·툴루즈·바르셀로나·아키텐이 유력했다. 프랑스 왕국의 직접적 기원은 843년에 대머리왕 샤를에게 할당된 서프랑크 영토였지만 987년에 위그 카페(987~996 재위)가 왕으로 선출될 때까지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끊이지 않았다. 위그 카페의 아들 로베르(996~1031 재위)가 그의 뒤를 이었으나 로베르는 물론 그의 후계자들도 실질적으로는 왕관을 쓴 봉건 제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국왕의 위신은 점차 높아졌다.

 

중세 프랑스

 

프랑스 왕령지 확장(1180~1328)
프랑스의 왕권은 존엄왕 필리프 2세(1180~1223 재위) 때 크게 강화되었으며, 잉글랜드 왕실의 프랑스 내 영지의 대부분을 회수했다. 또한 필리프 2세는 실질적으로 왕실 행정기구의 창설자이기도 했다. 그를 계승한 루이 8세(1223~26 재위)는 랑그도크를 접수하고, 왕실 세습 영지를 왕세자 아닌 왕족과 왕실의 측근에게 주는 왕족령(appanage)의 선례를 만들었다.

 

존엄왕 필리프의 손자 루이 9세(1226~70 재위, 1297 시성)는 공정하고 총명하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군주로 자처하고 인민을 구제할 책무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후에 고등법원(파를망)으로 알려진 왕실회의의 법정은 루이 9세의 명성에 힘입어 왕실 재판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루이 9세의 손자 단려왕 필리프 4세(1285~1314 재위)는 왕국의 통합을 강화하고 교황과의 투쟁 과정에서 삼부회(三部會)를 창설했다. 그가 프랑스 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세금 납부를 금지했다. 왕은 친위대를 파견하여 교황을 사로잡았으며, 노령의 교황은 그후 얼마 안 가서 죽었다. 그뒤를 이은 가스코뉴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5세(1305~14 재위)는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아비뇽 교황청).

 

12세기말부터 프랑스는 유럽의 정치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존엄왕 필리프의 외교 정책은 잉글랜드의 적대 관계로 좌우되었으며, 루이 9세의 최대 관심사는 성지 회복이었다. 루이 9세는 1248년에 직접 성지를 향해 출발했으나 실패하고, 1270년에 마지막 십자군에 나섰으나 현지에서 병사했다. 단려왕 필리프는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에 대해 가장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폈다. 특히 아키텐에 대한 행정권이 오래전부터 양국간에 긴장을 조성하고 있었다. 결국 잉글랜드의 에드워드와 필리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필리프에게 유리한 휴전이 맺어졌다(1297~1303). 샤를 4세 때 다시 전쟁이 일어났으나 이번에도 전세는 프랑스에게 유리했다. 파리 조약(1327)으로 프랑스는 잉글랜드가 차지하고 있던 영토를 회복하고 잉글랜드에 배상금을 물게 했으나 양국간에는 많은 미해결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사회적 현상은 계속되는 인구의 증가였다. 도시는 번영하고 상공업도 발달했다. 북부 프랑스의 도시들은 지역적인 상거래 중심지였고, 노르망디, 잉글랜드, 발트 해, 그리고 저지대 국가들과 이탈리아 도시들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번영했으며, 샹파뉴 대시(大市)는 13세기에 번영의 절정에 달했다.

 

백년전쟁

 

1328년 카페 왕조의 혈통이 끊어지고 발루아 왕조가 들어섰을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다. 필리프 6세(1328~50 재위)는 플랑드르에 대한 실질적인 종주권을 회복하고, 1329년에는 아키텐에 대하여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로부터 서약을 얻어냈다. 그러나 필리프 4세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함으로써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불가피했다. 에드워드 3세가 1346년 8월에 크레시에서 승리하고 칼레를 점령한 후 전세는 일방적으로 잉글랜드에 유리했다. 잉글랜드의 혹세자에게 패해 포로가 되었던 선량왕 장 2세(1350~64 재위)를 계승한 샤를 5세(1364~80 재위) 때 전세는 프랑스에 유리하게 역전되었다. 그뒤를 이은 샤를 6세(1380~1422 재위)는 1392년에 정신병에 걸렸기 때문에 숙부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왕실회의를 주관했다. 이후 양국간에 휴전 교섭이 진행되어 1396년에 화해가 성립했다. 그러나 15세기에 접어들어 헨리 4세가 프랑스에서의 영국의 권리 회복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전투가 재개되었다. 때마침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파 사이에 내란이 벌어져 상황은 잉글랜드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407년에 오를레앙 공작이 암살되자 아르마냐크파가 그뒤를 계승하여 파리를 장악했다. 이 와중에 1415년 새로 즉위한 헨리 5세가 침공하여 프랑스군을 아쟁쿠르에서 무찌르고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1420). 그결과 샤를 6세는 왕세자의 왕위계승권을 부인하고, 가신의 딸과 결혼한 헨리 5세를 왕위 계승자로 지목했다. 1422년에 헨리와 샤를이 다같이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를 겸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난국에 잔 다르크가 등장했다. 그녀는 왕세자인 샤를(훗날의 샤를 7세)을 도우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1429년 4월 오를레앙에 입성하고, 그후 프랑스군은 승승장구하여 같은 해 7월에 역대 프랑스 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랭스에서 샤를의 즉위식을 가졌다. 이후 프랑스군은 승리를 거듭했으나 잔 다르크는 1430년 적군의 포로가 되어 이듬해에 화형에 처해졌다.

 

백년전쟁이 끝난(1453) 후 프랑스 내에 남은 잉글랜드 영토는 칼레뿐이었다. 샤를은 잔 다르크를 마녀로 규정한 종교재판의 재심을 명했으며, 그결과 잔 다르크는 1456년에 복권되었고 수세기 후에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전쟁의 불꽃이 사그라짐에 따라(1435~49) 샤를 7세는 정부 조직의 재편에 나서고 몇몇 지방에 고등법원이 설치되었으며, 1448년에는 새로운 상비군 조직이 완료되었다. 1438년에 교황과 체결된 부르주 협약으로 프랑스로부터 교황청으로 유출되는 돈이 크게 삭감되고, 프랑스 교회에 대한 왕권의 영향력이 증대했다. 루이 11세(1461~83 재위)는 부르고뉴·오를레앙·브르타뉴를 왕령지로 확보하고 전국적인 규모로 상공업을 촉진시키는 데 주력했다. 전략적인 요지인 아르투아를 획득한 것을 비롯하여 1480년에는 앙주, 프로방스, 지중해 연안의 영지를 포함한 앙주 백작의 모든 상속권이 국왕에게로 넘어오게 되어 루이는 왕령지를 현저하게 확대시켰다.

 

14·15세기의 사회와 경제

 

악천후, 상업의 침체, 일부 지역의 인구과잉 등으로 전보다 더욱 격심한 기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여기에 전쟁마저 겹쳐 경제적 곤궁이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생명과 안전을 가장 혹독하게 손상시킨 것은 흑사병으로 알려진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흑사병은 1347년에 프로방스에 상륙하여 1348년에는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을 휩쓸고, 1350년에야 사그라들었다. 그밖에도 1358년에는 북부 지방에서 자크리(jacquerie)의 난으로 알려진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발생하고, 거의 같은 시기에 파리에서는 에티엔 마르셀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전쟁과 재앙, 그리고 반란들은 봉건적인 프랑스로부터 새로운 근대적 프랑스가 태어나는 과도기의 조짐들이었다.

