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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일본사 [日本史, Japan]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1.
일본사 [日本史, Japan, history of]

 

자연환경과 선사시대

 

자연환경

 

일본은 4개의 큰 섬인 홋카이도[北海道]·혼슈[本州]·시코쿠[四國]·규슈[九州]와 1,00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위도이지만 보다 더 춥고 더운 지역을 포함하며, 면적은 한반도의 약 1.5배인 37만㎢로 중국의 1/25가량 된다. 태평양으로부터 불어 오는 몬순을 직접 맞기 때문에 강수량이 풍부해 벼 재배와 수력발전에 적합할 뿐 아니라 풍부하고 급한 물줄기는 국토의 3/4이나 되는 산악지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이룬다. 대륙과 이웃한 섬나라로서의 일본은 흔히 영국과 비교되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영국은 대륙과의 거리가 약 30㎞에 불과하지만, 일본과 한반도와의 최단거리는 200㎞, 중국까지는 800㎞가 넘는다. 더욱이 동아시아 세계는 문화적 중심과 주변, 즉 '중화'(中華)와 '사이'(四夷)가 '화이질서'(華夷秩序)로서 정착된 국제사회였기 때문에 일본에 끼친 대륙의 영향은 다분히 문화적이었다는 점이다. 지리적 여건이 모두 불변의 조건은 아니다. 이를테면 근대 이전에는 빈 바다에 불과했던 태평양이 근대에 들어 항로와 공로로 연결됨으로써 일본과 미국의 국경이 맞닿게 되어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팽창이라는 서양 근대사의 전개가 마치 아시아 대륙 문명이 이전에 그러했듯, 일본 근대사에 새로운 영향을 끼치게 된 사정은 지리적 조건이 시대에 따라 크게 기능을 달리함을 보여준다. 심리적 영향을 끼친 자연환경도 있다. 그것은 여름마다 인구 밀집 지역을 휩쓰는 예견할 수 있는 정기적인 태풍과 더불어 예고 없는 지진과 화산 활동이다. 일본인들만이 지닌 자연과 인간, 가미[神]와 신의 대리로서의 통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는 현재도 거듭되는 자연재해가 형성한 불안·체념·복종이라는 집단 심리로 설명되기도 한다.

 

조몬문화

 

일본열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0만 년 전인 홍적세(洪積世) 말기로서 고고학적으로는 구석기시대에 속한다. 이때의 일본열도는 동아시아 대륙의 끝부분으로 대륙과 일본은 육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구석기 유적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첫 주민들은 남북의 두 방향에서 육로를 따라 이주했을 것이다. 그들이 쓰던 타제석기와 뼈연모는 점차 세련되어졌으나 토기는 만들 줄 몰랐다. 빙하가 녹고 충적세(沖積世)로 접어들 즈음 일본에 신석기문화가 나타났다(→ 신석기시대). 약 1만 년 전 육교가 사라지고 일본열도는 지금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1만 2,700년 전의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일본의 토기문화는 세계 최초의 것으로 간주된다(→ 도자기). 처음에는 실용 위주의 단순한 것이었으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용도에 따라 꾸밈과 형태가 극히 정교하고 다양해졌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새끼 모양의 무늬를 지녔기 때문에 이때 토기를 조몬[繩文] 토기, 즉 새끼무늬토기로 부르며, 이 신석기문화를 조몬 문화라 한다.

 

일본의 신석기인들도 마제석기와 활, 통나무배, 그물을 주요연모로 이용했다. 사냥감을 쫓아 2~3년을 주기로 떠돌이 생활을 했으나 이들이 한곳에 머물러 살 때는 땅을 얕게 파고 기둥을 세우고 이엉을 덮은 집안에서 4, 5명 단위의 가족 10가구로 이루어진 집락을 이루었다. 물론 빈부나 신분 차이는 아직 없었고 가족이나 집락의 어른이 질서를 잡고 협동작업·제사·배분을 맡았다. 채집·수렵·어로를 주로 하는 자급자족 사회였으나 화살촉을 만드는 흑요석 따위는 산지로부터 열도 전역으로 교역되었다. 평균수명은 30세 이하였고 질병과 재해를 막기 위해 주술을 부리고 토우(土偶)를 빚어 풍요를 빌 줄 알았으며 성인의식으로 이빨을 뽑는다든가 죽으면 사지를 구부려 묻는 굴장 풍습이 있었다(→ 매장). 이 조몬인을 현대 일본인의 직접 조상으로 여기는 근거는 체질과 언어의 기원이 이 시대에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신석기 토기문화의 주요특징은 정체성과 타율성이다. 유례없이 빨리 발생하여 오래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몬 사회는 생산이나 기술의 근본적인 발전 없이 8,000년 가까이 지속하다가 BC 3~2세기에 다음의 발전 단계로 이행했다.

 

야요이 문화

 

대륙에서는 청동기문화가 마감되고 본격적인 철기시대로 들어섰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막을 내릴 무렵이었다.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조몬 토기는 급속히 사라지고 재배와 청동기, 그리고 철기를 동반한 새로운 문화가 규슈 섬의 북쪽에서부터 급속히 전파되었다. 생산수단이 새로워져 석기는 밀려나고 목제·철제 농기구가 등장했으며 수로·둑·창고를 갖춘 대규모 농경지와 주거집단이 형성되었다. 농경사회다운 계절의식이라든가 관개와 치수 등 협동작업을 통솔할 지휘권, 나아가 개간이나 소출고에 따른 빈부차가 형성되었다. 비실용적인 동검(銅劍)·동탁(銅鐸) 등 지배 권위에 필수적인 의기(儀器)·제기(祭器)류의 다량 출토로 원시적 국가 형성의 기초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토기도 조몬과 비교해 꾸밈은 단조롭지만 전보다 높은 온도로 구워 훨씬 얇고 단단해졌으며, 바다 건너 가야(加耶)토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형질이다(→ 도자기). 이 토기가 처음 발견된 도쿄[東京]의 거리 이름을 따서 이때를 야요이 시대[彌生時代]라고 한다. 이 야요이 문화가 불과 반세기 만에 일본 주요지역에 퍼진 점과 야요이인들의 체질적 특성이 조몬인보다는 한반도 남부 고대인에 더 가깝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새로운 문화에 능숙한 대륙인들이 일본열도로 들어와 낡은 조몬 문화를 삽시간에 대체시킨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의 폐막과 한반도의 세력다툼 과정에서 탈락한 무리가 열도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 시대의 일본인을 대륙에서는 (倭)라고 불렀다. 고대 중국의 사서에 "왜의 땅에 100여 개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은 수많은 소국이 형성되고 있는 사정을 알려준다. 특히 2~3세기에 대하여는 이름을 밝힌 나라들과의 공식 왕래 사실과 내란에 관한 기록도 전하고 있다(→ 후한). 이를테면 3세기말 중국과 가장 왕래가 잦았던 야마타이코쿠[邪馬臺國]를 묘사한 데 따르면, 무녀 출신의 여왕 히미코[卑彌呼]는 조세권과 관제를 갖추고 중국을 이용해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남왕(男王)이 다스렸으나, 히미코 사후 일어난 상쟁이 여왕의 재옹립으로써 진정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듯, 아직도 여성의 주술적 권위가 우세한 사회였음이 분명하다. 또 약 30개국으로 이루어진 원시적 국가 연합체가 존재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시기는 국가형성의 과도기로 볼 수 있다.

 

고분문화

 

4세기 전후의 동아시아는 정치적 통합과 팽창의 시대였다. (晉) 왕조가 무너지고, 고구려는 낙랑·대방·현도군을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당시 세계 최강의 팽창국가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도 제각기 힘을 겨루고 있었다. 이러한 통합과 팽창의 물결이 일본열도에까지 미친 두드러진 고고학적 증거는 기마(騎馬)와 관련된 권력의 상징물이다. 우선 형태가 독특한 수많은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3~4세기경에는 앞쪽은 모나고 뒤쪽은 둥글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열쇠구멍 같은 이른바 전방후원(前方後圓) 고분이 나타나기 시작해 5세기에는 호(濠)까지 두른 거대한 고분이 평지에 자리잡는다. 가장 큰 것은 부피가 피라미드보다 크고 장변(長邊)이 약 470m에 이른다. 축조하는 데 약 140만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었으리라 추산되며, 정치 권력 집중의 증거가 된다. 초기 고분에는 청동·거울·옥 등 야요이 후기의 주술적 요소가 남아 있으나 5세기 중기 고분의 주요부장품은 갑옷과 마구, 금·은 장식과 철제무기로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학자들은 이 시기를 고분시대라 부르며 일부 중기 고분을 천황의 무덤으로 비정[比定]하기도 한다.

 

중국·한반도·일본의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말해주듯, 이 시기가 되면 일본열도와 대륙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진다. 5세기에 관해 기록한 중국 사서는 중국식 이름을 가진 왜왕이 상주문을 올렸다는 기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사료에는 그러한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재위기간이 불합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시점의 일본에 통일된 정권이 나타났다고 보기는 이르다. 다만 중국은 당시 팽창하는 한반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왜는 대내적 통일을 목적으로 서로를 이용하기 위한 외교적 접촉이 빈번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또한 가야지방에서 쏟아져나오는 철제·투구·갑옷 등 기마용 장비, 그리고 전방후원 무덤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유적이 한반도에서 발견되고 있음에 비추어보면, 북방 기마민족의 전법과 기동력을 갖추고, 한반도에 거점을 둔 세력이 아직 분열되어 있는 일본열도를 정복해 고대 국가의 성립에 이르게 했으리라는 가정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고대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통치이념으로서의 불교와 유학, 통치 기술로서의 역역(曆易), 의술 등은 6세기에 백제로부터 들어온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4~5세기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이른바 미마나 일본부[任那日本府] 를 두고 수세기 동안 통치했다는 일본 사서의 기록은 결정적인 물적 증거가 없음은 물론 역사 상식으로도 현실성이 희박하다(→ 〈니혼쇼키〉). 다만 백제·신라·가야의 세력 다툼을 비집고 공백지대에 일시적인 군사적 거점을 두었을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

 

고대사

 

고대국가의 성립

 

