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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네이트백과사전

by 마리산인1324 2010. 10. 5.

<네이트백과사전>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i=164358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

 

 

BC 384 마케도니아 근처 칼키디케 스타기로스~BC 322 그리스 에우보이아 칼키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과학자.

 

플라톤과 함께 그리스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로 서양지성사의 방향과 내용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세운 철학과 과학의 체계는 여러 세기 동안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과 스콜라주의 사상을 뒷받침했다. 17세기말까지 서양 문화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였으며 수백 년에 걸친 과학혁명 뒤에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서양사상에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구한 지식 분야는 물리학·화학· 생물학·동물학·심리학·정치학·윤리학·논리학·형이상학·역사·문예이론·수사학 등 매우 다양하다. 가장 큰 업적은 형식논리학과 동물학 분야의 연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학은 이제 낡은 것이 되었지만, 19세기까지는 관찰과 이론 면에서 그의 연구를 넘어선 사람이 없었다. 철학 분야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직도 살아 있다. 삼단논법론은 이제 형식논리학의 작은 부분일 뿐이지만, 그의 윤리학·정치학·형이상학·과학철학 등은 현대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의되고 있다.

 

<생애>

 

개요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필리포스 2세의 아버지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할아버지인 아민타스 3세의 시의(侍醫)였다. 당시 의술은 가업을 잇는 전통적 직업이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의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학교인 리케이온에서는 의술과 실제 의료행위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어릴 때부터 의술과 마케도니아의 궁정생활을 접한 탓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의 영향이 강한 철학사상을 내놓았고, 왕자들과 궁정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여러 번 표현했다.

 

제1기(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 시절)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릴 때 아버지가 죽자 친척으로 추정되는 프로크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고, 프로크세노스는 BC 367년 그를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아카데메이아에 보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에서 20년 동안 있었다. 이 기간은 그의 지적 성장의 제1기였으며, 플라톤과 그의 동료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시기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림없이 아카데메이아의 모든 활동 영역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때때로 수사학 공부에도 몰두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아카데메이아와 경쟁한 이소크라테스 학파에 맞서 글을 쓰기도 했다. BC 348(또는 347)년 플라톤이 죽자 그의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아카데메이아를 이끌었고 그뒤 곧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났다. 아테네를 떠난 동기는 플라톤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불만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으나 이 해석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지인이었으므로 처음부터 학파의 우두머리가 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리포스 왕이 BC 348년 그리스 도시국가 올린토스를 노략질한 뒤에 일어난 아테네의 반(反)마케도니아 감정 때문이라는 해석이 더 그럴 듯하다. 아테네를 12년 동안 떠나 있었던 탓인지 그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의 동료들보다 여행을 함께 한 사람들, 특히 제자이자 동료인 에레소스의 테오프라스토스를 더 높이 평가했다.

 

제2기(여행)

