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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 이념 /안상헌

by 마리산인1324 2010. 10. 6.

<안상헌교수 홈피>

http://web.chungbuk.ac.kr/~ahnsah/tnboard/main.cgi?board=open_board

 

 

이 글은 근래에 세계적으로 휘몰아치고 있는 '지젝열풍'에 즈음하여, 그의 철학적 토대이자 대전제라 할 수 있는 라캉적인 정신분석학적 분석에 근거한 그의 '이데올로기 비판' 이념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글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안상헌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 이념

 

 

 

안 상 헌

 

 

1. 들어가는 말

 

근래 들어 전 세계적으로 지젝에 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도 그의 저술의 대대적인 번역과 함께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지젝 열풍’은 처음에는 주로 문화연구와 문화비평에 머물러 있는 듯 했으나, 점차 ‘세계화 자본주의’ 비판과 ‘정치적 실천’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발언과 행보의 진의를 종잡기란 쉽지 않다. 왜냐 하면 ‘현존 사회주의’가 붕괴하던 시기에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마르크스(주의)와는 완전히 결별한 듯 보였던 그가 근래에는 ‘비폭력적 저항의 무용성’과 ‘가차 없는 무력투쟁’을 주창하면서 이미 역사의 무덤 속으로 사라진 ‘레닌’과 ‘모택동’의 정치적 유산을 복원하자고 주창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80년대 말 좌파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대탈주를 진행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마르크스의 유령’을 불러들이자고 주창했던 데리다를 떠올리게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해체’를 통한 ‘유령’의 환생을 주장했던 데리다처럼, 지젝도 ‘과거로의 회귀’나 ‘대안적 반복’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적으로 ‘재발견’된 레닌과 모택동 정신의 도래를 주창하고 있다. 이렇듯 그가 레닌과 모택동을 다시 불러들이는 까닭은 ‘창조적 실천’이 실종된 세계화 자본주의 시대의 한 ‘징후’로 보인다.

 

지젝의 최근 행보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이론적 무기인 ‘라캉적인 정신분석학’의 다양한 변용태들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정신분석학적 변용태들을 간단명료하게 갈무리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글쓰기’가 유일한 취미인 그가 쏟아내는 수많은 책과 글을 따라 잡으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도 필요하거니와, 거의 매 쪽마다 등장하는 영화나 문학작품의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선이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그의 정신분석학적 분석과 비판이 하나의 ‘선험적’ 매트릭스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분석들에 내재하는 ‘선험적’ 매트릭스를 간취하게 되면 매 번 되풀이되는 지루한 이론적 설명과 생소한 사례들 그리고 갖은 농담들이 초래하는 당혹함을 어느 정도 넘어설 수 있다. 사실은 지젝 자신도 바로 이러한 ‘선험적’ 매트릭스를 활용하기 때문에 눈앞에 펼쳐지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한 전천후적인 분석과 비판이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글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먼저 그의 정신분석학적인 매트릭스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이데올로기 비판’ 이념을 살펴볼 것이다. 그의 ‘이데올로기’론은 그가 시도해 왔던 실로 다양한 정신분석학적 분석과 비판 작업의 하나의 ‘단순한 사례’가 아니라, 그의 모든 분석과 비판 작업의 ‘이론적 토대’이자 그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작업이다. 따라서 그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비판적 이해는 곧 그의 분석과 비판 작업 전체에 대한 비판적 이해이기도 하다. 나의 비판은 두 측면에서 시도되었다. 첫째는 그의 ‘이데올로기 비판’ 이념이 ‘이데올로기 비판’을 처음 시도한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의 관점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조망해 보는 것이며, 둘째는 지젝 철학을 현대철학의 특수한 경향인 ‘언어적 전회’, ‘문화적 전회’, ‘사변적 전회’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해 보는 것이다. 모든 철학이 당대의 시대 현실의 ‘반영물’이자 ‘징후’이듯이, 지젝 철학 또한 ‘현실사회주의 몰락’과 ‘세계화 자본주의 시대’의 한 ‘징후’이자 ‘반영물’이다. 지젝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최근의 ‘지젝 열풍’ 현상을 따라잡는 하나의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이데올로기 비판 이념의 단초들

 

지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의 현실적 단초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다. 전자는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의 퇴행과 함께 등장한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등장이며, 후자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가속화되기 시작한 ‘세계화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전개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선언이다.

