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양산하는 ‘아나키즘’
◇ 역사의 격정, 이브 프레미옹/미토
권력은 권력을 낳는다. 부패한 권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는 혁명도 결국은 또다른 권력으로 이어진다. 그러다보니 일부는 어떠한 허울을 썼더라도 모든 권력은 동일하다며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이들을 아나키스트라고도 부른다.
최근 세계적으로 아나키즘이 부흥하고 있다고 한다. 1999년 시애틀에서, 2000년 스위스 다보스와 체코 프라하에서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맞선 시위대 중 3분의 1이 아나키스트였다. 아나키즘의 부흥은 국가를 비롯한 정치 경제 문화 등 온갖 권력의 그늘이 낳은 산물이다.
그러나 ‘자율적 반란의 역사’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권력에 대한 부정과 저항이 결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며 국가는 물론 사유재산에서 결혼까지 모든 전통을 거부한 채 아무 걱정없이 사는 개처럼 살고자 한, BC 4~5세기의 그리스 견유학파(犬儒學派)도 그중 하나이다. 물론 로마의 노예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비롯해 밑바닥의 주도로 일어난 유·무명의 반란과 혁명은 권력에 의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1971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중심부 크리스틴안하운의 군부대 터에 건설됐던 공동체 ‘크리스타니아’를 비롯해 거의 예외가 아니었다. 그만큼 권력은 강고하고 생명력이 길다. 그러나 반란의 그 순간만은 그 주체들이 내 삶의 주인공이 권력이 아니라 스스로라는 것을 확인하는 오르가슴에 휩싸였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몽테뉴의 친구인 라 보에티는 자신이 17살에 쓴 ‘자발적 노예 상태에 대한 논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주는 것도 인민이며 확실하게 지키는 것도 바로 인민이기 때문에 인민들은 봉사하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속박의 사슬을 끊을 수 있습니다. 종속의 책임도 인민에게 있으며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도 바로 인민입니다. 인민들에게는 속박과 자유의 선택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누구나 “나를 좀 그냥 내버려 둬”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때 이 책을 들면 이같은 심정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을 것이다. 김종원 외 옮김.
〈김윤순기자 kys@ky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