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학술>2008.10.12 10: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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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동체‧지구화‧여성신학*
김애영(한신대 신학과 교수‧여성신학)
Ⅰ. 시작하는 말
나는 이 글에서 생명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생명 개념에 대한 다양한 규정에 대한 이론적 모색을 논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오히려 나는 지구화가 초래하는 세계 불평등과 빈곤, 사회적 차별과 배제, 생태계 파괴에 직면해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힘겨운 고투에 집중함으로써 생명공동체의 격렬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 교회와 신학이 시급히 회복해야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함을 역설하고자 한다. 물론 교회와 신학은 생명공동체의 파괴 현상에 대해, 특히 지구화와 관련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우려 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너무도 미미하여 세상에서 외쳐지고 있는 거대한 소리에 압도되어 미세한 소리로 간헐적으로만 들려지기 때문에 거의 무시되고 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의 함성이 다 표현하지 못하는 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의거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세계에 공포함으로써 불의한 세계를 궁극적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야 하는 과제를 거듭거듭 수행해야 하며, 이 논문은 이러한 과제의 일환이다.
Ⅱ. 몸말
1. 생명 공동체를 위협하는 “문제들의 지구화” 현상
새로운 세상과 새 천년의 비전을 꿈꾸기에는 너무도 각박하고 혹독한 상황에 떨어져 있는 나라들이 전 세계에 널려 있지만 몇 년전 인류는 새 천년 맞이로 온통 법석을 떨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21세기 초입에 들어선 지금, 그 우울했던 전망이 전혀 근거없는 비관론이 아니라 절박한 현실임이 하나둘씩 입증되고 있다. 지난 여름 유럽은 일찍이 겪어 보지못한 살인적 폭염으로 수많은 사망자, 특히 홀로 사는 수많은 노약자들이 사망했는가하면, 우리나라는 거의 매 주말마다 끊이지 않은 비로 인하여 이제 한반도는 아열대 기후로 바뀌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것은 우연한 자연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생태계 파괴의 결과로, 즉 인간에 의한 생태계 파괴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장개방에 있어서 농업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최대의 약체에 속하는 우리나라가 소위 ‘도하 의제’(Doha Agenda)에 의해 선진국 조건으로 농산물 시장을 개방해야하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우리 농업 현실에 맞서서 세계무역기구(WTO) 제5차 각료회의가 열리고 있던 2003년 9월 멕시코의 칸쿤에서 농민 운동가 이경해씨가 자결로 항거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우리는 미국에 의한 이라크 침략에 의해 한 주권국가가 어떻게 능멸 당하고 있으며,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이라크 민중들이 어떻게 뿌리째 뽑혀 힘겨운 생존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한반도 핵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북미간의 공방과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적 태도는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지구촌 전체를 보면 인구 폭발이 전쟁보다 무서운 기세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저출산과 인구의 고령화로 국가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카드 빚에 몰린 가족들의 동반자살과 자식들의 카드 빚을 대신 갚아주고 자살한 부모들, 빚에 몰려 신체 포기각서를 써준 젊은 여성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신용불량자 300만명, 자살하는 사람들이 하루 평균 37명, 비정규직 노동자 800만명에 관한 뉴스는 이례적인 것이 아닌 너무도 일상적인 우리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으로 받아드려지고 있다. 노동자들에 의한 노동파업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됨에 따라 잉여노동력에 의한 각국의 실업문제는 ‘자본의 파업’ 문제를 어떻게 돌파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렇듯 지금 지구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멸절의 위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날로 심화하는 전지구적 차원의 물질적 불평등 문제,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의 심화와 빈곤의 확산, 중산층의 붕괴와 사상초유의 실업율 현상들은 전 인류에게 무자비한 경쟁만을 강요하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를 맞아 전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중병의 징후들로서 인간공동체의 파편화를 심화‧가속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기, 토양, 물, 동식물에 대한 남용과 오용에 의해 단 하나뿐인 지구의 기본적인 생명체계 자체의 목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가 그 어떤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은 줄을 잇는 궁핍한 자들의 자살행렬과 인간의 탐욕에 의해 이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멸종의 위기에 처한 수많은 생명체에 대한 우리의 최소한의 예의요 배려일 것이다.
