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8월 23일 마리선녀 씀 -
모닝 타임
출근하여 차에서 내리려는데 맞은편 옷가게에서 손짓을 한다. 아주머니들로 꽉 찬 그곳은 참새방앗간인 것 같다. 참새가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옷가게는 항상 아주머니들로 북적인다.
오늘은 나를 정식으로 초대한단다. 때마침 나의 주차 장소가 옷가게와 마주보고 있으니 거절하기가 어렵게 됐다. 고추축제와 관련한 일감과 몇몇 작업에 대해 출근 전부터 나의 머리는 복잡하고 이미 일정에 대한 시간 배정이 되어 있어 부담감이 들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몇 차례 그들의 요청을 뒤로 미뤘던바, 마음 한 켠 늘 죄송했었는데 오늘은 함께 어울리기로 했다.
4평 남짓 옷가게는 시골 아주머니들의 눈요기를 자극할 만한 웃들이 화려하게 걸려있고, 2년 된 선풍기는 모처럼 온 초대손님을 위해 특별 배려로 마리선녀에게 고정시켰놨다. 얼마지나지 않아 고장이 났는지 멈추고 말았지만 무더운 날씨임에도 오가는 대화는 의외로 신선하고 유쾌하고 통쾌하고 재미있었다.
40대 후반과 50대 중반, 중년의 나이에서 느껴지는 삶의 애환이 입으로 쏟아져 나온다. 디자인 작업의 성격상 도시에서나 이곳에나 거의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나는 이런 모임이 조금은 낯설고 어색하다. 언제 올 지 모를 손님에 대한 기다림에 익숙하기도 하려니와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여인들끼리의 모임에 합류하게 되어 내심 아줌마들의 수다가 기대 된다.
이야기의 주제는 중년의 여인으로 살아오면서 느낀 남편에 대한 기대와 실망과 또 다른 형태의 기대가 주류를 이룬다. 꿈 많던 소녀 시절을 그리워하는가. 반백의 머리에 알록달록 꽃무늬 티셔츠와 굽 높은 슬리퍼, 활달한 성격들, 여유만만한 웃음과 그 뒤로 느껴지는 기대감의 상실과 포기, 끝내는 남편들에 대한 초월된 이해 및 아량을 매일 모닝타임으로 풀고 있다. 아릿함이 느껴진다.
"울 남편을 5억에 내놓습니다."
"남편을 사세요."
그 옆의 여인, "저는 1억을 깎아드리겠습니다."
"싫다구요?"
다른 여인, "그럼 그냥 거져 드립니다."
"저는 첩이 꿈입니다."
"애인이 꿈이예요."
"꿈이 재혼..."
"뭐라구요? 두번을 묻고서야 "재혼" 라는 것을 알아 들었다. 옷가게 아줌마의 꿈이 재혼이란다. 내가 알아 듣지 못하니 다들 합창하듯 "재혼"이라고 내게 소개한다. 이미 이들끼리는 삶의 무게를 모두 털어놀수 있는 친근한 사이임을 알겠다. 그런데 '이룰 수 없는 꿈이야' 라고 덧붙여 설명한다. 여인들의 마음이 보인다. 또 예전에는 장사꾼이 정말 싫었노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이 장사꾼이 되어 있더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그 웃음이 슬프다.
내게도 묻는다. 남편을 5억에 팔겠냐고. 시세가 그렇게 올랐냐고 했더니 박장대소를 터트린다. 주변에 조사를 해봤더니 딱 2명의 여인이 절대 안 팔겠는 결과가 나왔단다. 이유는 열심히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떡집 아저씨와 신발가게 아저씨가 팔고 쉽지 않는 남편이다.
왜 이런 유머가 유행하고 있을까. 긴 세월 함께 살아온 남편을 왜 경제가치의 대상으로 삼아 즐거워 할까.
현실의 고달품과 미래에 대한 절망, 과거에 대한 그리움, 곱디 고운 청춘들의 꿈이 결혼과 함께 물거품이 되어버린 지금, 보상적인 그 무엇이 필요했던 것 같다. 현실과 거리가 먼 해괴한 꿈일지라도, 고달픈 현재의 입장보다 도덕적 비난의 대상인 첩과 애인이라도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현실 도피적 대안인것 같다. 또 다른 꿈으로 스스로를 위안한다.
이들의 진심은 무엇일까. 삶에 대한 경제적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 어렴푸시나마 느껴진다.
모닝타임은 비슷한 처지와 입장들의 모임인 것 같다. 서로에 대한 삶의 애환을 털어 놓고 위로와 이해로 무게를 덜고,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아 삶의 활력을 얻고 있다. 아직 마땅히 대화 상대가 없었던 나에게 좋은 공간이 될 것 같다.
부부로 살아온지 20년을 넘기거나 가깝게 둔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이 담겨 있다. 기대와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희망과 꿈을 키워가고 있는 듯 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 이미 허상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한 개씩의 꿈을 안고 살아간다. 대리만족의 차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