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불명>
세계철학사 머리말
철학사를 강의하거나 서술하는 것은 분명 망설여지는 작업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누구도 방대한 철학사를 충분히 숙지해서 균형 있게 서술하기는 힘들 것이니 말입니다. 더구나 문제가 ‘세계’철학사라면 더욱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사’, ‘중국철학사’, ...등은 제법 있지만 ‘세계철학사’는 아직 없습니다.
그런 이름을 단 책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죠. 예컨대 슈퇴리히가 쓴,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널리 읽힌 『세계철학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세계철학사를 유기적으로 서술하기보다는 서구 이외의 전통을 앞으로 따로 떼어 “예의상” 다루고 있을 뿐이죠. 말하자면 ‘동양’ 철학사를 ‘서양’ 철학사의 전사(前史)‘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을 ’서양‘의 전사로 보는 헤겔적인 편견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서구인들은 아직까지도 서구 이외의 철학 전통들을 잘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구에서의 철학 교육과정에는 서구 이외의 전통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예(武藝)’라는 말이 없었다고 해서 서구에 무예에 해당하는 활동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억지이듯이, ‘philosophia’라는 말이 헬라스 지역에서 나왔다고 해서 다른 지역들에 철학적 활동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철학이라는 개념을 좀더 넓은 안목으로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철학(哲學)’이라는 개념의 규정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철학사의 서술도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칩니다. 철학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역사의 많은 갈래들에서 ‘철학’에 해당하는 활동을 뽑아낸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즉 종교사, 정치사, 경제사, 전쟁사, ...같은 수많은 갈래들과 철학사를 변별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조심할 것은 철학은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과 같은 층위의 개념이 아닙니다. 과학, 예술, 종교, 정치, ... 등과 같은 층위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철학에 해당하는 것들의 역사를 뽑아내려면 당연히 철학이라는 개념이 미리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철학이라는 개념을 규정하려면 당연히 지금까지 ‘철학’이라고 불린 것들을 모두 모아서 보아야 합니다. 결국 철학과 철학사는 서로 순환관계를 이루는 것이죠. 그래서 철학/철학사를 수미일관(首尾一貫)하게 규정하는 것은 단지 양이 많다거나 하는 식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더 근본적인데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행위가 가지는 특이한 성격이 있습니다. 철학적 행위들은 지식이 아니라 항상 지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국면, 지식을 넘어서 가는 국면에서 꽃핍니다. 어떤 담론이 마치 어둠 속을 더듬는 듯이 매우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을 때 철학적 사유는 빛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끝나 그 담론이 정리가 되어 공식화가 되고, 그래서 연역적 체계를 갖추고 정답이 딱딱 나오는 상태에 이르면, 그 담론은 하나의 ‘과학’이 됩니다. 그러나 그 때가 되면 그 담론은 철학적으로는 더 이상 흥미로운 담론이 아닙니다. 그러면 철학적 사유는 다시 다른 길을 찾아갑니다. 철학적 사유의 본질은 이 넘어서 감, “메타적인” 성격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철학은 일정한 탐구범위, 개념들과 방법들, 담론 외적 도구들, ... 등을 갖춘 하나의 단일한 담론이 아닙니다. 철학은 경제학, 물리학, 사회학, ...등과 같은 개별적이고 단일한 담론들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담론인 것이죠.(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자체가 근대에 와서야 철학에서 분화되어 나온 담론들입니다) 철학에는 어떤 통일된 영역, 개념, 방법, ...등이 없습니다. 오히려 철학의 본질은 기존의 것들과는 다른 영역, 개념, 방법, ...등을 끝없이 새롭게 파헤쳐 나아가는 행위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철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영역, 개념, 방법, ...등은 너무나도 이질적입니다. 데카르트와 사르트르를 비교해 보십시오. 니체와 비트겐슈타인, 공자와 콰인, 플라톤과 푸코, ... 이런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똑같이 ‘철학자들’이라 불릴까요? 이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공통의 영역, 개념, 방법, ...등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을 ‘철학자들’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참 기묘한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입니다. 물리학과 역사학, 생물학과 경제학이 다른 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어떤 단일한 담론에 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각각의 문화와 시대에서 기존의 담론공간 바깥은, 담론과 담론의 사이를, 아직 담론화되지 않은 어떤 불투명한 차원을 모험적으로 파헤쳐 나갔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공통점은 구체적인 어떤 영역이나 방법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철학적 행위를 했다는 점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이다”라는 모든 명제는 그릇된 명제입니다. “철학은 메타과학이다.” 그러면 실존주의는 철학이 아닌가요? “철학은 인간 실존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논리학은 철학이 아닌가요? “철학은 존재 사유다.” 그러면 윤리학은 철학이 아닌가요? “철학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형이상학은 철학이 아닌가요? 이 모든 규정들은 철학의 어떤 일부분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에는 일정한 규정이 없습니다. 철학의 규정 자체가 한 시대, 한 문화가 요구하는 메타적 차원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따라 계속 변해 가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인식의 위기를 맞아 수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철학을 전개한 것이고, 맑스는 산업사회의 위기를 맞아 경제학적-역사학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철학을 전개한 것이고, 사르트르는 인간 실존의 퇴락을 맞이해서 문학적이고 실존적인 철학을 전개한 것입니다. 이 모든 작업들은 영역도 개념도 방법도 도구도 다 다릅니다. 다만 각 시대, 각 문화가 절실하게 요청하는 메타적 작업을 수행했다는 그 점에서만 공통되는 것이죠.
