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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 [英國史, England and Great Britain, history of]
중석기시대말까지도 브리튼 섬은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어 떠돌이 사냥꾼들이 쉽게 드나들었다(→ 수렵채취 사회). BC 11000년경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점점 더 따뜻해지자, 툰드라가 삼림으로 바뀌고 순록 사냥 대신 붉은사슴과 고라니 사냥이 널리 행해졌다. BC 6000~5000년경에 브리튼이 대륙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이주가 어려워졌다. 이때부터 브리튼은 발전된 유럽 대륙의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기보다는 이를 받아들이고 이용함으로써 섬나라 특유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유럽의 서쪽이나 서북쪽 해안 지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BC 4000년 무렵 농업을 들여왔다. 그후 BC 2000년대초에 네덜란드 지방과 라인 강 중류지방에서 건너온 비커족(Beaker Folk)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인도유럽어를 들여왔을 것이다. 교역을 장악한 이는 웨식스의 족장들이었는데, 그들의 호화스러운 무덤들을 통해서 그들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알 수 있다. 상업이 크게 발달해 콘월과 아일랜드, 중부 유럽과 발트 해에 이르는 중개무역이 번성했다. 이처럼 번성한 덕택에 웨식스의 족장들은 스톤헨지로 알려진 선돌기념물을 세울 수 있었던 것 같다.
BC 8세기 무렵부터 켈트족이 등장해 구릉지대에 성채를 구축했다. BC 2세기에 이르면서 브리튼에는 섬나라 특유의, 그리고 켈트 고유의 문화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갈리아의 벨기에 지역에서 더 많은 부족들이 이주해오면서부터 로마의 역사가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브리튼의 여러 부족들이 나타났다(→ 인구이동). BC 55~54년에 로마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략을 받은 뒤부터 브리튼(브리타니아)은 로마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후 약 90년 뒤 로마는 본격적으로 이 섬의 정복에 착수했으며, AD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섬의 남동부 지역(지금의 잉글랜드)을 정복하여 이를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 49년에 지금의 콜체스터(카무로두눔)에 콜로니아(colonia)를 건설했는데, 그것은 복무를 마친 군인들을 전략적 요지에 배치한 일종의 예비군 주둔지였지만 로마의 도시 생활의 보기를 브리튼인들에게 보여주는 구실도 했다.
로마인의 정복으로 로마 문명이 브리튼 섬에 전파되었다. 도시가 세워지고 황제숭배의식이 행해졌으며, 상인들은 부지런히 브리튼인에게 로마 물질문명의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1세기 후반 이래 로마인들이 웨일스를 점령하고 스코틀랜드 지방으로 진출함에 따라 남부지방에서는 군대가 떠나가고 대신 키비타스가 지방 행정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것은 주민 대부분이 토착민들로 구성된 하나의 행정구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키비타스 중심으로 추진된 도시화 계획과 주민교화사업이 2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로마의 웨일스 정복은 78년에 완수되었으나, 스코틀랜드 침입은 실패하고 말았다. 섬 전체를 점령하기에는 인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북부에 경계선을 마련하려는 몇 번에 걸친 시도 끝에 마침내 솔웨이 만과 타인 강 사이의 지협이 경계선으로 선택되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곳에 돌로 된 성벽을 쌓았다(122~130). 이것이 로마 제국에서 가장 거창한 국경선 방벽으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다.
로마인의 정복 이전에 벌써 브리튼은 곡물 이외에 금·은·철·가죽·노예·사냥개 등을 수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의 기반은 역시 농업에 있었다. 로마인의 정복은 농업 생산을 크게 자극했는데, 그것은 군에서 필요한 식량을 공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로마화 현상은 도시의 상층 계급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농촌지역에서는 켈트어가 계속 사용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라틴어와 켈트어 2가지 말을 사용했다. 벽이나 바위의 흔적들을 보면 심지어 수공업 장인들까지도 라틴 문자를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브리튼 섬의 로마 문명은 4세기에 큰 번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브리튼에 주둔한 로마 군대가 게르만족들의 제국령 침범을 막기 위하여 철수하게 되면서, 브리튼은 점차 로마의 지배와 보호에서 떨어져나오게 되었다. 367년에 스코틀랜드의 픽트족과 아일랜드의 스콧족이 바다를 통해 합동 작전으로 침범해왔을 때 브리튼은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후로도 계속된 군대의 철수로 방어력은 더욱 약해졌는데, 407년 브리튼 주둔군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콘스탄티누스 3세가 더 많은 군대를 갈리아 지방으로 철수시키자 섬에 남은 병력으로 픽트족과 색슨족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브리튼인들은 정통 황제인 호노리우스에게 호소했으나, 황제는 원군을 파견할 수가 없었고, 다만 자체 방어할 권한을 브리튼 각 도시에 부여하는 데 그쳤다(410). 이것으로 로마인의 브리튼 지배는 종말을 고했다.
앵글로색슨 시대의 잉글랜드
앵글로색슨 시대의 잉글랜드 |
브리튼 토착민들의 처지가 그후 어떻게 변했는지를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7세기말 무렵 모든 주민들이 자기 자신을 '잉글랜드인'으로 의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단일체 의식은 험버 강 이남의 모든 왕국들이 단일한 통치자, 즉 브레트월다의 통솔권을 인정한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점차 강화되어갔다. 로마인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브리튼에 전파했으나 앵글로색슨족이 침입하자 웨일스 지방으로 쫓겨났다. 597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에서 켄트로 선교단을 이끌고 오면서 그리스도교는 다시 전파되기 시작했다.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은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공로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잉글랜드인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켄트에 상륙한 지 10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잉글랜드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최첨단 중심지가 되었다. 캔터베리는 유명한 학교가 되었으며, 거기서 훈련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을 잉글랜드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했다. 신학이 가장 발달한 중심지는 노섬브리아였다. 이곳에서는 켈트의 영향과 그리스·로마의 영향이 함께 융화되었다. 이 시기에 배출된 유명한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비드(672경~735)는 노섬브리아 동쪽 해안의 재로 수도원에서 살았다. 고대 잉글랜드의 서사시 〈베오울프 Beowulf〉는 이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정확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앵글로아일랜드 양식의 장식 글자 필사본이 발달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인데, 그 가장 뛰어난 보기는 린디스판 복음서들이다. 교회에는 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잉글랜드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필사본과 공예품들을 자신들이 세운 해외 교회로 가져갔으며, 그래서 거꾸로 이런 교회들이 그와 같은 필사본과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브리튼에 대한 바이킹의 소규모 산발적인 습격이 8세기말에 시작되었고 9세기에는 대규모의 약탈적 침입이 자행되었다. 865년 가을에 데인족 대군이 이스트앵글리아에 쳐들어와 요크를 점거했으며, 머시아는 돈을 주고 그들의 침략을 모면했다. 871년 그들은 웨식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웨식스의 왕 앨프레드는 877년 이들 데인족들을 웨식스 영토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앨프레드가 승리함으로써 데인족이 잉글랜드 전체의 주인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므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이후 웨식스가 데인족의 지배하에 들어간 적은 없었으며, 그 다음 세기에는 웨식스가 데인족이 점거했던 영토를 되찾았다. 927년에 앨프레드의 손자 애설스탠이 노섬브리아를 차지해 전(全)잉글랜드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가진 최초의 국왕이 되었다. 웨스트색슨(웨식스)의 왕들은 전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됨으로써 웨스트색슨족·머시아족·데인족 영토 등 여러 법률과 다양한 관습을 가진 지역들을 다스려야만 했다. 행정구역이 점차 통일되었지만 왕들은 지방의 특수성을 없애려 하지는 않았다. 머시아는 웨식스를 따라 몇 개의 주(shire)로 나뉘었다(→ 셔). 주보다 더 작은 행정구역이 언제부터 '헌드레드'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은 이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인 행정단위가 되었다.
