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2006 마이클 앨버트 초청강연회
Michael Albert
기업 세계화 반대의 방향
The Directions for Anti Corporate Globalization
■ 일시 : 2006년 4월 3일(월) 오후 4시-6시
■ 장소 : 경상대학교 사회과학관 멀티미디어실(151-310)
■ 주최 :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및 경제학과
■ 후원 : 참세상(민중언론 참세상)
저로선, 그리고 여기 계신 한국의 많은 활동가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반-기업 세계화 운동―즉, 세계적인 관계들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 관계들에서 탐욕과 불의에 반하는 운동이자 그들을 대신할 국제주의를 위한 운동은 그 길의 잠재적인 갈림길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기업 세계화의 병폐들에 관해 우리가 제시하는 메시지가 보다 광범한 선거구들에서 점차 폭넓게 수용됨에 따라, 그것을 거부하려는 우리 운동의 크기, 전투성, 횟수는 줄어들고 덜 빈번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전체적인 해외 정책과 특히 이라크 전쟁에 관한 우리의 메시지들이 보다 널리 수용되고 점차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에 공증되어 감에 따라, 전쟁 정책을 방해하기 위한 우리의 자극적이고 전투적인 운동들은 보다 작아지고 덜 빈번해졌습니다. 반전의 나라인 미국에서, 반전운동은 길지 않은 지난 날 동원했던 것의 10분의 1을 동원하기도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목표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에] 동의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정말 잘 해낼 수 있었지만, 그 다음에 할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동의하고 그 다음 집에 가는 겁니다. 하지만 만약 목표가 사람들로 하여금 꾸준히 더욱 조직되고 적극적이게 하는 것, 그래서 보다 거대하고 강력한 운동들을 형성케 하는 것, 실제 변화를 강제하는 것이라면, 저로선 우리는 결코 잘해나가고 있지 않고, 사실, 우리는 실패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선택이 우리 운동들에 있어서 가능한 두 가지 방향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한 방향은 우리의 행동주의를 확장하고 풍부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행동주의의 점진적인 해소로 귀결될 것입니다. 나는 다른 운동들―미디어에 대한, 전쟁과 평화에 대한, 젠더와 인종에 대한, 빈곤에 대한 운동, 등등―에서도 마찬가지의 동일한 선택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취해야만 하는 긍정적인 진전들은 가장 기본적인 민족[국민]경제와 사회의 구조들을 제시하는 것과 적극적인 목표들을 제안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봅니다.
나는 [운동의] 해소를 향한 부정적인 접근은, 민족국가 사회의 구조들을 정의하는 것은 완전히 방기하고 적극적인 목표들을 제안하지 못하면서, IMF 반대, 세계은행 반대, 그리고 모든 무역 협정들의 반대―또는,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주류 미디어 반대, 전쟁 반대, 차별 반대, 빈곤 반대―를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좋은 접근법은 반-자본주의적으로 되는 것 그리고 특히 새롭고 고무적인 민족 국가적 목표들을 분명히 갖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쁜 접근법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민족 국가의 구조들이 아닌, 완전히 국제적 음모 때문인 것처럼 행동하고 어떠한 건설적인 전망도 제안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보기 위해서, 그리고 요컨대, 새로운 방향―여러 지점에서 이미 잘 진행 중인―이 어떤 것일지 보려면, 나는 세계 경제에 관해 조심스럽게 탐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적으로 현재 우리가 대체로 경험하고 있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우리의 행동주의를 통해 단기적/중기적으로 우리가 얻게 될 변화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시간이 지남에 따라―분명히 기업 세계화 반대 운동들 이나 심지어 우리의 전쟁 반대 운동들을 보면, 우리의 행동주의는 성장하기 보다는, 쇠퇴하는 것처럼 보일까?
게다가, 국내 경제를 수반하는 국제 관계들에 대한 우리의 열망들은 무엇인가? 우리의 열망들과 조화하는 새로운 경제 전망은 무엇인가? 전 세계에서, 새로운 경제를 둘러싼 상쟁이 민족들 간의 연계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에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의 조직적 전망들에 도움을 줄 것인가?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거부하기
최근의 국제 무역은 이미 대부분의 자산을 소유하고 오늘날의 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압도적으로 이익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 또는 한국의 다국적 기업과 과테말라, 케냐, 또는 타이의 지역 기업들 사이에 무역이 발생하면, 그 이익은 적은 자산을 가진 약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공평하게 나눠지지도 않습니다. 그 이익은 그것으로 자신의 상대적 지배력을 늘리는 강자에게 불균형하게 돌아갑니다.
기회주의적 수사들은 차치하고,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주역들은 빈곤하고 이미 약한 자들을 힘을 뺏으려 하고 부유하고 이미 강한 자들에게 힘을 주려고 합니다.
그 결과: 세계 100대 거대 경제들에서, 그 절반 이상이 국가가 아닙니다. 그들은 기업들이며 전 세계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년 빈곤하게 살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죽을 정도로 굶고 있습니다.
자원, 소득, 추종자를 얻기 위한 국제적 시장 경쟁은 너무나 자주 제로-섬[영합] 게임이었습니다. 나아가, 각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들의 패배를 먹이로 삼기에 기업 세계화는 적개심을 일으키고 개인, 산업, 국가 간의 연대를 파괴하는 나-먼저 태도를 가져옵니다.