일본의 주요 사적지
6세기에 들어서면서 완성도 높은 대륙의 고급 문물과 지적 체계가 일본 사회에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공식으로 파견된 자들도 있고 스스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도 있었다. 열도 내의 항쟁에서 어느 정도 물적 토대가 마련된 바탕 위에 이들 외래인에 의한 지적 토대가 마련됨으로써 일본 사회에서의 고대 통일 국가 성립이 가시화된 것이다. 당시 인구 약 400만~500만 명의 일본 사회는 조상신 우지가미[氏神]를 모시는 우지[氏]로 불리는 의제(擬制) 혈연적 상하조직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우두머리인 우지노카미[氏上]는 다도코로[田莊 : 사유지]나 가키베[部曲 : 사유민]를 거느렸다(→ 베). 최고 권력자는 가장 강력한 우지가미였으며 오미[臣]·무라지[連] 등의 가바네[姓]를 내려주면서 중앙인 야마토[大和]의 정치를 주도했고, 지방의 호족들에게는 구니노미야쓰코[國造] 등의 직함을 주어 상하관계를 규정했다. 최고의 우지가미 오키미[大王]가 바로 일본 천황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작은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진 커다란 피라미드 구조를 닮은 일본사회의 기본적 성격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의 고대국가로의 추진력은 주로 백제인들이 제공해주었다(→ 한국사). 513년 5경박사(五經博士)가 파견되어 유교를 전했고, 554년 천문학자 왕보손(王保孫)을 비롯한 의학·약학과 역학(易學) 전문가들이 백제에서 건너왔다. 538년에는 성명왕(聖明王)이 불상·불경을 보내어 백제인 중심으로 퍼져 있던 불교를 일본 사회에 공식화시켰다. 중심지인 기나이[畿內]의 유력한 우지, 즉 고급 기술인력의 30%가 한반도 남부 출신으로 집계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치에 대한 한반도 세력의 영향력을 알려주는 예도 있다. 527~528년 규슈 지역의 구니노미야쓰코였던 이와이[磐井]가 신라의 사주로 일으킨 반란을 야마토[大和]의 친백제 세력이 진압했다는 기록이다. 이 반란은 통일 야마토 정권의 출현을 앞둔 지역 세력 최후의 도전으로 해석되지만, 한편으로는 이때까지 존재하던 신라·백제라는 외세 개입 사실을 실증해주기도 한다.

 

6세기 후반 불교의 수용 여부를 명분으로 하여 일어난 심각한 세력다툼은 친백제파 소가 우마코[蘇我馬子]의 승리로 돌아갔다. 소가가 592년 조카딸을 스이코[推古]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 아스카 시대). 스이코의 조카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는 소가의 절대적 협력 아래 체제 구축에 나섰다. 그 핵심은 씨성제도에 기초한 구체제의 타파와 신체제의 제도화 및 이념적 논리였다. 첫째, 출신을 묻지 않고 인재를 등용한다 하여 603년에 관위12계(官位十二階)를 제정하고 관리의 임명권을 천황에 속하도록 했다. 둘째, 신 제도에 헌법17조(憲法十七條)라는 명분, 즉 군신(君臣)·신신(臣臣)·신민(臣民) 간의 위계질서를 명문화하였으며 나아가 새 관명은 모두 덕·인·예·신·의·지(德仁禮信義智) 등 유교적 규범에 따라 지었다. 〈천황기 天皇記〉·〈국기 國記〉 등 일본 최초의 역사서를 편찬한 것도 중국을 본뜬 정통성 부여가 그 목적이었다. 정치이념의 이식과 더불어 종교적 카리스마도 활용했다. 쇼토쿠 자신이 〈삼경의소 三經義疏〉라는 불경 주석을 짓고 호류 사[法隆寺]를 세우는 등 불교를 일으킴으로써 아스카[飛鳥] 문화라고 불리는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를 남겼다. 그러나 그 파급 범위가 중앙에만 머물고 지방으로 널리 퍼지지 않았던 점은 정권의 현실적 한계를 말해준다.

 

사상 최초의 대내적 통합을 이룬 일본의 위상을 잘 드러내주는 기록이 607년 견수사(遣隋使) 편에 보낸 국서이다. 스스로를 '해 뜨는 곳의 천자'로 칭하고 '해 지는 곳의 천자'로 (隋) 양제(煬帝)를 지칭한 것은 정녕 비현실적이었지만 통합된 일본의 공식적 등장을 알리는 상징적 문서였다. 그러나 대륙의 역사는 훨씬 앞질러 전개되고 있었으니 수의 뒤를 이은 당(唐)은 율령제도(律令制度)로 중앙집권체제를 완비한 국제화된 대제국이었으며, 한반도에서도 삼국통일이 막바지에 와 있었다. 열도에서는 쇼토쿠와 소가가 620년대에 죽고 난 뒤 소가의 아들이 천황가를 핍박하며 전횡을 일삼는가 하면 지방 호족들의 자의적 세력 확장에 따른 토지와 인민의 극단적 수탈과 상호 분쟁으로 혼란상태에 빠졌다. 대흉작과 참혹한 기근도 뒤따랐다. 그동안 중국에 공식사절을 보냈는데, 7세기 전반에만도 6회에 달했고, 매회 수백 명의 규모였다. 그밖에도 불승·유학자 및 고급기술을 전수받기 위한 전문인들의 대륙 왕래도 빈번해 해외에서 실력을 다진 인재들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국정쇄신과 선진문물의 도입을 요구하게 되었다.

 

다이카 개신과 율령제도

 

이 집단에 속한 황자(皇子) 나카노 오에[中大兄]와 나카토미 가마타리[中臣鎌足]가 645년 쿠데타를 일으켜 소가 씨를 타도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좌우대신을 두는 등 정부의 직제를 개편하고 귀국한 학승들을 정치고문으로 앉혔으며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難波]로 옮겼다. 일본 사상 최초로 독자적인 연호를 지어 다이카[大化]라고 하고 4개조의 '개신(改新)의 조(詔)'를 냈으며 철저히 당의 제도 문물과 신라에서의 적용례를 따랐다. 공지공민(公地公民)의 원칙으로 토지를 천황 직속으로 삼으며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조직하려 했다. 이것이 곧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으로 그 모제(母制)는 당나라의 율령제도였다. 일본 최초의 성문 법전이 완성되었는데, 영(令)은 지금의 행정·소송·민법, 율(律)은 형법에 해당하는 법 체제였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행정조직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668년 '오미[近江]령'으로 시작된 이 율령 편제 사업은 701년의 '다이호[大寶] 율령'으로 거의 완성된다. 중앙에는 태정관(太政官) 아래에 3대신, 그리고 기능별로 8성(省)을 두고 지방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고쿠시[國司] 등이 구니[國] 이하의 행정단위를 다스렸다. 소수 노비를 제외한 대부분을 공민으로 삼아 호적에 올리고, '반전수수(班田收授)의 법'에 따른 구분전(口分田)을 나누어주고 조·용·조(租庸調)라는 곡물·노동·특산물의 기본적 조세를 지우며 기타 잡세와 노력동원을 부과했다(→ 노예제). 태정관과 나란히 최고기관으로서 신기관(神祇官)을 두어 천황의 조상신 및 기타 제신의 제사를 관장하게 했다(→ 황제). 이는 일본의 율령체제가 대륙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는 대표적 사례이자 동시에 고대 일본 천황체제와 중국의 왕조체제와의 본질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일본은 다이카 개신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이나 국호인 '일본'(日本)도 이때 확정된 것으로 보이며 당의 장안(長安)을 크기만 1/4로 축소한 새 수도 헤이조쿄[平城京]를 새로 건설했다. 660년에 신라와 당의 공격으로 백제가, 8년 뒤에는 고구려 또한 나·당 연합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한국사). 이때 백제에 구원 병력을 파견했으나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퇴했다. 일본의 지배층이 '우리 조상 왕실의 멸망'을 운운한 것은 백제와 일본 지배층의 끊기 어려운 관계를 시사한다. 8세기에 한반도의 정세가 안정되자 당으로의 공식사절(遣唐使)도 부활되고 신라와의 국교도 회복하는 등 나름대로 안정된 고대 국가와 문화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남중국으로 통하는 직항로와 동해안을 따라 발해와 직접 교류로가 트인 것도 이때의 일이다.

 

국력은 전반적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혼슈 북쪽 에조[蝦夷]의 땅도 복속되어 열도 내의 영역이 확장되었으며, 금광·동광의 개발, 기술의 향상과 개간, 관개 수리의 개량 등으로 지역적 부도 축적되자 사유지와 호족 세력의 신장이 뒤따랐다. 이를테면 723년에는 개간지의 사용 연한이 완화되었고, 743년에는 영구 사유를 허용함으로써 귀족이나 대사원에 토지가 집중되어 권문세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사유지가 장원의 기원이다. 영주들은 땅을 넓히고 부랑자·농민 등 노동력을 끌어모았으며 납세나 노역 의무를 면제받는 등 독자적 재산권 확충에 주력했다. 나아가 중앙 관리들의 장원 출입을 막을 수 있는 특권 등 정치적 권익도 누리게 되었다. 공지공민의 원칙이 파탄되는 과정이었다. 율령체제의 핵심인 중앙집권적 정신이 실종되었을 뿐 아니라, 원래 이 체제의 전제였던 과거제도도 제대로 실시된 적 없이 출신 가문에 의한 관리임용이 보통이었다. 귀족 세력의 대두는 필연이었다. 다이카 개신의 공신 나카토미의 후손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그 전형이었다. 이들은 황족에게 국한되었던 셋쇼[攝政]가 되거나 율령 규정에도 없는 간파쿠[關白]를 신설하는가 하면 게비이시[檢非違使] 등 '영외관'(令外官)을 설치해 국정을 전단했다. 천황 세력은 때로는 후지와라 가문을 배제하는 인사(人事)로써, 때로는 율령의 세부사항인 격식(格式)을 편찬하는 등 제도적 조처로써 율령체제를 중흥하고자 했으나 일시적인 성공을 보았을 뿐이다. 과거로 충원된 인재들을 거느린 천자를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국식 중앙집권체제를 그대로 본뜬 율령체제는 일본에 뿌리내리기 어려운 비현실적 제도라는 것이 실증되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

 

