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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독일사

by 마리산인1324 2006. 12. 25.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B&i=127306&v=43

 

 

독일사 [獨逸史, Germany, history of]

 

 

독일사의 시작

 

독일이라는 국가 체제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 청동기시대부터 독일인은 스웨덴, 덴마크 반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지금의 독일땅 대부분을 켈트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BC 2세기경부터 게르만 부족이 북으로부터 남하하기 시작하여 켈트족을 압박하는 한편, BC 3세기경에는 갈리아를 차지한 로마인과 직접 접촉하고 있었다(→ 로마사). 이들은 다시 갈리아 지방을 위협하기도 했다.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라인 강을 넘어 게르만족 토벌을 단행했고(BC 55∼53) 네로 황제 치하에 로마군은 독일땅 깊숙이 침투하여 엘베 강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토이토부르거 발트 전투(AD 9)에서 게르만군에 대패함으로써 로마군의 진출은 저지되고 대부분의 독일지역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로마의 국경은 게르만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점차 도나우 강과 라인 강을 따라 구축되었다.

 

이 시대 게르만족은 여러 갈래로 분산된 채 농업에 의존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무장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고 선진 로마 문화와의 접촉으로 사회적·경제적으로 유력한 세력이 나타나면서 부족은 점차 통합되었다. 게르만족은 강력한 지휘자 밑에 군사력을 갖추고 3세기 후반부터 점차 쇠약해져가는 로마 영토 내에 깊숙이 침투하여 노략질을 거듭했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본격화한 것이 이른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다.

 

민족이동과 프랑크 왕국

 

게르만족은 본격적인 민족이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산발적으로 로마 영토에 침투하여 로마군의 용병으로 정착하거나 로마인과 교역하면서 상호 평화적으로 교류했다. 그러나 훈족의 압박으로 동고트족이 동쪽에서 이동한 것을 시작으로 거의 전 민족을 아우르는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서고트족은 남서갈리아에, 부르군트족은 남동갈리아에 각각 왕국을 건설했다(→ 부르고뉴). 그중 프랑크족은 클로비스에 의해서 통일되어 라인 강 상류와 중류, 마인 강 좌안에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이러한 민족이동의 와중에 서로마 제국은 476년 붕괴되었다.

 

이후 중요한 역사적 발전을 이루게 되는 프랑크족은 네덜란드 남부의 잘리어족과 중부 라인란트 중류지대의 리푸아리족을 결합한 부족연맹체이며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는 이를 기초로 세워졌다. 메로빙거 왕조의 창건자인 클로비스 왕은 다른 게르만족과는 달리 가톨릭교로 개종했고 교회의 도움으로 이교도를 교화한다는 명목으로 주변 부족을 정복하여 그 통치하에 종속시켰다. 독일 중부의 튀링겐족과 남부의 바이에른족 또한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 들어갔지만 북부의 프리지아족과 작센족은 그들 고유의 정치·사회조직을 유지하고 이교적인 교리에 의존하여 프랑크의 지배에 완강히 대항했다.

 

8세기 전반에 메로빙거 왕조는 피핀에 의해 카롤링거 왕조로 바뀌었다. 피핀은 아우스트라시아 출신으로서 민스 강에서 라인 강 중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와 귀족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왕국을 건설했다. 이 왕국은 작센을 제외한 라인 강 오른편의 여러 부족장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정치적 통합에 앞서 브리튼 출신의 보니파키우스의 정력적인 선교활동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왕 샤를마뉴 대제(800∼814, 피핀의 아들)는 작센족 토벌을 단행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장기간에 걸친 살육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작센족은 내부적 분열로 점차 프랑크의 지배에 복속되었다.

 

샤를마뉴의 끊임없는 정복전쟁으로 오늘날의 네덜란드·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대부분을 포괄하는 대제국이 형성되었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로마인을 계승하여 게르만인이 세운 제국이라는 역사적 성격을 지니며 앞으로 이 지역에 형성될 여러 국가에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러나 샤를마뉴 대제의 갑작스러운 죽음(814)으로 제국은 베르됭조약(843)에 의해 세 왕국으로 분할되고 샤를마뉴 대제의 손자 루트비히 2세(804∼876)가 오늘날 독일의 거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루트비히 2세의 오랜 통치는 독일인에게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9세기말 데인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동프랑크 왕국은 해체되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집권체제가 무너지기는 했으나 동프랑크 내의 5개의 중요 부족집단인 바이에른·프랑켄·슈바벤·로렌·작센 등의 지방세력은 교회에 의해 봉건적 주종관계로 결속되고 결집했으며 지방제후들은 거의 독립적인 지배자나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했다.

 

911∼1250년의 독일

 

독일(10~11세기)
동프랑크의 카롤링거 왕통이 단절되자 독일 내 부족장들은 프랑켄 부족장 콘라트 1세(911∼918 재위)를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선출된 왕이라는 정치적 조건 때문에 각 지방과 부족의 특권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지방분권주의는 이후 독일 역사의 구조적 특징이 되었다.

 

새로이 성립된 왕국은 동부의 마자르족을 비롯한 이민족의 위협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콘라트 1세의 뒤를 이어 작센의 하인리히 1세(919∼936 재위)가 다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안으로는 로트링겐(로렌)을 동프랑크의 영토로 삼아 국내의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마자르족을 토벌하여 외부의 위협을 중단시켰다.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 1세(936∼973 재위)는 독일 내의 모든 부족으로부터 차출된 기병군으로 955년 아우크스부르크 부근 레히펠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크게 무찔렀다. 이로써 독일이 동부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마자르족 대토벌은 서방에 있어서 오토 1세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는 962년 교황 요한네스 12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제관을 받았다.

 

작센 왕조 뒤에 성립된 잘리어와 슈타우펜의 두 왕조 치하에서 독일의 관심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풍요로운 이탈리아 경영에 모아졌다. 잘리어 왕조콘라트 2세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은 부르군트 왕국을 봉건적 주종관계에 예속하고 교황청 문제에 깊이 개입했다. 그러나 독일황제는 이탈리아 경영에 지나친 정력을 소모한 결과 국내 각 부족을 등에 업은 제후들의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편 독일의 상황은 10세기초부터 시작된 교회의 자정(自淨) 노력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로마 교황청은 교회에 대한 세속권력의 간섭을 철저하게 배격했으며 독일 내의 대주교들은 독일황제의 성직자 서임권(敍任權)을 거부하고 교황으로부터 직접 임명을 받았다. 이로써 교회와 세속권력 간의 갈등이 일어났고 독일은 극도의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양자간의 갈등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80 재위)와 황제 하인리히 4세(1084∼1105/06 재위) 간의 서임권 투쟁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교회의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대처(帶妻) 행위를 금지한 그레고리우스는 세속권력에 의한 성직서임을 철저히 금지했다. 하인리히는 반항하는 국내 제후를 토벌하기 시작했으나 남독일의 제후들은 그레고리우스와 긴밀하게 동맹했다. 마침내 교황이 하인리히를 파문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하인리히가 교황에 굴복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은 파문을 취소했다. 이후에도 황제권과 교황권의 투쟁은 거의 20년간 계속되다가 교권과 속권을 엄격히 분리하는 보름스 협약(1122)으로 일단락되었다.

 

잘리어 왕조 최후의 황제 하인리히 5세가 후계자 없이 죽은 뒤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왕조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왕)는 정치적 안정을 이룩한 뒤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동으로는 슬라브 땅에 진출하고 남으로는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평야를 차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사자공의 협력 거부로 프리드리히 1세레냐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롬바르디아 점령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탈리아 지배권을 겨냥하는 독일황제와 로마 교황의 대립, 국내 교회와 제후의 타협과 상충 속에 독일의 중앙권력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러는 가운데서도 독일인은 동방에 진출했고, '독일기사단'(튜튼 기사단)의 프로이센 개척은 프로이센 왕국의 기원이 되었다.

 

중세말 독일의 상황

 

호엔슈타우펜 왕조 최후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뒤 독일은 이른바 '대공위시대'(Great Interregnum:1250∼73)라는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는 이익에 따라 이한집산하는 성·속 세력이 이른바 대립왕을 선출하여 내부 혼란과 정치적 무질서가 극에 이르렀다. 이러한 혼란기에 제후들은 슈바벤의 한 지류인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를 왕으로 선출했는데 그는 제후들이 차지한 영지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루돌프가 제국 동부에서 준동하는 슬라브족을 평정하여 영토의 안정을 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다른 제후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영방국가(領邦國家)의 하나로 성장했다. 이로써 독일의 정치적 중심은 라인란트에서 동부 독일로 옮겨졌다. 이후 합스부르크·비텔스바흐·룩셈부르크 출신들이 돌아가며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었다. 빈번히 일어난 왕권의 교체는 성·속 세력의 영방세력화를 촉진시켰다. 14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은 제후들에 의해 구성된 느슨한 연방체에 불과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제국의 개편을 단행한 인물이 바로 카를 4세(1346∼78 재위)이다. 카를은 1356년에 금인칙서(Goldene Bulle)를 발표하여 황제선출을 위한 7선제후제 등 여러 원칙을 규정했다. 이로써 영방세력을 토대로 한 제국의 제도개편이 완료되었다.