에게 해의 아시아 쪽에 새로 건설된 도시 아소스에서는 그리스의 용병 출신인 아타르네오스의 헤르메이아스가 페르시아 군주들의 부하 신분으로 출발하여 소아시아 북서부 지방의 재정적·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했다. 헤르메이아스는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를 방문한 뒤 그리스의 규범과 철학을 아시아 지방에 전파하기 위해 아카데메이아 분원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플라톤의 제자 2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칼케돈의 크세노크라테스와 함께 아소스로 갔다.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Politica〉 제7권의 12개 장을 쓴 듯하다. 이 글에서 철학과 정치학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도시국가( 폴리스)의 최고 목적은 철학적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인뿐이며 따라서 그리스인은 비(非)그리스인을 노예로 삼아 비천한 일을 시킬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에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왕권에 관하여 on Kingship〉를 썼고, 이 책에서 플라톤과 달리 철학자와 왕의 기능을 분명하게 나누었다 (→ 철학자-왕). "왕이 철학자가 되는 것은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익하지도 않다. 오히려 왕은 참된 철학자들의 충언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왕은 자기 왕국을 좋은 말이 아니라 좋은 행동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후견자 헤르메이아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조카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딸을 얻었다. 〈정치학〉에는 이상적인 결혼 나이를 남편은 37세, 아내는 18세로 규정한 대목이 있는데, 이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나이가 37세였다. 피티아스가 18세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피티아스는 오래 살지 못했고 그녀가 죽은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르필리스와 함께 살았으며 아들 니코마코스를 얻었다. 아소스 아카데메이아에서 3년을 보낸 뒤 근처의 레스보스 섬으로 옮겨 수도 미틸레네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친구 테오프라스토스와 함께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를 본떠 철학 학파를 세웠다. 그리고 생물학으로 관심의 초점을 돌려 선구적인 연구를 했다. 그는 생물학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인과관계, 즉 목적론적 인과관계에 주목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식물과 동물 등 자연의 생명체는 자연적 목표 또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체의 구조와 성장은 이 목적을 알아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목적론과 이론이 모두 중요하지만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이론이 항상 관찰에 종속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발생에 관하여 on the Generation of Animals〉에서 벌의 발생 양식에 대해 잘 모른다고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이 충분히 밝혀지면 신뢰를 받아야 하는 것은 이론이라기보다는 관찰이며, 이론은 관찰 사실에 의해 확증되어야만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과 동물의 생활을 연구하면서 영혼과 육체의 관계도 고찰했다. 〈영혼에 관하여 De anima〉에서 그는 영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며 일시적으로만 육체 속에 살 뿐이라는 플라톤의 견해를 배척했다. 그대신 물질적 존재의 긍정적 가치를 더 강조하면서 영혼은 육체와 본질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생명의 원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플라톤을 어느 정도 수용하여 영혼을 육체의 형상, 육체를 영혼의 질료라고 정의했다. BC 343년말(또는 BC 342초) 그의 나이 42세경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13세 된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기 위해 펠라로 갔다.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 최고의 지식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아들을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를 철학으로 계몽된 고전적 용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그리스인의 우수함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비그리스 미개인을 정복하고 그들과 피를 섞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 충고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의 결혼을 허용했으며, 페르시아 귀족 가문 출신의 아내를 맞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특히 정치 이데올로기 면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이 그리스 세계에 일으키기 시작한 근본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정책이 도시국가의 중요성을 줄인다고 반대하기도 했다. 반면 알렉산드로스는 스승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파괴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 스타기로스를 다시 세웠다.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3년을 보낸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기로스로 되돌아왔으며, 그곳에서 테오프라스토스 등 자기의 철학 학파와 계속 교류했다.

 

제3기(리케이온의 창설과 지도)

BC 335년까지 스타기로스에 머문 뒤 거의 50세가 되었을 때 아테네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 아카데메이아의 지도자 자리는 스페우시포스가 죽은 뒤 비어 있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생물학을 함께 연구한 칼케돈의 크세노크라테스가 이어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와 완전히 인연을 끊지는 않았지만 BC 335년 경쟁학원을 리케이온에 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학원 안에 있는 지붕 덮인 산책로인 페리파토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 학파는 '페리파토스'(逍遙學派라고도 함)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뒤 12년 동안 많은 학자의 연구를 통합하여 리케이온을 모든 탐구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과학과 철학의 광범한 영역에 걸쳐 강의를 제공했다. 아카데메이아와 리케이온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플라톤주의자들이 수학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 반면 리케이온은 생물학과 역사에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짧은 기간이나마 아테네에서는 마케도니아에 강력히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있었고 아테네를 섭정한 마케도니아 장군 안티파트로스와도 친했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아테네를 떠나 에우보이아 섬의 칼키스에 있는 어머니의 영지로 갔다. 이듬해 그곳에서 위장병으로 죽었으며, 이때 나이는 62(또는 63)세였다. 그가 아테네를 떠난 까닭은 아테네인들이 철학에 대해 2번 죄짓는 것(첫번째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일을 가리킴)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성격 및 철학적 위치>

 

