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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삶>

http://www.sang1475.com.ne.kr/philo/herakleitos.htm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35 - 475)

이성과 파괴의 망치를 든 사나이

 

 

기원전 504 - 501년 사이에 자신의 새롭고도 영향력 있는 철학을 발전시킨 에페소스 출신의 한 귀족은 변화의 모든 과정을 다양성 속의 하나의 제일성(齊一性)으로 묘사하였는데, 그의 명제는 "만물(萬物)은 유전(流轉)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누구도 같은 강물을 두 번 걸어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변화의 개념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강물은 흐르고 또 언제나 변화한다. 왜냐하면 "항상 새 물결이 밀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유전(流轉)의 개념은 강물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포함하는 만물에 적용되는 이치였다. 강물과 인간은 항상 변하면서도 동일성이 유지된다는 매력적인 면을 보여준다. 비록 새 물결이 항상 강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지만, 우리는 '동일한' 강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며, 어른도 어렸을 적 어린 아이와 마찬가지의 동일한 인간이다. 사물들은 변화하며 많은 다른 형상을 취한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항상 동일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내포한다. 이 다양한 형상들과 단일한 지속적 요소 사이, 즉 다자(多者 : the many)와 일자(一者 : the one)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인 제일성(齊一性)이 존재함에 틀림이 없다고 그는, 즉 헤라클레이토스는 주장하였다.

   밀레토스 학파 및 그 추종자들은 사물의 구성 요소들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였으나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사물은 변화하고 변화만이 유일한 실체(實體)이며 물질세계는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물질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물질적 질료로서의 실체를 강력히 부정하였다. 변화를 다양성 속의 제일성으로 묘사하면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전제했던 것은, 변화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어떤 것을 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물질의 제 1 질료서의 탈레스의 물이나 아낙시메네스의 대기를 불이라는 원소로 대치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을 사물의 근본적인 원소로 생각할 수 있게 한 것은, 불이 변화의 과정을 암시해 주는 방식으로 존재하며 작용한다는 점이었다. 불은 일종의 결핍인 동시에 일종의 과잉이다. 즉 그것은 항상 무엇인가를 섭취하면서 동시에 항상 무엇인가를 배출하거나 소모한다. 그러므로 불은 변형의 과정이며 따라서 불이 섭취한 어떤 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될 뿐인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물이나 공기와 같은 실재의 본성으로서의 어떤 기초 원소를 인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근본 원소가 어떻게 다른 형상들로 변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을 근본 실재로 붙잡았을 때, 그는 변화하는 어떤 것을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이미 자신은 변화의 원리 그 자체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 만물이 유전한다는 말은 세계가 하나의 "영원히 타는 불 (ever living fire)"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불의 영원한 운동은 "타는 정도와 연소되는 정도"에 의해 보증된다. 또한 이 "정도"는 타는 것과 연소되는 것간의 일종의 균형을 의미했다. 그는 이 균형을 경제적인 교환의 견지에서 설명하였는데, "만물은 불의 교환이며, 불은 만물의 교환이다. 이는 마치 물품이 금의 교환이며, 금이 물품의 교환인 것과도 같다." 이 교환을 설명함으로써 그는 사물의 본질에 있어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했다. 만일 금이 물품과의 교환이라면, 비록 그것들이 서로 다른 수중에 있긴 하지만 금과 물품은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만물은 시시각각 그것들의 형상을 교환하면서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변화 혹은 유전의 질서 있고 균형 잡힌 과정으로 인해 우주 안에는 안정이 이루어진다. 실재는 마치 동일한 양을 들이마시고 내뿜는 거대한 불처럼 동일한 "정도"를 들여보낸 만큼 내보내며, 따라서 세계 내의 만물의 목록은 언제나 그대로 유지된다. 이 만물의 목록은 사물들의 광범위한 포진을 보여 주는데 그 모두는 불의 또 다른 형상들이다. 유전과 변화는 불의 운동이며 그 운동은 "위로" 아니면 "아래로" 작용한다. 불의 하향은 인간이 경험하는 사물들의 발생을 설명하는데, 불이 응축되면 습해지며, 이 습기는 압력의 조건하에서 물이 되고, 그 물이 응결되면 땅이 된다. 불의 상향은 하향과 반대로 일어나는데 땅이 액체로 변형되며 이 액체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생명이 나타난다. 이 변형의 과정에서는 아무것도 손실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불은 죽은 땅을 살리며, 공기는 죽은 불을 살리고, 물은 죽은 공기를 살리며, 땅은 죽은 물을 살린다."

   불을 통한 만물의 영원한 순환과 변형을 묘사함으로써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의 유일한 근본 재료와 세계 내의 다양한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제일성(齊一性)을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의 불의 개념 이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을 철학의 대지에 내놓았는데, 그것은 곧 보편 법칙으로서의 이성(理性)의 개념이었다.