그래서 철학사의 성격은 물리학사, 경제학사 등과 전혀 다릅니다. 예컨대 물리학사는 일정한 영역(물질세계), 개념들(힘, 속도, 에너지, ...등), 방법들(실험과 수학화), 도구들(실험기기들), 제도들(일정하게 제도화된 틀), ...을 갖춘 단일한 하나의 담론입니다. 그러나 철학사에는 이런 단일성은 없습니다. 철학사를 채우고 있는 인물들, 사조들, 문제들은 그 각각이 각 시대가 요청하는 절실한 메타적 문제들을 파고 들었다는 그런 공통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철학의 층위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철학은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등과 같은 층위에 있는 것이지, 물리학, 생물학, 사회학, ...과 같은 층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도적으로 철학‘과’로 되어 있다고 철학을 ‘과’로 생각하면 그것은 근본적인 오해인 것이죠. 철학과 철학‘과’는 다릅니다. 철학‘과’는 이미 이루어진 철학들을 ‘연구’하는 하나의 개별 담론이지만, 철학하는 행위 자체는 개별 담론이 아닙니다. 철학‘과’나 철학‘전공’과 철학 자체를 혼동하면 곤란한 것입니다. 이 혼동이 철학에 대한 여러 혼동들을 낳는 주범인 것이죠.
그래서 철학사의 서술이란 일정한 개별 담론의 서술이 아니라 매우 이질적인, 극히 다양한 담론들의 서술이기도 합니다. 철학사의 서술은 역사의 모든 측면들과 얽힙니다. 장자를 이야기하려면 당대의 역사, 문학, 신화 등을 논해야 하고, 데카르트를 이야기하려면 당대의 수학, 물리학 등을, 베르그송을 논하려면 당대의 생물학과 심리학 등을, 사르트르를 논하려면 당대의 정치와 문학 등을, ... 논해야 하는 것이죠. 서구 중세 철학은 종교와, 헤겔은 역사와, 니시다 기타로는 불교와, ... 연결되어 있습니다. 철학사를 논한다는 것은 결국 메타적 사유들과 그것들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끝도 없는 작업인 것이죠.
그러나 철학사가 아무리 이질적인 사유들의 집합이라 해도 그것이 하나의 ‘史’를 이루는 한 거기에 연속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죠. 첫째로 뒤에 나온 철학자들은 선대의 철학자들을 참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참조를 통해서 철학사의 계열들=갈래들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런 갈래들의 복잡한 교차를 통해서 철학‘사’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일정한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죠. 또 하나, ‘메타적 문제들’이 무엇이냐는 각 시대, 각 문화마다 다르지만, 거기에는 계속 반복되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서구 중세 철학자들이 논쟁했던 ‘보편자 문제’는 오늘날 과학철학이나 사건론에서 맥락을 달리해 반복되고 있습니다. 즉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존재들의 ‘존재론적 위상’에 관한 문제죠. 이렇게 철학사에는 반복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어떤 철학이든 부딪치게 마련인 보편적인 문제들도 있죠. 예컨대 죽음의 문제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철학사가 극히 이질적인 사유들의 집합을 이룬다 해도, 거기에는 참조와 논쟁, 반복과 보편성 등을 통한 어느 정도의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기묘한 ‘史’이긴 하지만 어쨌든 철학‘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때문에 철학사는, 특히 ‘세계철학사’는 쓰는 사람에 따라 커다란 편차를 띨 수밖에 없습니다. 지역적으로 문제의식이 다르기에 철학사 이해도 지역에 따라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겠죠. 만일 지금의 이 철학사를 인도 사람이나 러시아 사람 또는 다른 어떤 지역의 사람이 강의한다면, 틀림없이 상당히 다른 내용이 나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서도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각 시대의 문제의식은 다르기에, 그리고 시대가 뒤로 갈수록 그 사이에 배출된 철학적 사유의 내용들은 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기 마련이기에, 어떤 시대에 철학사를 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고 또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사란 무한히 새롭게 씌어져야 하는 그런 것입니다.
