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미국의 선박 제너럴 셔먼호는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 자명종, 등을 싣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으로 들어왔다. 그때 조선은 프랑스군이 침입하여 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관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셔먼호에 사람을 보내어 평양에 온 목적을 물어봤다. 미국의 상선 셔먼호는 그저 상거래를 하자며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서양과 통상을 하면 조선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국법으로도 서양과의 통상이 금지됐기 때문에 조선은 셔먼호의 요구를 거절하고,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다음날,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의 강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만경대까지 침입해왔다. 셔먼호는 관민에게 대포를 마구 쏘아댔다. 이에 조선은 돌팔매,활,소총으로 맞섰다. 그리고 셔먼호의 선체가 모래톱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자 배를 불태우며 저항했고, 배는 전소됐다.
1871년 미국의 해군 제독 로저스는 자기 나라의 배(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운 일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5척의 군함과 대포 85문과 군인 1230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했다. 배를 불태운 일의 사과와 함께 미국은 우리에게 통사조약을 요구했다.
미군이 뱃길을 막아 서울에서는 각종 식량과 물자들이 들어가지 못했다. 식량이 귀해지고 물가는 높아져 갔다.
그 해 6월 10일 미국 상륙부대는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까지 밀고 들어오게 된다. 이 사건이 바로 ‘신미양요’ 이다.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했다.
광성보에서 벌어진 48시간의 전투
당시 광성보의 전투를 지휘했던 어재연 장군.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그의 동생 어재순 장군과 몇 십 명의 군사들…. 미군의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군사장비와 군인으로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우리의 군사들은 포탄이 다 떨어진 이후에도 칼과 창, 그리고 맨주먹으로 48시간여 동안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역시나 역부족. 어재연 장군과 동생 어재순 그리고 50명의 군사들은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이 중에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바다에 뛰어 들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선군도 많았다.
신미양요 희생자들 ⓒ 네이버 백과사전
광성보 전투, 과연 승자는?
결국 미국군은 사망자 3명, 부상자 7명에 불과하며 승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조선은 전투에서 패했지만 조약은 계속 거부했다. 끝내 미국은 자신들이 원했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표면적인 승리는 물론 미국이다. 그러나 미군에 비해 턱도 없는 군 규모로 48시간이나 버텨냈다는 것은 가슴 뭉클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전투에 패했지만, 그들의 정신은 절대 패하지 않았다. 굴복하지 않았다. 그때의 선조들이 흘린 피와 강인한 정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때의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자!
광성보
광성보 입구 ⓒ 이장미
광성보는 조선 1658년(효종 9년)에 설치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 중 하나이다. 1679년(숙종 5년)에 강화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함께 축조하여 광성보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신미양요 때(1871년)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 광성보. 광성보에는 전쟁 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진적비와 350여 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있다.
광성보 지도
쌍충비각
순절비와 쌍충비 ⓒ 이장미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1823-1871)과 어재순 그리고 59명의 순절을 기리는 비이다.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그들의 충절을 추모하고 있다고 한다.
쌍충비각의 거미줄 ⓒ 이장미
거미줄 친 창살 너머로 보이는 쌍충비가 왠지 모르게 마음을 짠하게 한다.
자, 이번엔 광성돈대를 시작해서 용두돈대까지 둘러보며 우리의 역사를 되새겨보자.
3개의 돈대
◆ 광성돈대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의 돈대 중 하나이다. 숙종 5년(1679) 함격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한달하고 열흘만에 튼튼하고도 든든한 돈대 하나를 만들어 냈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힘을 들였을지 짐작된다.
1977년, 광성돈대의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되었다.
광성돈대에 전시된 포들 ⓒ 이장미
제일 뒤쪽에 있는 대포는 ‘홍이포’라고도 한다. 사정거리가 700m정도 된다. 포알은 화약의 폭발 힘으로 날아가지만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력은 약했다. 이 대포는 병자호란에도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가운데 있는 소포는 사정거리가 300m로 포알은 대포와 같단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지만, 소포는 조준이 된다.
맨 앞의 작은 것은 ‘불랑기’라 한다.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고 한다.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이다. 작지만 무게가 38kg이나 된다.
◆ 손돌목돈대
손돌목돈대 ⓒ 이장미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5년(1679)에 축조된 돈대이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고 한다. 손돌목돈대 또한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이다.
‘손돌목’에 관한 비화가 궁금하다면 클릭!!Click!!
◇ 광성포대
광성포대 ⓒ 이장미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아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가 약 6m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광성포대는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항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될 수 있었다.
◆ 용두돈대
용두돈대 ⓒ 이장미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이다. 손돌목 돈대에 속해있는 외곽 초소 겸 포대이다. 고종 8년(1871)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병인, 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별어졌던 현장이다.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 전적지(戰蹟地) 정화기념비가 세워졌다.
강화 전적지(戰蹟地) 정화기념비 ⓒ 이장미
용두돈대를 찾은 관람객 ⓒ 이장미
손돌목돈대, 용두돈대로 가는 산책로 ⓒ 이장미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의 풍경 ⓒ 이장미
광성보는 분명 과거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이다. 많은 사람이 이 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또 피를 흘려야 했던 곳이다. 그러나 쓰라린 역사가 있는 광성보는 너무도 평화로워 보였다. 오늘날 우리는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을 여행하곤 한다. 즐겁게 여행하되, 그 역사의 의미만큼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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