흉상과 조각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은 잘 생기고 세련되어 보인다. 그러나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한 자료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혀 짧은 소리를 했으며, 이런 신체의 결함을 만회하기 위해 좋은 옷을 입고 고급 신을 신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기로스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책을 모으는 데 돈을 많이 썼다. 플라톤은 그의 부유함을 부러워한 듯한데 그를 '책벌레'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느날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담은 〈파이돈 Phaidon〉을 읽어주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아리스토텔레스만 남았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꾸민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이 일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당시 영혼불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학설에 깊게 빠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학설에 지적으로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그가 아카데메이아 시절에 쓴 초기 대화편들(지금은 단편만 남아 있음)은 현세의 무가치함과 내세에 관한 사상도 담고 있다.

 

그에 관한 일화들을 살펴보면 그는 친철하고 다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잘난 체하는 성격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유언장에는 자신의 행복한 가정생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자식과 노예에 대해 깊이 배려한 대목도 있다. 이 개인적인 행복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의 마지막 문예 작품인 〈철학에 관하여 on Philosophy〉에 잘 나타나 있다. BC 348년경 이 작품을 완성한 뒤 그는 연구, 교육, 전문적 논문 집필 등에 힘썼다. 〈철학에 관하여〉는 그 뒤의 고대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저작은 철학을 하나의 전문직업으로 확립한 책이다. 현재 남아 있는 단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의 특수한 역할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다. 문명의 발달사를 5단계로 나누고 철학의 등장을 그 절정으로 본다. 첫번째 단계는 사람들이 필수품을 만드는 데 전력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이다. 2번째 단계에서는 생활을 세련되게 만드는 예술이 나타나고, 3번째 단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대로 훌륭한 생활을 하는 데 선결 요건인 정치기술이 나타난다. 4번째 단계에서 질서있는 국가가 나타남으로써 지적 호기심을 채울 여유가 생기고, 존재하는 사물의 물질적 원인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진다. 5번째 단계에서 사람들의 정신은 물질세계를 넘어 사물의 형상인과 목적인을 파악하고, 이 단계에서 자연철학은 신의 철학으로 이행한다.

 

이 신의 철학은 별들의 신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있을 때 천체의 완전한 질서를 찾아내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다. 그리고 이 완전성은 플라톤의 의도처럼 수학적 추상화로는 확증할 수 없고 눈에 보이는 천체 자체를 신의 구현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이 신과 그의 작품인 물질적 우주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봄으로써 현세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또 영혼은 육체 속에 갇혀 있고 따라서 자유로워지려면 물질과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학설도 거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러한 관점 때문에 사상사에서 독창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저작>

 

개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부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발표했지만 지금은 없어진 저작들이고, 2번째 부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발표하지 않았고 발표할 생각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모으고 편집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저작들이다. 첫번째 부류에는 그 자신이 '대중용'(exoteric)이 라고 부른 저작, 즉 일반대중을 위해 대화체 또는 그밖의 유행하는 문학형식으로 쓴 책, '기억용'(hypomnematic)이라고 부른 노트와 더 나아가 연구를 위한 자료모음이 포함된다. 이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단편들뿐이다. 마지막으로 '강의용'(acroamatic)이라고 부른 현재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저작 또는 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원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간결하고 개성있는 문체로 씌어 있다. 고대 후반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수백 권의 두루마리였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30권의 2,000쪽가량이다. 고대의 책목록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총 170여 권에 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발표했으나 없어진 저작