바이킹의 침입은 980년에 다시 시작되었으며, 그후 점점 더 힘이 거세어졌다. 계속되는 전쟁과 침입자들을 달래기 위해 바친 과중한 공납으로 지칠 대로 지친 잉글랜드인들은 1013년에 덴마크 왕 스벤(스웨인)을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였다. 약간의 저항이 있기는 했으나 스벤의 아들 크누트는 1016년 잉글랜드 전체의 왕이 되었다. 크누트는 몇몇 유력한 잉글랜드인을 무자비하게 처치했지만, 통치 자체는 폭군적인 것은 아니어서 그의 통치기간은 오히려 평화스런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1035년 크누트가 죽자 왕위를 요구하는 사람이 여러 명 나타났고 이때문에 불안 상태가 계속되었다. 1042년에 잉글랜드계의 참회왕 에드워드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데인족의 침입으로 노르망디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에드워드의 궁정에는 그의 총애를 받는 몇몇 노르만인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다. 이때문에 머시아와 웨식스의 백작들이 그에 반항했다. 추방되었던 웨식스 백작 고드윈이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오자 에드워드는 그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해럴드는 유능한 통치자가 될 만한 사람이었으나 적대 세력의 힘이 너무 강했다. 교황청은 해럴드의 왕위계승을 반대하고, 로마에 대한 충성을 지켜온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입을 축복했다. 이와 같은 교황의 지지 덕분에 윌리엄은 여러 지방에서 군대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해럴드는 북쪽에 침입한 노르웨이군을 스탬퍼드브리지에서 격퇴한 지 3주도 못 되어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엄과 맞서게 되었다(→ 헤이스팅스 전투). 그결과 해럴드는 피살되었고 윌리엄은 1066년 크리스마스에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노르만인(1066~1154)
정복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완수되지는 않았고 잉글랜드의 반항은 107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복의 결과는 노르만 귀족에 대한 잉글랜드의 완전한 예속이었다. 정복왕 윌리엄 1세(1066~87 재위)는 180명이 채 못 되는 부하들에게 영지를 분봉해주어 왕의 직속봉신으로 삼았다. 정복 전의 잉글랜드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성(城)이 행정과 군사조직의 기반이 되었다. 윌리엄은 처음에는 앵글로색슨의 행정조직을 별로 변경하지 않았으나 통치 말년에 이르러서는 중요한 행정관리들이 모두 노르만인이었다. 고위 성직자들 또한 세속 사회 방식을 따라 노르만화하고 봉건화했다(→ 봉건제). 당대의 연대기에서 윌리엄은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하고 넓은 지역을 유린한 무자비한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가 이룬 가장 큰 공헌 가운데 하나는 잉글랜드를 대륙과 연결시킨 점일 것이다.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한편, 라틴어가 교회와 행정기관의 용어가 되었다.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두 아들인 윌리엄 2세(1087~1100 재위)와 헨리 1세(1100~35 재위) 때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가 계속되었으며,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와의 유대가 강화되었다. 전반적인 견지에서 볼 때 노르만 시대는 건설적인 시대였다. 경제는 본질적으로 농업을 위주로 했다. 도시들이, 그중에서도 특히 런던이 번성했다. 교회는 대륙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럼 대성당이나 런던 탑 같은 훌륭한 건물, 윈체스터의 성서와 〈시편〉의 장식 글씨는 이 시대의 뛰어난 건축과 미술 솜씨를 보여준다.
플랜태저넷 왕가(1154~1399)
헨리 1세의 사후 약 20년간은 혼란기였다. 그의 딸 마틸다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내분과 혼란이 일어난 뒤 1154년에 그녀와 앙주 백작 조프루아의 아들인 헨리 플랜태저넷이 헨리 2세(1154~89 재위)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잉글랜드의 법률제도와 군사제도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대배심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법률문서가 표준화됨으로써 법률행정이 크게 간편해졌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사자심왕 리처드 1세(1189~99 재위)는 주로 십자군원정에 관심을 쏟았던 까닭에 잉글랜드에 머문 것은 10년 동안의 통치기간 중 6개월뿐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으로부터 귀국하는 도중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5세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으나 몸값과 그밖의 여러 가지 세금을 거두느라 왕국의 기틀이 약해졌으며, 그의 후계자는 어려운 부담을 물려받게 되었다. 형 리처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존(1199~1216 재위)은 잉글랜드의 왕들 가운데 가장 미움받은 왕이었다. 형과 같은 군사적 능력을 갖지 못한 그는 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 영토를 거의 모두 잃어버렸다. 또한 교회와 충돌해 교황에게서 파문당했다. 잃은 프랑스 영토를 되찾으려는 시도는 무거운 세금부담과 불필요한 군사적 징발을 가져왔다.
1215년 수많은 귀족들이 러니미드에서 존 왕을 만나 '귀족의 요구사항'(Articles of the Barons)으로 알려진 문서를 제시했는데, 이 문서를 바탕으로 대헌장(Magna Carta)이 만들어졌다. 귀족들은 플랜태저넷 왕가 치하에서 이제껏 봉건적 특전들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고 누려왔지만 존이 이를 무시하고 전제권을 행사하자 여기에 대항해 보호책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귀족들은 국왕이 법 위에 있지 않고 법 아래 있음을 확인시키려 했다. 이 문서는 존의 아들 치하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다시 공포되어 교황의 승인을 받았고, 그결과 1225년판 대헌장은 영구적인 국법의 일부가 되었다.
