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으로서의 속의 빛 21
(하워드브린튼,「퀘이커350년」, 3장)
속 죄
1. 영원한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를 구별하지 않는다 ; 빛은 하나님께로 끊임없이 흘러나와 세상의 모든 선을 창조합니다. 그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는 빛이 충만하고, 인간 속에는 분에 따라 있기 때문입니다.
2. 영원한 그리스도의 희생 ; ‘창세전에 기록된 책’(계13:8)의 ‘죽임을 당한 어린양’입니다. 하나님의 근본성격은 자기 자녀를 위해 자신을 영원히 희생하시고, 그 죄에 대한 벌을 담당하시고 그들을 도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희생이 있기 전 부터 줄곧 있어온 일입니다.
3. 역사적 예수의 희생 ; 영원한 과정의 시간적 단면 ; 자신의 자녀를 위해 영원한 찢김을 당하는 하나님의 심경이 시·공간 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의 희생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길을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영원한 과정 그 자체의 한 본질적인 부분으로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고통과 희생을 통해 새롭고 높은 형식의 생명이 이루어집니다.
4. 퀘이커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구속과 정화의 힘을 가지는 속의 빛으로 생각했으나 율법에 명령된 피의 희생을 드린다는 구약의 관념을 적용시키지는 않았습니다.
5. 피는 상징적으로 생명을 표시(레위기17:11,14)하며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핏줄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즉, 이 관계에 도장을 찍기 위해 한 짐승을 잡아 그 피를 받음으로써 둘이 한 생명으로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는 제3의 생명이 되어 인간의 고립과 헤어져나감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있는 구렁에 다리를 놓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됨, 즉 속죄이며 서로 떨어졌던 것을 하나로 연결함이 될 것입니다.
6. 바울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여러분이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평화와 연합을 시키는 능력의 영원한 그리스도, 곧 세상의 빛, 곧 바울이 인식했던 유일한 그리스도입니다.
선악에 대한 사람의 책임
1. 퀘이커는 프로테스탄트와 다르고 가톨릭에 가깝습니다.
구 분 |
퀘이커 |
프로테스탄트 |
칭의문제 |
인간 스스로 의롭게 함에 가능성을 둠. |
그리스도의 희생에 전적으로 의지함. |
죄 문 제 |
완전해짐과 죄에서 벗어나는 일이 이 세상에서도 가능함. |
생각·말·행동에 죄를 지음. |
-가톨릭은 신자 서로의 생활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어서 초자연적인 의로움과 그 안에 있는 은총의 모임에 참여하고 공유합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이러한 유기적으로 얽히는 관련을 없애버리고 하나의 개인주의적인, 거의 기계적인 관념으로 대신해 버렸습니다.
-퀘이커들은 가톨릭의 서로 얽힌다는 원리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좀 다른 방식으로 했습니다. 바클레이가 말했듯이 인간은 교회와가 아니라 영원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과 죄를 위한 수난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적인 덕이지 결코 얻어온 선이 될 수 없습니다.
2. 의인의 고통문제는 신기한 역사의 나선운동에 의하여 얻어졌습니다. 사람들을 도로 옛날의 신앙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시적인 희생제도는 백성의 죄를 위하여 한 죄 없는 희생을 바치면 받아주신다는 생각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문명화감에 따라 부족적인 혈통관계가 풀어지고 개인이 들끓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선언한대로 각 사람은 제 죄이 값을 담당해야 했습니다(에스겔서18:20). 욥이 옳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고통을 당하는 옳은 사람이 까닭없이 희생돼야 한다는 것은 이유가 닿지 않습니다.
3. 신약에서는 이 희생연극이 우주적 규모로 고쳐 연출됐습니다. 온 세계의 죄를 위해 그리스도가 몸을 바쳐진 것입니다. 이는 근대의 개인주의적 사상에는 불가능 혹은 모순입니다. 사람들의 죄를 위해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벌을 받으려고 자기 자신을 내놨다고 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짜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생명이 하나인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 속죄의 교리는 풍부한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 자신이 저들과 하나가 되었으므로 그는 사람의 죄를 위하여 반드시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완전론
1. 퀘이커들은 속죄, 새로남의 과정은 어떤 때는 사람을 정말 완전히 죄에서 해방하여,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사람을 완전 상태에 가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완전이란 다만 주어진 빛의 분에 따라-달란트 비유에서는 한 달란트- 한껏 사는 일입니다. 또 그것을 충실히 하면 더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브린턴은 스코트의「일기」(p.116)에서 “우리가 만일 우리로서 할 수 있는 극점에 간다면 우리로서는 ‘완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속의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프로테스탄트는 죄책감과 원죄 때문에 불안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한편 우리는 영원한 세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조지폭스는 ‘어떤 죄를 주장하는’사람과의 논쟁에서 “만일 당신의 신앙이 참것이라면 당신으로 하여금 죄와 악마를 이기게 하고 당신의 마음과 양심을 정화시킬 것입니다” 또 “우리는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다른 사람의 말에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하는 노력은 슬프고 맥빠지는 노력입니다.”라고 했습니다.