이 시기의 문화는 불교가 선도했다. 화장이 보편화되어 고분이 자취를 감춘 것도, 지금까지 장례만은 불교 사찰에서 행하는 관습도 이때 정착된 것이다. 쇼무[聖武] 천황은 구니마다 사찰(고쿠분 사[國分寺])을 짓게 하고 수도에는 높이 16m의 대불상을 갖춘 도다이 사[東大寺]를 건립했다. 신라의 문서뿐 아니라 의 국제화한 미술품과 아라비아 그림까지 소장한 쇼소인[正倉院]도 이 절의 부속 건물이다. 이처럼 엄청난 국력이 소모되는 국가 주도의 불교 문화가 융성하고 있는 가운데, 피곤한 인민들에게도 종교적 안식이 절실하여 교키[行基]처럼 자유로운 포교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민중 속에 파고든 승려도 있었다. 대륙문물과 일본 현실의 과도기적 동행은 문화에도 반영되었으나 대륙문화의 홍수 속에서도 일본 고유의 전통문화가 외래문화로 송두리째 대체되지는 않았다. 전통 시가(詩歌)는 오히려 한자의 힘을 빌려 정돈되고 기록되었는데, 일본 고유의 서정시 와카[和歌]의 1,300년 전통은 이무렵 집대성된 〈만요슈 萬葉集〉에서 비롯된다. 역사 서술에서도 중국 정사(正史)의 체제와 언어를 모방한 〈니혼쇼키 日本書紀〉와, 고대 일본어를 살려 쓴 〈고지키 古事記〉가 720년과 712년 거의 동시에 편찬된 일도 이를 반영한다. 그림에서도 주도적 장르인 야마토에[大和繪]는 일본의 풍경과 풍습을 주로 그렸고, 대륙과는 전혀 다른 일본풍(와요[和樣])의 서예와 일본식 음악, 이른바 가가쿠[雅樂]의 형태가 이때 자리잡는다. 불교미술도 아미타상(阿彌陀像)을 중심으로 일본적 색채와 윤곽이 두드러졌다. 당풍(唐風) 외래문화와 국풍(國風) 재래문화가 병존하면서 전자가 후자를 살찌우는 역할을 한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별개의 신앙으로 떨어져 있던 신도(神道)신앙과 불교신앙이 이 시기에 서로 융합된 사실이다. 부처가 일본의 제신으로 화신(化身)하여 나타났다는 '권현'(權現)의 개념이 성립했고, 신사에 불탑을 세우고 승려가 신사를 관리하는 일이 나타났다. 결정적인 예는 일본 국자(國字)인 가나[假名]의 고안이다. 한자의 의미는 무시한 채 한자발음에서 일본발음을 본떠 만든 50음도(五十音圖)가 이때 완성되었다. 10세기부터 쓰여지기 시작한 이 문자 덕분에 일본문학의 정점인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語〉와 같은 소설이 한 주부의 손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세사

 

무사단의 형성

 

형태만 남은 율령체제 위에서 일본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10, 11세기에 장원을 지배하는 영주들이 권익을 더욱 확장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비호를 받는 영주와 이들의 보호를 받는 약한 영주 사이에 차별이 생겨나면서 계열화된 장원적 체계가 자리잡아갔다.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제를 유지하려는 중앙 권력과 장원을 기반으로 삼는 지방 호족 사이에도 긴장이 높아갔다. 정부는 '장원정리령'(莊園整理令)을 내리는 등 기득권 방어에 나섰으나 당시의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영주들은 직접·간접으로 중앙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도 유지만을 목적으로 자신들의 권익을 침해할 정책을 세울 리는 없었다.

 

느슨하게 출발한 장원의 봉건적 관행은 점차 조직화되어, 권력자나 사사(寺社)로 이루어진 명의상의 최고 권력자인 혼케[本家]와 그 아래 료케[領家], 재지(在地) 관리인인 쇼칸[莊官], 자신의 이름으로 묘덴[名田]을 소유한 묘슈[名主] 등이 저마다 권익을 나누어 갖는 형태로 되었고 나아가 자작과 소작도 각자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업무도 나누어지고 자위력도 필수적이 되었다. 흔히 장원의 영주이기도 했던 사찰과 신사도 독자적 무력을 기르는 일이 예사였다. 사무라이 즉 무사 집단이 발생한 것이다. 무사단의 우두머리인 동량(棟梁)은 주로 지방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황족이나 귀족들의 후손으로, 미나모토 씨[源氏], 다이라 씨[平氏] 출신들이 대표적이었다. 무사단의 형성은 분쟁의 무력 해결을 가속화했다. 장원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들이 거느리는 무사단의 형성은 지방과 지방 사이의 세력다툼을 필연적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지방세력은 율령 왕조체제를 고수하려는 중앙 세력과 상쟁을 거듭하여 일본은 걷잡을 수 없는 내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가마쿠라 바쿠후

 

12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두 전란 호겐[保元]과 헤이지[平治]의 난은 복잡한 황위계승 문제로 출발했으나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좀더 강한 무력이 정권에 더욱 가까워지는 새로운 전통이었다.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는 맞수였던 미나모토를 제압하고는 황족과 외척관계를 만들어 중앙의 권력기반을 다지고, 또 한편으로는 주요지역 무사들과 주종관계를 맺고 지토[地頭]로 임명함으로써 귀족정치와 군사정치의 과도적 양면성을 보였다. 동시에 송선(宋船)을 유치하여 토지와는 또다른 경제적 기반인 대송무역의 활성화를 꾀한 사실은, 대외관계에 있어서 경제적 중요성이 본격화되는 중세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일본판 서곡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급반전하여 밀려났던 미나모토가 다이라 타도 거병에 성공한 것이다.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아직 여력이 남아 있던 후지와라 세력까지 일소한 뒤, 가마쿠라[鎌倉]에 바쿠후[幕府]를 세웠다. 군사적 패자(覇者)의 정치적 거점이 마련된 것이다. 황위를 찬탈하기보다는 명목만 남은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즉 '쇼군'이라는 칭호를 받고 실권을 택했던 것이다. 바쿠후와 쇼군이라는 12세기말에 태어난 이 군사통치는 일본에 근대적 정권이 들어서는 1868년까지 약 680년간 지속된다. 그 배경과 본질은 요컨대 개신(改新) 이래 율령체제라는 합법적이자 중앙집권적인 관료체계의 외곽에서 성장해왔던 실세가 그들의 기반인 토지와 무력의 집중을 조직적으로 규제하기 위한 통치체제를 수립한 데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다른 역사와 비교해볼 때 일본 역사의 가장 두드러진 한 특성이다. 요리토모는 가신들인 고케닌[御家人] 중심으로 체제를 꾸려나갔다. 일정한 소령(所領)을 보장하는 대신 충성을 서약받고, 각 구니에서 검색과 사찰을 담당하는 슈고[守護]나, 또는 그 영지와 장원의 경찰권과 징세권을 맡은 지토[地頭]로 임명함으로써 권력의 기본적인 틀을 짰다. 물론 중앙에는 일반 정무와 송사(訟事), 그리고 무사들을 통괄하는 기구를 쇼군 아래 두었다. 미나모토의 대가 끊겨 처가인 호조[北條] 가문이 집권하는 사이에 천황 세력의 도전이 있었으나 오히려 무가 세력을 더욱 다지는 결과만 빚었다.

 

이 시기에 바깥 세계는 몽골 제국의 팽창에 휩쓸리고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대제국이 말머리를 일본으로 돌려 고려의 해군력을 타고 1274년과 1281년 2차례에 걸쳐 규슈로 침공했다. 그러나 모두 폭풍으로 전투다운 전투도 못하고 물러났다(→ 태풍). 신통력으로 가미카제[神風]를 일으켜 침략군을 막아냈다는 신도와 불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반면, 병력과 물자를 총동원했던 가마쿠라 바쿠후는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이 기회에 천황세력의 중흥을 꾀하는 기도가 있었으나 새로운 쇼군 아시카가[足利]의 대두로 좌절되었고, 이 과정에서 천황가는 남북조[南北朝]로 분열·대립하다가 60년 만에 재통합되지만 천황가, 즉 공가(公家)는 허수아비로 남게 되었다. 무가(武家)의 우세가 확고히 되었다. 몽골 침략과 발맞추어 무사집단이 지방호족화 되고 있는 추세 속에서 가마쿠라 바쿠후의 봉건체제가 원래 모습으로 유지되기는 어려워졌다. 바쿠후는 각지의 봉건영주를, 각 영주는 가신들을 지배함으로써 간접적이며 중층적인 봉건제를 재정립하려 했다. 그러나 바쿠후가 위치한 교토[京都] 주변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멀리 떨어진 지역은 달랐다. 오히려 힘이 우선하는 풍조가 일었다.

 

센고쿠 시대

 

이러한 과도기적 상태에서 쇼군가(家) 내부 문제로 분쟁이 일자 전국이 내란상태에 빠져들었다. 오닌[應仁]의 난으로 불리는 수도 교토에서의 어지러운 상쟁은 11년이나 끌었다. 고도(古都)가 잿더미로 화했고 쟁란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정치적 통일력이 사라졌다. 바쿠후를 비롯한 일체의 기존 권위가 떨어지고 도처에서 하극상(下剋上)이 일어나 힘이 곧 정의(正義)가 되었다. 15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약 1세기를 지속하는 이 센고쿠 시대[戰國時代]는 신구 세력이 각지에서 다투어 세력을 넓혀 이른바 센고쿠 다이묘[戰國代名]가 대두했다. 저마다 분국법(分國法)·가법(家法)을 제정하고 서양에서 막 전래된 철포를 도입하는 등 부국강병에 힘썼다. 가신단을 성채에 집주시키고 이들을 수발할 상공업자들이 모이게 되어, 교토·나라[奈良]·가마쿠라 등 재래의 정치·종교적인 도시와는 달리 무사와 상공업자가 득실거리는 새로운 형태의 군사·상업 도시인 조카마치[城下町]가 발달해 각 영국(領國)의 중심을 이루었다.

 

혼란중에도 농촌에서는 이모작과 목화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상공업자들은 일종의 동업조합인 [座]를 조직해 생산과 판매의 독점을 꾀했다(→ 길드). 물물교환 외에 송전(宋錢)이 유통되었으나, 먼 지역간에는 환(換)이 통용된 사실은 이 시기에 전국 단위의 경제가 형성중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외무역은 경쟁적이었다. 명(明)과의 무역은 15세기초부터의 중국에서 허가받은 감합(勘合)무역의 형태였으며, 자본은 주로 서부지역 상인들의 자금과, 바쿠후·다이묘·사사(寺社) 소유의 선박이었다. 도검·동·유황을 주고 동전·비단제품을 받아오는 일종의 조공무역의 형태였다. 그러나 제한된 공식무역마저 1550년 이후 끊기게 되자 왜구(倭寇)가 발호하게 되었다. 많은 경우 관(官)이나 거상들이 뒤를 대었다. 중국·조선의 해안을 끈질기게 약탈하던 왜구 때문에 건국초의 명은 해안을 봉쇄하고 주민 소개 조치까지 취했고, 고려의 이성계는 왜구 정벌을 통해 쿠데타에 이르는 실권을 다지기도 했다. 왜구란 조선으로서는 임진왜란에 이를 때까지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용해서 처리해야 할 가장 거추장스럽고도 지속적인 외환이었다.