 

16세기

 

샤를 8세(1483~98 재위)가 1494년에 시작한 이탈리아 전쟁은 1559년에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왕국의 군사적·행정적 구조뿐만 아니라 왕권의 전통적인 역할에까지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으로 국왕은 보다 더 많은 수입원이 필요했는데,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왕은 신하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은 관직을 팔기 시작했다. 관직매매는 특히 16세기에 일반화되었으며, 이로써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들은 후에 정치적·사회적 지위 향상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왕은 또한 귀족작위도 팔았으며, 현금을 받고 작위와 관직 세습을 허용했다.

 

루터의 저서가 파리에 처음 나타난 것은 1519년이었다. 1521년에 프랑수아 1세(1515~47 재위)는 이 저서의 출판을 금지했으며, 1534년에는 이를 탄압하는 일련의 칙령이 반포되었다.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은 1530년대 중반에 장 칼뱅의 개혁 사상으로 변형되고 강화되었다. 앙리 2세(1547~59 재위)는 보다 더 억압적인 수단을 강구했으나 프랑스의 칼뱅주의, 즉 위그노주의는 날로 그 세력이 커지고 반항도 거세어졌다. 샤를 9세(1560~74 재위)의 섭정이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종교문제의 타협과 어느 정도의 관용을 시도했으나 로마 가톨릭파의 수령인 기즈 공의 강력한 반발을 샀을 뿐이다.

 

프랑스의 종교전쟁, 즉 위그노 전쟁은 신·구 양쪽의 대립이 주축이지만 귀족간의 세력다툼, 귀족과 왕권과의 대립, 왕위계승문제 등이 엉켜 장기간에 걸쳐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영국이 위그노를, 스페인이 가톨릭을 지원해 국제분쟁의 양상까지 띠었다. 전쟁이 고조되어가고 있던 1572년 8월 23일부터 24일 새벽에 걸쳐 때마침 위그노 지도자의 한 사람인 나바라 왕 엔리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파리에 모여든 위그노들은 가톨릭의 습격을 받아 지도자인 콜리니 제독을 비롯해 약 3,000명이 학살되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알려진 이 엄청난 유혈극으로 전쟁은 가열되었다. 강경한 가톨릭 동맹(1576 결성)의 지도자 기즈 공이 앙리 3세(1574~83 재위)에 의해 살해되고, 이에 격분한 동맹파가 앙리 3세를 살해하여 나바라 왕 엔리케가 왕위계승자가 되고 후에 왕위에 올라 앙리 4세(1589~1610 재위)가 되었다. 그는 카페 왕가의 방계인 부르봉 왕가의 초대 왕으로서, 또다른 5년간의 내전 끝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지위를 굳혔다. 종교전쟁의 최종 단계는 스페인과의 싸움이었는데, 1598년 베르뱅 조약으로 스페인은 앙리 4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고, 같은 해에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에게 종교적 관용을 허용함으로써 종교전쟁은 끝났다.

 

17세기

 

1600~1766년 프랑스의 영토확장
앙리 4세가 즉위할 무렵에는 당파를 초월한 강력한 영도자만이 국가의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앙리는 1598년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에게 관용을 보장했다. 1610년 암살되기 전까지 그는 왕권의 권위를 회복하고 즉위시 내외로부터 크게 위협받고 있던 국가를 재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루이 13세 시대

 

앙리의 사후 미망인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어린 루이 13세(1610~43 재위)의 섭정이 되었으며, 1624년에는 리슐리외 추기경이 루이 13세의 총리가 되었다. 리슐리외 외교정책의 첫째 목표는 프랑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국경지대의 요지들을 점령하려 했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만토 상속전쟁(1628~31)에 개입하고, 1635년에는 30년전쟁에 직접 참가해 합스부르크 왕실과 싸웠다. 리슐리외는 1642년에 죽고 이듬해에 루이 13세가 사망했다. 그리하여 모후인 오스트리아의 안이 섭정이 되었으나 실권은 마자랭 추기경의 수중에 있었다.

 

프롱드의 난

 

프롱드의 난은 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반란이었다(1648~52). 첫번째 난은 파리 고등법원 법관들을 중심으로 한 고위 관직자들과 국왕 사이에서 스페인과의 전쟁에 필요한 국가 수입 증대의 방편을 둘러싸고 일어났으며, 1649년 화해가 성립되었다. 이무렵 제2차 난이 발생했는데, 대(大)콩데 공을 수령으로 한 귀족과 왕족들의 왕권에 대한 반항이었다. 1652년 한때 파리를 탈출했던 루이 14세가 승리해 수도로 돌아왔다. 1659년 마자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마무리짓는 피레네 조약을 맺었다. 그결과 프랑스는 영토를 획득하고, 루이 14세는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다. 마자랭은 1661년에 사망했다.

 

루이 14세 시대

 

루이 14세는 장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세우고 태양을 상징으로 삼아 권위를 과시했다. 그러나 제도적인 혁신이나 행정상의 변화는 별로 없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고문관은 1665년에 임명된 재무장관 콜베르였다. 그는 정부 기구의 능률을 높였으며 잉여 생산에도 성공했다. 콜베르는 중상주의의 신봉자로서, 수입에 의존하는 물품을 자체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나 그의 시대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종교 문제에 있어 루이 14세는 관용은 불필요하며 여러 교파가 관용될 경우 국가의 통일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믿었다. 그는 1685년에 낭트 칙령을 철폐했다. 루이는 강력한 외교정책을 추구했다. 30년전쟁으로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1648)의 일부인 뮌스터 화약에서의 중요 과제 중의 하나는 프랑스의 북동 국경지대에 있는 메스·투르 및 베르됭 주교 관구의 귀속 문제였는데, 루이는 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1689~97)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4)에서 합스부르크 왕실이 노린 목표의 하나는 바로 이 3개의 주교 관구와, 루이가 네덜란드 전쟁(1672~78) 끝에 네이메헨 조약으로 획득한 프랑슈콩테의 회복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알자스의 보유는 물론 여기에 로렌 지방까지 추가할 생각이었으며, 1681년에는 스트라스부르를 획득했다.

 

왕위계승자가 없던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가 그의 전영토와 왕위를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백 필리프에게 물려주고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장기간에 걸친 전투는 위트레흐트 조약(1713)으로 끝을 맺었다. 루이는 그의 치세를 통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영토를 보전하고 손자 필리프를 스페인 왕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으나 신대륙의 많은 식민지를 영국에 양도했다. 루이 14세 시대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절정기로서, 프랑스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고 동부 국경지대에서 중요한 영토를 획득하기도 했으나, 식민지의 일부를 상실하고 많은 국력을 소모하기도 했다.