 

이러한 단초는 그가 처음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시도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에 잘 반영되어 있다. 라클라우가 서문을 쓴 이 책의 서론에서, 그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주창하고 나선 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론에 입각한 ‘적대’ 개념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장점으로 ‘적대’ 개념에 입각한 사회이론을 발전시켰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상징화, 전체화, 상징적 통합을 거부하는 ‘본래적 트라우마와 불가능한 중핵Kernal’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사회이론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SOI, 6) 상징화와 전체화는 주체와 현실의 본래적인 간격을 봉합하려는 시도로서 이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의 ‘근본주의’는 ‘근본적 통합’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틈바구니에서 살면서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의 발견하는 해결책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며, ‘근본적 불가능성’을 연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근본적 민주주의’ 이념은 매우 역설적이다. 즉 그들의 근본주의는 ‘순수한’ ‘진짜’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민주주의의 불가능성’을 염두에 둠으로써만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 민주주의 담론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관점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이다. 즉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전지구적 세계혁명만이 모든 개별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데 반해, 근본적 민주주의는 개별적인 문제의 잠정적인 해결을 목적으로 하며 ‘전지구적 혁명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과 궁극적인 해결이 불가능한 ‘근본적 적대’의 존재를 인정한다.

 

지젝의 이러한 관점은 이미 라캉적인 정신분석학의 매트릭스, 즉 상징화, 전체화, 절대화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며, 본래적으로 분열된 주체의 ‘숭고한 대상’일 뿐이라는 대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대전제는 그 자체로서 ‘자명한 전제’가 아니라 증명되어야 할 일종의 ‘가설적 전제’이다. 지젝에 있어 이러한 ‘가설적 대전제’는 전적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매트릭스에 의거한 것이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상징계’에 결코 포섭되지 않는 ‘실재계’를 상정하고, ‘실재계’의 개입을 통한 ‘상징계’의 전복을 사유한다. 우리는 ‘상징계’라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상징체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실재계’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폐쇄된 ‘상징계’ 안에 갇혀서만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역설적 존재'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삶의 절박한 문제들 때문에 ‘상징계’ 안에서 호명되고, 규정되고, 억압된 ‘노예’나 ‘죄수’ 또는 ‘규정된 그 무엇’으로 수동적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존재들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적 한계를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역설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라캉적인 정신분석학적 해명은 지젝에게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과 비판의 기본적인 매트릭스를 제공했다. 그러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매트릭스의 변용만으로는 ‘대전제’의 ‘가설적 성격’을 정당화하기 어려웠던 지젝은 ‘가설적 대전제’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했다. 이는 정신분석학적 가설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인 동시에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적대’의 근본적인 존재성 주장에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의 헤겔 변증법에 대한 재해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매트릭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매트릭스에 대한 일종의 순환논법적인 ‘사후정당화’로 볼 수 있다.

 

그는 헤겔 변증법에 대한 일반적 해석 즉 ‘내적 모순을 지양해 가는 현실적, 역사적 운동과정의 논리적 표현’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러한 시도의 ‘필연적 실패의 체계적인 기록’으로 간주한다. 지젝에 있어, 헤겔의 ‘절대지’는 ‘모든 통일성의 내적 조건으로서 모순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입장’을 의미하며, ‘화해’는 ‘개념 안에서 모든 현실을 범논리주의적으로 지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 ‘그 자체의 비전체성not-All에 대한 궁극적 동의’로 해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헤겔을 “제1세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SOI, xxix)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헤겔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봉합’해 놓은 주체와 객체의 틈을 다시 열어놓은 최초의 철학자이며, 헤겔의 ‘절대지’는 ‘모든 우연성을 포섭하는 괴물 같은 개념적 총체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헤겔이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인 까닭은 단지 헤겔이 ‘너무 빨리 총을 쏘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농담이 지젝의 헤겔 해석을 정당화해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 헤겔’은 ‘헤겔 자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젝의 헤겔’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젝 자신의 말대로 그는 “가장 불신 받고 있는 정신분석학을 가장 불신 받고 있는 최악의 사변철학으로 구제하려 했다.”(SOI, 2nd, iix) 그가 왜 굳이 이런 방식으로 헤겔 철학을 재해석하려 했는지는 명백하다. 지젝과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의 표적은 유물론적, 변증법적 역사 이해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과 ‘경제 결정론적’ 해석, 즉 인간 역사는 하나의 완결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목적론적 해석과, 삶의 물질적 토대가 인간의 의식, 정치, 윤리, 종교와 같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환원주의적 해석이다. 지젝에 의하면 이러한 해석은 모두 헤겔 변증법에 대한 ‘오인’의 결과라는 것이다. 지젝과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변증법의 ‘모순’ 개념을 ‘적대’ 개념으로 치환하려는 실질적인 이유는, 다양한 수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는 삶의 문제를 다원적인 방식을 통해 해결하려는 실천적 투쟁에 상대적 자율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그들은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해결하려는 ‘계급투쟁’ 대신에 여성운동, 생태운동, 문화운동, 정치운동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운동들의 운동’ 이론을 정립하고자 했다. 특히 라클라우와 무페 같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들에게는 ‘근본적 민주주의’ 정치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적대’ 개념의 근본주의적 성격을 드러내는 이론 정립이 필요했다.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적 근본주의와의 단절을 선언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논리를 이어 받아 여성주의적 근본주의, 민주주의적 근본주의, 생태주의적 근본주의가 가능하다면, 마르쿠제가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개진한 ‘정신분석학적인 근본주의’도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실천적 투쟁이론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에 의하면 “정신분석학적 ‘본질주의’는 본질주의적 논리와의 단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즉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개별적 실천투쟁의 환원 불가능한 다원주의적 성격을 확인함으로써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반-본질주의’를 넘어선다.”(SOI, xxvii)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정신분석학적 분석은 ‘대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개별적 투쟁들은 언제나 사회-역사적 과정의 “근본적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개별적 다원성을 하나의 동일한 ‘불가능한-실재의 중핵impossible-real kernel’에 대한 다양한 반응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젝이 ‘이데올로기 비판’ 작업에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헤겔 변증법으로부터 ‘근본적 부정성’ 개념을 도출해 내기 위해 헤겔을 끌어들인 이유와 동일하다. 즉 헤겔 철학에 있어 ‘근본적 부정성’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본질적인 인간 조건이다. 따라서 ‘근본적 부정성’은 해결책도 없고 피할 길도 없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근본적 부정성’을 극복하거나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과 더불어 살면서 그 안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고, 나아가 그러한 근본적 인정의 토대 위에서 그것과 함께 삶의 방식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모든 ‘문화’는 불균형과 심리적 외상과 근본적 적대를 잘 갈무리하여 물꼬를 터주려는 시도들이자 일종의 ‘반응 양식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적대’의 ‘근본적 부정성’을 폐지하려는 열망은 모두 전체주의적 유혹의 근원이 된다.

