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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유물론 철학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by 마리산인1324 2010. 10. 5.

 

<출처불명>

 

 

 

유물론 철학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로마 시대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시대’라 부른다. 군사적으로는 로마가 헬라스(그리스) 세계를 정복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헬라스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헬라스 점령을 통해서 ‘그레코-로망’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로마를 통해서 그리스 문화가 지중해 세계 전체로 퍼져나가게 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학파들이 있었지만 스승들의 잇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위대한 스승들의 패러디를 보여줄 뿐이었다. 박학과 회의주의가 공존하던 시대였다.


로마적인 기질이 사뭇 배어 있는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비교적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했다. 유태 문명은 일신교 문명이었고 유목 문화였다. 잠시 왕정(王政)을 거쳤으나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한다. 예수의 설법이 바울을 통해서 지중해 세계로 퍼져나가며 기독교가 탄생하고 헬레니즘과 만나게 된다. 그리스의 철학과 히브리의 종교가 만나 오늘날의 서구 문화의 뿌리가 형성된다. 헬레니즘 시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볼 수 있는 수준 높은 이론적 작업은 부재했으며, 그 대신 수많은 형태의 윤리와 종교가 발달하게 된다. 이 시대에는 극단적인 유물론과 극단적인 초월철학이 공존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성격과 목표는 똑같았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들은 지적 탐구보다는 험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것인가에 주력했다. 로마의 절대적 지배 아래에서, 이 시대의 철학자들은 더 이상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염세적(厭世的)이었다. 이론적인 탐구는 과거 철학들에 대한 주석이나 쓸데없는 박식(博識)으로 흘렀다. 기본적으로 객관세계에 관심이 있지 않았고 내면적-종교적 안심(安心)에 관심이 있었다. 때문에 이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테마는 ‘구원(救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을 찾는 방식은 다양했다. 스토아-에피쿠로스는 유물론 철학을, 플로티노스는 유출설(流出說)을, 그리고 이원론자들 및 교부철학자들은 단적인 초월철학을 세웠다. 이 시대의 학파들은 대개 배타적이었고 폐쇄적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버금가는 철학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들의 사후 200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idea, eidos)’의 철학을 거부하고 유물론 철학을 세웠다. 두 학파 공히 윤리학에 진력했으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기쁨/쾌락의 철학을 세웠고 스토아 학파는 금욕의 철학을 세웠다.


스토아 학파는 대략 서기전 300년 경에서 서기후 200년 경까지, 그러니까 500년 정도 이어진 철학체계이다. 대략 그리스가 멸망했던 즈음에서 로마가 멸망에 접어든 시기까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의 규정을 둘러싼 여러 異論들이 존재한다) 스토아 학파는 이 500년 동안을 에피쿠로스 학파, 신플라톤 학파, 회의주의 학파, 기독교 사상 등과 더불어 유럽을 지배했다. 윤리적-종교적 관심사가 지배했던 이 시대에 비교적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사유를 전개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 학파의 시조는 제논(Zenon)이다. 잘 알려진 엘레아의 제논, ‘제논의 파라독스’로 유명한 그 제논이 아니고, 키티움의 제논이다. 키티움이라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태어난 제논은 이 후 아테네로 옮겨와 살았다. 이 때 아티네는 정치적으로 이미 멸망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유럽의 중심이었고, 그래서 다른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모두 아테네로 몰려들었다. 대부분의 스토아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시에 아테네에서는 여러 학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플라톤을 이어받은 학파,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받은 학파, 그리고 퀴니코스 학파, ... 등등이 있었다. 대부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받은 학파들이었다. 제논도 처음에는 플라톤주의자였고, 또 퀴니코스 학파[犬儒學派]에도 많이 경도되었다. 그러다가 플라톤주의에 회의를 느껴, 플라톤주의에 대립하는 새로운 학파를 창설하게 된다. 이 사람은 그림이 죽 걸려 있는 주랑(柱廊)에서 강의했다고 한다. 이런 주랑을 왔다갔다하면서 강의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학파를 ‘스토아’ 즉 주랑의 학파라고 불렀다.