김여수는 한 논문에서 20세기의 마지막 부분은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말로 하자면 “해체, 불확실성, 위기”의 시대이며, 불확실성과 위기의 첫 번째 표징들은 1970년대 초의 첫 번째 오일쇼크를 수반했던 생태학적 위기로 나타났다고 진단한다. 그는 여러자료들을 동원하여 다음과 같이 “문제들의 지구화”(The Globalization of Problems)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물결에 예외 없이 포섭된 우리의 사회현상에도 거의 무리 없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 통제되지 않는 인류의 확산
* 사회적 혼돈과 분열
* 사회적 불의
* 기아와 영양실조
* 만연된 빈곤
*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
* 인플레이션
* 국제 무역과 금융 붕괴
* 보호무역주의
* 문맹과 시대착오적 교육
* 젊은이들의 반항
* 소외
* 통제되지 않는 도시의 만연 혹은 확장과 쇠퇴
* 범죄와 마약
* 고문과 테러리즘
* 법과 질서의 무시
* 원자핵의 어리석음
* 제도들에 있어서의 질병과 부적합성
* 부패
* 관료화
* 환경의 악화
* 도덕적 가치의 하락
* 신앙의 상실
* 이상의 문제들의 이해의 결핍과 이 문제들의 상호관련성 이해의 결핍
‘지구-시장 경제’(global-market economy) 혹은 ‘시장화’(marketization)의 성장이 초래한 바, 세계는 균질화 세력들에 의해 휩쓸려 있다는 것을 ‘맥도널화’(McDonaldization)이라고 칭하는데, 이것은 차이와 다양성이 동일성 혹은 일률성(sameness), 표준화(standardization), 관료적 합리성(bureaucratic rationalism)에 의해서 분쇄되는 것을 의미한다. 김여수가 소개한 저 ‘공통적인 지구적 문제들’의 목록들을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 터이지만, ‘맥도널화’라고 칭할 만큼 전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세계적, 지구적 공통 현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김여수가 소개한 저 문제들의 나열된 목록들은 도대체 저러한 현상들이 왜 그리고 어떤 세력들에 의해 야기되었는가하는 것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기독교 윤리학자 래리 라스무센(Larry Rasmussen)은 자연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지구화의 세 물결들이 있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 첫 번째 물결은 정복, 상업, 기독교, 유럽에 기초된 문명화의 전파를 지닌 식민화였으며, 두 번째 물결은 전후 개발(post-war development)이었다. 이때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경제적 진보, 발전된 테크놀로지라는 서구적 삶의 방식이 다른 사회들을 위한 표준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지구화의 세 번째 물결 속에 있는데 이는 탈냉전적 자유무역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L. 라스무센이 지구화의 세 물결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첫 번째, 두 번째 지구화 물결들의 여파는 초국적 기업식민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오늘의 지구화 물결과는 비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 초에 신학자 H. 골비쳐(H. Gollwitzer)는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인류 최대의 혁명이라고 간파함으로써 그는 전 지구전 규모로 발생하고 있는 무차별적 자본의 확산과 침투, 투기적 금융자본의 과잉 팽창, 초국적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그물망을 수반한 오늘의 자본주의 문제를 이미 통찰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지난 1백년 동안 지금처럼 높은 실업률을 기록한 적이 없었고 소득이 지금처럼 불평등하게 분배된 적도 없었으니, 이는 모든 경계를 넘어 지구촌을 대상으로 하는 무역과 외국투자는 엄청나게 증가하나 그 동안 세계의 빈부격차간 소득의 차이는 일찍이 인류가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극단적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초래한 ‘야만적 자본주의’ ‘패권적 자본주의’ 경제를 미국의 경제학자 케네스 E. 볼딩(Kenneth E. Boulding)은 ‘카우보이 경제’(cowboy economy)라고 부른다. 