 

제국통치를 이탈리아 경영과 교황청과의 관계에 결부시켰던 국면은 사라지고 왕권을 장악한다는 이념 역시 사라졌다. 합스부르크·비텔스바흐·룩셈부르크 등의 가문은 각자 영방 국가권력을 확대하는 데만 주력하게 되었다. 각 제후들이 영방국가로 발전하는 난맥 속에 각 영방 내에서는 다시 영내 귀족들이 그들의 전통적 특권을 고수했고 도시는 도시대로 자치와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 이들은 영방군주에 대항하여 신분(St nde) 세력을 형성했다. 한편, 북해 연안도시들이 뤼베크를 중심으로 한자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내륙무역이 활기를 띠었다.

 

때마침 도시의 발흥으로 화폐경제가 보급되고 장원을 중심으로 자연경제가 붕괴되는 경제적 전환기를 맞아 사회적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기에 기존 교회와 신앙에 대한 불신이 증대되어 신비주의 사상을 토대로 한 교회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교회개혁운동은 특히 보헤미아(뵈멘)의 민족운동과 결부되어 후스의 개혁운동을 낳았다. 후스는 파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으나 그 추종자들이 후스 전쟁을 일으켜 독일 전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서 룩셈부르크가 최후의 황제인 지기스문트(1410∼37 재위)가 교회 및 제국의 개혁에 나섰다. 그는 화폐제도 정비, 고리대 억제, 국가와 교회 관계의 조정에 힘쓰고 '란트 평화령'을 발표하여 제국의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했으나 제후들의 반발과 후계자 문제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제국개혁의 요구는 다시 막시밀리안 1세(1493∼1519 재위) 때에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는 부르고뉴를 상속받고 혼인정책으로 스페인·네덜란드·오스트리아를 포함하는 영토를 차지했다. 이 무렵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던 스위스는 제국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투르크가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오면서 제국은 난관에 봉착했다. 황제는 전비조달을 위해 제국의 신분세력과 타협해야만 했고 제후측은 조세징수의 대가로 제국개혁을 요구했다. 특히 마인츠 대주교를 중심으로 개혁파가 조직되어 제국 통치에 여러 신분세력이 참여하는 신분제적 국제(國制)를 주장했다.

 

1495년 막시밀리안은 제국개혁에 착수하여 영구 란트 평화령(제국 내 사적인 전투의 금지)을 발포하고 제국재판소를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제국의 군제와 세제를 재조직하여 최고통치기관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세적 체제를 갖춘 제국을 개혁하는 일은 영방권력의 반항과 앞으로 전개될 종교개혁이라는 커다란 지진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는 실현될 수 없었다.

 

종교개혁30년전쟁

 

30년 전쟁 이후 독일의 종교분포(1650)
제국개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분열된 독일사회에서도 초기 자본주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국민의식이 각성되고, 인문주의자들은 제국의 약체와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스페인·영국·프랑스 등 중앙집권체제가 진척된 나라에서는 교황청으로부터 분리된 국가의 정치적·종교적 결속을 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분열된 독일에 대해 로마 교황청의 경제적 압박은 더욱 가중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면죄부 판매를 성서적 진리에 입각하여 공격한 것을 계기로, 쌓여왔던 국민의 분노는 일시에 폭발했다(→ 로마 가톨릭교).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하고 정통 신학자 요한 에크와의 논쟁에서 교황과 종교회의의 권위까지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사태는 심각한 국면에 이르렀다.

 

새로이 황제가 된 카를 5세(1519∼56 재위)는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개최하여 루터로 하여금 자진 출두하여 그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했다(→ 보름스 의회). 이때 루터는 "성서와 명백한 이성에 모순되지 않는 한 이러한 주장을 철회할 수 없으며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일이 가장 위험하다"고 갈파(喝破)하여 명백하게 기존 권위에 도전하는 자세를 취했다. 황제는 루터를 제국에서 추방했고,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비호를 받으면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다.

 

루터의 주장은 독일의 종교적·사상적 토대를 크게 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적 불안을 느낀 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농민들의 불만은 농민전쟁으로 폭발했다. 영주에 의한 부역노동의 강화, 영방군주에 의한 조세부담의 압박 등에 시달리는 농민에게 루터의 교리는 자유의 복음으로 작용했다.

 

농민들은 프랑켄, 슈바벤, 상류 라인지대, 알자스 등지에서 영주관·사원·도시를 차례로 습격했다. 반란은 농민에 한정되지 않고 도시민에게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농민반란을 크게 비난하여 반농민적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루터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예배양식과 신앙을 추구하는 신교도의 수는 증가하고 프로테스탄트가톨릭교도의 대립은 화해될 수 없이 깊어졌다.

 

카를 5세는 네덜란드·프랑스와의 대립, 투르크의 침입 등 제국에 대한 위협 때문에 일관된 종교정책이나 효과있는 국정의 운영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루터주의는 영방제후에게까지 깊이 침투했다.

 

1546년 프로테스탄트파를 결속하는 슈말칼덴 동맹이 조직된 후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의 반목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회의가 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서 제국의 종교적 통일이념은 포기되고 가톨릭 교회와 루터주의 공존 원칙이 승인되었다(칼뱅주의재세례파는 용인되지 않았음). 이로써 영토를 지배하는 자가 그 지역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원칙이 마련되었다.

 

한편 종교개혁의 물결이 가라앉은 뒤,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종교회의를 계기로 교황의 우위를 재확인하고 교회의 엄격한 위계제를 재확립하여 교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등 자체 정화에 힘썼다. 또한 예수회의 조직으로 해외선교에 박차를 가하는 등 실추된 가톨릭교의 위신을 되찾고자 이른바 '반종교개혁'을 단행했다.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교리해석을 둘러싸고 칼뱅파와 루터파 사이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분쟁을 틈타 헝가리와 보헤미아에서는 귀족들이 지배자의 종교에 크게 저항했다. 그러나 가톨릭측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도나우 지대를 병합해 가톨릭 교리를 강요하자 프로테스탄트측은 연합(Union)을 결성하여 정치적 결속을 다지려 했으며 이에 맞서 가톨릭측은 연맹(Liga)을 조직하여 양측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연합, 가톨릭 동맹). 당시의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프로테스탄트측은 네덜란드·영국·프랑스와 가톨릭측은 스페인·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가톨릭 교리가 강요된 보헤미아 지방에서 반독일운동이 일어나 이 지방의 신교귀족들이 독일총독을 창 밖으로 던져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갈등은 독일전체로 확대되어 30년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비단 독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반(反)합스부르크 동맹군으로는 프랑스·영국·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이 가담하고, 이에 맞서 가톨릭 진영이 결속했다. 그러나 전쟁은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 간의 대립전으로 압축되었다. 일시 휴전도 성립되었으나 30년 간 계속된 이 전쟁은 베스트팔렌 평화조약(1648)으로 종결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① 프랑스와 스웨덴이 각각 독일 영토의 일부를 차지하고 프로테스탄트 통치자는 그들이 몰수한 교회재산을 차지한다. ② 칼뱅파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스위스가 독일제국으로부터 각각 완전 분리독립한다. ③ 모든 지배자의 종교가 허용되고 각 영방제후는 완전한 국가주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었다. 각 영방의 주권과 독립이 인정됨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붕괴하게 되었다.

 

전쟁이 가져다준 황폐화는 그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이 처참했다. 독일인구는 1,800만에서 700만으로 감소했고 전시 군인의 약탈과 폭행, 농촌과 도시의 황폐, 경제적 타격 등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경제활동과 상업활동은 극도로 마비되었고 독일이 이 재난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세기가 필요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30년전쟁 이후의 독일은 아무런 통일성도 찾아볼 수 없었고 단지 지리적 명칭에 불과했다. 그러나 독일의 동부에서는 앞으로 독일의 운명과 깊이 연관될 정치체제가 발전하고 있었다. 이것이 곧 '독일기사단'에 기원을 둔 프로이센이다.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1640∼88 재위)은 영토를 확대하고 폴란드와의 봉건적 관계를 청산했으며 행정체제의 재정적 토대,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절대주의 체제를 강화했다. 대선제후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1701∼13 재위)는 스스로 '프로이센의 왕'이라 칭했고, 그뒤 역대왕들은 군사적 통치를 계승하여 영토의 확장에 힘써 이 국가는 오스트리아 다음가는 강력한 영방국가로 발전했다. 특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713∼40 재위)와 프리드리히 2세(1740∼86 재위)는 서쪽으로는 라인 강으로부터 동으로는 바익셀 강까지 흩어진 영토를 통합하기 위해 강력한 관료제와 상비군을 창설했다. 다른 독일의 영방군주들이 프랑스의 궁정생활을 모방한 사치스러운 생활로 재력을 낭비한 데 비해 프로이센 군주들은 엄격한 근검절약 정신으로 국민생활을 규제해 국가의 재정을 확립했다. 200만의 인구로서 8만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를 모방한 행정·조세제도를 확립하고 국가의 부(富)를 증대하기 위해서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프로이센이 일약 유럽의 강국에 낄 수 있었던 것은 대(對) 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명칭을 간직한 채 꾸준히 영방국가로 발전했다. 오스트리아 공령(公領)을 비롯하여 보헤미아의 여러 주, 헝가리 왕국, 남 네덜란드 지역, 밀라노 공작령이 그 지배하에 있었다.