이처럼 헤겔의 ‘근본적 부정성’은 지젝의 정신분석학적인 분석의 철학적, 선험적, 필연적 대전제가 되며, 전체주의 비판을 위한 근본적인 초석이 된다. 그의 전체주의 비판은 일차적으로는 인간 사회의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목적으로 삼는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를 겨냥하고 있지만, 나아가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적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된다. 일체의 적대적 긴장을 ‘넘어서는’ 뉴에이지 운동, 자연과의 ‘완전한 조화’를 목적으로 삼는 근본주의적 생태주의, 어떤 부패와 중우정치도 용납하지 않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목적으로 삼는 근본주의적 민주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는 ‘시민사회의 적대는 전체주의적 테러에 이르기 전에는 결코 폐지될 수 없다’는 헤겔의 말에서 ‘적대’ 개념의 한계를 읽어낸 후 헤겔의 ‘절대적 부정성’을 자신의 정신분석학적 토대로 삼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세 가지 작업에 착수했다(SOI,7): 첫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포스트-구조주의자’가 아니라 포스트-구조주의자와의 ‘완전한 단절’로 해석하여 그를 가장 근본적인 현대 계몽주의자의 반열에 위치시킨다. 둘째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통해 헤겔의 변증법을 ‘차이와 우연’의 가장 강력한 긍정으로 해석하며, 헤겔의 ‘절대지’를 ‘근본적 상실의 인정’을 대변하는 이름으로 해석한다. 셋째는 헤겔과 라캉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기반으로 마르크스의 ‘상품의 물신화’와 라캉의 ‘고정단추’, ‘숭고한 주체’, ‘잉여-향유’ 개념을 원용하여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선험적 매트릭스’를 구축한다. 이러한 ‘선험적’ 매트릭스는 ‘전체주의’, ‘냉소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관용’, ‘문화다원주의’와 같은 개념들에 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비판하며, 나아가 ‘탈-이데올로기 시대’라는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비판한다.

 

3. 이데올로기 비판 이념의 형성

 

