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2010.04.02 제804호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045.html
장관님, 해군기지에서 관광하시겠네 |
제주 찾은 김태영 국방부 장관 “자연만 있으면 무슨 명소?” “해군기지는 자연과 어우러진 인공물” 궤변 늘어놔 |
“자연만 달랑 있으면 그게 관광명솝니까?”
지난 3월20일 김태영 국방장관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인 서귀포시 강정마을 주민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운을 뗐다. 이탈리아 카프리섬을 예로 든 김 장관은 “자연과 건축물이 적절히 잘 어울려야 관광명소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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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보다 심각한 논리의 부족
“아프리카 밀림에 가면 자연만 있죠. 그게 관광명솝니까? 거기를 관광명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무식한 검…, 흑인들이 뛰어다니는 그런 곳일 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참 정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삽시간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무식하게 뛰어다니는 흑인’이 됐다. 일국의 장관이란 사람이 이런 식의 인종차별 발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했다는 점만으로도 심각한 문제다. ‘표현’보다 심각한 것은 ‘논리’다. 해군기지 건설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제주를 대표하는 천혜의 자연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주민대표들을 면전에서 ‘무식하게 뛰어다니는 흑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김 장관의 발언이 알려지면서 제주 시민사회단체들이 일제히 반발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이날 김 장관은 ‘창조적 건설’이니, ‘자연과 어우러지는 인공물’이니, ‘아름다운 건축물’ 등을 자주 입에 올렸다. 모두 강정마을에 들어설 예정인 해군기지를 염두에 둔 수사였다. 말하자면 이런 얘기다. ‘이탈리아 카프리섬처럼 자연과 건축물이 어우러진 관광명소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굳이 무식한 흑인들이 뛰어다니는 곳으로 남으려 하느냐.’
강정마을은 제주 여느 마을보다 수려한 경관과 따뜻한 기후로 이름나 있다. 주민 대다수가 귤 농사와 어업, 화훼농업 등으로 나름대로 윤택한 삶을 꾸려온 터다. 기지에 반대하는 주민 입장에선, 해군기지를 포함해 어떤 대규모 시설이 들어오더라도 강정마을이 기왕에 지닌 가치만 떨어뜨릴 뿐이다.
‘자연’ 없이 ‘건축물’만으로도 관광명소를 만들어낼 자신이 있는 건가? 김 장관은 “자연과 건축물이 적절히 잘 어울려야 관광명소”라고 했지만, 건축물(해군기지) 건설 추진 과정에서 정작 강정마을의 자연은 제대로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 강정마을 앞 바다는 이미 문화재청이 지정한 문화재 지역이다. 바다 속에는 환경부가 지정한 멸종위기 희귀동식물이 9종이나 서식하고 있는 대규모 연산호 군락지다. 해군기지 건설 후보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이런 강정의 자연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로지 군사적 목적만 염두에 두고 추진한 것”이라는 게 마을 주민과 환경단체들의 주장이다.
사실상 입지를 정하고 나서 실시된 사전환경성검토나 환경영향평가 과정에서 이런 사실은 애써 축소되거나 은폐되기 일쑤였다. 사업지구에서 불과 1km도 안 떨어진 바다 속에 대규모로 분포한 연산호 군락에 대해 해군 쪽은 “어쨌든 직접 사업지역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문제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환경영향평가 과정에서 지역 환경단체가 추가로 발견한 붉은발 말똥게와 기수갈고둥 등 멸종위기종에 대한 문제도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김 장관과의 면담에 참석했던 윤호경 강정마을 해군기지반대대책위 사무국장은 “주민들이 봐도 환경파괴가 불을 보듯 뻔한데, 해군은 계속 거짓말만 하며 주민을 호도하고 있다”며 “해군기지는 결코 ‘창조적 건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주민들 지지 높다며 주민투표는 왜 거부?