없어진 대중용 저작에는 수필과 플라톤식의 대화편뿐만 아니라 시와 편지도 있다. 이 없어진 대중용 저작을 재구성하려는 학자들은 여러 가지 난제에 부딪쳤다. 예를 들어 없어진 대화편은 현존하는 글 속에 들어 있는 학설과 상당히 다른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편 〈행복론 Eudemus〉에 관해 현재 밝혀진 것이나 〈영혼에 관하여〉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부자연스러운 결합, 예컨대 티레니아 해적이 포로를 시체와 묶어 가한 고통에 비유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존하는 글에서 플라톤주의를 지지하는 동료들에게 영혼과 육체를 서로 적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2세기말에 활동한 권위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해석가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는 혹시 그가 '2가지 진리', 즉 일반인을 위한 '대중용' 진리와 리케이온의 제자들을 위한 '비전용'(秘傳用 esoteric) 진리를 따로 말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오늘날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대중용 저작이 대부분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있던 초기 단계에 나온 것이고 따라서 이 저작은 그의 '대중용' 사상보다는 '미숙한' 사상을 보여준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없어진 저작 중 중요한 것으로는 플라톤의 〈파이돈〉의 전통을 잇는 〈행복론〉, 나중에 〈형이상학 Metaphysica〉에서 설명하는 주제들을 담은 일종의 철학 강령인 〈철학에 관하여〉, 철학적 생활을 권하는 〈프로트레프티코스 Protrepticus〉, 〈그릴로스 Gryllus〉 또는 〈수사학에 관하여 Rhetorica〉, 〈정치학〉과 비슷한 주제를 다룬 〈정의에 관하여 on Justice〉, 플라톤의 형상론을 비판한 〈이데아에 관하여 on Ideas〉 등이 있다.

 

남아 있는 저작

현존하는 저작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수고(手稿)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중 많은 것을 강의 노트로 사용한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처음 편집·출간한 사람은 BC 60년경 리케이온을 마지막으로 이끈 로데스의 안드로니코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편집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그는 〈형이상학〉이라는 책을 쓰지 않았고, 10여 편의 짧은 논문을 썼을 뿐이다. 그러나 후세의 편집자들은 이 논문을 모아 〈자연학 Physica〉 다음에 읽어야 한다는 뜻에서 〈형이상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므로 〈형이상학〉과 그밖의 몇몇 저작은 사상의 일관성이나 뚜렷한 연속성이 없어 보인다. 또 리케이온의 학생이나 구성원이 뜯어고친 것으로 보이는 표현들도 있다. 안드로니코스는 선배 편집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논리적·교훈적 순서로 편집했다. 그결과 논문의 시간적 순서가 무시되었고 서로 다른 시기에 쓴 논문들이 함께 묶여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문들은 연구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는 다루어야 할 문제를 정의하고, 선배 사상가들의 견해를 평가하고, 자신의 예비적 의견을 정식화한 뒤, 여러 난점과 반론에 비추어 이 의견을 수정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고, 다른 관점을 지지하는 논증을 다시 듣고 난 다음 곧이어 자기 문제의 가장 적절한 해답을 찾아낸다. 그래서 독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학설을 독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난관·모순·역설 들에서 벗어나 하나의 전망 또는 식견을 계발하려 연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상의 진화에 관한 이론>

 

예거의 발달이론

20세기 이전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존하는 논문들은 그의 진짜 사상을 보여주는 글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발렌틴 로제처럼 없어진 대화편들이 모두 가짜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해석의 밑바탕에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엄밀하고 체계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일관성없는 사상을 제시했을 리 없다는 가정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 독일의 베르너 예거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단계적으로 발달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예거는 역사발생론적 방법론을 이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없어진 저작 대부분은 그가 아카데메이아에서 플라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때 지닌 사상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예거에 따르면 영혼불멸과 같은 주제에 대한 선호, 물질세계에 대한 경멸, 이데아의 '상기'(想起) 이론, 지혜의 우위, 금욕주의, 신의 존재 인정 등 초기 사상은 플라톤적이었으며, 그 뒤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점차 플라톤의 견해와 멀어져 관념론을 버리고 경험주의로 나아갔다.