그렇다면 그는 왜 기존의 ‘이데올로기’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신의 정신분석학적 ‘선험적 매트릭스’에 대해 굳이 낡은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을 고수하는가? 그 이유는 그가 시도한 ‘이데올로기’ 개념 자체에 대한 범주적 분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아도르노에서 자신에 이르는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주요 논문들을 편집한 '이데올로기의 지형도'(1994)의 서문 「이데올로기라는 유령」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범주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이 글에서 ‘왜 오늘날에도 “이데올로기 비판”이 여전히 유용한 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사적 상상력의 지평이 어떻게 ‘변화’에 종속되어 왔는지에 대해 간단히 성찰해 보면, 우리는 사건들의 한 가운데서 ‘이데올로기 개념의 줄기찬 적절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불과 일 이십년 전만 하더라도 인간의 생산과 자연의 관계는 하나의 독립변수로 여겨졌으며, 모든 사람들은 생산과 교역의 사회적 조직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상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연의 종말’, ‘지구에서의 생명의 종말’에 대해서는 누구나 상상력을 쉽게 발휘하면서도,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산양식의 ‘온건한 변화’보다도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일이 더 쉬워진 듯하다. 마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지구의 생태학적 종말이 오더라도 살아남을 ‘실재’라고 여기는 것 같다. 이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의 관계와 그 관계의 변화를 조절하는 발생적 매트릭스generative matrix로서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범주적으로 주장해 볼 수 있을 것 같다.(MI, 1)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해 ‘발생적 매트릭스’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용어는 “오늘날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들은 외부의 강압적인 힘에 의해 주어지거나,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호명’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 안에 존재하는 주체들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이런 발생적 매트릭스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나 시대를 알리는 사건이 과거의 ‘연속’이나 ‘회귀’로 (오)인될 때나, 현존 질서의 논리에 기입되는 사건이 ‘완전한 단절’로 (오)인될 때나,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변증법 안에서 쉽게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례의 하나로 ‘사이버 섹스’를 예로 든다.(MI, 2) 인터넷 등장 이후에 새로 생겨난 ‘사이버 섹스’는 과거와는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섹스로 널리 (오)인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현실 세계’에서도 (라캉에 따르면) ‘성적 관계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관계는 이미 본래적으로 ‘환상적’인 것이며, 타자의 몸은 나의 성적 욕망의 환상적 투사를 보조하는 것으로만 봉사해 왔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사이버 섹스’는 실재 섹스의 괴상한 왜곡이 아니라, 실재 섹스의 이면에 있는 환상적 구조가 ‘가시화’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사건이 생겨날 때마다 필연적으로, 혹은 선험적으로, 그 사건 안에서 ‘이데올로기’가 스스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전의 낡은 ‘이데올로기’ 개념을 가지고 아무리 ‘이데올로기’ 개념을 청산하고자 하더라도 이데올로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는 ‘피하려고 하면 갑자기 튀어나오고, 그 안에 안주하려고 하면 나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어떤 주장을 명백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부정하면 바로 그 반대주장도 그 못지않게 이데올로기적이다. 역사적으로 한정된 어떤 조건을 영구화하거나, 우연적 사건 안에서 더 고차적인 필연성을 끌어내는 행위 등은 모두 이데올로기적이다. 왜냐하면 ‘실재’의 무의미한 우연성이 ‘내면화되고, 상징화되고,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또한 필연성을 알아내는데 실패하거나, 그것을 무의미한 우연성으로 오인하는 정반대의 주장도 역시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이데올로기는 ‘외적 우연성의 내재화’가 아니라 ‘내적 필연성의 외재화’ 안에 상주한다. 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 비판’의 과제는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안에 숨어있는 필연성을 발견해 내는 것”(MI, 4)이 된다. 이처럼 그는 기존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이데올로기(로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우리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는 것은 동일한 형식”(MI, 6)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지젝은 이데올로기 개념은 ‘표상주의적인’ 문제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즉 “이데올로기는 허구나, 그 사회적 내용에 대한 잘못된, 왜곡된 표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MI, 7) 간단히 말하면, ‘정치적 입장은 객관적 내용에 있어서는 매우 정확하고 ‘참’일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으며, 정치적 입장이 그 사회적 내용에 부여하는 이념이 완전히 그릇된 것으로 증명되었다 할지라도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도 갖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이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것이라고 보는 정치적 입장’은 완전히 착각이었던 반면에,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은 곧 바로 서구 자본주의 체제에 흡수될 것이라고 보는 정치적 입장’은 ‘참’이었다. 그러나 후자의 순응주의적 입장은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문제도 없고 비적대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신념을 갖고 있었던 데 반해, 전자의 입장은 사실상 착각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하는 ‘적대’를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이데올로기적이다. 따라서 적어도 ‘현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 흡수되어 가는 혼란기에 ‘제3의 길’이라는 ‘허구’를 택한 사람들은 사회적 ‘적대’를 망각하지 않은 유일한 정치적 입장이었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그는 바로 이 지점에 ‘포스트-모던적’ 이데올로기 비판의 과제가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현존 질서 안에서 -- 허구의 모습으로, 즉 가능하지만 실패한 대안적 역사의 ‘유토피아적’ 담론으로 -- 체제의 적대적 성격을 지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동일성의 자명함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드는 요소를 지적해 내는 것이 그들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과제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지젝은 당시 현실에서 제기되었던 ‘이데올로기 비판’의 사례들을 통해 ‘더 이상 이데올로기일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전-이해에 도달했다. 즉 ‘이데올로기적 기제에 의해서는 일관성이 유지되지 않는 현실, 즉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모두 제거하는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현실의 분리 불가능한 내재적 본성이 있다’(MI, 16)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거짓은 아니다. 내용에 있어서는 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주장된 내용이 아니라, 발화과정에 의해 함축되는 주체의 입장과 연관되어 있다”(MI, 8)는 명제를 이끌어낸다. 즉 우리는 그 내용이 참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본래적으로 불투명한 방식으로 사회적 지배관계와 연관하여 기능하는 순간, ‘이데올로기적인 공간’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지배관계를 정당화하는 바로 그 논리는 효과를 발휘하는 한 감추어져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출발점은, 이데올로기는 ‘진리로 위장하여 거짓말을 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염두에 두는 것이다. 예컨대 강대국이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제3세계에 개입할 때, 인권침해가 사실이고 또 개입을 통해 인권개선이 실제로 이루진다 할지라도, 경제적 이권이라는 개입의 실질적 동기를 감추고 있는 한 개입의 정당화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된다.