13세기 동안에 잉글랜드에서는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realm)라는 개념과 더불어 의회제도가 발달했다. 왕국이 하나의 공동체이며 따라서 그 공동체의 대표자들에 의해서 통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처음 제시된 것은 어린 국왕 헨리 3세(1216~72 재위) 대신에 섭정회의가 통치하고 있던 시기의 일이었다. 왕국 공동체라는 말은 처음에는 전체 귀족을 의미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과세에 대해 더욱 광범위한 동의를 얻을 필요가 있게 됨에 따라 공동체의 구성원 폭이 더욱 넓어졌다. 주(州) 공동체의 기사들이 지방 정치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을 맡도록 요청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국의 정치 무대에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되었다. 13세기에는 인구가 급속하게 팽창하여 약 500만 명의 수준에 달했다. 대지주들은 번영했지만 소농의 보유지 평균면적은 감소했다. 전잉글랜드 기사가 2,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대영주와 봉건적 차지인들 사이의 관계가 개인적인 것에서 법적인 것으로 변경되어감에 따라 그들 사이의 유대가 느슨해졌다. 도시는 계속 성장해갔지만 직물공업은 쇠퇴를 면하지 못했다. 교역 면에서 잉글랜드는 점점 더 원모 수출에 의존하게 되었다. 문화 면에서는 옥스퍼드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가 급속하게 발전해갔으며, 로버트 그로스테스트와 로저 베이컨이라는 약간 괴팍스럽지만 탁월한 지혜를 지닌 두 인물이 배출되었다. 1258년에 발포된 옥스퍼드 조례의 여러 규정들을 통해서 왕정에서의 귀족들의 소임이 더욱 커졌으나, 1260년에 이르러 이 규정들은 실효성을 잃게 되고 뒤이어 내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헨리 3세는 통치권을 되찾게 되었으며 치세말에 이르면 왕국 공동체는 국왕에 대항하는 대신 국왕과 협조하여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에드워드 1세(1272~1307 재위)는 왕국의 공동체 개념을 더욱 조성하고 주를 대표하는 기사와 도시의 시민 대표를 의회에 소집하는 관행을 한층 더 장려했다. 대표 소집은 과세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왕과 백성들 간의 의사소통의 길을 넓히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의회를 통해서 왕과 왕의 자문회의(council)에 청원하는 길이 크게 넓혀졌으며, 1295년에 소집된 '모범 의회'는 오늘날의 의회가 갖추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모두 간직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치세 말기에 웨일스·스코틀랜스·프랑스 등과 벌인 여러 차례의 전쟁은 잉글랜드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으며, 전쟁에 매달려 그 이상의 정치개혁과 법률개혁을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왕의 통치 성격도 변했다. 에드워드 2세(1307~27 재위)는 부왕이 안고 있던 몇 가지 문제점들을 이어받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20만 파운드가량의 재정적자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었다. 에드워드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난 결과 1311년의 칙령(Ordinances)이 발포되었는데, 이 문서에서 왕이 국정을 운영할 때는 의회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 최초로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에드워드 3세(1327~77 재위)의 치세 동안에 백년전쟁이 시작되고 흑사병이 일어났다. 백년전쟁은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에서 싸우고 있었을 때 프랑스가 스코틀랜드 편을 든 것과, 1294년 이래 계속되어온 가스코뉴에서의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전쟁 초기 단계의 상황은 불확실했으며, 전쟁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에드워드 3세 치하 국내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한이었다. 에드워드의 군대는 이제 봉건적 수단에 의해서 충원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이 용병의 임금 지급을 위해 화폐가 필요했던 왕은 점점 더 의회에 의존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 치세에 2개의 중요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교황이 잉글랜드 내의 성직을 임명하는 관행을 제한한 후임성직자규제법(1351)과, 성직에 관한 분쟁에서 로마에 상고하는 것을 금지한 교황존중처벌법(1353)이다.
1369년에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전황은 잉글랜드에 불리했다. 인기 없는 전쟁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에드워드 치세말에 인두세가 부과되었다. 리처드 2세(1377~99 재위)의 통치 초기에 부과된 세금들은 불공평하고 비현실적이었으며, 1381년 봄에 정부가 그 징수를 독촉하자 반란이 일어났다(와트 타일러의 난). 반란을 일으키게 한 불꽃은 인두세였지만 경제적 변화 및 정치적 발전과 관련된 더욱 근원적인 원인들이 있었다. 특히 정부는 치안판사의 권한을 확대함으로써 지방법원과 장원법원의 권한을 축소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법률제도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리처드 2세는 농민들에게 몇 가지 약속을 했으나 나중에 가서 그 약속을 무시해버렸으며 반란이 실패하자 국왕은 더욱 자신의 권력을 과신했다.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이 얻은 것은 고작 인두세 폐지에 불과했다. 농민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점에서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반란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경제적 변화의 결과였다. 종교적 불안과 개혁이 처음 나타난 것은 리처드 2세의 치하에서였다. 옥스퍼드의 신학자이자 신부인 존 위클리프는 1375~76년에 2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종교개혁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주권(dominium)의 행사는 신의 은총에 의존하며, 심지어 교황까지도 반드시 신의 은총을 받고 있지 않다면 주권을 행사할 정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화체설(化體說) 역시 부정했다. 1380년 그의 주장은 옥스퍼드의 신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그는 옥스퍼드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후에 롤라드 운동으로 알려지게 된 하나의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추종자들은 그의 교의를 전파하기 위하여 외부로 진출했고 성서를 영어로 번역했다. 리처드 2세는 의회와 충돌했으며 적대자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했다. 그러나 그는 1399년에 결국 폐위당하고 말았다. 1348년 흑사병의 발생은 인구감소 등으로 14세기의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361, 1369년 및 그 뒤에도 계속 병이 발생함에 따라 인구는 더욱 감소하여 심각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일으켰다. 1370년대에 들어서면서 임금은 엄청나게 상승하고 식품비는 하락했다. 이 기간에 지역에 따라서 인구의 약 1/3~1/2이 사망했으며, 13세기의 특징이었던 경제적 팽창이 멈추게 되었다. 문화면에서 14세기에 일어난 큰 변화는 영어 사용이 늘어난 점이다. 영어를 법률 용어로 삼으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공문서와 공공기록에서는 점차 씌어지기 시작했다. 랭커스터가의 헨리가 1399년에 왕위계승을 요구했을 때, 그는 영어를 사용했다. 초서는 프랑스어와 영어로 글을 썼지만, 중요한 그의 시는 영어로 씌어졌다.
