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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집짓기

[펌]정호경신부의‘살아숨쉬는’집짓기

by 마리산인1324 2008. 6. 28.

 

[펌] http://cafe.daum.net/noaark

 

 

 

정호경신부의‘살아숨쉬는’집짓기



개성도 없고 겨레의 뿌리도 없이 숨통죄는 집들은 사람을 살리는‘살림집’이 아니라 죽이는 ‘죽임집’이라고 말하는 경북 안동 교구의 정호경신부는 94년 1월부터 약 5년여에 걸쳐 ‘숨쉬는 살림집’을 손수 지었다. ‘새들도 자신의 집을 훌륭히 짓는다’고 말하는 정신부는 자신의 집짓기 경험이 ‘생각과 마음은 간절하지만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썼다. 더 상세한 내용은 최근 출간된 ‘손수 우리집 짓는 이야기’(현암사)를 참조하기 바란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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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목장이도 이야기꾼도 못 되는 제가 주제넘게 ‘집 짓는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이런 생각들이 계기가 됐습니다.

이 땅에 ‘집다운 우리집’은 있는가? 그동안 우리는 개성도 없고, 겨레의 뿌리도 없이 숨통 죄는 집들을 너무 오랜 세월 지어왔고 지금도 무더기로 짓고 있습니다. 1900년 초부터 집장수들이 지은 집, 장삿속으로 지은 집들이 땅을 가득 채워오고 있으니 그 세월이 한 세기가 꽉 찼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이 살리는 ‘살림집’인가, 죽이는 ‘죽임집’인가로 저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정(情)으로 짓고 정으로 사는 ‘집생활’은 있는가? 사람살이에 꼭 필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밥을 짓고 밥을 먹는 ‘밥생활’, 옷을 짓고 옷을 입는 ‘옷생활’, 집을 짓고 집에 사는 ‘집생활’입니다. 사람은 자동차나 컴퓨터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밥과 옷과 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가장 소중한 이 세 가지가 온통 병들어 있습니다. 위기를 넘어서 파국이라는 느낌입니다.

밥과 옷과 집을 살리는 길은 없는가? 아직은 어린 싹에 불과하지만, 우리 밥상을 살리자는 이 땅의 ‘밥생활운동’은 30여 년이 됐고, 우리 옷을 살리자는 이 땅의 ‘옷생활운동’은 20여 년이 되었으니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집을 살리자는 이 땅의 ‘집생활운동’은 아직 움도 트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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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흘려 일하는 삶 그리워 집 짓기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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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떻게 생명을 살리는 ‘우리 집’을 짓기로 마음먹게 됐는지를 이야기하자니 우선 저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야 할 듯합니다.

저는 1940년 ‘용’의 해에 경북 봉화읍(당시 지명은 ‘내성’)에서 태어났으니, 올해로 쉰아홉 살입니다. ‘중늙은이’입니다. ‘용띠’라서 그런지 관상학 분류에 따르면, 제 코는 용코형이고 눈썹은 용눈썹형이며 눈은 용눈형입니다. 그리고 상상의 동물인 용의 귀가 쇠귀라지만, 제 귀는 쇠귀는 못 되는 듯하나, 비교적 큰 귓바퀴에 귓밥이 넉넉해서, 밥이라면 ‘고봉밥’이 분명합니다. 귀가 고봉귓밥인데도 배고픈 시절이 꽤 길었던 편입니다. 그 시절 대다수 밑바닥 인생들이 그랬으니 시절 탓도 있었겠지요.

긴 고학생활을 거쳐 가톨릭 교회 신부가 된 해가 1968년이었으니, 제 나이 스물아홉 살이었습니다. 그 후 주로 경북 북부지방의 여러 성당에서 사목활동을 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집 짓는 일’이라고 해 본 것은, 중학생 때 칠장이(페인트공)를 따라가 한 달간 밑일꾼 노릇을 해본 적이 있고, 성당과 성당 부속건물을 수리할 때 허드렛일꾼 노릇을 몇 차례 해본 적이 있을 뿐입니다.

1970년대에는 농민 생존권과 민주화와 관련해서 두 차례 짧은 옥살이를 했고, 1980년대에는 ‘한국가톨릭농민회’ 전국 지도신부 노릇을 했습니다. 이 시절에 저는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너무 늙기 전에 노동할 만큼 건강할 때 시골에 가서, 농사지으며 살다가 죽겠다’

행복한 인생이란 ‘신명을 바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가는 삶’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신부가 된 것도 이 때문이었고, ‘은퇴 없는 삶’을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란 짜인 틀 속에서 성당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교육이나 복지에 투신할 수도 있고, 도시 빈민이나 노동자 또는 농민과 함께 살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입품’만 팔다가 가는 삶이 두려웠고, 하느님이 허락하신다면 흙에서 ‘즐겁게 땀흘려 일하다 가는 삶’이 그리웠습니다. 짜인 틀의 가치도 소중하겠지만, 그것이 모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땀흘려 농사지어서 나눠 먹고 오두막집 지어서 살며, 아직도 너무 많이 갖고 있는 옷가지(30여 년 동안 신자들이 선물한 옷)는 손자대(실은 손자가 없지만)까지 입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 결심을 했을 때부터 저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습니다. 가톨릭농민회 소임을 마치고 잠시 외국(유럽과 이스라엘)을 다녀온 다음, 어느 시골 성당에서 몇 년간 사목활동을 했습니다. 이때, 오래 사귀어 온 봉화의 전우익 선생님 소개로 목공일을 시작했습니다.