강정 주민들이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것은 무엇보다 주민 동의를 제대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정마을이 ‘후보지’로 정해지기 이전인 2005년부터 해군 쪽은 기회 있을 때마다 주민 동의를 전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입지로 정해지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한 제대로 된 주민설명회나 공청회는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2007년 4월, 당시 강정 마을회장이 마을 향약까지 위반해가며 졸속으로 진행한 마을총회 결과만 가지고 해군기지 유치 신청에 나섰고, 군과 제주도 당국도 이를 근거로 강정마을을 여론조사 대상지역에 포함시키면서 느닷없이 후보지가 돼버린 것이다.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제대로 된 설명회와 주민투표 실시 등 누가 봐도 정당하고 합리적인 절차를 거친다면, 그 결과에 무조건 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지에 찬성하는 주민이 단 1명만 더 많아도, 당장 반대위원회를 해산하고 결과에 따르겠다는 게다. 그러나 정부 당국과 해군 쪽은 제주 기지 유치 여부와 후보지 선정을 위해 실시한 2007년 5월의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고 버티고만 있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바로 그해 8월 기지 유치를 추진한 마을회장을 해임하고, 신임 회장 주관 아래 주민투표를 거쳐 공식적인 반대 입장을 결정한 바 있다. 이후 3년 동안 ‘국가의 결정’과 ‘주민의 결정’이 대립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번 김 장관과의 간담회에서도 강정 주민대표들은 재차 주민투표를 요구했다. 김 장관은 이를 평소 주장을 ‘재탕’하는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이미 기지 건설을 위한 행정절차가 끝나고 착공을 눈앞에 둔 상황이라는 게다. 사실 김 장관이 이날 주민대표들을 만난 것도 이런 상황을 반영한 모양 갖추기에 불과했다. 해군기지 건설의 정당성을 장관이 직접 언급하며 ‘주민 달래기’에 나선 셈이다.
“강정의 많은 분들이 (기지 건설에) 동의하는 걸로 알고 있다. …여러분은 주민들을 잘못 오도하고 있다.” 김 장관은 간담회에서 주민대표들에게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정말 강정 주민 다수가 동의하고 있다면, 주민투표 요구를 수용 못할 이유가 없다. 마을 주민을 포함한 해군기지 반대의 목소리를 한순간에 정리하고, 기지 건설의 정당성을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지 건설 찬반을 놓고 둘로 갈라진 마을의 갈등을 씻어내기 위해서도 주민투표가 절실하다.
강동균 마을회장은 “해군기지 문제로 부모·형제, 친구 관계 다 깨지고, 공동체가 전부 파괴되고 말았다”며 “갈등 해결 차원에서라도 무기명 주민투표를 실시해달라”고 김 장관에게 직접 요구했다. 양홍찬 마을대책위원장도 “지금 장관이 찬성 여론이 많다고 얘기하는데, 그러면 주민투표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 것 아니냐”고 따져물었다. 김 장관은 “크게 보셔서 화합해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해군기지에 대한 도민 전체의 여론은 찬성이 조금 앞선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해군기지를 매개로 한 정부의 ‘획기적인 지원’에 대한 기대감이 대폭 반영돼 있다. 지난해 제주도지사 주민소환 서명에 7만 명이 넘는 도민이 참여한 것도 바로 직전 체결된 정부와의 양해각서(MOU)에 따른 지원책이 정작 ‘속 빈 강정’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앞서 2008년 1월 제주한국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민·군 복합항 개념이 아닌 해군기지만을 건설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도민은 전체의 4.6%에 불과했다.
최근 자료도 있다. 지난해 12월 도내 4개 언론사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제주도민이 해군기지 문제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음이 잘 드러난다. ‘해군기지가 무리하게 추진되고 있다’고 답한 도민이 전체의 52%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날 김 장관의 일성은 “제주도민 다수가 ‘긍정’하고 있다”는 발언이었다. 제주도민의 민심을 제대로 짚었다고 볼 수 있을까? 강정마을 주민들의 주민투표 요구를 무조건 거부할 상황이 아닌 게다.
해군기지 찬반으로 마을 공동체 파탄
현재 제주 해군기지 문제는 서울 행정법원에 소송이 계류 중이다. “지난해 1월 국방부 장관이 환경영향평가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해군기지 사업 실시계획을 승인해준 것은 명백한 법 절차 위반”이라며, 마을 주민들이 국방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4월 중에는 소송 결과가 나올 전망이다. 주민들은 이 소송 결과에 기대를 걸고 있다. 강정마을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주민들이 지난해 낸 소송에서 두 차례 승소 판결을 이끌어낸 바 있기 때문이다. 착공을 눈앞에 두고도 극도의 불신이 가시지 않는 제주 해군기지 문제를 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리라.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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