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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도종환, 경향100518)

by 마리산인1324 2010. 5. 23.

 

<경향신문> 2010-05-18 18:18: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5181818075&code=990303

 

 

 

[시론]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도종환 시인

 
ㆍ노무현 전대통령 1주기를 앞두고

빗속에서 뻐꾸기가 웁니다. 오월이 깊어갑니다. 보랏빛 창포 위에 내린 빗방울이 창포 잎을 툭툭 두드리다가 풀 위로 가볍게 뛰어내리는 게 보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버린 지 1년이 되어갑니다. 그 무렵 피던 찔레가 다시 피고 있습니다. 꽃은 때가 되면 다시 피는데 한번 간 이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자전거에 손녀 태우고 마을 도는

신동엽 시인은 <산문시 1>에서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는 그런 대통령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우리는 자전거 뒤에 손녀를 태우고 마을을 도는 전직 대통령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데서나 편하게 앉아 막걸리를 나누는 소탈한 전직 대통령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꼴(?)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는 이들에 의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벼랑은 다시 예전의 벼랑으로 돌아가고 / 허공도 다시 허공이 된 뒤 / 밀물 같은 슬픔의 물살 출렁이다 빠져나가고 나면”(졸시 ‘얼굴’ ) 세상은 다시 그를 잊을 것입니다.

세상은 증오와 불신과 대립과 모함과 협잡과 폭력으로 갈수록 흉흉해지고, 권력과 탐욕을 향한 집착만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같지 않거나 종교가 다르거나 입장과 처지가 다른 사람들끼리는 점점 더 높은 벽을 쌓아갈 뿐 차이를 존중하면서 차별하지 않는 세상으로 가는 길은 더 멀어지는 듯합니다. 원칙과 신뢰보다는 특권과 반칙이 횡행하고, 공정과 투명보다는 불공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대화와 타협보다는 고집과 배타가 일반화되고, 자율과 균형발전은 실종되고 있습니다. 군사적 충돌이 되풀이되는 서해안을 평화협력지대로 만들려는 지혜를 생각하기보다는 증오와 긴장의 바다로 유지하려는 세력의 목소리만 커지고 있습니다. 개성과 금강산을 교류와 협력, 상생과 해원의 출발지로 가꾸어가기보다는 분단과 대립의 종착지로 되돌려놓으려는 시도만이 눈에 띕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하기는커녕 점점 더 동이불화(同而不和)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권력인 대통령과 맞짱 뜨고 싶어하던 젊은 검사들의 기개는 보이지 않고, 승진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비굴한 권력의 모습과 음험한 거래만 보일 뿐입니다. 정권이 바뀐 지난 몇 년 사이 데모크라시(민주주의)는 찾아볼 수 없고, 스노보크라시(속물이 지배하는 가짜 민주주의)만 횡행하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시장과 국가권력이 인간의 가치를 놓고 균형을 이루는 민주주의”를 가장 바람직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치권력이 비대해지면 생활과 인권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언론이나 시민사회의 견제가 필요하고, 시장이 권력화되는 걸 국가가 견제하되, 그것들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연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장이 국가권력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 되었고 언론도 스스로 시장권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가치가 존중되는 세상의 꿈

이제는 그의 말대로 ‘깨어있는 시민의 각성된 힘’ ‘조직화된 힘’ ‘소비자로서의 주체적 자각’이 아니면 인간의 가치가 존중되는 세상으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노무현은 우리 곁에 없지만 노무현의 가치, 노무현이 이루고자 했던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리가 한 방울의 맑은 물, 사회의 진보를 향해 깨어 있는 물줄기가 되어 멀리까지 가고자 하는 각오가 있어야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한 선사의 말씀처럼 우리는 물이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듯(水流元入海) 이 세상에 왔고,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듯(月落不離天) 이 세상을 살다가 가는지 모릅니다. 그도 그렇게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 왔고, 이 하늘 아래 있으리라 믿고 싶은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