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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 /안상헌

by 마리산인1324 2010. 10. 6.

<안상헌교수 홈피>

http://web.chungbuk.ac.kr/~ahnsah/tnboard/main.cgi?board=open_board

 

 

이 논문은 "문예미학" 8, '비판이론'(문예미학회, 2001. 5. 25) 225-248쪽에 실려 있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00년 12월 16일 [비판이론]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근래에 들어 관심과 연구열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마르쿠제의 사상에 대해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조망해 본 글입니다. 안상헌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

 

안상헌(충북대 철학과)

 

 

1. 마르쿠제의 딜레마

 

마르쿠제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마르크스가 남긴 유산에 가장 충실하고자 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마르크스의 유산으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마르크스가 남긴 유산 중에서 1) 당대의 구체적인 ‘현실로부터의 출발’ 이념과 2) ‘이론과 실천의 통일’ 이념에 가장 충실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3)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이해 방식을 끝까지 견지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1) 3-40년대의 파시즘 등장, 2) 냉전체제 이후의 소련과 동구권의 파시즘화, 3) 50년대 이후 선진 산업사회에서의 노동계급의 급속한 부르주아화, 4) 소비와 여가 중심의 대중문화, 5) 60년대의 학생운동과 70년대의 신좌파 지식인 운동, 그리고 6)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과 같은 ‘변화된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과 실천에 있어, 주로 1) 기술적 합리성 비판, 2) 억압적 관용과 과잉 억압 비판, 3)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의 체제 이데올로기 비판, 4) 일차원적 사회 비판, 5) 억압적 관용과 반혁명 비판에 초점을 맞춘 ‘이데올로기 비판’에 치중함으로써, 1) 부정적 이성 변증법, 2) 개인의 욕구에 대한 억압과 해방 이론, 2)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의 화석화 비판과 새로운 변혁 주체론, 3) 일차원적 인간 및 일차원적 사회에 대항하는 ‘위대한 거부’의 결단과 요청, 4) 유토피아적 사유를 통한 새로운 기술. 새로운 인간성, 새로운 감성,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회로의 가치 전도, 5) 미학적인 변혁 이념과 같은 마르크스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마르쿠제는 일생동안 이론적으로는 1) 마르크스 이념의 수용과 견지, 2) 마르크스 이념의 보완과 수정 그리고 일탈을 반복해 왔으며, 실천적으로는 1) 급진적 낙관주의와 2) 절망적 비관주의가 교차하는 외로운 그러나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의 양극화된 문제의식과 인생 역정으로 말미암아,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 그리고 비마르크스주의 진영 모두로부터 1) 수정주의자, 2) 낭만적 혁명주의자, 3) 급진적 유토피아주의자, 4) 존재론적 관념론자, 5) 엘리트주의자, 6) 완고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7) 비판적 계몽주의자, 8) 전체주의적 유토피아주의자라는 비난과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 현존 자본주의 사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미래 사회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전망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으며, 2)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이해 방식을 역사발전에 대한 포괄적 분석 방법이자, 미래에 대한 실천적 전망 하에서 사회, 정치, 문화의 경향을 설명하는 최상의 이론으로 간주했으며, 3) 변화된 현실에서의 인간 해방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부단히 추구해 왔다.

 

이렇듯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는 매우 지난하고 복잡한 과정을 겪어왔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평가 또한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니다. 이 글은 1)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의 흔적을 먼저 간략히 정리한 후, 2) 마르쿠제 후기 사상의 몇 가지 특징을 사례로 들어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에 대해 한 가지 미리 언급해 두자면, 마르크스 ‘따라잡기’란 마르크스 이념의 맹목적 추종이나 고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현실 안에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념에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말하는 것이며, 마르크스 ‘벗어나기’란 변화된 현실과 관련하여 마르크스의 이념이 지닌 사회적, 역사적, 시대적, 개인적 한계를 얼마나 극복 또는 일탈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마르크스의 이념은 어떤 원리나 이론에서 출발하여 고정 불변하는 궁극적 진리를 발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하여 그에 적절한 이론적 실천적 전망을 제시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에 대한 평가는 마르쿠제의 이념이 그가 살았던 당시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얼마나 적절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2. 따라잡기와 벗어나기의 흔적들

 