1992년 저는 처음으로 집 설계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설계라지만 어설픈 흙집 평면도였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대체로 이렇습니다. 공간활용을 가장 잘 한 집이라는 ‘벌집’의 육각형을 공동방으로 삼고, 남·동쪽에 세 개의 방을 달아 세 사람이 공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돼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짓는 집은 흙집이 아니라 통나무흙집이 됐고 구조(방 배치)도 많이 달라졌지만,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뜻은 집을 손수 짓고자 하는 분은 반드시 몇 차례라도 손수 설계를 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설프고 조잡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일은 집 짓기 기획이자 구체적인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당시 제가 가진 돈이라곤 매달 15만원씩 1년 반쯤 부은 적금통장뿐이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때가 오면 13∼15평의 흙집을 지을 돈은 생길 것이라 믿기로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품처럼 포근한 집, 자연과 이웃에 열린 집, 살아 숨쉬는 집,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집을 그리며, 무엇보다 우리의 ‘전통살림집’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전통살림집에서 ‘오늘에 되살려야 할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아울러 되살리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제가 ‘손수’ 지어야 할 집이기에 선(아마추어)목수가 될 제가 ‘쉽고 싸게’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줄곧 염두에 두어야 했고, 할 수 있는 대로 집터 가까이에서 집 짓는 재료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우리의 전통살림집을 이야기하는 분들은 북쪽 추운 지방의 ‘구들(온돌)’과 남쪽 따뜻한 지방의 ‘마루’가 만나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거나, 지붕곡선과 문창살의 아름다움, 기둥·도리·인방·문얼굴이 드러나 보이는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이러한 얘기는 집의 ‘속’보다는 ‘겉’에 초점을 맞춘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겉’보다는 ‘속’에 관심이 더 많아, 집의 속사정에 초점을 맞추어, 집터·방배치·집 짓는 재료·집을 짜맞추는 방식·벽과 천장과 지붕·문과 창·방바닥·뜰과 울타리(담장)와 대문·세간살이 따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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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는 남향이나 남남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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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는 반드시 양지발라야 합니다. 박정희의 군사 독재시절처럼 ‘철도향 집’이나 ‘도로향 집’을 지어서는 안 됩니다. 집은 남향(子坐午向)이나 적어도 남남동향으로 지어야, 여름에는 뜨거운 햇볕이 안 들고 남풍이 불어 시원합니다. 남쪽 창만 크게 낸다면 겨울 한낮의 따스한 햇볕이 방의 3/4까지 스며들어 밝고 따뜻할 뿐만 아니라, 땔감도 훨씬 적게 듭니다.

서향집이 되면 무더운 여름 오후부터 밤중까지 집이 뜨거워 살기 어렵고, 겨울의 매서운 서풍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또 북향집을 지으면, 겨울 북풍에 시달리고 마당에는 늦봄까지 눈이 녹지 않습니다. 햇볕이 좋은 겨울 한낮에도 마당에 나서기가 싫으니, 겨우내 웅크리고 견뎌야 하고 감기도 잦기 마련입니다. 더위와 추위가 심한 집은 거처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몹쓸 집(흉가)’입니다.

집터는 건조해야 합니다. 습기가 많으면 집도 사람도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30여 년 전 얘깁니다만, 제 친구 류강하 신부가 살던 시골 성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그 성당에는 신부의 밥짓기·옷빨래·집청소를 담당하는 여자(성당에서는 그분들을 ‘사제관 언니 또는 언니’라고 부르기도 함)가 사는 집이 별채로 있었고, 그 집이 신부의 식당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 집에 사는 여자가 자고 일어나면, 얼굴과 몸이 붓고, 기력이 떨어지며, 몸과 마음에 탈이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임 신부들이 살 때에도 그런 일이 되풀이 되어, 전임 신부마다 돈을 들여 집을 수리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류 신부도 그 집에 손을 쓰기는 해야겠는데,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걱정이라 했습니다. 이 사정을 들은 얼마 후, 저는 그 성당을 찾아가 이틀간 머물면서 그 집터 안팎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오전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집 안의 목욕탕 벽과 바닥에 송알송알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후가 되면 그 물방울이 사라지고, 문창을 닫은 밤부터 오전까지 다시 나타났습니다. 저는 속으로 조금 흥분해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건 습기 너 때문이야!’.

그리고 집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또 하나의 숙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낮은’ 집터에는 습기가 많고 ‘높은’ 집터에는 습기가 적은 편인데, 이 집터는 성당 터와 함께 그 지역에서 우뚝 솟은 높은 집터였지만 습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집터의 높고 낮음과 습기의 적고 많음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찰을 마쳤으니 처방을 내릴 수밖에요. 그래서 제가 류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처방대로 하든지 말든지 자네 맘대로 하게. 분명한 것은 진정 집과 사람을 치유할 맘이 있으면 믿음이 있어야 하네. 병의 원인은 심한 습기 때문일세. 집 둘레에 너비 30∼40cm, 깊이 1m 정도의 홈을 파고 그 안에 주먹만한 자갈을 채우게. 그리고 집 뒤 구석에는 더 깊이 구덩이를 파서 큰 독(그때 당시에는 PVC 물통이 없었음)을 묻어 보게. 병의 원인이 습기 때문이라면, 그 독에 물이 괸 것을 보고 확인할 수 있네. 해볼 텐가?”