 

4. 이데올로기 비판선험적매트릭스

 

기존의 이데올로기 분석을 통해 지젝이 도달한 결론은, ‘이데올로기’는 그 내용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형식적인 차원에서 선험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라캉의 표현법을 따르자면, 형식적 이데올로기 개념은 ‘주인-기표Master-Signifier’ 즉 ‘기의 없는 기표signifier without signified’와 같은 것이다. 즉 ‘일상적’ 기표는 실증적 지식 내용을 기입하는데 반해, 주인-기표는 어떤 실증적 지식 주장도 필요로 하지 않는 ‘본질적 차원’의 형식을 대변한다. 이러한 형식적 매트릭스는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선험적’ 담론 분석의 ‘약점’으로 비치기도 하고 이데올로기 개념을 포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 안에 내재하는 약점’이라고 주장한다. 왜냐 하면 ‘일상적’ 기표와 상징적 질서 그 자체의 일부인 ‘주인-기표’ 사이의 틈 사이에 ‘이데올로기’를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형식적 접근은 ‘우리를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다시 이데올로기에 말려들게 하는 덫’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데올로기’와 ‘현실’을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려는 시도 자체를 ‘이데올로기적’이라고 거부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라는 개념을 거부하게 되고 “우리가 다루는 모든 것들은 ‘상징적 허구’이자 ‘다원적인 담론 세계’일 뿐 결코 ‘실재’는 될 수 없다”는 포스트-모던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적인 왜곡의 기준을 제공하는 중립적인, 이데올로기 외적인 토대까지도 모두 이데올로기에 포함시켜 ‘담론 질서 자체가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급한 해결책은 곧바로 다시 ‘이데올로기’로 떨어지게 되며, ‘불가능성의 입장’에 머무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와 ‘실재’를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살아있게 지키는 긴장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MI, 17)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거부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며, 이 장소는 ‘비어 있어야’ 한다. 즉 이 장소는 ‘실증적으로 규정된 어떤 실재’에 의해서도 채워질 수 없어야 하며, 이 장소를 채우려는 유혹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된다.

 

