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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인터뷰] 백낙청 교수 (시사IN 제100호)

by 마리산인1324 2009. 8. 14.

 

<시사IN>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17

 

 

“MB 정부는 파쇼할 능력도 없는 정체불명 정권”
백낙청 교수는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정부가 남북 문제를 풀어갈 전망은 어둡다면서 북·미 관계의 변화 여지가 보일 때 재빨리 편승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절묘하게도 이 인터뷰 바로 다음 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소식이 터져나왔다.

 

 

[100호] 2009년 08월 10일 (월) 14:13:18 이숙이 기자 sook@sisain.co.kr

 

 

<창작과 비평> 편집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백낙청 교수(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는 보수 진영에서도 평가하는 합리적 진보론자다. 평소 대중 앞에 나서기를 자제해온 그가 용산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시민사회와 야4당 간의 원탁회의에도 참석했다. 무엇이 그를 자꾸 발언하게 만드는지, 현 시국과 남북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시사IN> 특별 인터뷰를 통해 알아봤다.


 

용산 관련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시국선언은 오랜만인 것 같은데.
이른바 사회원로라는 사람들이 별다른 전문성도 없이 온갖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상당부분 자제해왔고, 앞으로도 자제할 생각이다. 다만 용산 문제는 인륜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민주주의 측면에서도 굉장히 심각하고 상징적인 사태라고 본다. 그것이 반년 넘게 지속되는 마당에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라도 이름을 올려놓는 것이 옳겠다 싶었다.

 

최근 들어 학자나 종교인 등 이른바 지식인 그룹의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시국선언 중에도 의미 있는 것은 잘 안 나서던 사람들이 나서는 것과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일반 시민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나, 미디어법에 대해 신문방송학자들이 나서는 것, 그리고 지난해 대운하문제로 서울대 교수들이 나선 것 등이 그렇다. 또 늘 나서던 사람들이라도 위협을 감수하면서 다시 발언하는 경우, 이를테면 최근 전교조 교사들의 시국선언 같은 것은 의미가 크다. 서명한 교사들에 대해 탄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때는 전교조 노조원이 아닌 일반 교사까지 더 많이 참여했다고 들었다.

 

   
1938년 1월10일 대구 출생. 경기고·미국 브라운 대학 졸업. 하버드 대학 영문학 석사, 철학 박사. 서울대 영문학 교수. 백석문학기념사업운영위원회 위원장, 시민방송 이사장, 환경재단 136포럼 공동대표, 6·15 공동선언 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현 한국작가회의 상임고문,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얘긴가?
우리 사회가 이명박정부가 원하는 방향대로만 굴러가지는 않으리라는 징표다. 지난해 촛불이 이명박정부의 노선을 바꿔놓지는 못했지만, 일단 이명박정부 맘대로는 안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그것을 아직 이명박정부나 여당측에서는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아주 모르는 것 같지는 않고, 직감으로 느끼고 오히려 겁에 질려있다고 본다.

 

‘실제로 바뀐 건 없다’며 촛불 피로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편에서는 작년의 그야말로 꿈같은 축제가 다시 벌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로는 안되는 게 입증되었으니까 옛날식 투쟁으로 돌아가서 제2의 6월항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답은 없어도 ‘그 양쪽 어느 것도 아니다. 또 새로운 사태가 전개될 것이다’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서거라는 뜻밖의 사건 때문에 일어난 거지만 지난 5월의 촛불은 또 달랐다. 그리고 미디어법 강행처리로 일어난 최근의 파장이 지금 당장은 촛불의 재연을 가져오고 있진 않지만, 이것도 가세해서 다음 단계에는 또다른 양상이 벌어질 것이다.

 

새로운 양상이라면 어떤 건가?
가령 지난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지 않았나. 민주당이 별로 잘한 게 없는데도 민주당이 될 만한 곳에서는 그쪽으로 표가 결집됐다. 작년 촛불을 계기로 사람들의 마음이 MB정부로부터 확 돌아섰던 게 표면에선 가라앉았다가, 선거가 벌어지든 전 대통령이 서거하든 뭔가 계기가 있을 때마다 다시 분출하는 형국이다.

 

이명박정부에 대해 ‘소통부재의 일방통행 정부’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이 정부가 파쇼정권이라는 규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파시스트 성향을 가진 사람이 그 핵심이나 언저리에 많이 있고 안보관계 기관들은 박정희?전두환 시대부터 줄곧 그런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파시스트적인 행태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건 사실인데, 나는 “파쇼는 아무나 하나?”라고 말한다(웃음). 이 정부는 파쇼할 능력도 없으면서 파쇼적인 기질을 시도 때도 없이 발휘하다 보니까 국민이 엄청 피곤하고 불행해지는 거다.