 

이 시기에도 대륙으로부터의 문화적 유입은 끊이지 않았다. 신유학은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들어왔고, 임제종(臨濟宗)·조동종(曹洞宗) 등 선(禪)불교가 들어와 난세에 지친 무사들을 사로잡았다. 뿐만 아니라 재래 일본 불교도 혼란한 시류를 타고 누구나 '나무아미타불'만 외면 극락정토 왕생이 가능하다는 정토종(淨土宗) 등을 만들어내어 무사들과 의욕을 잃은 서민들을 달래었다. 몽골 침략 때 활약하던 니치렌[日蓮]은 새로운 법화종(法華宗)인 니치렌종[日蓮宗]을 열었다. 또한 난세 속의 내면적 성찰과 사색의 요구를 채우 듯, 추상적인 안뜰과 차를 마시며 수면을 건너 바라볼 수 있는 전각 건축이 유행했다. 무사·승려·서민이 어울렸던 이 시기의 문화는 일본의 역사적 풍토에서만 자랄 수 있는 무사의 문화와 정신을 배양하고 있었다.

 

근세사

 

천하통일

 

분열된 강자들의 항쟁시대가 패자(覇者)들의 출현으로 종식된 시점은 서양의 새로운 기운이 동양으로 뻗칠 때였다. 15~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겪고 난 17세기 서유럽에는 민족국가와 부르주아 계급이 대두했다. 활기찬 기운은 동아시아 세계에 도달했다. 예수회 선교사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서 포교를 시작한 것은 1549년이었다. 백성들뿐 아니라 '크리스천 다이묘'가 생겨나 교황청으로 사절을 보낼 정도로 교류가 활발해졌다. 철포와 그리스도교와 무역이 왕성한 이때 분열을 마감하는 패자들이 등장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통일 삼걸(三傑)이다.

 

오다는 우선 아시카가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나서 그동안 지나치게 커진 사원 세력을 강타하여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이로써 통일의 기반은 조성했으나 모반으로 오다가 죽자 도요토미가 통일사업을 이어받았다. 도요토미는 거대한 요새 오사카 성[大阪城]을 쌓고 완전한 통일을 향한 군사적 패권의 근거지로 삼았다. 나아가 주요 경제 도시와 금·은광을 장악하고 정복된 영지들을 직할지로 편입했으며, '다이코 겐치'[太閤檢地]라는 토지조사 사업에 나섰는데, 이는 경지의 크기·등급·소유관계까지 포함하는 대규모의 기초자료 조사사업이었다. 또 인가받은 무사 외에는 무기휴대를 금지하는 '칼사냥명령'(가타나가리령[刀狩令])과 함께 병·농(兵農) 간의 신분을 분리하고, 사·농·공·상간의 신분 이동을 금지시키는 사회 재편성 조처를 단행했다. 모두 난세의 마무리임과 동시에 근세 봉건사회의 기초가 되는 사업이었으나 엄청난 재원이 소요되었다(→ 봉건제). 아직 완전히 복속되지 않은 세력도 남아 있었다. 명과의 본격적인 교역이 열린다면 주요한 돌파구가 될 수 있었으나 명은 문을 닫고 있었고, "명 정복의 길을 빌어달라"는 요구에 조선은 응하지 않았다. 여기에 허황된 야심이 겹쳐 도요토미가 침략 전쟁을 택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임진왜란

 

1592, 1597년 일본은 2차례에 걸쳐 십수 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을 초토화했으나 조선인들의 불굴의 저항과 해전 사상 유례없는 이순신의 절묘한 전술에 시달리다, 1598년 도요토미가 죽자 바로 퇴각함으로써 7년의 전란은 끝났다. 명나라도 개입한 국제전쟁이었지만 피해는 조선에 집중되었다. 왜란의 폐허 위에 조선에는 봉건사회의 재편과 동요가 일어나게 되었다. 명은 왜란의 부담도 한 원인이 되어 반세기 뒤(1644)에 만주 왕조 청(淸)으로 대치되었다. 역설적으로 이 침략전쟁에서 최대의 이득을 본것은 명분상 패퇴한 일본이었다. 도공(陶工) 등 강제 납치된 기술자들이 이후 일본의 생산 기술의 비약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인쇄술도 노획되었으나 무엇보다도 최대 노획물은 신유학에서 의학까지, 정점에 달한 조선 전기의 지식이었다. 학승(學僧)을 종군시켜 전적(典籍)들을 조직적으로 약탈했으며, 퇴계의 빼어난 문하인 강항(姜沆)은 피랍되어 근세 초기 일본 유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왜란은 장기간의 난세로 부진했던 일본의 학문과 산업부흥에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바쿠한 체제의 성립

 

왜란중에 국내에서 힘을 기르고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의 전투'로 정적을 없애고 통일 사업을 완결지었다. 자신의 거점 에도[江戶]에 바쿠후를 열고 중앙집권을 핵심으로 하는 오랜 봉건적·군사적 분권 상태를 해결할 현실적 처방을 내놓았다.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 때 일단 완결되는 이 '바쿠한[幕藩] 체제'는 무사들까지 관료조직에 편입시킨 하나의 관료체제이기도 했다. 전국을 250여 개의 [藩 : 영지]으로 나누어 다이묘[大名 : 영주]에게 맡기고, 도쿠가와 일족은 '신판'[親藩], 세키가하라의 전투 전부터 따르던 자들은 '후다이'[譜代], 그리고 마지막에 편든 자들은 '도자마'[外樣]로 분류해 원칙적으로 정치·경제·군사의 중심이 된 에도로부터 순차로 배치했다. 각 한은 토지·농민·무사에 미치는 다이묘의 자치권 아래 일반행정·재정사찰 기능이 중심이 된 바쿠후의 축소판으로 조직되었다. 다이묘 통제를 위한 기본 법제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제정하고, 에도에서의 정기적 인질 생활을 의무화한 산킨코타이제[參勤交代制]를 시행했다. 천황의 정치활동을 봉쇄시킬 제도적 조처와 함께 조정이 있는 교토는 물론 사원과 다이묘 등 모반의 가능성이 있는 요소마다 감시와 사찰 기구를 두었고, 사찰 담당의 메쓰케[目付] 조직을 풀어놓았다. 이것이 악명 높은 20세기 정보 사찰 조직의 제도적 기원이다.

 

농민은 토지 외에도 무라[村 : 마을] 단위의 말단 행정과 이웃끼리 묶은 '고닌구미'[五人組]라는 연대 책임 조직으로 묶였다. 쌀 소출 40~50%의 기본 연공(年貢)인 혼토모노나리[本途物成]와 잡세·잡역이 부과되었고, 검약과 근로가 법령으로 강제되었다. 병·농 분리로 땅을 떠난 무사들은 봉급을 받는 관료가 되었다. 중국·조선의 관료와 비교할 경우, 우선 칼을 찼다는 사실과 세습 신분이라는 면에서 크게 달랐다. 또 일본 무사들은 과거 위주의 독서에 전념해야 했던 중국·조선의 예비 관료와는 달리 지적 기초를 자유롭게 쌓을 수 있었다. 더욱이 바쿠후는 명목상의 정통인 주자학을 강요하지 않았으므로 학문의 다양한 전개가 가능했다. 또한 무사들의 충성이 천자나 임금 또는 천황·쇼군이 아닌 자신의 다이묘에게만 지워져 있던 점은 커다란 차이였다.

 

다이묘들의 본거지 조카마치에는 주로 무사와 상인들이 거주했다. 무사들은 상인들을 마치 금전을 대하듯 경멸했으나 토지에서 생활이 도시화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조카마치 상인들은 본디 무사 중에서 전시에 군수를 담당한 인연으로 상업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관료사회는 상행위를 보호해주고 상인들은 반대급부로써 운조킨[運上金]·묘가킨[冥加金] 등 면허 영업세를 내는 상조관계였다.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로 축적된 상인의 이 한의 적자나 무사의 채무를 메워주는 여분으로써 일본 근세 사회의 성장에 긍정적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근대 경제의 전단계라는 의미에서 250년 도쿠가와 시대는 도시와 농촌이 균형된 발전을 보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농경지가 16세기말 150만㏊에서 18세기에 거의 2배로 늘었으며, 면·비단·차 등 환금작물과 주류·장유(醬油) 등 농산가공품 생산이 활발해졌고, 전국적인 운송·유통·금융 망이 충실해져 전체적으로 괄목할 만한 산업발전을 이루었다. 도시화 수준도 근세 유럽과 비견할 만하여 에도의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고 오사카·교토도 35만 명을 헤아렸다. 상인과 더불어 조닌[町人] 계층을 구성하고 있던 쇼쿠닌[職人 : 수공업자]들의 군 장비와 일용품·공예품 생산도 활발했다. 20세기 자이바쓰[財閥 : 재벌]의 기원이 17세기까지 올라가는 것은 이러한 안정되고 지속적인 자본의 축적에 있었다.