아테네 사람들은 제논을 대단히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케도니아 왕도 때때로 강의를 들으러 왔다고 한다. 죽을 때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하루는 발이 걸려 넘어져서 발가락이 부러졌는데, 그것을 대지(大地)에로 돌아가야 한다는 징표로 받아들이고 자살한다. 우리는 유교나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자살을 비난하지만, 스토아적 세계관에서 보면 자살은 그 자체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행위이다. 우주가 불이라면 우리는 불티들인 것이다. 불티가 불로 돌아가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잠시 떨어져 나왔던 전체와 합일하는 것이다. 제논 역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아테네 인들은 제논이 자살했을 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자살은 소(小)카토의 죽음이다. 카이사르에 맞섰던 인물이자 성실성(誠實性)의 화신과도 같았던 카토는 독재자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했다. 카토는 어느날 저녁 친구들과 스토아 철학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으면서 목숨을 끊었다.

제논은 철학을 세 분과로 나눈다: 자연철학(physica), 논리학(logica), 윤리학(ethica). 논리학은 우리가 지금 ‘인식론’이라고 부르는 분야를 포괄한다. 언어철학도 물론 포함한다. 제논에 따르면, 인식은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표상에서 유래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철학에 따르면, 진정한 인식은 우리의 감각을 버리고 형상/본질을 볼 때 성립한다. 감각이란 우리를 속이는 것,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논은 진정한 의식은 감각에 기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스토아의 인식론을 ‘감각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경험론, 실증주의, 현상론, 현상학 등의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은 소피스트들의 인식론과도 구분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피스트 사이에서 중용적인 입장을 취한다. 스토아 학파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적인 표상에는 주관적인 표상도 있고 객관적인 표상도 있다는 것이다. 소피스트들처럼 감각의 주관성, 상대성을 근거로 해서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가는 것도 아니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감각적 인식을 폄하하는 입장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제논은 확실한 표상, 객관적인 표상을 ‘포착적 표상(phantasia katalptik)’이라고 부른다. ‘phantasia’는 표상이다. ‘환타지’라는 지금의 뜻과는 전혀 다르다.(이 말을 환타지라는 뉘앙스로 쓴 사람은 플라톤이다) ‘katalptik’는 ‘katalambanein'에서 온 말로서 “꽉 붙잡다”를 뜻한다. 독일어 ‘Begriff’와 비교가 된다. 또 우리말의 “파악(把握)한다”는 말이 연상된다. 물론 제논의 경우는 개념의 수준이 아니라 표상의 수준이다. 인식 주체는 표상이 표착적 표상일 때, 그 표상을 수용한다. 객관적 표상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이 수용을 ‘sygkatathesis’ ‘synkatathesis’로 로마자화(字化)하기도 한다.
라고 부른다. 그래서 인식은 표상과 수용을 기초로 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와 소피스트주의의 양극단으로 가지 않고, 비교적 건전한 형태의 경험주의를 취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자연철학에서도 제논은 플라톤주의와 대립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질료 자체는 궁극적 실체가 아니다. 궁극적 실체는 형상이다. 다만 형상은 일정한 터에 자리잡음으로써만 현실적인 사물로서 구현될 수 있고, 이 터전이 질료이다. 그래서 플라톤주의에서 질료란 늘 형상의 상관자로서 파악된다. 이에 반해 스토아 학파는 이 세상에 가장 궁극적인 존재는 ‘smata’라고 말한다. 맥락에 따라 ‘물질’로 번역할 수도 있고 ‘물체’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스토아 철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제논에 따르면, 우주는 타오르는 불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한번 거대하게 불타올랐다가(‘ekyrsis’라고 한다) 다시 잦아드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른바 ‘영원회귀’(니체의 영원회귀와 구분해 ‘영겁회귀’라고 할 수도 있겠다)라고 불리는 매우 역동적 세계관이다. 그렇다고 이 세계가 질서가 없는 곳은 아니다. 제논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도 오히려 더 극단적인 결정론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불을 또한 ‘로고스’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얼핏 들으면 불이라는 말과 로고스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식으로 말해 제논이 말하는 불을 기(氣)로 해석하고 로고스를 이법(理法)으로 해석해 이 기 자체가 이법을 내포한다고 보면 이해가 간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이 불-로고스의 조각들이다.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스토아의 철학은 완벽하게 결정론적이고 일원론적인 형태를 띤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이 결정론이 근대적인 형태의 기계론적 결정론이 아니라 목적론적 결정론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 결정론은 ‘메커니즘’이나 ‘법칙’이 아니라 ‘섭리’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는 이 섭리를 인식하고 그에 따르는 것이 현자의 길, 철학자의 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에 따라 살라”는 것을 역설했다.