1) 1918년 독일혁명기: 마르쿠제(1898-1979)의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의 인생 역정은 그가 처음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청년 시절의 경험, 즉 1차 대전 참전(1916-18) 당시의 독일혁명에의 정치적 참여에서 비롯된다. 이 시기의 흔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유대인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1916년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는 정치적 관심의 뚜렷한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입대 후 베를린에 주둔하면서 경험한 급진 사회주의자들의 반전 소요,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반목과 갈등, 대중파업과 노동자평의회의 출범과 같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 상황은 그에게 정치적 현실과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했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정치적 문제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정치적 투쟁대열에 참여한 것은 1917년 반전운동을 전개한 사민당(SPD)에의 합류였다. 그러나 사민당이 프로이센 부르주아 체제와 화해하는 태도를 취하고, 군대조직의 구 위계질서를 그대로 유지하고, 혁명 해군 조직을 해체하고, 부르주아 사법체제를 유지하고, 좌파에 대한 억압을 부추기고 지지하는 등 사민당의 부르주아 지배 집단과의 연대 움직임에 실망한 그는, 입헌 공화국을 선호한 사민당과 사회주의 공화국을 주장한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대립 상태에서 후자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으며, 칼 라이프크네흐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체포되고 암살되자 제대와 동시에 사민당을 떠났으며, 그 후 일생동안 사민당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2) 1918-1922년 문학기: 그러나 그는 자신의 무지, 즉 정치의식의 결여 때문에, 룩셈부르크와 라이프크네흐트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 대열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제대 후 곧바로 정치적 현실을 떠나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독일학, 철학,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1922년 「독일 예술가 소설」에 관한 학위논문을 마쳤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독일혁명의 실패는, ‘왜 이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실천적 문제의식을 갖게 했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마르크스와 헤겔과 프로이트를 읽기 시작했다.

 

3) 1927-32년 철학기: 1922년 학위를 마친 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결혼 후 고서점상에서 일하고 있다가, 1927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출간되자 다시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돌아가 하이데거 밑에서 마르크스주의와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실존주의를 ‘구체 철학’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 철학의 구체성은 사이비-구체성일 뿐만 아니라, 당시 강단에서 유행했던 신칸트주의, 신헤겔주의, 신관념론, 신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현실 문제와 동떨어져 있으며, 심지어는 현실 문제를 회피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하이데거 철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2년 교수자격논문인 ?헤겔의 존재론과 역사성 이론?을 완성할 때까지는 하이데거와 함께 있었다. 그가 왜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헤겔의 존재론으로 관심 방향을 바꾸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반응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자신의 언급은 없지만, 헤겔 존재론에 대한 관심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동적, 역사적 범주가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존재론보다는 사회변화와 역사발전의 이해에 더 적절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따라잡기의 결정적 전기는 1932년 마르크스의 ?경제철학 초고?(1844)의 공개적 출간이었다. 그는 이 ?초고?가 출간되자마자, 이에 대한 서평 논문인 「사적유물론 근거 놓기의 새 원천」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초기 마르크스 해석과 청년 마르크스와 장년 마르크스의 연속성과 단절성 논쟁에 단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해석에 중요한 단초가 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초고?에서 그는 마르크스 변혁 이론의 철학적, 인간학적 근거를 발견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 역사는 소외의 역사이며, 변혁의 과제는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이론적 단초를 마련하였다.

 

4) 1933-41년 사회비판이론기: 1932년 12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결합하여 「사회과학연구소」를 따라 제네바를 거쳐 34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 때부터 마르쿠제는 사회비판이론가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에 수많은 서평을 발표하였으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공통 관심사였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의 파시즘 및 권위주의 비판을 전개하는 동시에, 특히 철학과 비판이론의 관계를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30년대 초반까지는 마르크스주의적 프로그램을 기술하면서 ‘유물론’, ‘유물론적’, ‘경제적 사회이론’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1937년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비판 이론(Kritische Theorie)’이라는 용어를 채택하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며, 1941년 ‘사회과학연구소’ 활동을 중단한 후 비판이론가들이 각개 전투를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현격한 이론적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마르쿠제는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를 동시에 시도했다: 1) 사회이론의 중심에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치시키고, 2) 개인과 사회의 본질적 문제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경제적 환원주의를 제외한) 일관된 유물론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1) (파시즘의 승리나 억압과 지배적 관심에 봉사하는 부르주아 철학을 비판하면서도) 부르주아 철학이 지닌 진보적 측면을 옹호하기 시작했으며, 2) 철학은 만연된 이데올로기를 타도할 수 있는 개념을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이론에서 진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투쟁에 비판적 무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결정한 ‘연구소’의 전략에 따라 마르크스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비판이론의 토대로 간주했다: “유물론과 올바른 사회이론을 연결하는 두 가지 근본 요소가 있는 바, 이는 1) 인간의 행복에 대한 관심과, 2) 물질적 존재 조건을 변혁함으로써만 이를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새롭게 등장한 ‘행복’ 이념만 제외한다면, 마르쿠제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벗어나기의 특징은 비판이론을 인간의 욕구와 욕구 충족과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쾌락주의에 대하여」(1938)에서 ?에로스와 문명?(1955) 이후의 핵심 개념이 되는 욕구, 감성, 행복에 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으며, 행복의 사회적 조건과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행복은 계급적 현상이며, 소비영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주장은 ?초고?의 소외된 노동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개인의 모든 잠재력의 충족으로서의 행복은 자유를 전제하고 있으며, 자유는 행복의 근간”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행복 개념을 자유 개념과 연관시켜 ?에로스와 문명?에 나타나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념을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그는 현존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실현할 수 없는 이유는, 노동 체제 그 자체가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동 체제의 지배적 쾌락이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거짓으로 만들고 제약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진정한 욕구’와 ‘거짓된 욕구’, ‘진정한 행복’과 ‘거짓 행복’의 판단은 ‘이성’의 능력에 속하며, ‘비판의 법정’으로서의 이성 이념은 비이성적 사회의 변혁을 통해 이성적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나아가며, 이는 나중에 구체적 개인의 ‘위대한 거부’ 및 ‘리비도적 합리성’ 이념으로 발전되었다.