 

문화도 시대상을 반영해 문화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사·농·공·상의 신분차이가 흐려짐을 볼 수 있었는데, 가부키[歌舞伎]나 [能] 공연을 보느라 많은 빚을 지는 사무라이가 있을 정도였다. 도쿠가와 시대의 서민문화는 우키요에[浮世繪]에 보이듯 얼핏 천박한 채색화이지만, 성(性)과 돈을 스스럼없이 그려 생활인에게 거리감을 주지 않는 생생한 현실적 주제에다 대량 소비에 부응하는 판화기법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소설도 비슷한 종류의 것이 인기를 모았다. 이는 동시대의 조선과는 또다른 면모였다. 일본의 이 '조닌 문화'[町人文化]는 하나의 전형적인 근세 부르주아 문화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혼란 끝에 찾은 안정된 정치체제 속에서 신유학으로 기초를 닦은 도쿠가와 사상가들이 처음 당면한 주제는 바쿠한 신체제의 합리화였다. 천자를 정점으로 연장된 효로서의 충(忠)을 받들고, 왕조교체를 천자의 덕으로 설명하는 중국의 전통적 역성(易姓) 혁명론으로는, 연금(軟禁)된 천황과 바쿠후의 중앙집권과 한의 분권적 자치라는 일본의 새로운 현실을 설명할 수 없었다. 역사를 재해석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중국과 일본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주(周)의 봉건에서 진·한으로 점점 중앙집권화의 길을 밟은 역사가 중국이라면, 고대 천황통치에서 지금의 바쿠한 체제로, 즉 집권에서 분권으로 발전한 역사가 일본이라는 해석이었다. 나아가 현체제의 합리화는 '변화'에 대한 무상(無常)의 논리로 접근했다. 체제란 추상적인 도(道)에 따른 영구불변의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현들이 규정한 도라는 것도 그 시대의 현실에 조응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논리였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나의 영웅인 이유는 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했기 때문이며, 거꾸로 바쿠한 체제가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현실에 따를 수 없게 될 때에는 또 새로운 체제를 만들 영웅의 출현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일본의 체제와 역사, 그리고 변화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된 과제는 천황이라는 존재였으나, 일군의 사상가들은 천황을 현실 정치를 초월한 형이상학적 정상에 위치시킴으로써 해결했다. 현실을 초월한 만큼 그의 뜻은 구극(究極)의 유권 해석이 될 수 있었고, 현실적 체제가 해체된 경우에는 정신적 수렴의 핵이 될 수 있었으나 현실적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매김이었다. 또 한편에서는 근본에의 회귀를 주장하는 고쿠가쿠[國學]가 형성되었다. 대륙 문물의 도입 이래 일본의 순수성이 오염되어 왔다는 역사 해석으로서 근대적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와 쉽게 결합할 소지를 품고 있었다. 또 일본의 역사를 천황 중심의 국체(國體) 개념으로서 재규정한 〈다이니혼시 大日本史〉도 편찬중이었다. 이러한 사유체계를 행동화할 방아쇠는 양명학(陽明學)의 몫이었다.

 

1853년 미 해군 제독 매슈 C. 페리가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흑선을 몰고 왔을 때 일본은 위와 같은 변혁의 논리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바깥 사정에 어두운 쇄국국가는 더욱 아니었다. 조선과는 왜란 이후 국교가 트여 20년에 한 번꼴로 400~500명 규모의 통신사절단이 왕래했으며 중국과도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교체기를 제외하고는 교역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한은 있었지만 해외 진출도 활발하여 루손 섬 등 동남아시아 곳곳에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형성될 정도였다. 16세기 중반 하비에르의 포교 이래 수십 년 간은 서양인들의 활동이 자유로워 17세기초의 그리스도교도는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양인끼리의 경쟁과 비방,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대부분 도자마인 서부 다이묘들의 세력강화에 대한 바쿠후의 견제책으로써 그리스도교도와 서양인 금압조처가 내려졌다. 그리스도교도들의 시마바라[島原] 반란을 계기로 바쿠후는 '후미에'[踏繪]라는 성상(聖像)밟기로 그리스도교도를 색출하는가 하면, 사찰에서 비그리스도교도 증명서를 발급받게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만은 나가사키[長崎]의 매립지 데지마[出島]에서의 교역을 허락받고 드나들었기 때문에, 일본의 쇄국은 문이 작았을 뿐 언제나 열려 있는 최소한의 개국이었다. 이를테면 18세기에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가 지은 〈가이타이신쇼 解體新書〉는 서양 해부학의 역술(譯述)이라기보다는 서양지식의 체계화, 즉 란가쿠[蘭學]의 성립을 고한 것이었다. 작은 섬을 통해 유입된 이 지적 체계는 일본인들의 시야를 세계로 넓히고 실증주의·경험주의 학문을 접하게 함으로써 후에 서양문물의 충격을 완화시키면서 근대화의 모루 노릇을 하게 된다. 이는 메이지[明治] 시기 대표적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지적 뿌리가 이 란가쿠였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바쿠한 체제의 동요

 

무력을 앞세운 페리의 개항 및 통상 요구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바쿠후는 전례없이 동요했다. 1600년대초만 해도 현실적이었고 완성도도 높았던 이 체제는 250년 동안의 역사 발전에 이제는 발맞출 수가 없었다. 안으로는 경제와 사상이, 밖으로는 세계사의 진전이 앞서갔다. 17~18세기에는 상업 자본이 농촌에 활발히 투자되고 있었고, 공장제 가내공업까지 성행하는 등 부농과 상업자본은 뚜렷이 커갔으나 소농·빈농은 일용 농업노동자로 전락했다. 장기적인 경제 성장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봉급계층인 무사들을 곤궁에 빠뜨렸다. 18~19세기 몇 차례의 대기근으로 경제성장이 멈추고 기층 민중이 타격을 입었다. 18세기초에는 매년 5건 정도였던 농민반란이 18세기 후반에는 평균 3배로 늘어났고, 1866년의 경우 40건에 달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1837년 오사카의 1/4을 소진시킨 대반란은 전직 관리이자 양명학자로 이름높은 오시오 헤이하치로[大平八郞]가 주도한 것으로 문하생과 도시빈민, 농민이 규합하여 부농·거상·관청을 공격목표로 삼았다. 이것은 봉건 바쿠한 체제의 대내적 모순을 여실히 드러낸 반란이었다.

 

체제유지를 위해 바쿠후는 여러 차례의 개혁을 시도했다. 18세기초 바쿠후 최초의 교호[享保] 개혁은 제도의 재정비만으로도 당시의 위기를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으나 후반에는 사정이 달라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경제성장에 따른 사치와 향락을 기강 확립으로써 다스리겠다는 18세기말의 간세이[寬政] 개혁은 현실 인식이 결여된 문제 의식이었으며, 검약과 질서로 봉건 재정과 조직의 재정비를 노린 1841년의 덴포[天保] 개혁도 사회 경제의 발전에는 한발 늦은 접근 방식이었다. 낡은 체제를 낡은 방법으로 유지하려는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던 이러한 개혁은 조선에서도 중국에서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바쿠후와 거리로나 충성으로나 가장 먼 지역의 개혁은 달랐다.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의 경우 정치를 개혁하고 산업 개발과 전매정책을 시의적절하게 시행하여 자본을 축적했다. 이들이 바쿠후 타도의 주력이 됨은 우연이 아니었다. 페리의 최후통첩을 받아든 바쿠후는 개국 여부를 다이묘들에게 물었으나 의견이 분분했다(→ 가나가와 조약). 교토의 천황에게 발길을 돌려 내키지 않은 승인을 얻어내는 유례없는 일이 일어났다. 지사(志士)들이 '천황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치자'(尊王攘夷)며 교토로 몰려들었다. 이는 천황의 일본이라는 충성 대상의 격상과 차원의 전이(轉移)였으며, 하급무사·다이묘·쇼군으로 이어지는 단층적 충성이 천황을 정점에 자리매김한 민족국가적 충성으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근현대사와 전망

 

메이지 유신

 

일본제국의 팽창(19세기말~20세기 중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불리는 1868년의 왕정복고는 수세기 동안 경영되어온 한 체제의 종말이었다. 역사의 변화에 더이상 기능하기 힘든 체제 자체의 구조적 모순과 때맞추어 가해진 외압이라는 이중의 위기가 반체제 행동에 의하여 해결을 본 것이다. 거사의 주동자들은 주로 구체제의 도자마 한이었던 사쓰마·조슈·도사[土佐]·히젠[肥前]의 젊은 무사집단이었다. 많아야 서른을 갓 넘었고 대부분 20대였다. '지사'(志士)로 불리던 이들은 현실 감각과 미래상을 제시하는 학문과 교양 및 유능한 관료로서의 경력을 공유하고 있었다.

 

1854년 미국에 이어, 영국·러시아·프랑스 등과 잇따라 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자유무역과 개항, 치외법권이 허용되고 관세자주권을 빼앗긴 불평등조약체제가 시작되었다. 수출입증가에 따른 물가고로 각지에서 서민들의 폭동이 일고, 고정수입 생활자인 무사들의 궁핍이 가속되었다. 개국 결정의 주체인 바쿠후에 대한 반발이 다시 드세졌다. 바쿠후는 쇼군 후사문제를 빌미로 반격에 나서 1859년 존왕파 지도자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등을 처형했다. 무사들은 반격에 나서 통상조약 서명 당사자인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를 죽였다. 바쿠후는 공무합체(公武合體) 정책과 인사개혁으로 한걸음 물러섰으나, 사쓰마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조슈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이 지도하는 각 지역의 존왕양이 운동은 물러서기는 커녕 목표를 바쿠후 타도로까지 높였다. 양이의 행동도 더욱 거칠어져 조슈에서는 시모노세키[下關] 해협을 지나는 서양함대에 포격하고 기세를 올렸으나 영국·미국·프랑스 함대의 보복 포격을 받았다. 영국함대는 또 자국민 살상사건에 대한 응징으로 가고시마[鹿兒島]를 포격했다. 바쿠후는 늘어나는 배상금도 문제였으나 아직도 대외관계의 주체일 수밖에 없었기에 권위를 회복하려 또 체제유지의 마지막 시도로 조슈에 대한 2차례의 징벌에 나섰다. 처음에는 전투 없이 굴복을 받아냈으나 2번째는 실패했다. 각 한 단위로 흩어져 있던 충성심이 무너진 것도 이무렵이다. 도사의 지도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포격을 받고 있는 조슈도 일본이 아닌가?"라고 스스로 물으며 서로 반목하던 삿초[薩長]간의 동맹을 성사시킨 뒤 조정의 이와쿠라 도모미倉具視]와 힘을 합쳐 바쿠후 타도에 나서게한 충성의 대상은 바로 민족국가로서의 일본이었다. 바쿠후에 대한 반역이 곧 충성을 뜻하게 되었다. 성급한 지사들은 이미 1860년대 전반에 덴추구미[天誅組]·기헤이타이[奇兵隊] 등을 조직해 바쿠후 타도의 군사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1866년말 고메이[孝明]가 죽고 메이지가 15세의 나이로 천황에 즉위하자 바로 바쿠후 토멸의 밀칙(密勅)을 내렸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의 뜻을 밝혔고 지금까지 무력을 결집시켜온 바쿠후 타도파들에 의해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선포되었다. 수개월 동안 바쿠후 잔당과의 전투가 뒤따르기는 했으나 구체제는 타도되었다. 짧게는 250여 년, 길게 본다면 거의 700년에 걸친 무가 통치 체제의 몰락이자, 동시에 외압을 이겨 살아남을 수 있는 실용적 체제의 수립이었다. 1868년 3월 신체제의 대원칙으로서 5개조의 서문(誓文)이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요약하자면 첫째, "만사를 공론(公論)에 따라 결정한다"는 것으로 이는 체제전복 쿠데타가 영웅적 개인이 아닌 집단에 의한 거사라는 사실과 앞으로도 집단으로 움직일 전망에 걸맞는 것이었다. 둘째, "지식을 세계에서 찾아 크게 황기(皇基)를 떨쳐 일으킨다"는 대목으로 이는 앞날의 신일본이 지향할 목표와 수단을 명시한 것이다.