   변화의 과정은 임의적이고 우연한 운동이 아니라, 신(神)의 보편 이성(logos)의 실현이다. 이 보편 이성의 개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종교적 신념, 즉 만물 중 가장 실재적인 것은 영혼이며, 그 영혼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지혜 혹은 사유(思惟)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신과 영혼에 관해 언급할 때, 개인적인 실체(신)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근본 실재는 불이며, 이 물질적 실체인 불이야말로 그가 말한 유일자(有一者), 혹은 신(神)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범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있어서 만물은 신(神)이며 신(神) 또한 인간의 영혼이나 사물의 일부였다. 지혜가 신의 가장 중요한 속성인 것처럼 인간의 주된 활동 역시 지혜 혹은 사유(思惟)이다. 더 나아가 무생명들 역시 이성의 원리를 내포한다. 왜냐하면 그것들 속에도 불의 원소가 침투해 있고, 신의 속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생각하기에 신은 이성이고 만물에 충만해 있는 유일자(有一者)이기 때문에, 결국 신은 만물을 제일성(齊一性) 속에 가두며 사유나 원리들에 따라 만물을 움직이고 변화하게 하는 보편 이성이었으며, 이 원리들과 사유는 법칙의 본질을 구성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따라서 이성으로서의 신은 만물에 내재하는 보편 법칙 그 자체이며, 모든 인간은 그들 자신의 본질 속에 신이나 불을 지니고 있으므로 사유의 능력을 지니는 한에서 이 보편 법칙을 공유(公有)하거나 분유(分有)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인간의 이성적 본성에 관한 이 설명은 인간의 모든 생각이 신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유일자와 다양성 사이, 즉 신과 인간들 사이에는 하나의 제일성(齊一性)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신에 대해 유사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같은 줄기의 지식을 공유하고 있다. 세계의 다양한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 모든 암석들은 그를 중력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신의 이성을 분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반복하며 살아 있는 세계를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려 기획한다. 인간의 반복과 부조리를 인정한 헤라클레이토스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잠에서 깬 사람은 하나의 질서 있는 세계를 발견한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동안 인간은 항상 그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버린다."

  그렇지만 만일 인간의 영혼과 정신이 신의 일부라면, 헤라클레이토스가 생각이 없는 상태 혹은 무지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잠자는 행위"가 어떻게 인간에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사유하는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이 공유적 세계의 개념, 즉 신의 보편적 이성의(보편적 법칙)의 분류의 개념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철학에 기여한 중요한 공헌 중 하나가 되었다. 스토아 학파의 세계 시민주의의 이상(理想)을 제공한 것도 이 개념이며, 기독교에 의해 선도된 신의 아가페(agape)적 사랑이라는 개념 역시 헤라클레이토스의 공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을 조금씩 변형한 많은 정신적 주조(鑄造)들이 고대 및 중세와 근대의 사상에 편재하여 있으며 거의 모든 자연법 이론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인간은 모든 사물을 관류(貫流)하는 영원한 지혜를 인식할 수 있으면서도 이 지혜에 집중하지 않으며, 따라서 사물들이 자신들에게 나타나는 방식에 대한 이유들을 "파악하고 있지 못함이 증명된다." 인간은 그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단지 세계의 온갖 무질서뿐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뇌하고 괴로워한다. 또한 그들은 선과 악의 존재에 압도당해 왔으며 평화를 갈망해왔다. 그렇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투쟁이 변화 그 자체의 본질이라고 말함으로써 투쟁을 설명하였다. 대립자(對立者)간의 투쟁은 단순히 한 때의 불행이 아니라 만물의 영원한 조건이다. 우리가 변화의 전과정을 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즉, "싸움이란 일반적인 것이며 정의는 투쟁이다. 또한 만물은 투쟁과 필연성에 의해 발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대립 속에 존재하는 것은 일치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서로 다른 것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죽음조차도 불행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기대하거나 상상할 수는 없지만 사후에도 만물은 인간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투쟁과 무질서의 문제를 다루면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줄곧 다음과 같은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즉 만물은 유일자 속에서 그것들의 제일성(齊一性)을 발견하며, 따라서 서로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사건들과 모순적인 힘들은 실재적으로 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사람들은 모순적인 것이 어떻게 그 자체와 조화를 이루고 일치하는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활이나 수금(竪琴)처럼 대립적인 긴장들의 조화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불 그 자체는 대립자간의 이러한 긴장을 보여 주며 실제로 그 긴장에 의존한다. 불은 불 자체의 대립자들간의 수 많은 긴장들이다. 유일자 속에서 만물은 그들의 제일성(齊一性)을 발견하며, 따라서 유일자 내에서는 "상향과 하향이 동일하며" "선과 악이 하나가 된다."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깨어난 것과 잠든 것, 젊은 것과 늙은 것도 모두 동일한 것이거나 마찬가지이다." 대립자의 투쟁에 관한 이러한 해결책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다음과 같은 주요 가정들에 의존한다. 즉 그는 손실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단지 형상만이 변화될 뿐이라는 가정과, 영원한 불은 신의 정향(定向)에 따라 계획된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과, 변화는 대립자들과 다양한 사물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가정했다. 더 나아가 "신에게는 만물이 공평하고 선하며 정의롭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던 이유는 만물이 선하다고 판단하는 어떤 인간적인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철학에 주축을 이루고 있는 사상, 즉 "만물은 하나"이며, 그 유일자는 다양한 현상으로 체현되는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철학은 대부분 소실되었거나 망각된 채, 또는 극히 제한적으로 플라톤과 스토아 학파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그의 사후 2000년이나 지난 다음 다시 소생하여, 변증법의 헤겔 철학과 니체의 사상 속에 강렬하고 열정적인 불꽃으로 타올라 거의 완벽하게 그 가치와 의미를 되찾게 되었다. 고대의 다른 어떤 철학보다 찬탄과 놀라움의 정서적 전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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