4. 속의 평안이 있느냐 없느냐가 퀘이커들이 올바른 인도 밑에 있나 있지 않나를 증험하는 주된 방법이었습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요구에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에게만 옵니다. 실패의 걱정, 타협의 생각이 없어야만 평화를 얻습니다. 전 세계의 고난을 하나님이 내게 가져다 지우신다 해도 사람은 평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초기 기독교도가 완전론자였던 것을 신약에서 많이 인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5:48,19:21, 엡4:13, 빌3:15, 골1:28,4:12, 딤후3:17, 히12:23, 약1:4). 폭스의 서간에 “푹풍 속에 있어서도 ······ 물 위에 머리를 내놓고 견딜수가 있습니다.”
5. 퀘이커는 유토피아적이라 비평을 받고 완전론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은 미움과 싸움에서 해방되는 일을 어떤 특별한 종교적 계급이나 또는 이생 혹 내생의 어느 미래에만 국한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각 사람이 다 제 속에 계시되는 대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데 있어 과연 완전론자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목적에 도달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빛은 자라나는 원리입니다. 빛 안에서 완전한 씨는 완전한 싹으로 그리고 완전한 나무로 자라는 것입니다. 타협은 일부러 생각해 가지고 최고에 가는 길을 택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가톨릭 사제, 수도사, 수녀의 공덕은 타협(군인의 윤리적 타협 등)에 끌려간 사람들을 구속해내는데 도움이 되긴 합니다. 사람들은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줄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직면하고 제 아는 한의 최고로 살아보려 할 것이냐(퀘이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좀 낮추어서라도 비교적 성공이 가능한 데로 노력을 기울일 것이냐?(가톨릭?) 대개의 사람은 둘째 것을 택합니다. 조금이라도 얻는 것이 전혀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
1. 인간 타락의 얘기는 실지로 인간 역사에 일어난 일을 고등한 상징의 형식으로 기록하는 종류의 신화에 속합니다(브린튼,「Divine Human Society」Chapter 2) 초기의 친우들에게 타락은 칼빈주의자들의 생각처럼 완전히 결딴이 난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뱀의 후손의 머리를 부술 하나님의 씨가 아직 인간의 속에 남아 있습니다(창3:15).
2. 속의 빛 교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빛이 위로부터 비치어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를 싹이 트게 하는 형식으로 그려온 듯 합니다. 자연인은 모든 다른 자연과 한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그 속에는 아무리 타락해 내려갔더라도 아직도 만물이 그것으로 지어졌고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거룩한 말씀의 어떤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3. 바클레는 믿기를 인간이 초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 타락한 것은 그것을 다시 인간이하로 타락하는 것에 비교해봄으로써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자는 영적 살림에서 율법과 이성에 의존하는 데로 떨어졌지만, 후자는 율법과 이성에 의존하는 데서 정욕적인 상태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실지 체험으로 자라온 퀘이커 신학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인간은 두 세계의 틈에 끼여 있는 이성의 어둑한 지대에 처해 있는 것을 봅니다. 인간은 빛에 따라 살수도 있고, 인간성에 따라 살수도 있고, 정욕적인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의 몸은 동물적, 마음은 이성적, 그 속에 있는 빛은 신적입니다. 이 셋은 항상 관계있으나 명확히 구별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빛은 이성을 지도해야하고, 이성은 본능을 도와 올바르게 정돈된 살림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경험적인 신학이지만 초기 퀘이커 사상을 요약한 것입니다. 세 개의 영역을 바클레는 이야기합니다.
인간 정신 이하의 것(짐승 혹은 그밖의 무슨 피조물의 젖 같은)이 고등한 존재인 인간의 일을 따라올 수도 이해할 수도 없듯이, 또 인간 즉 자연인의 정신은 하나님의 것을 받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이 참빛에 복종하고 따르는 사람 안에 있는 밝아진 이성은, 영에 따르고 복종하는 한, 그것은 사람의 정신적인 일에 있어서까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마치 사람 안에 있는 동물적인 생활이 이성에 의해 조절되고 지도되기만 하면 합리적인 일을 처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과 일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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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과 인성의 관계
1. 퀘이커들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기보다 느끼려고 했습니다. 퀘이커고요주의, 19세기 충돌과 분열, 20세기 초 퀘이커사상혁명은 이 문제와 관련 있습니다.