나머지는 지배층의 화합, 상하 국민의 단결, 누습 타파 등의 강조였다. 정부 조직의 기초를 '정체서'(政體書)로 밝히고 중앙요직을 공가(公家) 출신인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와 이와쿠라 도모미 외에는, 모두 사쓰마·조슈·도사·히젠 출신들이 장악해 특정지역 편중의 이른바 '한바쓰[藩閥]정부'를 구성했다. 이어서 판적봉환(版籍奉還)으로 다이묘의 영주권을 반납시키고,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각 현에 지사(知事)를 임명하여 전국을 완전한 중앙집권체제로 재편성했다. 1873년에는 징병령으로 국민군을 편제함으로써 계층으로서의 사무라이 신분은 해체되었다. 군사권을 잃은 무사들에게는 공채를 주었고 개중에는 이를 밑천 삼아 기업으로 성공한 자들도 있었지만 경험이 없는 대부분은 낙오자가 되었다.

 

새 정부는 당시의 제국주의 각축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강력한 일본을 담보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목표로 재빨리 산업화에 나섰다. 재원 확보를 위해 지가(地價)에 따른 과세기준과 지조 3%의 금납 등을 기조로 하는 '지조개정'(地租改正)사업에 착수해, 농민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1881년에 완료되었다(→ 토지개혁). 이로 인해 산업화의 재원뿐만 아니라 농업 자본주의화의 단서가 열린 셈이었다. 또 관영공장을 설립해 총포·조선 공업에 이어 외화획득을 위한 비단 제품 공업과 수입대체 효과를 노린 방직산업에도 힘을 쏟았다. 이러한 '식산흥업'(殖産興業)을 뒷받침할 철도·해운 등의 간접 투자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가 확립한 금융·통화 제도와 재정긴축 정책은 초기 자본주의 발달의 밑바탕이 되었다. 유신 이후 20년 뒤의 성과는 석탄 생산 16배, 철도 100배, 수출입량이 4배 증가하는 성과를 올렸다. 본격적인 1차 산업혁명이었다.

 

헌정제 성립

 

19세기 후반 세계가 2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이른바 '제국주의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던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일본의 조선침략 논쟁(정한론[征韓論])도 이러한 세계사적 환경론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어난 지 갓 5년, 대내적 통합조차 불투명한 신정부가 대외침략론에 휘말린 일은 유례없는 일이다. 1873년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이 침략론을 제기하고 실행에 옮길 참이었으나 불평등조약 개정과 시찰을 목적으로 구미를 순방하고 돌아온 이와쿠라 등이 내치우선론을 내세워 침략론을 일단 저지시키자, 사이고 외에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등 정한론자들은 신정부의 요직을 사임하고 반정부운동에 나섰다. 에토는 무장반란을 일으켰으며 불만에 가득 찬 옛 무사들의 반란이 이미 곳곳에서 진행중이었다. 사이고도 1877년 자신의 근거지 가고시마에서 반란에 나섰다. 진압에 7개월이 걸린 대반란이자 옛 무사들의 마지막 반란이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타가키는 정치적 투쟁을 택했다. 여론에 따른 대의정치를 주장하면서 〈민선의원설립건백서 民選議院設立建白書〉를 제출하는가 하면 릿시샤[立志社]를 조직하고 나아가 입헌(立憲)정치와 민권 운동을 선도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의회정치 테두리 내의 야권 세력의 기원을 이루는 '자유민권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도시와 농촌의 자산가들이 주도한 서구의 사조들을 절충한 자유주의에 기운 운동이었다. 정부는 강온 양면책으로 대응했다. 입헌 정치의 수립을 약속하면서 원로원(元老院)과 지방관 회의체를 설치하고, 반정부 인사들을 정부에 영입하며 동시에 비판을 잠재울 '신문지조례' 등 법적 장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는 여론에 대해 정부는 1890년 국회 개설을 천황의 이름으로 약속했다(→ 자유당).

 

일련의 헌법 논쟁의 와중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권력의 핵으로 떠올랐다. 일찍이 이와쿠라를 수행하여 구미 각국 시찰의 경험으로 '정한론'에 반대한 바 있는 그는 일본 헌정의 모델을 독일에서 찾았다. 역사적 배경이 일본과 비슷한데다 최근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실증한 바도 있었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되었다.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하는 내각, 천황이 통수하는 육해군, 비록 예산과 법안의 심의권밖에 없었지만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중의원과 귀족원, 사법권을 갖춘 천황주권의 이 헌법은 1945년까지 일본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써 정치 체제가 일단 정리되어 반정부 정치 투쟁도 이제는 헌정이라는 체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는 이토의 장기적인 목표였다.

 

정부가 헌정을 서둘렀던 이유는 그것이 불평등조약 개정이라는 국가적 과제와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굴욕적이라는 비난을 무릅쓰면서 조약개정에 힘을 쏟았으나, 상대방은 언제나 일본 법률 체계의 미비를 구실로 삼았고, 특히 사법권의 독립을 포함하는 입헌국가로의 전환을 전제 조건으로 삼아왔다. 1894년 영국과 맺은 개정통상조약으로 일본의 불평등조약체제는 막을 내렸고 신정부 최대의 대외적 과제가 해결되었다. 그러나 아시아 세계는 사정이 달랐는데, 정한론은 연기되었을 뿐이라는 것이 곧 증명되었다. 정한론자들을 내보낸 직후인 1874년 신정부는 현안이던 일본어부 살해사건을 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고 해결했다. 근대 일본이 무력으로 분쟁을 해결한 출발점이다. 이듬해 조선으로 군함을 보내어 강화도 등 서울의 관문을 포격하여 무력시위를 벌임으로써 조선으로 하여금 불평등조약을 조인케 했다. 두 사건 모두 아직도 내정이 불안한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서양 제국에 대한 수평적 관계의 모색과 인접국들에 대한 수직적 관계의 모색이라는 대외관계의 이중적 구조는 근대 일본사에서 중요한 주제였다. 메이지 최대의 논객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 脫亞入歐論〉에 압축된 이 인식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청일전쟁이었다.

 

청일전쟁

 

강화도조약에서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규정한 이래 일본의 1차 목표는 조선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 영향력의 배제였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사). 일본은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지원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청국과의 공동 출병권을 확보하는 소중한 성과를 올렸다. 1894년 조선에서의 갑오농민전쟁으로 인한 혼란은 일본이 기다리던 일이었다. 조선의 요청도 없이 멋대로 파병하여 청군에 도발함으로써 조선을 확보할 결전에 나섰다. 이 전면적 침략전은 미리 계획되기도 한데다 작전·기동력, 장병들의 사기가 청군을 압도했다. 전쟁 외교에서도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다시 못박고, 배상금 외에 랴오둥 반도[遼東半島], 타이완 섬 등의 일본 할양, 그리고 중국 내륙에서의 자유로운 통상권을 얻었다. 랴오둥의 할양만은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취소되었으나 기대 이상의 전과였다. 막대한 배상금은 금본위제도와 군비증강의 밑천이 되었다. 전쟁의 대내적 성과는 무엇보다도 국권론과 민권론으로 분열되었던 국론을 국권 우선의 팽창론으로 통합하는 계기가 된 점이다. 이 전쟁은 또 국제적인 관심사였다. 나라의 크기뿐만 아니라 최근 한 세대 동안 추진된 두 교전국의 '근대화' 성과가 비교될 참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을 부패한 절망적인 중국으로부터 조선을 해방하는 '의전'(義戰)이라고 세계에 선전했다. 그러나 전승의 영광은 뤼순[旅順] 학살과 조선에서의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따른 국제적 지탄으로 반감되기도 했다.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전개에 하나의 새로운 국제적 전기이기도 했다. 신생 제국주의 일본의 등장뿐만 아니라 태평양 세력으로서의 러시아의 본격적인 등장이 시베리아 철도의 착공(1891, 완공 1902), 삼국간섭과 때를 같이한다.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관심 또한 팽배해져 있었다. 청일 강화 과정에는 국무성과 대통령도 간여했으며 중국과 조선에서 확보해 둔 기득권도 적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산업국가로 성장한 일본·미국·러시아가 새로운 제국주의 팽창세력으로 만난 것은 이때 이 지역에서였다. 그러나 내란과 혁명으로 러시아가 곧 탈락함으로써 미·일 두 나라가 남게 되었다. 1890년대 전반에는 서로 경합했으나, 1898년을 계기로 미국의 폭발적 팽창에 밀린 일본은 조선과 중국에 주력하게 되었다. 양국은 러일전쟁중인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에서의 독점권을 상호 승인했다. 일본은 같은 해 11월 을사보호조약을 강압하여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팽창 행보는 더욱 빨라졌다. 패전한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義和團)운동을 진압하는 데 일본이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극동의 헌병'이라는 조롱기 섞인 별명도 얻게 되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의 일본은 해외 침략전쟁으로 얼룩진다. 1904~ 05년의 러일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대독선전과 중국에 대한 21개 조항 요구, 1918년의 러시아 혁명간섭을 위한 시베리아 침략, 1928년에 시작된 중국 본토에서의 무력 도발이 1931년의 만주사변, 1937년의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과의 전면전이 1945년까지 지속된다. 1941~45년의 태평양전쟁은 시기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이지만 그 핵심은 중국을 둘러싼 미국·일본 양국의 반세기 상쟁의 최종 결전이기도 했다.