 

파쇼를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란 무슨 뜻인가?
파쇼란 과격한 반동이고, 과격한 반동이 아닌 보수는 온건 보수인데, 이 정부는 온건 보수도 아니고 일관된 파쇼도 아니고 그냥 국민들 짜증나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정권이 아닌가 싶다. 유능한 점은 자기들의 사익 실현에 상당히 적극적이고 단기적으로는 꽤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성격 규정이 모호하다. 
보수라면 있는 걸 지켜내려다 보니까 대체로 온건하고 상당히 합리적이어야 한다. 오히려 진보를 추구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좀 과격해지는 거고. 그런데 이 정부는 어찌보면 굉장히 과격한 개혁세력이다. 다만 그 개혁의 내용이 대세를 완전히 거꾸로 읽은 결과다. 이미 미국 같은 본고장에서도 끝난 신자유주의, 규제완화, 부자감세, 이런 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아주 과격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걸 관철할 일관된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더 중요한 건 개혁을 제대로 하려면 스스로 개혁된 집단이라야 하는데, 지금 정권 핵심의 다수는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 개혁해야 했던 면모들을 가장 개혁 안된 상태로 지니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개혁하겠다고 나서니 세상만 어지러워지고 사람들이 피곤해지는 거다.

 

노무현 정권 때 권력기관을 장악하지 못한 게 오히려 반동을 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를 청산하고 가령 검찰에 대한 대통령의 감독권을 포기한 것 등을 두고 칭송들을 하는데, 인간적으로는 훌륭한 대목이지만 대통령으로서나 개혁세력의 지도자로서 과연 현명한 일이었는지 엄정하게 평가를 해야 한다. 검찰개혁을 제대로 하고 권한을 줘야지 개혁 안된 집단을 그대로 기만 살려줘서는, 결국 본인도 당했지만 국민들이 얼마나 당하고 있나. 그리고 소위 당정분리라는 것도 노무현 대통령이 사실 열린우리당에 대해서 영향력을 안 미친 것도 아니면서, 서로 유기적인 협조관계는 깨버리고, 정당정치에 대해 책임질 건 안 지고, 그런 점은 잘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권은 오히려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주장한다. 그게 통하면서 대선 승패도 갈렸고.
‘잃어버린 10년’은 정말 선거 구호로는 최고였다. 왜냐하면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그 구호에 동감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지난 10년간 다른 건 다 누렸는데, 이를테면 부동산?주식?골프회원권 등이 다 엄청 늘고 위장전입해가면서까지 자식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했지만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해서 더 잘살지 못했다는 상실감을 가진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IMF 이후 10년 동안 생활이 진짜 어려워진 다수 서민들이다. 그런데 정권밖에 잃은 게 없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10년’이란 구호를 들고 나오자 실제로 생활이 어려워진 다수 서민들과 소수 특권집단 사이에 일종의 국민연대가 이뤄진 것이다.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무적의 연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연대가 깨지고 있다. 서민들이 끓는 국맛을 보면서 ‘이명박 찍어줬더니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더 어려워졌다’는 원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있는 정치집단이라면 선거 때 써먹은 건 뒤로 감추고, 지난 정부들의 업적 가운데 계승할 건 계승해야 한다.

 

반드시 계승해야 하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인권위원회 같은 게 하나의 사례다. 인권위는 지난 10년간 주요 업적이고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사례다. 그런데 이걸 축소하고 압박하면서 차기 의장국을 놓친 건 물론이고 인권국가 등급까지도 강등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런 걸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이 정부 안에 많은 모양인데, 이른바 국가 브랜드와 직결된 일이고 아주 속되게 계산하면 언젠가는 한국의 수출능력에도 악영향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남북관계의 경우도 그렇다. 6?15공동선언은 원칙에 관한 문서니까 이 정부도 전혀 부담될 게 없고, 10?4선언은 구체적인 사업들이 걸려있으니까 ‘원칙적으로 10?4선언 이행하겠다’고 하면서 북측과 만나서 ‘지금은 이걸 다 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라며 선후와 완급을 조정하면 되는데, 왔다갔다 하다가 모든 게 경색이 됐다. 국내의 단기적인 이해관계에 물려 국가 차원의 더 큰 이익을 훼손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의 단기적 이해관계란 무얼 말하나?
촛불로 정권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조?중?동이나 극우세력의 지지를 받는 게 우선 급하니 그들이 비판하는 6?15를 들고 나올 수는 없었을 게다. 게다가 북측 정권이 우리 국민 사이에 별로 인기가 없으니까, 큰 틀에서는 ‘정부가 남북관계를 발전시켜야 하는데 잘못하고 있다’ 하다가도 구체적인 문제로 우리 정부가 북측과 부딪치게 되면 대개는 ‘이명박도 나쁘지만 김정일은 더 나쁘다’는 쪽으로 간다. 국정지지도가 낮을수록 그런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이 커지기 마련이다. 