이러한 경제체제에 의해 초토화된 중남미의 생태파괴 실태-- 미국의 맥도널드 패스트 후드 체인점에 사용될 육류를 값싸게 공급하기 위해 중남미 지역의 엄청난 범위의 산림을 황폐화 시켜 만든 목초지 조성에 의한 생태계 파괴 현실을 I. 헤드스트룀은 중남미의 ‘햄버거화’(hamburgerization)라고 부르는데--를 다시금 거론하는 일 자체가 이미 진부한 일로 치부될 정도이다. 동구권의 몰락이후에 지정학적 경계를 넘어 세계를 무대로 최대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초국적 기업들이 주도해가는 오늘의 지구화 물결은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와 국민국가의 해체, 과학기술, 특히 정보통신 분야의 기술혁신에 의거해 있다. 이러한 경제 전쟁과 시장지배의 일차적 희생은 노동자, 특히 정보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단순 노동자들, 경쟁력을 상실한 노인들, 장애자들, 빈민들등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자들이며, 지구화의 수혜자들은 각 나라의 정부안에 있는 초국적 기업들의 동맹자들, 그리고 새로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게된 WTO(세계무역기구), IMF(국제통화기금), IBRD(국제개발은행)과 같은 국제기구에 종사하는 세계 무역관료들이다. 충천하는 자본에 의한 새로운 계급전쟁 혹은 갈등의 격렬화 양상이 우리의 생명 공동체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사랑이란 위장을 통해서 전달된다는 것이다. 사귐의 한 본질적 형식이 ‘식탁의 사귐’이니,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발을 같은 식탁 아래로 뻗고 있는 한 가족의 식구들처럼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끝없는 탐욕에 의해 이러한 가족의 사귐을 가능케 했던 식탁은 이미 오래 전에 뒤엎어졌고 소수의 승리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기에 이르른 지금 전세계의 거대한 빈곤층은 아무런 대책 없이 잔혹한 시대에 내몰려 있다.
2. 지구화에 대항하는 지구적 ‘위대한 거부’ 운동: 생명공동체를 향하여
필리핀의 제3세계 여성신학자 메어리 존 마난잔(Mary John Mananzan)은 한 논문에서 지구화가 우리를 가장 허약하게 만드는 효과들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아무런 다른 대안이 없으며,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 항복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단지 그러한 기존의 것에서부터 최선의 것을 만들어야한다는 태도라고 말한다. 지구화에 대한 어떤 대안이든 이러한 태도를 돌파해야하는데, 우리는 우선 지구경제의 가치들에 대하여 ‘아니다’ (No)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거부’(Grosse Verweigerung)를 요청하는데 그 위대한 거부를 가지고 마르쿠제는 1960년대에 이미 도전을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구약학자 W. 브르거만이 “예언자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것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H. 마르쿠제가 1955년에 발표한 『에로스와 문명』에서 그는 유토피아와 저항과 보편 개념의 상관성을 설파했는데, 그는 1960년대 동안,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갈 경제‧사회 체제와는 절대로 손잡지 말라는 명령의 의미로 ‘절대적 거부’라는 것을 주창했다. ‘절대적 거부’가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지만, 그는 예술과 상상력의 세계에서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는 것이다. 편협한 현실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상상과 환상의 세계에서 진리를 키워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분석의 결과를 ‘위대한 거부’라는 한마디로 요약하였다고 한다. 위대한 거부는 불필요한 억압에 대한 저항이요, 궁극적인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마르쿠제는 ‘위대한 거부’라는 단어를 A. N. 화이트헤드로부터 빌려왔다. 