랭커스터의 헨리 4세(1399~1413 재위) 역시 의회와 충돌했으며, 웨일스와 노섬벌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에 직면했다. 그의 아들 헨리 5세(1413~22 재위)는 프랑스와의 싸움을 다시 시작했다. 1415년에 소규모의 군대를 가지고 프랑스에 침입한 그는 아르플뢰르를 공략한 뒤 칼레로 진군했다. 아쟁쿠르에서 계속 나아갈 길이 막힌 잉글랜드군은 어쩔 수 없이 있는 힘껏 싸웠고 그결과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1417~19년에 헨리 5세는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프랑스에서의 사태 진전에 만족한 의회는 왕이 필요로 하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헨리 5세의 아들 헨리 6세(1422~61, 1470~71 재위)가 아직 어리던 1429년에 잔 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인들의 저항력을 한군데로 결집했을 때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부르고뉴의 필리프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자 싸움은 소모전이 되었으며, 1453년 무렵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영토를 잃고 말았다.
에드워드 3세의 후손들인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에 벌어진 투쟁인 이른바 장미전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헨리 6세의 무능과 그에 대한 요크 공작 리처드의 반대로 말미암아 일어났지만, 지방 유력자들 사이의 반목 또한 이에 작용했다. 왕이 분쟁을 해결하지 못함에 따라 싸움은 전국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요크가가 내란에서 승리한 결과, 리처드의 아들인 에드워드 4세(1461~70, 1471~83 재위)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초 몇 년은 반대 세력을 진압하는 데 보냈으나, 후반은 상대적으로 질서와 평화의 시기였다. 에드워드의 가장 큰 업적은 왕국의 위신을 회복한 점이었다. 에드워드가 죽은 뒤 두 어린 왕자는 숙부인 리처드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첫째아들인 에드워드 5세(1483. 4~6)는 즉위하자마자 리처드에 의해 동생과 함께 런던 탑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리처드는 1483년에 리처드 3세로 즉위했다. 그는 유능한 국왕으로 인정받았으나, 그가 조카들을 살해했다느니 또는 살해를 묵인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퍼지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가 국왕에게 바치는 헌금 형식으로 내오던 덕세(德稅)를 금지하고 잉글랜드 상인 및 수공업 장인들을 보호하는 입법을 만드는 등 인심을 얻을 만한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조치도 그가 배신자이며 사악한 숙부라는 소문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1485년 여름에 랭커스터 가계의 인물로서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인 헨리 튜더가 밀퍼드 헤이븐에 상륙하자, 리처드는 결국 지지자들에게 버림받았다. 리처드는 보즈워스 평야의 전투에서 패배해 죽었다(→ 보즈워스 전투).
15세기 전기간에 걸쳐 잉글랜드는 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토지 시장이 크게 발달해 농민들 가운데는 이웃 농민들보다 높은 지위로 상승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요먼리라 불린 계급을 형성했다. 대지주들은 토지의 직접 경영보다 임대차제도를 선호했다. 잉글랜드는 여전히 농경사회였지만, 도시에서는 중요한 발전과 변화가 일어났다. 런던은 계속 성장하여 동남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다른 지방에서는 양모공업이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15세기는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불모의 시대였으나, 학교와 대학의 설립이라는 점에서는 중요한 시기였다. 교회 예배당에 부속된 학교가 세워졌는가 하면, 어떤 것은 길드에 의해서도 세워졌다. 헨리 6세는 1440년에 이튼 고등학교를, 그리고 1441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 칼리지를 설립했다. 옥스퍼드대학교 및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다른 칼리지들도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튜더 왕가(1485~1603)
1485년에 헨리 튜더가 헨리 7세(1485~1509 재위)로 왕위에 올랐을 때 118년 동안 이어질 튜더 왕가의 지배가 시작된 것을 예견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1399년 이래 6명의 군주는 등장했다가 바로 사라졌으며, 왕위를 차지하려는 적대자들 사이에 큰 싸움만도 최소한 15차례나 벌어졌다. 싸움에 승리한 뒤 헨리는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으며, 이렇게 해서 랭커스터가와 요크가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경제적 성장과 사회적 변화는 헨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헨리가 등극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왕국은 14세기 후엽 이래 지속되던 인구 격감과 농업 불황에서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15세기말에 가까워지면서는 회복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원모 수출 대신에 모직물의 수출이 급격히 늘어났다. 중세 방식의 토지보유제도와 공동경작제도가 서서히 무너져갔다. 장원의 공동보유지는 분할되어 울타리가 쳐졌으며(인클로저 운동), 등본(장원 법정에 기록된 문서) 또는 불문 관습에 의해서 토지를 보유하고 있던 차지농은 토지에서 쫓겨났다.
변화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토지를 가진 지방 젠트리 계층과 사회적 신분이 조금 떨어지는 상인과 법률가들이었다. 1500년에 이르러서는 장차 정치적·사회적으로 그 지위가 상승하게 될 지주 젠트리의 경제적 기반이 형성되고 있었다. 15세기의 주 기사(주 대표의원)들은 무책임하고 퇴락한 토지소유자에서 강력한 정부와 법의 지배를 바라는 존경할 만한 지주로 변모하고 있었다.
헨리는 의회를 통하지 않는 수입원을 늘리고 재판업무를 효율화함으로써 그의 지배권을 강화했다. 튜더 왕가의 왕들은 법의 힘이 왕국의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래서 지방의 법과 관습이 국왕의 법보다 오히려 더 구속력을 가졌던 중세적인 흐릿한 왕국의 모습은 국왕의 명령에 복종하는 충성스런 신하들로 가득 찬 단일국가의 모습으로 점차 바뀌었다. 1500년 무렵 국왕의 통치는 북부 여러 주와 웨일스까지 확장되었다. 1509년 헨리 7세가 죽었을 때 그는 안전한 왕위, 재정적 지급능력이 있는 정부, 기름진 영토, 그리고 상당한 정도로 통합된 왕국을 그의 아들에게 남겨주었다. 그러나 과거의 중요한 유산 가운데 한가지만은 손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바로 로마 가톨릭 교회였다.