 

18세기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전(前)근대시대의 종말을 상징한다.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과 1776년의 미국 독립혁명은 이러한 변화의 전주곡이었으나, 개인주의와 합리성을 인간의 주된 관심사로 만든 것은 프랑스 혁명이었다. 1789년 이전의 프랑스, 즉 앙시앵 레짐(구체제)하의 프랑스에서는 모두가 국왕의 신하였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여러 종류의 결사나 집단들이 각종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법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계승되는 것이며, 국왕은 스스로를 봉건적 수장인 동시에 성직자와 같은 기능을 가진 그리스도교적 군주라고 생각했다. 한편 경제적·문화적 발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1789년에 발생한 정치적 봉기를 원하게 되었다.

 

18세기 프랑스에는 풍요 속에 곤궁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 프랑스 농민의 1/3은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그 반면에 산업의 생산고는 급속하게 증가하고 상업, 특히 식민지와의 교역은 번성했다. 프랑스의 수많은 도시들, 특히 대서양 연안의 항구도시들은 이러한 식민지와의 교역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이러한 도시에서 계몽사상이라는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루이 15세와 루이 16세의 계몽된 신하들은 정부나 사법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굳히고 있었다. 종교적 불관용과 사법상의 과오가 몽테스키외, 디드로, 그리고 특히 볼테르에 의해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루소(1712~78)의 영향도 매우 컸다. 인간은 타락한 피조물로서 사회적·정치적 공공제도를 순화하고 개혁함으로써 구제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당대인들을 크게 고무했다. 1789년에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프랑스인은 전인구의 1/3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적 변혁은 어느 정도 한정된 것이었으나, 직접 이 변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그것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의 정치가들은 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프랑스의 식민지 제국을 확장하며, 영국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의 독립전쟁(1775~83)중 프랑스는 해상권 유지에 힘을 집중시켰고, 그결과 영국의 진출을 억제하고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전쟁 개입은 소요 비용으로 문제가 되었다. 국왕은 한없이 불어나는 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서 지배층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무조건적인 지원에는 반대했다. 그리하여 1789년의 왕정의 붕괴에는 재정문제가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고등법원은 보수적인 저항의 강력한 보루였다. 파리 고등법원은 왕의 재정개혁을 공격한 탓으로 1771년 해산되었는데, 루이 16세는 즉위초에 이를 소환했다. 1774년말 루이 16세는 튀르고(1712~81)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정부 지출을 삭감하고 징세방법을 변경하려 했다. 1776년 파리 고등법원은 이에 관련된 칙령들의 등록을 거부하고 튀르고는 해임되었다. 미국 독립전쟁에의 개입으로 국가의 부채는 배로 증가했다. 튀르고의 뒤를 이은 네케르는 공채모집에 성공했으나 재정의 고갈 상태로 미루어 조만간 국민에게 호소하는 길밖에 없어 보였다. 네케르를 계승한 칼론(1734~1802)은 차용으로 필요한 기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는 대귀족, 주교, 고등법원 법관들, 즉 특권 신분을 대표하는 명사회를 소집했는데, 명사회는 오랫 동안 저항을 받아온 국가의 변혁 시도를 지원하기를 거부했다. 칼론의 뒤를 이은 로메니 드 브리엔은 1787년 5월 명사회를 해산하고, 8월에는 파리 고등법원을 추방했으나 고등법원은 1788년 5월에 파리로 되돌아왔다. 이리하여 완전히 속수무책이 된 국왕은 결국 1788년 8월 삼부회의 소집에 동의했다.

 

앙시앵 레짐의 붕괴

 

1789년 혁명의 발생

 

1789년 삼부회를 열겠다는 루이 16세의 결정은 프랑스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문제는 삼부회의 운영 방식이었다. 과거처럼 신분별로 투표할 것인지 아니면 합동으로, 즉 머릿수로 투표할 것인지의 여부가 문제였다. 제1·2신분은 신분별 투표를 원했으나 대표수가 배가된 제3신분은 머릿수 투표를 주장했다. 1789년 5월 삼부회가 베르사유에서 개회되었을 때 귀족 대표는 성직자 대표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회의를 구성했으나 제3신분은 이를 거부했다. 그 대신 제3신분은 6월 17일 국민의회를 선언하고 다른 두 신분의 합류를 유도했다. 1주일 후에 150명의 성직자 대표가 합류했으나 귀족 대표는 이를 불법이라 항의했다.

 

왕이 제3신분의 회의실을 폐쇄하자 그들은 6월 21일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회합을 계속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했다(테니스코트의 서약). 6월 23일 왕은 부분적인 양보와 더불어 회의는 신분별로 행할 것을 명령했으나 제3신분은 이를 거부했다. 이러한 완강한 도전에 기력을 잃은 왕은 며칠 후 귀족 대표에게 국민 의회에 합류할 것을 지시했다. 이리하여 제3신분은 성직자 및 귀족의 동조자와 더불어 위로부터의 비폭력적인 혁명을 수행했다. 국민 주권을 신봉한 제3신분 대표들은 국민의 대표로서 그들만이 주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1789년의 법률혁명이었다. 그러나 왕의 양보는 개혁을 원하는 애국파를 억압할 병력을 규합할 때까지의 전략적인 후퇴에 지나지 않았다. 7월 11일 왕이 인망있는 네케르를 해임하자 파리 시민은 이것을 반(反)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파리 시민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궐기했다. 7월 13일 파리 시민은 무기를 구하기 위해 무기상을 수색하고, 다음날 바스티유를 포위했다. 수비대는 항복하고 민중은 수명의 병사를 살해했다. 7월 14일의 파리 민중봉기는 국민의회를 해산의 위기에서 구출하고 혁명의 진로를 보다 더 적극적이고 민중적이며 폭력적인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한편 농민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7월에 농민들은 귀족의 성을 습격하고 봉건적 의무를 기록한 문서들을 불살랐다. 이러한 농민반란은 '대공포'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체제

 

8월 4일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다. 이 8월 4일 법령은 낡은 특권을 일소함으로써 국민의회로 하여금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수 있게 했다. 국민의회는 8월 27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선포했다. 이 '인권선언'은 혁명의 기본 원리와 미래의 지표를 천명한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앙시앵 레짐의 사망 증서이기도 했다. 인권선언에 표명된 자연권사상은 혁명이 역사나 전통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 이성에 입각하여 사회를 새롭게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1789~91년 국민의회는 제한군주정의 헌법을 제정했는데, 권력분립의 원칙을 채택했으며, 국왕에게 장관 임명과 해임권이 주어졌으나 주권은 입법의회에 귀속시켰다. 선거권은 최소한의 직접세를 납부하는 '능동 시민'에게 한정되고, 관직과 의원의 피선권에는 재산 자격이 설정되었다. 지방 정부와 행정에 관한 국민의회의 개혁은 혁명의 가장 지속적인 유산 중 하나였다. 과거의 역사적인 지방 행정구역의 정치적 특성을 무시하고 의회는 전국을 83개의 도로 구분하고, 도는 다시 군과 읍, 그리고 촌락과 도시를 다 같이 지칭하는 코뮌(자치체)으로 구분했다. 혁명은 또한 낡은 사법제도를 보다 더 간편하고 편리하게 개혁했다. 국민의회는 절대왕정 붕괴의 요인이었던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고, 그 토지 재산을 매각함으로써 국가의 부채를 상환했다.