 

국내정세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약 2세대만에 부국강병을 달성했다. 서양제국주의의 지배를 모면하고 산업화에 성공하여 자본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천황중심의 헌정체제를 수립·유지했으며 식민지를 거느리고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섰다. 그러나 국권과 국위가 휘날리는 동안 일본 국민의 희생은 엄청난 것이었고 정상적인 발달과정 대신 파행적으로 전개된 역사의 상처를 지니게 되었다. 1945년 8월 세계 최초의 핵공격으로 인한 비극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메이지 헌법에 따른 중의원 선거에는 당시 일본 인구의 1% 남짓한 45만 명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1925년에야 제정된 보통선거법도 여성·빈민·식민지인들에게는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 언론·출판·집회 등 기본권도 1945년까지 줄곧 제한되었다. 사회운동도 처음부터 제한받았다. 1890년대부터 노동운동이 일어났고,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 같은 진보적 자유민권론자를 거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가타야마 센[片山潛]같은 사회주의자들도 등장했으며, 1901, 1906년에는 사회민주당일본사회당도 발족한다. 러일전쟁과 한국 병탄(倂呑) 사이의 이 시점에서 체제측의 대응은 강경했다. 사회주의자 탄압에 항의하는 무정부주의자 24인을 천황암살을 기도했다는 구실로 모두 사형에 처한 대역(大逆) 사건이 일어났다. 장차 이념을 불문하고 반체제 운동의 탄압에 천황의 존재가 맡을 역기능을 예시해주는 일이었다.

 

식민지 영유가 반드시 일본인들을 이롭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엄청난 식민지 경영 비용 때문에 한때는 타이완 매각을 고려했고, 조선 쌀 반출이 늘면서 일본 농민이 고초를 겪었다. 만주에서의 야심적인 개발은 패전까지의 반세기 동안 투자액도 못 건졌다. 일본 제국주의를 제국주의 일반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제국주의 팽창이 민중 생활까지 근대화시킬 여력은 더더욱 없었다. 쌀 생산은 도쿠가와 시대 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 100년간 2배로 늘었으나 인구는 3,000만에서 6,500만으로 늘었다. 화학비료나 경지정리에 힘입었을 뿐 근본적으로는 당시 선진국가들이 도달한 자본주의화된 집약적 영농과는 거리가 멀었다. 20세기 전반 내내 농민의 30%가 소작농이었으며 소작료는 1930년대에도 50%나 되었다. 다수가 농촌에서 일용 농업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이농하여 공장노동자·도시빈민이 되었다. 지조개정 때부터의 초기 농민운동은 국지적인 것이었다. 1884년의 지치부[秩父] 사건처럼 지방의 반정부 정치인들과 결부된 거친 소요도 있었지만 중농 이상이 참여한 운동이었다. 20세기의 농민운동은 소작쟁의 위주로 노동운동과 결부되어 1922년에는 일본농민조합이 설립되고 사회주의의 영향도 받게 되지만 뚜렷한 발전은 없었다. 이처럼 근대 일본의 농민들은 근대화의 상층을 떠받치는 기층이면서도 봉건적 구조로부터의 해방 투쟁 경험은 미미했으며 이는 중국·조선의 경우와 크게 비교되는 점이다. 다만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일본 농촌에서 불만과 야심에 찬 젊은이들이 제국 군대로 진로를 택함으로써 국가사회주의와 전체주의에 기울어 부르주아 의회 정치를 타도하려는 반체제 세력의 핵심이 된 것은 일본만의 특징이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노동자들의 저항 운동은 상대적으로 활발했다. 일찍이 1886년 최초의 파업이 있었으나 청일전쟁 이후에야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가타야마 센[片山潛] 등의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되었다. 곧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되고 노동조합기성회 또는 유아이카이[友愛會]가 결성되어 세력이 커진 노동운동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 정점에 달했다. 1920년에는 일본사회주의동맹이, 1922년에는 일본공산당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들 세력은 내부 분열과 1930년대의 전체주의의 통제 밑으로 가라앉았다. 일본의 민중 운동이 비교적 허약했던 까닭은 민중들의 자발적 운동보다 지식인들의 이념 중심의 정치운동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근대 일본의 지식인들이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사조의 충실한 전달자 노릇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메이지 시대 이래의 사상적 규범은 '문명개화'라는 계몽주의였으며, 그 방법은 '서양화'에, 목표는 국가의 독립과 '부국강병'에 있었다. 따라서 기초적 근대 개념인 개인주의는 전체를 위한 수단의 하나로, 인권이나 민권은 국권에 종속된 맥락에서 풀이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1910~20년대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는 자유주의가 그러하다. 메이지 시대의 숨가쁜 부국강병으로부터 한숨 돌리고 자본주의도 어느 정도 성숙하여 시민계층이 대두한 개방된 시기였다.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질문, 천황제와의 관계가 핵심문제였다. 당대의 석학들인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는 국가를 법인으로 규정한 뒤 왕을 하나의 그러나 최고의 기관(機關)으로 설정함으로써,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민본주의라는 용어로써 천황제하의 민주주의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진정한 민주주의와 천황제라는 모순을 양립시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토가 한국의 애국지사 안중근에게 암살당하는 등 메이지의 이른바 '겐로'[元老]들이 대부분 퇴장하여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치 활동도 메이지 헌법의 틀 안에서 정당 중심으로 발전했다. 1913년에 정우회(政友會)·국민당(國民黨) 등 정당이 언론인들과 제휴하여 한바쓰 세력의 거물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 사퇴에 성공함으로써 정당의 정치력을 과시했다. 1918년에는 쌀소동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내각이 물러나자 하라 다카시[原敬]가 정우회의 총재로서 내각을 조직한 것이 이른바 정당내각의 시초였다. 또 1924년 선거에서 다수당 헌정회(憲政會)의 총재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가 총리가 되자 중의원의 다수당이 정국을 주도하는 하나의 정치적 관례가 세워졌다.

 

파시즘과 침략확대

 

다이쇼 시대는 유신 이후의 반세기를 결산이나 하듯 성숙한 자본주의의 보편적 면모가 여실히 나타났다. 그러나 새 왕 쇼와[昭和]가 즉위(1926)하고 1930년대에 들면서 파국이 오고 있었다. 세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인한 1929년의 대공황이 그것이다. 자원과 시장을 해외에 크게 의존하던 일본의 타격은 더욱 컸다.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는 거리에 넘쳤다. 금수출 금지나 산업합리화 조치 등으로 해결될 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뉴딜 정책 등 체제적 차원의 대개혁으로 헤쳐나갔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전체주의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군인들이 나서 체제변혁을 꾀했다(→ 군국주의). 무대는 중국이었다. 만주의 실세 장쭤린[張作霖]을 본국 정부의 통제 밖에 있던 만주 주둔 관동군(關東軍)의 중견 장교들이 폭사시켰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으로 전면 무력 도발, 이듬해에는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푸이[溥儀]를 수반으로 앉혔다. 도쿄에서도 기성 정치체제의 타도와 신체제 수립을 노린 거사가 뒤따랐다. 사관 생도 또는 현역 장교들이 1932년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를(5·15사건), 1936년에는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등 주요 정치지도자들을 죽였다(2·26사건).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움츠러들고 군부는 오히려 발언권이 강화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의 전체주의에는 경제적인 배경말고도 정당정치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이념적 뿌리가 있었다. 2·26사건에서 민간인으로 처형된 기타 잇키[北一輝]는 1906년에 이미 '순정(純正) 사회주의'를 내걸고 부패한 현 체제의 개조를 주창한 바 있다. 그를 추종하고 거사한 청년들이 받은 교육이란 메이지 시대 이래 교육칙어(敎育勅語)와 군인칙유(軍人勅諭)가 가르쳐온 충군·애국 및 왕에의 절대적 복종이 핵심이었다. 기타를 포함한 이 '쇼와 유신주의자'들의 표적은 의회민주주의라는 체제와 이념이었으며 이들의 좌표는 천황주의라는 이념과 그 체제였던 것이다.

 

1910~20년대 유럽은 전후 처리 문제에,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에 몰두해 있었고, 특히 미국은 레닌주의에 대응한 14개조의 윌슨주의라는 처방을 내놓아 계급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국제협력과 경제성장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대외 팽창은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일본의 계속되는 군비증강 문제도 1922년의 워싱턴 회의, 그리고 1930년의 런던 군축회의등 일련의 군축협상을 통한 영국과 미국의 견제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이 군축체제는 정부에 대한, 또 영·미에 대한 군부의 불신을 폭발시켰다. 군부는 이미 가상적국 제1순위를 러시아·소련 대신 미국으로 바꾸어놓은 터였다. 미국 내 일본 이민을 둘러싼 반미감정도 이를 거들었다. 캘리포니아에서의 일본인 배척과 적대행위는 인종주의·황화론 및 경계심이 그 배경이었다. 외교적 노력도 헛되이 배일(排日) 이민법(Japanese Exclusion Act)까지 1924년 상·하원을 통과하자 극에 달한 일본의 반미여론은 선전포고까지 거론했다. 공황을 전후로 두드러진 부패, 타락한 천민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미국과 서양에 대한 경멸을 부추겼다. 이러한 서양에 대비한 동양을 순수성과 윤리성으로 규정하고 일본을 동양의 정수(精髓)로 자인하면서, 서양인들에 의한 지난 1세기 동안의 유색인 박해를 갚자고 내외에 선전했다.

 

대동아공영권의 발상은 여기에다 경제적 야심을 곁들인 혼합물이었다. 중국과 강점지 한국에서도 이러한 인식을 유포시켜 민족주의를 버리는 지식인들이 나타났다. 국내에서도 반체제주의에서 일본주의로 전향하는 지식인들이 줄을 이었다. 1932년 일본정신문화연구소를 세워 세뇌사업을 시작했고 중·일 간 전면전이 일어난 1937년에는 〈국체의 본의〉를 배포하면서 국수주의를 고취했다. 이 이념의 중심은 언제나 왕이었고 전향을 거부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민족주의자·평화주의자·자유주의자 등 모든 반체제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왕의 이름으로 단죄되었다. 이 일본 파시즘은 유럽의 파시즘과 손을 잡고 전쟁으로 치달았다.