공적 사회적 재원은 경시되고, 사적 재원은 기세가 올라갑니다. 사업들과 민족국가들은 손실들을 다른 나라들 그리고 심지어 자기 국가의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부과하면서 그 자신의 이윤을 확대합니다. 연대는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맞선 후방 전투를 치르는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 세계적 교환에서, 구조들이 맥도날드식이든 디즈니식이든 또는 그들이 대신 훌륭한 토착적 기원들로부터 끌어왔을지라도, 문화적 공동체들과 가치들은 그들의 확성기가 허락하는 만큼만 널리 보급되고, 더 나쁘게는, 그들과 충돌하는 더 큰 확성기를 가진 다른 공동체들에 의해 압도됩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양으로 질을 잠식하고 문화적 다양함이 아닌 동질화를 창조하였습니다. 스타벅스가 확산되는 것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의 이미지들과 메디슨 에비뉴의 스타일들도 그렇습니다. 토착적이고 비상업적인 것은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다양성은 사라집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주도하는 자들의 회관에는 오직 정치 및 기업의 엘리트들만 환영받습니다. 노동자, 소비자, 농민, 빈곤층의 다수 공중(公衆)과, [다른 사람에] 상응하는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말하는 생각은 적극적으로 반대됩니다. 사실,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핵심은 정확히 전체 인구 그리고 기업과 정치적 지배의 강력한 요소들을 모은 국가 리더십의 영향력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조합주의적 위계를 부과합니다. 권위주의 국가와 심지어 파시스트 국가의 구조도 확산됩니다. 주변부로부터의 목소리의 대다수는 사라집니다.
기업 수뇌부의 재정담당자들이 주주들의 영향력을 넓힘에 따라, 다른 종(種)들, 그 부산물들, 환경, 심지어 인류에 대한 배려 없이 지구 밑은 파헤쳐지고, 잠기며, 다시 포장된다. 오직 이윤과 권력만이 계산됩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국제적 지배와 종속의 규준들과 기대치들을 확립했습니다. 확립하고, 강화하고, 방어하고, 그러한 규준들의 위반들을 처벌하기 위해, 강자들은 약자들에 대해 폭력을 사용하였습니다. 국내적으로 이것은 경찰 국가장치들과 억압의 증가를 의미합니다. 국제적으로 그것은 지방적, 지역적, 국제적 적개심들과 전쟁을 의미합니다.
기업 세계화에 반하는 운동
반세계화 활동가들은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평등, 다양성, 연대, 자주-관리, 그리고 생태적 균형처럼 활동가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을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외세의 침략, 끔찍한 노동 현실, 빈곤, 공해, 그리고 자원 착취에 맞서 싸운 지역 시민들의 운동들로부터, IMF, 세계은행에 맞선 대규모 국제적 성토들, 심지어 이라크에서 석유자원을 노린 전쟁에 맞선 주민들의 엄청난 반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높인 후, 시위를 한 후, 모든 사람들이 부정한 관계들과 정책들에 대한 우리의 주장들에 개방적으로 동의를 한 후, 우리는 에너지를 얻은 것이 아니라, 잃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더욱더 밖으로 나가 조직하고 시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왜 우리는 이런 수축적 결과들을 얻고 있는 것일까요?
자,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 의해 계속 가능한 하나의 해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들은 그렇게 될 수 있는지를 의심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들은 대안을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들은 도달할 정의의 전망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 활동가들과 역사는 함께 자본주의는 끔찍하다고, 빈곤은 유전자나 신에 의해 부과된 것이 아니라 탐욕에 의한 것이라고 사람들을 확신시켰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이것이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 사물의 방식이라고 사람들을 확신시켰습니다. 또는, 보다 정확히, 주류 미디어, 학교, 학자, 공무원, 그리고 주위 모든 것들은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시니컬한 견해를 갖게 했고,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무엇이 잘못인지 계속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삶들을 파괴한 권력의 중심들이 얼마나 나쁜지 또한 얼마나 압도적으로 강력한지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러곤 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우리 손을 맞잡고 우리와 함께 하자고 말합니다. 그러곤 상대적으로 안전한 얼마간의 영토를 발견하고, 당신 자신과 당신의 가족을 보호하라고, 그렇게 당신의 에너지들을 최악의 것을 피하는 것에 쓰라고, 그것이 당신이 희망할 수 있는 전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운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문제들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다른 측면은 강력합니다. 미디어는 널리 스며들어 있습니다. 논쟁은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솔직히, 전 그런 이야기들을 듣는데 넌더리가 납니다.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고 앞으로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망, 우리의 전략, 그리고 그/녀의 건강한 삶과 그/녀의 가족, 친구, 공동체의 건강한 삶과 고려하는 한 명의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왜 민감한 것인지, 적극적으로 되고, 투쟁하고, 싸우기 위해, 진정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들과 갖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자리의 초점인 기업 세계화를 포함한 우리 주위의 부정에 반대해감에 따라,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사실상 문명화되고 호혜적인 교환과 발전의 모든 규준들을 계속 위반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세계적 정의
간단히, 반세계화 활동가들은 주로 IMF, 세계은행, 그리고 WTO 같은 기업 세계화의 제도들을 대체할 무엇을 제안할까요?
IMF와 세계은행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설립되었습니다. IMF는 세계의 사람들과 국가들에 악영향을 끼치는 금융 혼란에 맞서 싸울 수단들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초기에 통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그리고 경제 혼란으로 인한 금융적 음모와 혼동들을 그 나라들이 피할 수 있도록 협상과 압력을 사용했습니다.