화이트헤드는 예술과 비평에서 보편개념이 특수한 경우를 포괄하며 초월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별성과 다양성을 찬양하는 오늘의 포스트모던적 사고가 초래한 보편 개념에 대한 무분별한, 노골적인 거부와 불신이 지닌 함정을 지적하면서 화이트헤드와 마르쿠제의 ‘위대한 거부’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러셀 자코비(Russell Jacoby)는 “ ‘위대한 거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위대한 거부’를 본능적으로 저항의 역사적 근거로 받아들인다. 억압적인 사회와의 협조를 거부함으로써, ‘위대한 거부’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신념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반대로 정치적으로 혁신을 주장하더라도 보편 개념을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열망을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구 소련의 해체로 야기된 자본주의 단일체제로 인하여 인류는 이제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어떤 종류의 대안도 더 이상 논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상태에 떨어져 ‘역사의 종말’의 추종자들과 ‘야만적 자본주의’의 승리자들에 의해 억눌려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몰트만은 단테가 지옥의 입구에 써 붙인바, “이곳에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리시오”라는 문구에 의거해서 지옥이란 바로 희망을 상실함을 의미한다고 말하였다. 과연 우리는 거대한 맘몬적 지구화에 짓눌린 채 모든 희망을 상실하고 말 것인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어떤 양상으로 지구화되어 있는가의 목록들을 매우 건조하게 제시한 김여수는 1970년대와 80년대 동안 내내 국제적인 컴뮤니티는 진전하고 있는 위기의 지구적 차원을 헤아리기 시작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국제적 노력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의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동적 지구적 문제들”에 직면하는 상이한 사회들과 문화들 사이에서의 협력을 위한 기초로서 “지구적 시민 윤리”를 위한 지구적 통치 위원회(the Commission on Global Governance)의 보고서 “우리의 지구적 이웃”(Our Global Neighborhood)이 1995년에 출판되었다. 그러한 지구적 시민 윤리는 모든 문화들과 종교 전통들에 의해서 공유된 핵심 가치들의 최소치(minimum)를 포함하며, 이러한 핵심 가치들에 기초한 시민법규를 규정하는 권리들과 책임들을 포괄한다. 이 가치들은 생명, 자유, 정의, 평등, 상호존중, 배려, 통전성에 대한 존중을 포함한다. 또한 저 보고서는 이러한 핵심 가치들에 기초한 권리들과 책임들의 목록들을 제시한다. 그 권리들이란 안정된 삶에 대한 권리, 공평한 대우, 공정한 생계를 벌 수 있는 기회, 모든 수준들에서의 통치에의 참여, 정보에 대한 동등한 접근, 지구적 공동사들에 대한 동등한 접근들에 대한 권리들이다. 책임들이란 타자들에 대한 우리 행동들의 영향을 고려하는 것, 젠더 평등을 포함해서 평등을 증진시키는 것, 미래 세대들의 이해들을 보호하는 것, 지구적 공동사들을 보호하는 것, 인류의 문화적, 지적 유산을 보존하는 것, 통치에의 활동적 참여자들이 되는 것, 부패제거에 사역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19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종교회의에서 채택된, 그리고 세계적인 가톨릭 신학자 H. 큉에 의해 초안된 “지구 윤리를 향한 선언”(Declaration toward a Global Ethic)의 출발은 종교적 가르침 안에 있는 컨센서스는 오늘의 지구적 문제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인식이라는 것이다. 저 선언은 세계종교들 안에서 발견된 폭넓은 도덕적 지침들을 담고 있는데, 그 지침들은 1) 비폭력과 생명에 대한 존중 2) 연대와 정의로운 경제 질서 3) 관용과 진실성의 삶 4) 평등권들과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파트너 쉽의 문화에 대한 결단이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의 국제적 노력들을 담은 문서들이 김여수에 의해서 소개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공동적 지구적 문제들’로 대두한 지구화에 대항하는 보다 더 직접적이며 행동적인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바, 생명 공동체를 향한 ‘위대한 거부’ 운동에 집중해 보자.