 

예거의 발달이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정확한 연대를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어느 논문이 어느 시점에 쓴 것인지를 알 수 없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사상만이 플라톤과 일치한다는 가정은 증명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예거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과 관련해서는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초기에 영혼을 육체와 분리된 실체로 묘사했고, 육체를 영혼의 도구로 보는 중간 단계를 거쳐 마지막에는 영혼을 육체의 형상 또는 현실태로 봄으로써 영혼과 육체의 실체적 통일을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발달과 체계화에 관한 최근의 분석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은 대체로 그의 사상이 단계적으로 발달했다고 볼 근거가 있지만 변화의 시점과 정도를 결정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현대 해석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경험적 지식과 물질의 역동적 측면을 중시하게 되면서 플라톤의 관념론의 모든 측면을 거부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에서는 실험적으로 연구하면서도 물리학에서는 지각과 사유, 사물의 우연적 특성과 본성 사이의 차이를 계속 주장했다.

 

<원전>

 

논리학에 관한 저작

논리학이라는 용어는 이미 아카데메이아의 크세노크라테스가 만들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 로고스)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인간만의 특징으로 강조하고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했다. 여기서 이성적 동물은 그리스어로 '언어·말' 또는 '단어'를 가진 동물이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논문들은 〈오르가논 Organon〉('도구'라는 뜻)이라는 저작 속에 모여 있다. 이 제목은 후대의 해석가들이 붙인 것인데, 이들은 소요학파의 전통에 따라 논리학을 철학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과학의 분류체계 속에 넣지 않고 각 지식분야를 연구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예비학문으로 여겼다. 그가 논리학에 직접 붙인 이름은 '분석론'(analytica)이었다.

 

〈오르가논〉은 〈범주론 Categoriae〉·〈해석론 De interpretatione〉·〈분석론 전서 Analytica priora〉·〈분석론 후서 Analytica posteriora〉·〈토피카 Topica〉·〈궤변론 Sophistici elenchi〉 등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논문들의 배열 순서는 연대보다 체계에 따른 것으로 보이며, 집필연대에 따른 순서를 확정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범주론〉이 실제의 사물 또는 사물의 본성에 관한 이론인지 아니면 말 또는 표현에 관한 이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을 실재에 관한 이론으로 사용하여 플라톤의 형상이론을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은 예를 들어 아름다움 또는 지혜와 같은 질에 실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실체 범주와 그밖의 범주를 혼동했다. 〈범주론〉 5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범주 안에서도 '제1실체'와 '제2실체'를 구분했다. 제1실체는 이 사람, 저 말, 이 돌 등의 개체이며, 제2실체는 이 개체가 속한 종(種)과 유(類)이다.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종과 유를 파생된 종류의 실체로 보았다. 그러나 〈형이상학〉에서는 종과 유가 1차적 실체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분명하지 않으며,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그가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적 존재론으로 되돌아갔다고 해석한다. 〈해석론〉에서는 우선 '이름'·'동사' 등 문장을 구성하는 단순한 부분들에 관해 논의한 다음 다양한 종류의 완전한 문장들과 이들 사이에 성립하는 논리적 관계(반대·모순·함언)를 검토한다. 또 '양상' 문장('……은 가능하다', '……은 필연적이다')에 대한 선구적인 설명과 '미래의 우연'에 대한 유명한 논의(만일 내일 해전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 이미 참이라면, 어떻게 그 해전을 우연적 사건으로 볼 수 있는가? 만일 진리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그 해전은 확정적이고 필연적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미래에 관한 특정 유형의 문장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라는 것임)를 포함하고 있다. 〈토피카〉는 주로 어떤 주장을 확인하거나 반박할 논증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를 다룬다. 그래서 이 논문은 논리학의 일반 법칙 또는 규칙을 설명하고 있다.

 

〈궤변론〉은 겉으로 보면 타당한 것 같지만 실은 오류인 추론규칙을 밝힌다. 오류논증의 예로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 또는 순환논증(예컨대 영혼은 불멸이기 때문에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증명'), 후건긍정의 오류(예컨대 만일 어떤 사람이 술꾼이라면 그는 가난할 것이다, 피터는 가난하다, 그러므로 피터는 술꾼이다라는 논증), 논점일탈의 오류(문제가 되는 결론을 증명하는 대신 무관한 사실에 주의를 돌림으로써 자신의 논점을 뒷받침하는 논증) 등이 있다.