 

1740년 황제 카를 6세(1711∼40 재위)가 남자 상속인 없이 죽자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국토가 상속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작센·바이에른 등이 이 상속에 이의를 제기하는 와중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점령해 이 지역의 소유권을 요구했다(→ 슐레지엔 전쟁). 이로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유럽 열강 사이에서 8년간 계속되었다.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령에 반대하는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1756년 시작된 7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과 결부되어 국제적 분쟁으로 발전했다. 프로이센이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동맹하고 다시 이에 러시아까지 가담하게 되었다. 한때 베를린까지 함락당할 위험이 있었으나 어느 쪽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전쟁은 종결되었다.

 

7년전쟁으로 슐레지엔에 대한 프로이센의 영유권이 확인되면서 독일제국 내에서는 두 주요국가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경합하게 되었다. 독일 내부에서 두 국가가 대립하는 틈을 이용해 동방으로부터 새로이 러시아의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압력으로 왕조적 이해를 추구하기 위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두 나라의 다툼은 결국 1774년 폴란드를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가 분할함으로써 수습되었다. 이로써 독립국으로서의 폴란드는 소멸되었다(→ 폴란드 분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뒤를 계승한 요제프 2세 등은 흔히 '계몽절대군주'로 불린다. 계몽군주체제란 봉건주의가 청산되지 않고 자본주의가 아직 본격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나라에서 군주가 스스로 계몽군주로서 산업개발, 농민보호 등으로 국가개발에 주력하는 정치체제이다. 그러나 구조적 모순은 청산되지 않았으므로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그 체제의 무력함이 드러났다.

 

프랑스 혁명과 해방전쟁

 

프랑스에서 3부회가 소집되고 혁명이 시작되자(1789) 요제프 2세는 이를 '민족의 봄'으로 예찬했으나 뒤이어 즉위한 그의 동생 레오폴트 2세는 혁명을 공포와 악마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독일의 교양시민계급들도 '자유·평등·우애' 등 혁명의 이념에 찬사를 보냈으나 혁명이 과격해지자 환호는 사라지고 혁명에 대한 환멸감이 퍼졌다.

 

프랑스 망명귀족들이 독일에 몰려오고 오스트리아가 무력 행동을 계획하자 프랑스 혁명정부는 이에 강력히 항의했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오빠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함께 독일 영방군주의 협력을 얻어 '필니츠 선언'을 발표했다(→ 프랑스 혁명전쟁). 이를 혁명정부에 대한 간섭으로 단정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1792).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프랑스 영토까지 진출했으나 프로이센은 연합군이 프랑스 문제에 전념하는 동안, 러시아에 폴란드를 송두리째 빼앗기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철군했다. 이로써 공세는 역전되어 프랑스군은 독일의 마인츠·보름스·슈파이어까지 점령했다.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함께 제2차 폴란드 분할을 단행하고 프랑스와 단독으로 강화를 맺었다. 폴란드에서 민족적 저항이 일어나자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그 영토의 나머지 부분까지 분할했다(3차 폴란드 분할). 이로써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일시적인 협력 관계도 붕괴되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의 배후인 이탈리아에 진출하자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는 프랑스와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했다(1797). 그러나 이 조약은 오래 유지될 수 없었다. 프로이센이 중립을 지키는 가운데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영국과 함께 제2차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해 전쟁을 재개했다. 연합군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내쫓았으나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 대패했다. 이어 1801년 뤼네빌 조약이 체결되어 캄포포르미오 조약의 원칙이 다시 확인되었다. 라인 강 오른편의 영토를 상실한 제후들에 대한 보상을 절충하기 위해 '제국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보상 결정에는 나폴레옹의 의사가 크게 작용했고 독일의 지도는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1805년 제3차 대 프랑스 동맹이 조직되었으나 프로이센은 중립을 유지했고 결국 프랑스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연합군을 대파하고 승리했다. 이는 독일의 운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즉 1806년 빈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라인 동맹'을 창시해 보호자로 자처하는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소멸을 통고했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도 신성 로마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제국의 소멸을 선포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이념을 토대로 한 제국은 사라지고 독일은 아무런 정치적 구심점도 없는 지리적 명칭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백 개의 영방으로 분산된 정치체제는 나폴레옹에 의해 크게 단순화되었다.

 

1806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벌어졌으나 동맹의 지지없이 고립된 프로이센은 베를린에 함락당한 뒤 굴욕적인 틸지트 강화조약을 맺었다. 국가의 틀은 유지되었으나 프로이센은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폴란드 분할로 얻은 영토도 포기했다(→ 예나 전투). 프랑스군이 상당기간 중유럽을 점령하는 동안 병력 감축과 프랑스에 대한 배상금 압박 등으로 독일은 이류국가로 전락했다.

 

프랑스군의 독일 점령은 한편으로는 봉건적 유제(遺制)에 허덕이는 독일에 혁명의 원리인 근대화 개혁을 부추겼지만 외국 침략자들의 존재는 독일인들 사이에 민족감정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민족주의). 프로이센에서는 프랑스 점령하에 '위로부터의 개혁'이 단행되었다. 개혁에 착수한 인물은 카를 폼 슈타인이었다. 먼저 각 지방을 관리하는 장관직에 전문직 장관이 임명되어 합의제 내각제가 도입되었다. 각 도시는 국가의 명령체계로부터 해방되어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왕령지(王領地)에서 단행한 농노제 폐지는 사령지(私領地)까지 확대되어 토지소유권의 이전이 자유롭게 되었으며 이른바 농민해방이 단행되었다. 또한 모든 영업을 길드 체제로부터 해방하고 직업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슈타인에 의해 시작된 프로이센 개혁은 그가 나폴레옹군에게 추방된 뒤 하르덴베르크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과 더불어 왕실 군대를 개편하여 국민의 군대로 개편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국민병역의무제가 도입되었다. 프로이센군이 해방전쟁에서 주역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정·군제 개혁에 의해 해방된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유럽 제패는 영국과 러시아가 건재하는 한 완결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유럽 여러 국가의 군대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마침내 모스크바 원정을 감행했다. 나폴레옹의 실패는 대군의 좌측을 맡았던 프로이센 장군 요르크 공작이 러시아군과 중립협정을 체결하면서 시작되었다. 나폴레옹군에 대한 프로이센의 선전포고를 계기로 북독일 각지에서 반나폴레옹 봉기가 거듭 일어나고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의 협력관계가 다져졌다. 또한 중립을 지키겠다고 했던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연합군이 나폴레옹군에 대승함으로써 프랑스의 중유럽 지배는 끝났다.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부르봉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파리 조약으로 해방전쟁은 끝났다.

 

빈 조약과 독일 자유주의 운동

 

1814∼15년의 빈 회의는 전후문제 처리를 논의했다. 회의의 주역들은 18세기의 지적 상속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영국의 캐슬레이, 프랑스의 탈레랑 등이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이 제시한 자유의 이념과 민주주의의 원리를 거부하고 민족자결의 원리를 봉쇄했다. 그러나 이들조차 1789년 이전의 국경과 정치체제가 수정이나 타협 없이 그대로 복고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독일연방이 탄생했고 이는 1866년까지 계속된 국가체제와 정치생활의 윤곽을 이루었다. 이로써 39개의 독일국가들은 그들의 주권을 간직한 채 느슨한 연방체제에 소속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군주들은 다시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반동체제를 수호하는 기반으로 삼고자 했으나 프랑스군의 점령으로 봇물이 터진 개혁과 민주화의 움직임은 나폴레옹의 몰락이나 신성동맹의 체결로써 중단될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군이 몰락한 뒤에 각 영방은 다투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소집했다. 프로이센에서는 해방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국왕이 국민에게 약속한 헌법제정을 요구하는 입헌운동이 전개되었다.

