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황진태 기자] 지난해는 가히 진보적 싱크탱크의 붐이었다. 대표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하 새사연)', 희망제작소, 세교연구소 등을 들 수 있는데, 새사연은 이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하여 소위 '새사연 모델'이라고 불리는 대안경제모델을 화두로 던진 바 있다.
이번에 발간된 두 번째 신서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는 그들이 내놓았던 대안경제모델이 유토피아적 망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가능함을 예증하고자 한 것이다.
정희용 새사연 미디어센터장은 자료 수집을 하면서 국내학계의 남미 관련 자료와 논문 축적이 얄팍했다고 토로했다. 내 기억으로도 현재 남미정세를 알 수 있는 단행본으로는 2003년 개마고원에서 펴낸 <콜롬버스에서 룰라까지>가 유일하다.
이 책도 당시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시기와 맞물린 분위기(룰라와 노무현을 비교하는 등)에 편승되어 출간된 측면이 강하다. 저자인 송기도 전북대 교수가 2006년에 콜롬비아 대사로 임명된 것 또한 달리 생각하면 남미 전문가가 국내에 드물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대선 이후 룰라 브라질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포개어서 보는 기사가 많았다. 덕분에 남미에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보수든 진보든 언론들이 남미정치를 포퓰리즘으로 바라본 탓에 남미에 대한 균형적인 이해가 이뤄지진 않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책은 출간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차베스는 포퓰리즘 독재자? 남미에 대한 색안경부터 벗자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는 이러한 국내의 왜곡된 남미상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컨대, 보수언론이 차베스를 '정치적 후진국의 독재자' '포퓰리스트'로 몰고 있다. 그러나 차베스는 지난 2002년 일어난 반차베스 쿠데타 세력과 자본파업에 동조한 보수언론에 대해서 이후 지금까지 어떠한 정치적 보복도 가하지 않고 있다.
사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차베스 정부 이전에 포퓰리즘 정부를 충분히 맛보았다. 차베스가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98년 대통령 당선이후부터 변함없는 지지를 받는 것은 단순히 포퓰리즘 때문이 아니다. 일부 기득권층에게만 유리했던 헌법을 바꾸고, 경제를 부활시키는 개혁프로그램의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개혁의 실행주체는 민중이었다는 점은 이 책은 물론이고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서도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책은 본론에서 베네수엘라 혁명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짚어보고, 민중의 직접 정치참여를 가능케 한 '볼리바리안 서클', 주민자치위원회 등의 조직을 분석한다. 사회적 경제를 지향하는 공동경영제도와 협동조합의 사례들도 소개했다.
베네수엘라 혁명은 과거 종속이론처럼 남미로 퍼져나가고 있는데, ALBA(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 구상이 그러한 시도다.
또하나 이 책에서 인상적인 것은 부록이다. 제헌의회와 국민투표를 통해서 새롭게 만든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헌법을 부록으로 실은 것. 87년 체제의 위기 논의와 개헌 논의가 활발한 요즘 한국사회 구성원에게도 대한민국 헌법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생각해보면, 나도 대학에서 헌법 강의를 듣다가 대한민국 헌법을 읽어본 게 전부다. 이 책의 부록을 보면서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그들의 헌법을 소지하면서 왜 읽고, 토론을 하는지에 대해서 공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막노동'에 가까운 노력이 배어있다는 이유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한반도에도 직접 민주주의가 있었다
책 요약이 서평의 미덕은 아니다. 그보다 직접민주주의가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반문에 대해서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 게 유익하다.
그동안 직접민주정치는 스위스와 같은 소국에서나 가능하거나 미래의 정보통신기술로써 가능한 '원터치 투표' 행사가 전부인 줄 알아서 일까. 책을 읽는 내내 번지점프대 앞에 서있을 때의 비슷한 긴장감을 느꼈다. '우리도 정말 할 수 있을까?'
사실 차베스가 처음부터 선거 민주주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정치신인일 때는 군부 출신의 한계로 군대를 우선한 혁명을 주장했다. 그는 보수적 관료제와의 갈등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선거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차베스는 정치인의 재신임을 물을 수 있는 법안을 만들었는데, 기묘하게도 반차베스 쿠데타 당시 차베스 자신이 이 법안을 적용받게 되었다. 결국 다시 대통령 권좌로 복귀하게 된 차베스는 국민의 의중을 정치에 침투시킬 방법을 찾으면서 주민자치위원회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사하게 탄핵정국에서 재신임을 받은 노무현 대통령은 출발점은 같으나 핀트가 엇나가고 있다. '참여정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한미FTA 협상, 대추리 사태 등에서 국민들의 목소리에 더더욱 귀를 닫은 것이다. 정부의 눈에 여전히 국민은 몽매한 우민이며, 계몽받을 객체일 뿐이다.
사실 주민자치위원회는 해외사례만이 아니다.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을 필두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이끌었던 조선인민공화국(지금의 북한체제가 아니다)는 전국 각 지역 민중들의 자발적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체험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우익과 미국이 이들 국가기구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발칙해 보일지 모르는 상상력은 실천으로 승화되어야 의미를 갖는다. 아직도 점프대에서 뛰어내리기를 주저하는가.