 

〈분석론 전서〉의 가장 큰 업적은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론이라고 알려진 논리학 체계를 발달시킨 점이다. 삼단논법이란 세 명제(두 전제와 한 결론)로 구성된 논증형식이며, 타당한 삼단논법의 예는 다음과 같다. '모든 그리스인은 사람이다·모든 사람은 죽는다·모든 그리스인은 죽는다.' 〈분석론 전서〉는 놀라울 정도로 엄밀하고 정교하게 삼단논법의 다양한 형식을 검토한다. 〈분석론 후서〉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 이론을 과학과 인식론의 목적에 응용하려 한다. 과학지식의 적절한 구조를 논의하면서, 각각의 과학은 제1원리, 즉 공리와 여기서 연역된 정리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분석론 후서〉 제2권은 주로 '정의'(定義) 이론을 다룬다.

 

자연철학에 관한 저작

〈자연학〉에서는 자연 물체 일반, 즉 형체를 가진 모든 것을 다루고, 특수한 종류의 물체는 〈하늘에 관하여 on the Heavens〉·〈기상학 Meteorology〉 등의 글에서 다룬다. 〈자연학〉 제1권은 자연 물체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들, 즉 '질료'와 '형상'을 다룬다. 질료는 변화를 거치더라도 계속 존재하는 기체이고 형상은 변화의 성질을 결정하는 특징이다. 제2권은 주로 자연학자들이 연구하는 다양한 유형의 원인을 다룬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질료인·형상인 이외에 어떤 것이 존재하는 목적인과 어떤 것을 존재하게 하는 작용인 등이 있다 (→ 질료형상론). 제3~7권은 운동과 공간·위치·시간·크기·연속성 등 운동과 관련된 개념을 다룬다. 제8권의 주제는 원동자(原動者)이다. 원동자란 그 자체가 자연 물체는 아니지만 모든 자연 물체를 운동하게 만드는 원인이며, 부동성·영원성 등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논의한 일반원리를 우주 전체를 다루는 〈하늘에 관하여〉(여기서 그는 우주가 공간 면에서 유한하지만 시간 면에서 영원하다고 논증함)와 우주의 생명 없는 부분을 다루는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on Generation and Corruption〉· 〈기상학〉 등에도 적용한다.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는 4원소(흙·공기·불·물)와 그 상호관계를 다룬다. 특히 그는 한 원소가 다른 원소를 변하게 하거나 다른 원소로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상학〉은 예컨대 혜성·강·연소·무지개 등 잡다한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그는 자연학의 일반원리와 원소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구가 항상 일종의 '증발'(수증기나 연기와 같이 습기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음)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위의 다양한 현상을 이 증발로 설명하려 한다.

 

생물학과 동물학 저작에도 〈자연학〉의 원리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동물사 History of Animals〉는 서로 다른 동물 종에 대한 기술이 주내용이다. 이중 갑각류 동물종에 대한 것을 비롯한 몇 가지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고 정확하다. 몇몇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는 〈동물사〉가 1차 자료들을 모은 것일 뿐 체계화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사〉에서 생물 분류학을 세우려 했고 그래서 동물세계를 유(類)와 종(種)으로 나누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동물의 신체 부분 Parts of Animals〉·〈동물의 생성 Generation of Animals〉은 비록 많은 경험자료를 담고 있지만 과학적 설명 체계를 세우려는 의도를 가진 글이다.

 

그는 동물의 여러 기관과 그밖의 '신체 부분'의 성질·기능 등을 단순히 기술하지 않고 '설명'하려 한다. 바로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설명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자연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으며,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동물의 모든 특징을 기능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동물의 생성〉은 특히 생식과 성장의 문제를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무르익은 이 과학저작에는 그의 방법의 장단점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조심스럽고 정확하며, 이론적 설명을 제시하면서도 이론이 관찰을 왜곡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지식과 새 지식을 얻는 그의 수단은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적어도 몇몇 이론적 개념은 거칠고 부적절하다. 그밖에 생물학 저작으로는 〈동물의 운동 Movement of Animals〉·〈동물의 진보 Progression of Animals〉 등 2편의 짧은 논문이 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움직임에 대한 생리학적 설명과 심리학적 논의를 결합하려 했다.