16세기 전반기에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획기적 사건들은 전 유럽에 걸쳐 일어나고 있던 종교개혁을 배경으로 관찰해야 한다. 중세 교회는 변화하고 있던 경제적 현실, 정부 구조, 사회적 가치관 등 16세기의 현실과 동떨어진 시대착오적 존재가 되어 있었다. 교회는 또한 그 내부에서부터 쇠퇴해가고 있었다. 부재성직제도와 겸직제도가 성행하고 있었으며, 주교와 고위성직자들은 세속에 몰두해 교회 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개혁운동은 대륙에서 먼저 터져나왔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위클리프 시대에 시작된 롤라드 운동이 16세기에 이르자 다시 활력을 얻었다. 헨리 8세(1509~47 재위)와 그의 대법관(chancellor)인 울지 추기경은 종교적 사건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잉글랜드를 국제정치와 전쟁의 와중에 끌어넣었다. 그러나 헨리와 울지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사이에 벌어지고 있던 대륙의 싸움에서 잉글랜드의 국제적 지위를 과대평가했다. 1525년에 카를은 프랑수아를 참패시켰다. 이탈리아는 황제의 군대에 유린당하고 교황은 황제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전 유럽이 정복자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까지 대륙의 외교에서 지렛대의 받침목 노릇을 해오던 잉글랜드는 2류 국가의 지위로 떨어졌는데, 이때 마침 헨리는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을 내쫓으려 하고 있었다.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 불린과의 혼인을 성사시키려는 울지의 노력이 실패하자 헨리는 결혼 무효 선언을 얻기 위해 이번에는 국가의 주권을 들고 나왔다. 그래서 소위 '종교개혁 의회'라는 전례없는 의회가 1529년 11월에 처음 열리게 되었다. 이 의회는 7년 동안 지속되어 137개의 법률을 제정했으며, 이전의 의회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서까지도 개입하여 입법했다. '의회 내의 국왕'이라는 제도가 중세적 교회를 무너뜨린 혁명적 기구가 된 것이다. 국왕을 잉글랜드 교회의 우두머리로 인정하고 잉글랜드를 교황으로부터 단절시킨 법이 제정되었다. 교회와 국가가 별개의 실체이며 신의 법이 인간의 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중세적 교리는 법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새로운 잉글랜드 교회는 사실상 튜더 국가의 한 부서가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쇄는 수도원 해산을 가져왔고 1539년에 이르러 크고 작은 수도원들이 모두 해산되었다. 약 2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재산이 국유화되어 왕령으로 편입되었는데, 그결과 정부의 수입은 평화시에 비해 거의 2배가 되었다. 그러나 헨리와 그 뒤를 이은 왕들은 이렇게 해서 얻은 재산을 팔지 않을 수 없었다. 튜더 왕가가 끝나는 1603년에는 몰수한 수도원령의 3/4이 지주 젠트리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튜더 시대의 가장 유력한 사회층이 그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로마 가톨릭을 반대하는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헨리가 사망한 1547년 무렵 중세적 전통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국왕의 권력은 절정에 달해 일찍이 봉건적 국왕이 바랄 수 없었던 복종을 모든 국민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만사가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헨리의 유일한 적자 에드워드 6세(1547~53 재위)는 16세에 죽고 말았으며, 그후 메리 1세(1553~58 재위) 치하에 로마 가톨릭교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의 통치기간에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처형되었기 때문에 '피의 메리'(Bloody Mary)로 알려진 메리는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힘을 오히려 강화시켰다. 1558년에 왕위는 메리의 이복 동생 엘리자베스에게 넘어갔다.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재위)는 잉글랜드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오랜 동안 통치했다. 그동안 읽기와 쓰기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1640년까지는 거의 모든 젠트리와 상인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1560~1650년은 학교 건축과 교육시설 설립의 시대였다. 읽고 쓰는 능력이 이처럼 보급되지 않았더라면 청교도들이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며, 또 나중에 일어난 내란에서 온 나라를 휩쓸었던 이념의 차이에 입각한 정파들의 형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말로·스펜서·베이컨·던 등을 배출한 문화 면에서의 폭발적인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모험가들이 바다로 진출하고 세계적 식민제국의 건설 작업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였다. 거의 20년 동안 계속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엘리자베스는 점점 더 의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지주 계급의 의사를 반영하는 기구가 되어가고있던 의회는 차츰차츰 국왕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인 자각을 가지게 되고 경제적 지배권을 획득하게 된 젠트리의 목소리가 높아진 결과였다. 엘리자베스는 영국국교회를 다시 회복시켰다. 그렇지만 교리나 의식에 관해서는 무난한 방식을 택했다. 여왕은 교회의 최고 수장이라는 칭호 대신 최고 통치자라는 칭호를 가지게 되었으며, 1552년의 기도서는 로마 가톨릭교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받아들여 개정되었다. 많은 가톨릭적 교회장식이 그대로 간직되었다. 앞으로 적당한 시기가 되면 그 이상의 개혁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하면서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들은 우선은 이러한 타협을 용인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착각이었다. 왜냐하면 엘리자베스는 1559년에 협정된 종교적 결정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차 청교도로 불리게 된 급진적 프로테스탄트들은 금방 여왕과 대립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명실상부한 여왕이 되려 했다. 그녀는 강력하고도 유화적인 방법으로 하원을 길들였고,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을 불리한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유리한 조건으로 이용했다. 그녀는 왕실의 질서를 세우는 데 당시대의 계서제적 개념을 따랐다. 왕권은 신이 부여한 것으로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오직 국왕만이 신성한 존재는 아니었다. 왕국 전체를 대표한 것은 국왕만이 아니라 '의회 내의 국왕'이었다. 왕권과 의회의 이와 같은 신비한 결합체를 통제하는 기능은 여왕 자신에게 속한 것이었다. 국왕의 대리자 역을 맡은 추밀원이 모든 입법활동을 계획하고 추진했으며 의회는 이것을 법률로 제정했다. 튜더 왕들이 실현하고자 한 것은 어진 온정주의 정부였는데, 그것은 권위주의적 강권의 정체가 세심한 여론 조작, 화려하고 장엄한 의식, 지방 지주 젠트리들의 재정적·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이들 지배 엘리트층을 왕권과 결부시키려는 신중한 노력 등에 의해서 은폐된 그런 정부였다. 튜더 시대의 사회적 이상은 안정된 노동력의 공급을 보장하고, 사회적 유동을 제한하고, 경제적 자유를 억제하고, 그리고 백성들이 자기 삶의 궁극적 목적, 즉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 구원을 달성할 수 있는 왕국을 건설함으로써 하나의 안정된 계급구조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처음 10년 동안은 비교적 평온했다. 그러나 1568년이 지나면서 차츰 위기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 특히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엘리자베스의 친척이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1603년에 엘리자베스가 죽은 후 영국의 제임스 1세가 됨)의 어머니였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잉글랜드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반대하는 여러 음모가 발각됨에 따라 1587년 메리는 처형당했다. 스페인에 대한 전쟁이 그뒤를 따랐다. 스페인과의 대립은, 잉글랜드가 스페인에 대항해 싸우고 있던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원한 것과 스페인의 해상 운송에 대해 잉글랜드 상인과 해적들이 침략을 자행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싸움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배였다.