류 신부는 믿음이 깊은 사람이어서 제 처방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결국 집수리도 하지 않고 헐값으로 그 집은 되살아났습니다. 진찰 및 처방료를 받지 않았으니, 저는 아직도 류 신부에게는 채권자인 셈입니다. 습기가 심한 터의 집 역시 몹쓸 집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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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밑 물길 피해서 지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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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밑에 지하수길이 없어야 마땅한 집터입니다. 땅 위에 강이나 내가 있듯이 땅 밑에도 물길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 집을 지으면 사는 사람들이 탈나기 마련입니다. 척추나 신경계통에 심하게 영향을 끼치니, 배겨나기 어렵습니다. 몸과 마음이 탈이 나서 심한 병이 생기거나 죽기까지 합니다.

집 밑에 지하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방법이 ‘라디에스테지’입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프랑스 신부님들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지하수도 찾고, 온천도 찾고, 땅굴도 찾고,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도 찾고, 병의 원인 따위도 찾는 방법입니다. 땅 따위의 기(氣)와 사람의 기를 맞추는 훈련을 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쓰이는 연장은 버들가지나 대나무 따위의 ‘바게트(막대기)’이고, 우리가 ‘추’라고 부르는 ‘뺑돌’입니다. 이 두 가지 연장 가운데 한 가지를 가지고 용케도 알아 맞힙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면, ‘이 자리에 얼마를 파면 얼마만한 물길이 있어 얼마의 물이 나올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요즈음 돈벌이로 지하수를 파는 사람이 이것을 흉내내는 것을 더러 보았습니다.

어쨌든 물길의 피해를 막는 가장 완벽한 길은 그 물길을 피해서 집을 짓는 것인데, 그게 안 되면 거울을 엎어놓고 자는 게 효과가 크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더러 구리판을 깔았으나, 거울은 구리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집을 짓기 전에 지하수 물길을 확인하기로 했고, 방바닥 일을 할 때, 방마다 여러 장의 거울을 50∼60cm 간격으로 엎어 깔기로 했습니다.

집 주위에 마실 물, 쓸 물이 넉넉해야 좋은 집터입니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샘물(석간수)이면 더욱 좋겠지만, 집 가까이에 넉넉한 지하수 물길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물이 있어야 삽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집터를 찾을 때 이것을 꼭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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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구석 없는 으(―)자형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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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짜임새(방 배치)나 크기는 그 집에 살 사람의 사정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이를테면 가족의 성격, 취향, 생활습관, 가족 수 따위에 따라 집의 평면도가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집의 모양과 크기와 짜임새를 결정하기에 앞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집의 평면 ‘모양’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조상이 지어 온 집의 평면 모양은 대체로 으(一)자집, 기역(ㄱ)자집, 디귿(ㄷ)자집, 미음(ㅁ)자집이었습니다. 방금 말한 차례대로 우리의 집이 변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민들은 대체로 一자집, ㄱ자집을 지어 살아왔고, 가진 사람들(상류층)은 대체로 ㄷ자집이나 ㅁ자집을 지어 살아 왔습니다. 서민들은 一자집을 짓고 살다가 가족이 늘어나면, 방 1∼2칸을 더 달아내 ㄱ자집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ㄷ자집이나 ㅁ자집은 추위와 짐승이나 도적의 습격을 막으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고, 감추고 숨길 것이 많거나, 남자와 여자,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갈라놓으려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서민들이 짓고 살아온 ‘一자집’은 우리 집의 조상이라 할 수 있고, 남향집을 一자 모양으로 지으면 그 집 전체가 살게 됩니다. 버릴 구석이 거의 없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합니다. 춥고 더운 서북향 방을 가장 많이 줄이는 집 모양입니다. 一자집을 이칸 통집(겹집)으로 짓는다 해도, 씀씀이를 봐서 남북을 터 큰방(공동방 또는 거실)을 대청처럼 겹간통으로 지으면 쓸모가 적은 공간을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뜰과 뒤뜰도 온전히 활용할 수 있습니다.

집의 ‘크기’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몇 채를 지을 것인가? 방의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 저는 상류층의 전통살림집을 볼 때마다, 아름다움이나 정교함도 더러 느끼지만, 부정적인 느낌이 더 큽니다. 이를테면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 따위를 여러 채 지어 놓고, 그 사이사이를 담장과 문틀로 막아 갈라놓은 집 모양은 아무래도 생명의 이치를 거스른다고 느꼈습니다. 생명의 이치는 순환 또는 공생(共生)이지만, 죽음의 이치는 차단 또는 분단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농촌의 경우 살림집 한 채에 ‘헛간(창고) 겸 일간(실내 일터)’과 ‘마당뒷간(집밖 화장실)’이 있어야 합니다. 농기구와 곡식 따위를 넣어 둘 곳이 있어야 하고, 눈비가 올 때나 춥고 더울 때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당뒷간은 농촌살이에 꼭 필요합니다. 일하다가 더러워진 몸으로 집안뒷간(실내 화장실)에 드나들기가 곤란하고, 특히 여럿이 품앗이를 할 때면 더욱 그러합니다. 또한 마당뒷간의 똥오줌은 땅을 살리는 재료기 때문에 꼭 필요합니다. 요즈음 시골에서 양옥을 지으면서 집안뒷간(실내 화장실)을 믿고 이미 있던 마당뒷간을 없앤 후, 후회하다가 다시 짓는 경우를 더러 보았습니다.