세계은행은 저개발 국가들에 장기 투자 및 그들의 경제를 확장하고 강화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지역의 역량 부족을 교정하기 위해 낮은 이자로 많은 투자금을 빌려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현존하는 시장관계들에서, 이러한 제한적인 IMF와 세계은행의 목표들은 초기엔 진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리고 1980년대에 극적으로 가속화되었는데, 이 제도들의 의제가 변하였습니다.
안정적인 환율이라는 편의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금융 불안정에 대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그 나라들을 돕는 것 대신에, IMF는 자본 흐름 및 족쇄 풀린 이윤추구에 대한 어떤 모든 장애들을 쳐부수기 시작했는데, 사실상 그것은 자신의 권한에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지역 빈곤 경제들에 투자를 용이하게 하는 대신, 세계은행은, 기업 접근을 위한 개방에 대한 당근과 채찍으로서 대부를 제공하고 보류하는, IMF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대부를 수령하는 국가의 이익 증대에 지켜보지 않고, 오히려 주요 다국적기업들의 이익 증대에 보다 주의하여 프로젝트들에 자금을 대주었습니다.
게다가, 전쟁 후 초기에 처음 추진되었던 WTO는 수십 년이 지난 1990년대에 실제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의 의제는 이미 부유하고 강력한 편에 보다 거대한 혜택을 주려 무역을 규제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약한 또는 매수된 정부들을 쉽게 억압할 수 있게 되어감에 따라 저임금과 고공해를 제3세계 국가들에 부과하는 것을 넘어, IMF와 세계은행의 정책들이 이미 1990년대에 이르러 달성되어 갔으므로, 또한 부유한 자들은 제3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 소비자들, 또는 환경을 방어하려는 모든 정부들과 행위자들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부상하였습니다.
왜, 진정 강력한지 의문인데, 무역의 노동에 대한 관련성, 환경에 대한 관련성, 사회적 또는 문화적 관련성, 또는 그것의 발전에 대한 관련성들에 따라 무역을 제한하려는 운동들을 제거하지 않고, 긴급한, 단기적 이윤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무역의 규제라는 오직 법적 기준으로 남겨둔 것일까요?
만약 민족국가의 또는 지역의 법률이 무역을 방해―환경적인 것, 건강, 또는 노동법을 말해서―한다면, 왜 분쟁들을 매듭짓고, 또 모든 사안들에 있어 완전히 예상가능한 친-기업적인 평결을 끌어올 올 수 있는, 세계 무역의 새로운 조직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요? 그래서 WTO가 기업 이윤의 편에서 정부와 사람들에 승리하려 IMF/세계은행 혼합에 더해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요한 세계적 제도들에 관한 완벽한 이야기는 지금 이 대화가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길고, 하지만 단지 이러한 개관을 갖고서, 개선점들을 인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첫째, 왜, IMF, 세계은행, 그리고 WTO를 대신하여, 국제자산국, 세계투자원조국, 그리고 세계무역국을 설립하려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세 가지 새로운 (단지 개혁된 것이 아닌) 제도들은 국제 금융 거래, 투자, 발전, 무역, 문화적 교환에 있어서 공평, 연대, 다양성, 자주-관리, 그리고 생태적 균형에 이르는데 기여할 것입니다.
무역과 투자의 이익을 이미 보다 부유하고 보다 강한 편이 아닌, 보다 약하고 가난한 편에 유리하도록 불균등하게 만드는 것을 보증하려 할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가치들에 대해 상업적 고려들을 우선시 하지 않고, 민족국가적 목표, 문화적 동일성, 공평한 발전을 우선시 할 것입니다. 그들은 국내의 법률, 규정, 제한들에 대해 노동자, 소비자, 환경, 건강, 안전, 인권, 동물보호, 또는 여타 비영리 중심의 이해관계들을 감축하거나 제거할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을 증대하는데 기여할 것이고, 그러한 목표들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사람들에 보상할 것입니다.
그들은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정부들에 가능한 선택들을 감축시킴으로서 민주주의를 잠식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다국적기업들과 거대 경제들의 욕망들을 생존, 성장, 그리고 소규모 단위들의 다양화에 종속시키는데 기여할 것입니다. 그들은 지역 경제발전과 정책들을 희생하면서 세계 무역을 추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역을 추진합니다. 그들은 제3세계 국가들로 하여금 부유한 다국적기업들에 자신을 시장을 개방할 것 그리고 걸음마 수준의 국내 산업을 보호하려는 노력들을 포기할 것을 강제하지 않고, 그 반대를 용이하게 할 것입니다.
인류의 건강 또는 환경에 대한 잠재적 위험에 대응하여 행동하는 것으로부터 국가들을 막아서지 않고, 건강, 환경, 그리고 여타 위험들을 식별하는 것을 돕고, 그것의 나쁜 영향들을 막는 나라들을 원조할 것입니다.
국제적인 건강, 환경, 그리고 여타 기준들을 이른바 “하향평준화” 과정을 통해 낮은 수준으로 떨어뜨리기보다는, 새로운 “상향평준화”를 기준으로 수준을 올리는데 기여할 것입니다. 새로운 제도들은 인권, 환경, 노동자 권리, 그리고 여타 비상업적 목표들을 위해 달러를 구매하는 정부의 역량을 제한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조언하고 편의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들은 각 나라들이 어떻게 생산되었는가―짐승 같은 아동노동으로, 독소에 노출된 노동자들에 의해, [동물의] 종(種) 보호에 대한 어떤 고려도 없이 그것들이 만들어졌든지 개의치 않고서―에 따라 차별적으로 상품들을 대하는 것을 불허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그러한 차별화를 용이하게 할 것입니다.