지젝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 있어 ‘진실을 가장한 거짓’의 가장 두드러진 이데올로기는 ‘냉소주의’이다. 그가 이데올로기 비판에 ‘냉소주의’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냉소적 이성’을 만나면 ‘허위의식’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은 더 이상 작동하지 못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SOI, 26) 냉소주의자들은 지배 권력의 이권적 동기를 충분히 깨닫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지배 권력의 이권추구를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즉 냉소주의의 공식은, “그들은 모르면서 행동한다”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공식이 아니라, “그들은 지배 권력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SOI, 30. MI, 8) “냉소적 주체는 이데올로기적 가면과 사회현실의 거리를 잘 알고 있다. 냉소적 이성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으며, 계몽적 허위의식의 역설이다.”(SOI, 25) 그리고 “냉소주의는 ‘공식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착적인 ‘부정의 부정’이다.”(SOI, 26) 최근 역사에서 ‘냉소주의’는 두 양태의 ‘냉소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즉 그 하나는 ‘소비주의적, 탈-기독교적, 후기 자본주의적 냉소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 사회주의에서 나타난 냉소주의’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두 체제 모두 주체가 냉소적 거리를 유지하는 조건 하에서, ‘공식적’ 가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작동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형식적 매트릭스는 ‘자발적인’ 경험 세계로서의 이데올로기’와 ‘외부로부터 우리의 삶의 경험의 진정성을 왜곡하는 근본적인 비-자발적 기제로서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이데올로기들의 이러한 긴장과 대립은 이데올로기 개념의 중심부로 ‘반성적 거리’를 끌어들이게 되며,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정의상 언제나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이다.”(MI, 19) 예컨대, 현실 사회주의의 분열과정에서,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적 ‘억압’과 교조화의 ‘통치’로 이해되었으며, 민주주의-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이데올로기적 통제로부터의 ‘해방’으로 경험되었다. 그러나 ‘해방’ 경험의 과정에서 ‘정당’과 ‘시장경제’는 비-이데올로기적으로, 자연 상태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지젝이 강조하는 요점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특징이 ‘보편적’이라는 점에 있다. 예컨대 “어떤 이데올로기도 다른 ‘단순한 이데올로기’와 구분하지 않고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지젝은 이데올로기 개념의 최후의 방책, 전-이데올로기적 중핵, 그리고 다양한 이데올로기 형태들을 접목시킬 수 있는 형식적 매트릭스를 ‘유령’ 개념과 연관시킨다. 즉 ‘유령이 없는 실재는 없으며,’ ‘실재의 원환은 유령적인 보충을 통해서만 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라캉에서 그 근거를 발견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는 ‘물 자체’가 아니라, 항상-이미 상징적 기제의 의해 상징화되고, 구성되고, 구조화된다. 문제는 언제나 ‘상징화는 궁극적으로 항상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즉 ‘상징화는 실재를 완전히 채울 수 없으며,’ ‘상징화는 항상 확정되지 않는, 완성되지 않는 상징의 부담을 안고 있다.’ 따라서 상징화되지 않고 남아있는 현실의 일부인 ‘실재’는 유령이 출몰하듯이 되돌아온다. 그러나 ‘유령’과 ‘상징적 허구’는 다르다. 다만 ‘유령’ 개념과 ‘허구’ 개념은 바로 양자의 양립 불가능성 때문에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현실은 무매개적으로 자신일 수는 없으며, ‘불완전한 실패’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유령’의 출현은 실재로부터 현실을 영원히 분리하는 바로 그 틈에서 등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현실은 ‘상징적 허구’의 성격을 지닌다. 즉 유령은 상징적으로 구조화된 현실을 회피하려는 것들에 몸을 부여한다. 이데올로기의 전-이데올로기적인 ‘중핵’은 실재의 ‘구멍’을 채우는 ‘유령’으로 출현한다. 따라서 “유령이 감추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그에 기반하고 있는 ‘원초적으로 억압된’, ‘표상될 수 없는’ X이다.”(MI, 21)

 

지금까지의 선험적 매트릭스에 입각한 이데올로기 분석과 비판은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투쟁’ 이념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변’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젝은 ‘계급투쟁’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 개념에 대한 라캉적인 분석을 통해 “현실 안에는 어떤 계급투쟁도 존재하지 않는다”(MI, 21)는 결론을 도출한다. 즉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의 사회의 총체성의 원리인 ‘계급투쟁’은 객관적인 (사회적) 현실이 자기-완결적인 전체를 구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적대’ 개념으로 대치된다. ‘계급투쟁’ 개념의 역설은 이성적 전체의 완결성을 영원히 방해하는 ‘분리’ 즉 바로 그 ‘적대’ 개념을 통해 ‘사회’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계급투쟁’은 통합하거나 길들이려는 ‘새로운 상징화’에 저항하는 장해물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저항의 궁극적 실패를 선고하는 ‘새로운 상징화’라는 점에서 라캉적인 의미의 ‘실재’이다. 즉 ‘계급투쟁’은 사회적 총체성 안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불가해한 한계의 이름이며, 우리들로 하여금 사회를 닫힌 총체성으로 생각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한계이다. ‘이데올로기’ 분석과 비판에 ‘계급투쟁’ 개념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사회적 적대’로 치환된 이러한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변증법적 이해’를 본래적으로 불완전한, ‘비전체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결국 마르크스(주의) 이론 체계의 ‘근본적 전위’를 함축한다. 그는 “이데올로기 이론의 이념은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완벽한 설명체계인 역사적 유물론을 완성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지만 이데올로기 이론에 의해 채워져야 할 구멍도 존재한다”는 발리바르의 입론을 받아들여, 바로 이 지점이 정신분석학이 개입해야 하는 곳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마르크스주의가 계급투쟁에 대한 자기-비판적 입장으로서 유지하는 영원한 ‘불편함의 징후’이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전체화가 불가능한 역사과정의 복잡성을 다루는 것이다. 왜냐 하면 사적 유물론은 원리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PT, 173-4)

 

지젝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스탈린주의적 개인숭배의 모습으로 실재 안으로 되돌아오는 ‘닫힌 성격’을 개념화하거나, 상징화할 수 없다. 권위주의적 대중주의의 문제와 진보적 정치 구상을 거듭 좌절시키는 유기체주의는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은 어떻게 ‘전체주의적 폐쇄성’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상징적 경제를 그려낸다. 프로이트의 꿈 이론과의 비교해 말하자면, 꿈속에서 우리는 정확히 ‘꿈속의 꿈’의 모습으로 ‘실재’의 중핵을 만난다. 즉 꿈속에서는 ‘실재’와의 거리는 이중화된다. 같은 형식으로, 우리는 사회적 실재의 내재적 한계에 직면한다. 표면으로 드러난 ‘단순한 이데올로기’는 ‘그 깊이보다 더 깊은 곳,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과 직결되어 있으면서, 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대치한다. 이러한 ‘역설적 위상학paradoxical topology’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선험적 매트릭스이다.(MI, 30)