 

일본은 만주침략에 대한 국제연맹의 제소를 연맹 탈퇴(1933)로 되받았다. 1936년 일본·독일·이탈리아 방공협정이 성립되었다. 대공황으로 보호주의 흐름 속에 블록(bloc) 경제권을 형성하자 일본은 중국으로 파고들어 동북아시아 경제 블록을 다졌고 남방으로 자원 확보에 나섰다. 1937~38년에는 중국의 주요지역이 실질적인 일본 점령지가 되었다.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법·중요산업통제법이 시행되고 각 분야마다 보국연맹이 창립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쌀과 생필품의 배급제를 실시하고 정당과 농민·노동 조합들이 해산되었다. 군부는 1940년 9월 내각을 사퇴시키면서 독일·이탈리아와 3국군사동맹을 성사시켰다. 10월에는 대정익찬회가 만들어져 전국민을 세포조직화했다. 조선에서는 창씨개명 등 '황민화'정책을 강제했다. 전면전에 대비한 전시체제가 이루어졌고 1941년 7월에 성립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 2차 내각은 '대동아 신질서'의 수립을 공언했다.

 

태평양전쟁

 

미국영국은 태평양 지역에서도 공동전선을 폈다. 1939년 미국은 미·일통상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어 고철류와 석유류의 금수, 그리고 일본인 자산 동결조처를 취했다. 영국은 미얀마 루트를 통해 중국의 항일전쟁을 본격 지원했고, 여기에 미국·네덜란드로 이루어진 대일 봉쇄망 ABCD 라인이 형성되었다. 일본의 일부 기업가, 외교관들은 전쟁만은 피하기 위해 미국과 협상에 나섰으나, 영·미 양국의 결의는 이미 굳어져 있었고 국내에서는 강경 주전파인 육군장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내각을 맡았다. 1941년 11월 마지막 협상은 결렬되고 12월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제2차 세계대전). 3년 8개월을 끈 이 전쟁의 초반에는 일본이 기선을 잡았으나 갈수록 국력의 격차가 드러나면서 대세가 기울어갔다. 태평양의 동남부부터 밀리기 시작해 1945년에는 본토의 일부인 오키나와[沖繩] 섬이 미군에게 점령당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공군이 일본의 대도시를 공습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은 부족한 자원과 군사력을 가지고 거의 맨몸으로 버텨갔다. 전쟁 초기 240만 명이었던 병력이 말기에는 학생까지 동원하여 700만 명에 이르렀고 어린 소녀까지 포함된 여자정신대를 편제했다. 한국 등 강점지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아 장병들의 성적 요구를 충족시켰다. 한국에서 70만 명, 중국에서 4만 명을 징용하여 광산·막장 등 혹독한 노동현장에 투입했다. 물속으로는 인간어뢰를 가이텐[回天]을 하늘로는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를 보내 미국 함대를 공격하게 했다. 자살 공격에 선발된 이들은 한결같이 '천황 만세'를 외치며 산화했다. 그러나 혼슈[本州]의 대도시까지 미군의 소이탄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고 있었다. 8월초 미국은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각각 1발씩 핵공격을 가해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원자폭탄). 1주일 뒤 일본 왕은 무조건 항복을 방송했다. 중일전쟁부터 따지자면 일본의 군인 230여 만 명, 민간인 80만 명이 죽었으며 8명 중 1명은 집을 잃었다. 여기에 미국의 손실은 접어두고라도 중국은 1,000만~2,000만 명, 인도네시아·베트남은 각각 200만 명, 필리핀은 100만 명 이상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는 한국으로, 전쟁기간의 인적·물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36년간 일본의 강점에 이어 미·소 양 전승국에 의해 국토가 분단됨으로써 역사의 자주적 발전이 거의 1세기 동안 파행되었다.

 

항복문서는 1945년 9월 2일 조인되었다. 이때부터 1951년 9월에 미국 등 48개국과 조인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이 회복될 때까지 6년간 일본은 연합국총사령부(GHQ)의 이름으로 주둔한 미군의 점령 아래 놓였다. 총사령관 D. 맥아더의 지시를 받은 일본 정부가 그 정책을 집행하는 간접 통치였다. 전후처리 및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그리고 미래의 미·일 관계에서 바람직한 상대로서의 일본의 위상정립이 초기 미국의 점령정책의 핵심이었다. 강화조약과 동시에 맺은 미·일안전보장조약으로 미군의 계속 주둔과 침략시의 즉각 참전을 규정했다. 전쟁 책임을 묻는 극동군사재판을 열어 1급 전범 28명 중 7명을 교수형에, 16명을 종신형에 처했으나 왕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것이 미국의 기본 정책이었으며 대신 왕으로 하여금 보통 인간임을 선언케 했다. 군대와 재벌을 해체하고 독점금지법과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미국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일본의 새 헌법이었다. 국민 주권과 기본권을 보장하고 평화주의 원칙 아래 전쟁이라는 수단을 영구히 없앨 목적으로 헌법 제9조에 육·해·공군 기타 전력의 보유를 금지시켰다. 남녀평등을 못박고 직접·보통 선거로 성립되는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나라의 주요권한을 갖도록 했다. 언론·출판·집회·결사 자유도 물론 보장되었다.

 

그러나 중국 정세는 미국의 예상과는 전혀 달리 전개되었다. 전쟁중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정권은 국제적으로 중국을 대표하고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공산당에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946년 공산당 소탕을 노린 야심적 대공세가 역공을 불러 1년 사이에 국민군의 1/4을 잃고 황허 강[黃河] 이북은 거의 공산군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미국의 집중적인 원조도 효력이 없었다. 공산당이 지배하게 된 중국 대륙을 눈앞에 둔 미국은 동아시아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1949년에는 타이완을 제외한 전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판도로 들어갔다. 1948년 8월 미국의 지원으로 남한 단독정부가 세워졌고, 10월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는 대일정책의 기본을 '민주화'로부터 '경제부흥'으로 대선회했다. 12월에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16명의 1급 전범이 모두 석방되었다. 1950년 6·25전쟁의 발발을 전후로 공산당원과 동조자들을 색출·추방하는작업이 본격화되었다. 반면 11월에는 옛 공직자와 군인들에 대한 추방령이 해제되었다. 이에 앞서 맥아더는 병력 7만 5,000명의 국가경찰예비대를 설치하고 해상병력에 8,000명을 추가로 증원하도록 하여 실제적인 군사력을 구축했다. 3년간의 6·25전쟁은 일본을 군수 보급 기지로 만들었다. 군수물자 생산이 주도하는 이른바 '특수'(特需)가 일어나 광공업 생산은 곧 전쟁 전의 수준을 되찾았고, 점령 초기부터 들어온 미국의 원조와 민간자본을 바탕으로 이른바 급속한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1960년대의 연평균성장률이 11.9%, 1980년대까지 30년간 연평균성장률 7.7%는 구미 각국의 2.4~4.4%와 크게 대비된다. 1968년부터는 국민총생산량(GNP)이 미국에 이어 자본주의 세계 제2위로 오름으로써 경제대국이 된 것이다.

 

세계정세와 일본

 

그러나 일본 경제의 근저에는 대미 의존이 크게 깔려 있다. 지난 30년간 수출의 25% 이상, 수입의 평균 20%가 미국에 편중되어 있는데다 수입품의 대부분은 식량과 원자재, 수출품의 대부분은 공산품이다. 총수입액의 75% 이상이 식품·원자재·에너지이며, 총수출액의 95%가 공산품인 점을 염두에 둘 때 이 의존도는 심각하다. 에너지의 주공급원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을 받는 지역이다. 또한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을 쓰고 있으며 가까운 장래에 이것을 벗어날 가능성은 없다. 최근 핵무기의 비중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일본이 미국을 위협할 정도의 군비를 증강할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국제연합(UN)의 깃발 아래 해외로 파병하는 평화유지군(PKO)도 이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전후 일본의 대외정책도 미국의 세계 전략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대(對) 한국·중국 정책이나, 대공산권 통상에서도 미국 주도의 수출통제위원회(COCOM)의 규제를 받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이 이제껏 세계 도처에 미친 현실도 부인할 수 없지만,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20세기 전반기의 역사가 미국·일본의 두 신제국주의가 경합한 역사였고, 태평양전쟁은 그 마지막 무력 대결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전후의 미·일 관계는 단순히 패전국과 승전국 간의 일반적인 관계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그러나 냉전시대가 폐막된 20세기말의 세계는 일본에게 좀더 넓은 운신의 폭을 주고 있기도 하다. 냉전시대의 긴장을 이용해왔던 미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이완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민당(自民黨) 장기집권하에서의 일본은 일찍이 없던 반세기에 가까운 평화와 고도 경제성장의 열매인 안정과 평화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65년간 재위한 쇼와 왕에 이어 '평화롭게 되다'라는 뜻의 '헤이세이'[平成]라는 새 왕의 연호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를 이끌어온 지도층은 스스로 전후 체제의 핵심에 도전해왔다. 자위대라는 이름의 군사력 증강, 천황주의와 군국주의 이념의 부활, 그리고 전쟁수단을 영구히 부인한 헌법 제9조의 개정을 위한 노력이 그것이다. 20세기 전반 일본의 역사가 잘못되었다는 역사적 평가와 그에 따른 반성 및 청산을 부인하는 점이다.

 

전후 체제는 본질적으로는 미국에 의해 미국의 희망을 반영한 타율적으로 주어진 체제였기 때문에, 일본이 장차 미국의 영향을 벗어나 진정한 주체성을 찾을 때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지가 주목된다. 현재로서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릴 수밖에 없다. 다만 과거 일본의 압박을 받은 이웃 나라들의 국력과 경계 태세가 과거와는 다르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사는 대중의 적극적인 역사에의 참여를 그 특징으로 삼는다는 점에 희망을 걸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일본인의 70% 이상이 전후 세대이며, 구세대라 하여 모두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 지배층이 주도해왔던 역사를 일본 민중이 주체적으로 전환시킨 예를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 특히 근대사는 유례 없는 성공담으로, 근대화의 모델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를 고찰해볼 때, 첫째, 단기간에 국위를 선양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20세기 전반의 역사와, 패전국으로서 타율적 울타리 안에서 주변 국가의 경계를 받으며 경제대국으로서 주체성을 넓히려는 20세기 후반의 역사라는 20세기 일본의 두 역사 사이에 우리들이 내릴 역사적 평가의 여유가 존재한다. 둘째, 근대 일본의 역사상은 전근대 일본이 일구어놓은 토양 없이는 그 전개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한 나라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는 근대사라는 토막난 한 시대의 특성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수직적으로 관통하는 '전통과 개성'이라는 2개의 잣대로써 균형을 잃지 않고 이해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표1. 일본의 역대 총리, 표2. 일본의 역대 천황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朴英宰 글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8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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