자연에 따라 산다는 것은 자신을 정념, 분노, 편견, 불안, ...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과도 같다. 데 역점을 둔다. 철학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곧 무의미한 열정으로부터 해방되어 잔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pathos’를 초연하게 극복한 ‘apatheia'의 경지이다. 이 점에서 도가나 불가와 통한다. 스토아적 가치는 ’초연(超然)함‘을 추구한다. 스토아적 초연함은 일차적으로는 쾌락과 공포로부터의 초연함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주에 대한 관조, 그리고 자신의 의무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이성적이고 강인한 초연함이다. 이성적이고 용기 있는 사람이 ‘스토아적 현자(賢者)’이다. 삶의 풍랑(風浪) 속에서도 이성적인 초연함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스토아적 현자이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의 보다 적극적인 측면은 현실 속에서의 초연함이다. 다시 말해 현실을 피하고 소요(逍遙)하는 초연함이 아니라 현실에 용감하게 맞서고 우주의 섭리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불굴의 초연함이다. 스토아 철학은 강인하고 불굴의 용기를 갖춘 영웅들의 철학이기도 하다. 우리 삶에 몰아닥치는 갖가지 사건들을 초연하고 용기 있게 대처하는 실천적 철학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토아적 금욕주의가 즉물적인 의미에서의 “조용한” 철학을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스토아 철학자들은 대개 격정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끊임없이 자기를 휘젓는 무의미한 열정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기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autarkeia’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으로 불굴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곧 주관적 조건들을 초월해 우주적 이성에 따라, 자연적 섭리에 따라 사는 삶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처럼 “춥든 덥든, 피곤하든 휴식을 취하였든, 욕을 먹든 칭찬을 받든, 죽어가든 일에 분망하든, 너의 의무를 다하여라.” 그러나 우주의 섭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한 이론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또 제논은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들, 사람들이 궁극에는 모두 무차별적이라는 생각을 편다. 이런 생각은 이른바 ’사해동포주의‘로 이어진다. 스토아 학파는 박애(博愛)를 강조했다. 편협한 테두리를 무너뜨리고 위대한 의무에 자신을 바치는 삶이 뛰어난 삶이다. 동정(同情)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의무 때문에 도와야 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그 태두(泰斗)인 에피쿠로스(Epikuros, 서기전 331-270)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이 살던 삶의 현실을 적의에 가득 찬 세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이 적의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찾을 것인가를 희구했다. 그는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마련해 준 ‘정원(庭園)’에서 활동했으며, 이는 후에 ‘에피쿠로스의 정원’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찾았던 중요한 한 가지는 ‘아레테(aretê)’ 또는 ‘아가톤(agathon)’이었다. 전자는 흔히 ‘덕(德)’으로 번역되지만 더 정확히는 뛰어남/빼어남, ‘...다움’을 뜻하며, 후자는 흔히 ‘선(善)’으로 번역되지만 더 정확히는 ‘좋은 것’을 뜻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무엇이 좋은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hedonê’라고 답했다. 이 말은 ‘快樂’ 또는 ‘기쁨’으로 번역될 수 있다. 본래 한자의 의미는 그렇지 않음에도 ‘쾌락’이라는 말은 오늘날 말초적이라는 어감을 풍긴다. 때문에 ‘쾌락주의’라는 이름만 가지고 그 내용을 상상할 경우(사람들은 흔히 정확한 내용을 모르면서 그 이름만 가지고서 내용을 엉뚱하게 억측하곤 한다) 큰 오해를 할 수 있다. 실제 중세의 에피쿠로스가 생각한 쾌락=기쁨은 말초적 쾌락과는 다른 것, 아니 거의 반대되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기쁨은 차라리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평온함이었다.


