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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기독교와 불교

by 마리산인1324 2010. 10. 5.

<출처불명>

 

 

기독교와 불교

 

 

믿음과 깨달음


철학이 경험과 사유의 결합을 통해 계속 열린 탐구를 이어간다면, 종교는 특정한 사상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제도화한다. 종교와 철학은 성격이 판이하지만 종교의 ‘교리(敎理)’ 부분은 철학적 성격을 띤다.
중세는 특정한 철학/종교가 확고한 진리로서 국가의 통치이데올로기로 군림한 시대이며, 때문에 중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초월적 존재에의 믿음


헬레니즘 시대는 본격적인 철학보다는 안심(安心)을 구하는 인생철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대는 ‘구원에의 갈망’이 지배하던 시대이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초월성의 거부를 통해 유물론적 철학을 세우고 그로써 행복을 추구했다면, 그 이외의 대부분의 사조들은 종교의 형태를 띠었다. 이 시대는 종교의 시대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적 사상을 지배한 것은 플라톤주의였다. 플라톤주의는 이원론적 종교들과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 나아가 기독교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플라톤주의는 변질된 플라톤주의이며 오리엔트적 종교들 및 신비주의(점술, 점성술, 해몽, 예언술, 접신술, ...)이 가미되었다.

오르페우스교와 퓌타고라스 학파가 결합된 신퓌타고라스파는 플라톤적인 이원론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 이들은 플라톤이 은유적으로 말한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극히 사변적이고 초월주의적인 교리들을 만들어냈다. 육체와 영혼의 날카로운 이분법, 윤회설, 상기설, ...등이 특히 그렇다. 초월성에 다가가려면 육체를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동방에서 유래하는 여러 신비주의적 의식(儀式)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영지주의(靈知主義)’=그노시스파 역시 이원론을 견지했으며, 당시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기독교에도 스며들었다. 이들에게서 현실세계는 악한 신인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물질의 세계를 초월해야 영혼들만이 사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죽음이 그 통로이다. 영지주의는 서구 문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플로티노스(Plotinos)는 플라톤을 보다 종교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 이른바 ‘신(新)플라톤’ 학파를 만들어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잇되 좀더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사유로 나아갔다면, 플로티노스는 보다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사유로 나아갔다. 중세 사람들이 플라톤의 사유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상 상당 부분 플로티노스의 사유였다.
플로티노스와 그 후계자들은 대개 오리엔트 지방(이집트 등) 출신이었으며 그리스-로마적 전통에 오리엔트적 요소들을 가미했다.
플라토니스의 철학은 흔히 ‘流出說’로 불린다. 플라톤이 감각적인것과 형상적인 것을나누었다면, 플로티노스는 존재들을 위계적으로 배열한다. 궁극적 존재는 일자(一者=the one)이다. 다른 존재들은 일자로부터의 유출을 통해서 성립한다. 일자는 넘쳐흐르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유출한다. 다른 존재들은 각각 구분되긴 하지만 서로 이어지면서 마지막에는 물질에 도달한다. 따라서 물질의 세계에서 출발해 존재의 사다리를 올라가 일자에 가까이 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플로티노스의 사상은 연속적 초월의 사상이다.
플로티노스의 사상은 일원론적이고 연속주의적이다. 그래서 일자는 어디에나 임재(臨在)한다.(‘parousia’의 사상) 이 임재가 초월의 근거가 된다.(포르퓌리오스 『플로티노스의 생애』와 『기독교도 논박』을 썼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입문서와 주석서를 썼다. 이 입문서와 주석서는 스콜라 철학의 초석이 되었다. 여기에서 포르퓌리오스는 유(genera)와 종(species)은 실재들인가 아니면 개념들인가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중세의 ‘보편자 논쟁’의 씨앗을 뿌렸다.
는 플로티노스 자신은 일생에 네 번 接神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마이너스는 없다. 다만 플러스의 계속 적어지는 방향이 있을 뿐이다. 악은 선의 결여(privatio)이다. 일자가 아닌 것들은 악이 아니라 일자의 결여태이다. 태양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빛이 약해지는 것과 같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존재의 충만함(plenitude of Being)’이다. 물질은 일자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일자의 약화(弱化)의 극한일 뿐이다.
일자 자체는 서술할 수 없다. 서술 자체가 일자를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일자가 존재한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일자 아래의 단계는 理性(nous)의 단계이다. 이것은 순수정신으로서 사유라는 것 자체이다.(사유하는 존재가 있고 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영혼(psychê)이 있다. 영혼은 조직화의 원리(생명의 원리)이다. 그 아래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물들이 존재한다.
플로티노스는 훗날 기독교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일자는 기독교의 신과 동일시되었고, 유출설에 불연속이 도입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노스에 입각해 기독교 철학을 구성했고, 그 철학이 중세로 이어졌다.
플로티노스의 저작으로는 9편의 글을 모아 한 권으로 해서 모두 6권으로 된 『에네아데스』(‘아홉 벌’이라는 뜻)가 있다. 이 책은 포르퓌리오스가 편집한 것이다.

기독교는 유태교에서 연원하지만 예수를 새로운 분기점으로 인정함으로써 유태교에서 갈라져 나온 한 지류(支流)이다. 유태인들의 원래 뿌리는 ‘히브리인들’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야콥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스라엘’이 생겨났고, 훗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렸을 때 남쪽 국가가 ‘유태’가 된다. 유태가 바빌로니아에 망한 이후 ‘유태인들’이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유태인들은 사막의 유목민들로서 야훼(여호와)라는 신과의 ‘계약’을 통해서 종교생활을 했다. 때문에 이들의 경전은 ‘약(約)’으로서 표시된다. 유태교의 기원은 ‘토라’라 불리는 다섯 경전(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일들은 ‘예언서’라 불리는 경전들(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및 ‘후기 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에 나타나 있다. 그밖에 ‘성문서’는 여러 가지 문서들(documents)로 구성되어 있다.
유태교는 인격신인 유일신과의 약속, 선민의식, 배반과 구원의 반복, 메시아주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의 뿌리로서만 다루어지며 유태인들 사이에서만 이어지고 있다.
유태교 입장에서는 예수는 유태교의 한 예언자이며 타락한 유태교를 다시 세우려 한 사람이다. 이것은 예수 자신의 말로 알려진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이르나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한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따라서 유태교 경전은 성문서에서 그친다.
그러나 예수의 후계자들은 예수를 유태교로부터 갈라져 나오는 하나의 새로운 갈래로 만들고자 했다. 특히 바울이 그런 작업을 했으며, 이 점에서 기독교의 창시자는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예수의 전설을 활용해 유태교로부터 단절되어 나오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것이다.(‘christ’라는 말은 유태교에서는 ‘메시아’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이런 맥락에서 ‘Jesus Christ’라는 고유명사로 바뀐다)
예수의 생애는 네 종류의 『복음서』에 수록되어 있으나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기록된 것이어서 신빙성에 대한 논의가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 사상’은 예수의 생애를 모태로 해서 바울이 다듬은 것으로서 바울이 쓴 것으로 알려진 편지들에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