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불명>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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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궁극 목적으로서의 행복
ab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설은 인간 행동이 어떤 목적을 지향한다고 보는 데서 시작한다. 목적들은 다양하며 그 중 어떤 목적은 다른 목적에 종속되고, 그 다른 목적은 또 다른 목적에 종속될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에는 궁극 목적1)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 행동의 궁극 목적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선2)이 그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무엇이 최고선일까? 즉 우리의 궁극 목적이 되는 최고선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행복(eudiaimonia)3)이 그것이라고 답한다. 이런 점에서는 그의 윤리설은 행복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ab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설은 인간 행동이 어떤 목적을 지향한다고 보는 데서 시작한다. 목적들은 다양하며 그 중 어떤 목적은 다른 목적에 종속되고, 그 다른 목적은 또 다른 목적에 종속될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에는 궁극 목적1)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 행동의 궁극 목적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선2)이 그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무엇이 최고선일까? 즉 우리의 궁극 목적이 되는 최고선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행복(eudiaimonia)3)이 그것이라고 답한다. 이런 점에서는 그의 윤리설은 행복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잘 살고 편한 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는 데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4)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행복하다는 것이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말을 도덕적 판단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행복하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이며 가장 바라던 것을 가지는 것이지 칭찬을 받는 것은 아니다5).
ab행복은 복합적인 것이다. 이상적인 삶은 그것이 포함한 한 가지 요소에 의해서만 이상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준들 또는 희망 사항을 가진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매우 못생기고 천한 출신이며 외롭거나 아이가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1095b2) 또한 돈도 필요하다.(1099a31) 즐거움과 우정, 그리고 모든 인간적 탁월성은 행복에 필수적이다. 최상의 삶의 후보로 상식적으로 거론되는 세가지 유형의 삶은 감각적 즐거움의 삶과 세속적인 일에 연루된 삶, 그리고 이론적 성찰의 삶이다.
ab이 중 첫번째 유형의 삶은 단순한 동물의 목표이다. 다른 두 가지는 실천적이든 이론적이든간에 이성을 사용하고 있는 활동을 포함 한다. 생물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 목적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우리가 심장, 간, 신장 또는 눈의 기능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데, 이러한 기관들 중 어떤 것도 단순히 쓸모없는 잉여물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과 같이 심장, 신장, 간, 눈등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만이 홀로 추론 능력을 가진다. 이렇게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은 단순히 쓸모없는 잉여물이 될 수 없다. 추론 능력은 한 사람을 독특하게 인간(human)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충족적인 인간의 삶은 추론 능력을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독특한 인간의 추론 활동을 빠뜨린 삶은 짐승에게 적합한 삶을 선호하고 자신들의 기호에 노예적인 사람들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ab아리스토텔레스는 보다 구체적으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특징적인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6). 성장과 재생산은 동물, 식물과 공유하는 기능이고 감각은 동물과 공유하는 기능이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특징적인 기능이 될 수 없다. 『De Anima』에서 밝혀진 것처럼 인간 속에는 이러한 기능들 위에 더 상위의 기능이 놓여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계획, 규칙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안에 계획을 이해하고 그것에 따르는 부수 기능이 포함된다. 행복은 이러한 기능의 삶임에 틀림없다.
ab둘째로 행복은 단순한 잠재태(potentiality)가 아니라 현실태(activity)임에 틀림없다. 셋째, 행복은 덕7)에 따르는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 하나 이상의 덕이 있다면 최선의 가장 완벽한 덕에 따르는 것일 것이다. 넷째, 행복은 단지 짧은 시기에 드러날뿐만 아니라 전생애를 통해 드러남에 틀림없다.8) 이러한 정의는 행복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과도 부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덕에 부합하는 활동이라고 보기 때문에 덕의 본성에 대한 세밀한 논의를 전개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영혼안에는 논쟁을 이끌거나 계획을 만들 수 있는 엄밀한 의미의 이성이외에 계획을 따를 수 있게 하는 부분이 함께 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이성적 요소로도 비이성적 요소로도 분류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욕구(desire)하는 기능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적 삶속에는 두 종류의 덕이 있다. 이성적 요소의 덕과 매개적인 요소의 덕, 즉 지성의 덕과 성격의 덕이 있다.