철학사가 이렇게 다질적(多質的)인 담론이기에, 철학사 서술에서 갈래들=계열들과 특이점들=문턱들을 잡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갈래들은 유사한 문제의식, 개념들과 방법들, 이론들, 정치적 정향들, ...등을 가진 사람들을 계열화해 잡아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공자, 맹자, 순자, ...등을 ‘유가(儒家)’ 사상가들로 계열화해냅니다. 또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 같은 사상가들을 ‘현상학 및 실존주의’의 사상가들로 게열화해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입니다. 유가 사상가들은 ‘천하무도(天下無道)’의 시대에 인의(仁義)의 가치관과 덕치(德治)의 정치사상을 추구함으로써 난세(亂世)를 치세(治世)로 바꾸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상학자들/실존주의자들은 인간존재가 사물화되고 사물들은 함수화(函數化)되는 과학 만능주의의 시대에 경험의 진정한 의미와 인간 실존의 독특성을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은 일정한 갈래를 형성하면서 또 일정한 개념들, 방법들, 이론들, 행위들, ...을 창출해낸 것입니다. 물론 이런 갈래짓기가 어려운 경우들도 많고, 또 갈래짓기를 통해서 한 철학자의 개인적인 측면들이 자칫 사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질적인 철학사에서 굵직한 갈래들을 갈라내는 것은 분명 중요한 작업이라 하겠습니다.
아울러 특이점들=문턱들을 잡아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철학사의 갈래들을 산맥(山脈)으로 비유한다면, 문턱들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맑시즘의 갈래에서는 맑스가 가장 큰 봉우리이고, 산맥을 따라 쭉 가면 레닌, 그람시, 마오쩌뚱, ...으로 가면서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솟아 있습니다. 또 분석철학의 갈래로 가면 프레게, 러셀에 이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유독 높은 봉우리가 나타나고, 또 그 뒤를 이어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이어집니다. 이런 봉우리들이 철학사의 한 갈래의 문턱들을 형성하는 것이죠. 이렇게 갈래들과 더불어 문턱들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갈래들이 오로지 한 갈래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죠. 하나의 갈래가 가다가 작은 갈래들로 갈라지기도 하고(예컨대 맑시즘 갈래는 그 후 ‘정통’ 맑시즘과 ‘서구’ 맑시즘으로 갈라집니다), 상이한 갈래가 합쳐서 보다 큰 갈래를 형성하기도 하고(예컨대 해석학 갈래와 현상학 갈래는 하이데거에서 종합됩니다), 두 갈래가 교차하기도 합니다(예컨대 구조주의의 계열과 니체-베르그송의 계열은 들뢰즈에게서 교차합니다). 그 외에도 갈래들 사이의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관계들의 그물이 펼쳐지죠. 그리고 문턱들이란 대개 갈래들이 교차하거나 갈라지는/모이는 곳에서 솟아오르기 마련이죠. 푸코 같은 거장에게서는 과학철학, 생(명)철학, 구조주의, 역사학 등이 모두 교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철학사의 갈래들과 문턱들에 주목하면서 사유의 역사 전체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은 비길 데 없는 지적 기쁨을 주지만, 그 기쁨은 늘 절실한 문제의식과 긴장을 동반해야 합니다. 거시적인 구도를 잡아내고 지도를 그리는 작업은 자칫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들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으며, 때문에 빗나갈 경우 자신이 구성한 구도 자체에 스스로 도취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모든 구성, 조직화는 언제나 해체의 측면을 동반해야 합니다. 종합적 구도는 구체적 증거들에 의해 언제라도 기꺼이 스스로를 수정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해체와 구성은 늘 동전의 양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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