 

5.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비판적 이해

 

이상에서 보듯이, 지젝에 있어 ‘이데올로기’란 본래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주체와 실재의 간격과 틈을 막기 위한 기제이다. 그 벌어진 틈을 막고 채우는 것이 ‘이데올로기라는 환상’이다. ‘환상’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이 되고, 상대적인 것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서 이데올로기적 기제는 반드시 발견된다.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 안에 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작동 기제’를 선험적으로 분석, 비판할 수 있으며, 희롱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신분석학적인 ‘선험적’ 매트릭스는 그의 근본주의적인 ‘선험적 존재론’이다.

 

이에 반해, ‘실천적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에 있어 ‘이데올로기 비판’은 ‘담론 차원의 비판과 반-비판’도 아니고, 자기-완결적인 ‘역사철학’이나 ‘역사이론’의 체계적 정립을 위한 것도 아니며, ‘선험적 존재론’은 더욱 아니다. 마르크스에 있어 ‘비판 작업’은 ‘순수 이론’적 작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천을 위한 이론적 무기’였다. 예컨대 ?독일이데올로기?(1845)는 청년헤겔학도들의 관념적 ‘실천’ 이념이 “세계를 뒤흔드는 문구에도 불구하고 왜 현실 변혁에 무력한 ‘최대의 보수주의’일 수밖에 없는지” 그 ‘현실적 원인’을 밝혀내기 위한 비판적 작업이었고, ?자본론?(1867)을 비롯한 ‘정치경제학 비판’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의 물신화’ 즉 ‘돈의 신격화’ 현상의 물질적 토대를 구명하기 위한 비판 작업이었다. 그의 이러한 ‘비판’ 이념은 ?정치경제학비판 서문?(1859)의 1843년대를 회고하는 글에서, “나의 연구로부터 국가 형태는 물론 법적 관계는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인간정신의 보편적 발전에 의해 설명될 수도 없으며, 헤겔에 의해 ‘시민사회’라는 이름으로 요약된 삶의 물질적 조건에 뿌리박고 있다는 결론과, 시민사회의 해부는 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MEGA, 100)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 작업은 ‘이데올로기의 존재론적 차원의 정체성’을 밝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뿌리’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내재하는 ‘계급적 모순’의 성격을 명료하게 드러냄으로써 이를 제거하기 위한 실천적 운동의 이론적 계기였다. 즉 마르크스에 있어 “모든 역사의 추진력은 ‘비판’이 아니라 ‘혁명’이다.”(MEW,3,38)

 