스튜어트 왕가와 영국내란(1603~60)
청교도혁명 때의 영국 |
로드의 교회개혁 방안은 곧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대한 간섭을 좌시하지 않았다. 1640년에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에 침입해 찰스로 하여금 다시 의회를 소집하도록 한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1640년 11월에 소집된 의회(장기의회)는 찰스의 의도를 불신했으며, 2가지 내용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첫번째 안은 의회의 존재와 신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었다(3년마다 의회를 소집하는 규정 설치, 성실법원과 고등 종교재판소의 폐지 등). 그러나 2번째 안인 교회개혁은 하원을 2개파로 갈라놓을 위험성이 있었다. 1641년에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의회는 군대를 찰스의 수중에 맡기느니 차라리 의회 자체의 군대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찰스는 그 결정은 물론 그밖의 의회가 강요한 사항들까지도 거절하고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기로 작정했다.
1642년에 내란이 시작되었으나 사실 그것은 국왕이나 의회나 국민들이나 그 누구도 바라지 않던 사태였다. 그것은 이기든 지든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인 싸움이었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은 결국 찰스를 패배시켰으나, 의회의 통제하에 있던 군대는 다음에 취할 행동을 몰랐다. 1646년에 군대가 정치적 투쟁에서 발언권을 주장하게 되자 내란은 혁명으로 바뀌었다. 의회가 찰스와 타협하려 한다고 믿은 군대는 1648년 하원의원들을 숙청했으며, 이렇게 해서 남은 잔부의회는 찰스를 재판할 고등법정을 설치하고 왕을 반역죄로 선고하여 처형했다(1649). 그후 계속된 승전으로 명성이 높아진 크롬웰은 1653년에 호국경의 자리에 올랐다(→ 보호정치).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 의회 지도자들, 군 지휘관들 사이의 의견 차이 때문에 호국경 정부는 계속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으며, 오직 크롬웰 혼자 힘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1658년에 그가 죽자 개혁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호국경 정부는 혼란에 빠졌고 군의 한 부대가 런던에 진입해 장기의회(長期議會)를 회복하고 국왕이 돌아올 길을 닦았다.
찰스 2세(1660~85 재위)는 왕정복고의 조건으로 몇 가지 사항을 약속했다. 일반사면령을 내리고 관용적인 종교적 결정을 추구할 것이며, 사유재산권을 보장할 것이라는 것 등이었다. 1660년에 새로 소집된 컨벤션 의회는 국왕과 상원의 복구를 선언하고, 군대를 해산하며, 국왕을 위한 고정 수입을 확정하고, 몰수된 재산을 국왕과 주교들에게 되돌려주었으나, 종교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기사의회(Cavalier Parliament)는 엄격한 영국국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립하고, 지주층과 성직자 사이의 제휴를 도모하기 시작했는데, 그후 수세기 동안 영국의 지역사회를 지배한 것이 이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국왕이 마지못해 서명한 심사령(1673)의 통과로 비국교도의 공직 취임이 금지되었다. 경제적인 면에서 찰스 2세는 꽤 넉넉한 재정을 물려받았다. 호국경 시대에 프랑스 및 스페인과 벌인 전쟁 덕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늘어났고 식민지 무역이 왕실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식민주의).
그러나 찰스는 의회와 대립했으며, 가톨릭 편향 정책을 펴서 많은 의원들을 불안하게 했다. 그의 아우이자 계승자인 제임스 2세(1685~88 재위)는 공개적인 가톨릭 신봉자로서 의회에 대한 도전이 한층 더 심했으며 심지어는 의회를 자신의 지지자들로 채우려고까지 했다. 1688년 왕비가 아들을 낳음에 따라 다시 또 가톨릭 국왕이 이어지리라는 염려가 널리 퍼지게 되고, 이때문에 제임스 지지 세력이 무너지자 제임스는 국외로 도망했다. 영국 침입을 계획하고 있던 오라녜 공 빌렘은 영국에 들어와 사태를 수습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부인인 메리(제임스의 딸)와 함께 1689년에 왕위에 올랐다(명예혁명). 윌리엄과 메리 여왕의 치세(1689~1702) 동안에 늘어나는 국가의 부채를 갚기 위해 영국은행이 설립되었다(1694). 의회는 또한 1701년에 왕위계승법을 통과시켰는데, 이것은 제임스 1세의 손자, 즉 하노버의 소피아와 그녀의 아들 조지(게오르크)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국왕의 계승을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정치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은 아마 휘그당과 토리당이라는 대립적인 정당이 성장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토리당이 영국국교회·지주 편이고 복종의 원리를 중시했던 데 비해 휘그당은 종교적 분리주의자들을 지지했고 활발한 대외정책을 장려했다.
18세기
앤 여왕(1702~14)의 치세 동안에 영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점거하여 서지중해의 주요해상국이 되었다(→ 제해권). 1707년 스코틀랜드와의 통합이 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가 보호받게 되고, 스코틀랜드 출신 의원이 영국 의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1714년에 하노버의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1714~27 재위)로 왕위에 올랐을 때, 영국은 유럽 내에서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이 되어 있었다(→ 하노버 왕가). 영국은 지브롤터·미노르카·노바스코샤·뉴펀들랜드 및 허드슨 만에 새로운 식민지를 획득함과 동시에 신대륙의 스페인령에서 무역 거점을 확보했다. 하노버가의 왕위계승 이후 약 25년 동안은 전쟁이 없이 평화가 지속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새 왕조가 발전해나갔다. 이 시기에 휘그당의 세력이 커졌는데, 그 지도자 로버트 월폴은 영국 최초의 총리로 불리기도 한다. 월폴은 전례 없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다가 1742년에 실각했다. 그의 사임은, 이제부터는 아무리 국왕의 신임을 얻더라도 하원의 다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총리 자리에 있을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1745년에 스튜어트 왕가를 복구하려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식민지 획득경쟁으로 1756년에 7년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전세계에 걸쳐 넓은 영토를 획득했다. 그러나 전쟁에 소요된 엄청난 비용 때문에 모든 식민지에서 수입을 늘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기에 국왕이었던 조지 3세(1760~1820 재위)는 영국의 국왕들 중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왕이다. 그의 치세의 처음 10년 동안에 내각은 7차례나 바뀌었다. 이 기간은 또한 흉작, 식품 가격의 상승, 잦은 실업이 발생한 시기이기도 했다. 의회개혁과 재산 소유자의 선거권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인들도 의회개혁과 납세의무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아메리카 문제는 1760년대의 불안 상황을 자아낸 중요한 요인이었다. 늘어나는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인지세법이 통과되었는데(1765), 이것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세수입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같은 방법은 아메리카인들의 불평을 격화시켰는데, 1774년까지도 의회는 그 불평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775년에 미국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은 이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게다가 국내의 사회적 불안(런던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곳에서 반가톨릭 폭동이 7번이나 일어났음)과 해군이 7년전쟁의 피로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던 상황으로 말미암아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다. 1783년 영국은 마침내 미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소(小)윌리엄 피트의 탁월한 지도하에 영국은 1775~83년의 곤경에서 급속하게 회복되었다. 이러한 회복은 산업화의 결과이기도 했는데, 1800년의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한 국가였다(→ 산업혁명). 영국은 대서양에 면하는 자연항들, 풍부한 연안 운송, 그리고 훌륭한 내륙수송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1760년대에 벌써 영국에는 1,600㎞에 달하는 내륙 운하가 있었고, 석탄과 철광석 자원이 풍부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이 국내외 양쪽에서 상품을 소비할 고객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식민지들은 영국 상품의 고객 노릇과 함께 그 원료 공급지 노릇을 했다.