지구화에 반대하는 국제시민운동이 1999년 6월24일부터 26일까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1998년 6월에 창립된 시민원조 토빈세를 위한 실천행동이라는 아탁(ATTAC)이 주최한 것으로서 70개국 대표들을 포함하여 약 1천여명이 참가했다. 1999년 11월 30일 미국 시애틀에서 세계무역기구(WTO) 3차 각료회의가 뉴 라운드 혹은 밀레니엄 라운드라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한 모임으로 열렸으나 전 인류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는 WTO 에 대항하는 반대시위가 전세계에서 일어났다. 이 WTO회의에 앞서서 10월 22일 프랑스에서는 유명 영화배우 쥘리엣 비노슈, 이자벨 아자니, 미테랑 전 대통령 부인 다니엘 미테랑 등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WTO 에 반대하는, 브레이크 없는 지구화 과정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또한 11월 1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국제 민중행동”이라는 단체의 회원 20명이 댄 글리크먼 미 농무장관의 WTO 본부 방문에 맞춰 WTO 본부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WTO 가 사람들을 죽인다, WTO를 해체시키자!(WTO Kills People, Kill The WTO!)라는 현수막을 건물 밖에 내걸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자전거 자물쇠를 이용해서 청사내 주요 계단 단간에 자신의 몸을 매다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민노총, 사회진보연대, 민예총 등 20개 단체로 구성된 ”투자협정 밀레니엄 라운드 반대 민중 행동“이 서울 명동 한 복판에서 제1차 대중 캠페인을 벌였으며, ‘밀레니엄 라운드 반대 행동주간’ 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벌인바 있다.
이처럼 세계 80여개국 1300여개 단체가 뉴 라운드 혹은 밀레니엄 라운드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나섰다. WTO 시애틀 각료회의는 ‘21세기로 넘어가는 다리가 어떻게 건설되고 누가 건널지’를 규정하게 되는, 따라서 지구상의 수많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중들을 인류로부터 영원히 따돌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중대한 회의다. 이에 대한 국제 시민‧민중 항거운동은 WTO 웹사이트의 디자인을 일부 모방한 전세계적으로 수 백개에 이르는 WTO 반대 웹사이트를 이용한 사이버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농민, 노동자, 학자, 소비자, 사회운동가,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들이 불의한 세계경제질서에 대한 항거운동에 나서고 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탄생을 고대하면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고 함께 진통하는 어머니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어코 민중 생존권을 박탈하려는 거대한 골리앗과 같은 위세로 맘모니즘(mammonism)의 세계 자본주의 구조를 대표하고 있는 WTO에 맞서서 그 불의한 방향을 바꾸기를 촉구하는 세계민중들의 항거는 “우리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한 곳으로 모아질 때, 밀레니엄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전세계 민중이 초국적 기업에 앞서 건널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 1968년 5월 프랑스 학생운동에서 시작된 68혁명에 관한 연구자,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의 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저는 21세기에는 68혁명보다 더 세계적이고 더 동시적인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장만능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전파의 일등공신인 세계화 혹은 지구화는 그것의 파열을 이룰 ‘혁명의 세계화‧동시화’를 이루는 기제로도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세계화‧동시화’의 표징들로 읽어 낼 수 있는 사건들을 좀 더 살펴보자. 세계적인 생수로 그 명성이 알려진 프랑스 국경도시 에비앙에서 경제선진 8개국 연례 정상회의(G8)가 개막된 2003년 6월1일에 맞추어 에비앙에서 제네바에 이르는 길은 전세계에서 몰려든 약 10만명 (경찰 추산 5만여명)의 대규모 반 G8 시위대로 채워졌다. 이 집회는 이라크전 이후 이른바 ‘반지구화‧반전’운동 진영이 세계적 차원에서 조직한 첫 대규모 집회였다. 약 1천만명 이상이 전 세계 주요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한 2월 15일 이라크전 반대시위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반 G8 시위 집회는 이라크전 이후 반지구화‧반전운동의 향배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한다. 2월15일 반전 시위가 ‘전쟁반대’를 기치로 내걸었다면, 이번 행사조직위원회는 ‘부시를 막아라’(Stop Bush)를 주된 구호로 채택하였다. 이번 G8 반대집회 주최측은 6월1일의 시위 이전에 스위스의 제네바와 프랑스의 안마스에서 각종 토론회를 조직했다. 2001년까지 G8 반대집회의 최대 의제는 외채탕감이었으나 9.11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면서 G8 회의는 경제 중심에서 대테러전쟁과 군사안보로 중심축이 기울었다. 이에 따라 G8 반대집회 성격도 달라졌다. 