 

마르쿠제의 비판이론은 1) 현존 사회를 파악하고, 현존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변혁적 실천적 관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2)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착취와 소외, 잉여가치의 전유, 자본축적을 파악하고, 개념적 재구성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나아가 3)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려 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의 통합 이념과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통합이념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존하는 사회(what is)의 비합리성과 잠재적 미래 사회(what could be)의 합리성 사이의 모순에 대한 내재적 비판과 지양을 사회 변화의 추동력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헤겔의 이성 개념과 변증법 개념에 토대를 둔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현재와 단절된 미래의 유토피아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의 요구로 이어지면서 후기 마르쿠제 이론의 중요한 단초를 이루게 된다.

 

5) 1941년 ?이성과 혁명?: 비판이론가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마감하던 해에 그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사회이론을 정리한 ?이성과 혁명?을 출간하였다. 이 저술에서 그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 개념으로부터 ‘부정적 사유의 위력’을 강조함으로써 ‘위대한 거부’의 철학적 초석을 마련했으며, 헤겔로부터 마르크스로의 전환을 ‘철학으로부터 사회이론으로의 전환’으로 해석한다. 이 시기 마르쿠제는 전통 철학과 단절하고, ‘이데올로기 비판과 철학은 혁명 투쟁의 필수 불가결한 측면’이라는 코르쉬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여, ‘진정한 철학은 비판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현실 변혁을 요구하는 혁명의 추동력’이라고 주장하며, 철학을 사회이론의 일부로 간주하게 된다. 또한 그는 루카치와 코르쉬의 영향 하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의 실현’ 이념을, 철학의 사변적 성격을 청산하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지향하는 내적 추동력의 실현이라고 재규정한다.

 

이 시기에도 그는 여전히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동조하고 있으며,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이론을 수용하고(261ff), 마르크스의 「초고」에 개진된 인간학과 노동과정 분석을 수용하고(273ff), 자본주의 비판과 자본주의 몰락 이론(310ff) 및 사회주의 혁명론을 수용하고(318ff) 있을 뿐만 아니라,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레닌주의에 대한 선호를 드러내고 있다(314, 401).

 

그러나 그의 헤겔 해석은, 초기의 하이데거의 무비판적 수용에서도 드러났듯이, 헤겔 철학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헤겔을 변혁적 사회이론의 토대로 삼으려는 그의 시도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의 헤겔 해석은 전체적으로 관념론적인 ‘범이성주의’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헤겔 철학의 보수적 측면에 대한 비판을 결여하고 있다. 이성을 역사의 추동력으로 간주하고 사회를 이성의 실현체로 보는가 하면, 헤겔의 논리학과 존재론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철학적 진리의 전범으로 간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62), 헤겔 철학 자체를 비판적이고, 급진적이며, 파괴적인 ‘부정의 철학’으로 믿고 있었다. 헤겔 철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마르크스 철학이 헤겔 철학의 유일한 진정한 계승자라는 주장에 기반해 있다. 따라서 그는 헤겔의 관념론과 관념론적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의 매우 치열하고 강력한 비판을 간과하고 있으며, 루카치의 청년 헤겔 비판과 비교하더라도 마르쿠제의 헤겔 해석은 헤겔 텍스트와 역사적 맥락과 지성사적 맥락을 매개하는 헤겔의 전기적 해석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헤겔과 마르크스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헤겔 철학의 비판적, 해방적 요소를 체계화하는 헤겔리언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걷게 된 이유는, 독일 관념론 전통에 내재한 비판적 이성이 절망적인 파시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그는 파시즘이 종말을 고한 40년대 후반부터는 더 이상 헤겔철학을 옹호하거나 표방하지 않았으며, 단지 부정적 사유로서의 변증법과 비판적 이성의 해방적 측면을 강조하는데 그쳤다.