2. 브래드웨이트의 바클레 이해
구 분 |
브래드웨이트(William Charles Braithwaite) |
바클레(Robert Barclay) |
신성과 인성 |
바클레는 이원론자. 하나님의 빛과 인간의 마음을 지나치게 구별함. 이는 그리스도안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설명불가하게 만듬. 또 사람속에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선의 자취조차도 없게 만듬. 바클레가 칼빈영향을 받음. 퀘이커 쇠퇴의 원인이다. |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후는 ‘자연적’이요, 타락된 것이라함.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온전히 다른 빛이 오는 것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임. 빛의 구원하는 힘에 반항하지 않는다는 수동적인 활동만 있음. |
3. 오늘날 퀘이커들은 신성과 인성은 비슷한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전 역사를 통해 논쟁되어온 근본적인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리스와 라틴 두 형태의 기독교사이에서 싸움으로 나타났고, 오늘날은 헤겔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신학과 칼빈주의·바르트신학과의 논쟁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철학적으로는 우주를 내적 유기적관계로 보려는 사람과 외적 기계적 관계로 보려는 사람과 논쟁이라는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4. 바클레의 이원론적 구별은 도덕적이요, 실제적인 것이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며 임시적인 것이며 극복가능한 것입니다. 처음에 외적인 듯이 뵌 빛은 결국 나중은 인간의 의지와 조화되어 하나님과 진정한 유기적인 연합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5. 바클레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비유를 너무 지나치게 글자대로 취했습니다. 바클레의 변호론은 주로 칼빈주의를 반박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그는 상대와 공통의 광장을 발견해 거기서부터 설복시킬 생각이어서 저쪽에 양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칼빈신학의 외형주의는 바클레 퀘이커주의의 내면주의에 용납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이원론은 하나됨으로 극복되기 시작합니다.
6. 퀘이커의 신앙생활은 생활 전체가 성례전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정신적 여행의 끝에 가서 될 일이며 세족적인 것이 천천히 노력을 통해 종교적인 것에 까지 간 것입니다.
7. 기독교사상사에 있어서의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대답이 있는 것은 인간의 심리가 서로 다른데서 오는 것도 있지만 또 기독교 자체 안에 있는 두 뿌리에서 오기도 합니다. 바로 히브리종교에서 오는 것과 하나는 그리스 철학에서 오는 것입니다.
구 분 |
히브리종교 |
그리스철학 |
철학의 원천 |
프로테스탄트는 히브리적(플x) |
가톨릭은 그리스식 사고방식(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아퀴나스) |
성서 |
공관복음 |
바울·요한신학 |
하나님 vs 인간 |
시·공간적 분리, 연합(예언자) |
일시적x, 계속적o 인간의덕=연합을깨닫는것 |
구원관 |
행함으로 구원, 복종이 목적 |
근본 바탈(being)로 구원, 올바른 지식이 목적(요8:32) |
종교현상 |
순종을 강조(의지변함을 구함) |
명상과 세속에서 물러감을 강조(천성변함을 구함) |
하나님과 연합 |
어떤 일의 결과로 오는 것 |
시간을 뛰어넘는 사실로, 깨달아져야 하는 것 |
성육신 |
기적, 이해불가 |
계시의 길고 긴 과정의 자연적·필연적 완성 |
메시아론 |
새 사회질서위해 역사에 출현 |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히 나타남 |
영감론 |
간헐적, 기다려야 하는 것 |
계속적, 찾아야 하는 것 |
8. 퀘이커는 두 사상을 연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일관된 체계를 세우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폭스나 페닝톤의 실체와 그림, 능력과 형식, 실재와 거짓의 구별은 성격상 그리스적입니다. 보편적 빛도 그리스적입니다. 예배모임에 “집중하라”는 권고의 말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길이며 명상하고 하나님의 임재체험을 노력하는 것도 그리스적입니다. 한편 퀘이커모임의 전도는 히브리적 예언자주의에서 유래합니다.
9. 일관된 신학을 엮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논리적 체계는 관념의 틀에 박혀버리기 쉽고, 또 논리적인 일관성이 없으면 성장·발전·진리의 새계시를 얻기가 쉽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이념의 확고부동한 하나의 체계 곧 진리 그 자체에 가깝게 됩니다. 없어서는 아니될 요소는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입니다.
10. 서로 도와주는 두 개의 운동 ; 속에 있는 진리의 근원으로 물러가는 일(그리스적)과 행동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일(히브리적). 명상적이면서도 행동적,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윤리적, 그것을 일관된 사상체계 속에 결합시켜 그런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결합시켰기 때문입니다. (끝)
요약,발제/ilovepalgong
- 2010년 2월 21일 민들레영토에서 예배후 참석한 멤버들과함께 발제하고 토론하고 학습한 내용입니다. 28일 한번더 학습하게 됩닏. 21일 참석한 사람은 한승훈님,진보겸님,신성룡님,남영택님,신현호님입니다.*2010년 2월 28일에는 대구에는 남영택님과 신현호님이 참석해 침묵예배와 교제를 나눴습니다. 한승훈님과 진보겸님은 서울퀘이커모임에서 예배를 드렸고, 신성룡님은 베트남 여행준비를 위해 참석을 못하셨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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