 

1817년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이 일찍이 루터가 성서를 번역했던 발트부르크 성에 모여 자유와 통일을 요구하며 부르셴샤프트 운동을 일으켰다. 때마침 학생운동을 비난한 보수주의 계열의 극작가 코체부가 과격학생조직의 일원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메테르니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전독일의 자유주의 운동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독일연방의 구성원을 설득해 카를스바르트 법령을 가결하여 모든 출판과 결사의 자유를 금지하고 부르셴샤프트를 불법으로 간주했으며 저항하는 교수들을 대학에서 추방했다.

 

탄압과 압제를 받던 독일 자유주의 운동에 새로운 자극을 준 것은 프랑스의 7월혁명(1830)이었다. 자유주의 운동은 하노버에서도 일어났다. 국왕이 의회를 폐기하고 헌법을 정지시켰을 때 이에 정면으로 맞선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났다(괴팅겐대학 7교수 사건). 이 사건은 전독일의 여론을 들끓게 했고 7명의 교수를 후원하려는 범국민적 운동이 일어났다. 체제비판이 탄압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뿌리째 뽑힐 수는 없었다. 몇몇 영방국가에서는 기존 체제의 옹호자들과 그 반대파가 초보적인 정당을 만들기 시작했다. 헌법이나 의회가 없는 국가에서도 클럽·집회·팜플렛 등을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비판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점차 국가와 사회의 본질에 대한 정치이론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자유주의자들은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는 귀족사회보다는 재능으로 부와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시민사회를 갈망하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급진적 여론에 가담한 층은 이른바 민주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소규모 기업가, 소상점주인, 숙련 노동자, 중소농민, 신문기자 등 지식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제한선거가 아니라 보통선거에 입각한 공화주의를 추구했다.

 

관세동맹과 1848년 혁명

독일 관세동맹의 발전
빈 회의 이후의 독일에는 사회적 변화에 따른 각종 소요가 일어났으나 역사상 드물게 보이는 평화시대가 찾아왔다.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들어서는 계기는 농민해방과 영업자유령으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본격적인 산업화가 전개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사회경제적 재편성이 진행되고 있었다. 농민해방 이후 독일 농업은 재편성 단계에 들어섰다. 농노제가 폐지된 엘베 강 동쪽지방에서는 귀족들의 대농장 경영이 확대되어 융커의 농업 자본주의 경영은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대규모의 농업노동자층을 형성했다. 이들 대토지 경영에 종사한 융커 계급은 지방경제만이 아니라 행정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1834년 독일연방에 소속된 대부분의 국가를 포함하는 관세동맹(Zollverein)이 결성되었다. 이에 가입하지 않은 지역은 오스트리아와 북서 연안지역뿐이었다. 약 40만㎢의 면적과 2,500만 명의 인구를 포괄하는 관세동맹의 의미는 정치적 통일에 앞서 독일의 경제적 통일을 성취했다는 데 있다. 이로써 관세동맹의 주역인 프로이센은 중유럽에서 우위를 다투는 오스트리아와의 경쟁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했다.

관세동맹으로 독일이 하나의 경제단위로 통합된 것은 경제발전의 중요한 기반을 확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국가 형성이라는 과제의 해결은 요원했다. 같은 국민으로서의 일체감 형성에 필요한 다양한 집단간의 유대는 형성되지 않았고 일상생활은 개별국가의 테두리 속에 폐쇄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1848∼49년의 혁명은 사회적 해방운동과 더불어 국민적 일체감을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1840년대 후반 유럽 대륙을 휩쓴 경제적 불황은 대중적 불만을 혁명으로 확산시켰다. 때마침 프랑스 2월 혁명의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 전역에서도 소요가 일어나고 혁명적 기운이 퍼졌다. 반동의 총수 메테르니히는 자리에서 물러나 망명했으며 베를린에서는 국왕의 헌법제정 약속에도 불구하고 시가전이 벌어졌다. 국왕은 헌법제정위원회를 소집하고 라인란트의 자유주의자를 총리로 기용하는 등 혁명적 요구에 따랐다.

 

독일의 다른 영방에서도 개혁이 단행되고 헌법제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혁명의 가장 큰 성과는 프랑크푸르트에 국민의회가 소집되어 국민의 기본권과 독일의 정치적 통일에 관해 논의한 일이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그러나 이 혁명에는 사회적으로 통일된 지도세력이 없었다. 독일 국민국가라는 공통성으로 겨우 결속력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특히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의 견해 차이가 심각했다. 전자가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반면, 후자는 소수였으나 그 원외 세력은 급진 개혁까지 요구했다. 또한 통일방안에 관해서도 의견이 대립되어 대독일주의자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했던 오스트리아만이 통일된 독일을 성공적으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소독일주의자들은 잡다한 이민족으로 구성된 합스부르크 왕가는 독일적 성격이 부족해 통일의 주체로서 부적합하다고 보고 통일의 주역이 프로이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회가 미래의 통일독일정부의 법적 형태와 기본권에 관한 논의를 거듭하는 동안 반혁명이 진행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국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폭동을 진압하고 베를린에서도 민중탄압을 강행했다.

슬레스비히·흘슈타인을 해방하기 위해 덴마크와 교전하던 프로이센은 국민의 열망은 아랑곳하지 않고 휴전했으며 이에 저항하는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했다. 더욱이 '제국헌법'이 제정되고 프로이센 국왕이 독일황제로 추대되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것이 다른 군주에 의해 승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국민의회는 더이상 존속할 의의를 잃었고 온건파 의원들이 떠남으로써 의회는 붕괴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급진파들이 대중 봉기를 주도했으나 보수파 군대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혁명은 종결되었다.

 

1850년대의 독일

 

혁명의 실패로 자유주의 이념을 토대로 한 통일의 꿈은 사라지고 보수주의적 국가이념으로 독일의 통일이 추진되었다. 오스트리아가 이민족의 반란에 시달리는 동안 프로이센은 북부·중부 독일의 군주들을 결속해 새로운 독일 국가체제를 구상했다. 1851년에는 옛 연방규약이 다시 부활해 독일은 혁명 이전의 사태로 돌아감과 동시에 정치적 반동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중앙집권적 관료조직과 가톨릭의 정교주의를 토대로 강력한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프로이센에서는 새로운 헌법으로 주민의 수입을 기준으로 한 3급선거권(Dreiklassen-wahlrecht)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동적 정책에 대해서 주민들은 오랫동안 혁명과 소요에 시달려 왔으므로 극도로 무관심했다.

 

이러한 정치적 불모와는 달리 1850년대의 독일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이 시기에 중유럽은 산업화의 돌파구를 찾아 정치적 개혁에서 좌절되었던 국민적 저력을 물질적 번영에 방출했다. 1857년 과잉투자로 인한 경기침체가 잠시 있었으나 독일은 급속히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농촌인구가 도시인구를 능가했지만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부의 중심이 농업에서 산업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귀족에서 자본가로 옮겨짐으로써 이러한 추세는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쳐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정치적 대결로 나타났다.

 

185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대신 왕의 동생 빌헬름에 의해 섭정정부가 조직된 것을 계기로 프로이센의 이른바 '신시대'가 열렸다. 자유주의 내각이 구성되어 반동의 시대가 끝난 듯이 보였다. 때마침 크림 전쟁에 개입했던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피에몬테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전쟁의 결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2세는 강력한 군사국가를 유지하려 했던 노력이 헛수고였음을 깨닫고 의회주의 노선을 추구하고 자본주의 경제를 북돋우려고 했다. 그러나 전쟁의 패배는 독일 내에서 오스트리아의 역할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자유독일의 지도적 지위를 프로이센에 요구했다. 이 시대 자유주의자들은 혁명기의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이상주의에 입각한 체제 개혁보다는 강력한 경제력과 국가의 지도력이 독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인식했다. 장래를 위한 계산된 정책이 현실정치에 반영되었으며 자유주의자들은 기존제도의 틀 속에서 점진적 개혁과 통일을 요구했다.

 

1861년 빌헬름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자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은 무산되었다. 왕의 보수적 성향에 실망한 자유주의자들은 진보당을 결성했고 왕과 의회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왕의 관심은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데 있었고 군사개혁을 통해 민병을 감축하고 상비군을 늘리려 했다. 의회가 군사예산을 거부함으로써 왕과 의회의 적대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새로이 실시된 선거에서 진보당이 의회에 대거 진출하자 군사예산의 의회통과는 더욱 난관에 부딪쳤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등용된 인물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그는 프로이센 융커 출신으로 완강한 왕당파 보수주의자였으나 파리와 러시아 공사(公使)를 지내 급변하는 국제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갖추고 있었다. 헌법 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비스마르크는 4년간 의회의 예산승인 없이 군사개혁을 비롯한 국정업무를 강행처리했다. 의회가 총리를 법의 파괴자라 비난하는 가운데 비스마르크는 모든 정파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길, 즉 독일 통일을 실현하는 데 헌신했다.