 

6) 1941-51년 학문적 단절기: 이 시기는 마르쿠제 개인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41년 호르크하이머가 이끌던 ‘연구소’ 활동이 중단되어 개별적 활동이 불가피해지자, 그는 프란츠 노이만, 오토 키르히하이머와 함께 워싱턴에 있는 미국 정부기관인 ‘전쟁 공보국’(OWI, 나중에 OSS로 개편되었으며, CIA의 전신)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행적 때문에 그는 나중에 많은 변명을 했어야 했다. 종전 후에도 51년까지 미국무성에서 일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아내의 중병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 시기에 발표된 알려진 논문은 거의 없으며, 학문적 활동은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7) 1951년 이후 독자적 활동기: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국무성을 떠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학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5년 ?에로스와 문명?, 1958년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1964년 ?일차원적 인간?, 1965년 ?순수 관용 비판?, 1969년 ?해방 이론?, 1972년 ?반혁명과 반란?, 1978년 ?미학적 차원?을 비롯한 수많은 논문과 저술은 마르쿠제 철학의 독자적 성격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의 첫 번째 문제의식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1943)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1947)과 같은 저작에 깔린 비관주의적 경향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원시 마술에서 현대 과학의 의식과 인간의 삶의 사물화 과정을 추적하면서, ‘인류는 왜 새로운 형태의 야만주의로 빠져들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만 집착하는 ?계몽의 변증법?에 실망했으며,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계몽의 변증법’의 일부로, 즉 해방의 담지자가 아니라 새로운 지배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극단적 염세주의로 전락한데 대해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러한 비관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변화된 새로운 현실에서의 변혁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타진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18년 독일혁명의 실패 이후 좌파들의 잇따른 실패, 종전 이후의 냉전 체제 강화와 군비 경쟁, 소비적 자본주의의 출현, 매카시적 반공주의와 같은 새로운 현실에 대응하여, 개인적 불행에도 불구하고 좌절은커녕 프로이트의 재해석, 문학과 미학 및 철학 연구를 통해 현대 사회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비판이론과 해방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생산력, 기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신뢰에 있어서는 매우 회의적이었지만 결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포기한 적은 없었으며, 생산력 자체가 억압적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강화하는 지배도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포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재건의 길을 선택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마르쿠제는 1)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문학적 관심의 양립, 2) 문학적 관심에서 철학적 관심으로의 전환, 3) 현상학적 실존주의에서 헤겔 철학으로의 전환, 4) 헤겔 철학에서 마르크스의 철학과 사회이론으로의 전환, 5) 파시즘과 권위주의 비판을 겨냥한 비판이론의 새로운 정초 단계를 거쳐, 마침내 2차대전 이후의 변화된 현실에 대한 본격적인 이론적 실천적 작업의 일환으로 1) 기술적 합리성 비판, 2) 선진 산업사회 비판, 3)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념, 4)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 새로운 가치, 새로운 감성, 새로운 기술,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유토피아적 사유, 5) 미학적 감성론을 전개해 나갔다.

 

3. 따라잡기와 벗어나기의 성격

 

앞에서 살펴본 대로, 마르쿠제의 현실적 관심사는 새로운 사회로의 질적 변화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타진하는 실천적 전망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이론의 실제 전개과정에서는 최초의 현실적, 정치적 문제의식이었던 ‘독일혁명을 비롯한 좌파운동의 잇따른 실패’에 대한 원인 구명과 그에 따른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마르쿠제의 문제의식은 다른 부류의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직면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재구성하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 안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처방식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1) 첫째는 마르크스주의 테제의 근본적 수정이며, 2) 둘째는 마르크스 저작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시대에 상응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성이며, 3) 셋째는 마르크스 사상의 해체와 일면적 재해석을 통한 부분적 수용이며, 4) 넷째는 마르크스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속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구출하여 변화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마르크스 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으나, 40년대에 들면서 점차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으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1947)을 기점으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이들과는 달리 마르크스를 새롭게 해석함(따라잡기)으로써 변화된 현실에 상응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 발전(벗어나기)을 시도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했다.