 

심리학에 관한 저작

감각 생활과 지적 생활에서 작용하는 능동적 원리와 수동적 연속체 사이의 관계 또는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검토하는 저작은 〈영혼에 관하여〉이다 (→ 질료형상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본성에 관한 플라톤의 초월주의적 이론과 소크라테스 이전의 유물론적 이론을 모두 거부한다. 영혼은 생명체의 형상으로서 질서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능은 양육·지각·지성 등이다. 양육 기능은 모든 생명체에 공통적인 기능이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움직이는 역할을 담당한다. 지성 기능은 인간에게만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각 양식을 자세히 설명했고, 사유에 대해서도 '수동' 지성과 '능동' 지성을 구분하는 어렵기로 소문난 설명을 제시했다. 이 저작은 동물의 움직임과 그 전제조건인 상상·욕망 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형이상학에 관한 저작

형이상학은 그 주제 면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던 분야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분야의 연구를 혁신했다. 〈형이상학〉에는 그가 때로는 '지혜'라 부르고 때로는 '제1철학' 또는 심지어 '신학'이라 부른 학설이 설명되어 있다. 이 학설의 과제는 실재의 가장 일반적·추상적 특징과 보편타당성을 지닌 원리를 기술하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형이상학을 '존재로서의 존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존재하는 것이라면 모두 충족해야 하는 일반조건, 달리 말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해 참인 것을 연구한다는 뜻이다.

 

〈형이상학〉 제1권에서는 선배 철학자들이 사용하거나 논의한 설명 형식을 조사·연구하고 자신의 '4원인' 이론이 설명문제에 관한 올바른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이 조사·연구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플라톤 철학의 몇 가지 측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2권은 과학의 원리에 대한 짧은 논문이고, 제3권은 형이상학의 수수께끼 또는 '아포리아이'(aporiai)를 나열한 글이다. 제4권에서는 '제1철학'이 존재의 조건에 대한 일반적 연구라고 설명하고, 모순율('P와 비P가 모두 참은 아니다')과 배중률('P가 참이거나 아니면 비P가 참이다')을 옹호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사전이라고 불리는 제5권에서는 중요하면서도 모호한 약 40개의 철학 용어를 분석한다. 제6권의 주제는 제4권과 같다.

 

제7~9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가장 어려운 글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요약할 수 없다. 핵심문제는 실체란 무엇인가, 세계의 기본 구성물은 무엇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우리가 인식·정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매우 복잡하게 꼬여 있으며, 질료와 형상, 실체와 본질, 변화와 발생, 현실태와 가능태 등에 초점을 맞춘다. 결론은 실체란 어떤 의미에서는 형상이라는 것인 듯하다. 그러나 이때 형상은 플라톤식의 추상적 형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특수한 형상이다. 이러한 형상은 예컨대 '이 사람', '저 말' 또는 '이 참나무' 등의 표현이 지시하는 것이다. 제10권은 통일성·연속성·동일성 등 '일자'(一者)에 관한 독립적인 논문이다. 제11권은 〈자연학〉·〈형이상학〉의 앞부분을 요약하는 글이다. 제12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을 제시한다.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원인을 설정해야 하는지를 묻고, 결국 신 또는 움직이지 않는 제일 원동자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제13·14권에서는 수학적 대상의 본성에 대해 길게 논의한다.

