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0-07-14 18:27:3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141827345&code=990308
[정동칼럼]좌파의 대량생산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분명 의도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지난 2년 반 동안 이명박 정부가 가장 부지런히 해낸 것은 좌파의 대량생산이었다. 좌파라는 단어는 그 쓰임새가 워낙 폭넓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두면 스스로 좌파인지 아닌지 규정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이 정부는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편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주었다. 좌파 내부에는 그 사상적 지류 또한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노선투쟁이라도 있을 법한데, 워낙 좌파 딱지를 남발하다 보니 좌파 사상 따위를 고민할 필요조차 없이 좌파 정체성을 공유하는 거대한 시민적 공동체가 생겨나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좌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에 떠밀려 좌파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현 정부, 비판만 하면 ‘딱지’ 남발
그 천편일률적인 과정은 이렇게 진행된다. 우선 건전한 시민의 상식에 반하는 정책들이 무리하게 진행된다. 4대강, 세종시 수정안, 언론장악 등이 대표적이다. 당연히 비판자와 피해자가 속출하게 마련이다. 이들에 대해 공안통치를 방불케 하는 뒷조사와 무리한 인권침해가 이어진 끝에 사건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공론화된다. 당연히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고 사건 자체를 부정하거나 몰랐다고 하면서 발뺌한다. 이 대목쯤에서 여당 정치인이나 고위관료가 나서서 비판자와 피해자를 좌파라고 쏘아붙인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김미화씨 사건이 한 예다. 처음에는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믿고 싶어 하지 않았던 그가 어떤 계기에서 나름의 심증을 가지게 되고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명예훼손에 의한 고소였다. 그는 마침내 트위터에 “경찰서에 불려간답니다. 대한민국 만세”라는 글을 남긴다. 글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공영방송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보았다고 해서 고소를 당해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국가의 자격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의식했든 못했든, 이 순간 그는 좌파로 다시 태어난다.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든, 이번의 경험은 일생동안 그의 생각과 행동을 일정 부분 규정할 것이다. 이번 사건도 그런 일 없다는 KBS의 주장과 여당 의원이 피해자를 쏘아붙이는 공식을 따랐음은 물론이다.
돌이켜보면 80년대 군사독재정권은 의도하지 않게 386을 만들어냈다. 386세대의 대학시절, 독재자들이 풀어놓은 전경들은 길 가는 여학생을 공연히 붙들어 세워놓고 검문을 한다는 핑계로 소지품을 뒤지며 시시덕거렸다. 멀쩡한 학생을 고문으로 죽여놓고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댔다. 악몽 같은 일상의 경험들은 사상보다도 훨씬 강력한 것이어서, 중장년이 된 지금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불심검문과 고문이 부활했다는 소식에 그들은 치를 떤다.
지방선거 참패서 교훈 못 얻었나
이 나라 보수정치의 핵심가치인 안보와 경제성장은 불행히도 전쟁과 가난의 경험이라는 트라우마에 의존한다. 지금의 20~30대는 이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운 첫 세대이자, 이 나라 역사상 가장 잘 교육받고 가장 국제화된 세대이다. 당연히 그들은 한국적 민주주의나 한국적 인권이 아니라 국제적이고 보편상식적인 기준에 입각해 사태를 판단한다. 이 대목에서 이명박 정부는 절묘하게 386세대와 청년세대를 묶는 공감대를 만들어주고 있다. 386세대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상적 인권침해는 젊은 세대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몰상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참패로 끝난 이번 지방선거는 세대 분기점이 50대로 올라간 최초의 선거이기도 하다. 정권에 떠밀려 대거 탄생된 좌파가 어떻게 전통적인 세대의 벽까지도 뛰어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 셈이다. 아직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좌파 대량생산의 공식을 계속 따른다면, 지금 좌파 딱지 붙이기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한줌도 안 되는 우파”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좌파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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