 

그렇다면, 마르쿠제는 과연 마르크스의 이념에 얼마나 충실하였으며, 동시에 벗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 50년대 이후의 저술을 중심으로 몇 가지 쟁점을 사례로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는 주로 50년대 이후의 서구의 선진 산업사회, 특히 그가 몸담았던 미국 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그의 이론적 실천적 관심은 1) 노동계급의 부르주아화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개념의 화석화, 2) 대중적 소비사회와 대중 문화의 등장과 반문화 운동, 3) 개인적 삶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억압과 이에 대항하는 신좌파 운동, 4)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과 반전운동의 맥락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그의 문제의식이었던 ‘혁명운동 실패’의 현실적 토대이자, 그의 새로운 변혁이론을 전개하는 현실적 전제로 받아들였다. 이는 마르크스의 ‘현실로부터의 출발’ 이념을 가장 충실하게 따라잡은 본보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전제에서 출발한 그의 변혁이론은 6-70년대 신좌파 운동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실제적 성과는 매우 미미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죽음과 동시에 그 영향력은 급속히 사라졌다. 물론 그 이유는 마르크스로부터의 이론적 실천적 일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 이제 그의 마르크스 벗어나기의 몇 가지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노동계급의 부르주아화와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의 화석화

 

마르쿠제는 좌파 혁명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기술과 생산력 발전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안정화 경향과 그에 따른 노동계급의 부르주아화를 들고 있다. 이러한 명백한 역사적 현실을 간과하고 노동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마르크스 이념에 대한 화석화된(사물화된) 그릇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혁명에 대한 비관주의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 당시에는 노동계급의 궁핍과 노동의 소외와 그들에 대한 착취가 계급의식을 가능케 했고 따라서 노동계급이 변혁의 핵심 역량이 될 수 있었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생산력 발전은 노동자들의 빈곤 문제를 해소했으며, 이에 따라 노동조합의 귀족화와 노동자들의 부르주아화가 현실로 나타났다. 이런 시점에서도 여전히 노동계급 중심의 변혁운동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이는 프롤레타리아 개념의 화석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마르쿠제 주장의 핵심이다. 따라서 마르쿠제는, 변화된 현실에서는 그에 적절한 새로운 이론과 실천이 요구되며, 이는 마르크스의 변혁이론의 부정이 아니라 마르크스 이론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마르쿠제의 이러한 주장은 원리적으로는 전적으로 올바른 주장이다. 왜냐 하면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의 통합이념은 현실적 전제인 구체적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도출한 적절한 이론만이 실천에서도 적절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현실 분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변혁의 역사적 필연성 내지는 불가피성을 도출해 내는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그것을 이론적 무기로 삼아 변혁에 나서게 될 물리적 주체를 전혀 설득할 수 없으며 따라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연유에서든 (부르주아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한 허위의식이든, 기관 없는 신체로 이루어진 통제 사회의 산물이든) 이미 부르주아화된 노동계급에게 왜 자신이 변혁의 대열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설명하고 납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이론은 실천적 이론이 아니라 주관적인 환상이나 당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르쿠제의 현실 분석은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프로이트의 욕구이론을 수용하여 현대 사회를 개인의 욕구에 대한 억압과 지배 체제로 규정하고 이러한 체제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론을 전개하며,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포함한) 선진 산업사회를 과학과 기술 발전에 의한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대중을 일차원적 인간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현실 분석은 1) 선진 산업사회에서의 경험을 일반화하고, 2) 계급적 측면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부르주아적 개인 개념에 의존하고 있으며, 3)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보다는 과학과 기술 중심의 산업사회의 모순 분석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벗어나기의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이는 마르쿠제 자신의 자의적 해석이거나 주관적 환상일 수 있다. 왜냐 하면, 마르쿠제 변혁이론은 프롤레타리아 개념의 화석화라는 원리적이고 소극적인 주장을 통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현실에서의 구체적 현실 분석을 통해, 역사적 필연성을 갖춘 대안적 주체 역량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구명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변혁의 주체가 이를 이론적 무기로서 받아들여 물리적 힘으로 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마르쿠제의 대안적 변혁 주체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마르쿠제에 있어서의 변혁 주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구하는 행복과 자유가 진정한 행복과 자유가 아니라 사이비 행복과 자유라는 점과, 이런 사이비 행복과 자유는 자본주의 자체의 메커니즘에 의해 자기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한 개인이나 집단들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국외자들이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개념 대신에 마르쿠제가 대안적 변혁 주체로 제시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잠재적 변혁 역량은 학생, 지식인, 여성 등과 같은 국외자 집단이다.