은행가들과 관료들이 다양한 삶의 상황들에 영향을 주는 대통령들의 정책들을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참여하는 척도 않고 수행하는 대신, 이 제도들은 지역적, 대중적, 민주적 책임성을 갖는 개방이고, 민주적이며, 투명하고, 참여적이며, 상향식이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제도들은 막무가내의 세계적 기업들, 자본, 시장들을 규제하고 지역 공동체들의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삶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을 억제하기 위해 국제적 협조를 추진하고 조직할 것입니다.
그들은 금융적 휘발과 용해라는 위협을 감소하는 무역을 추진하고, 지역에서 세계에 이르는 모든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방어하고 풍부하게 하며, 세계적 범위의 환경의 유지가능성을 존중하고 육성할 것이며, 가장 억압받고 착취당한 집단들의 경제적 향상에 편의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들은, 수출-주도 성장을 위한 국내적 긴축이 아닌, 국내 경제 성장과 발전을 독려합니다.
주요 산업 국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경제 정책, 통화 환율, 그리고 사적 이윤이 아닌 공적 이해관계에서 단기 자본 흐름들을 조정할 것을 독려합니다. 일국적 국제적인 규제 기관들을 통해, 금융 자원들을 투기로부터 유용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이동하는 것을 독려함으로써, 그들은 금융제도들의 규제에 대한 기준들을 확립하고 감시할 것입니다. 그들은 불안정한 단기 국경 간 금융 흐름을 감축하고 빈곤한 공동체들과 국가들 환경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에 장기의 투자를 위한 기금들의 모임들을 제공하기 위해 외환거래에 대한 세금을 확립할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과 환경의 필요를 맞추는 공공의 국제투자기금들을 만들고 지속가능한 장기 투자로 기금들을 돌려서 적절한 세계적 요구를 보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국제적 제도들을 현재 민족국가의 중앙은행들에 의해 부적절하게 수행되고 있는 통화 조절의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개발할 것입니다. 예컨대, 모든 금융 기업들의 국제적으로 통합된 세계적 대차대조표에 대한 최소한의 예비적 요구들을 국제적으로 조화시킨 시스템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제도들은 부유한 나라들로 하여금 가난해진 나라들의 채무를 소거하게 하고 상당한 빚을 진 나라들의 채무를 조정하는 영구적인 지급불능 메커니즘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적 기업들에 대한 공적 통제와 시민 주권을 확립하는 것 그리고 지역, 국가, 국내법으로부터 기업의 도피를 억제하는 것을 돕는 규제 제도들―예컨대, 노동, 환경, 투자, 사회적 행태들의 규제를 포함하는 초민족적 기업들에 대한 행동 강령의 구성 같은 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상기한 모든 것들을 넘어, 더불어 IMF, 세계은행, WTO를 없애면서 위에서 개관한 세 가지 극적으로 새롭고 상이한 구조들로 대체해가는 것에 덧붙여, 반세계화 활동가들은 또한 국제적 관계들은 중심화된 제도들이 아니라 상향식 제도들로부터 도출된다는 인식을 옹호합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새로운 구조들은 자신의 확실성과 권력을 시민, 이웃, 국가, 민족, 국가의 집단의 수준에서 규정된 배치, 구조, 그리고 연계의 대형으로부터 얻습니다. 그리고 이 풀뿌리 구조들, 동맹들, 그리고 논쟁을 규정하고 의제들을 설정하는 대다수는, 상기 묘사한 세 가지처럼, 또한 투명하고, 참여적이며,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평, 연대, 다양성, 자주-관리, 그리고 생태적 지속 가능성과 균형을 우선시하는 위임에 의해 유도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전체적인 생각은 간단합니다. 세계화 문제는 그 자체 국제적 관계는 아닙니다. 반-기업 세계화 활동가들은, 사실, 국제주의자들입니다. 세계화 문제는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국제관계를 바꿔서 부유하고 강한 자들에게 보다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활동가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자들을 약화시키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조건들을 향상시키는 관계들로 바꾸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반-기업 세계화 행동주의에 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첫 번째는, 만약 그것이 보다 성공적이게 된다면, 그것의 태도로서 반(反 anti-)- 에서 친(親 pro-)-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방금 묘사한 것과 같은 제도들의 배열에 미리-(pri-)가 되어야 합니다.
더 큰 전망의 문제
하지만, 제 생각엔, 국제적 전망으로 이렇게 넘어가는 것이 충분치 않을 겁니다. 우리가 국제적으로 원하는 것―자본주의적 세계화를 대신하는 세계적 정의―은 새로운 제도들과 관계들의 전망이자 선호된 미래로 귀결되는 현재에서 이득을 얻는 방법론이라고 가정합시다.
만약 그것이 우리가 국제적으로 원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국내적으로, 우리 자신의 나라들 내부에서 원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갖는 함의는 무엇일까요?
보다 긍정적인 입장으로 가는 길에서, 이것은 새로운 쟁점, 새로운 장애물이 될 것이라는 것은, 내 생각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새로운 국제적 관계들에 대한 위의 전망들과 같은 무엇을 채택할지라도, 여전히 반-기업 세계화 활동가들에게 전망의 문제가 존재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는 것의 효용성을 의심할 것입니다.