2. 성격의 탁월성
ab아리스토텔레스는 세가지 유형의 인간의 탁월성, 즉 신체의 탁월성과 성격의 탁월성 그리고 지성의 탁월성을 나눈다. 성격의 탁월성과 지성의 탁월성은 인간의 이성적 삶 속에 포함되어 있고 선택이 가능한 영역에 속한다.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나 이론적 통찰과 같은 지성의 탁월성은 명백하게 이성적이다. 그러나 성격의 탁월성은 비록 본질적으로 지성의 형태는 아니며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아닌 비이성적인 부분의 탁월성이지만, 여전히 이성에 귀를 기울인다(1102b30). 이성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통해 성격의 탁월성은 신체의 탁월성과도 구별된다.
ab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동의 탁월성을 연구하면서 구별되지만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측면들, 즉 성격의 탁월성과 선택들과 관련되어 있으면서 이것들을 통제하는 사유의 종류를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성격의 탁월성은 이성이 가장 좋은 행동의 방식이라고 결정한 것을 행위자가 기꺼이 실행하도록 만드는 단 하나뿐이지만 중요한 역할을 가진다.
ab지성의 탁월성은 대개 가르침을 통해 획득된다. 성격의 탁월성은 비합리적이기는 하지만,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획득된다9). 물론 성격의 탁월성이든 지성의 탁월성이든간에 우리가 탁월성을 획득하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는 이와 관련된 능력들을 가지고 태어나야 하지만 탁월성은 계발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어떠한 성격도 갖지 않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따라서 우리가 좋은 성격을 획득할지 또는 나쁜 성격을 획득할지는 우리가 받는 양육의 종류에 의존한다. 성격은 단순히 우리가 하고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우리가 하기를 즐기는 것, 우리가 하기를 원하는 것에 달려 있다. 탁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올바른 방식으로 힘들이지 않고 행동할 것이다. 따라서 탁월한 성격은 가장 행복한 삶 즉 가장 선택할 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가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격의 탁월성은 중용에 있다고 생각한다. 두려움, 자신감, 욕구, 노여움, 연민, 그리고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것들과 싫어하는 것들은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적게 느낄 수 있으며, 양쪽 모두 좋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을 적절한 때에, 적절한 대상들에 관련하여, 적절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동기로, 그리고 적절한 방식으로 느끼는 것은 중간적이고 가장 좋은 것이며, 이것이 탁월성의 특성이다.(1106b19) 중용은 이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탁월성은 우리에게 상대적인 중용 상태에 있는 일정한 선택 성향으로서 정의될 수 있다.
ab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쿠스 윤리학』의 3권 6장에서부터 5권까지에서 개별적인 성격의 탁월성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10) 이성은 그 자체로는 활동력이 없다(1139a36). 음식에 대한 기본적인 본능이나 욕망 없이는 우리의 먹는 습관들에 대해 신중하거나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어떠한 감정도 없고, 따라서 욕구도 없다면, 우리는 실천적 지혜에 의해 인도되는 어떠한 성격의 탁월성도 나타낼 수 없다. 이성적 소망을 가능하게 만드는 본능적 욕구와 이성의 상호 작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중심 주제이다. 그 두 가지가 없다면 어떠한 인간적 행동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과 같은 동물은 만일 즉각적인 욕구의 만족을 버릴 수 있고 장기간의 좋음과 궁극적으로 행복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면 일반적인 자연의 규칙성에 관한 지식, 예견, 기억, 계획 수립과 심사숙고의 능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만이 이러한 이성적인 능력들을 가지며, 따라서 본능적 욕구들뿐만 아니라 이성적 소망들도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성적 소망이 본능적 욕구와 모순될 때에는 이성적 소망이 우세해야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3. 지적인 탁월성
ab이론 이성은 달리 될 수 없는 것, 필연성으로부터 나온 것, 영원히 그렇게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달리되어질 수 있는 것은 행동과 생산의 영역 안에 있다고 말해진다. 이론적 문제들에서 탁월성은 전통적으로 지혜(sophia)라고 불리어졌고 실천적 문제들에서는 실천적 지혜(pronesis)하고 불리어졌다. 건전한 실천적 원리들과 상황에 관한 지식에 비추어 어떤 행동을 선택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실천 이성의 영역 안에 있다. 그래서 이성과 욕망은 선택의 분리 불가능한 측면들이다.
ab어떤 목적을 위한 욕망과 어떻게 목적에 도달할지에 대한 추론이 없다면 어떠한 선택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계획을 세울 수 없다. 현명하다는 것은 탁월성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는 좋음들에 대해 올바로 판단하는 성향이다. 실천적 지혜가 이러한 종류의 탁월성이기 때문에 나쁜 사람들도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 나쁜 사람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 수 있지만 그의 계획은 좋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지 않아서 결국 그는 커다란 해악을 겪을 것이다.(1142b18) 따라서 현명한 계획과 심사숙고는 두가지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것들은 바람직한 목적으로 이끌어야 하며 목적이 좋아야 한다. 즉 목적은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야 한다.