이제 각종 토론회에는 기존의 지구화 관련 경제용어에 군사용어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예컨데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ATTAC) 프랑스 지부는 ‘금융 불안정성, 무장한 지구화 그리고 지구적 지배구조의 위기: 다른 세계는 가능한가?’라는 주제아래 경제전쟁, 사회-생태전쟁 및 군사전쟁으로 나누어 토론회를 조직하였다. 이 토론회의 참가자들은 “미국은 물론 G8 국가 대다수가 최대의 무기 제조‧수출 국가”라고 지적하면서 이라크 전쟁을 전후해 군사적 측면에서의 지구화가 부각되면서 경제선진국, 특히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대한 대응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올해 9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에 앞서서 이에 대응하는 전 세계 수 백개의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이 개최한 여러 토론회에서 채택한 대표적 구호는 “부시를 막아라” 와 함께 “칸쿤을 탈선시켜라” (Derail Cancun)라는 구호였다. 2004년 G8 정상회담이 미국에서 열릴 예정인데, 12월 예정인 미국의 대선을 불과 3개월 정도 앞두고 개최될 내년 G8 정상회담에는 미국 안팎에서 훨씬 큰 규모의 시위대가 결집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 세계 수 백개의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의 토론기간 중 많은 이들이 “미국의 정책이 전 세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고려할 때, 다가오는 2004년 말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단순히 미국의 유권자들에게 맡겨둘 수만은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 야만적 자본주의의 승리에 의해 인류는 이제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어떤 종류의 대안을 논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상태에 떨어져 있는 것 같으나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구화에 대한 ‘위대한 거부’를 통하여 ‘혁명의 세계화‧동시화’의 조짐을 적극적으로 읽어내고 행동으로 이를 관철시켜 나가고 있으니 이는 세계의 양심이 살아 있다는,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세상 한복판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아닌가!
16세기 이후의 세계사를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관점에서 고찰하여 세계체제론을 주창하는 미 뉴욕 주립대의 이매뉴엘 월러스틴 교수는 이익추구라는 경제 행위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자본의 전지구화는 자본주의의 태생적 특징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종말을 내다보는데 자본주의가 앞으로 50년을 넘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예견한 바 있다. 이러한 조짐에 대한 사례를 위해 나는 세계교회연맹 협력과 증언부 총무인 박성원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신자유주의 제국의 지구적 차원의 경제적 폭력이 이에 맞서는 지구적 차원의 폭력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논하면서, ‘제국’ 세력과 이에 맞서는 세계공동체의 투쟁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특히 그는 신자유주의 제국의 붕괴조짐이 제국의 1차 수혜자들에게 불안을 가져다주고 있는데 그 붕괴의 조짐은 다음과 같은 세 분야에서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금융시스템은 제국의 가장 강력한 통제 수단들 중의 하나인데, 주가 몰락, 회계 부정등 금융의 불안정성과 금융사기로 인하여 세계 금융시스템은 치명적 약점을 지닌 것으로 드러났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이 이상 기후의 첫 희생자들인 반면에 부자들은 지금가지 이상 기후의 고통을 절실히 느끼지 못했으나, 북미와 유럽에서 최근 발생한 강력한 해일과 폭풍우, 극심한 가뭄과 홍수등은 부자들과 힘있는 자들의 삶도 위협하기 시작했다. 세째, 테러와 군사주의이다.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 사건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그 어느 곳도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남겼는데, 제국은 소위 테러리스트들의 소탕과 테러로부터 세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응징으로 인해 세계가 테러로부터 더욱 불안하게 되었다는 세계의 목소리가 대두하고 있다. 박성원은 엘리트의 세계화 혹은 지구화는 궁극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는 시스템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는 것, 제국의 방법은 점점 더 자기 기만적, 비이성적으로 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세계의 지배 세력은 세계를 현재 보다 훨씬 파괴적으로 몰고 갈 수 있다고 그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제국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간파하면서, 지구 시민사회가 이러한 파괴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일을 미룰 수 없는 긴급을 요하는 일이라는 말로 글을 맺고 있다.