 

남북문제가 꼬이는 1차적 책임이 우리 정부에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오는 주말에 새로 나오는 책(『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에도 썼지만, 이번 제3차 핵위기는 ‘남한발’이라고 본다. 북측은 일이 잘 안 풀리면 핵 보유로 가겠다는 계획을 항상 갖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핵 실험을 한 뒤에도 핵무기를 지렛대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대폭 개선하겠다는 전략을 동시에 세우고 있었다고 보는데, 그 결과 나온 것이 10·4선언이다. 그 10·4선언을 현 정부가 계승했다면 북이 2차 핵실험으로 갈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럴 경우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남한 정부를 거들면 거들었지 부시처럼 훼방놓았을 리는 없다. 그런 점에서 1차적인 책임은 이명박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분단체제에서는 남북의 분단체제 기득권 세력이 서로 원수처럼 여기면서도 묘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그 책임을 전적으로 어느 한쪽에 지우는 건 무리다. 단적인 예로 인공위성 발사 직후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 나왔는데, 그에 대해 북이 반발하는 건 당연했겠지만 곧바로 2차 핵실험을 강행한 걸 보면 북에서도 종전에 비해 강경세력이 훨씬 힘을 얻은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서(웃음). 

 

분단체제가 더 공고해지는 건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분단체제가 더 심하게 고장이 나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거지, 과거에 분단체제가 안정돼 있을 때는 오히려 북이 핵무기를 만들 필요도 안 느꼈었다. 남북대결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남북이 모두 지속가능한 발전은 아니었지만 남쪽은 남쪽대로 경제성장을 했고, 북도 어느정도 성장하며 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남한에 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분단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소련?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북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엄청난 곤경에 처하게 됐다. 따라서 지금 대결이 강화되는 건 옛날처럼 안정된 대결체제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단체제가 흔들리다 못해 요동치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거 관리 잘못하면 전쟁까지 안가더라도 남과 북이 엄청나게 더 어려워지는 사태가 온다. 따라서 나는 미국의 지도자들이 한반도 주민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원대한 세계전략의 차원에서라도 이 국면을 다시 수습하려고 나올 거라고 본다. 

 

결국 칼자루는 또 미국이 쥐는 건가?
가까운 시일에 우리 남측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풀어갈 전망은 어둡다고 본다. 북측 역시 우리 대통령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등 그 사이 너무 나갔다. 따라서 남북관계만 가지고는 풀기가 너무 어려운데, 북미관계는 좀 다르다. 물론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 실망하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경우 부시 전 대통령처럼 북의 정권을 전복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출발한 사람이 아니고, 준비 안된 상태에서 북이 습하게 치고 나오니까 좀 기분이 나쁜 것도 있고 또 그사이 협상팀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이래저래 일이 꼬인 것 같다. 오바마는 이걸 계속 꼬인 상태로 가져가서 국내정치에 활용해야 할 처지는 아니기 때문에 빠르면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늦어도 가을에는 북미관계가 변화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절묘하게도 이 인터뷰 바로 다음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뉴스가 터져나왔다). 그렇게 됐을 때 우리 남측은 재빨리 거기 편승을 해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질질 끌려가다 보면 결국 YS 짝 나게 된다. 경수로 할 때 우리는 협상테이블에 끼지도 못하고 나중에 돈만 왕창 내지 않았나. 북측으로부터 고맙다는 소리도 전혀 못 들었다(웃음)

 