그의 말대로, 만약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 이념을 견지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처한 ‘세계화 자본주의’ 시대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을 그 ‘현실적 토대’로부터 분석하고 해명하는 정치경제학적 비판 작업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전복’을 꾀하며, 정신분석학적인 ‘선험적’ 매트릭스를 활용하여 ‘이데올로기의 본래적인 비완결성, 환상적 성격, 유령적 성격’을 희롱하는 것에 역점을 두어 왔다. 이러한 ‘희롱’이야말로 그 자신이 오늘날의 가장 두드러진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냉소주의’의 전형적인 한 형태일 수 있다. ‘마르크스 이후after Marx’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젝도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정체성은 지젝의 정신분석학적 담론 분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뿌리’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 작업을 통해 그 정체성이 지금은 거의 다 밝혀져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만연해 있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도 이미 그 물질적 토대인 ‘세계화 자본주의’에 대한 유물론적인 비판 작업을 통해 거의 다 해명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지식인과 대중들의 냉소주의적 행태에 대해서도 ‘실천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그 물질적 뿌리에 대한 ‘비판적 해명 작업’이 가능하고 또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유물론’에 입각한 이러한 분석과 비판 작업의 결과는 지젝의 정신분석학적인 선험적 매트릭스를 통한 분석과 비판과 희롱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그가 분석과 비판에 역점을 두고 있는 또 하나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이에 대해서도 ‘실천적 유물론’의 관점에 의한다면, ‘어떤 신비화도 없이, 누구나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물질적 뿌리’를 쉽게 밝혀낼 수 있다. 즉 ‘탈-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의 종언’, ‘역사의 종말’과 같은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의 본래적인 환상적 성격’ 때문에 피하거나 청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전지구적으로 확산된 세계화 자본주의 체제와 그 안에서의 삶의 방식이 ‘다른 대안적 세계’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화’되고 ‘자연화’되고 있는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의 이데올로기적 반영물이다. 따라서 ‘탈-이데올로기’라는 이데올로기는 지젝이 주장하는 ‘환상 가로지르기’를 통해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물리적 실천을 통해 변혁함으로써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그는 ‘다문화주의’, ‘관용’, ‘911테러’ 등과 같은 현대의 다양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 ‘물질적 뿌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정신분석학적인 매트릭스에 의존한 ‘문화 논리’의 분석에 치중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접근의 이면에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분석과 비판,’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와 라캉의 ‘잉여-주이상스’의 형식적 상동성homology이 전제되어 있지만, 마르크스의 ‘비판’과 라캉의 ‘분석’이 정말 얼마나 호환 가능한 것인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또한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전화와 현대철학의 몇 가지 중요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즉 전자는 ‘허위의식’,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이데올로기의 물질화’ 등으로 전화해 온 ‘이데올로기’ 개념사의 반영이며, 후자는 20세기의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 ‘문화적 전회Cultural Turn’, 20세기 후반의 ‘사변적 전회Speculative Turn’의 반영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 안에서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전화는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의 ‘이론과 실천의 통일’ 이념에 대한 ‘오인’에서 연유한다.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에서 ‘이론’과 ‘실천’은 별개로 분리되지 않는 변증법적 계기들이다. 그리고 그의 ‘이데올로기 비판’ 이념의 요체는, “이데올로기는 그 ‘물질적 뿌리’를 ‘물리적 실천’을 통해 변혁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물리적 실천’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역사에 등장하는 ‘이데올로기’ 개념은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고전적 대립과 그 해체과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의 ‘변혁적 실천의 퇴보’ 및 그에 따른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데올로기 비판’ 이념은 ‘허위의식’과 대비되는 ‘과학적, 이론적, 객관적 지식’ 자체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는 주장에서 출발하여 종국에 가서는 모든 지식주장이 ‘이데올로기’로 간주되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그 극단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실재론적인 ‘과학적, 객관적, 보편적 지식의 부재’ 상황이 현실의 어떤 ‘물질적 뿌리’를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 작업이 불가피하며, 또한 실천적 변혁의 ‘퇴보’ 및 ‘불가능성’ 문제와 관련해서도 그 ‘객관적인 물질적 조건’에 대한 비판적 분석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 영역의 확대를 근간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문화적 전회’는 그 ‘물질적 뿌리’보다는 주체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감염’에서 주로 그 원인을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적 변혁의 ‘가능성과 효과’ 문제는 잠재적 변혁 주체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감염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실천적 전략을 넘어서 마침내 문화적 ‘헤게모니’ 투쟁과 ‘적대’적 정치투쟁으로 대치되었다.

 

또한 ‘마르크스 이후’의 이러한 경향은 마르크스주의 외부에서 전개되어 온 현대철학의 새로운 경향, 즉 언어철학적 경향과 맞물리면서 치유하기 힘든 ‘외상’을 입었다. ‘언어적 전회’는 소쉬르의 언어학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의 등장과 함께 비롯되었다. 소쉬르가 ‘기표의 세계’와 ‘기의의 세계’를 분리하여 ‘기표의 세계’만을 독립적으로 다루는 기호학적 언어학을 정립하고,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세계’와 ‘사태의 세계’에 대한 초기의 ‘그림 이론’을 포기하고 후기의 ‘쓰임새 이론’으로 돌아선 이래로 20세기 철학은 ‘언표와 언어의 문제’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언어적 전회’는 언어적 표현으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와 ‘지식 주장’에 관한 현대철학뿐만 아니라 포스트-주의자들의 ‘인간’, ‘사회’, ‘문화’, ‘정치’에 대한 언어적, 상징적, 문화적 이해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실천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언어적, 문화적 전회’의 ‘물질적 뿌리’를 밝히는 ‘이데올로기 비판’ 작업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필수불가결한 과제이기도 하다. 잠정적 가설이긴 하지만, ‘언어적 전회’와 ‘문화적 전회’는 철학 이론의 ‘자립적’ 전회의 직접적인 산물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 및 ‘지식’ 기반 산업의 성장을 그 ‘물질적 뿌리’로 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적인 반영물로 보이며, 특히 최근의 ‘사변적 전회’의 경향성은 21세기 자본주의를 주도해 가는 ‘투기적 금융자본주의speculative financial capitalism’의 ‘추상화’ 경향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가설적 주장은 일체의 신비화가 없는 엄밀한 ‘이데올로기 비판’ 작업을 통해 해명되어야 할 하나의 연구과제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바로 이러한 20세기말과 21세기 초반의 특수한 자본주의적 현실을 반영하는 복합적인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여겨진다. 따라서 지젝의 ‘철학적 작업’과 최근의 ‘지젝열풍’은 그 영향력이나 파급효과로 볼 때 21세기의 ‘실천적 유물론’이 수행해야 할 ‘이데올로기 비판’ 작업의 최우선과제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