3. 지구적 지평을 확보해야 하는 여성신학
페미니즘의 제1차 물결로 칭해지는 19세기의 여권운동은 여성이 자신들을 남성들과 동일한 역사의 주체로 확인하고 새로운 해방적 행위의 주체로 제시하도록 격려했다. 이것은 도구적 이성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계몽주의 이래의 모던적 사고의 결과이다. 1960년대 이래의 여성해방운동이라는 페미니즘의 제2의 물결운동은 ‘여성의 경험’에 호소하면서 여성이라는 보편적 카테고리로 모든 여성들을 포함한다는 가정 하에서 여성평등의 기치를 내걸었다. ‘여성’을 보편적 카테고리로 상정한 모던 페미니즘에 대하여, 우선 흑인 여성해방가들은 남성과 다른 여성을 상정하는 젠더의 정치학(politics of gender)이란 백인 중산층 엘리트 여성들의 거짓된 보편주의라고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1980년대 이래로 여성들은 남성과 다른 여성이라는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혹은 이항대립적 틀로 인식되던 성적 주체의 경험을 인종, 계급, 성적 취향, 문화‧사회적 장소 혹은 분할등과 관련된 다중적, 복합적인 것으로 인식하면서 ‘다중적 주체’ 개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각종 포스트주의에 의한 ‘차이의 정치학’이 페미니즘과 결합하여 가히 핵분열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페미니즘의 파편화가 일어났다. 레티 러셀, 로즈마리 류터, 엘리자벳 피오렌자등이 선도하던 초기 여성신학은 모던 이론적 가정들에 의거해 있다고 한다. 이들의 여성신학에 비하면 핵분열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하는 오늘의 페미니즘의 영향하에서 수많은 여성신학들이 존재하기에 이르렀으니, 현재 미국 여성신학계는 각종 포스트주의가 범람하는 페미니즘의 제3의 물결이라는 변혁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이른바 다원성과 ‘차이의 정치학’(politics of difference) 혹은 ‘차이의 문화 정치학’(a cultual politics of difference)을 주창하는, 다양성과차이에 대한 집중으로 인하여 페미니즘 운동과 여성신학을 추동해 내었던 실천적 역동성의 약화를 우려할 정도로 오늘의 페미니즘과 여성신학의 학문적‧이론적 작업이 성행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E. S. 피오렌자는 흑인 여성들과 제3 세계 여성들과 같은 다양한 페미니스트 공동체들이 각각 자신들의 적극적인 칭호들을 확산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 이러한 시도들이 아카데미와 교회에 있어서 페미니즘의 서로 적대적인 분할화(balkanization)를 유발하는 위험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곽 푸이 란(Kwok Pui-Lan)은 전세계 여성들이 지구 자본주의의 영향들에 직면해 있음을 언급하면서 세계가 지구적 시장 때문에 훨씬 더 함께 결합되어 있을 때 여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의 정치학 (identity politics) 때문에 분리되어 있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피오렌자의 말을 인용한다.