과거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한때 남북관계 진전이 좌절됐었는데, 김정일 위원장 때도 재연되는 것 아닌가 싶다. 
북측 체제의 성격상 중요한 고비마다 김정일 위원장이 결단하지 않으면 안됐고, 실제로 6·15공동선언이나 10·4선언, 9·19 공동성명이 다 김 위원장의 결단이었다. 후계체제로 갔을 경우 그런 전략적인 결단을 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사실 걱정이다. 개성공단의 경우도 당시 그런 전략적 요충지를 내준다고 했을 때 남쪽에서는 처음에 아무도 안 믿었다고 한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에게 직접 들은 얘긴데, 자기가 현대측 사람에게 “그 말을 믿고 있냐”고 그랬다고 한다 (웃음). 비슷한 일로 우리 정부가 국방부를 설득한다고 해보자. 국회, 보수 언론 다 설득하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을 북측은 김정일 위원장이 하자고 해서 됐다. 그게 꼭 좋은 시스템은 아니겠지만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당분간 그런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라 본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도 건강이 안 좋다. 민주개혁 진영이 자꾸 위축되는 것 아닐까?
저는 김대중 대통령을 어떤 땐 비판하고 반대도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좀 더 살아계셔야 한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국제적으로 한국의 진정한 국가이익을 대변해서 발언했을 때 세계의 언론이나 지도자들이 주목하게 만들 수 있는 위상을 가진 분이 그분 빼고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고비를 잘 넘기시기를 바란다. 국내에서도 역할이 중요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직 대통령으로서지 특정 정치세력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일 수는 없다. 지금 활동하는 후속세대들이 너무 그분에게 의존하지 말고 역할을 잘 해야 한다.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이 없다는 얘기가 많다.
나는 인물하고 국민의 전체적인 기운이랄까 그런 게 맞물려 있다고 본다. 구심점이 있을 때 기운이 확 일어나기 좋은 면이 있는가 하면, 국민들의 기운이 무르익을 때 그에 부응하는 인물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인물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단박에 해결해주길 기대하지 말고, 그런 인물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가진 사람은 그 사람대로 준비를 하고, 국민들은 그런 인물이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해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 인물이 없는데 뭐가 되겠냐고 그냥 앉아 있으면 평생 인물도 안 나오고 일이 되지도 않을 거다.

 

   
지난해 10·4 선언 1주년 기념식에서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리본을 다는 백낙청 교수.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커질수록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것 같다. 합리적 보수, 합리적 진보가 연대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고.
국민이 현실정치 차원에서 믿고 의지할 만한 세력이 나오는 게 중요한데, 이른바 합리적 진보와 보수가 어느 날 갑자기 모여서 정치연대를 만드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합리적이면서 사람들이 보수적이라고 볼 만한 분들이 진보진영에서도 대화할 만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전체적인 사회분위기가 많이 바뀌리라고 본다. 그런데 이건 편파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이야긴지 몰라도, 합리적 보수의 필요조건 중에는 ‘이 정부는 진짜 보수주의 정부가 아니다’ 하는 분명한 인식이 포함된다고 본다. 공개적으로 반MB 발언을 해야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의 국정기조나 운영방식이 잘못됐다는 인식을 이른바 진보인사들뿐만 아니라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누구나 공유해 마땅한 상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국민이 방향감각을 잡는 데 도움을 주고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해주리라고 본다.

 

합리적 진보진영도 그리 큰 것 같지는 않다.
제가 성찰적 진보라는 말을 썼는데, 자기가 믿고 주장하는 진보노선이 과연 진정으로 이 사회를 한 걸음 발전시키는 노선인가를 성찰하는 이들도 있고 안하는 이들도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남북관계발전이나 통일에 대한 적극성이 흔히 ‘진보’의 한 척도가 되는데, 남쪽 정부나 대기업의 이익에만 몰두해서 남북사업을 한다면, 그것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정말 이 사회의 진보를 가져오는 남북사업이나 통일운동 방식일까. 마찬가지로 자주파 평등파 할 때 평등파의 경우도 그렇다. 한국이 분단된 사회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해 신축적인 평등지향 정책을 펴는 게 아니라 교조적인 평등주의를 취한다면, 그 모델이 소련식 사회주의든 북구의 사민주의든 우리 현실하고는 동떨어진 얘기가 된다. 그것은 자칫 우리사회의 건전한 중도세력이 제대로 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을 방해하고 보수세력에게 여러 빌미를 줄 수가 있다. 따라서 진보 노선에 대한 이런저런 성찰이 필요한데, 그런 성찰을 하는 인구가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적다고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미 명성을 지녔거나 조직 안에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런 성찰이 더 부족하다. 그분들은 그만큼의 기득권을 가졌기 때문에 성찰할 필요를 덜 느끼는지도 모른다.

 

정치세력으로서는 성찰하는 진보와 성찰하지 않는 진보가 함께 가는 게 맞다고 보는 건가?
성찰하는 진보와 안하는 진보를 두부 자르듯이 가를 수 없잖은가? 같은 사람도 어떤 날은 성찰하고 어떤 날은 성찰 안하고 하니까(웃음). 당연히 다 같이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리없이 결합할 수 있는 철학이랄까 노선이 필요하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내가 주장하는 ‘변혁적 중도주의’가 그런 노선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일부 호응하는 분들도 있고 아직 안하는 분들이 더 많고 그렇다.