국제적 규준들과 구조들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일단 존재하면 그것들은 국내의 배치들과 선택들에 심각한 제약들을 부과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계적 관계들은 맨 위층에 앉아있고 국내 경제들과 제도들의 명령들에 의해 추진되고 강화된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물론, IMF, 세계은행, WTO는 시장들 및 기업들과 같은 자본주의적 제도들을 전 세계 국가들에 부과합니다. 하지만 전 세계 나라들에 시장들과 기업들의 존재는 자본주의적 세계화로 몰아갑니다.
따라서 반-기업 세계화 활동가들이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대신해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그리고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국제주의를 향한 전망을 제공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우리가 현재 견디고 있는 매우 나쁜 국내 경제들의 상층부에, 매우 훌륭한 국제자산국, 세계투자원조국, 그리고 세계무역국의 설치를, 여기에 더하여 풀뿌리 민주주의적이고 투명한 제도들의 구성을 제안하고 있음을 모두가 알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회의적일 겁니다.
문제는 우리의 나라들 내부에 존속하는 국내 구조들이 우리가 그것들의 상층에 건설하고자 하는 새로운 구조들을 계속적으로 방해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존속하는 기업들과 다국적기업들은 우리가 선호하는 새로운 제도들을 긍정적으로 증대하고 강화하지 않을 것이고, 가장 최선인 일시적으로 그것들을 설치하려는 압력들에 굴복할 것이며, 보다 탐욕스러운 방식들로 복귀하려는 압력을 항구적으로 발산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인 활동가들에게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그들은 단지 당신이 국제적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더불어 묻습니다, 당신은 자본주의를 대신해 무엇을 바라는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를 갖고 있다면,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향한 그리고 반-자본주의적 혁신들에 반한 가공할 압력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새로운 IAA, GIAA, 그리고 GTA는 멋져 보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설치했을지라도, 그것들이 IMF와 세계은행의 본래 논리에 맞선 관계들인 것처럼, 전 세계 국가들의 국내 경제들은 그것들을 취소하려 할 것입니다.
결국,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규모를 확대한 국내 시장들, 기업들, 그리고 계급 구조입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진정 대체하려면 그리고 그것의 효과들을 누그러뜨리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자본주의 역시 대체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면, 그것을 위한 전망이 없다면, 그것을 위한 방법론이 없다면, 우리의 다른 괜찮은 정식들은 끔찍하게 의심스러워집니다. 이상에서 묘사한 새로운 국제적 제도들을 통해 기업 세계화를 감축하고 개량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다시 돌아올 때 부서지게 될 바위들을 산을 굴려 올리는 것과 같은데, 이는 물론 우리의 운동이 자본주의적 구도들의 중요한 기원을 전화하려는 거대 프로젝트의 부분이 아닐 때의 경우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진정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시장들과 기업들에 대한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면, 많은 이들이 느끼는 것이지만, 여러분이 가진 것은 잘해봤자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는 널리 퍼진 의견이고 “대안은 없다”라는 반동적 슬로건에 활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주요 현실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국제적 행위자들을 고려한 그리고 세계적 경제를 고려한 대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또한 시장들, 기업들, 국내 경제들을 고려한 대안들도 필요합니다.
참여 경제는 자본주의적 탐욕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경제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 시장 분배, 노동 분할을 통해 굴러갑니다.
계급 분할은 소유에 따라 그리고 강한 노동 대 순종적 노동으로의 차별적 접근에 따라 나타난다. 의사결정의 영향력에서 그리고 환경의 질에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구매자들과 판매자들은 서로 앞서고 광범한 공중들은 이기적 경쟁이 씨뿌린 것을 거두고 있습니다. 투자와 개인성의 반-사회적 궤적들의 발전의 결과입니다. 의사결정은 생태 붕괴를 무시하거나 착취합니다. 감축된 생태적 다양성의 결과입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단지 기업 세계화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대체하는 것을 향한 우리의 국제적 운동들에 공유된 경제적 목표를 제공하기 위해, 우리가 이상에서 세계적인 평가들에 사용한 것 같은 동일한 가치들―단지 국제적인 경제 구조들뿐만 아니라 국내 경제 구조들의 새로운 전망을 향한 공평, 연대, 다양성, 자주관리, 그리고 생태 균형―을 옹호한다고 가정합시다.
어떤 제도들이 이러한 가치들을 국내 경제들에서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경제적 기능들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사유화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들 대신하는 공적/사회적 관계들을 지지하는 것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새로운 체계에서, 모든 시민들은 자신의 일터를 가집니다. 이 소유권은 어떤 특별한 권리나 소득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가 생산되는 것을 통해 엄청난 양의 수단들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소유하고, 또는 대칭적으로, 만약 여러분이 선호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소유권은 소득, 부, 또는 권력의 분배와 관련된 쟁점이 됩니다. 이렇게 엄청난 부를 낳는 개인적 이윤 추구나, 광범한 생산적 자산들의 사용에 대한 개인적 처분권 같은 사적 소유의 병폐는 사라집니다.