 

불화의 씨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은 이로부터 소외되거나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일부 왕족이 나라를 떠나 최초의 망명자가 되었을 때부터 이미 반혁명파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혁명의 중요한 고비마다 새로운 망명의 물결이 일어났다. 프랑스 사회를 가장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혁명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킨 것은 종교정책이었다. 의회는 주교관구의 수를 줄이고 그 경계선을 새로운 도의 그것과 일치시키는 한편, 교구 경계선은 지방 행정당국에 맡겼다. '성직자 민사기본법'(1790. 7)에 따라 주교는 도 의회에서 선출되고 교구 사제는 군 선거인에 의해 선출하게 되었다. 교황청은 이러한 조치를 배격했는데, 의회는 1790년 11월 모든 현역 성직자들에게 복종의 선서를 요구했다. 그러나 7명의 주교와 교구 사제의 54%만이 이에 응했다. 그결과 성직자는 '선서' 사제와 '비선서' 사제의 두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한편 자유언론과 정치적 클럽의 현저한 발전은 여론의 배출구를 마련했다. 이미 베르사유에서 애국파 대표들은 브르타뉴 출신의 뛰어난 제3신분 대표들을 중심으로 결합하기 시작했는데, 이 브르타뉴 클럽은 곧 자코뱅 클럽으로 알려지게 되고 1791년 중반에는 로베스피에르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자코뱅 클럽은 보다 더 전투적인 좌파인 코르들리에 클럽의 압력을 받았다. 1791년 6월 21일 국왕과 그 가족은 국외로 도망가려다 바렌에서 발각되어 파리로 되돌아왔다. 이 사건은 혁명의 일대 위기를 조성했다. 의회 내의 온건파는 왕의 명백한 반역 행위에 애써 눈을 감으려고 했으나, 자코뱅과 코르들리에 클럽은 루이가 왕좌를 유지하는 데 반대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7월 17일의 민중 시위는 폭동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의회를 지배하던 온건파는 이를 묵살하고 1791년 헌법을 완성시켰으며, 1791년 9월의 마지막 날에 국민의회(제헌의회)를 해산했다.

 

10월에 새로 선출된 입법의회가 개최되고, 1792년 4월에 프랑스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및 망명자들의 연합세력과 전쟁을 시작했다. 연합군이 프랑스 영토 내로 침입하고 입법의회는 의용병을 모집했다. 프로이센군 사령관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은 파리로 진격하면서 국왕에 반대하는 행위에 대해 위협적인 경고를 했다. 이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은 파리 시민으로 하여금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게 했다. 1792년 8월 10일 무장한 파리 민중이 왕국을 습격하고, 앞서 파리의 혁명정부인 파리 코뮌의 왕권 정지 통고를 묵살했던 입법의회도 할 수 없이 왕권을 정지했다. 그날 밤 의원의 절반 이상이 파리를 탈출했으며, 남은 의원들이 성년 남자의 보통선거로 새로운 공화국 헌법을 기초할 국민공회의 선출을 결의했다(→ 참정권). 제2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프랑스 제1공화국

 

제2의 혁명

 

프로이센군이 파리로 진격하고 있을 때, 수도는 반혁명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파리의 민중은 반역자들이 감옥의 문을 열고 광신자와 도적들을 석방할 것을 두려워하여 감옥에 들어가 약식재판을 거쳐 죄수들을 처형했다(→ 9월학살). 9월 20일 프랑스군은 발미에서 침입자들을 격퇴하고, 11월에는 제마프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를 장악했다. 발미 승리의 다음날인 9월 21일에 개회한 국민공회의 첫 주요과업은 폐위된 왕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었다. 국민공회는 만장일치로 루이의 유죄를 인정했으나, 형벌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라졌다. 공회는 사형 선고를 가결하고, 집행 연기 동의안과 국민투표에 회부하자는 안은 모두 부결되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시민 카페'로서 1793년 1월 21일 처형되었다. 1793년 봄 공화국은 포위되었다. 연합군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라인란트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피레네 산맥을 돌파했다. 인플레이션, 물자 부족, 매점 등으로 도시 민중의 생활은 견디기 어려웠고 공화국 군대에 대한 물자보급도 어려웠다. 급진적인 파리 민중은 결정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파리의 선거인단은 로베스피에르·마라·당통을 비롯해 파리 코뮌과 자코뱅 클럽의 쟁쟁한 투사들을 공회에 선출했다. 이들 파리 출신의 대표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지방 대표들은 공회 내 위쪽 의석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산악당으로 불렸다. 브리소파는 파리에서는 선출되지 않았으나 특히 지롱드 지방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지롱드파로 불렸다. 산악당은 퀼로트를 입지 않고 긴 바지를 입었다고 해서 상퀼로트로 불리는 파리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경제·군사·정치 문제에 있어 대담하고 급진적이었다. 이에 반하여 지롱드파는 파리의 민중적 혁명투사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존중했으며 극단적인 혁명적 조치를 반대했다. 이 양파의 중간에서 조정 역할을 한 대표들은 '평원파'(平原派)라고 불렸다. 국민공회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정치범을 재판하기 위한 혁명재판소, 반혁명 분자를 색출하기 위한 지방의 감찰위원회, 혁명 수호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공안위원회를 설치했다. 1793년 5월경에는 대세가 산악당으로 기울어졌다. 6월에 29명의 지롱드파 대표가 숙청되고, 후에 이에 반대한 120명의 대표들이 공회에서 추방되었으며, 10월에는 혁명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지롱드파의 지도자급 대표들이 처형되었다.

 

공포정치

 

국민공회는 혁명의 적에 대한 공포정치의 필요성을 선포하고 경제적 범죄를 주요범죄로 규정하는 동시에, 최고가격제로 물가와 임금을 통제했다. 반혁명자 법은 지방의 혁명위원회에 체포권을 부여하고 준(準)군대인 '혁명군'이 이러한 포고령의 준수 여부를 감시했다. 국민공회는 혁명력 '서리의 달' 14일(1793. 12)의 법으로 공안위원회를 정점으로 한 의회의 독재권을 확립함으로써 혁명정부를 강화했다. 자코뱅 독재는 정부의 능률을 증진시키고 국가 자원의 동원을 촉진시켰다. 공안위원회는 공회가 파견한 지방 순찰 대표에 의한 것이라도 극단적인 행동과 자의적인 조치에는 반대하고, 교회를 파괴하거나 폐쇄하고 성직자를 위협하는 등 1793년 가을에 발생했던 비(非)그리스도교화 운동을 저지하려고 했다. 공안위원회는 또한 몇 개월 후에 파리 지구회의의 과격한 행동을 억제하고 '혁명군'을 해산하는 동시에 파리 코뮌을 숙청했다. 공식적 정책을 벗어난 과격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혁명력 2년 '목월'(牧月) 22일(1794. 7. 10)의 악명 높은 법은 피고로부터 자기 변호의 권리를 박탈하고, 선고는 석방 또는 사형으로 제한했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공화국에 대한 내외의 위협이 사라진 때에 강화되었다. '열월'(熱月) 8일 로베스피에르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일단의 대표들을 '자유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는 반역자라고 규탄했다. 공회 내의 온건파, 자코뱅의 실용주의자, 적대적인 대표 및 극단주의자들이 합세하여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을 타도하려 했다. 열월(테르미도르) 9일(1794. 7. 27) 공회는 로베스피에르의 체포를 명했고, 다음날 그는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테르미도르 반동). 1793년 8월 공회는 국민총동원령을 공포하여 18~25세의 건전한 미혼 남자를 전원 소집하여 1년 이내에 약 75만 명을 무장시켰다. 군대의 규율하에서 공화국 군대는 민주적 관행의 모범이 되었다.