ab아리스토텔레스는 심사숙고하는 능력과 같이 실천적 지혜에 필수적인 하위의 탁월성을 두가지 더 들고 있다. 첫째, 상황을 총합하는 능력인 이해(understanding)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상황을 평가하는 것과 이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는 동안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아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상황을 파악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적절한가를 결정하는 능력인 판단(judgement)이 있다. 일반적 원리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체적인 상황의 모든 복합성들을 올바르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지 경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1143b11)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으로 실천적 지혜는 단지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성숙한 나이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지혜가 없다면 성격의 탁월성은 어둠 속에서 더듬는 사람과 같고 반대로 탁월한 성격의 욕망들이 없다면, 지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ab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 시간, 장소, 사람들, 목표들과 같은 수많은 변수들과 관련하여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개별적인 상황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어떤 일반적인 규칙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에만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어떠한 단순한 규칙도 실제 생활의 복잡성을 다루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이론적 지혜는 오직 필연적으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만을 가진 불변하는 세계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론적 지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변화하는 세계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행복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1143b18) 지혜는 탁월성 전체의 한 부분이며, 지혜를 소유하는 것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나 지혜는 행복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탁월성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4. 관조적 삶의 문제
ab아리스토텔레스는 최상의 삶의 후보로 상식적으로 거론되는 세가지 유형의 삶, 즉 감각적 즐거움의 삶과 세속적인 일에 연루된 삶(정치적 활동의 삶), 그리고 관조적 삶(이론적 성찰의 삶)중에서 가장 행복한 삶은 관조적 삶이며 두 번째로 정치적 삶이라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동과 과정을 구별하면서 좁은 의미에서의 활동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반면, 과정은 그것의 결과나 산물을 위해서만 추구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어떤 활동의 즐거움은 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활동 자체와 가까스로 구별되는 어떤 것이다. 즉 그에게는 어떤 일을 하는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은 그 일의 자체 목적을 위해 그것을 하는 것과 같다.
ab관조는 이론적 지혜인 탁월성의 발휘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과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관조는 어느 때나 그 자체로 완전하며 자신의 외부에 어떠한 한계도 갖지 않는다. 관조 자체는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지식의 즐김이다. 우리가 이전에 알았던 것으로부터 더 발전된 진리들을 연역해 가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분명히 어떤 과정이며,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자면 관조가 아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탁월성들은 성격에 관한 것이든 지성에 관한 것이든,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실천적 지혜는 비록 이론적 관조에 대한 정황을 제고하는 것으로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다.(1144a1)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윤리적 탁월성을 발휘한 상태에서 행동하는 삶을 행복의 한 형태로서 인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분명히 두 번째 선택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관조적 삶)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이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인 한에서가 아니라 인간 속에 신적인 그 무엇이 있는 한에서이니 말이다......그러므로 인간에 비하여 이성이 신적인 것이라고 하면, 이성을 따른 생활은 인간적인 생활에 비하여 신적인 생활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인간이니 인간적인 일을, 또 사멸할 것일 따름이니 사멸할 것들을 생각하라"는 권고를 따를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 자신을 불사불멸의 것이 되게 하고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최선의 것을 따라 살도록 온갖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1177b-1178a)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어서 어떤 것이든 그것에 고유한 것이 본성상 그것에 가장 종고 즐거운 것이므로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성을 따른 생활이 가장 좋고 즐거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되게 하며 이러한 생활이 가장 행복한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조적 삶에 대한 강조는 행복은 복합적인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이나 각종 탁월성(덕)과 실천적 지혜에 대한 논의와 대립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덕을 따른 생활은 제2차적으로 행복하다. 그런 덕을 다른 활동은 우리들 인간의 형편에 어울리는 것이니 말이다. 의로운 행위라든가 용감한 행위, 이 밖의 덕있는 행위를 우리가 피차간에 하는 것은, 계약이라든가 봉사라든가 온갖 행동 그리고 정념에 관련하여 우리들 각자의 의무를 지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전형적으로 인간적인 것으로 보인다.>>(1178a)
여기서 나타나는「가장 행복한 삶」, 「2차적 행복」이라는 표현을 상호배타적인 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작품의 전반적인 방향과 일관되게, 행복한 삶이란 모든 인간의 탁월성들과 모든 가치 있는 활동들이 충분히 표현되는 삶이며, 비록 관조가 중요하고 유력한 구성요소로서 강조될수 있을 지라도, 어떤 인간의 탁월성도 게으름에 의해 감퇴되지 않는 삶11)이라고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주