공업화가 유럽에서의 경제적 지배권을 가져다주었다면, 나폴레옹 전쟁(1793~1815)은 유럽에서의 정치적 우위를 부여했다. 영국 해군은 해전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육상전은 프랑스군이 우세하여 쉽사리 끝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1809년부터 전세가 바뀌기 시작해 1812년 이후 나폴레옹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것(1815)은 동맹군이었지만, 그 공은 주로 영국군에게 돌아갔다(→ 워털루 전투). 이 승리로 그후 100년 동안 영국은 유럽과 세계 여러 지역에 대해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처럼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이 시기 전체에 걸쳐 중요한 지위를 누린 것은 주로 영국의 부(富)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성공은 또한 우월한 해군력, 그리고 지배계층의 정력과 적극성 덕택이기도 했다. 영국은 입법활동, 전쟁, 개인 기업활동을 통해서 그 통제권을 확장하고 식민지를 늘려나갔다. 1820년에 영국이 지배한 영토의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26%인 2억 명에 달했다. 이 시기에 〈신이여 왕을 구하소서〉, 〈브리타니아의 지배〉라는 2곡의 국가가 작곡되었으며 영국의 특권층과 부유층은 자신과 오만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세계 지배가 국내문제를 은폐할 수는 없었다. 계속된 공업화는 공업가들과 지주층 사이의 싸움을 초래했으며, 또한 많은 사회불안을 일으키게 한 노동자계급을 창출했다. 가톨릭과 비국교도에 대한 차별정책이 계속되었고 선거권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1801년의 통합법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이 법은 아일랜드를 그레이트 브리튼에 통합해 연합왕국(United Kingdom)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유권자들은 의회에 100명의 대표를 내보낼 수 있게 되었으나 가톨릭교도들은 이 규정에서 제외되었다. 그들이 완전한 영국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1829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19세기
1832년 선거법 개정 이후 각 주의 의석수(잉글랜드만 해당) |
장수한 빅토리아는 1837년에 즉위했다. 몇 해 동안의 개혁 바람이 불고난 후 중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비교적 평온을 유지했는데, 각 가정이 사회의 핵심 조직으로 인식되었으며 개인의 위대한 창조력이 강조되었다. 품격, 의무, 의지, 성실, 근면, 훌륭한 처신과 태도, 그리고 검약 등 이른바 '빅토리아주의'가 절제된 일련의 윤리적 덕목을 대표했다. 부르주아는 이러한 덕목을 스스로 익힐 뿐만 아니라, 귀족층이나 노동조합원 등 다른 모든 사회계층에까지 전파시켰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러 저명인사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정치문제나 사회문제와 함께 종교문제였다. 빅토리아 시대인들은 신앙심이 깊은 것으로 잘 알려졌지만 한편으로 기성 종교에 대한 회의도 그만큼 컸다는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었다. 지질학과 생물학 분야에서의 여러 발견으로 이제까지 공인되어왔던 종교적 연대기에 대한 의문이 줄곧 제기되었다. 종교에 대한 이와 같은 도전 중에서 가장 심각했던 것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대립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의문을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이상적 행동방식을 조금도 파괴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모든 분야에 퍼져 있었다. 심지어 불가지론자들조차도 '인간의 종교'를 운운하는가 하면,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善) 자체를 위해서' 선해지려고 노력했다. 개인생활만이 아니라 공공생활에서도 행동기준이 중요하다고 인식되었다. 따라서 행정업무가 확대됨에 따라 공공 윤리규정도 발달했다. 1853~54년에 발표된 한 보고서에 따라 하나의 행정업무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중요 부서의 직원 임용과 승진이 경쟁시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렇게 자리잡히게 된 행정업무는 정치세력의 비호와는 무관했고 또한 부패에 물들지도 않았다. 파머스턴 경은 중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중요한 정치가였는데, 그것은 그가 극적인 변화를 반대했기 때문이며, 아직도 제대로 개혁되지 않은 헌정체제 안에서 정치를 이끌어나갈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륙의 절대주의 체제보다 더 안정된 사회적 기반을 가진 영국의 헌정체제를 선호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영국의 이익을 앞세웠다. 그의 간섭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1840~41년에는 중국의 여러 항구를 외국인에게 개방하도록 강요하고, 이어 1842년에는 난징[南京] 조약을 통해 홍콩을 획득했다. 파머스턴의 사후 의회개혁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1867년에 제2차 선거법 개정이 있었다. 이 개정 법안은 글래드스턴이 처음 제안했지만, 그것이 통과된 것은 디즈레일리에 의해서였다. 이 두 사람은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영국 정부를 이끌어갔는데, 그들은 휘그파가 자유당으로, 그리고 토리파가 보수당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글래드스턴의 자유당은 1869년에 아일랜드 국교회를 폐지하고, 아일랜드토지법(1870), 최초의 교육법(1870), 그리고 노동조합을 합법화한 노동조합법(1871)을 통과시켰다. 보수당의 디즈레일리 역시 사회입법을 추진하여 공중보건기구의 설치를 규정한 공중 보건법을 제정하고(1875) 주당 노동시간을 56시간으로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1878). 글래드스턴과 디즈레일리는 모두 제국의 팽창에 힘썼다(→ 대영제국, 식민주의). 1890년대의 제국주의는 원료와 상품시장을 찾는 기업가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나 제국주의적 모험에 들뜬 군중의 열광과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영광과도 관련이 있었다. 아프리카·아시아·태평양 등지에 보호국을 세우고 식민지를 획득하는 과정은 이 기간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제국을 구성하자는 유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정치적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기는 어려웠다. 캐나다·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백인 식민지에는 1839년 이후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인도는 정복을 통해서 획득했다. 1857년의 세포이 항쟁은 진압되었고, 1년 후 동인도회사가 폐지되고 새로이 총독제가 창설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1899년에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보어 전쟁) 2만 2,000명의 영국인이 죽었다. 이런 일들을 계기로 보건과 교육 등에 관한 좀더 적극적인 사회정책을 요구하는 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19세기말에 이르면서 빅토리아식 사회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경제적 상황의 변화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중기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은 1873년에 그 절정에 달했고 그 이후에도 국민소득은 꾸준히 증가했으나, 이윤 폭에 대한 압박이 계속 증대했다. 이와 같은 국내의 경제적 어려움은 주로 국제금융 면에서의 영국의 경제력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불만의 목소리는 점점 더 뚜렷해지고 또 조직화되어갔다(→ 노동력). 1900년 2월 런던에서 열린 노동자대표회의에서는 노동조합 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 노동자 출신 의원을 내보내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20세기의 노동당의 시작이었으며, 노동당은 마침내 자유당 대신 제2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20세기