이른바 ‘좌식 생활’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아주 오랜 옛날에는 방바닥이 흙이나 돌이었으므로 의자와 침상생활을 했다지만, 온돌과 마루가 생긴 이후부터는 참으로 오랜 세월 좌식 생활을 해왔고, 지금도 시골에는 대체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의자생활을 한 사람이 우리 농장에 오면 쪼그리고 앉아 하는 일(김매기나, 수세식이 아닌 뒷간에서 일 보기)에 쩔쩔맵니다. 다리도 굳어 있고 허리도 굳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의자생활보다 좌식생활이 다리와 허리운동을 더 자극시킵니다. 머리도 몸도 그리고 마음도 자주 써야 좋아지는 법입니다. 의자 따위가 없다면 방의 활용도를 크게 높일 수 있습니다. 한 방에 밥상을 펴면 식당, 책상을 펴면 공부방, 방석을 펴면 응접실, 이불을 펴면 침실, 요강을 놓으면 화장실이 되니, 이것만 해도 방 하나의 쓸모가 다섯 가지나 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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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부엌 뒷간은 편리함 위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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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짜임새(방의 배치)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전통살림집에서 가장 넓은 ‘대청마루’는 집 가운데 있고 남향이어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청마루는 남북이 겹간통으로 터져 보기에도 시원스럽고 바닥은 나무널판으로 조각조각(모자이크) 깐 우물마루입니다. 천장은 반자(추위와 더위를 줄이고 방의 안정감을 얻기 위해, 지붕과 방바닥 사이 지붕 밑에 수평으로 종이나 나무널판 따위로 막는 것) 없이 나무 색깔 그대로여서 굵고 탐스러운 대들보와 도리, 서까래 따위가 드러나 보이는데, 이는 누가 봐도 아름답습니다. 더운 여름 시원한 대청마루에 앉아 울 넘어 산과 숲과 바위도 만날 수 있고, 여름밤에는 달과 별과도 사귈 수 있는 자리가 대청마루이기도 합니다. 바쁘게 장보러 가는 이웃집 처녀도 넉넉히 바라볼 수 있고, 온 식구가 두레밥상에 둘러앉아 밥 나누는 모습을 이웃에 보여주는 자리도 바로 대청마루입니다.

그러나 대청마루에 문제점도 있습니다. ‘쓸모’의 문제입니다. 따뜻한 남쪽지방에서는 겨울 한 철을 빼고는 쓸모가 많겠지만,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나라에서는 참 아깝게도 여름 한 철밖에는 쓸모가 없습니다. 방 가운데 가장 넓고 좋은 자리를 차지한 대청마루가 여름 한 철만을 위해서라면, 이것도 거품이고 과소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대안은, 대청마루 자리에 남쪽 창을 크게 내 온돌방을 만들어, 공동방 혹은 두레방으로 쓰기도 하고 침방으로 쓰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루는 원두막 바닥이나 문간(‘현관’이란 말은 일본집의 문간을 뜻함)바닥에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전통살림집의 ‘부엌’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저에게는 불만투성이입니다. ‘위치’도 그렇고 ‘구조’도 그렇습니다. 요즈음은 집에 대한 결정권이 거의 온통 가정주부에게 있다지만, 지난날에는 가정주부의 뜻이 사람의 뜻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부엌 위치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살펴본 바로는, 부엌이 가장 나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서쪽 또는 서북쪽에 있으니까, 춥고 더울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땔감이 나무니 연기가 쉽게 빠지라고 만든, 이빨이 듬성듬성 나 있는 살창 때문에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고생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농촌 주부는 온갖 힘든 농사, 빨래 해가며, 부엌살림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부엌은 생명의 밥을 짓는 거룩한 곳이며, 주부 혼자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곳입니다. 밥을 지어 나누는 사람이 기분 좋아야, 밥도 좋고 집안도 좋아집니다. 여자들이 콧노래 흥얼거리며 밥 짓기를 하도록 부엌을 만들어야 합니다. 허리를 펴고 거룩한 밥 짓기를 할 수 있는 조리대, 찬물과 따뜻한 물을 적절히 쓸 수 있는 설거지대, 가스불 이리저리 옮기지 않고 부엌 가까이서 따뜻한 밥상을 차릴 수 있는 부엌 구조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도 시골에는 부엌과 밥상자리 사이가 ‘너무도 먼 당신’인 곳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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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자리는 남동쪽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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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자리는 집 가운데 가장 좋으면서도 편리한 남동쪽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혼자 사는 신부니까, 남동쪽에 침방·서재·식당·응접실·부엌을 하나로 합친 5평(16.5㎡) 정도의 방을 생각했습니다. 아프거나 더 나이 들어 거동이 좀 어려워도 바로 옆에 부엌이 있으면, 굶어 죽어서 세상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잠도 자고(침방), 밥 짓고(부엌), 밥 먹고(식당), 글 읽기 글 쓰기를 하고(공부방), 기도하고(성당), 손님을 맞는(응접실), 요즘 흔히 말하는 원룸시스템이지요. 과거 우리나라의 추운 북쪽지방에서도 이런 몫을 하는 방이 있었는데 이것을 ‘정주간’이라 불렀습니다.