 

국민공회의 개혁

 

국민공회는 모든 봉건적 공납을 무상으로 폐지하고, 식민지에서의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누진세 제도를 도입하고 소비자를 위한 경제 통제를 실시했다. 1793~94년에 공회는 전국적인 복지정책을 채택하고 초등 교육의 의무제도를 도입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은 권력쟁탈전을 일으켰으며, 반(反)자코뱅적이고 반왕당파인 테르미도르파는 중도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들이 제정한 1795년(혁명력 3년)의 헌법은 납세를 토대로 한 제한선거와 양원제, 그리고 입법부가 선출하는 5명의 총재로 구성되는 자유 공화국을 건설했다(→ 테르미도르 반동).

 

총재 정부

 

1795년 10월에 출범한 총재정부는 1797년의 선거에서 왕당파가 우세를 보이자 프뤽티도르(열매의 달) 쿠데타로 이를 제압했다(1797. 9). 총재정부는 '자매 공화국'의 창설로 혁명을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원정은 예상밖의 성공을 거두고, 오스트리아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조인했다(1797. 10). 대륙에서의 영국군의 근거지인 네덜란드에 대한 공격도 대성공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보호하에 토착 혁명가들은 북부 이탈리아에 치살피나 공화국을, 그리고 네덜란드에 바타비아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이러한 자매 공화국의 건설은 계속되었다.

 

1797년의 쿠데타 후 총재정부는 혁명력을 부활시켰다. 1793년에 제정된 혁명력은 종래의 일요일을 없애고 10일을 1주일로 삼았으며, 달의 이름은 기후와 계절의 특징에서 따왔다(혁명력은 1806년에 폐지됨). 1798년에 제정된 미혼 남자 20~25세의 징집령은 강한 반발과 이탈을 낳았으며, 전세 또한 불리했다. 이러한 위기에 당면하여 입법부는 4명의 총재를 축출했다(프레리알의 쿠데타, 1799. 6). 이러한 정세는 총재정부에 불만을 품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며, 그들은 1789년의 기본적인 개혁과 재산권을 보장해줄 정치구조를 원했다. 그리하여 헌법을 폐기할 의회 주도의 쿠데타를 준비했으며 군대의 힘을 빌리기 위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추대했다. 혁명력 8년 브뤼메르(안개의 달) 18일(1799. 11. 9) 보나파르트는 의회에서 취지를 설명하고 반대자를 군대의 힘으로 눌러 새로운 체제의 지배자가 되었다(→ 브뤼메르 쿠데타).

 

나폴레옹 시대

 

통령정부

 

1812년의 유럽
브뤼메르 쿠데타의 주동자인 '수정주의자들'은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1789년의 성과를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엘리트 정부를 수립할 생각이었으며, 그결과 탄생한 것이 통령정부였다. 혁명력 8년의 헌법은 국민투표의 찬성을 거쳐 행정수반으로 3명의 통령을 두기로 했는데, 실권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이 장악했다. 1802년에는 다시 국민투표를 거쳐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이 되고, 1804년 봄 그는 황제를 선언했으며 혁명력 12년의 헌법으로 제국을 건설했다. 혁명의 기본적인 정치적 원칙인 대의제와 입법부의 우위가 통령정부에 의하여 부인되고, 양원제 입법부는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동시에 법률 발의권마저 행정부로 넘어갔다. 통령정부는 선거제를 없애지 않았으나 유권자는 정부가 마련한 후보자 명단에 투표할 따름이었다. 사법관 선거의 폐지와 함께 1800년에는 지방관리의 선거가 폐지되고 도지사는 통령정부가 임명하게 되었다. 1802년 교황과의 화약이 성립되어 로마 가톨릭 교회가 부활되었고, 비선서 성직자는 복권되었으며 가톨릭의 우위가 인정되었다. 나폴레옹은 구귀족 대신 재능에 기반을 둔 새로운 귀족을 창설하고, 1808년에는 새로운 작위 체계를 마련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법전은 시민적 평등, 법적 평등, 봉건제의 폐지와 근대적인 계약적 재산 형태, 정교 분리 등 1789년의 원리 중 일부를 수용했다.

 

정복전쟁

 

이탈리아 원정(1797)과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의 해체 후 나폴레옹은 영국을 공격할 목적으로 이집트 원정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영국 해군의 봉쇄망을 뚫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나폴레옹 전쟁). 브뤼메르 쿠데타 때 프랑스군은 이탈리아에서 축출되었으나 나폴레옹은 북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마렝고 전투에서 격파하고(1800)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뤼네빌 조약에 조인하게 했다. 1802년 프랑스와 영국은 아미앵 조약으로 관계를 강화했으나 2년 후에 전쟁이 재개되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는 트라팔가 해전(1805. 10)에서 영국 해군에 크게 패했으나 대륙의 지상전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울므의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1805. 12). 그결과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베네치아와 티롤을 양도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를 인정했다. 프로이센은 1806년 10월의 예나 전투와 아우어슈타트에서 패하여 베를린이 점령되었고 프랑스에 배상금을 물었으며 북부 독일이 프랑스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러시아와의 전투는 아일라우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1807. 2) 프리틀란트 전투(1807. 6)에서는 승리했다. 틸지트 조약에서 나폴레옹은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 러시아를 지원할 것을 다짐하고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영국에 대항해 프랑스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토스카나·피에몬트·제노바·라인란트를 병합한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왕국, 스페인 왕국, 바르샤바 대공국을 그의 일족과 동맹자의 지배하에 두었다. 나폴레옹은 또한 북부 및 남부 독일의 동맹국들을 연결하기 위해 라인 연방을 창설하고 1810년에 오스트리아의 왕녀인 마리 루이즈와 결혼함으로써 오스트리아마저 그의 세력하에 놓이는 듯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의 경제와 상업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대륙봉쇄체제). 1806년 11월 베를린 칙령으로 프랑스의 세력하에 있는 모든 국가의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했다. 대륙 봉쇄는 영국 경제에 타격을 가했으나 허점이 많았다. 1811년 러시아가 대륙 봉쇄에서 이탈했으며,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공격했다. 나폴레옹의 '대군'(大軍)은 모스크바에 도달했으나 러시아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부터의 철수할 당시 군대의 2/3가 상실되었고 러시아의 혹한 속에서의 후퇴로 나머지 병사들의 대부분이 죽었다. 1813년 10월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의 국민해방전쟁에서 패하고 얼마 후 파리가 함락되었다. 그는 1814년 4월 퇴위당해 엘바 섬에 유배되었다. 프랑스의 국경선은 1792년의 상태로 축소되고 부르봉 왕실이 되돌아왔다.