다음으로,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은 민주적 평의회로 조직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의사결정을 위한 정보 확산 및 각자 선호하는 것이 생기고 그것을 결정들을 기록하는 수단들이 매 결정에 관해 각 행위자에게 전해져야만 하며, 가능한 정도에서, 그것에 의해 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은 행동의 규준들을 갖고 있습니다. 평의회는 의사결정 권력의 중심이 되고 작업 집단들, 팀들, 개인들과 같은 하위단위들, 작업장들과 전체 산업들과 같은 상위단위들과 같은 많은 수준들에서 존재할 것입니다. 평의회의 사람들은 경제의 의사결정자가 될 것입니다. 투표들은 과반수, 3/4. 2/3, 합의, 기타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상이한 수준에서, 소수 또는 다수의 참여자들과 함께, 그 의문시된 결정들의 특정한 함의들에 의존하면서, 취해질 수 있습니다. 때론 한 팀이나 개인이 거의 자기 자신의 결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때론 전체 작업장이나 심지어 한 산업이 결정의 단위가 될 수 있습니다. 각기 상이한 투표와 기록 수단들이 개별 결정들에 필요에 따라 사용될 것입니다. 선험적인 유일한 올바른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효과적이고 분명하게 수단을 제공하려는 올바른 규준들은 존재합니다: 의사결정의 투입은 결정들에 영향을 받은 것에 비례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어떤 결합체들에서 어떤 업무를 누가 하는가를 바꿔냄을 통해 노동의 조직을 바꿉니다. 각 행위자는 물론 일을 합니다. 각 직업은 다양한 업무들로 구성됩니다.현재 기업의 분업구조에서 미래에 바라는 분업구조로의 변화들은 각 행위자가 수행하는 다양한 업무들이 그의 권한과 삶의 질에 균형이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산물을 만드는데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노동자입니다. 우리는 권한부여적인, 성취적인, 관여적인 직무들과 환경들을 압도적으로 독점하는 사람들이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계적인, 순종적인, 그리고 위험한 것들을 압도적으로 떠맡은 또 다른 사람들을 갖지 않습니다.
공평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민주적 참여와 자주 관리의 조건들을 창출하기 위해, 우리가 각자 작업장과 산업의 (그리고 소비자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때, 우리는 자신감, 기술, 지식을 갖는 우리의 직무로 비교적 준비되었습니다. 오늘날 전형적인 상황은 몇몇 생산하는 사람들은 굉장한 자신감, 사회적 기술들, 의사결정 기술들, 그리고 관련 지식을 가지면서 자신의 하루 노동에 의해 고취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하루 노동과 관련하여 오직 피로하고, 탈숙련되고, 관련된 의사결정 지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균형적 직무 복합체들은 이러한 환경들의 분할을 극복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본의 사적 소유권을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된 계급 분할의 기초들을 제거하는 업무를 완수합니다. 균형적 직무 복합체는 소유자/자본가의 역할 및 그것의 부와 권력의 불균형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의 위에 존재하는 지적/의사결정적 조정자의 역할 또한 제거할 것입니다. 그들은 개념적이고 권한부여적인 그리고 기계적이고 권한박탈적인 책임들을 보다 평등하게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와 무계급성에 조화하는 것으로 분배할 것입니다.
다음은 보상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노동 생산의 몫을 부여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전망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 우리가 얼마나 오래 일했는가 그리고 우리가 일하는 동안 우리가 치룬 희생은 무엇인가와 조화하는 양을 우리의 노동에 대해 받을 것을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다 좋은 도구들이나 기술들을 갖기 때문에, 또는 남다른 재능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보다 생산적이라는 점에서 더 많이 받진 않고, 보다 많은 권력을 갖거나 보다 많은 재산을 갖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보다 많은 우리의 노력을 들이는 것 또는 다른 경우엔 보다 많은 희생을 견디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점에서 보다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질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적절하고 또한 적당한 인센티브를 오직 우리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제공할 수 있습니다. 직무 복합체들을 정의하는 것에 관한 그리고 어떤 비율과 밀도에서 사람들이 노동하는지에 관한 결정들은 누가 조정합니까? 당연히 채용된 균형적 직무 복합체들과 정당한 보상에 일치하는 수단들로 모인 정보들을 사용하여 노동자들이 자신의 평의회에서 그리고 적절한 의사결정 발언권을 갖고 조정합니다. 한 가지 매우 커다란 단계가 남아있는데요, 경제적 전망의 광범한 개관을 제공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의 행위들이 연결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작업장에서 만들어지는, 그리고 개별 소비자들뿐만 아니라 집합적인 소비자 평의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정들이 모두 일치될 수 있을까요? 이웃들과 다른 집단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그리고 개인들에 의해 사적으로 소비된 전체를 작업장에서 생산된 전체와 일치시키는 요인들은 무엇일까요?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얼마만큼 생산하는 산업에 필요할지를 무엇이 결정할까요? 새로운 생산 수단과 도구들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어떤 것은 연기되거나 거부되는 것은 무엇이 정하는 걸까요? 이것들은 모두 배분과 관련된 것입니다.
배분을 다루는 존재하는 옵션들은 중앙 계획(구소련에서 사용된)과 시장(소수의 또는 거대한 변이들을 갖는 모든 자본주의적 경제들에서 사용된)입니다.
중앙 계획에서 관료제는 정보를 모으고, 지시를 조직하고, 이러한 지시들을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에게 보내며, 피드백을 받고, 그 지시들을 약간 개량하고, 다시 그것들을 보내고, 순종적으로 다시 받는 것입니다.