뒷간(화장실)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마당뒷간(집밖뒷간)’은 편리한 자리에 짓고, 냄새와 파리 번식을 없애기 위해 효소 찌꺼기(광명단을 칠하지 않은 독에 싱싱한 풀과 나뭇잎을 흑설탕과 켜켜로 쌓아 발효시켜 짠 후, 그 효소액은 사람이 먹고, 찌꺼기는 좋은 거름이 됨)를 뒷간에 가끔 뿌려 주면 됩니다. 수세식이 아닌 마당뒷간을 아늑하게 꾸며서, 넉넉한 마음으로 뒤를 보며, 명상이나 공상을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처음 집 지을 마음을 먹었을 때, 집안뒷간(실내 화장실) 없이 세면과 간단한 목욕을 할 수 있는 작은 방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꿨습니다. 몇 분이 충고했습니다. 아프거나 늙어 기동하기가 어렵게 되면, 또 몸이 불편한 손님이 오셔서 이 집에 묵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 특히 추운 겨울 밤, 아픈 몸을 이끌고 마당뒷간에 가는 일은 힘에 벅찬 일입니다. 더욱이 요즘의 시골 사정은 지난날처럼 집안에 부축할 식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홀로 갈 수밖에 없으니, 외롭게 전쟁터에 나가는 꼴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따뜻하고 아늑한 수세식 뒷간, 간단한 목욕터 및 빨래터를 한곳에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늘 물이 흘러야 하는 곳이니 추운 겨울에 얼어터지지 않도록, 한쪽 벽만 집밖(외벽)에 닿는, 집 중앙의 북향 방에 정할 생각이었습니다. 발가벗고 목욕하는 곳이니 따뜻한 온돌방이어야 하고, 거의 아무 쓸모도 없이 큰 자리만 차지하는 욕조 없이, 손빨래와 간단한 목욕(샤워)을 할 수 있는 작은 터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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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과 숨쉬는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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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겨울 밤, 골초이자 술꾼인 네 사람이 2평(6.6㎡) 정도의 방에서 술을 마시며,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술자리를 끝내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우리 넷은 함께 놀랐습니다. 그토록 많이 뿜어낸 담배연기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집은 숨쉬는 재료로 지은 전통살림집이었습니다.

우리 전통살림집의 재료는 나무, 흙, 돌, 흙벽돌, 흙기와, 마른 풀(짚, 억새, 갈대 따위), 닥종이(닥나무 속껍질로 만든 창호지), 석회입니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자연재료로 숨쉬는 것들입니다. 집의 수명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연의 몫을 다합니다.

숨을 쉰다는 뜻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방 안 공기를 밖으로, 바깥 공기를 방 안으로 교통시켜, 방 안의 공기를 돌게(순환) 만듭니다. 창호지는 말할 것도 없고, 30cm 두께의 토담집 흙벽도 그 일을 조금씩 해냅니다. 숨을 쉰다는 또 하나의 뜻은 방 안의 습도 조절입니다. 습기가 많을 때 품었다가 건조할 때 내뿜어 줍니다. 자연 건조기이자 자연 가습기입니다. 자연습도조절기입니다. 특히 닥종이로 된 창호지는, 유리와는 달리, 숨도 쉬며 은은한 햇빛을 방 안에 선사합니다.

저는 시멘트나 단열재(스티로폼, 우레탄 따위), 그리고 유리를 안 쓰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유리창문은 햇빛을 잘 받아들이고, 밖을 환히 내다볼 수 있는 좋은 점은 있지만, 숨통을 막는, 결정적인 흠도 있습니다. 밖의 자연과 이웃을 제대로 만나려면 고개만 돌려서 볼 것이 아니라 손수 창문을 열고 만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집 짓는 재료를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집터 가까이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집을 지었습니다. 나무가 흔한 곳에서는 나무로, 흙이 흔한 곳에서는 흙으로, 돌이 흔한 곳에서는 돌로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운반수단이 부족한 탓도 있었겠지만, 집터 가까이에서 얻을 수 있는 자연재료로 집을 짓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요즘 흔히 말하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이기도 합니다. 턱도 없이 비싼 물류(운반)비용을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집터 가까운 데서 나무·흙·막돌·갈대·닥종이를 얻어 집 지을 마음을 먹었고, 특히 흙집을 지을 생각을 했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더러 썼던 ‘삼화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흙이나 나무는 습기에 약하므로, 습기에 비교적 강하고 견고한 삼화토는 석비레(풍화된 편마암인 푸석돌이 섞인 진흙)와 모래와 생석회를 1/3씩(1:1:1) 섞은 흙입니다. 집을 ‘손수’ 짓고 싶다고 저에게 얘기하는 분은 하나같이 흙집(황토집)을 말합니다. 그 때마다 제가 제안했던 것은 ‘습기에 강하고 튼튼한 흙벽돌을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먼저 관찰·연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흙벽돌을 찍어서 흙담집을 짓더라도 빗발이 들이치거나 장마철의 습기에 견딜 수 없다면 그 공든 집은 쉽게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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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대가 수평 수직이어야 민주화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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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살림집의 뼈대는, 못을 쓰지 않고, ‘톱’과 ‘자귀’와 ‘끌’ 따위 연장을 써서, 나무를 켜거나 썰고 촉을 내고 구멍을 파서 하나로 짜맞추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습니다. 이렇게 짓는 집을 ‘도리집’이라고 합니다. 도리집은 전통살림집의 뼈대를 만드는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대궐이나 절집의 대웅전과 같은 ‘폿집’도 그 기본은 도리집입니다. 바깥기둥 위에 새의 날개처럼 달아 낸 공포는,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지붕을 밖으로 길게 빼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흔히 폿집의 아름다움만 얘기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쓸모가 먼저고 아름다움은 나중입니다. ‘공포’가 집의 네 귀에 있는 집을 ‘귀포집’, 바깥기둥마다 있는 집을 ‘주심포집’, 기둥 사이사이에도 있는 집을 ‘다포집’이라고 합니다.

흙으로만 벽을 쌓아 짓는 ‘흙담집’이나 통나무로 벽을 쌓아 짓는 ‘귀틀집’도, 도리와 보, 그리고 문·창얼굴은 도리집을 짓는 방식으로 짜맞춥니다.