 

통일의 길

 

이 시대의 국제질서는 독일 통일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유럽 문제 개입은 중단되었다. 영국은 거대한 해양제국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산적한 국내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루이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도 내정의 여러 문제에 직면하고 라인 강 너머에 일어난 내란이 자국에도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했다.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오스트리아였다. 이와 관련된 것이 곧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였다. 독일계 주민이 거주하는 두 지역은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혁명 때의 민족주의 기운을 바탕으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공동으로 이곳을 점령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1864년 양국은 다시 출병하여 양국의 공동소유로 삼았다. 그러나 두 지역에 대한 양국의 관리방법을 둘러싼 긴장은 중유럽의 패권을 겨루는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탈리아와 공수동맹을 맺은 비스마르크는 무력으로 오스트리아를 독일연방에서 추방할 것을 다짐하고 오스트리아와 개전했다. 불과 7주간 계속된 전쟁은 오스트리아군의 패배로 끝나고 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더이상 독일 문제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7주전쟁).

 

오스트리아가 제거된 뒤 프로이센은 독일 내에서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군이 점령한 마인 강 이북 지역을 정치적으로 베를린 정부와 연결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구상이 구체화된 것이 곧 '북독일연방'이다. 연방은 가장 큰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프로이센이라는 거인을 중심으로 잡다한 군소국가가 연합한 것으로서 프로이센의 뜻대로 움직이는 정치체제에 불과했다. 그러나 연방 내에서는 단일한 통화, 통일된 도량형, 산업, 상업, 재정 등을 규제하는 통일된 법이 적용됨으로써 정치적 통합과 함께 경제적 통합이 실현되었다.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결속된 북독일 연방이 중유럽에 출현함으로써 유럽의 전통적 국제질서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독일에서 일어난 변화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나라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독일의 만성적 내란을 유발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기대와는 달리 통일된 강대한 독일이 프랑스에 큰 위협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양국 이해의 충돌은 무력대결을 피할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비스마르크는 무력충돌보다는 여타의 독일국가들이 북독일연방에 평화롭게 편입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들 남부 독일국가들은 프로이센을 크게 불신했다. 이러한 불신을 씻고 독일의 모든 나라들이 일치단결하는 애국적 결속을 위해서 전쟁은 불가피했다.

 

때마침 호엔촐레른 왕가의 레오폴트 왕자가 스페인 왕위에 오를 것이 확실해지자 파리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왕자를 대신해 그의 아버지가 왕위의 포기를 선언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프로이센 국왕이 이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불가피하도록 사태를 조작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남부 독일국가들은 나폴레옹의 예상을 뒤엎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 편에 가담해 형제애를 다졌으며 몰트케가 전격작전을 전개해 프랑스의 난공불락 요새인 스당을 함락했다(→ 스당 전투). 이때 파리에서는 제2제정이 붕괴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항전을 계속했으나 1871년 1월 프랑스는 항복했다. 그해 5월에 맺어진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독일에 양보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대 프랑스 전쟁이 전개되는 동안, 비스마르크의 통일과업은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전쟁 초기부터 비스마르크는 차례로 남부국가와 교섭해 민족적 결속을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1871년 1월 18일 포성이 아직도 그치지 않은 가운데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빌헬름 1세를 황제로 한 독일 통일이 선포되었다. 이 제국은 제1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제2제국으로 불렸다.

 

독일제국의 창건과 제국주의

 

독일제국(1871~1918)
새로운 제국은 22개의 군주국과 3개의 자유도시로 구성되었다. 프로이센 국왕이 독일 황제로,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가 제국총리를 겸임하고 연방대표로 구성되는 연방참의원과 새로운 선거권에 입각한 제국의회가 구성되었다(→ 분데스라트, 라이히슈타크). 제국의회는 1867년에 제정된 북독일 연방헌법을 개정없이 제국헌법으로 수용했다. 헌법에는 정부에 대한 의회의 권한과 총리의 책임 소재가 밝혀져 있지 않았으며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관계규정에 대해서도 명시되지 않았다. 이 무렵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지 않은 이 헌법은 1918년 독일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제국이 창건된 초기 단계에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과 제휴하여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다. 단일화된 법절차, 화폐의 통일, 통일된 행정 등이 완비되고 자유 기업에 대한 일체의 제한이 철폐되었으며 출판의 자유도 허용되었다. 또 제국은행이 창설되고 주식회사도 활성화했다.

 

이러한 경제적 자유화와 더불어 독일경제는 전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경제적 호황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가 당면한 국내정치의 난관은 국민의 1/3 이상을 차지하는 가톨릭교도와의 불화였다. 가톨릭교도로 구성된 중앙당은 남부 바이에른의 농업지구를 기반으로 하여 국민자유당과 제휴한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흔히 문화투쟁으로 알려진 가톨릭교와의 싸움은 '5월법' 제정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교회대신관의 결혼신고 의무화,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국가시험제 등이 강요되었다. 중앙당이 로마 교황청의 후원을 받아 완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사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경제적 불황은 비스마르크와 국민자유당의 제휴에 종지부를 찍었다. 비스마르크는 보수당·중앙당과 다시 화해함으로써 이들을 새로운 동맹자로 삼았다. 독일제국의 새로운 적대자는 사회민주당으로서 이들은 의회에 진출해 사회개혁의 요구를 제시했다.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탄압법을 제정해 사회민주당을 비합법적 정당으로 선언하고 일체의 급진주의 운동을 탄압했다. 사회당에 대한 탄압과 동시에 비스마르크가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 채택한 것은 재해보험법과 상해보험법 등의 사회복지정책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노동자를 '채찍과 당근'으로 다스렸다.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은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복수심을 경계하고 슬라브 민족주의에 강경하게 대처하는 데 집중되었다. 따라서 프랑스가 러시아·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과 각각 동맹을 맺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프랑스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비스마르크는 1873년 오스트리아·러시아와 함께 3제동맹(三帝同盟)을 맺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1879년에는 러시아와의 이해충돌로 오스트리아와 2국동맹을 맺고 다시 이탈리아를 포함시켜 3국동맹으로 확대시켰다. 국제관계의 변동 속에 1881년에는 다시 3제동맹이 부활했다. 1887년에는 러시아와 재보장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에 대한 러시아의 접근 정책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러시아와 프랑스와의 관계를 조절하기 위해 전개되었던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은 1880년대말 국제 관계의 변동으로 크게 동요되었다. 독재권에 가까운 총리의 권한은 빌헬름 2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마비되기 시작했는데, 그 가장 큰 원인은 사회주의 탄압법에 저항하는 사회민주당의 대규모 의회진출이었다. 탄압법의 연장이 의회에서 부결되고 비스마르크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를 이어 성립된 카프리비 내각은 대중적 지지를 겨냥한 국왕 빌헬름 2세의 정책에 보조를 맞추었다. 카프리비는 낡은 보수주의 정책을 포기하는 한편,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 갱신을 거부했고 이로써 차리즘과 융커 계급의 결속은 종지부를 찍었다. 또 오스트리아의 발칸 정책을 지지하고 영국과의 친선을 도모했다. 국내에서는 관세를 인하하고 영국과 협력해 자유무역을 확대했다. 또한 사회주의 탄압법의 갱신을 요구하는 보수파의 요구를 묵살하고 사회입법을 추진하여 좌파세력을 자극하려 했다.

 

한편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을 거부함으로써 양면전쟁의 위협을 느낀 카프리비 내각은 군비증강을 위한 예산확대 요구로 의회와 정면 충돌했다. 일련의 사태로 카프리비 내각은 해체되고 호엔로에 내각이 새로이 구성되었다. 보수당의 지원을 받은 총리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오스트리아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호엔로에의 뒤를 이어 폰 뷜로가 총리가 되었다. 보수당의 지지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은 폰 뷜로는 융커계급을 경제적으로 제국과 연계시키고 범게르만주의를 추구했다. 이미 독일의 제철 및 강철산업이 세계적 규모로 발전하여 막강한 국력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뷜로는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이 아프리카나 극동에서 벌이는 제국주의 정책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해군장관 티르피츠가 함대법을 제정하여 독일해군을 건설하기 위한 장기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사태는 크게 달라졌다. 대규모의 함대건설계획은 불황에 허덕이는 산업계의 큰 지지를 받았다. 이로써 밖으로는 영국을 크게 자극하고 안으로는 간접세를 요구하는 보수당과 직접세를 지지하는 중앙당 사이에 정면 충돌이 일어났다. 해군건설은 국가 차관에 의존해 추진되어 뒤에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었다(→ 제해권).

 

독일이 제국주의적으로 팽창하는 시기에 영국은 일본(1902)·프랑스(1904)와 각각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빌헬름 2세는 탕헤르에 상륙하여 모로코의 영토보전을 지지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모로코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영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의 반대로 독일의 진출은 실패했다.