1.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목적론적이다. 도덕성은 그 자체로 옳기 보다 우리를 최선의 삶에 더가깝게 가져간다고 보는 행동들에 있다. Ross는 이러한 관점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행위」와 그것의 결과로 인해 가치를 갖게되는 「생산」을 구분하는 것과 조화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Aristotle』, Sir David Ross, Methuen&Co LTD, 1971, 188p <돌아가기>
2. 행복을 인간행위의 원리로서 근거지우려는 철학적 시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주관적 만족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 이상의 어떤 다른 목적이 생각될 수 없는 절대적 최고의 목적으로 이해한다. 회페는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칸트 역시 요청이론의 틀 속에서 인정한 것처럼 최고선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칸트는 최고선의 개념을 의지 윤리학의 틀에서 생각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 윤리학의 틀 속에서 최고선을 파악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임마누엘 칸트』, 오토프리트 회페, 이상헌 옮김, 문예출판사, 1997, 235p <돌아가기>
3. Ross는 ε?δαιμουια은 원래 「좋은 신에 의해 돌보아진」(watched over by a good genius)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인 그리스어 용법에서는 번영(good fortune)을 의미하며 종종 외적인 번영과 관련하여 쓰인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행복」(happiness)라는 일반적인 번역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는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영원, 깊이, 평정의 암시로 인해 「즐거움」과는 구별되지만 감정의 상태를 의미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ε?δαιμουια은 일종의 행위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다시말하면 비록 즐거움이 행복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즐거움도 아니다. Ross는 더 오해가 적은 "well-being"이라는 번역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Aristotle』, Sir David Ross, 190p <돌아가기>
4. 『Nicomachean Ethics』, 1095a19, 이하 본문에 쪽수만 표시. <돌아가기>
5. 만일 우리가 도덕적 삶을 산다면 물론 칭찬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산다면 축하받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높이 평가 받는 것과 칭찬받는 것을 자주 구별한다(1101b10). 행복은 높이 평가받는 것이다. 그것은 성공 즉 성취이다. Urmson은 만일 우리가 현대 윤리학자의 질문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인 "행복한 삶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은 부모에게 묻게되는 "당신은 어떤 종류의 삶을 자녀들에게 바라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기대되는 것과 비슷한 대답을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성공을 구성하고 있는 것에 관해 자녀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지만 그들이 인생에서 성공하기를 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J.O. 엄슨, 장영란 옮김, 서광사, 1996, p32 <돌아가기>
6.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쾌락이란 인간만의 것이라기보다는 동물을 포함한 유정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인 반면, 인간은 쾌락보다는 행복을 목표로 하는 존재이다. 그는 인간의 종차인 합리성을 제대로 발휘하는 아레테로서의 덕을 소유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을 본질주의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행복의 개념을 이끌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행복의 윤리학』, 문시영, 서광사, 1996, 40p <돌아가기>
7. Urmson은 arete를 덕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지적인 덕들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들은 자연히 정직, 공평, 자기 비판과 같은 것들을 의미하게되는데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논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arete를 vitue로 번역하게 되면 「수학을 잘하는 것은 덕스럽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이해할수 없게 된다. Urmson은 arete를 탁월성(excellence)로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이글에서는 덕과 탁월성을 문맥에 따라 혼용한다. <돌아가기>
8. "...더욱이 이런 활동은 전생애에 걸쳐야 한다.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아직 봄은 아니며, 하루아침에 여름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루의 또는 단기간의 행복이 사람을 무한히 축복되게,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098a) <돌아가기>
9.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사람들은 염치감에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공포심에 지배되고, 나쁜 행위를 삼가는 것도 그 행위가 추악해서가 아니라 벌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처럼 성격속에 오랫동안 도사리고 있던 습성을 언설에 의해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따라서 올바른 법률 밑에서 어릴때부터 양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습관이되면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으로 확대된다. <돌아가기>
10.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부족했던 측면을 보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은 단순한 공허한 이데아만으로써는 그의 삶의 방향을 잡아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데아에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여함 하고, 그것을 인간적 선으로 만들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일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선의 이데아가 다수의 구체적인 덕(탁월성)의 이상으로 분화됨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덕들이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나서 그를 현실적으로 지도할 수가 있다. 『존재론의 입장에서 「인식과 윤리」』, 니콜라이 하르트만, 허재윤, 금교영 옮김, 형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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