집의 뼈대를 짜맞추기 위해서는 먼저 설계(정현)를 해야 하고, 설계에 따라 ‘마름질’을 해야 합니다. 마름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치수를 정확히 재는 일과, 촉과 구멍을 내고 파는 일을, 제 자리에 깔끔하게 하는 것입니다. 치수를 정확히 잰다는 뜻은 기둥의 경우 중심선에서 중심선까지가 설계대로 되어야 집이 된다는 뜻입니다. 재목에 촉과 구멍을 내고 파는 일을 ‘바심’이라고 하는데, 문·창을 짜는 소목(목공)처럼 정교하게 하지 않아도, 줄 그은 먹줄에 따라 정확히 촉을 만들고 구멍을 파야 합니다.

마름질된 재목을 짜맞추는데(상량) 가장 중요한 일은, 주춧돌 밑이 제대로 다져지고, 그 자리가 정확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위에 짜일 집의 뼈대를 세우는 데는 ‘수평’과 ‘수직’이 정확해야 합니다. 기둥은 수직이어야 하고 도리나 보는 수평이어야 합니다. 좀 허술한 집이라도 수평과 수직이 바르면, 내리 누르는 힘이 분산되어(자치) 집의 수명이 오래갑니다. ‘민주화’된 집은 튼튼한 법입니다.

마름질을 할 때 써왔던 짜임방식이 여러 가지지만, 실상 살림집을 짓는 데 소용되는 방식은 몇 가지가 안 됩니다. 몇 가지 짜임방식만 알면, 튼튼하고 예쁜 집을 지을 수 있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도리집의 짜임방식은 ‘사개(괘)맞춤’입니다. 기둥과 도리와 보가, 못 하나 쓰지 않고, 찰떡궁합이 되어 합쳐져서 하나의 집 뼈대를 이루는 절묘한 방식입니다. 우리 조상 ‘장이’들의 놀라운 지혜를 새삼 확인합니다. 이 짜임방식만 알면, 집의 뼈대를 짓는 데 50점 이상은 따 놓은 셈입니다. 그 밖에 ‘십자맞춤’ ‘맞짜임’ ‘반턱이음’ 그리고 문·창을 짜는 데 쓰이는 ‘연귀짜임’ 따위의 짜임방식을 알면, 단순한 살림집의 뼈대를 넉넉히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선(아마추어)목수가 될 작정이었으므로, 복잡하고 힘든 방식보다는 단순하고 쉬운 짜임방식을 골라 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오래 되고 단순한 ‘맞배집’을 짓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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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벽은 봄에 바르고 반자는 연탄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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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집의 벽은 짚을 썰어 섞어 반죽한 진흙을 기둥과 기둥 사이(문구멍과 창구멍은 빼고) 안팎으로 바르고, 그 흙벽이 완전히 마른 다음, 모래가 섞인 흙이나 하얀 회를 발라 마감합니다. 무거운 진흙이 제자리에 붙어 있기 위해서, 아울러 더 튼튼한 벽을 만들기 위해 팔뚝 굵기 나무를 세우고(중깃), 대나무 따위를 가로엮고 나서(가시새), 수수깡이나 겨릅대(삼―대마초의 속대궁), 혹은 싸리나무 가지를 한움큼씩 가로(누운외 또는 눈외)와 세로(선외)로 엮습니다. 흙벽의 힘줄인 셈입니다. 흙벽은 반드시 안벽부터 쳐야 합니다. 만일 바깥벽부터 치면 볕이 안 들고 바람도 막히게 된 안벽은 제대로 마르지 않아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여러 가지 까닭이 있지만, 봄집을 지어야지 가을집을 짓지 말라는 것도, 특히 흙벽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봄에 흙일을 해야 벽 안팎이 뽀얗게 말라 방이 따뜻합니다. 가을에 흙일을 하면 방이 춥고 벽에 곰팡이가 슬며 쉽게 허물어집니다.

집의 ‘천장(반자)’과 ‘지붕’은 방바닥 온돌의 열을 40%나 빼앗아간다고 합니다.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반자와 지붕이 허술하면 외풍이 센 집이 되어 겨울에는 너무 춥고 여름에는 낮의 뜨거운 햇볕에 온종일 집이 달아서 방은 한증막이 됩니다. 거꾸로 반자와 지붕이 ‘제대로’ 된 집이면, 외풍을 크게 줄여 ‘산 집’이 돼 땔감도 크게 줄이고 시원하고 따뜻한 집이 됩니다. 방바닥이 아무리 따뜻하더라도 반자와 지붕이 허술하면 말짱(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전통살림집의 ‘반자’는 종이를 여러 겹 바르거나 널판을 깔아 그 위에 고미흙(반자 위에 까는 물에 이긴 진흙)을 깔거나, 공을 들여 우물반자를 해서 그 위에 고미흙을 깝니다. 종이반자는 외풍을 줄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므로, 고미흙을 깔고 치받이하는 고미반자가 좋지만, 흙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비교적 굵은 나무로 반자틀을 짜야 하므로 비싸고 공이 많이 듭니다.