소위 2/3 세계에 대한 점증하는 신자본주의 착취와 ‘지배의 정보과학’의 폭발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에 대한 증가하는 지구적 폭력에 직면해서, 페미니스트 이론
은 포스트모던적 ‘언어에서의 주체’와 그것의 영구적 해체, 지구적 분산, 원자화
하는 지역화로써 그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생산의 문화-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영역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담론과 분석적 틀을 발전시켜
야 한다.
이처럼 피오렌자는 ‘서구 철학에 있어서의 언어에로의 전환’, 이것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는 보편주의에 입각한 거대담론들의 붕괴, 이로 인한 무력감들을 불러일으킨 각종 포스트주의들의 문제들을 지구화 문제에 직면해서 비판하고 있다. 나는 오늘의 세계가 어쩔 수 없이 포스트 모던적 양태를 지닌다 해도 자본주의적 시장 통합과 결부된 각종 포스트 담론들이 지닌 문제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새로운 인터내셔널리스트로 떠오른 여성해방운동가들과 여성신학자들은 지구화라는 거대담론을 외면한 채 ‘개체화’의 급진적 성 정치에만 매몰되어 있을 수 없다. 한국에서 전개된 여성신학과 운동들은 싫든 좋든 해방신학, 민중신학, 통일신학과의 연관성 혹은 맥락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우리의 분단극복의 과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거대담론의 차원을 지니고 있으며 이점이 한국여성신학의 특수성이자 장점이라고 본다. 다양한 그리고 일상적 형태로 여성들( 그리고 남성들에게도!) 에게 가해지는 폭력극복의 의지, 생태계 파괴를 저지하려는 다양한 형태의 항거와 이론적 투쟁, 미국의 일방주의로 인해 빚어지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제국’에 맞서는 평화운동들은 우리 땅이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전개된다해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초국적이며 전지구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우리가 추구하고 실천해야할 여성신학은 지구적 지평의 성격을 지닌다. 민족‧민중‧여성 해방운동이라는 커다란 시야를 올바로 확보하면서 어떻게 우리는 우리 지역에서 또 나의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올바른 실천을 수행할 것인가를 위해 함께 고투해야 할 것이다.
Ⅲ. 마치는 말
나는 지금까지 산업화의 발달, 특히 미국이 주도해 가고 있는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전면화인 지구화로 인한 생명공동체의 파괴 현상과 그 폐해의 거대한 맘몬적 세력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세계시민‧민중세력들에 의한 아래로 부터의 반세계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과정을 예시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오늘의 교회와 신학이 ‘혁명의 세계화‧동시화’의 징조를 포착해내는,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그리고 악한 세력에 대한 ‘위대한 거부’를 시급히 선포해야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음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오늘의 여성신학이 주로 포스트모던 혹은 포스트 구조주의의 이론에 입각해서 보편주의 혹은 거대담론에 대해 마치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폐기해 버리는 1980년대 이래의 여성학과 여성신학의 개인주의적, 탈정치적 경향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오늘의 잔혹한 지구화의 물결에 대한 저항과 이러한 저항을 중요한 신학적 과제로 설정하는 것은 여성신학이 성차별의 불의를 고발하고 이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인종차별, 제국주의, 식민주의, 생태계 파괴에 대한 지구적 저항의 지평을 확대‧확보해 온 여성신학 본래의 과제에 속하는 것이다. 여성신학, 특히 분단극복의 과제를 짊어지고 있는 한국여성신학은 ‘혁명의 세계화‧동시화’ 의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내다보면서 또한 이러한 역사적 카이로스를 맞이할 준비를 단단히 하면서, 개인주의, 소비주의, 탈정치적 쾌락주의를 전세계에 유포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맞서서 정의로운 그리고 새로운 생명공동체의 삶을 구축해야하는 과제에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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