시장에선 다른 행위자의 좋은 삶에 대한 고려로부터 고립된 행위자는 경쟁적으로 자기 자신의 의제를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를 통해 추구하고 상품들과 자원들을 경쟁 입찰에 의해 결정된 가격으로 구매하고 판매합니다. 개별 사람들은 그 교환에서 다른 편들보다 많은 이득을 얻으려 합니다.
문제는 나머지 경제들에 압력을 부과하는 행위자들과 단위들로 연결된 이 두 양식들이 우리가 선호하는 가치들과 구조들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장들은, 심지어 소유의 사적인 자본화 없이도, 공공의 이익에 대해 사적 이익의 선호 가치판단을 왜곡하고 반사회적 방향으로 개인성들을 돌려서 연대를 감축하고 파괴합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산출물과 권력을 보상으로 받고 노력과 희생은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경제적 행위자들을 계급으로 분할하여 기계적이고 순종적인 노동과 권한부여적인 상황들을 즐기고 경제적 성과들을 결정하고, 또한 대개의 소득의 증대를 꾀하는 계급으로 나눕니다. 그들은 판매자들과 구매자들을 경쟁적으로 생태에 대한 노력들을 포함한 자신의 선택들에 대한 광범한 함의들을 무시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도록 고립시킵니다.
반대로, 중앙 계획은 권위적입니다. 그것은 자주 관리를 거부하고 시장에서와 같은 동일한 계급분할과 위계제를 생산하는데, 중앙계획의 경우 제일 먼저 계획입안자들과 그들의 계획을 수행하는 사람들로의 구분이 이루어지고, 권한부여적 그리고 권한박탈적 노동자들을 보다 일반적으로 통합하는 것을 확대합니다.
이 두 배치 체계들은 우리가 기꺼이 잡고 있는 가치들을 추구하기 보다는 왜곡합니다. 그렇다면, 시장과 중앙계획에 대한 대안들은 무엇일까요?
중앙에서 계획된 선택들의 하향식 부과 대신에 그리고 원자화된 구매자들과 판매자들에 의한 경쟁적 시장 교환 대신에, 우리 국내 경제들로 우리의 국제주의적 논리를 확장하는 것과 조화시킨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협동적이고, 정보가 주어진 선택들을, 조직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얽힌 행위자들 각자가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선택들에 비례하여 발언권을 갖고 그들 각자가 필요로 하는 정확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각자 적절한 훈련을 받는 것과 자신의 선호하는 것들을 개발하고 교통하려는 자신감을 포함한 가치들을 갖는 것을 통해, 채택할 것입니다. 그것은 참여적 자주관리의 가운데 위치한 평의회와,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상과, 균형적 직무 체계와, 집합적/생태적 효과들에 대한 적절한 가치들과, 그리고 무계급성에 모순되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들을 향해 세계적 활동가들이 자신의 관심을 국내 경제로 돌리는 것은 참여적 계획, 즉 노동자와 소비자 평의회들은 노동 활동들을 제안하고 소비자들은 지역과 국가적 함의들에 대한 적절한 지식과 그들의 선택들이 부과하고 축적할 완전한 사회적 이득과 비용들이라는 점에서 선호하는 체계로 나타났다고 상상해 봅시다.
자, 이제 IMF, 세계은행, 그리고 WTO, 그리고 그에 동의하는 것들을 대체하기 위해, 이미 언급된 세 가지 새로운 세계적 제도들에 동의하는 국제주의를 향한 운동을 상상해 봅시다.
· 공평한 참여를 위한 민주적인 작업장과 소비자 평의회
· 결정들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 비례해 발언권을 구하는 다양한 의사결정 구조들
· 권한 부여적이고 권한 박탈적인 환경들의 분배를 만드는 균형적 직무 복합체들
· 뛰어난 도덕과 효과적인 인센티브 논리에 맞는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상
· 인간의 건강한 삶과 발전에 봉사하는 경제에 조화되는 참여적 계획
이 모두는 참여 경제, 즉 자본주의 그리고 우리가 이른바 계획 또는 시장 사회주의라고 본 것들에 대한 체계적 대안의 핵심적인 제도적 뼈대를 구성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내 요점은 우리 운동의 성장과 힘을 제한하고 있는 믿음인 “대안은 없다”라는 시니컬하고 반동적인 슬로건에 대한 장기적으로 절대적인 해답은 대안들을 실제로 법제화하는 것이고, 단기적인 해답은 선호할만한 제도들과 그 동학들의 일관되고, 지속적이며, 실행가능한 모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해하고 개량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국제적이고 국내적인 경제 전망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운동의 몰락을 역전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일구고, 영감을 제공하며, 가능하고 가치 있는 것을 드러내고, 우리의 전략들을 만들고 민주화하는 전망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순환들에 집어넣거나 또는 심지어 우리가 지금 견디고 있는 것보다 더 나쁜 무언가로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욕망하는 것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늪에 빠지기 보다는 계속 성장하는 국제적 운동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운동에서 우리를 고무하고 정보를 주는 전망을 필요로 하고, 사회에서 우리가 만날 사람들의 전망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국제적 관계들에 관한 전망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민족국가적 관계들에 관한 전망도 필요로 합니다.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것에 관한 것도 필요합니다.
내가 자본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논의한 새로운 특성들의 조합에 대한 이름은 참여 경제, 또는 짧게 해서, 파레콘(parecon)입니다.