1981년쯤 제가 시골성당에서 살 때, 사제관을 수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연탄재 가루에 석회를 섞은 후, 촉촉할 정도로 물을 섞어 반자 위(더그매 바닥)에 15㎝ 정도 깔았습니다. 연탄재 쓰레기 문제도 해결하고, 당시만 해도 집집마다 연탄을 땠으니 얼마든지 공짜로 얻을 수 있으며, 불에 탄 재니만큼 완전 소독되어 깨끗한 자연재료입니다. 석회를 섞었으니 쥐나 벌레가 얼씬도 못할 것이고, 곧 말라서 굳으면 가볍고 일도 쉽고 집을 수리하더라도 덩어리가 되어 떨어질 것이므로 석회 가루를 뒤집어 쓸 염려도 없습니다.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칠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연탄재를 올릴 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반자는 합판으로 하더라도 반자틀은 좀 튼튼히 짜서 지붕 바로 밑 서까래에 단단히 매달아야 합니다. 촉촉히 젖어 무거운 연탄재와 이것을 골고루 까는 한 사람의 몸무게를 견딜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안전하게 깔고 내려오면 성공입니다. 그때부터는 곧장 마르기 때문에 하루만 지나면 가벼운 덩어리판이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방법이 최저비용·최고효율입니다. 저는 새 집의 반자는 이 방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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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이 머리면 문·창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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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과 반자 사이에 생기는 삼각형의 공간을 ‘더그매’라고 하는데, 이 더그매 공간도 단열의 몫을 잘 해냅니다. 요즘 시골에서 많이 짓는 이른바 슬라브집(콘크리트로 수평지붕을 만들어 짓는 집)은 더그매가 거의 없어 춥고 덥습니다. 더그매는 방안공기와 바깥공기 사이의 완충역할을 하기 때문에 방 안을 따뜻하고 시원하게 해줍니다.

전통살림집의 지붕을 이는 방식은 서까래 위에 ‘산자’(수수깡, 나무개비, 널판 따위)를 촘촘히 엮어 깐 후, ‘알매흙’(이긴 진흙)을 골고루 두껍게 깔고, 짚·기와 따위의 지붕을 덮습니다.

짚으로 이은 초가집이 우리나라 산천에 어울리고 단열효과도 뛰어나다고 하지만, 수명이 짧아 늦어도 2∼3년에 한 번씩은 새 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덮어야 하는데, 일손이 없어 쩔쩔매는 시골 사정을 생각하면 이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수명이 길다지만 구하기 어렵고 비가 샐 염려가 많은 너와나 굴피로 지붕을 덮는 것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는 비교적 수명이 길다는 억새나, 수명이 30년 이상이나 된다는 갈대를 지붕재료로 쓸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의 완제품 ‘발’과 ‘삿자리’가 마구 들어와 갈대를 찾는 이가 없어 마음만 먹으면 베어 올 수 있으므로 저는 지붕에 갈대를 얹기로 했습니다.

지붕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기와지붕의 아름다운 곡선(추녀끝이 사뿐히 솟은)도 쓸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처마 끝이 직선이면 집이 벌어진 듯한 느낌이 들어(착시현상) 불안감을 주기 때문에 시원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지붕의 처마 길이는 비가 들이치지 않으면서도 전망과 햇빛을 가리지 않도록 해야 하고, 집의 뼈대가 무거운 지붕 무게를 견딜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지붕과 반자가 제대로 된 집은 반 이상 ‘산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기둥·도리·널 따위가 집의 뼈대고, 흙벽은 살이요, 문·창은 얼굴이며, 지붕은 머리, 문과 창의 모양새는 그 집의 표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참으로 재수 좋은 사나이라 가까운 전우익 선생님 마을에 70여 년 된 집이 헐려야 할 처지인데, 거기서 옛 문창이나 재목을 얻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집에서 나올 헌 소나무 재목으로 문창을 짜기로 했고, 쓸 만한 띠살문을 되살리기로 했으며,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용(用)자 창이나 넉살창, 또는 판장문창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창은 겹창으로 하되 안창은 형편이 되면, ‘조각창’(얇은 널판에 그림을 그리고 구멍을 뚫은 다음 창호지를 바름)으로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벌레와 추위를 막아 주고 방의 환기를 도와 주는 ‘문풍지’를 되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문풍지가 바람을 타고 연주하는 소리는, 때로는 환호요, 때로는 잠에서 깨어나라는 질타이며, 때로는 함께 노래하는 합창이고, 때로는 편안히 자라는 자장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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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방의 세 가지 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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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구들방(온돌방)’을 좋아하는 데는 우선 세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식한 말로 ‘열의 효율성’ 때문입니다. 난로나 벽난로 생활을 하는 서양방과 비교해 봐도 그렇습니다. 난로에 의존하는 서양사람들은, 온종일 구두를 신고 일하다가 방에 들어와서도 구두를 벗지 않습니다. 침대에 기어들어갈 때에야 ‘마지못해’ 구두를 벗습니다. 발 냄새는 둘째치고, 사람의 기초이자 온갖 궂은 일을 하는 ‘발님’이 불쌍합니다. 마치 독방 징역살이를 가혹하게 시키면서 잠시 운동(!)시간만 허락하는 신세 같습니다. 발이 해방될수록 사람도 건강해집니다.

둘은 구들(온돌)의 재료가 좋아서입니다. 구들은 돌이나 흙벽돌로 ‘미로(迷路)굴’을 만들고, 그 위에 얇고 넓은 돌판을 짜맞춘 뒤 진흙을 이겨 방바닥을 만들고, 다시 그 위에 돗자리나 종이장판을 깔거나 발라, 아궁이에서 굴뚝까지 불길이 천천히 가게 합니다. 돌이나 흙벽돌, 진흙과 돗자리나 종이장판은, 모두 숨쉬는 자연재료입니다. 생명은 하늘의 기운[天氣]도 받아야 하고, 땅의 기운[地氣]도 받아야 하며, 자연과 이웃의 기운도 나누어야 합니다. 공생(共生)의 길이지요. 숨쉬는 자연재료로 살림집을 짓는다면, 벽도 숨을 쉬고 천장·지붕도, 방바닥도 숨을 쉬니, 집 전체가 숨을 쉬는 게 아니겠습니까!