 

윤리학과 정치학에 관한 저작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과학과 실천과학의 목적이 결정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하면서, 실천과학은 무엇인가를 행하거나 만들기 위한 학문이지 그것을 사고하고 정의하고 알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ca Nicomachea〉 첫 부분에서 왜 실천과학이 이론과학만큼 정확성을 가질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실천과학의 주제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습관·기술·제도 등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정의나 심리학적 정의가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사람은 환경·교육·가족·재산·신분, 심지어 여가 방식 등에 따라 다양하다고 주장했다.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도덕문제들은 서로 분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정치문제와도 분리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정치학〉은 독자적인 주제를 다루는 서로 분리된 과학이 아니라 공통의 영역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다루면서 상호보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들의 가능태를 바탕으로 삼아 도덕문제를 다루었지만, 이 가능태를 현실화하고 실천하는 능력은 정치상황에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 법철학). 그래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에서 정치철학의 광범한 맥락을 도덕적으로 고려하는 데서 출발하여, 제10권에서는 행복과 명상생활을 검토한 뒤 도덕문제에 대해 법이 기여할 수 있는 점을 언급하면서 끝낸다. 이 지점이 윤리학에서 정치학으로 넘어가는 곳이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접근법은 목적론이다. 즉 도덕적으로 절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인간의 선을 위해 바람직한가를 기준으로 윤리문제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접근법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선을 검토하고 마침내 행복에 이르는 최고선을 규정한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말썽 많은 개념을 면밀히 검토한 뒤 행복을 덕(arete)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도덕적 덕과 지적 덕을 구분하고 각각은 영혼의 비합리적 힘과 합리적 힘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 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덕을 개발할 능력 또는 성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린이는 처음에는 자기 행동의 도덕적 우수함을 깨닫지 못한 채 부모의 명령에 따라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결국 참말을 하는 습관이 그의 도덕성의 뿌리 깊은 일부가 된다.

 

그 다음 아리스토텔레스는 덕과 악을 구분하고 덕을 '중용'으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용기는 만용과 비겁 사이의 중용이다. 그는 최고선을 정의하면서 이 논의를 끝맺는데, 행복이 덕에 따른 활동이기 때문에 최고선은 사람의 최고덕, 즉 이성적 활동에 따른 삶이라고 주장한다. 〈정치학〉은 인간 행동과 공동체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국가에 관한 이론을 세우고 다양한 유형의 법제도를 구분한다. 정치적 불안정과 혁명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논의도 있으며, 마지막 2권은 주로 교육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술과 수사학에 관한 저작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의 목적 또는 목적인을 설득이라고 주장한다. 수사학도 논리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체계 속에 포함되지 않으며 따라서 특정의 주제, 단일한 방법, 일련의 원리를 갖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설득의 양식은 설득자 자신의 성격에 따른 설득력, 원하는 감정을 청중에게 일으키는 것, 증명 또는 겉치레 증명 등 3가지이다. 〈시학 Poetica〉에서 그는 시와 역사를 비교하면서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따라서 더 큰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역사는 개별자, 즉 특정 사건이나 특정 인물을 다룬다. 반면 시는 비록 자연을 모방하지만 보편자에 가까운 유형과 상황을 창조한다. 〈시학〉 중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단편은 비극을 분석하는 부분이며, 여기서 비극의 목적은 동정과 두려움을 통해 감정을 정화하는 것, 즉 '카타르시스'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읽는 방법

괴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피라미드에 비유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각 부분은 다른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저작을 처음부터 확실히 이해하면서 읽을 수 없고, 기본적인 개념과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방식을 익힌 뒤에는 〈오르가논〉에 있는 논리학 부분과 〈자연학〉에 있는 공간·시간·운동론을 읽는 것이 좋다. 그 다음으로 〈형이상학〉·〈영혼에 관하여〉에 있는 좀더 복잡한 사상을 만나보고, 윤리학과 문학이론 연구에서 나온 결론을 그 통찰력·분별력·논증력 등에 비추어 검토해봄직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결론에 접근해보면 그는 하나의 철학을 제시한 인물로서 중요할 뿐 아니라 정신을 갈고닦는 데 도움을 준 사람으로서도 중요하다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A. H. Amadio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