이 새로운 유형의 경제, 파레콘과 함께, 시장에서의 몫을 확대하고 자원들과 노동의 원천들을 확대하여 떠먹으려는 자본주의적 압력은 제거됩니다. 본질적으로 축적을 향한 유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장 몫을 끝없이 확대하려는 또는 국제적인 이윤 창출의 기회들을 착취하려는 경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윤 창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와 새로운 식민주의의, 단지 그것들의 징후들만이 아니라, 기원들은 사라졌습니다.
만일 전 세계가 참여경제들을 갖는다면, 어떤 구조적인 것도 하나의 장소들―이웃들, 나라들, 국가들, 등등―인 것처럼 국가들을 대하는 것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생산 측면에 접근하는데, 하나로 얽힌 국제적 체계로 세계를 보는 데에 어떤 구조적 장애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일어나든 아니든지 간에, 또는 미래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파레콘에 대한 국내적 지지의 국제적 장기간 확대는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균형적 직무 복합체와 전체 사회적 산출이라는 점에서 공평한 분배가 도덕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한 나라에서 괜찮은 선택들이라면, 왜 국가들을 가로질러 균형을 잡지 않고 국제적 산출에 대한 노력과 희생에 기초한 소득들을 관련짓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협상된 참여적 자세에서 각 나라에 계획을 세우는 것이 말이 된다면, 이해가능하다면, 왜 나라에서 나라들로의 상호작용들은 그렇지 않은가?
물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로부터 나온 구조적 장애들이 사라지고, 정치적 문화적 형태들이 국내적 참여 경제들의 논리를 전 세계적 참여경제로 확대하는 것을 허용하고 환영한다고 가정해도, 남는 어려움은 국가 간 격차의 막대한 규모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그렇길 원할지라도, 발전된 사회와 저발전된 사회들 간의 소득과 직무의 질, 대규모 건설, 발전, 교육의 부족을 분별력있게 평준화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만약 몇몇 파레콘들과 몇몇 자본주의적 경제들이 존재한다면, 상황은 보다 어려울 것인데, 발전과 또한 사회적 관계들에서 격차들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내적으로 참여 경제를 채택하는 나라들로 구성되는 국제관계들과 파레콘에 관한 진짜 쟁점은, 무역과 여타 정책들이 대외적으로 직면한 것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입니다. 어떻게 파레콘은 경제 조직과 실행에 있어서 그 논리를 공유하지 않는 국가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을까요?
저에게 그 해답들은 초기에 국제적인 세계 정책들에 관한 전체 토론에서 함축되었다고 보입니다. 그 생각은 부와 권력의 격차들을 축소하는 방식에서 무역과 다른 관계들에 적극 관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제안은 파레콘이 시장가격들 또는 파레콘의 가격들로 다른 나라들과 거래하는 것인데, 부와 권력의 불평등성들을 교정하는 보다 나은 직무를 수행하는 선택들에 의존합니다.
두 번째 제안은 파레콘이 자신보다 덜 잘사는 다른 나라들에 대한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원조에 관여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다른 곳에서 참여 경제적 관계들을 획득하려는 운동들을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참여 경제의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이 이러한 종류의 정책들을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 연대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에 만들어질, 체계적인 경제적 압력으로 제약들을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보다 진정 단기적인 핵심이 있는데, 만약 우리 운동들이 긍정적으로 될 수 있다면, 전망을 공유할 수 있다면, 관련된 공유 전략들을 구성할 수 있다면, 그들은 오래지 않아 해명될 운명인 존재라기보다는, 보다 나은 미래로 향해졌던 그들의 노력들에 대한 알려진 기대들과 함께 오늘날 성과들을 위해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날 그들은 미래를 향해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인식한 방식들로 싸울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오직 국제적인 관계들을 추구하는 것은 국내적 관계들을 추구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참여 경제는 이 두가지 의제들을 달성합니다. 게다가, 이건 단지 학술적인 사안이진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운동들이 희망과 욕구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대안이 없다는 시니컬한 공포에 그들이 마주할지에 달려있습니다. 그들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서, 대안을 위해 싸우지 않고선,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로선 바람직한 미래의 경로는 반-자본주의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새로운 보다 고무적이고 성취적인 미래에 대한 지지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파레콘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무계급적이고 자주관리적인 다른 무엇이어야 하며 우리를 고무하고 지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것은 우리가 마주한 모든 어려움에 맞서 승리하기 위한 충분한 참여를 유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들에 맞서, 승리는 자유를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가장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번역: 참세상 (민중언론 참세상)
□ 강사 소개: 마이클 앨버트(Michael Albert)
Z Magazine 및 Z net (www.zmag.org) 편집인
마이클 앨버트는 Z net의 공동 설립자이자 편집인이며, 미국의 월간 시사교양지인 Z Magazine의 편집인이기도 함. Z net은 영어를 기반으로 한 가장 대표적인 진보언론으로 미국 내외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매주 30만 명의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음. 앨버트는 한국에도 번역 출판된 Parecon: Life after Capitalism(2003) (국역: <파레콘>, 김익희 옮김, 북로드, 2003)의 저자임.
'세상 이야기 >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8/4일 용산학살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0) | 2009.08.05 |
---|---|
마이클 알버트를 만나다 (참세상050508) (0) | 2009.08.05 |
[손호철 칼럼] '진보'가 그렇게 부러운가? (프레시안090803) (0) | 2009.08.03 |
[인터뷰] 지리산 개발 논란에 '야단법석' 준비 중인 도법 스님 (오마이뉴스) (0) | 2009.08.03 |
사진에 나온 괴산고 학생의 아버지입니다 (0) | 2009.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