 

   
백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는 7월14일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소통을 위한 2차 원탁회의’를 주도했다.

 

변혁적 중도주의 안에 기존 정당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변혁적 중도주의가 정당의 정강이 되기는 어렵다. ‘잃어버린 10년’처럼, ‘변혁적 중도주의’를 내걸고 선거에 나갈 정당도 없고 그렇게 해서 이기기도 어렵다. 그래서 이건 더 폭넓은 철학이랄까, 기본 노선에 해당하는 거고, 변혁적 중도주의에 민주당 분파, 민노당 분파, 진보신당 분파 (웃음), 이런 건 가능하지 않겠나. 그러려면 변혁적 중도주의의 내용도 더 충실해져야 하지만 각 정파의 내부도 바뀌어야 한다. 진보정당들은 자기들 내부에서의 성찰과 더불어 연립정치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나는 굳이 합당을 해야 잘하는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나라 선거제도가 연립정치하기에 아주 나쁘게 되어 있지만, 정당들 자신이 섣불리 연립정치를 하다가 자기들 정체성이 의심스러워져서 그나마 갖고 있는 지지세력도 놓친다는 우려를 많이 한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는 항상 소수 지지세력만 붙들고 있게 된다. 이른바 진보정당들이 더 큰 정치를 할 이런저런 훈련을 쌓고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성찰을 거친 진보정당과 연립정치를 할 만큼 개혁성을 확보해야 한다.

 

시민사회와 정치권과의 원탁회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성과가 있나?
두 번 했는데, 발상은 이런 거다. 지금 국민의 변화욕구는 굉장히 높은 수준에 와 있는데 이걸 담아낼 능력이 정치권이나 시민사회 세력이나 다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서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갑자기 융합하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원탁회의 자체가 해답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정치권하고 시민사회가 만나서 주파수를 조정할 수 있으면 조정해보자 그런 취지다. 그런데 만난 날이 한번은 6?10대회 전날이고, 다른 한번은 미디어법 싸움이 한창일 때이다 보니 그런 장기적인 구상은 묻혀버리고 야당의 투쟁에 시민사회가 서포터즈로 나선 것처럼 비춰졌다. 그 대목에서 응원해준 걸 후회하진 않지만, 아무튼 그게 초점은 아니었다. 문제는 원탁회의란 것도 자주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정당인사들이야 한번이라도 더 언론에 오르내려서 손해 볼 게 없지만, 시민사회 쪽에서는 굉장히 부담을 지고 하는 일이다. 따라서 3차 모임을 언제할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우리 시민사회 입장에서는 모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해야 한다고 본다. 

 

그 사이 시민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누구나 활동가로 나서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 국민들이 미디어 악법의 불법적인 처리나 용산사태 같은 것을 묵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10월 재보선 같은 때 국민의 문제의식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보고, 지방선거의 경우도 예비후보 등록일을 따져보면 그리 먼 것도 아니다. 따라서 후보등록 전에 범민주세력의 선거공조에 대한 아주 원칙적인 룰이 나오는 게 바람직하다.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그야말로 정치권의 선수들이 결정할 일이지만, 올가을에는 그런 작업이 시작돼야 한다고 본다.

 

승자독식 구조가 문제라면 권력체계나 선거구제를 바꾸는 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 아닌가?
현행 헌법이 제정된 지 20년이 넘었으니까 손볼 사항은 꽤 있지만, 지금은 헌법 같은 고차원의 얘기를 할 시기가 아니라고 본다. 훨씬 더 절박한 상황이다. 헌법 못지않게 중요한 게 선거법인데, 비례대표 수를 늘리고 소선거구제 비중을 떨어뜨리는 식의 손질만으로도 승자독식 구조는 완화할 수 있다. 개헌을 한다고 하면 그런 선거제도 개혁의 전망이 서는 정도의 상황이 됐을 때 하는 게 맞다고 본다. 87년 헌법이 부족한 점이 많지만 유신헌법과 5공 헌법에 비하면 엄청 좋은 헌법이다.

 

대통령제 폐해가 많다며 내각제로 바꾸자는 의견도 적지 않다.
내각제라는 게 의원내각제의 줄임말인데 국회가 이런 상태에서 국회의원 내각제가 대통령제보다 낫겠는가. 좋은 국회를 만들려면 정당도 좋아져야 하고, 언론상황도 지금과 달라져야 하고, 무엇보다 선거제도가 개선돼야 하는데 그런 걸 쟁취하기 전에, 가령 지금 18대 국회가 내각책임제를 운영한다고 생각해보라. 끔찍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