에피쿠로스에게 성취를 증가시키는 것은 삶에 휘둘릴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때문에 욕망을 줄이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데모크리토스와는 달리 에피쿠로스의 사유에는 깊은 비애(悲哀)의 여운이 깃들어 있다. 때문에 에피쿠로스 학파는 스토아 학파의 소극적인 초연함만을 추구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동요로부터의 자유”로 규정한다. 이런 쾌락 추구의 핵심적인 방법은 지적 탐구와 대화이다. 왜인가? 삶의 많은 문제들은 실제 상황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많은 주관적 괴로움들은 사실 그릇된 믿음들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특히 죽음의 문제에 대해 이 점을 강조했으며, 루크레티우스는 종교의 해악을 경고했다.


에피쿠로스 학파도 스토아 학파처럼 감각에서 인식의 근거를 찾았다. 그러나 감각이 언제나 실재와의 일치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감각은 최종적인 진리가 아니다. 감각도 결국 원자들의 운동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근본 사상은 원자론이다. 에피쿠로스가 본격적인 저작을 남기지 않은데 비해 그의 제자인 루크레티우스(Lukretius, 서기전 96-55)는 장대한 철학시(哲學詩)인 『자연에 관하여(De rerum natura)』를 남겼다. 이 철학시는 유물론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표현하고 있는 최초의 본격적인 저작이다.


1) 이 세계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자연에는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다. 비교: “天地不仁”.
2) 세계는 원자와 허공으로 되어 있다. 원자들이 낙하하다가 방향이 틀어짐으로써(‘클리나멘’) 혼돈이 생겼고 그로부터 다양한 질서들이 만들어졌다. 비교: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자연에서의 이런 우연=비결정성이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의 근원이다. 영혼도 예외가 아니다. 영혼은 공기, 숨, 열 및 제 4의 원자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자연은 놀랍도록 풍부하며 아름답고 위대하다. 그러나 거기에 목적과 계획은 없다. 다만 우연과 필연의 놀이만이 있을 뿐이다.
3) 자연이 인간을 낳았다. 인간은 진화해서 문명(文明)을 만들었다. 그러나 두 가지 불행한 존재가 태어났다. 그 하나는 사유재산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이다. 사유재산 때문에 야심, 탐욕, 전쟁, 범죄 등등이 생겨났고, 종교 때문에 불안(不安)이나 공포심이 생겨났다.
De rerum natura는 오로지 원자론에만 입각해 철학의 모든 문제들을 일관되게 논한 대표적인 저작이다. 그러나 목적은 과학적 세부 사항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혼의 해방에 있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이런 생각은 당대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던 종교적 사상들과 충돌하는 것이었으며, 최초의 명확한 형태의 ‘탈신비화(demythologization)’의 사상을 보여준다. “경건(敬虔)이란 흔히 생각하듯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재단 앞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볼 문제가 아니라 [...] 오히려 평화로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자연철학은 스토아 학파의 그것보다 훨씬 간명하고 극단적이다. 단적으로 말해,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는 영혼조차도 물질이지만, 스토아 학파에게는 물질조차도 영혼이다.(물론 영혼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물질이다) 스토아 학파의 우주론은 독특하게도 유물론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중세에 에피쿠로스 학파가 천대받은 반면 스토아 학파는 일정 정도 세력을 유지했으며, 근대에 들어와서는 오히려 에피쿠로스 학파(와 회의주의 학파)의 영향이 컸던 것도 이 때문이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세계의 현실을 파악한 바는 비슷하다. 스토아 학파에게도 삶이란 힘겨운 것이며 세상은 적의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의 처방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대조적이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개인적인 안심(安心)을 추구했다면, 스토아 학파는 삶에 대한 강인한 의무(義務)를 추구했다. 개인적인 욕망, 감성, 편견에 휘둘리는 것이 인간이다. 스토아 학파는 이런 현실을 뚫고 나가 이성적이고 용기 있는 삶을 살라고 권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대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관용과 우애를 역설할 뿐 스토아적 의무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평온한 사람은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평온한 삶은 곧 정의로운 삶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不義)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과 고통에 대한 신중한 계산을 강조한다.(훗날의 공리주의로 이어짐)

스토아 학파는 형이상학적 자연철학에 근거에 열정적인 의무의 철학을 제시했다면, 에피쿠로스 학파는 완벽한 탈신비주의를 보여주는 자연철학에 근거해 소극적인 안심(安心)의 철학을 제시했다. 미묘한 엇갈림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물론이라는 점에서 공통되며, 로마적 철학을 추구했다는 것도 공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