 

나폴레옹과 혁명

 

나폴레옹은 혁명의 유산 중 무엇보다도 '봉건제', 즉 영주제와 법적 특권, 그리고 지방자치 폐지에 충실했으며, 시민적 평등과 기회 균등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혁명을 종식시켰으나 선거제와 당파정치를 억제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1815년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로 즉위하고 입헌적인 통치를 수락했다. 그러나 1815년 3월에 나폴레옹은 엘바를 탈출하여 파리로 귀환하고 6월까지 다시 프랑스를 통치했다(백일천하). 그러나 워털루 전투(1815. 6. 18)에서 영국과 프로이센군에게 패한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1821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왕정복고와 입헌군주정

 

루이 18세(1815~24)는 혁명으로 야기된 변화는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앙시앵 레짐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과격 왕당파 사이에서 양자의 조정에 노력했다. 그의 동생 샤를 10세(1824~30)는 부활한 가톨릭 교회의 옹호를 받아 왕권신수설의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1830년 왕은 의회를 해산하고 7월에 새로운 선거를 실시할 것을 명명했다. 선거 결과 반대세력이 승리하자 샤를은 새로이 선출된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권을 더욱 제한했으며, 출판의 자유를 억압했다. 이러한 조치들을 담은 7월 칙령이 26일에 공포되자 혁명이 발생하고 '영광의 3일'(7. 27~29)에 걸친 시가전이 벌어졌다. 7월 30일 왕은 악명 높은 총리 폴리냐크 공을 파면하고 7월 칙령을 폐기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샤를 10세는 퇴위하고, 8월 9일 의회는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를 입헌군주로 선포했다(→ 7월혁명).

 

새로운 체제는 7월 왕정 또는 부르주아 왕정으로 불린다. 왕권신수설 대신 국민주권의 원리가 확립되고, 사회의 중심은 지주 귀족으로부터 부르주아지로 이동했다. 1814년 헌법이 개정되어 선거권이 확대되었다.

 

제2공화국과 제2제정

 

2월혁명

 

보수적인 7월 왕정 반대 세력의 지도자들은 1847년초 자유주의적인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공개적인 정치집회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연회'라는 편법으로 불만세력의 동원을 꾀했으며,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 대대적인 연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민중은 경찰과 충돌하고 24일에는 왕궁을 위협했다. 이에 루이 필리프는 퇴위하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시청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성년 남자의 보통선거제와 노동권을 선언하는 동시에 실업자의 구제기관인 국립 작업장을 설립했다. 4월 23일의 선거에서 온건파와 보수세력이 압승하자 새로 선출된 의회는 국립 작업장을 폐쇄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이 6월폭동(6. 23~26)을 일으켜 완강하게 저항했다. 의회는 카베냐크 장군으로 하여금 폭동을 진압하게 하고 보통선거제로 선출되는 대통령과 단원제 의회를 규정한 헌법을 제정했다. 12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나폴레옹의 조카로서 영국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압도적 다수표로 당선되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왕당파가 우세한 의회와의 충돌을 회피했으나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개정을 희망했다. 1851년 의회의 다수가 이를 거부할 것이 확실해지자 그에게는 1852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거나 쿠데타를 감행하는 길밖에 없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후자를 택했다. 1851년 12월 2일 지도적인 정치가들이 체포되고 새로운 헌법 초안이 국민에게 제시되었다. 이 헌법은 국민투표로 가결되고 1852년 12월에 보나파르트는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 3세라 칭했다.

 

제2제정

 

1852~59년의 정책은 보수적이었고 사회안정의 확보가 개혁에 우선했다. 이 기간중 가장 주목할 업적은 경제성장과 외교정책이었다. 즉 산업생산이 배로 늘고 대외무역은 3배로 증가했다. 그리고 1856년에 끝난 크림 전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협약이 부활했다. 1859년 이후 나폴레옹 3세는 일부 측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국의 자유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경제는 침체하고 거듭되는 대외정책의 실패로 체제가 동요했다. 1860년대 중반부터 비스마르크의 영도하에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 프로이센이 위협을 가해왔다. 프로이센이 덴마크(1864)와 오스트리아(1866)에 승리한 결과 유럽의 세력균형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다. 1870년 7월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로 발생한 위기를 잘 처리하지 못하고 이어 비스마르크의 계략에 빠져, 프랑스는 7월 19일 프로이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독일 전쟁). 그후에 발생한 군사적 참패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스당에서 프로이센은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 나폴레옹은 포로가 되었다(→ 스당전투). 9월 4일 이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민중은 공화국의 선포를 요구하고 제국 관리들은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않았다.

 

제3공화국

 

국가 방위를 위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이 조인되면서 정식 강화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가진 의회를 빠른 시일 내에 선출해야 했다. 2월 13일 보르도에서 개회한 새로운 의회는 나폴레옹 외교정책의 비판자였던 오를레앙파의 아돌프 티에르를 공화국의 행정수반으로 선택했다. 3월 1일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이 비준되었는데, 프랑스는 동부 프랑스의 독일군 주둔비와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고, 알자스와 로렌의 절반을 독일에 양도하게 되었다(제1차 세계대전 종결 때 이 지방들은 프랑스에 반환되었음). 강화조약이 체결된 며칠 후에 의회는 파리 코뮌의 반란에 직면했다. 3월 18일 티에르는 군대를 파견하여 국민방위군을 무장해제하려 했으나 유혈충돌이 발생하고 폭력사태가 확산되었다. 정부군은 서서히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 민중은 독일과의 강화에 반대하여 평의회를 선출하여 파리 코뮌을 설립했는데, 거기에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5월 21일 티에르의 정부군은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이로부터 '피의 일주일'(5. 21~28) 동안 코뮌 투사들은 항전을 계속했으나, 결국 2만 명이 전사하거나 처형되고 수천 명의 생존자들은 유배되거나 망명했다.

 

티에르는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했으나, 그의 지지세력이었던 왕당파를 떠나 공화주의자에 동조하자 왕당파는 그를 해임하고(1873. 5) 군사령관인 마크마옹 원수를 내세웠다. 1875년 의회는 일련의 기본법을 채택하여 제3공화국 헌법을 마련했는데 이 헌법은 양원제 의회와 국무회의, 그리고 대통령직을 규정했다. 1880년대에 공화주의자는 급진파와 기회주의자로 나누어졌다. 좌파인 급진주의자들은 중앙집권, 반(反) 교회주의, 대외정책에서의 민족주의, 헌법개정, 그리고 사회개혁을 내세웠다. 이에 반하여 기회주의자들은 현체제의 유지와 시민의 사생활에 대한 정부간섭의 제한을 목표로 삼았다. 이 시기에 정부를 운영한 것은 기회주의자들이었으며 레옹 강베타는 그들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

 