셋은 유식한 말로 구들의 다목적성 때문입니다. ‘난방도 하고 밥도 짓고’입니다. 따뜻한 밥을 지어 먹고 따뜻한 방에서 자는, ‘등 따시고 배부른’ 구조가 바로 구들구조입니다. 비록 춥고 배고픈 시절이 오래 이어졌지만, 적은 땔감 적은 곡식이라도 ‘구들’ 덕택으로 그 효율성을 곱절로 만든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과 짐승의 밥도 지으면서 방을 데우는 구들(온돌)은 확실한 저비용·고효율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서민들의 천당 가운데 하나인 목욕’에 쓰일 물도 데웠습니다. 밥을 짓는 일 없이 그저 방만 데우는 경우에는, ‘군불’을 땐다고 했습니다. 군것질 군식구 따위의 말처럼 군불은 땔감이 아깝다는 검소한 마음에서 생겨난 말일 것입니다. 서민들의 아궁이는 대체로 다목적 아궁이였지만 부자들의 아궁이 가운데 대부분은 오로지 방 데우는 데만 쓰는 ‘함실아궁이’였습니다. 요즘 ‘아이 엠 에프’시대라 검소니 절약이니 야단이지만, 실상 ‘심뽀’ 고치고 뭘 해야 할 사람들은 가난한 서민들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함실아궁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방바닥에 바르는 장판도 초배지는 창호지, 그 위에 기름을 먹인 ‘종이장판’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기름장판 위에 ‘니스’ 따위의 화학도색을 하지 않고, 들기름을 섞은 ‘콩댐’(콩을 물에 불려서 빻아, 면자루에 담아 방바닥을 여러 차례 문지르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화학장판은 질기고 편리하겠지만, 땅기운을 막는 것이 큰 흠이고, 피부와 접촉할 때 어쩐지 시체처럼 차디찬 느낌이 들어 싫기 때문입니다. 따뜻하고 포근하며 숨쉬는 방바닥은 따뜻하고 포근하며 숨을 고르게 쉬는 사람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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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집 19.5평, 일·헛간 16평 등에 5317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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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울)’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전통살림집의 울타리는, 부잣집과 가난한 집에서 뚜렷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잣집의 울타리는 훨씬 튼튼하고 위엄을 갖추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진 특징은 ‘높다’는 점이고, 바깥 울타리 안에 안 울타리가 ‘많다’는 점입니다. 가리고 숨길 것이 많았거나, 차릴 체면이나 내세울 권위가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와 담을 쌓는다’는 말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담을 쌓을수록, 담을 높일수록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과 자연 사이를 갈라놓기 쉽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을 때 세상사람이 모두 감격한 것도 담은 없을수록 좋은 것이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50년이 넘은 한반도의 분단 장벽도 자꾸 낮아지고 드디어 허물어져야 이 겨레가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울타리 없이 살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집안 식구들의 안정감과 생활의 필요에 맞게 최소한의 울을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집 울타리는 ‘나지막’합니다. 집 안에서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고, 집 밖에서 안을 적당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집 안에서 산과 들과 이웃을 바라볼 수 있고, 집 밖의 이웃과 자연이 집안 식구들을 지켜볼 수 있으며, 울을 사이에 두고 음식도 나누며 기쁨과 걱정도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집 대문(마당문)은 있는 듯 없는 듯하거나 아예 없는 집도 많았습니다. 문이 없고 통로만 있어도 대문이라 불렀습니다.

이 밖에 집을 지으면서 자연과 이웃에 열린 나지막한 돌각담, 산소 따위 생기를 듬뿍 나눠주는 숲으로 두른 생울타리, 언제 밟아도 늘 저를 포근히 안아주는 흙마당, 그 한켠에 샘터와 장독대, 나무그늘 밑에 제멋대로 놓인 통나무 의자, 뜰 가까이에 사는 여러 가지 과실나무들, 달밤에 벗과 더불어 소주도 나눌 수 있고 더운 한낮에 낮잠도 즐길 수 있는 원두막 따위를 생각했습니다.

세간은 어지간하면 손수 만들고, 헌 것을 튼튼하게 고쳐서 쓸모 있게 만들었습니다. 세간을 손수 만드는 일에 마음만 있으면 쓰레기도 부활시키고, 너무도 재미있는 창조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저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됐습니다.

원두막 짓기, 음식 저장간 짓기, 나무 옮겨심기 등 아직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남아 있지만 돈 쓸 일은 별로 없습니다. 마지막 결산은 아니지만 손수 집을 짓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지금까지의 결산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입은 친구 신부 7명의 성금 4792만원, 기타 성금 600만원, 이자 199만원 등 모두 5591만여원이었습니다. 지출은 땅 구입비 927만원(밭 1543평, 논 442평), 살림집(19.5평) 공사비 2316만원, 지하수 및 마당 상하수도비 495만원, 연장구입비 186만원, 일간·헛간(16평) 공사비 519만원, 비품 및 가구 구입비 255만원, 중고 짐차 구입비 382만원 등 모두 5317만원 남짓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생각나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집 짓기든 뭐든 깊이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창조적인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둘은 제가 지은 집을 흉내내지 말고 각자가 주체적인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는 손수 집 지을 마음먹은 분들의 부교재로 쓰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 본교재는 스스로 준비해야지요. 손수 집 짓는 이들에게 신바람의 은총이 이어지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