 

이들을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잠재적 변혁 역량으로 제시하기 위해 그가 시도한 이론은 프로이트의 욕구이론으로부터 끌어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론과 부정적 변증법적 이성의 ‘위대한 거부’와 '유토피아적 사유'이다. 그러나 국외자 집단과 개인을 변혁의 잠재 역량으로 제시하는 정당화 근거는 현실 분석에 입각한 역사적 필연성에 근거를 둔 것이라기보다는, 60년대에 들어 이미 전개된 반전, 반핵, 민족해방, 학생, 반문화 운동에 대한 현상적 분석을 통해 도출해 낸 것들이다. 그 결과 70년대에 들면서 국외자 집단, 특히 학생, 지식인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로, 마르쿠제는 새로운 변혁 주체를 찾아 나섰으며, 마침내는 현존 사회 체제의 억압에 대항하는 다양한 저항 집단을 두루 포괄하는 「통일 전선」, 「인민전선」 이론으로 나아가게 되며, 변혁에 대한 전망도 장기화되고, 현존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해방운동에서, 체제 내적인 개혁운동을 통한 ‘점진적인 변혁’을 지향하게 된다.

 

3)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론

 

변혁의 전망에 있어, 경제적 모순의 첨예화를 통한 프롤레타리아트 중심의 사회주의 변혁이 불가능해지면서 그가 제시한 이론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론이다. ‘억압’과 ‘해방’이라는 개념은 본래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면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의 구별을 위해 ‘착취’와 ‘혁명’ 개념을 대치한 것이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본능이론을 끌어들여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정당화하기 전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념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본능과 억압 이론을 새로운 비판이론의 토대로 삼기 시작하면서 그의 이론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억압 이론을 통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념을 정당화하면서, 프로이트의 억압이론이 지닌 회의주의와 보수주의, 프롬의 체제 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론, 그리고 빌헬름 라이히의 성 혁명론을 거부하고, 에로스적 에너지가 파괴적 에너지를 극복하고 인간의 전체적인 삶이 다시 에로스적 에너지의 구현으로 나아가는 인간해방 이론으로 이끌어갔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론에서 핵심적 문제는 ‘무엇에 대한, 무엇으로부터의 억압인가’ 하는 것이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억압은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 즉 에로스적 에너지에 대한 억압이며,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억압이자 구체적으로는 개인의 행복과 자유에 대한 억압이다. 이러한 논의는 물론 프로이트의 ‘쾌락 원리’, ‘현실 원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특수한 억압 원리로서 ‘수행 원리’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 개념을 통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념은 소외된 노동을 통한 자본주의적 착취, 자본의 이윤 추구를 위한 사치와 낭비의 재생산으로 인한 불필요한 생산과 소비,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의 소비 충동을 통한 과잉 노동 등을 포함시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종합을 시도한다. 이는 동시에 욕구 개념의 역사성을 인정함으로써 억압에 대한 역사적 유물론적 분석의 가능성과 변혁의 잠재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르쿠제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 현실에서의 특수한 ‘해방’ 이념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화 측면(what is)과 해방적 측면(what could be)의 대립과 모순, 즉 안정화 과정에서 야기되는 억압 및 지배 이데올로기와 기술 발전과 자동화를 통한 개인의 자유와 해방의 가능성과 잠재력의 대립으로부터 인간 해방의 당위성(what should be)을 도출함으로써, 그의 해방 이념은 객관적인 역사적 필연성보다는, 유토피아적 사유를 통한 인간해방의 당위성에 근거를 둠으로써 많은 난점을 안게 된다.

 

이러한 난점은 마르쿠제의 비판이론의 전반에 나타나는 본질주의/역사주의, 이성적/반이성적, 유물론/관념론, ‘마르크스/헤겔의 대립 항에 대한 애매한 변증법적(?) 태도에서 비롯되며, 현실 문제에 있어서의 주객의 통일성/미학적 차원에서의 비동일성, 소외 없는 노동/놀이와 자유 활동, 개인의 위대한 거부/정치적 실천(혁명적 폭력, 대중투쟁, 연대투쟁), 엘리트주의/민주주의, 해방의 장애물로서의 기술/해방의 잠재력으로서의 기술(새로운 기술)의 문제로 나아가면 더욱더 혼란스럽고 다의적이다. 이러한 애매성은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적 현실과 다양한 사상에 연관된 마르쿠제 사유의 변화와 발전의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켈르너는 이러한 애매성과 혼란을 마르쿠제 이론의 단점이 아니라, 마르쿠제 사상의 다의성, 개방성, 반독단성, 풍부성, 복합성으로 파악하여 오히려 장점으로 이해하고자 하며, 이를 마르쿠제 사상의 ’미완의 유산‘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마르쿠제의 이러한 혼란은 구체적인 현실 변화의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도달한 막다른 골목에서 출구를 찾는 과정에서 생긴 피할 수 없는 한계로 판단된다. 이는 객관적 현실의 뚜렷한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기에 따라, 관점에 따라, 변혁과 해방에 대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교차하며, 변혁 주체의 설정에 있어서도 명확한 필연적 근거가 없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4) 유토피아적 사유와 해방 이론

 