1880~85년 총리직과 다른 각료직을 맡았던 쥘 페리는 의무교육제의 실시와 식민지 제국 건설에 공헌했다. 1885년에 연립내각의 국방장관이 된 불랑제 장군은 곧 공화제를 크게 위협하는 민중운동의 지도자로 나섰다. 그의 목표는 1889년의 의회선거에서 승리해 독재권을 장악하는 것이었으나 선거 직전에 브뤼셀로 도망감으로써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결과 기회주의자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당시 새로 일어나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은 공화국 지도자들의 정직성에 대한 회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1893년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의석을 얻고, 사회주의는 도시노동자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1900년경에는 많은 사회주의 정당들이 쥘 게드와 장 조레스의 두 당으로 결집되었고 1905년에 양당은 합당하여 통합사회당(SFIO:지금의 사회당 전신)이 탄생했다. 1890년대에 제3공화국은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최대의 정치적·도덕적 위기를 맞았다. 유대인 출신의 드레퓌스 대위는 1894년 독일에게 군사 기밀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후에도 군사 기밀이 계속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 누설되었고 또다른 장교 에스테라지 소령이 혐의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군부는 드레퓌스의 재심을 거부했다. 한편 언론과 일부 정치가, 그리고 좌파 지식인들이 드레퓌스 옹호에 나섰고, 우파 정치가와 가톨릭 주간지들이 군부를 옹호했다. 1898년에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군대 문서의 일부가 위조된 사실이 드러났고 1899년의 군법회의는 드레퓌스의 형을 감형했으나 여전히 유죄를 선고했다. 그후 드레퓌스는 대통령의 사면을 받고 1906년의 민사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은 프랑스의 정치와 지적 생활에 큰 상처를 남겼다. 1899년부터 제3공화국 말기까지 프랑스의 정치생활의 중심이 된 것은 급진사회당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군부와 교회는 다 같이 큰 타격을 받았고 1905년에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1871년 이후 약 20년간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으나 1891년에 러시아와 느슨한 협약을 맺었는데, 1894년 이 협약은 군사동맹으로 발전했다. 1890년대에는 영국과의 대립이 중요한 외교 문제였지만 1904년에 프랑스는 독일에 위협을 느낀 영국과 협상을 맺고 양국간의 중요한 식민지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했다. 1899~1905년 좌파와 중앙정당의 연합인 공화파 블록이 형성되어 프랑스 정부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우익 소수파는 급진적인 공화파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악시옹 프랑세즈'의 깃발 아래 모였다. 이 조직은 드레퓌스의 새로운 재판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1914년 무렵에는 아직 작은 운동에 불과했으나 공화국의 유력한 적이 되었다. 이에 못지 않게 심각했던 것은 대다수 노동자 계급의 소외였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새로이 탄생한 통합사회당에 투표하고 있었으나 사회당은 그들의 대표들이 부르주아 내각에 참여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결과 내각의 안전성을 보장해주고 있던 좌익연합이 깨어졌다. 급진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공화파 블록에서 철수하자(1905) 다른 중앙 정당들과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1906년 급진주의자인 조르주 클레망소가 총리가 되었다. 1907년 그의 정부는 영국과 러시아에 접근하여 3국협상을 성립시켰다. 클레망소의 후계자들은 화해정책을 채택했고, 특히 조제프 카요 내각이 모로코 문제에 관하여 독일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자 프랑스의 애국자들은 분노했다. 1912년 카요 대신 독일에 대한 강경론자인 레몽 푸앵카레가 총리가 되었고 다음해에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 5주간의 협상 끝에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새로이 구성된 거국내각(신성연합)은 조제프 조프르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독일군은 벨기에를 통하여 공격하면서 파리를 포위할 기세를 보였으나 프랑스군은 이를 저지했다. 그후 양군은 참호전에 들어가 대체로 1918년까지 서로 대치했다. 1916년 독일군은 베르됭 주변의 프랑스 요새를 2~6월에 공격했고, 쌍방에 25만 명의 희생자가 났다. 베르됭 방위의 영웅은 필리프 페탱 장군이었다.

 

1916년 조프르 대신 로베르 니벨 장군이, 1917년에는 다시 니벨 대신 페탱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정부 쪽에서도 푸앵카레 대통령은 재차 클레망소를 총리에 임명하고, 클레망소는 전쟁을 종결시킬 결의를 표명했다. 1918년 3월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마지막 대공세를 취했을 때 클레망소는 페탱을 페리낭 포슈와 교체하고 영국을 설득해 그를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임명했다. 독일의 대공세는 저지되고, 11월 11일 휴전조약이 조인되었다. 191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클레망소는 독일의 공격에 대한 프랑스의 안전보장의 확보가 그의 목표라고 선언했다. 가을에 베르사유 조약이 비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1920년대의 최대 관심사는 국가의 안전보장과 전비 및 재건에 관한 재정문제였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게 배상금 지불을 규정하고 있었으나 독일은 그 의무를 거듭 이행하지 않았다. 1923년 당시 총리였던 푸앵카레는 프랑스 군대와 기술자를 루르 강 유역에 진주시켜 독일로 하여금 배상금을 물게 하거나 직접 징수하려 했다. 독일은 1924년에 개정된 도스안에 동의하고 이에 따라 프랑스의 루르 점령군도 철수했다. 1924년 푸앵카레가 영도하는 우익의 '국민 블록'이 '좌파연합'에 패했다. 1924~26년에 좌파 연합은 재정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푸앵카레가 복귀했다. 푸앵카레 내각의 외무장관이었던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유화'정책으로 평화를 추구했다. 로카르노 협약(1925)으로 독일은 현존하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선을 무력으로 변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배상금에 관한 새로운 수정안이 1929년에 성립되어(영 안) 독일은 부담이 훨씬 가벼워졌고, 1930년 프랑스는 라인란트의 점령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공황이 유럽 전역에 파급되었으며, 1931년에는 프랑스도 그 와중에 휩쓸렸다. 독일 나치의 흥기는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프랑스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우익 세력의 선동이 있었으나 좌익의 행동 통일로 저지되었다. 1935년에는 '인민전선'이 형성되었고, 이듬해의 선거에서 승리하여 레옹 블륌이 총리가 되었으나 1937년에 그의 내각이 붕괴 되었다.

 

1935년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1936년 3월 히틀러의 라인란트 진주는 프랑스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1938년 3월에는 히틀러의 군대가 오스트리아로 진주하여 새로운 위기가 조성되었다. 다음해 3월에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송두리째 병합했는데 그의 진격을 저지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1939년 4~8월에 프랑스와 영국은 소련을 대(對) 히틀러 공동전선에 합류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소련은 오히려 히틀러와 협약을 맺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지 이틀 뒤인 9월 3일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대하여 내키지 않는 선전포고를 했다. 폴란드를 함락한 후 히틀러가 제안한 강화는 서방의 연합국에 의해 거절되었다. 1940년 5월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거쳐 진격하여 스당 근처의 프랑스 방위선을 돌파했다. 6월 10일 독일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프랑스 정부는 투르로 떠나고 파리를 무방비 도시로 선언했다. 페탱 내각이 조직되고 6월 22일에 휴전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의 형식적인 주권은 인정되었으나 국토는 독일군의 점령지역과 비점령지역으로 분할되고 프랑스는 독일군의 점령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다.