 

1907년 영국은 러시아와의 오랜 세월에 걸친 의견차이를 조정하고 프랑스와 함께 3국협상을 체결했다. 영국은 또한 1909년에 독일의 건함계획에 대항하는 대규모의 해군건설계획을 발표했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을 지지함으로써 독일과 러시아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독일은 밖으로는 영국·프랑스·러시아에 포위되고 안으로는 혁명적 강령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회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제국의 전제적 지배체제는 붕괴 직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한 청년 민족주의자에게 피살되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열강과 싸워야 할 것인가 하는 중대 기로에 놓였으나 발칸 반도에서의 오스트리아 입장을 지지할 것을 결의했다. 3주 후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발표하자 참모총장 헬무트 몰트케는 러시아의 군대동원이 완료되기 전에 프랑스를 패배시켜야 한다고 믿고 프랑스와 러시아에 동시에 선전포고할 것을 건의했다. 총리인 베트만 홀베크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에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사회주의적 이념으로 전쟁에 반대해온 독일 사회민주당은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선회하여 전쟁공채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들은 위기의 순간에 '정치적 정전'을 선언하고 여러 정당과 함께 대정부 비난중지를 결의했다.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프랑스는 6주 이내에, 러시아는 6개월 이내에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여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마른 전투의 패배 이후 서부전선의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파리 점령에 실패한 독일은 스위스 국경에서 영국 해협에 이르기까지 긴 참호를 구축하여 대치하는 소모전에 시달려야 했다. 독일은 타넨베르크(스템바르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함으로써 1917년 여름까지 언제든지 협상을 제시할 수 있었으나 휴전이 이루어지면 무기생산에 종사하던 산업계가 마비되고 정치혁명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었다(→ 타넨베르크 전투).

 

몰트케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에 임명된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갈리치아에서 러시아군을 추방하고 세르비아를 제압하여 투르크와 연결되는 요로를 확보했다. 전쟁 2년째에는 기업가들의 주장에 힘입어 산업자원 확보를 위해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장악하는 일이 휴전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1916년 팔켄하인은 베르됭 대공세를 통한 '프랑스군의 괴멸'을 계획했으나 프랑스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도 지쳐 있었다. 정부는 러시아와 휴전회담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1916년 8월 팔켄하인이 해임되고 노장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17년 1월 제국의회는 베트만 홀베크의 반대를 묵살하고 영국의 보급로를 차단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개시를 결의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의 적극적인 수송선 호위작전으로 실패하고 말았으며 미국이 대독일에 선전포고함으로써 독일의 앞날은 더욱 불확실해졌다.

 

1916∼17년 겨울, 독일은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되었고 국민들 사이에는 전쟁에 대한 혐오가 만연되었다. 이때까지 전쟁을 반대해온 것은 독립사회민주당과 스파르타쿠스단이었으나 중앙당의 지도부 역시 정부정책을 비난하고 강화결의안을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사임했고 이후 새로운 총리들은 최고사령부의 의사대로 지명되기에 이르렀다.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했다. 레닌은 대전으로부터 혁명을 구출하기 위해 브레스토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5,600만의 주민과 제철산업의 79%, 석유생산의 89%를 빼앗기는 손실을 감당했다.

 

러시아의 붕괴는 동부전선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독일에게 명백한 패배를 피할 마지막 기회를 제공했다. 루덴도르프는 미국군이 참전하여 저울추가 연합국 쪽으로 기울기 전에 서부전선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로 결심하고 1918년 이른바 '황제작전'에 착수했다. 같은 해 4월과 5월에 걸쳐 50만 명의 독일군은 전선을 돌파하고 2번째로 마른 강에 도달했으나 7월이 되자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불가리아가 무너지고 오스트리아의 붕괴가 임박하자 루덴도르프는 연합군에 휴전안을 제시했다. 연합군이 받아들일 만한 조건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독일이 입헌군주국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바덴 공 막스가 총재직에 오르자마자 독일은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했음을 통고받았다.

 

1918년 11월에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가 항복하고 독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막시밀리안은 사임했고 사회민주당 당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새 총리로 임명되었다. 같은 날 빌헬름 2세는 제위에서 물러나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공화국이 선포되는 혁명적 상황 속에서 독일 대표는 1918년 11월 11일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정부의 수립은 난관에 부딪혔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고 노동자·농민 위원회를 토대로 정부수립을 요구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이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에베르트는 군 통수권을 가진 힌덴부르크와 협의하여 혁명의 과격화를 저지하고자 했다. 정부를 전복하려는 대중시위는 탄압되고 스파르타쿠스단의 2명의 지도자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이로써 과격 혁명노선은 좌절되었고 1919년 1월 19일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새로운 의회는 혁명의 중심지인 베를린을 떠나 유래깊은 문화의 중심지 바이마르에서 소집되었다. 에베르트가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사회민주당 소속인 필리프 샤이데만에게 조각이 위촉되었다. 신헌법은 연방제를 토대로 하는 공화국을 국체로 삼았으나 중앙권력은 각 주의 권력을 능가하여 조세징수를 관할했으며 연방의 법률이 각 주의 법규보다 우월했다.

 

연방의회는 비례대표제를 기초로 20세 이상의 성인 남녀에 의해 4년마다 선출되고 총리와 내각은 연방의회가 책임지도록 했다. 임기 7년의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동맹과 조약의 체결, 군최고사령관, 의회해산권 외에도 비상시에 국민의 자유를 일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은 공화국의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으나 훗날 국가사회주의를 대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의 경제는 사회민주당 정권하에서도 여전히 소수 산업자본가들이 장악했으며 산업이 통제되거나 토지소유가 제한되는 일이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민주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약화시켰고 훗날 불만세력들이 권위주의 정부를 추종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1919년 5월 연합군은 베르사유에서 강화를 위한 여러 조건을 일방적으로 제시했다.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슐레지엔·포젠·프로이센 등지를 폴란드에,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각각 양도해야 했다. 동프로이센의 상당 부분이 분할됨으로써 독일의 인구와 영토는 큰 손실을 입었다. 라인 강의 좌안과 우안이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거나 비무장지대로 남게 되었고 석탄생산지인 자르 지역은 15년 후 인민투표에 의해 그 귀속을 결정하도록 국제연맹에 위임되었다. 그밖에도 200만 마르크의 배상금 지불과 해외영토의 몰수가 결정되었으며 군병력이 엄격하게 제한받고 징병제가 금지되었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는 전쟁의 모든 책임이 독일과 그 동맹세력에 있으므로 침략자들은 대전중의 손실을 보상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했다.

 

조약에 대한 불만과 항의가 빗발치는 가운데 샤이데만이 사임하고 사회민주당과 중앙당의 연립내각이 구성되었다. 공화국 초기에 반정부 우파 정당들은 소요를 통해 조약에 대한 불만을 조장했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인종주의가 횡행하고 유랑하는 자유군단이 정국을 마비시켰다(→ 프라이코어). 1920년에는 병력감축에 반대하는 군인들을 주축으로 한 불만세력이 신정부를 선포하는 카프 폭동이 일어났고 지방에서도 유사한 폭동들이 야기되었다.

 

1921년 연합군이 제시한 배상총액 1,320억 마르크는 독일의 지불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불안은 경제적 불안에 기인했다. 식량 수입과 배상금의 지불을 위해 전후에도 발행한 국채는 불환지폐로 보상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폭등했다. 물가의 폭등은 노동자 실질임금의 감소로 귀결되었다.

 

1923년 배상금 지불의 불이행을 구실로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하자 독일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마르크화(貨)의 가치는 폭락하고 식료품의 품귀현상으로 노동자들이 큰 고통을 받았으며 중산층과 연금생활자들도 어려움은 비슷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에서 폭동(→ 비어 홀 폭동)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슈트레제만 총리는 베르사유 조약 수정에 노력했다. 1923년 우선 독일의 공업이 농업자원을 담보로 렌텐마르크화를 발행, 불환지폐를 회수하고 이듬해 이를 다시 마르크화로 교환함으로써 다소 경기를 부양시켰다. 독일경제의 안정을 위해 연합국은 배상지불을 연장하는 도스안(案)을 제시했으며, 로카르노 조약으로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포기하고 서부 국경을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연합군의 라인란트 철군과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이 성사되었다. 이에 따라 연합군의 군사관리위원회는 해체되고 미국 대표 을 의장으로 하는 배상조정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대규모의 외국자본이 유입됨에 따라 독일의 대외무역도 점차 회복세를 보였으나 외부 투자에 의존한 독일 경제의 회복과 번영은 1929년초부터 외국군의 철수와 함께 대부금이 회수되기 시작함으로써 정체되기 시작했다(→ 1929년증권시장붕괴). 세계공황의 여파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독일에 더 큰 타격을 주었으며 거듭되는 혼란 속에서 미약한 정치세력에 불과했던 나치가 제1당으로 부상하는 정치상황이 전개되었다.