의회개혁과 국민보험법의 제정은 20세기초의 중요사항이었으나, 아일랜드는 여전히 정치적 현안으로 남아 있었다. 자치권을 획득하려는 노력 대신에 독립을 외치는 소리가 높아갔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겨우 내란을 피할 수 있었다. 1916년 더블린에서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부활절 봉기). 제1차 세계대전이 영국에 미친 영향은 연합국 진영의 다른 어느 나라에 대한 것보다도 컸으며, 어쩌면 제2차 세계대전이 미친 영향보다도 더 큰 듯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정부는 보험업·철도운영·광산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대한 군수산업 등 경제적 활동을 대대적으로 수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정부는 비행기에서 철모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무기 제조에 직접 참여하는 한편, 수십만 명에 달하는 남녀 군수산업 노동자들을 위한 후생·오락·의료 시설들을 마련하는 등 중요한 사회적 실험을 처음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대부분 큰 성과를 올렸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대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나라는 주택과 학교도 지을 수 있으며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고용주는 정부'라는 주장이 전후에 나오기까지 했다. 전쟁은 경제적·사회적 변화를 유발하는 강력한 촉매제였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전쟁은 영국의 경제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전쟁 후 영국은 부채국이 되었으며, 공장의 조업 능력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해외시장은 줄곧 부진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결과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영국은 불경기와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다. 1919년 아일랜드에서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으나, 영국은 이것을 종식시킬 수가 없었다. 1921년에 북부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6개 주는 영국 치하의 자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남부지역은 완전 독립을 위해 투쟁을 계속하여 그해말에는 결국 영국도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영국에도 큰 영향을 미쳐 실업자 수와 재정적자가 급증, 경제적 위기를 맞았다. 노동당 출신의 맥도널드는 거국내각을 구성해 위기를 극복하는 데 진력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유럽에서의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유화정책이 취해졌다. 1938년 체임벌린 총리는 뮌헨에서 히틀러와 만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점령을 인정했다. 그러나 1939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땅까지 점령하자, 체임벌린은 유화정책을 포기하고 폴란드의 영토보전을 보장했다. 그후 수개월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영국을 전열에서 이탈시키려고 한 히틀러는 1940년 영국 공습을 개시했다. 6개월 동안 영국은 무서운 공중폭격으로 많은 시민들이 희생당했으나 영국인들은 이를 이겨냈다. 전쟁 동안 윈스턴 처칠의 탁월한 지도는 전쟁 수행에 대한 영국민들의 결의와 지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보여준 중요한 교훈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오랜 전통을 가진 민주 국민도 거대한 국가적 사업에 동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일찍이 그 유례가 없을 만큼 영국을 통합시켰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전쟁은 사실상 영국이 가지고 있던 해외의 재정적 자원을 모두 앗아가버림으로써 영국은 국제적으로 파산했다. 노동당은 20세기초부터 그들이 내걸어온 정책들을 입법화하기 시작했다. 철도·탄광·영국은행의 국유화가 즉각 실시되었으며, 도로운송·부두·항만·전력생산 또한 국유화했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창출하기 위한 노동당의 사회복지입법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노동당은 전국민을 포함하는 종합국민보험계획을 입법화함으로써 공공보조금의 지불을 규정했고, 모든 시민에게 무료의 종합진료를 보장하는 거창한 국민보건시설을 수립했다(→ 영국국가의료제도). 이와 때를 같이해 영국은 제국 체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전후의 내각은 1947년에 인도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으며, 뒤이어 미얀마(버마)·스리랑카(실론) 또한 독립했다(1948). 영국은 군사적·경제적으로 통제력을 잃은 식민지에서 철수해 식민지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노동당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였다고 할 수 있다.
1956년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이든이 이끄는 보수당 정부는 운하의 재점령을 시도함으로써 영국은 다시 제국주의 정책으로 되돌아가는 듯이 보였다(→ 수에즈 위기). 그러나 이와같은 모험은 곧 미국의 반대에 부딪쳤을 뿐만 아니라, 영국연방에 속한 나라들 그리고 심지어는 영국 자체에서까지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1950, 1960년대초에 영국은 경제적 팽창과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영국은 1957년 유럽 공동체 가입을 거부함으로써 서독이 주도한 유럽의 놀라운 경제성장에 동참하지 못했다. 1960년대 중엽에 이르면서 영국의 번영이 시들어가는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의 불안과 북아일랜드에서의 폭동이 영국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1979년 마거릿 대처를 총리로 한 보수당이 다시 집권했다. 대처는 영국에서 사회주의를 끝내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인 조치는 지난 40년 동안 노동당이 정부의 통제하에 넣었던 거의 모든 산업과 1세기 이상 국가의 수중에 있던 몇몇 산업을 다시 민영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처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취는 노동조합과의 권력싸움에서 승리한 점인데, 이 승리에는 중공업 분야에서의 높은 실업률도 작용했다. 대처는 세계적 호경기시대가 다시 돌아오고, 인플레이션이 둔화하고, 기업가들에게 매각한 산업에서 이윤이 남고, 북해산 석유 판매에서 막대한 돈을 얻음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대처의 국민적 인기는 1982년 포클랜드 섬에서 아르헨티나의 군대를 몰아냄으로써 절정에 올랐다(→ 포클랜드 전쟁). 그러나 주민세 부과로 국민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유럽 통합에 대한 비타협적인 자세로 당 지도부의 반발을 초래해1990년 11월에 사퇴했으며 존 메이저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표1. 영국의 역대 왕, 표2. 영국의 역대 총리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Macropaedia| 李敏鎬 참조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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