 

1940년 이후의 프랑스

 

제2차 세계대전중의 프랑스

 

1940년 6월 18일 샤를 드골 장군이 전투를 계속할 것을 프랑스 국민에게 호소했으나 국민의 대부분은 페탱에게 기대했다. 7월 9~10일에 비시에서 열린 의회는 제3공화국을 폐지하고 비시 프랑스를 수립했다. 1942년 11월 북아프리카가 미국군에게 항복하자 히틀러는 독일군에게 프랑스 전국토를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비시 프랑스는 오직 독일의 관용으로 그 생명을 유지할 뿐이었다. 비시 프랑스의 쇠퇴와 때를 같이하여 독일에 대항하는 지하운동이 일어났다. 1940년의 붕괴 후 수일 내에 프랑스인들은 집단저항을 시작했으며, 런던에 본부를 둔 드골은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 1943년말에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대표가 되었으며, 1944년 8월 25일 드디어 자유 프랑스의 기갑부대가 파리에 입성했다. 1944년 10월에 미국·영국·소련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은 드골의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제4공화국

 

제4공화국과 더불어 의회 민주주의가 부활했다. 1946년 1월 의회는 드골 대신 사회당의 펠릭스 구앵을 택했고 10월에 국민투표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다. 제4공화국의 구조는 제3공화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4공화국은 프랑스의 식민지 제국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일본의 패배와 더불어 남부 인도차이나의 지배권을 회복한 프랑스는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북부의 민족주의자들과 오랫동안 싸웠다. 1954년에 프랑스의 거점인 디엔비엔푸가 베트남인들에게 점령되자 관계국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어 전쟁은 종식되고 베트남은 임시로 남과 북의 독립국가로 나뉘었다. 1954년 10월 알제리 민족주의자들이 반기를 들었다. 1958년에는 프랑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 원정부대가 알제리에 파견되었다.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를 비롯한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민족주의의 흥기는 제4공화국을 붕괴시키고, 1958년 6월 의회는 드골에게 6개월 간 전권을 위임했다.

 

제5공화국

 

드골이 당면한 가장 긴급한 과제는 알제리 분쟁과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이었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디플레이션과 긴축정책으로 진정시키고, 알제리 문제는 자치권을 부여하는 타협책을 모색했으나 알제리의 민족주의자나 프랑스의 식민주의자를 다 같이 만족시키지 못했다. 1961년에는 알제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실패하고 테러가 횡행했다. 해결책이 강구된 끝에 1961년까지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프랑스 식민지는 독립을 달성했다.

 

1962년 조르주 퐁피두가 총리가 되자 정당 지도자들은 의회의 권한을 부활시키는 헌법 수정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와 반대로 드골은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헌법개정을 제안했고,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그의 제안이 통과되었다. 1965년 드골은 7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자 알제리를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고, 경제성장, 통화안정, 안정된 정부 운영에 노력했다. 그러나 1968년 5월에 위기가 발생했다. 5월 3일 파리 지구 대학생들의 소요가 다른 대학과 공장에 확산되었고, 5월말에는 급진파들이 공공연하게 제5공화국의 타도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드골은 필요하다면 군대를 동원해 소요를 진압하겠다고 선언하고, 그 자신만이 무정부 상태와 공산주의 지배에 대한 방어벽이라고 언명했다. 불안에 떨고 있던 시민들이 그를 지지했다. 드골은 의회를 해산하고 6월에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5월 위기의 여파는 심각했다. 정부는 불만이 깊고 광범위한 사실에 충격을 받고 항의 집단의 요구에 크게 양보했다. 서서히 정상 상태가 회복되었으나 드골이 받은 충격은 컸다. 그는 다시 국민투표에 의한 헌법 수정을 시도하고 그것이 부결되면 사임하겠다고 언명했다. 1969년 4월 27일에 헌법 수정안이 부결되자 그날 밤으로 드골은 집무실을 떠났다. 1970년 그는 사망했다.

 

드골 이후의 프랑스

 

1969년 6월 대통령에 선출된 퐁피두는 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채택했는데, 이는 좌익 세력에게 부활의 길을 열어주었다. 좌파 중도의 소정당 지도자였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1971년에 좌파의 작은 집단들을 사회당에 결합시키고 재생한 사회주의 세력의 영도자가 되었다. 1974년 퐁피두가 사망하자 기업가 중심의 보수적인 정당인 독립공화당의 후보자 지스카르 데스탱이 대통령에 선출되고 그는 자크 시라크를 총리에 임명했다. 1976년에 총리가 된 레몽 바르는 1973년의 세계적인 경제난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고 엄격한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한편 총리직에서 물러난 시라크는 드골주의자들을 설득하여 공화국연합(RPR)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었으며, 1977년에는 파리 시장에 선출되었다.

 

198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의 미테랑이 당선되고 뒤이어 실시된 의회선거에서도 사회당은 과반수를 훨씬 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결과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자들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동시에 장악했다. 사회당은 집권 첫해에 경제의 중요 부문을 국유화하고 행정권의 부분적인 지방 이양을 단행했다. 사회당 정부는 1973년 이래의 경제적 침체로부터 벗어나는 데 실패하자 더 과감한 긴축정책을 채택했다. 사회당 지지자들의 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이 높아가고 공산당 출신의 각료 4명이 내각을 떠났다. 극우의 장 마리 르 팽의 '국민전선'이 탄생했으며, 그의 이민 노동자 추방을 위한 선동적인 캠페인으로 국수주의가 대두했다. 1986년 사회당은 의회의 지배권을 잃었다. 미테랑의 임기는 아직 2년이 남아 있었으나 대통령과 의회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통치체계가 제대로 운영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미테랑은 이 모순을 최대 보수당인 '공화국연합'의 당수인 시라크를 총리에 임명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이 불안정한 협력관계를 유지한 2년간의 '동거'(코아비타시옹)시대가 시작되었다.

 

시라크는 사회당의 개혁 중 많은 것을 철회했으나 학생시위, 교통기관의 파업, 그리고 파리에서의 테러 발생 등으로 정부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시라크의 인기는 떨어지고 미테랑의 인기가 회복되었다. 198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은 시라크·지스카르·바르 등 주요 보수세력의 지도자들을 누르고 승리했으며, 미셸 로카르를 총리에 임명했다. 미테랑은 그의 개인적인 승리로 사회당이 지배하는 의회를 성립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1981년의 경우처럼 의회를 해산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이번에도 사회당과 그 연맹 세력들이 승리했으나 과반수에 약간 못 미치는 것이었다. 로카르는 소수파 내각을 조직하고 시라크가 폐지했던 많은 재산에 대한 '부유세'를 부활시켰으며, 최저수입보장법을 의회에 제출하는 동시에 직장 창출기금 설치를 제안했다. 외교정책에서는 드골 시대 말기 이래의 정책이 대체로 답습되었다. 그후 1993년 총선에서 우파가 대승을 거두자 미테랑은 우파의 발라뒤르를 총리에 임명하여 다시 좌파 대통령과 우파 내각의 동거체제가 발족되었다.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우파 '공화국연합'의 시라크가 사회당의 조스팽을 누르고 미테랑에 이어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프랑스의 역대 왕과 대통령도표를 참조하세요.

 

Macropaedia| 閔錫泓 참조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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