 

1930년 3월 공화국 의회는 예산안 채택문제를 놓고 진통을 겪고 있었다. 브뤼닝 내각은 헌법에 규정된 긴급권을 발동, 난국을 수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의회는 해산되었다. 새로이 실시한 총선에서는 조직적 폭력과 선동이 난무하는 속에서 공산당과 나치당의 위세가 크게 진작되었다. 브뤼닝은 사회민주당의 지지를 받아 총리직에 올랐지만 공황으로 초래된 경제난국을 타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은행들이 연이어 도산했고 1931년초 독일의 실업자 수는 6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기가 만료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1,935만 표를 얻어서 1,341만 표를 얻은 히틀러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비록 인기는 없었지만 대통령과 군의 후원을 받아 출범한 파펜 내각은 로잔 회담에서 유럽 부흥기금 30억 마르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배상의무에서 완전히 놓여나는 데 성공했다.

 

1932년 선거에서 나치당은 230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나치는 9월에 내각 불신임 의결을 유도했으나 파펜 내각은 의회를 해산하고 긴급권을 발동시켜 비상정국에 대처했다. 파펜과 함께 통치책임을 분담했던 슐라이허의 사태수습 노력은 중도파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파펜은 나치에 접근하여 연립내각구성을 제안했는데 이로써 각료의 수가 적은 히틀러의 행동을 구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집권과 제2차 세계대전

 

총리가 된 히틀러 휘하의 각료 11명 중 나치 당원은 3명에 지나지 않았다. 1933년 3월 아돌프 히틀러는 다수 의석의 확보를 위해 총선을 요구했다. 나치당의 강령은 국가기구를 총동원하여 선전되었고 나치가 장악한 경찰은 친위대와 돌격대의 활동을 원호했다(→ 제3제국).

 

1933년 의사당방화사건이 일어나자 나치는 이를 권력을 찬탈하려는 공산당의 음모로 조작 발표했고 정부는 긴급권을 부여받았다. 공포 속에 진행된 선거의 결과 나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히틀러는 강압적 수단을 동원, '수권법'(授權法)을 통과시켰다. 히틀러의 독재권은 바이마르 헌법을 토대로 구축된 것이었으므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필요는 없었다.

 

전권을 위임받은 히틀러는 국가재건법을 비롯한 일련의 법규제정에 착수, 주 의회의 폐지, 지방 권력의 중앙으로의 이양, 노동조합의 폐지, 나치당 이외의 정당에 대한 탄압 등을 포고했다. 집권 초기에 히틀러가 직면한 가장 큰 난관은 강력한 조직으로 남아 있던 국방군과 나치 돌격대 사이의 알력이었으나 돌격대장 에른스트 을 전격적으로 체포·처형함으로써 어느 정도 문제의 해결을 보았다. 힌덴부르크가 서거하자 히틀러는 국방군 사령관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과 최고사령관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총통에 오른 히틀러는 게슈타포·친위대·돌격대 등의 테러 조직을 동원, 독일(제3제국)을 전체주의 경찰국가로 변모시키기 시작했고, 교육·예술·보도매체 등의 주요 국가기관들은 나치당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히틀러유겐트의 이념이 젊은이들에게 교조적으로 주입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 역시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나치의 인종주의 정책은 모든 유대인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유대인과의 혼인을 법으로 금지했다. 유대인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군 점령지역에서는 수백 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600만 명의 실업자를 물려받은 나치 정권은 대규모 공공사업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노동력을 다시 거대 규모의 재군비사업에 투여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 6년 동안 약 510억 마르크를 각종 사업에 투자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재군비를 추진했으며 국제연맹과 군비축소회의에서 탈퇴할 것을 선언했다. 자르의 영유권 문제를 놓고 실시된 인민투표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구속을 공공연히 거부하고 군병력을 35개 사단으로 확충했으며 징병제를 강행했다.

 

히틀러의 외교정책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영국과 맺은 해군조약은 프랑스를 분노시켰으며 에티오피아 점령을 둘러싼 이탈리아와 유럽 열강 사이의 분쟁은 나치 독일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936년 스페인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다시 이듬해에는 일본과 반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했으며 소련과의 상호원조조약을 비준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무효화하고 라인란트의 재무장을 강행했다(→ 스페인 내란).

 

연합국의 수수방관 속에 재군비를 완료한 히틀러의 첫 목표는 오스트리아의 병합이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 내 나치당에 의한 권력찬탈에는 실패했으나 군사적 위협 속에서 진행된 오스트리아 총리와의 협상에서 병합문제를 인민투표에 부칠 것을 강요했다. 그후 히틀러는 의도를 바꾸어 무력으로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체코슬로바키아주데텐란트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이 자치를 요구했을 때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로 하여금 체코 정부에 압력을 가하도록 만들었다. 히틀러와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과의 회담으로 주데텐란트 거주 독일인의 민족자결은 승인되었고 프랑스도 이에 동의를 표했다.

 

히틀러는 폴란드에 대해서도 단치히(그다인스크) 자유시를 반환할 것과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잇는 도로와 철도의 건설을 구실로 영토의 분할을 요구했다.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하고 유화정책을 포기한 영국은 어떠한 무력위협 앞에서도 폴란드를 지킬 것을 단호히 천명했다. 1939년 히틀러는 폴란드와의 불가침조약과 영국과의 해군조약을 폐기했다. 히틀러는 영국·프랑스·소련의 대(對) 독일 견제노력이 난조를 보이고 있음을 확인하고 소련과 비밀조약을 체결했다. 독·소불가침조약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는 동유럽, 특히 폴란드 분할에 합의했다. 폴란드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보장이 철회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영국은 폴란드와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의 의사를 확인한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히틀러는 폴란드 공격을 국지전으로 쉽게 끝내고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점령, 발트 해로의 출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독일은 네덜란드·벨기에·프랑스 침공을 개시하고 대서양 연안까지 진출하여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차단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잇달아 항복했고 영국인들은 독일 공군의 공습에 시달렸다(→ 영국 공습). 독일의 승리에 힘입은 이탈리아도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발칸 전선은 1939년 6월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함으로써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이탈리아군을 후원하기 위한 전투는 크레타 섬의 점령과 북아프리카에서의 로멜 작전의 성공으로 이어졌고 군수뇌들은 지중해를 무대로 하는 중동작전까지 요구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관심은 동부의 소련을 향하고 있었다.

 

소련 침공은 1941년 6월에 시작되었다. 독일의 기갑사단은 처음에 별 무리없이 내륙 깊숙이 진출했으나 12월에 들어서자 혹독한 추위와 예기치 못한 소련군의 저항을 받아 전세가 기울어졌고 히틀러와 군지휘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결국 총통 자신이 야전군의 지휘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전쟁을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시켰다. 독일은 곧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1942년 이후 유보트(U-boat) 작전의 수행을 위해 구축함 건조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43년말까지 영국과 미국의 해군은 대서양에서 독일 해군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동부전선을 볼가 강까지 밀어붙이려 했으나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의 완강한 반격에 부딪혔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패배하고 말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지중해에서의 영국군의 새로운 공세와 미군의 알제리 상륙으로 1943년 여름 25만 명이 넘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튀니지에서 투항했다. 전쟁은 스탈린그라드와 북아프리카에서의 잇단 패배로 중대한 국면에 돌입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후방에서는 1942년까지 전쟁의 추이가 명백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었다. 연합군의 포위망 속에서 독일군은 피점령지역을 남김없이 약탈했다.

 

연합군이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고 1943년 무솔리니 정권이 타도되었다. 소련군은 중부 유럽까지 진격했고 독일군 참모부는 정략적 후퇴를 고려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1944년 여름에 동부전선이 붕괴되고 6월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소련군은 동부에서 진격하고 미군은 라인 강을 넘어 독일 영토에 진입했다.

 

전쟁중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군 내부의 계획은 실패를 거듭했고 1944년 7월의 쿠테타 역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1945년 4월 20일 히틀러는 총리관저 지하방공호에서 자살했으며 후계자로 지명된 되니츠 제독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받아들였다.

 

분단과 통일

 

독일군의 항복으로 제3제국은 소멸하고 4개 연합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점령지역 통치를 분담하게 되었다. 독일 통치를 위한 연합국 관리위원회가 구성되고 소련 점령지역 내의 베를린은 전승 4개국이 공동으로 통치했다(→ 연합국 통제 위원회, 분단국가).

 

포츠담 회의는 독일을 분할하지 않고 어떤 형태의 중앙기구를 갖는 단일경제단위로 취급한다는 원칙을 선언했다. 동프로이센의 대부분을 소련이 영유하고 오데르나이세 강 동쪽의 독일 영토를 폴란드에서 관할하게 됨에 따라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확정된 영토의 23%를 상실하게 되었다.

 

연합국의 독일 관리는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미국·영국·프랑스의 대(對) 독일정책에 차이가 있었고 소련이 연합국의 입장을 무시한 점령정책을 강행했기 때문이었다.