마르쿠제 해방 이론의 마르크스 벗어나기의 결정적 계기는 유토피아적 사유의 적극적 도입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마르크스 이론에서 가장 금기시해 왔던 유토피아적 사유를 사회비판이론의 중심에 끌어들임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수정은 현대 사회의 실제적 발전에 의해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유토피아적 사유는 역사적 세계에 부재하거나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사유가 아니라 단지 현존 사회의 억압적인 힘에 의해 그 출현을 방해받아 왔을 뿐이며, 따라서 유토피아적 사유의 실현 가능성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의 기술과 기술력에 내재하고 있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술력을 범세계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용하기만 한다면 가까운 미래에 궁핍과 빈곤의 문제를 끝장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생산자들이 이를 합리적으로 이용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와 착취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욕구의 문제를 제기한다: “현 단계에서 문제는 ‘개인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으면서, 즉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노예화를 영속시키는 착취적 기구에의 의존성을 재생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곧바로 ‘인간의 하부구조’로 간주되는 욕구의 근본적 변화의 요구로 이어지며, ‘사회적 복지 증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의 질’의 문제로 대치시킨다. (개인의 욕구와 삶의 질의 근본적 변화가 생산 관계와 제도의 근본적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욕구 이론의 주목적은 유토피아적 사유를 통해 착취적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욕구와는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한 새로운 욕구로의 변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지배구조 하에서의 복지 실현을 위한 경쟁 수단이 아니라 기존의 삶의 방식이 지닌 공격성과 잔인함과 추악함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유기체의 환경으로서의 자유 이념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정치 투쟁의 목적과 전략도 이러한 새로운 근거 위에서 재규정된다. 이러한 주장의 현실적 전제는, “기술적 진보가 파괴적인 사회적 생존투쟁이 더 이상 불필요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언론과 경영자들은 이미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이러한 기술 발전 단계가 초래할 미래의 위험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투쟁을 향도하는 사회비판이론은 이러한 자각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애석해 한다.

 

?에로스와 문명? 이후 마르쿠제의 변혁이론의 중심에 자리잡기 시작한 유토피아적 사유는 점차 새로운 인간성, 새로운 감수성, 새로운 가치, 새로운 기술, 새로운 사회, 새로운 미래와 같은 다양한 개념과 더불어 마르크스 벗어나기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절대로 치유 불가능한 감성적 낭만주의자’로 자처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마르쿠제의 유토피아적 사유의 현실적 전제는 기술력의 발전이 아니라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의식의 급속한 부르주아화와 그에 따른 변혁적 주체의 현상적 실종에 있으며, 유토피아적 사유를 더욱 강조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60년대 이후의 학생운동과 신좌파 지식인 운동의 고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유토피아적 사유의 생명력은 학생운동과 신좌파 지식인운동의 흥망과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5) 마르쿠제와 마르크스의 차이와 평가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마르쿠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념이 마르크스의 변혁 이념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즉 1) 마르쿠제는 물질적 궁핍이 사라진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회, 새로운 인간성, 새로운 감성, 새로운 기술로의 변혁이 가능하며, 이를 위한 해방 투쟁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론을 제기한데 반해, 2) 마르크스는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유물론적 역사이해의 방식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 경향성을 파악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혁의 역사적 불가피성을 밝혀내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 마르쿠제는 개인과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념을 제시하고, 주체의 문제에 있어서는 현대 사회 체제의 억압적 기제와 문화에 저항하는 지식인을 비롯한 광범위한 대중적 연대와 대중들이 근본적 변혁의 당위성과 불가피성을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데 반해, 2) 마르크스는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체적인 모순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였으며, 역사적, 시대적, 개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원칙은 자본주의 사회가 존립하는 한 유토피아적 사유나 관념론적 사변 또는 계몽주의적 의식혁명으로 퇴행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의 성패 여부는 그의 해방 이론의 실천적 적실성 여부에 달려 있다. 만약 그의 비판이론에서 아직도 해결해야 할 미해결의 이론적 실천적 과제가 남아있다면 마르쿠제의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념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 있어 아직도 유효한 반면에, 마르쿠제 이론의 현실적 유효성이 의심된다면 이는 마르크스 따라잡기의 실패인 동시에 벗어나기의 실패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 결론을 말한다면, 마르쿠제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인식과 실천은 모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실패했다고 단정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1) 억압과 소외의 역사적 필연성과 질적 변화의 역사적 필연성과 가능성을 논증하지 못했으며, 2)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의 변혁 주체를 구체적으로 구명해내지 못했으며, 3) ‘억압과 소외로부터의 해방’의 역사적 필연성과 불가피성을 논증해내지 못했으며, 4) 무엇보다도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구체적으로 가능한 실천적 전망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회적 억압은 그 자체의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확대 재생산 메커니즘에 의해 초래된 산물이며, 따라서 2) 자본주의 사회의 확대 재생산 기제에 의한 억압의 심화과정과 그 역사적 필연성을 유물론적 역사이해의 방식을 통해 구명하지 못하는 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념은 그 현실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이렇듯 마르쿠제의 이론이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이론적 실천적 적실성을 결여하게 된 주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문학과 미학 연구에서 보여준 사변적이고 관념적이고 급진적인 태도와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마르쿠제는 청년기에 심취했던 문학과 미학 연구에서 얻어낸 관념론적 사유 경향을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의 생애 마지막 저술인 ?미학적 차원?에서 더욱 전면적인 형태로 강화되고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마르쿠제의 사상은, 실천적으로는 1) 선진 산업사회의 파괴적, 소비적 재생산과 낭비 경제, 2) 자본주의적 지배 체제의 억압적 관용과 방어적 반혁명, 그리고 3) 환경과 여성 문제와 같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실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의 관점에서의 분석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1) 인간의 본능과 욕구에 대한 사회 이론적 접근, 2) 현존 사회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적으로 새로운 가치, 새로운 감성, 새로운 인간성, 새로운 기술,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해 부단히 추구해 왔다는 점에서 새로운 각도에서 재검토해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이후의 마르쿠제 연구는 매우 드물게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5. 결론에 대신하여