의사와 쇠고기 받고 석유 주고... 사람냄새 나는 무역
한국보다 이미 10년 앞질러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맞았던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학습효과는 반신자유주의와 대안경제를 주창한 차베스를 선택했다.
차베스는 본국의 혁명을 남미 전역으로 퍼뜨리기 위해서 ALBA 구상을 내놓았다. 이 구상은 ▲회원국가의 주권을 존중해 경제적 보완성을 중시하고, ▲국내 사업의 진흥과 민감한 영역을 보호하고 ▲사회적 공공 서비스의 국가개입을 중시하고 ▲빈곤, 문맹 퇴치 등의 사회 통합 프로그램을 중시하고 ▲원주민이나 중소기업, 환경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실제 사례를 들면 쿠바는 베네수엘라에 2만여명의 의사들을 파견해서 무료 건강 진료를 시행해주고, 아르헨티나는 베네수엘라에 쇠고기를 제공했다. 그 대가로 베네수엘라는 두 국가에 석유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마치 어린 시절 5일장에서의 물물교환처럼 말이다.
맑시즘 경제학자 마이클 레보위츠는 이를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가 압도된 사례"라며 극찬했다. 자본주의 폐해에서 다시 인간의 온기로 덮인 상품으로 교환되는 장으로 교정된다. 이는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간적인 경제'로의 귀환을 상정한다.
FTA만이 '글로벌스탠더드'라는 교리에 사로잡힌 외교통상부 관료들에게 10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맞았던 베네수엘라는 쉽게 무시되고 있다. 이같은 참여정부의 상상력은 민중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ALBA 구상이 동북아 경제에 잘 맞을 지는 모르더라도, 금융모델을 비롯하여 동북아 지역협력모델 구상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독자들도 똑같이 느낄 것이다.
베네수엘라와 한국의 다른 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유럽모델에 대한 연구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석유산업이 발달한 베네수엘라와 부존자원이 빈약한 한국을 기계적으로 비교하는 것 또한 주의할 부분이다. 베네수엘라도 석유산업 위주에서 최근 통신업 등 다변화를 추구하지만, 한국은 혁신 창출을 통한 도약 밖에는 딱히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물론 새사연 연구원들도 베네수엘라 모델을 모범답안으로 보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고, 차베스도 복지정책은 유럽 복지모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 발간은 한국적 대안경제모델을 제시하기 전에 해외사례를 검토한 첫 단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사연 모델'에서는 기술혁신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애용하는 표현들로 불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는 베네수엘라라는 사례연구에선 빠진 부분이다. 오히려 이 부분은 유럽모델에서 참고할 게 많을 것이다.
대안경제가 현실이 되려면 공론화부터
손석춘 새사연 원장이 얼마 전 한 TV토론회에 나와서는 진보진영에서도 대안모델이 있다면서 '새사연 모델'을 언급하려다가 주저한 모습을 보았다. 그의 말대로 대안모델에 대한 논의의 장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서 '한미FTA에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의식이 대중을 지배하는 것이리라.
진보는 대안이 없다는 기존의 선입견을 깨고자 한다면 앞으로 공중파 토론회에서도 대안경제모델을 주제로 한 토론을 한번쯤은 해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대안모델을 둘러싼 담론의 장을 심화, 확장시켜야 할 학계 또한 지적받아야 한다. 제대로 된 비판담론이 아직까지는 시들한 것은 자성할 부분이다. 정성진 교수의 최근작인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촉발시킨 '트로츠키 논쟁'은 언론인과 운동가 외에 관련 국내학자들의 참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자면, 사실 이 책의 저변확대는 힘들 듯싶다. 서두에서부터 '조중동'을 일반명사로 사용하면서 출판계와의 '커넥션'이 확고한 보수언론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모한(?) 언급을 굳이 사용한 것은 언론권력의 개선을 중요하게 본 서술로 보아야겠다.
"연구를 깊이있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 못지않게 핵심 맥락을 빠르게 전달하여 이후 학계의 풍부한 연구와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일차 목표"로 삼는는 김병권 새사연 연구센터장의 말처럼 이 책을 통해 사라진 논쟁이 부활되고, 현실의 태엽과 맞물려 한국이 나아가야 할 비전으로 작동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실천적인 몽상가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추천한다.
/황진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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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한 가지 더 구차한 지적을 하자면 본서 224쪽에는 몰수를 'expropriation'으로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재산법상으로 보상 없는 사적 자본의 압류를 의미하는 몰수는 'confiscation'이 적합하다.
한미FTA의 핵심사안인 투자자-국가소송제에 있어서 'expropriation'이 핵심개념이라 굳이 보론 하자면 'expropriation'은 수용(收用) 즉, 보상 있는 사적 자본의 압류로 보는 것이 선명한 번역이다.(홍기빈,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 2006, 64쪽 참조) 혹시라도 통상법을 공부하는 독자가 본서를 읽다가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사소하지만 차후 수정을 했으면 바람이다. ---------
이 기사는 <이스트플랫폼> <대자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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