 

1946년 영국과 미국의 점령지역이 경제적으로 통합되자 소련과 프랑스가 이에 반발했으나 1948년에는 서방 3개국 관할 지역에 통화개혁이 단행되어 단일경제체제가 구축되었다. 전쟁중의 계획경제는 시장경제로 전환되었고 마셜 플랜의 원조하에 경제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소련은 마셜 플랜에 대한 보복으로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으나 서방측은 공수작전(空輸作戰)으로 이에 대응했다(→ 베를린 봉쇄와 공수).

 

1949년 5월 23일 단일경제체제가 형성된 서부지역에 헌법을 대신할 기본법이 공표됨으로써 '독일연방공화국'이 탄생했다. 연방의회는 기독교민주당의 아데나워를 초대 연방 총리로 선출했다.

 

기본법에 나타나는 서독 민주주의의 특색은 강력한 중앙집권 대신에 연방주의를 택하고, 대통령이 직접선거가 아닌 연방의회에 의한 간접선거로 선출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기본법의 안정기조는 연방공화국의 정치적 발전으로 이어졌다. 서방 지향적 외교관계를 추구한 연방공화국은 1954년 서방 9개국과 파리 협정에 조인하고 1955년에는 유럽 공동체(EC)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으나 동독과 국교를 수립한 동유럽 국가(소련을 제외하고)는 승인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했다.

 

분단된 또 하나의 독일, 즉 동독의 정치·경제·사회 발전은 연방공화국과는 판이하게 전개되었다. 독일 공산당은 소련 점령기에 이미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를 구축하여 농지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민간소유의 산업기반을 박탈했다. 동독의 공산정권은 1949년 10월 인민의회에서 '독일민주공화국' 헌법이 발효됨으로써 공식 수립되었으며 공산당을 중심으로 개편된 '사회주의통일당'의 정치국이 최고 권력기관이 되었다. 계획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한 동독 경제는 국가수립 직후부터 서독이 마셜 플랜의 혜택을 받은 것과는 달리 소련과 폴란드 정부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동독 정부는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로 구성되는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에 가입함으로써 중앙통제적 계획경제에 종속되었다. 농업집단화가 추진되고 노동생산성제고의 일환으로 노르마 향상이 강요됨으로써 농민과 노동자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서독으로 도주하는 동독인의 수는 해마다 늘어났고 1953년 6월에는 폭동사태까지 초래되어 소련군이 출동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불안상태가 계속되자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서방측 선동을 차단한다는 구실로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구축되었다.

 

정치적 안정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진 서독 사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경제불황과 함께 신나치 극우정당의 등장과 급진적 학생운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연립내각이 발족되고(1966), 1969년에는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의 연립내각이 출범하여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가 연방공화국의 총리로 취임했다. 브란트는 동유럽 국가와의 수교를 지향, 할슈타인 원칙을 청산하고 동독을 승인함으로써 '1민족 2국가'원칙을 추구했다. 동·서독의 국교정상화는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에 힘입은 바 컸다.

 

베를린 장벽이 구축된 후 동독은 노동력의 유출이 중지되고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았다. 때마침 탈스탈린주의의 여파를 타고 계획경제의 테두리 안에서도 '신경제체제'가 모색되었고 사회주의권 내에서 꾸준한 경제발전을 이루어갔다.

 

그러나 경제분야의 개혁과는 대조적으로 이데올로기면에서는 오히려 통제가 강화되었고 다른 동유럽 국가가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 접근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소련과의 정치적·군사적 유대를 더욱 강화해나갔다. 1971년 울브리히트를 이어 에리히 호네커가 당 제1서기에 올랐다.

 

1982년말 서독에서는 기독교민주당의 헬무트 이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어 사회민주당의 오랜 집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서독의 정치풍토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의 전쟁책임론과 역사발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부터 해방되어 독일 역사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는 쪽으로 쇄신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논의의 배후에는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비판적 관점과는 달리 서독의 경제적·정치적 우위가 결국은 독일의 재통일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큰 역할을 했다.

 

서독의 생산량은 유럽 공동체 전체 생산량의 27%를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대외무역량에 있어서도 미국·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서독의 경제성장은 자유경제체제를 근간으로 국가의 일정한 규제를 허용하는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의 원리'에 힘입고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 동독 정부는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에서의 민주화 경향에 날카롭게 대처했다. 더욱이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제창하여 스탈린주의 노선을 청산하고 '위로부터의 개혁'에 착수하자 새로이 '동독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강한 제재를 가했다. 동독의 경제는 다른 공산주의 국가보다 나은 편이기는 했지만 서독 국민들이 누리는 생활수준이나 엄청난 구매력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동독 정부는 1986∼90년의 경제5개년계획을 발표하고 노동의 효율성 제고, 노동생산의 가속화, 에너지와 자원의 절약을 강조했으나 이내 심각한 생태계 파괴와 기술적 낙후라는 난관에 봉착했다. 총선은 국민의 불만을 반영했다. 공산주의 국가의 선거는 100%에 가까운 지지율을 보이는 것이 통례이지만 1989년 공산당 정부는 개표조작이 불가피했고 격렬한 항의시위를 촉발했다.

 

베를린 장벽은 동·서 냉전의 상징물로 인식되어왔으나, 1989년 11월 ...
1989년 5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쪽 국경선을 개방하자 엄청난 출국사태가 빚어졌다. 동독인들은 부다페스트의 서독대사관과 동베를린의 서독 연락사무소에 몰려와 서독으로 망명을 요청했다. 9월 11일에는 반체제 인사들이 노이에스 포룸(Neues Forum)을 조직, 30만이 참여한 라이프치히(1989. 10. 4)를 비롯하여 동독의 각 도시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주동했다. 10월 18일 에리히 호네커가 축출되고 에곤 크렌츠가 제1서기직을 승계했다. 민중의 힘은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고 이와 동시에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배체제도 무너졌다. 공백기의 정치질서는 다양한 정파가 마주앉은 이른바 '원탁회의'에 의해 유지되었다.

 

1990년 3월 10일 실시된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는 조기 통일을 주장하는 기독교민주당의 압승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23조에 의거,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에 흡수 통합되는 기본절차가 갖추어졌고 4월 23일에는 동독에 비공산 연립내각이 수립되어 개헌의 조건을 갖추었다. 5월 18일 본에서 국가조약이 조인되고 양 독일의 경제·사회 통합이 결정되었다. 같은 해 7월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독일의 NATO 가입을 승인했고 이로써 독일 통일을 가로막는 국제적 장애는 사라지게 되었다.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4 외무장관 회의에서 최종규정 조약이 조인된 데 이어 마침내 10월 3일 분단 41년만에 하나의 독일이 탄생했다.

 

같은 해 12월 2일 실시된 최초의 통일 독일 선거에서 기독교민주연합과 기독교사회연합이 43.8%의 득표로 최대강자로 부상했다. 11%의 표를 얻어 연정구성 협상에서 실력을 행사하게 된 자유민주당의 약진으로 인해 콜 총리의 공식 재선은 다음 해로 연기되었다. 콜 총리는 선거 전에 세금인상이 없을 것이라고 공약했으나 통일 직후 첫 해에 서독 지역 주민들은 동독 지역을 부흥시키는데 소요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내야했다. 한편 동독 지역 주민들은 대량의 실업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불만이 양 지역에서 극우 및 극좌 집단의 테러로 나타났다. 1991년말에는 1,400억 마르크를 동독 지역 경제에 쏟아부은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직업훈련·고용창출 정책에 힘입어 단기노동자의 수가 줄면서 실업률 증가세가 다소나마 둔화된 것이다. 같은 해 6월 20일 연방하원 자유선거에서 근소한 표차로 정부 소재지를 본에서 베를린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것 또한 동독 지역의 그늘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92년에는 경제약화가 심화되어 예상에 못 미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콜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연립정부는 서독 지역의 세수 감소와 동독 지역의 탈공산주의 노력을 보조해야 하는 절박한 요구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는 공약을 또 한번 어겨야 했다. 문제 해결 능력이 없어 보이는 정부와 정당들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급격히 증가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독일로 망명하는 경제난민들의 숫자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었다. 외국인에 대한 폭력이 증가했고, 극우 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1993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한 경제침체를 겪었고, 실업률은 기록적인 수치를 보였다. 같은 해 말에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대한 비준 절차를 완료함으로써 유럽공동체(EC)의 12번째 마지막 회원국이 되었다. 1994년에 들어서면서 독일 경제는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해 4월에는 통일 이후 처음으로 실업률이 약간 감소했으며 기업들의 설비투자도 재개되었다. 한편 7월 12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 군대의 국제안보임무 참여를 허용하는 역사적 판결이 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해 내려졌다.

 

Macropaedia| 李敏鎬 참조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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