 

사실 마르크스 따라잡기와 벗어나기의 역설은 비단 마르쿠제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수정, 현대화, 일탈로 특징지어지는 이른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혹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지칭되는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 이념이 여전히 유효한 것과 마찬가지로, 파괴적이고 낭비적인 자본주의 경제가 가속화되고 이에 따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질주하는 사회 표면에 개인적 삶의 소외가 존재하는 한 마르쿠제가 우리에게 던진 문제의식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심각한 자기 모순에 처하게 되면, 마르쿠제 식의 유토피아적, 미학적 급진성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그 의미를 크게 상실하게 될 것이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지속적 성장이라는 현실적 전제, 즉 먹고사는 문제가 전면적으로 해결되었다는 현대의 다양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공통된 전제는 자본주의 경제 자체가 위기 국면에 처하게 되면 즉시 그 생명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서구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신좌파 이론의 대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르쿠제의 해방 이론은 그의 죽음(1978)과 함께 순식간에 논의 공간에서 사라졌으며,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적 세계화 전략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면 지금 명멸하고 있는 수많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도 순식간에 논의 공간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60년대 후반에 그의 주저 ?이성과 혁명?이 번역되어 소개되면서,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열심히 수용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의 이론은 산업화 과정에서 첨예화된 노동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학생운동권의 자기논리 개발과 헤겔과 마르크스의 ‘노동의 소외’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주었을 뿐,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과 폭압적 정치 현실의 인식과 실천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적 해방 이론’이 지닌 원천적 한계의 당연한 귀결이었으며, 따라서 80년대에 들면서 서구 마르크스주의 변혁이론은 자본주의의 원천적 모순을 다루는 마르크스주의 고전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고 문민정부 이후 ‘세계화’와 ‘무한경쟁’의 구호들이 등장한 이후 사회적, 정치적 관심이 개인적, 실존적 관심으로 대치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오랜 침묵에 빠져들었으며, 이 시기를 틈타 온갖 유형의 포스트주의들이 이 땅의 지식인들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기에 들면서 소수 선진 자본주의 국가 중심의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전략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마르크스의 이념에 기초한 새로운 현실 분석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마르쿠제를 재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혹자는 이제 우리 사회도 마르쿠제가 살았던 선진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될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마르쿠제로부터 무언가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마르쿠제의 유령을 불러내는 것은 정말 때맞지 않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현실의 시간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법이 없으며 언제나 미래를 향해 흐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쿠제를 타산지석으로 삼을지언정 우리의 지표로 삼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제에 대한 이런 예비적 논의가 일말의 의미를 지닌다면, 그것은 우리 학계의 해묵은 관행인 민감한 유행병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학계의 민감한 유행병은 학문이나 현실의 발전에 기여하기보다는 학문의 경박성을 자초한 경우가 많았다. 바람이 일다가 그치면 학문적 관심도 마치 포말처럼 스러지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리하여 제기된 문제에 대해 제대로 천착하여 평가해 보기도 전에 관심이 먼저 떠나는 기이한 풍토를 낳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포스트 증후군에 들떠 있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작은 일 중의 하나는 우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차분히 갈무리하면서 차근차근 우리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 나가는 일일 것이다. 이럴 때에나 침묵도 금이 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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